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남 직각(南直閣) 공철(公轍) 에게 답함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19. 12:50
남 직각(南直閣) 공철(公轍) 에게 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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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1793) 정월 16일에 형이 지난 섣달 28일 띄운 서한을 받고서 비로소 형이 내각(內閣 규장각)에 재직하고 있음을 알았으며, 바삐 서한을 펴 보고 또한 평안히 계심을 알았소이다. 그런데 반도 못 읽어서 혼비백산하여 두 손으로 서한을 떠받들고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렸소.
대개 사신(私信)이기는 하지만 임금의 명령을 받든 것이라,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두렵더니 뒤따라 눈물이 마구 쏟아졌소. 진실로 위대한 천지는 만물을 기르지 않음이 없고, 광명한 일월은 미물이라도 비추지 않음이 없음을 알게 되었소. 그러나 글방의 버려진 책이 위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대궐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이곳은 천 리나 동떨어진 하읍(下邑)이지만 임금의 위엄은 지척(咫尺)이나 다름이 없고, 이 몸은 제멋대로 구는 일개 천신(賤臣)이건만 임금의 말씀은 측근의 신하를 대할 때나 차이가 없으며, 엄한 스승으로서 임하시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가르치시어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킨 죄로 처형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 편의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 속죄하도록 명하셨으니, 서캐나 이 같은 미천한 신하가 어이하여 군부(君父)께 이런 은애(恩愛)를 입는단 말이오.
아! 명색이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몸소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교화를 펴는 시대를 만나고도,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이 화목하고 평온한 음향을 발하고, 《서경(書經)》ㆍ《시경(詩經)》과 같은 저작을 본받아 임금의 정책(政策)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선비의 수치입니다. 더구나 나 같은 자는 중년(中年) 이래로 불우하게 지내다 보니 자중하지 아니하고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때때로 곤궁한 시름과 따분한 심정을 드러냈으니 모두 조잡하고 실없는 말이요, 스스로 배우와 같이 굴면서 남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으니 진실로 이미 천박하고 누추하였소이다.
게다가 본성마저 게으르고 산만해서 수습하고 단속할 줄 몰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로(畵蘆)ㆍ조충(雕蟲) 따위의 잔재주가 이미 자신을 그르치고 또한 남까지 그르쳤으며, 부부(覆瓿)ㆍ호롱(糊籠)에나 알맞은 글로 하여금 혹은 잘못된 내용이 전파됨에 따라 더욱 잘못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차츰차츰 패관소품(稗官小品)으로 빠져 든 것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위항(委巷)에서 흠모를 받게 된 것도 그러길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문풍(文風)이 이로 말미암아 진작되지 못하고 선비의 풍습이 이로 말미암아 날로 퇴폐하여진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교화를 해치는 재앙스러운 백성이요 문단의 폐물이라, 현명한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에 형벌을 면함만도 다행이라 하겠지요.
제 자신은 웅대하고 전중한 문체를 거역하면서 후생들이 고문(古文)의 법도를 계승하려 하지 않음을 탄식하고, 벌레 울고 새 지저귀는 소리나 좋아하면서 ‘옛사람들은 듣지도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이로 말하자면 나나 그대나 마찬가지로 죄가 있다 하겠소. 지금에 와서는 도깨비가 요술을 못 부리고 상곡(桑穀)의 재앙이 저절로 소멸되게 되었으니, 그 본심을 따져 보건대 비록 잔재주에 놀아난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는 진실로 무슨 심보였던가요?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단단히 기억을 해야겠소.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용서하시니 임금의 덕화(德化)에 함께 포용되었음을 확실히 알았으며,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청아(菁莪)에 거의 자포자기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나나 그대나 죽도록 같이 힘쓸 바요. 어찌 감히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 뒤늦게나마 만회할 것을 급히 도모하여 다시는 성세(聖世)의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지 않으리오
부(附) 원서(原書)
서울에는 한 자가 넘게 눈이 내려 가죽옷을 껴입지 않고는 외출을 못할 지경인데, 남쪽 소식은 어떤지 몰라 애달프게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요즘 정사(政事)에 수고로운 몸 안녕하신지요? 영남(嶺南)은 가뭄의 피해가 이루 다 볼 수 없을 지경인데, 귀하의 고을은 세금 독촉이며 기민 구제 사업으로 정신이 괴롭지나 않으신지 이것저것 삼가 염려되옵니다. 기하생(記下生)은 어지러운 진세(塵世)와 어수선한 몽상 속에서 예전의 저 그대로입니다.
