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족형(族兄)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19. 12:51

족형(族兄)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새봄에 도(道)를 닦으시며 조촐하게 보중(保重)하신다는 소식 받잡고 흐뭇함과 동시에 하례를 드립니다. 족제(族弟)는 5년 동안 벼슬살이에 지친 가운데 육순이 문득 다가오니, 귀가 순해져야 할 터인데 오히려 점점 막혀 가고 나이는 비록 더해 가나 더욱 쇠퇴해만 갑니다. 사람이 60년을 사는 것도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마는, 도(道)를 들은 것이 거의 없으니 이것이 한탄스럽고 슬픕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에 축관(祝官)을 썼다.’는 일은 아마도 아뢴 사람이 잘못 말한 것일 터입니다.
제전(祭田)을 되돌려 받은 것이 계축년(1793) 겨울이고, 그 이듬해인 갑인년에 종중(宗中)으로부터 비로소 의논이 정해져서, 본군(本郡 합천군)의 질청(秩廳)에 맡겨 해마다 한식(寒食)에 한 번 묘제(墓祭)를 지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해엔 한식이 이미 지나서 새로 의논하였던 것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호장(戶長)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말할 거리조차 안 됩니다. 또 다음 해인 을묘년에는 제가 한식날 관아에서 제물을 마련하고 삼가 십여 구의 제문을 지어 몸소 제사를 지냄으로써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폈으니, 호장을 쓸데없이 축관으로 덧붙일 까닭이 없었음은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본군의 공형(公兄)이 비로소 제전을 받으러 왔기 때문에 그와 함께 제전 이름과 면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진설(陳設)의 도식(圖式)을 참작하여 정해 주었으니, 대개 다음 해 한식부터 도식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할 작정이었습니다.
지난해의 다음 해는 바로 금년 병진년(1796)이라 호장의 행사는 의당 금년부터 비롯될 터인데, 한식이 다가오지 않아 제사는 아직 멀었으니, 보내신 편지 가운데 ‘축관으로 호장의 이름을 썼다’는 것은 과연 누가 보고 누가 전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축관을 쓰는 것이 타당하냐 부당하냐는 고사하고, 3년 동안에 호장이 본시 한 번도 제사를 지낸 적이 없었으니 아무리 축관을 쓰고 싶은들 어디다 썼겠습니까?
사실이 이처럼 판별하기 쉽고 전하는 말이 저토록 근거가 없는데도, 보내신 편지에 널리 예설(禮說)을 인용하여 분명하게 가르침과 꾸지람을 주시고, ‘누가 이런 의논을 주장했으며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가?’ 하고 힐책을 내리셨습니다. 대저 이치에 통달하고 판별에 밝으신 우리 형님께서도 오히려 이러한 의심을 가지셨다면, 뭇사람들이 듣고 놀라 의심할 때 어느 누가 깨우쳐 주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모르는 결에 가슴이 서늘합니다.
무릇 선영을 받드는 일에 관해서는 설사 구구한 한 가지 소견이 있어 예(禮)에 합당하다고 자신할지라도, 오히려 부형이나 일족들이 내가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어렵게 여기고 조심하고 두루 물어서 감히 선뜻 독단하지 못함은 진실로 경우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중론이란 통일시키기 어려운 데다가 사람마다 제각기 정성과 공경을 바침이 나와 똑같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함부로 근거 없는 일을 만들어 경솔히 혼자 시행하여 스스로 일족에게 죄를 짓고 식자에게 기롱을 받겠습니까? 사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 산소 아래 사는 여러 윤씨(尹氏)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유독 원망과 노여움을 산 것은 대개 또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후(李侯)가 제전을 되돌려 받기로 든 것은 과연 여러 윤씨들이 사실을 알려 줌으로 인해 나온 것인데, 이것을 서울에 있는 여러 박씨들과 멀리서 의논하기는 어렵고 안의와 합천은 거리가 백 리도 못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이후가 전후로 서신을 왕복하여 매양 저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때문에 