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해인사(海印寺)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海印寺唱酬詩序)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19. 11:44

해인사(海印寺)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海印寺唱酬詩序)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 이공 태영(李公泰永) 사앙(士昻 이태영의 자(字))이 관하를 순시하다가 가야산(伽倻山)으로 접어들어 해인사(海印寺)에 묵게 되었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이채(李采) 계량(季良), 거창 현령(居昌縣令) 김유(金鍒) 맹강(孟剛) 및 지원(趾源)이 마중하기 위하여 절 아래 모이니 모두가 이공의 한동네 친구였다.
차례로 나아가 뵈자 공은 각각 소관 고을 농사의 풍흉과 백성의 질고를 묻고 나서 일어나 관복을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어 촛불을 돋우고 술을 내오라 하여 예의절차를 무시하고 반가이 지난날을 이야기하였다. 공은 그 큰 깃발들 아래 경상도 일흔두 고을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고, 자리를 같이한 이들 역시 자신이 대령(大嶺 조령(鳥嶺)) 너머 천 리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마치 예전에 나막신을 신고 평계(平溪)와 반지(盤池) 사이에서 서로 오가며 놀듯이 하였으니 몹시도 성대한 일이었다.
다음 날 공이 운을 정해 율시 두 수씩을 각기 짓게 하고 지원에게 이에 대한 서문을 지으라 명하므로, 지원은 공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예전에 조남명(曺南冥)이 지리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은(報恩)에 있는 성대곡(成大谷)을 방문하였다. 이때 그 고을 원이던 성동주(成東洲)가 자리를 함께하였는데 남명과는 초면이었다. 남명이 그를 놀리며

“형은 내구관(耐久官)이시군요.”

하였다. 이에 동주는 대곡을 가리키며 웃으면서 사과하기를

“바로 이 늙은이가 붙들어서 그렇게 되었지요. 비록 그렇긴 하나 금년 팔월 보름에는 해인사에서 달이 뜨기를 기다릴 테니 형은 오실 수 있겠소?”

하였다. 남명은 그러마고 하였다. 기약한 날이 되자 남명은 소를 타고 약속한 대로 가다가 중도에 큰비를 만나 간신히 앞개울을 건너 절 문에 들어서니 동주는 벌써 누각에 올라 막 도롱이를 벗고 있었다.
아아! 남명은 처사였고 동주는 이때 이미 관직을 떠난 처지였으나 밤새도록 이야기한 것이 민생 문제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절의 중들은 지금까지도 이 일을 서로 전해 산중의 고사(故事)가 되었다.
지원이 해마다 감사의 행차를 맞아 이 절에 들었는데, 하마 세 번이나 감사가 바뀌었으니 나 역시 내구관이라 이를 만하다. 달이 뜨기를 기다려 만나자는 약조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모진 바람, 심한 비를 감히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매번 절 문을 들어서면 기약 않고도 모인 수령이 늘 일고여덟은 되었다. 절간은 여관처럼 즐비하고 승려는 기생처럼 많으며 모임자리에서 시를 지으라 재촉하기를 마치 도박에 돈을 걸라고 독촉하듯 하고, 차일과 다담상은 구름 같고 퉁소소리와 북소리 요란하니, 비록 단풍과 국화가 어울려 비치고 산수가 절경을 자랑하나 민생 문제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매양 누각에 오를 적마다 시름없이 옛날 어진 이의 비 맞은 도롱이를 아스라하게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울러 이를 기록하여 산사의 장고(掌故)에 대비하는 바이다.
을묘년(1795, 정조 19) 9월 20일 안의 현감(安義縣監) 박지원 중미(仲美 연암의 자(字))가 서문을 쓰다.

조남명의 이름은 식(植)이요 성대곡의 이름은 운(運)이며 성동주의 이름은 제원(悌元)인데 모두 징사(徵士)이다. 보은은 고을 이름이다.