지난번에 문체(文體)가 명(明)ㆍ청(淸)을 배웠다 하여 임금님의 꾸지람을 크게 받았고 치교(穉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함추(緘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또 내각(內閣)으로부터 무거운 쪽으로 처벌을 받아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내각에서 북청 부사(北靑府使)로 부임하는 성사집(成士執)의 송별연을 벌였는데, 대개 사집(士執)은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내렸던 것입니다. 낙서(洛瑞) 영공(令公)과 여러 검서(檢書)가 다 이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문원(文苑)의 성사(盛事)요 난파(鑾坡)의 미담이라,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서 이에 아뢰는 바입니다.
어제 경연(經筵)에서 천신(賤臣 남공철)에게 하교하시기를,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비록 남행(南行)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죄가 내릴 것이다.”
하시며, 이로써 곧 편지를 보내라는 일로 하교하셨습니다.
이런 임금의 말씀을 들으면 필시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한꺼번에 뒤섞일 줄 상상되오나, 다만 이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은 진실로 졸지에 지어 내기는 어려울 터이니,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시려는 우리 성상의 고심과 지덕(至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그 만에 하나나마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집사는 허물을 자책하고 속죄해야 하는 도리상 더욱이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나, 그 제목을 정하기가 딱하게도 쉽지 않으니, 명ㆍ청의 학술을 배척하는 한두 권 글을 지어서 올려 보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영남(嶺南) 산수기(山水記) 한두 권이나 혹은 서너 권을 순수하고 바르게 지어 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막론하고 두어 달 안에 올려 보내심이 어떨는지요? 편지를 보낸 것은 이 때문이며, 이만 줄입니다.
本年正月十六日。得吾兄去臘廿八日所出書。方知足下職在內閣。忙手發函。又審足下起居萬勝。奉讀未半。魂神飛越。雙擎跪伏。以首頓地。葢書雖私抵。命自天啣。始則惝怳震惕。繼而涕泗橫流。誠知天地之大。無物不育。日月之明。無微不燭。然豈意兎園之遺冊。上汚龍墀之淸塵也哉。下邑千里之遠。而天威不違於咫尺。踈野一介之賤。而恩敎無間於近密。嚴師而臨之。慈父而詔之。不惟不加以兩觀熒惑之誅。乃反命贖其一部醇正之書。蟣蝨賤臣。何以得此於君父也。噫。士之生斯世者。躳逢堯舜之化。不能振渢瀜和平之響。追典謨大雅之作。黼芾皇猷。以鳴國家之盛。固士之恥也。况如僕者。中年以來。落拓潦倒。不自貴重。以文爲戱。有時窮愁無聊之發。無非駁雜無實之語。自同俳優資人諧笑。固已賤且陋矣。性又懶散。不善收檢。未悟雕蟲畵蘆之技。旣自誤而人誤。致令覆瓿糊籠之資。或以訛而傳訛。駸尋入稗官小品。則莫知爲而爲。轉輾爲委巷所慕。則不期然而然。文風由是而不振。士習由是而日頹。則是固傷化之災民。文苑之棄物也。其得免明時之憲章。亦云幸矣。至若違鴻厖典厚之軆。嗟小子之不肯搆。悅蟲鳥啾喞之音曰。昔人之無聞知。是則僕與足下俱有罪焉。今其魑魅莫衒。桑穀自消。究厥本情。雖伎倆之所使。是誠何心。自楚撻而爲記。赦過宥罪。固知幷囿於陶甄。改心易慮。庶不自棄於菁莪。是則僕與足下。至死所共勉者也。敢不亟圖其黥刖之補。桑楡之收。無復作聖世之辜人也。
原書附
洛雪盈尺。非重裘不能出。未知南信如何。瞻悵無已。伏惟履玆政軆候萬相。嶺以南災荒溢目。貴縣則催科營賑。不至惱神否。種種伏慮。記下生粉塵絲夢。依舊吾也。頃日以文軆之學明淸。大被恩讉。與穉敎諸人。至蒙緘推記下生。則又自內閣從重照律收贖。贖錢設酒饌。自本閣餞送。北靑府使成士執槩。士執文軆醇正。故有是命也。洛瑞令及諸檢書。皆與此會。文苑盛事。鑾坡美談。榮極感隨。玆以仰報耳。昨日筵中下敎于賤臣曰。近日文風之如此。原其本則莫非朴某之罪也。熱河日記。予旣熟覽焉。敢欺隱此。是漏網之大者。熱河記行于世後。文軆如此。自當使結者解之。仍命賤臣。以此意作書。執事斯速著一部純正之文。卽卽上送。以贖熱河記之罪。則雖南行文任。豈有可惜者乎。不然則當有重罪。以此卽爲貽書事下敎
矣。承此恩言。想必榮悚俱集。而第此純正書一部。誠難猝然辦得。未知欲何以爲之耶。此實出於我聖上敦世敎。振文風。正士趣之苦心至德。敢不對揚其萬一。况執事則其在訟愆贖罪之道。尤不容頃刻暫緩。而命題苦不易。以排斥明淸學。作一二卷文字。上送爲好耶。不然則南中山水記一二卷。或三四卷。醇正著出好耶。毋論如此如彼。數月內上送。如何如何。爲此姑不備。