여러 윤씨들은 마치 제가 이 토지를 주장하여 주고 빼앗는 것이 제 손에 달린 줄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해 묘제를 올릴 때 여러 윤씨들로서 척분(戚分)을 일컫는 자 5, 6명이 번갈아 와서 만나 보니 대개는 모두가 토지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제전이 온데간데 없어진 지 여러 해인데 그것이 아무 곳에 숨어 있음을 적발해 낸 것은 우리들이었고, 그 본래 가격이 얼마인지 알아서 본래 가격을 물고 되돌려 받은 것도 우리들이었고, 서원의 선비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관에 소지(所志)를 올려 가로채려는 것을 우리 사또에게 힘껏 부탁하여 영원히 빼앗길 염려가 없도록 만든 것도 바로 우리들이었으니, 사리로 보아 마땅히 우리들에게 넘겨 도지(賭地)를 나누어 맡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저 질청은 일찍이 아무 애도 쓴 일이 없는데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앉아서 받고 있으니 우리들의 심정이 어찌 허탈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비록 순박하고 촌스럽지만 오히려 속셈을 내보였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의 공적은 많다 하겠지만, 이번에 질청에 제전을 맡긴 것은 바로 우리 종중의 중론이요 문중 제일 어른의 명령이외다. 내가 이웃 고을에 있기 때문에 나를 시켜 거행하게 한 것이니 나는 오직 받들어 시행할 뿐이오. 어찌 감히 중간에서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일이겠소!”
밤에 손님 한 사람이 혼자 왔는데 언사와 태도가 제 딴에는 자못 의젓스러웠습니다. 그는 깊이 탄식하며 한참 있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묘소인데 호장이 제사를 지내다니 혹시 고례(古禮)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저는 웃으면서,
“그대는 진실로 고례를 아시오? 옛날엔 묘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미 천묘(遷廟)한 묘이겠소? 진실로 세대가 점점 멀어지면 묘역을 잃을까 두려워서, 옛날에 두었던 토지와 집을 묘지기하는 노속에게 맡기기도 하고 산 아래 사는 그 고장 선비에게 부탁하기도 하여 한 해에 한 번 제사 지내는 것은, 멀리서나마 그 상로지감(霜露之感)을 붙일 뿐만이 아니라 아무 집안의 선산임을 알려 주자는 까닭이지요. 세족(世族)이 토지를 질청에 맡기는 것은 그 의의가 대체로 같소. 노속의 성쇠와 존망은 일정하지 않고, 그 고장 선비나 군의 아전들도 제 족속이 아님은 마찬가지요. 그러나 질청이란 고을이 있는 날까지는 같이 있게 되어 백대를 가도 제사를 폐지하지 않을 수 있고 토지가 도중(都衆)에게 들어가면 한 사람이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이미 토지를 맡겼으면 토지를 받은 자가 제사 지내는 것일 뿐이외다. 어찌 꼭 예(禮)의 고금(古今)과 사람의 귀천을 따지겠소.”
하였더니, 그 사람이 겉으로는 그럴 듯이 수긍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듣자니 도리어 서원의 선비들과 합세하여 본군의 신임 사또에게 부탁해서 그 토지를 옮겨서 서원에 귀속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했는데 본 사또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괴이한 언설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촌구석의 고루한 소견으로 제사에는 반드시 축관이 있는 줄만 알았지 호장은 절대 축관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이며, 그자가 배척한 것은 호장의 직품이 낮다는 것이지, 축관을 쓰는 것이 예(禮)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거기에 축관이 있으려니 멋대로 생각하고 서슴없이 이런 언설을 퍼뜨린 것입니다.
아! 묘에다 제사함도 오히려 슬기롭지 못하다는 기롱이 있을 수 있는데, 이미 마지못할 경우라면 그 고장 선비나 군의 아전 중에서 손을 빌려 향기로운 제물을 진설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어찌 제 족속이 아닌 사람이 축문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먼 곳이라 풍문의 와전됨이 대개 이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후에도 괴이한 언설이 이러쿵저러쿵 일어날 터이니, 바라옵건대 저의 이 편지를 일족에게 돌려 보이시어 뭇 의혹을 깨뜨려 주심이 어떠하신지요?

