[한자로 보는 세상] 使者
조선은 중국의 명(明)·청(淸) 왕조와 500여 년 동안 사절(使節)을 주고받으며 활발한 외교를 펼쳤다. 외교 사절을 뜻하는 사(使)의 자획을 파자(破字)하면 사(史)가 핵심이다. 사(史)는 신에게 기원하는 축문(祝文)을 놓는 그릇(口)을 손(又)에 쥐고 선조에게 제사 지낸다는 뜻이다. 후에 ‘제사를 기록하다’는 의미로 변했다. 사당 안에서 지내는 제사가 아니라 바깥에서 올리는 제사에는 그릇을 나무에 매달아 들고 가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 관리가 리(吏)요 사(使)였다. 사절(使節)은 본디 고위 벼슬아치인 경대부(卿大夫)가 천자나 제후를 방문할 때 지니던 징표인 부신(符信)을 의미했다. 임금의 명을 받아 외국에 사절로 가는 신하가 전통시대의 사신(使臣)이요, 사자(使者)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780년 건륭제의 고희(古稀)를 맞아 파견된 연행사(燕行使)로 친척 형을 수행한 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겼다. 연암은 그 가운데 ‘심세편(審勢篇)’에서 당시 중국과 교류하던 조선 선비의 다섯 가지 허세인 ‘오망(五妄)’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조선 선비들은 자신의 지체와 문벌(地閥)을 뽐내며 중국의 명망가마저 업신여기니 이것이 첫째 허세요, 중국인들의 변발을 무시하고 한 뼘 상투만을 잘난 체함이 둘째 허세다. 중국이 변해 오랑캐(胡)가 됐다며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함이 셋째 허세이며, 이제껏 중국 글을 써왔음에도 갑자기 중국에 문장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큰소리치는 것이 넷째 허세다. 이미 청을 섬기는 신하들에게 강개(慷慨)한 명나라 선비가 없음을 탄식하니 이것이 다섯째 허세다’.
연암은 ‘오망’에 이어 중국 지식인의 세 가지 어려움인 ‘삼난(三難)’을 지적했다. 즉, 중국의 관리는 사서오경·제자백가를 전부 통달해야 하고, 인간적인 면은 감춘 채 대국의 체면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법과 관(官)은 두려워하면서도 사·농·공·상의 분업은 똑똑히 지킨다며 비판했다.
중국 대학생 우호사자(友好使者) 150명이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한국을 찾아 홈스테이 등을 경험하고 있다. 연암의 방중 이후 230년이 흘렀어도 그다지 변화 없는 양국 간 상대국 인식 수준은 큰 문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한·중 청년들의 문화교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