[주C-001]남 직각(南直閣)에게 답함 : 남공철(南公轍 : 1760~1840)은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세손(世孫) 시절 정조(正祖)의 사부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의 아들이다. 1792년 전시(殿試) 급제 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고 규장각 직각,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는 등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때 더욱 현달하여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문장가로 평판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금릉집(金陵集)》 등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연암을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분이 있었다. 직각은 규장각(奎章閣)의 관직으로 정원은 1명인데 홍문관에 속한 정 3 품에서 종 6 품 사이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이 편지는 남공철의 편지와 함께 《과정록》 권2에도 일부 소개되어 있다.
[주D-001]글방의 버려진 책 : 원문은 ‘兎園之遺冊’이다. 원래 글방에서 아동들에게 가르치던 교재 따위를 토원책(兎園冊)이라 하는데, 자신의 저술을 겸손하게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는 연암이 자신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가리켜 한 말이다.
[주D-002]위로 …… 줄 : 원문은 ‘上汚龍墀之淸塵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上汚’가 ‘誤玷’으로 되어 있다.
[주D-003]임금의 …… 처형을 : 원문은 ‘以兩觀熒惑之誅’인데, 양관(兩觀)은 원래 궁궐 정문의 좌우에 있는 망루(望樓)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궁궐이란 뜻도 가지게 되었다. 공자는 노(魯) 나라의 재상 직무를 대행하게 되자 난신(亂臣)인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노 나라 궁궐의 양관 아래에서 처형했다고 하여 ‘양관지주(兩觀之誅)’란 성어(成語)가 생겼다. 또한 노 나라 임금과 제(齊) 나라 임금이 회합한 자리에서 제 나라 측이 광대와 난쟁이의 유희를 공연하자 공자는 필부로서 임금의 총명을 현혹케 한 죄를 물어 그자들을 처형하도록 했다고 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주D-004]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 원문은 ‘鳴國家之盛’인데, 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글에서 한유는 맹교(孟郊)와 같은 그의 벗들을 뛰어난 작가라는 뜻의 ‘선명자(善鳴者)’라고 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노래하지 말고 크게 발탁되어 국가의 융성을 노래할 날이 오기를 염원하였다.
[주D-005]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 원문은 ‘以文爲戱’인데, 궁귀(窮鬼)와의 가상적인 문답을 통해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 같은 작품이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은’ 글로 비난을 받았다.
[주D-006]화로(畵蘆)ㆍ조충(雕蟲) : 화로는 호로(葫蘆 표주박)를 그대로 따라 그린다는 말로 참신함이 없이 단순하게 남을 모방하는 것을 말하며, 조충은 벌레 모양의 글자〔蟲書〕를 새기듯이 자구(字句)를 수식하여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주D-007]남까지 그르쳤으며 : 원문은 ‘人誤’로 되어 있으나, 《과정록》과 김택영(金澤榮)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誤人’으로 되어 있다.
[주D-008]부부(覆瓿)ㆍ호롱(糊籠) : 부부는 항아리를 덮는다는 뜻이고 호롱은 종이로 농을 바른다는 뜻으로, 항아리 덮개로 삼거나 농이나 바르기에 족한 시원치 않은 글을 가리킨다.
[주D-009]패관소품(稗官小品) : 명(明) 나라 말 청(淸) 나라 초에 크게 유행했던 패관소설(稗官小說)과 소품산문(小品散文)을 가리킨다.
