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실학자의 단상] 연암 박지원 '세상으로 나가는 자와 숨는자'를 말한다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1. 12. 6. 15:51

 


동전의 양면처럼 세상 이치는 앞면과 뒷면이 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갈등하게 된다.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는 가족도 가치관의 충돌로 갈등할 수도 있고, 나라 안에서도 서로 이념이 달라 충돌 할 수도 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세상이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세상을 등질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꿀 것인가로 고민하곤 했다.『열하일기』를 쓴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 1737∼1805)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장중거라는 인물을 통해 제시하였다.

세상의 비판에 자신의 몸을 숨긴 장중거

박지원과 동시대 인물인 장중거(張仲擧)는 진사 출신으로 걸출한 인물이었다. 키는 팔척 장신이었고 기개 또한 남보다 뛰어나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호인이었다. 그러한 그도 단점이 있었으니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만취하면 언행에 실수가 많았다.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고 괴롭게 여겨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하고 친구들 사이에도 비방하는 말들이 많았다.
장중거를 미워하는 사람 중에 그를 감옥에 넣으려는 자가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장중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내가 아마 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모양이다!’라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였다. 그런데 누구 보다 호방하던 그가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피하고 그들을 멀리할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세상과 담을 쌓고 집안에서 틀어박혀 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장중거는 자신이 살고 있는 방을 깨끗이 쓸고 문을 닫아걸고는, 크게 ‘이존(以存)’이라는 글씨를 써서 벽에 걸어 놓았다. 이존은『周易(주역)』의 “龍蛇之蟄 以存身也”에서 따온 말로 그 뜻은 ‘용과 뱀이 칩거하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다’라는 의미이다. 뱀이 겨울의 혹한을 피해 또아리를 틀고 칩거하며 겨울잠을 자는데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서 장중거는 자신이 살아 나갈 방도를 구하고자 했다.
장중거는 마치 딴사람이 된 것처럼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같이 어울리던 술친구들이 찾아오자 이렇게 대꾸했다.

“자네들은 그만 물러가라. 나는 장차 내 몸을 보존하려고 한다.”

장중거가 ‘이존(以存)’의 삶을 산다는 소문을 들은 박지원이 하루는 장중거를 찾아갔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 장중거를 본 박지원은 그를 향해 기나긴 충고를 내뱉었다.

“중거가 몸을 보존하려는 방법이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화를 피하기는 어렵겠구나. 비록 독실하고 경건했던 증자(曾子)도 평생토록 외우며 실행한 것이 어떠했는가. 항상 하루아침 하루저녁도 무사히 넘기기 어려울 듯이 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러서야 손발을 살펴보게 하고 비로소 그 온전히 살다가 돌아감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더더구나 일반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한 집을 미루어 한 지방을 알 수 있고 한 지방을 미루어 온 세상을 알 수 있다. 온 세상이 저와 같이 크나, 일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거의 발을 용납할 땅조차 없을 지경이다. 하루 사이에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스스로 살펴 보면 실상은 요행히 살고 요행히 화를 면한 것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제 중거는 세상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밀실에 칩거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 자기 몸 안에 있음을 모르고 있구나. 비록 발자취를 멈추고 그림자를 감추어 스스로 옥살이처럼 살지만 이는 더욱더 사람들의 의혹을 사고 분노를 모으기에 족할 뿐이니, 그 몸을 보존하는 방법이 서투르지 아니한가.
이제 중거의 과실은 술에 있는데, 여전히 자신의 몸을 잊지 못하고 몸 보존할 바를 생각한 나머지 찾아온 손님들을 사절하고 깊이 숨어 살며, 깊이 숨어 사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데 부족하게 되자 또 함부로 스스로 ‘이존’이라는 당호를 써서 남들이 보게 걸어 놓으니, 이는 술에 몸을 피한 유백륜이 자기 묻을 삽을 짊어지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장황하다시피한 박지원의 충고를 들은 중거는 두려워하며 한참 있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대의 충고가 맞다면 나의 팔 척 몸을 일으켜 어디로 던진단 말인가?”

장중거의 질문을 받은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그대의 몸을 그대의 귓구멍이나 눈구멍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무리 천지가 크고 바다가 넓다지만 그 눈구멍이나 귓구멍보다 더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치가 그러한데 그대가 이 속에 숨기를 바라는가?
마음은 귀와 눈에 비해 더욱더 넓고 크니, 예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마음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내 몸의 전체와 큰 쓰임이 진실로 가슴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장차 어디로 가든지 보존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끝가지 들은 장중거는 박지원의 충고에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이어갔다.

