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1. 11. 1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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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여름의 일입니다. 한양 계산동(지금의 서울시 가회동)의 한 초당(草堂)에서 박종채라는 한 선비가 18세 된 그의 맏아들과 함께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때 웬 비렁뱅이 노파가 초당을 기웃거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상도 하지. 초당 모양이 어쩌면 이리도 우리 고을 관아에 있는 정자와 똑같을꼬?" 그 소리를 듣고 박종채가 노파를 불러 어디 사람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안의현(현재 경상남도 함양군)인뎁쇼." 그러자 박종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너희 고을 관아에 있는 정자는 누가 세웠느냐?" 노파가 대답했습니다. "30년 전 박사또께서 고을을 다스릴 때 세우셨는데 그 모양이 이 초당과 똑같사옵니다." "너희들이 아직도 그 어른을 칭송하느냐?" "별다른 칭송이야 있겠습니까? 다만 새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늘, '예전의 박사또 같기야 하겠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돈을 모아 술 마시고 놀 때면 언제나 박사또 얘기를 하면서 '그 분은 풍채가 훌륭하고 풍류를 좋아하셨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듯 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인자하셨어. 그 때문에 관아와 고을이 모두 한가하고 편안하여 저절로 즐거웠지. 박사또께서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수령의 존재를 잊고 살았으니까. 수령이란 원래부터 그런 줄 알았는데.. 그처럼 좋은 시절은 다시 볼 수 없을 게야.'라고들 말합니다."
그 말을 들으며 박종채는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노파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사또께서 떠나시고 몇 년 뒤에 고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송덕비를 세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박사또께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매우 화를 내시면서 '너희들이 끝내 송덕비를 세우려 든다면 집안의 하인들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수어 땅에 묻어버리고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자를 벌주도록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러는 바람에 송덕비를 세우지 못하고 말았지 뭡니까요." 박종채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들이 그 모습을 보고 노파에게 말했습니다. "그 분이 바로 내 부친 일세." "네에? 그럼 여기가 박사또님의? 아이구.. 아이구.." 노파는 기쁨과 황송함에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안의현 백성들이 30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는 박사또- 그는 바로 연암 박지원이었습니다. 계산초당은 바로 연암 박지원이 지은 것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과 손자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박사또님을 빼다 박으셨습니다. 황송합니다만 함자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노파가 박종채의 아들, 즉 박지원의 손자를 보며 물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박규수라고 하오."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인 환재 박규수는 1807(순조7)년에 할아버지 박지원이 말년을 보낸 바로 그 계산초당에서 태어났습니다. 박규수의 집안은 뼈대있는 양반 가문이지만 박지원이 그랬듯이 그의 아버지도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어려서부터 매우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박규수는 15세 때에 이미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한성부윤 조종영(趙鍾永)이 망년지교(忘年之交 :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젊은 벗. 망년지우(忘年之友))를 청해왔을 만큼 학문의 수준이 매우 높았습니다. 20세 무렵에는 훗날 익종이 되는 효명세자(孝明世子)와 함께 토론도 하고 글도 지으면서 문명(文名)을 떨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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