[주D-010]후생들이 …… 탄식하고 : 원문은 ‘嗟小子之不肯構’인데, 《서경》 대고(大誥)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이룩한 왕업을 계승하는 일을 집 짓는 데 비유하여,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확립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집터를 닦으려 하지 않으니 하물며 기꺼이 집을 얽어 만들겠는가?〔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고 하였다.
[주D-011]벌레 …… 소리 : 자질구레한 소재를 다룬 소품산문을 풍자하여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주D-012]나나 …… 하겠소 : 남공철도 패관소품을 즐겨 읽고 그 영향을 받았다. 1792년 음력 10월 그는 초계문신으로서 지어 올린 책문(策文) 중에 패관소품의 문체를 구사했다는 정조의 견책을 받고 지제교(知製敎) 직함을 박탈당했으며, 어명으로 규장각으로부터 죄를 추궁하는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서를 지어 올려야 했다. 《正祖實錄 16年 10月 19日ㆍ24日ㆍ25日》
[주D-013]상곡(桑穀) : 뽕나무와 꾸지나무를 말한다. 은(殷) 나라 태무(太戊) 때 상과 곡이 조정 뜰에 솟아나 하루 만에 한 아름이나 자랐다. 그것을 본 태무가 두려워서 이척(伊陟)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이척의 말이 “요얼(妖蘖)은 덕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임금의 정치에 결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니 임금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다. 태무가 그 말에 따라 덕을 닦자 상과 곡이 말라 죽었다고 한다. 《史記 卷3 殷本紀》
[주D-014]청아(菁莪) :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출처를 둔 말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정조가 인재를 발탁ㆍ기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운산만첩당집》에는 ‘膏燭’으로 되어 있다.
[주D-015]지난날의 …… 것을 : 원문은 ‘黥刖之補’인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형벌을 받아 훼손된 몸을 온전하게 회복한다는 뜻으로, 개과천선과 같은 말이다. 식경보의(息黥補劓)란 성어가 있다. 또한 원문의 ‘상유지수(桑楡之收)’는 ‘아침에 잃은 물건을 저녁에 되찾는다(失之東隅 收之桑楡)’는 속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처음의 실수를 나중에 만회한다는 뜻이다.
[주D-016]어찌 …… 않으리오 : 《운산만첩당집》에는 그다음에 “차츰 순수하고 바르게 되고자 했으나 그래도 《맹자》에 나오는 풍부(馮婦)처럼 예전 솜씨를 다시 발휘하려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어찌 《장자》에서 말한 ‘제 그림자를 피하려 하면서 해를 향해 달려가는 자’가 아니겠는가?〔稍欲醇正 而猶不脫攘臂下車習氣 無乃畏影而走日中者耶〕”라는 평어가 있어 글을 감상하는 데 참고가 된다.!
[주D-017]기하생(記下生) : ‘기억해 주시는 아랫사람’이란 뜻으로, 편지에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다.
[주D-018]치교(穉敎) …… 하였습니다 : 치교는 심상규(沈象奎 : 1766~1838)의 자이다. 함추(緘推)는 함사추고(緘辭推考)의 준말로 6품 이상의 관원이 경미한 죄를 범한 경우 서면(書面)으로 죄를 추궁하고 서면으로 진술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심상규는 정조로부터 그의 이름과 자를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792년 음력 11월 규장각 대교로서 함추를 받아 지어 올린 함답(緘答)이 구두(句讀)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고 그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주해(註解)를 달아 올리라는 엄명을 받았다. 당시 심상규뿐만 아니라 패관소설을 즐겨 본 전과가 있던 김조순(金祖淳)과 이상황(李相璜)에게도 함추의 처분이 내렸다. 《正祖實錄 16年 10月 24日, 11月 3日ㆍ8日》
[주D-019]성사집(成士執) : 사집은 성대중(成大中 : 1732~1809)의 자이다. 성대중은 호가 청성(靑城),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에 오래 재직했으며 어명으로 문신들이 지어 올린 응제(應製)에서도 자주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 16년 12월 정조는 성대중이 공령부체(功令賦體)로 지어 올린 글을 칭찬하면서 서얼 출신임에도 특별히 북청 부사에 임명하고 규장각에서 그의 송별연을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6年 12月 18日》 《硏經齋全集 卷10 先府君行狀》 이와 같이 성대중은 정조의 보수적인 문예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출세한 인물로, 연암과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 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주D-020]낙서(洛瑞) 영공(令公) : 낙서는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자이다. 이서구는 호가 척재(惕齋)ㆍ강산(薑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조선 후기 한시(漢詩) 4대가로 불린다. 승지를 영공(令公)이라고도 부른다.