 

선비의 출사(出仕)나 은거(隱居)는 그 뜻이 한가지이다. 은거한다 하여 민생 문제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승려일 따름이요, 출사한다 하여 산수 자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노예일 따름이다. 남명과 동주가 선탑(禪榻)에 앉아 백성을 걱정한 것과, 감사와 수령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시를 지은 것이 그 일은 정반대이지만 그 뜻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다르지 않았다.


 

옛 친구가 된다 해서 허물없이 대하지도 않았고 상관이라 해서 아첨하지도 않았다. 풍(風) 같기도 하고 송(頌) 같기도 하여 글 뜻이 매우 진지하고 간절하다 하겠다.

 

 

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李公泰永士昂行部。路入伽倻。宿海印寺。善山府使李釆季良,居昌縣令金鍒孟剛曁趾源。迓候會寺下。皆公之里閈舊要。以次參見。公各詢當邑年成民之疾苦。然後起更衣。因剪燭命酒。寬假禮數。歡然道舊。殊不見其高牙大纛擁七十二州以自尊大。而在列者。亦不自覺其身在大嶺千里之外。怳然若履屐徵逐於平溪盤池之間。甚盛事也。明日公拈韻。各賦二律。命趾源序之。趾源復于公曰。昔曺南冥之還山也。歷訪成大谷于報恩。時成東洲以邑倅在座。與南冥初面也。南冥戲之曰。兄可謂耐久官也。東洲指大谷笑謝曰。正爲此老所挽。雖然。今年八月十五日。當待月海印寺。兄能至否。南冥曰。諾。至期。南冥騎牛赴約。道大雨。僅渡前溪入寺門東洲已在樓上。方脫簑。噫。南冥處士也。東洲時已去官。而盡夜相語。不離於生民休戚。寺僧至今相傳爲山中故事。趾源歲迎輶軒。入此寺已三更。使亦可謂耐久官矣。非有候月邂逅之約。而不敢避甚風疾雨。每入寺門。不期而會者。常七八邑。梵宇如傳舍。緇徒如舘妓。臨塲責詩如催博。進供張如雲。簫鼓啁轟。雖楓菊交映。流峙競奇。亦何補於生民之休戚哉。每一登樓。未甞不愀然遐想于昔賢之雨簑也。並錄此。以備山寺掌故。乙卯九月廿日。安義縣監朴趾源仲美。序。
曺南冥名植。成大谷名運。成東洲名悌元。俱徵士。報恩縣名。
士之出處一也。處而不志乎生民休戚。則髡緇而已矣。出而無涉於楓菊巖泉。則徒隸而已矣。南冥東洲之禪榻憂民。按使太守之官尊賦詩。其事正相反。而其志則未始不同。
不爲舊要而昵慢。不爲上官而諂屈。若風若頌。文旨剴切。



 

[주D-001]평계(平溪)와 반지(盤池) : 평계(平溪)는 평동(平洞), 거평동(居平洞)이라고도 하였다. 서대문 밖 반송방(盤松坊)에 속한 동네로, 지금의 종로구 평동 일대이다. 예전에 평동과 냉정동(冷井洞: 지금의 냉천동) 사이에 지금은 복개된 계천(溪川)이 흘렀으므로 평계라 한 듯하다. 반지(盤池)는 반송지(盤松池) 또는 서지(西池)라고도 하며, 서대문 밖 반송방에 있던 큰 연못으로 명승지의 하나였다.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주D-002]내구관(耐久官) : 벼슬을 무던히도 오래 하는 관리를 비꼬아 말한 것이다.
[주D-003]징사(徵士) : 임금이 벼슬을 주며 불렀는데도 응하지 않은 은사를 말한다.
[주D-004]풍(風) …… 하여 : 풍과 송은 《시경》의 세 가지 시가(詩歌) 유형 중의 하나이다. 풍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풍간(諷諫) 즉 넌지시 충고하는 노래라는 뜻이 있고, 송은 덕을 칭송하는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