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이 바라본 정치란 -연암 박지원의 풍자정치학
태종이라는 거대한 절대군주를 이상형으로 꿈꾸었고 실재로 선조이후 분파되고 확대 재생산된 당쟁이라는 거대한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절대권력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신하들 뇌리속에 심어 주었던 숙종이 사망하고난 이후 조선은 시쳇말로 안개속을 걷는 정세의 연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경종과 그이 이복동생인 연잉군(이후 영조)의 있을수도 없는 권력쟁탈 그리고 석연치 않은 경종의 사망과 영조의 등극 이후 정통성의 시비와 사도세자의 죽임등은 바로 한 국가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전주곡이었다. 비단 이후 정조라는 걸세출의 군주가 등장했지만 이러한 흐름을 바꾸는데는 너무 멀리와 버린 것이 현실의 조선이었다. 임란이후 급격하게 해체된 신분사회와 서서히 등장하는 상업자본의 힘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고 서서히 민초들의 의식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사대부 지배계층은 그런 흐름을 애써 외면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 자리보존에 모든것을 걸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일부 지식층에서 숭명배청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가지면서 신진문물에 대한 지적호기심과 열망으로 가득한 이들이 등장하게 되고 후대의 우리는 이들을 이른바 실학파라고 명명한다. 이들 실학파는 기존의 정통성리학으로 무장하고 당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세태의 피해자였고 이미 굳어진 당쟁의 한 끄나풀이라도 잡을 수 없는 몰락한 양반가문의 출신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항상 이러한 이들에 의해 역사의 물꼬가 바뀌기 마련이듯이 이들이 추구했던 사유는 이후 거대한 패러다임으로 조선을 휘감게 된다. 바로 그 중심에 북학파의 좌장인 연암 박지원이 자리잡고 있다.
<열하일기>로 인해 정조에게 문체반정의 최대난적으로 지목 되고 반성문까지 작성했던 연암은 당대 신진지식계층의 여론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정통성리학에서 해법을 찾을려고 했던 지배계층에게 연암은 이단이었고 사문난적의 대상이었다. 이에 맞선 연암 역시 철저하게 조선의 대표적인 아웃사이더로서 기껏이 받아 들이고 한편으로는 시대를 즐겼다. 흔히 연암하면 <열하일기>,<호질>,<허생전>,<양반전>등의 소설이나 문집으로 유명한 문장가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물론 틀린말은 아니다. 그만큼 연암의 문장은 조선을 통틀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힘과 호소력 그리고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현대판 칼럼니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시 신분사회에서 지배계층에 속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을 갖춘 사대부였고 비단 지방직이라는 관직을 역임했지만 중앙정치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는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재야정치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북학파라는 정당의 당수로서 그리고 학문적 스승으로서 연암은 자칫 수면 밑으로 흐를 수 있는 실학을 보기좋게 표면화 시킨 장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당시 조선 양반사회를 빗댄 자조적인 소설로 알려져 있는 <허생전>,<양반전>,<호질>이라는 작품에서 바로 연암의 정치의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암은 이들 작품에 자기자신의 정치관을 투영했고 서로 비슷비슷한 내러티브이지만 전반적인 플롯은 일맥상통하듯이 자신만의 정치철학이 고스란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연암의 전매특허인 풍자와 해학으로 인해 작품속의 정치적 이슈가 오히려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시 연암의 뛰어난 문장력도 있지만 그 특유의 노마디즘적 사유의 표현일 것이다.
면천군수 재직당시 정조의 특명으로 과농소초에서 한전법을 주장하여 상업분야 뿐만아닌 당시 농업경제의 쏠림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할만큼 그는 친 서민정책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유는 <호질>의 북과선생의 이중적인 삶에 그대로 반영하였고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 몸소 실천하기도 하였다. 안의현감 재직시 민초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는 정책을 폈고 이에 감흥한 백성들이 그 흔한 선정비하나 세울려고 해도 마다했던 점에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이상을 몸소 실천한 인물중에 하나였다. 연암의 사유 핵심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지도계층의 각성만이 기울져 가는 조선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민중을 이해하는 혁명가들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연암의 작품인 <허생전>,<양반전>,<호질>에서 볼 수 있듯이 연암은 당시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의 현실 괴리적인 삶을 풍자하였고 거시경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중기부터 율도국등의 이상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면서도 자신의 기본적인 정치적 입장에는 작품속에 반영하고 있다. <호질>의 범, <허생전>의 허생을 통해서 혁식적인 정치관을 추구하면서도 그 중심엔 언제나 민중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몸소 겪여 잘 알고 있는 자신과 같은 지식층들이 있어야 한다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연암은 상업경제발전에 무게를 두면서도 지금과 같은 재벌형의 대자본이 성행할 경우 국가경제와 서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지금의 시각에서 다소 진부한 경제관과 정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비록 느슨해진 신분 사회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연암의 사유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고 남을 정도의 혁신적인 사고였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 만큼 연암의 사유는 이후 조선사회을 도그마속에 빠져들게 하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원천으로 남게 된다. 이들 작품들이 민중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고 지배계층인 양반들에게 자성의 시간을 주는 흔하디 흔한 계도적인 작품으로 곡해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연암은 작품을 특유의 해학과 풍자로 끌어가고 있지만 그 내러티브속에 꼼꼼히 그리고 강력하게 자신의 정치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연암을 단순하게 문장가,소설가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열하일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철학,과학등 다방면에서 그는 시대와 타협할 수 없는 독특한 사유를 펼친 위대한 사상가로 기억되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논문형식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미란다,크레덴다등 다소 낯선 정치학적 용어가 등장하고 책의 전반적인 구성 자체가 다소 무겁고 딱딱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작품세계를 심도깊게 통찰하고 당시 시대상과 정치적 상황등 전반적인 서술에서 연암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여겨진다.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노마디즘적인 연암의 참된 모습은 그 어느 누구보다 민중을 생각하고 자신의 철학을 고수했다는 면에서 더욱 더 가슴 속에 깊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