 

 

伏承新春。道軆起居淸重。慰慰賀賀。族弟五載倦遊。六旬奄届。耳宜順而漸塞。齒雖添而加頹。人生一周甲。豈易得哉。第其朝聞無幾。用是嗟悼。來敎華陽先墓用祝事。此殆以告者過也。祭田之畢贖在於癸丑冬間。其明年甲寅。自宗中始爲定議。付諸本郡秩廳。每歲寒食。俾行一祭。252_036a當年則冷節已過。新議未行。戶長行祭。非所可論。又明年乙卯。弟以寒食日。官廚備物。謹作文十數句。躳行一祭。以展追遠之慕。戶長之無庸贅祝。從可知矣。其時本郡公兄。始爲受田而來。故與之詳錄田號卜數。參定陳設圖式。葢將自明年寒食。始令依式擧行也。去年之明年。卽今歲丙辰也。戶長行事。當自今年始。而冷節未届。享事尙遠。來書中祝用戶長名者。果未知孰見而孰傳之也。用祝當否。姑舍是。三年之間。戶長固未嘗一番行祀。雖欲用祝。安所施乎。事實之易辨如此。傳說之無根若彼。而來書廣引禮說。明垂誨責。俯詰其誰爲此論而誰作此事。夫以吾兄之達理明辨。猶有此疑。則衆聽之駭惑。當誰曉之。思之及此。不覺心寒。凡係奉先之事。設有區區一得。自信合禮。尙懼父兄宗族不我足也。難愼周咨。未敢專輒。固其義然也。又况衆論難齊。而人各自效其誠謹。與我無不同乎。如之何妄作無稽。率爾獨行。以自速辜於宗黨。取譏252_036b於君子哉。求之事情。殆不近理。此無乃墓下諸尹之所譸張耶。弟之獨取怨怒。葢亦有由。當初李矦之謀贖祭田。果出於諸尹之陳告。而非可遠議于在京之諸朴。陜川之於安義。不過數舍之近。則李矦之前後往復。每屬此身。故乃諸尹。則意吾主張此田。與奪在手。弟之昨年祭墓也。諸尹稱戚者五六輩。迭相來見。大抵皆田事也。以爲祭田之年久。淪沒而摘發。其伏在某處者。吾輩也。知其本價之爲幾許。而得以本價贖出者。卽吾輩也。院儒群起。呈官橫執。而力囑本倅。永無見奪之患。卽吾輩也。事當見付吾輩。分掌賭地。彼秩廳者。旣無曾前效勞。而坐受漁人之功。在吾輩之心。寧不落莫哉。言雖樸鄙。猶見情實。弟應之曰。君輩勞績則多矣。今此付田秩廳。乃吾宗之僉議。而門長之所命也。吾在鄰邑。故俾吾擧行。則吾惟奉而行之而已。豈敢從中擅便而撓改之乎。夜有一客獨來。言辭視瞻。頗自修飾。長歎良久曰。夫惟先生之墓也。而戶長之252_036c祭也。抑或古禮有之否。弟笑應曰。君誠能知古禮乎。古不祭墓。况旣祧之墓乎。誠以世代浸遠。而懼失墓兆。則因其舊置之田廬。或付守直之奴屬。或托山下之鄕士。歲一以祭。非但遙寄其霜露之感。所以要識其某家之先隴也。世族之付田秩廳。其義大同。奴屬之盛衰存亡不恒。而鄕士與郡吏。其非族則一也。然而秩廳者。郡在與在。則將百世而不替香火。田入都衆。則非一人之所可遷動。旣付其田。則受田者祭之而已。何必論禮之古今人之尊卑乎。客貌應而去。其後聞之。反與院儒合勢。圖囑本郡新倅。以爲移屬書院之計。而本倅不爲之聽施云。其他恠說。不一而足。鄕曲固陋之見。徒知祭者之必有祝。而不識戶長之必可以無祝。其所斥者。戶長之品卑。而未必謂用祝之非禮。直是妄意。其有祝而遽播此說也。噫。墓而祭也。尙或有不智之譏。旣不得已焉。鄕士郡吏之間。倩陳其芬苾則有之。焉有非族而可以祝告之乎。遠地傳聞之譌252_036d謬。類多如此。此後恠說。又將不勝其紛紜。幸望以弟此書。輪示諸宗。以破群惑如何。