[주D-021]검서(檢書) :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담당하는 규장각의 5~7 품 벼슬로 주로 서얼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당시 성대중을 위한 규장각의 송별연에는 승지 이서구, 규장각 직각 남공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검서로 이덕무와 유득공이 참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1 年譜 壬子 12月》
[주D-022]난파(鑾坡)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규장각을 가리킨다.
[주D-023]집사(執事) : 편지에서 상대방을 가리킬 때 쓰는 경칭이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다.
[주D-024]남행(南行) 문임(文任) : 남행은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거나 자신의 높은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오르는 벼슬, 즉 음직(蔭職)을 이른다. 문임은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종 2 품 벼슬인 제학(提學)을 이른다.
[주D-001]글방의 버려진 책 : 원문은 ‘兎園之遺冊’이다. 원래 글방에서 아동들에게 가르치던 교재 따위를 토원책(兎園冊)이라 하는데, 자신의 저술을 겸손하게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는 연암이 자신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가리켜 한 말이다.
[주D-002]위로 …… 줄 : 원문은 ‘上汚龍墀之淸塵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上汚’가 ‘誤玷’으로 되어 있다.
[주D-003]임금의 …… 처형을 : 원문은 ‘以兩觀熒惑之誅’인데, 양관(兩觀)은 원래 궁궐 정문의 좌우에 있는 망루(望樓)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궁궐이란 뜻도 가지게 되었다. 공자는 노(魯) 나라의 재상 직무를 대행하게 되자 난신(亂臣)인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노 나라 궁궐의 양관 아래에서 처형했다고 하여 ‘양관지주(兩觀之誅)’란 성어(成語)가 생겼다. 또한 노 나라 임금과 제(齊) 나라 임금이 회합한 자리에서 제 나라 측이 광대와 난쟁이의 유희를 공연하자 공자는 필부로서 임금의 총명을 현혹케 한 죄를 물어 그자들을 처형하도록 했다고 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주D-004]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 원문은 ‘鳴國家之盛’인데, 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글에서 한유는 맹교(孟郊)와 같은 그의 벗들을 뛰어난 작가라는 뜻의 ‘선명자(善鳴者)’라고 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노래하지 말고 크게 발탁되어 국가의 융성을 노래할 날이 오기를 염원하였다.
[주D-005]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 원문은 ‘以文爲戱’인데, 궁귀(窮鬼)와의 가상적인 문답을 통해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 같은 작품이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은’ 글로 비난을 받았다.
[주D-006]화로(畵蘆)ㆍ조충(雕蟲) : 화로는 호로(葫蘆 표주박)를 그대로 따라 그린다는 말로 참신함이 없이 단순하게 남을 모방하는 것을 말하며, 조충은 벌레 모양의 글자〔蟲書〕를 새기듯이 자구(字句)를 수식하여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주D-007]남까지 그르쳤으며 : 원문은 ‘人誤’로 되어 있으나, 《과정록》과 김택영(金澤榮)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誤人’으로 되어 있다.
[주D-008]부부(覆瓿)ㆍ호롱(糊籠) : 부부는 항아리를 덮는다는 뜻이고 호롱은 종이로 농을 바른다는 뜻으로, 항아리 덮개로 삼거나 농이나 바르기에 족한 시원치 않은 글을 가리킨다.
[주D-009]패관소품(稗官小品) : 명(明) 나라 말 청(淸) 나라 초에 크게 유행했던 패관소설(稗官小說)과 소품산문(小品散文)을 가리킨다.
[주D-010]후생들이 …… 탄식하고 : 원문은 ‘嗟小子之不肯構’인데, 《서경》 대고(大誥)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이룩한 왕업을 계승하는 일을 집 짓는 데 비유하여,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확립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집터를 닦으려 하지 않으니 하물며 기꺼이 집을 얽어 만들겠는가?〔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고 하였다.
