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국회의장, 박규수 선생 묘소 둘러봐
[국회보 2011년 12월호]
백성의 안위와 부국강병 박규수, 개화에서 길을 찾다
기사입력 2011-12-08 15:14
박희태 국회의장이 11월 22일 충북 보은군 장안면에 위치한 박규수 선생의 묘소를 둘러보고 있다.
11월 22일 햇살도 몸을 움츠린 쌀쌀한 초겨울 아침, 박희태 국회의장은 충북 보은군에 있는 환재 박규수(瓛齋 朴珪壽, 1807~1877) 선생의 묘소를 방문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난 계절의 무게를 모두 내려놓은 산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가을이 진 자리마다 겨울 풍경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날 박희태 의장의 보은행은 지난 1월 조선 초기 명정승 황희를 필두로 시작된 국회보 특별기획 시리즈의 마지막 회로, 그간 박 의장은 ‘화(和)의 정신’을 강조한 황희 정승과 대동법을 주창한 김육, 이용후생의 실학자 박지원, 서유구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오늘날 한국 정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왔다.
박희태 의장은 박규수 선생에 대해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실학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고 후에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연행을 다녀오면서 실학사상을 개화사상으로 발전시킨 조선 후기 개화론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충북 보은군 장안면에 위치한 박규수 선생의 묘소에 도착하자 선생의 직계종손인 박찬구 씨와 반남 박씨 종친회 관계자들이 나와 박희태 의장 일행을 맞았다. 묘소를 둘러본 박희태 의장은 “이렇게 훌륭한 조상이 계셔서 무척 자랑스러우시겠다”고 인사를 했고 후손들은 박 의장의 특별한 관심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효명세자의 죽음과 18년의 은둔생활
박규수는 연암이 별세한 지 2년 뒤에 태어나 직접 조부의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연암은 박규수의 문학과 사상에 어느 누구보다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박규수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이 연암의 옛집인 계산초당입니다. 계산초당은 연암이 북학론에서 주장한대로 건축에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박규수는 할아버지의 실학정신과 삶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계산초당에서 ‘연암집’을 읽으며 실학에 눈뜨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박규수가 초기에 활동하던 시기는 정조가 죽고 12살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시작되던 때였다. 당시 순조는 김조순 및 외가 세력의 세도정치에 맞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후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해 국정을 주도하고자 한다. 효명세자는 왕실의 친척을 멀리하고 신진관료를 육성하는 등 개혁 정책을 추진하며 ‘제
박희태 국회의장이 박규수 선생 직계후손 및 반남 박씨 종친회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의 정조’를 꿈꾼 인물이다.
“이 시기에 효명세자는 젊은 박규수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채용합니다. 그러나 국정을 주도하려는 효명세자와 그에 제동을 걸려는 안동 김씨 외척세력 간에는 극심한 갈등이 벌어졌고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4년 만에 갑자기 병석에 누워 급서하게 되지요. 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박규수는 연일 통곡하며 살 의욕조차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8년간의 긴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갑니다.”
은둔 시절 박규수는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심화시키는 한편, 서유구·홍양후 등 저명한 선배 및 동료 학자들과 교유한다. “당시 말년의 서유구는 수원에 서실을 마련해 ‘임원경제지’의 완성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그의 탁월한 학식과 인품을 흠모한 후배들이 찾아오면서 자연스레 모임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서유구는 젊은 시절에 존경하며 따랐던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찾아오자 학문과 문학의 대선배로서 그를 아끼고 지도했다고 하지요.”
박규수 선생 초상화(자료제공 : 실학박물관)
두 차례의 중국 연행과 개화사상
박규수는 1848년 마흔두 살의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은둔생활을 마감한다.
“박규수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즈음 조선은 천주교 박해로 나라가 어지러웠고 해안에서는 서양선박이 자주 출몰했습니다. 또 중영전쟁(아편전쟁)이 발발하는 등 청에 대한 서양열강의 침입이 본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박규수는 서양세력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위협에 대비하여 해안을 지켜야 한다는 ‘해방론(海防論)’을 주장합니다. 그는 천주교의 포교 목적 역시 순수한 교화가 아니라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들여온 신서(新書)를 읽거나 중국 연행을 다녀온 사람들을 통해 서양에 대한 정보를 얻고 서학 등 새로운 학풍에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았다.