 

부(附) 원서(原書)

 

새봄에 정사를 돌보느라 어떻게 지내시는지 몹시 궁금하외다. 족종(族從)은 늙고 병들어 나날이 정신이 혼미해 가니 서글프고 한탄스러우나 어쩌겠소.
듣자니 선조 야천(冶川 박소(朴紹)) 선생의 묘제에 축관으로 호장의 이름을 썼다 하니 놀랍고 괴이함을 이기지 못하겠소. 만약 잘못 전해진 말이 아니라면 이는 실로 예에 어긋나도 너무나 크게 어긋난 것이오. 누가 이 의논을 주장했으며 누가 이 일을 꾸몄는가 모르겠소.
예서(禮書)에 비록 ‘총인이 시가 된다.〔冢人爲尸〕’는 글귀가 있으나 호장은 총인이 아니고, 예법에 본래 ‘빈객이 제사를 돕는다.〔賓客助祭〕’는 규정이 있으나 주사자(主祀者)는 조제자(助祭者)가 아니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근거가 없는데 그래도 행한다면 이상한 게 아니겠소.
전(傳)에 ‘신(神)은 제 족속이 아니면 그 제사에 흠향하지 않는다.〔神非族類 不歆其祀〕’ 했는데, 합천의 호장은 우리 선조에 대해 같은 족속이 아니오. 무릇 우리 선조께서는 평소에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非禮勿動〕’ 마음을 가지셨는데, 그 밝으신 혼령이 어찌 족속 아닌 사람이 올리는 제사를 즐겨 와서 받으시겠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모르는 결에 마음이 아프고 쓰리오.
무릇 세일제(歲一祭 시제(時祭))란 곧 친진(親盡)한 뒤에 자손이 먼 조상을 추모하는 무궁한 생각을 펴는 것이며, 대수(代數)를 제한하지 않는 것은 대개 묘가 사당과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당이 이미 헐렸기 때문에 모든 지손(支孫)들이 다 제사 지낼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예(禮)이외다.
일찍이 보니 양주(楊州) 홍 부인(洪夫人)의 묘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자손 한 사람을 정해 보내어 제사하게 하는데, 선생의 묘에는 유독 그리 못 하는 것은 그 길이 천 리나 멀기 때문이지요. 뭇 자손이 돌아가며 가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 이상 할 수 없이 그 고장 사람이나 고을 아전을 시켜 제물을 진설하고 잔을 올리는 것을 묘지기가 집사(執事)하는 예(例)와 같이 하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겠거니와, 꼭 축문을 써서 ‘호장 아무개는 감히 밝게 아룁니다.〔戶長某敢昭告〕’ 운운한다면 너무도 같잖은 일이 아니겠소. 그 사람을 천히 여겨서가 아니라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럴 경우에는 축관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따름이오.
세일제에 삼헌(三獻)으로 하자는 것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주장이고, 단헌(單獻)으로 하자는 것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학설이오. 내 생각으로는 사계의 학설을 따라 단헌으로 하고 축관을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비록 삼헌으로 할 경우라도 축관을 없애는 것 또한 무방하다고 생각하오.
일찍이 듣자니 제전이 없어져 제사가 소홀히 되고 말았으나 좌하(座下 연암을 가리킴)가 영남의 원으로 나가면서 옛 전토를 찾아내어 본군의 질청에 맡겨 길이 제사를 잇는 계책을 세웠다기에 잘 처리했다고 자못 다행스레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 축문 한 구절이 이토록 잘못되어 도리어 향기로운 제사 의식에 누(累)가 되고 말았구려.
이는 필시 제전을 맡길 때에 미처 축관을 쓸지 여부를 의논하여 지시한 바가 없어서 고을 아전들이 제멋대로 이와 같이 했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혹시라도 고명(高明 연암을 가리킴)의 의견에서 나왔다면 아마도 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신 것 같소.
이미 예가 아닌 줄 알았으면 당장에 고쳐야 할 것이니, 금년 한식(寒食)부터는 축문을 쓰지 말라는 뜻을 자세히 밝혀 패(牌)를 만들어 제사를 부탁한 호장에게 훈계하고 단속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그래야만 제사 예법이 바르게 되고 인정과 도리상으로도 편안할 터이니 소홀히 말기를 신신 부탁하오.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일이 되고 보니 잠자코 있는 것은 경우가 아니라 부득불 여러 말을 하게 되었소. 깊이 양찰해 주기 바라오.

