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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도학파와 개화파의 역사의식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0. 11. 8. 16:26

 

한말의 도학파와 개화파의 역사의식

 

1) 시대적 배경

 

19세기 한말의 역사적 상황을 보는 입장은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첫째로 새로운 세계사적 질서에로의 능동적인 진입과정이며, 근대화를 지향하는 주체적 자기발전의 역사라는 발전적 측면에서 보는 입장과, 제국주의 열강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서세동점의 역사적 배경이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화라는 역사의 위기적 측면에서 보는 입장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이것은 발전단계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국주의적 침략이 이권 쟁탈이나 경제침략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근대적 진보를 억제하였으며 국가 주권에 대한 무력적 탄압과 폭력적 지배라는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위기상황으로서의 이해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위기상황이 발생한 원인은 크게 보아 대내적인 모순과 대외적인 모순의 두가지로 요약이 될 수 있다. 대내적인 모순은 조선 후기사회가 안고 있던 만성적인 모순이라는 정치 사회적인 문제라면, 대외적인 모순은 근대적 국제정치질서를 앞세운 서구열강의 도전으로 인한 경제 문화적인 충격과 군사적 위협으로 인한 민족 생존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대내적 모순과 대외적 도전이라는 상황에 대응하는 양태는 네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첫째는 전통적 문화의식과 정치제도를 계승하면서 서구열강의 도전을 제국주의적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의 문화 일체를 배격하려는 척사위정사상이고, 둘째는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비판 계승하면서 기존체제의 근대적 개혁을 시도하고 서구문화를 수용하여 개혁을 시도하려는 개화사상이며, 세째는 외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비판 대항하면서 대내적 전통문화와 기존체제에 대해서도 비판과 개혁을 시도하려는 동학사상이고, 네째는 전통문화와 정치체제를 고수하면서 서구열강의 침략행위를 비판하지만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동도서기사상이 그것이다. 이렇게 네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나 대내적 무순과 대외적 도전에 대하여 대립을 보인 것은 도학파의 척사위정사상과 개화파의 개화사상으로 대별할 수가 있다.

 

2) 도학파의 척사위정사상

 

17세기 이후 서양의 천주교가 전래된 이래 전통문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서양 세력의 도전이 격화되는 위기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의 자존을 위한 도학파의 응전의 논리가 척사위정사상이다. 서양문화의 전래는 동양문화와 본질적으로 다른 이질문화의 충격이고, 강대한 무력을 수반한 외세의 도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문화적 위기만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친 민족의 생존과 주체성의 위기로 인식이 되었다.

17세기에 서학이 전래된 이래 정통 성리학적 입장에서 천주교에 대한 이론 비판은 계속되었다. 성호는 천주교의 이론들 가운데 부분적 수용과 비판을 하였으나 신후담의 서학변과 안정복의 천학고에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교리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척사위정사상이 적극적으로 대두된 것은 1791년 윤지충 사건이후 천주교의 문제가 중요한 국내 정치문제로 등장한 이후부터이다. 특히 19세기에 전개된 도학파의 척사위정론을 그 성격의 변화에 따라 나누어 보면 다음의 네단계로 구별할 수 있다.

제 1기는 천주교 사건이 표면화 됨에 따라 도학파의 격렬한 비판과 함께 정부의 강력한 대응 조치가 계속되어지던 시기(1791-1866), 제 2기는 서양의 함대가 내침함에 따라 척서위정론에 의한 천주교 비판이 척양으로 확대되던 시기(1866-1875), 제 3기는 일본의 강요로 불평등 조역이 체결됨에 따라 척사위정론에 의한 비판의 대상이 일본으로 구체화되던 시기(1876-1894), 제 4기는 민비시해 사건 등으로 국권이 유린되고 일본의 침략정책이 구체화 됨에 따라 착사위정론이 의병활동으로 행동화되던 시기(1895-1910) 등이다.

제 1기는 문화적인 척사위정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국가도 유림들의 입장과 의견을 같이 하면서 강력한 제제 조치를 취하였다. 천주교도가 조상숭배와 제사를 우상으로 부정하는 데 대해 국가에서는 멸륜난상의 반역행위로 단죄하면서 척사윤음을 발표하여 척사의 당위성을 밝혔다.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탄압에 항의하거나 선처를 호소하였으나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의 저항도 강화되고 그 결과 유학과 천주교 사이의 이해의 장을 상실하였다.

제 2기는 서양으로부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등의 물리적인 위협이 구체화되자 서구의 제국주의에 강력한 대응을 드러낸 시기이다. 이 시기의 척사론의 특징은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을 구별하지 않고 척사의 대상에 포함시켜 서양 일체를 배척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서학과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고 할 수도 있으나 당시 민족의 생존이 위협받던 위기상황속에서 민족적 자존과 주체성을 확보하여야 하는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다면 관념적 평가에 그칠 수 있다. 또 이 시기의 외세에 대한 패쇄적인 태도를 비판할 수도 있으나 이 속에 민족의 자주정신과 지존의식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민족정신이 국가유지의 원동력으로 기능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제 3기는 일본의 강압적 요구로 타율적인 개방이 되고 이어서 서구와의 통상조약이 계속 체결되자 자주성 없는 개방정책을 비판하는 상소가 이어지면서 정부와 유림의 견해가 어긋나던 시기이다. 이 때의 척사운동은 민족주체성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적인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대내적 척사의 입장이며 동시에 개화파와 척사파의 정책적 대결로 인한 갈등과 간격이 커지고 있었다.