“박규수의 개화사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역관 오경석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오경석은 10여 차례 북경을 왕래하면서 중국의 개혁론자들과 교유했고 이들을 통해 중국이 당면한 위기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오경석의 학문이나 사상은 박규수와 흡사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1860년대부터 신분을 초월하여 가깝게 지냈습니다. 후에 정계를 은퇴한 박규수는 그의 사랑방에서 오경석과 함께 ‘연암집’, ‘해국도지(중국 위원이 쓴 세계지리서)’ 등을 김옥균, 박영효, 홍역식, 유길준 등 젊은 후학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서적과 교유를 통해 서양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던 박규수의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연행이었다. 1856년 애로우호 사건으로 청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을 받게 되고 수도 북경이 함락된다. 이로 인해 청의 함풍제는 열하로 피난을 떠나게 되며, 서양의 요구대로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완전히 개방한다.
“조선 정부는 열하로 피신한 청의 함풍제를 위로할 ‘열하문안사’의 파견을 결정하는데 박규수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박규수는 조선과 중국 간에 결속을 강화한다는 문안의 1차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서양세력의 실상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하문안사를 자원했다고 합니다.”
연행을 떠난 박규수는 철종의 당부대로 귀국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에서 박규수는 중국이 내정과 외정의 문란으로 극히 쇠약해져 있으며 서양세력의 진출 목적이 영토 확장이 아니라 통상과 종교 전파에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박규수가 서양세력에 대해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연행 이후 그의 서양관에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그는 쇠퇴한 중국의 실상을 보면서 중국에만 의존하는 외교에서 벗어나 서양 세력과 새로운 관계정립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후 박규수는 1872년 2차 연행을 통해 개국론을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켜나갑니다.”
2차 연행 후 보고서에서 박규수는 서양의 장기(長技)를 배워 서양을 막는다는 중국의 양무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조선도 서양의 대포나 화륜선 같은 기계류의 제작기술을 수용하면 오히려 강국을 도모하는 이득이 되며, 이를 통해 서양의 침범을 막게 된다는 의견을 펼친다.
제너럴셔먼호 격침과 대미·대일 개국론
2차 연행 전인 1866년 박규수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즈음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여 외국선이 본국에 진입해 교역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너럴셔먼호는 이에 따르지 않고 대동강까지 올라왔습니다.”
조선은 제너럴셔먼호에 교역이나 포교활동이 불가하니 즉각 퇴각하라는 요청을 하지만 제너럴셔먼호는 응하지 않고 계속 진격했으며 그들을 감시하던 조선군의 배를 끌고 가고 대포를 쏘았다. 이에 분노한 평양군민이 전투를 벌여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키게 된다.
“박규수는 대미개국론을 주장하긴 했지만, 불법적인 미국상선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처음에 원인을 제공한 측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한편, 박규수는 격침된 제너럴셔먼호의 선체와 증기기관을 끌어올려 서울로 보내 증기선 실험을 하도록 대원군에게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정세에 대한 지식을 얻고 발전된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후 박규수는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서구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일본이 조선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한다. 수교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에게 침략의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대원군을 비롯한 척사대신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는다.
“박규수는 1860~70년대에 걸쳐 고위정책결정과정에 참가하긴 했지만 개화세력이 아직 형성되기 전이다 보니 소수의견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미개국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고 대일개국론도 운요호사건이 있은 이후에 채택되어 자주적으로 개국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개국론이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쇄국만을 고집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개국론의 전개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녔다고 봅니다.”
우의정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박규수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개화사상을 가르친다. “김옥균, 유길준 등 젊은 지식인들은 박규수의 자극에 고무되어 개화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지금 헌법재판소 안에 박규수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석이 자리잡고 있는데, 말하자면 이곳이 ‘조선개국의 산실’이었던 것입니다. 훗날 춘원 이광수와 박영효가 잡지에서 대담을 하면서 박영효에게 개화사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묻자 ‘박규수 집 사랑방에서 나왔다’고 대답하여 이 사랑방이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시대를 앞선 통찰과 안목
자주적 개국을 주장하던 박규수는 1875년 운요호사건과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보면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1877년 고희를 갓 넘긴 나이로 재동 사저에서 생을 마감했다. 박규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문인 김윤식은 박규수의 만년을 “나라 사정이 날로 그르쳐지매 공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고 적고 있다.
“박규수 선생은 19세기의 시대적 격랑을 헤쳐나가기 위해 실학사상을 근간으로 개화를 주창하며 다방면에 걸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입니다. 시대를 앞선 통찰과 안목으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던 박규수 선생의 선각자적인 생을 살펴보면서 저도 국회와 정치권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고 성찰해보겠습니다. 나날이 찬 기운이 더해가는 연말에 따뜻하고 힘이 되는 정책으로 민생을 보살피는 국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글_김현아 미디어담당관실 사진_김진혁 미디어담당관실 촬영관
이창훈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tantan@mk.co.kr1993년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 증권·금융·정치·사건 취재를 두루 거침
128회, 130회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수상
<잡스처럼 꿈꾸고 게이츠처럼 이뤄라>, <초월하는 애플, 추월하는 삼성>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