 

 

 原書附

春新。不審尊政履何似。懸溯懸溯。族從老且病。憒憒日甚。憐歎奈何。聞先祖冶川先生墓祀祝。用戶長名云。不勝驚恠。若非傳說之訛。則實是違禮之大者。未知誰爲此論而誰作此事耶。禮雖有冢人爲尸之文。而戶長非冢人也。禮固有賓客助祭之規。而主祀非助祭也。進退無所據。而且行之惑也。傳曰。神非其族類。不歆其祀。陜川戶長之於先祖。非族類也。夫以我先祖平日非禮不動之心。其於赫之精靈。豈肯來享於非族之祀乎。思之及此。不覺傷痛。夫歲一祭。卽親盡之後。子孫所以伸追遠無竆之思。而不限代數者。葢墓異於廟也。然宗已毁矣。故諸支孫皆得以祭焉。亦禮也。甞見楊州洪夫人墓。每歲春。252_037a定送子孫一人祭之。而於先生墓。獨不能然者。以其道遠千里故也。諸孫旣不得輪往行祭。則不得已使鄕人或邑吏。陳饌獻酌。如墓直執事之例。容或可也。必用祝文而曰。戶長某敢昭告云云。豈非不似之甚乎。非賤其人也。爲非族也。爲非禮也。到此惟當不用祝而已。歲一祭欲三獻者。愚伏之論也。欲單獻者。沙溪之說也。愚意從沙溪說。單獻無祝爲宜。而雖或三獻無祝。亦無妨矣。曾聞祭田亡失。香火苟簡。自座下出宰于嶺。推得舊田土。托付本郡作廳。以爲久遠之圖。頗以善區處爲幸。不謂其祝文一節。謬誤至此。反爲玷累於芬苾之儀也。此必是付祭田時。未及議到於用祝與否有所指揮。而郡吏輩擅自爲之如此。不然而或出於高明之意。則恐未之深思也。旣知其非禮。釐改不容小緩。自今年寒食爲始。勿用祝文之意。詳明作牌。戒飭於所托戶長處。如何如何。夫然後祭禮正而情理安矣。不可忽。不可252_037b忽。事關享先。義難泯默。不得不覼縷言之。幸願深加諒察焉。


 


 