제 4기는 개항체제의 누적된 모순과 외세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적 개혁의 기회를 상실하고 민비사건과 단발령 등으로 민심을 자극하여 항일의병이 유림들의 주도하에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 때의 척사위정사상은 척양론에 담겨있는 패쇄성을 탈피하여 민족주의 이념으로 발전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국제 사회속에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척사론은 한말에 서세의 점진적 침략에 대하여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고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도학파의 대외 항쟁의 이론적 근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3) 개화파의 개혁정신

 

1876년 개항을 전후하여 서구의 문물을 자주적 입장에서 받아들여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한 사상이 개화사상이다. 개화사상은 실학사상과 내면적인 연속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초기 개화파의 인물들이 실학의 인맥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880년대의 개화사상에는 실학파들이 주장하였던 실사구시 부국강병 이용후생 통상개국 제도개혁의 성격들이 개화사상에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실학사상이 임란과 호란 이후에 피폐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정통 주자학을 사상내적으로 극복한 개물사상이라면 개화사상은 이러한 실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서구의 근대문물을 수용하여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시도한 개물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개화파는 개혁정치의 구현방법에 대해 의견의 대립이 생겨 급진적 개혁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는 온건 개화파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일본의 명치유신과 같은 체제 개혁의 방법을 따르려고 하였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젊은 세력이며, 후자는 청국의 변볍자강과 같은 부분 개혁 방식을 따르려고 하였던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등의 집권세력이었다. 온건 개화파의 주장을 채서주의 또는 동도서기론이라고도 한다.

개화사상은 다음과 같은 세단계로 진행이 되었다.

제 1단계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급진 개혁파가 중심이 되었던 시기이다(1876-1895). 정부는 일본에 두차레에 걸쳐 수신사를 파견하여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을 도입하고자 하였으며 뒤이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청국에도 영선사를 파견하여 외국의 문물을 수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개혁정책에 대하여 위정척사파의 비판 상소가 이어졌고 정부는 척사윤음을 선포하여 유림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이때에 척사위정파의 척양론을 비판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적극 수용하여야 한다는 온건 개화파의 동도서기론이 제기되었다. 즉 서양을 물리치기 위하여 서양의 기술 습득과 이용이 필요하다고 하고, 전통적 가치로서의 도는 지키고 도구적이고 응용적인 수단으로서의 기를 고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념적 갈등과 함께 청국의 힘을 빌려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려던 온건 개혁파와 일본의 세력을 빌려 근본적인 체제 개혁을 시도하던 급진 개화파들의 정치적인 대립등으로 인하여 자주적인 개혁을 수포로 돌아가고 갑신정변과 함께 급진개혁파는 몰락을 하였다. 그 뒤를 이은 온건 개혁파도 비록 자주적인 개혁을 이루려고 하였지만 단발령의 예처럼 전통의 파괴를 기도하는 개혁정책이었기 때문에 유림의 저항과 함께 국론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제 2단계는 계속된 개화운동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개화의식이 확대되면서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던 시기이다.(1896-1904) 신문화로서의 개화 풍조가 광범위하게 파급되면서 자주적 개화를 갈망하는 국민 계층이 확대되는 여건 속에서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나타난 것이 독립협회이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개화의식을 대중화시키며 극권운동과 민권운동 주권의 수호 그리고 법치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개화사상의 질을 한단계 높여 주었다. 외세 의존과 굴욕적 수모를 벗어나려는 역사적 자각에서 출발한 독립협회의 자강운동은 근대 민족주의의 중추적인 맥을 형성하였지만 지도층과 회원간의 이해 갈등과 아직 입헌군주제를 수용할 수 없는 시대적 제약 속에서 단절되고 말았다.

제 3단계는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으로 주권이 상실되면서 애국계몽운동이 중심을 이루던 시기이다.(1905-1910) 개화사상의 역사적 임무는 이미 2단계에서 종결되고 그 발전과정으로 오직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던 시기이다. 이때는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서는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보고 대한협회 등 많은 애국계몽 단체들이 설립되어 국민들에게 자강의식과 근대의식을 계몽하였다.

이상 3단계에 걸쳐 진행된 개화사상의 특징은 다음의 몇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실학의 기존 이념인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킨 점이다. 초기 개화파들이 정덕보다는 이용을 강조하고 실사구시를 강조하였으나 후기 계몽사상가들에 이르러서는 이용의 목적이 단순한 부국강병이 아니라 보국안민으로서의 민족주체사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점이다. 둘째 개화사상이 청국이나 일본의 영향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실학의 북학파와 연계되어 내재적 발전법칙에 따라 자주적으로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세째 자주적 입장에서 낡은 제도와 사상을 개혁하고 국력의 배양에 힘쓴 점이다. 개화파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에 의존하였고 마침내는 경제 침투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지만 주체성이 없는 개화는 사대주의에 빠지게 됨을 경계하면서 개화의 주인이 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네째로 인간의 평등과 인권 그리고 민권을 강조한 점이다. 이로 인하여 이성의 해방과 능력본위의 인재 등용이 이루어지고 천부적 인권의 인정으로 평등의식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개화사상은 실학사상을 계승하여 물질적인 개화만이 아니라 의식적인 개화를 추진하여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에서 국만들에게 근대의식을 진작시키고 항일운동의 자주정신을 계몽함으로써 그 역사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