[주D-011]벌레 …… 소리 : 자질구레한 소재를 다룬 소품산문을 풍자하여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주D-012]나나 …… 하겠소 : 남공철도 패관소품을 즐겨 읽고 그 영향을 받았다. 1792년 음력 10월 그는 초계문신으로서 지어 올린 책문(策文) 중에 패관소품의 문체를 구사했다는 정조의 견책을 받고 지제교(知製敎) 직함을 박탈당했으며, 어명으로 규장각으로부터 죄를 추궁하는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서를 지어 올려야 했다. 《正祖實錄 16年 10月 19日ㆍ24日ㆍ25日》
[주D-013]상곡(桑穀) : 뽕나무와 꾸지나무를 말한다. 은(殷) 나라 태무(太戊) 때 상과 곡이 조정 뜰에 솟아나 하루 만에 한 아름이나 자랐다. 그것을 본 태무가 두려워서 이척(伊陟)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이척의 말이 “요얼(妖蘖)은 덕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임금의 정치에 결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니 임금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다. 태무가 그 말에 따라 덕을 닦자 상과 곡이 말라 죽었다고 한다. 《史記 卷3 殷本紀》
[주D-014]청아(菁莪) :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출처를 둔 말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정조가 인재를 발탁ㆍ기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운산만첩당집》에는 ‘膏燭’으로 되어 있다.
[주D-015]지난날의 …… 것을 : 원문은 ‘黥刖之補’인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형벌을 받아 훼손된 몸을 온전하게 회복한다는 뜻으로, 개과천선과 같은 말이다. 식경보의(息黥補劓)란 성어가 있다. 또한 원문의 ‘상유지수(桑楡之收)’는 ‘아침에 잃은 물건을 저녁에 되찾는다(失之東隅 收之桑楡)’는 속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처음의 실수를 나중에 만회한다는 뜻이다.
[주D-016]어찌 …… 않으리오 : 《운산만첩당집》에는 그다음에 “차츰 순수하고 바르게 되고자 했으나 그래도 《맹자》에 나오는 풍부(馮婦)처럼 예전 솜씨를 다시 발휘하려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어찌 《장자》에서 말한 ‘제 그림자를 피하려 하면서 해를 향해 달려가는 자’가 아니겠는가?〔稍欲醇正 而猶不脫攘臂下車習氣 無乃畏影而走日中者耶〕”라는 평어가 있어 글을 감상하는 데 참고가 된다.!
[주D-017]기하생(記下生) : ‘기억해 주시는 아랫사람’이란 뜻으로, 편지에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다.
[주D-018]치교(穉敎) …… 하였습니다 : 치교는 심상규(沈象奎 : 1766~1838)의 자이다. 함추(緘推)는 함사추고(緘辭推考)의 준말로 6품 이상의 관원이 경미한 죄를 범한 경우 서면(書面)으로 죄를 추궁하고 서면으로 진술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심상규는 정조로부터 그의 이름과 자를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792년 음력 11월 규장각 대교로서 함추를 받아 지어 올린 함답(緘答)이 구두(句讀)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고 그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주해(註解)를 달아 올리라는 엄명을 받았다. 당시 심상규뿐만 아니라 패관소설을 즐겨 본 전과가 있던 김조순(金祖淳)과 이상황(李相璜)에게도 함추의 처분이 내렸다. 《正祖實錄 16年 10月 24日, 11月 3日ㆍ8日》
[주D-019]성사집(成士執) : 사집은 성대중(成大中 : 1732~1809)의 자이다. 성대중은 호가 청성(靑城),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에 오래 재직했으며 어명으로 문신들이 지어 올린 응제(應製)에서도 자주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 16년 12월 정조는 성대중이 공령부체(功令賦體)로 지어 올린 글을 칭찬하면서 서얼 출신임에도 특별히 북청 부사에 임명하고 규장각에서 그의 송별연을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6年 12月 18日》 《硏經齋全集 卷10 先府君行狀》 이와 같이 성대중은 정조의 보수적인 문예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출세한 인물로, 연암과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 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주D-020]낙서(洛瑞) 영공(令公) : 낙서는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자이다. 이서구는 호가 척재(惕齋)ㆍ강산(薑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조선 후기 한시(漢詩) 4대가로 불린다. 승지를 영공(令公)이라고도 부른다.
[주D-021]검서(檢書) :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담당하는 규장각의 5~7 품 벼슬로 주로 서얼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당시 성대중을 위한 규장각의 송별연에는 승지 이서구, 규장각 직각 남공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검서로 이덕무와 유득공이 참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1 年譜 壬子 12月》
[주D-022]난파(鑾坡)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규장각을 가리킨다.
[주D-023]집사(執事) : 편지에서 상대방을 가리킬 때 쓰는 경칭이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다.
[주D-024]남행(南行) 문임(文任) : 남행은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거나 자신의 높은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오르는 벼슬, 즉 음직(蔭職)을 이른다. 문임은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종 2 품 벼슬인 제학(提學)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