[주C-001]족형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 박윤원(朴胤源 : 1734~1799)은 호가 근재(近齋)로 성리학자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인(門人)이다. 딸이 정조의 후궁이 되어 세자를 낳음으로써 후일 순조(純祖)의 외조부가 된 박준원(朴準源)은 그의 아우이다. 박윤원은 연암에게는 일족에 속하는 형님뻘이 된다. 박윤원의 사후 그의 문집을 간행하려 할 때 연암은 박준원에게 박윤원이 보낸 원서(原書)뿐 아니라 그에 답한 자신의 이 편지도 함께 수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燕巖集 卷10 與族弟準源書》 박윤원의 원서는 《근재집(近齋集)》 권18에 ‘여족제미중지원(與族弟美仲趾源)’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연암이 보낸 이 편지를 받고 난 뒤 오해를 푼 박윤원이 연암에게 보낸 사과 편지도 ‘여미중(與美仲)’이란 제하에 수록되어 있다.
[주D-001]귀가 순해져야 :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가,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스스로 섰고, 40세에 사물의 이치에 의혹됨이 없었고,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60세에 귀가 순해졌고, 70세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귀가 순해졌다는 것은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으며, 그 말의 미묘한 뜻까지 곧바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주D-002]도(道)를 …… 없으니 : 원문은 ‘其朝聞無幾’인데,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3]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 : 박소(朴紹)의 묘를 가리킨다. 《연암집》 권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주D-004]질청(秩廳) : 고을의 아전들이 직무를 보는 곳을 이른다.
[주D-005]호장(戶長) : 고을 아전의 우두머리를 이른다.
[주D-006]공형(公兄) : 삼공형(三公兄)이라고도 하며 호장(戶長), 이방(吏房), 수형리(首刑吏)를 이른다.
[주D-007]여러 윤씨(尹氏)들 : 박소의 외가인 파평(坡平) 윤씨들이 합천에서 대성(大姓)을 이루고 대대로 살았다. 박소가 합천에서 은둔하다 서거했을 때 윤씨 가문에서 화양동의 묏자리를 제공하였다. 《연암집》 권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주D-008]이후(李侯) : 합천 군수 이희일(李羲逸)을 가리킨다.
[주D-009]서원 : 화암서원(華巖書院)을 가리킨다.
[주D-010]도지(賭地) : 농사짓는 땅을 남에게 빌리면 그 대가로 해마다 일정한 수확을 바쳐야 하는데, 그러한 땅을 도지라고 한다. 그 대가로 바치는 수확을 도지 또는 도조(賭租)라고도 한다.
[주D-011]천묘(遷廟) : 가묘(家廟)에서 신주를 모시는 대수(代數)가 지나면 더 이상 합사(合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D-012]상로지감(霜露之感) :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서글피 사모함을 이른다.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 제사 때에 “서리나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주D-013]도중(都衆) : 어떤 집단이나 그 성원 전체를 가리키는 ‘도중(都中)’이란 한국식 한자어를 조금 달리 표기한 듯하다. 여기서는 아전 집단을 가리킨다.
[주D-014]족종(族從) : 편지에서 일족(一族)에 속하는 먼 촌수의 친척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박윤원 자신을 가리킨다.
[주D-015]총인(冢人)이 시(尸)가 된다 : 총인은 주(周) 나라의 관명으로 왕실의 묘가 있는 지역을 관장하는 관리를 이른다. 시는 ‘신주(神主)’라는 뜻으로 죽은 이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사람을 이른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총인(冢人)에 “무릇 묘제에 시가 된다.〔凡祭墓爲尸〕”고 하였다.
[주D-016]전(傳)에 …… 했는데 : 전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구절은 희공(僖公) 31년 조에 나온다.
[주D-017]예가 …… 않는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주D-018]친진(親盡) :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대,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주D-019]양주(楊州) 홍 부인(洪夫人)의 묘 : 박소의 부인 홍씨는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지낸 홍사부(洪士俯)의 딸로서 박소보다 44년 뒤에 85세의 나이로 졸했으며, 그 묘가 양주의 풍양현(豐壤縣)에 있었다. 《思菴集 卷4 冶川朴公神道碑銘》
[주D-020]삼헌(三獻) : 제사에서 초헌(初獻)ㆍ아헌(亞獻)ㆍ종헌(終獻) 이렇게 세 번 술을 부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한 번만 술을 부어 올리면 단헌(單獻)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