“그대의 말은 내가 내 몸 안에 몸을 숨기고, 몸을 보존하지 않음으로써 보존하게 하고자 하라는 충고라 보네, 그러니 내가 감히 내 몸을 보존하라는 말을 벽에 써 붙여서 돌아보고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장중거는 박지원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은 용케 자신의 몸을 보존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을 결코 바꾸지 못한다. 박지원은 장중거의 삶과 대비되는 이성택을 소개하면서 세상을 피해 숨는 지식인을 비판하고자 했다.

정희량의 반란과 이성택

이성택(李聖擇)은 경남 안의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대대로 거창에서 살았다고 한다. 1686년(숙종 12)에 태어났으며 부친은 이만령(李萬齡)이고,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 송규창(宋奎昌)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유학한 이성택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김창흡(金昌翕)ㆍ이재(李縡)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학식을 인정받아 벼슬길로 나갔으나 경종의 즉위와 함께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산골에 묻혀 살았다. 신임사화는 노론계의 몰락을 가져온 사건인데, 이후 경종이 죽고 노론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계는 다시 집권하였다.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과 남인의 불만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으로 표출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신임사화로 득세한 소론이 영조의 즉위로 노론에 밀려나게 되면서, 영조가 신임사화 때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을 무고(誣告)한 소론파 김일경(金一鏡) 등을 처형하자, 소론의 과격파와 갑술옥사 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이 연합하여 이인좌·정희량 등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난을 주도한 정희량은 안의현을 중심으로 근처 여러 고을들을 함락시키고 있었는데, 안의에서 살고 있던 이성택을 잡으려고 하였다. 이성택은 곧장 한밤중에 도망해서 서울로 급히 달려가다가 길에서 말을 달려오는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새로 부임해 오는 현관(縣官)이었다. 현관이 난리 중에 부임 받아 불안하던 차에 이성택을 만나자 두사람은 정희량을 토벌할 계책을 비밀리에 모의하였다. 현관이 안의현 도착하자 정희량의 무리는 이미 처형된 상태였다. 정희량의 난이 평정되자 영조는 안의현을 없애버리고 그 지역을 거창과 함양에 합쳐 버렸다.

역적의 땅, 안의현

거창과 함양은 안의현의 하류지역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이 두 지역 사람들은 논에 물을 댈때도 안의에서 물을 댄 뒤에 남으면 물을 빌어가고, 산에 와 땔나무를 하고 풀을 베어 갈 때에도 도끼 같은 도구는 지니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안의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완전히 처지가 뒤바뀌고 말았다.
안의현이 두 고을에 합쳐져 버리자 거창과 함양 사람들은 안의현의 제방부터 터서 물을 내렸고, 대낮에 나무를 베 가고 남의 묘에 심은 나무를 베어 가도 안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서서 바라볼 뿐 아무도 감히 따지질 못했다. 입술만 약간 움직여도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안의지역 사람들의 고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고초가 뼈에 사무쳐도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고을을 되찾아지길 바랐으나, 그 일을 맡아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결국 안의 지역의 옛 장로들이 이성택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 했다. 이성택은 그 즉시 서울에 가서 상소를 올렸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안의 지역 사람들의 고충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역적이 일어난 곳이라하여 짐승 보듯 했고 얼굴 조차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안의현을 살리다

이성택은 당시 재상이었던 김재로(金在魯)를 만나 울면서 말했다.

“역적이 나면 그 집을 웅덩이로 만들어 불모지가 되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고장은 우물도 마을도 이전 그대로인데 그 읍치(邑治)를 폐지하고 사직을 폐허로 만들었으니, 이는 백 리 일대를 웅덩이로 만든 격입니다. 게다가 학교마저 폐교시켜 버리면서 나라 세금은 여전히 내게 하는데, 안의현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모두들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려 장차 안의현은 여우와 뱀의 소굴이 될 것입니다.”

“좋소. 당신을 위해 힘껏 진달하리다.”

이성택의 간곡한 부탁을 들은 김재로는 그 다음날 영조를 찾아 뵙고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영조는 안의지역 백성들을 가련하게 여기고 다시 안의현으로 회복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실로 안의현이 폐해진지 9년만의 일이었다.

이성택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안의 지역은 회복되었는데, 사실 안의의 옛 이름은 안음(安陰)이었다. 그런데 안의 지역 근처에 산청이라는 곳이 있다. 산청도 원래 이름이 산음(山陰)이었다. 안음과 산음이 안의와 산청으로 바뀌게 된 것은 영조 때의 일이다. 안의는 역적을 낸 고장이라는 이유로, 산청은 7살 짜리 여자 아이가 애를 낳은 사건이 화제가 되어 고을 명칭이 개칭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반란과 요상한 일이 발생한 원인을 고장 이름에 있는 음(陰)자에서 찾았다. 음자의 음습한 나쁜 기운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성택이 5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박지원은 “사람도 신도 의지할 곳이 없던 안의현이 이처사의 공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으니, 그 영광이 함께 할 것이다”라며 이성택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였다.
(글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