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25. 10:12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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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에 중존(仲存 이재성)이 편지 한 통을 손수 가지고 와 전해 주었고, 이어 또 성위(聖緯)가 와서 머물고 오일(五一)도 와서 합류하였지요. 쌍지(雙池)에 물은 맑고 언배와 붉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뜰에 가득하며, 더구나 또 동산에 가득한 고종시(高種柹)는 월중홍(越中紅)에 못지않은데, 운사(雲社)에서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절반이 송원(松園)에 대한 말이었지요. 이때에 비록 한 글자의 답서도 올리지 못했지만, 그대의 두 귀가 몹시 가려웠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소이다.
그 뒤 중존은 세밑이 임박해서 떠나고, 성위도 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말을 달려 돌아가 버리니, 비로소 이 몸이 갑자기 대령(大嶺 새재) 남쪽800리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삼복더위가 요새 들어 더욱 심한데, 신령의 가호로 벼슬살이를 탈 없이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대의 사촌 형님 시가(時可)씨가 문득 고인이 되었다니 애통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원례(元禮)의 부고가 또 이르렀군요.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의 20대 친구로서 기개는 산악을 무너뜨릴 만하고 언변은 황하나 한수(漢水)의 둑을 무너뜨릴 만하여 천지간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를 몰랐지요. 신선술을 배울 수도 있고, 장수가 될 수도 있고, 문장과 공훈을 머지않아 성취할 수 있었을 터인데, 40년 세월을 통틀어 결산해 보면 그저 분주하게 평범한 벼슬아치 노릇을 하면서, 겨우 건물 약간을 세운 데 불과했습니다. 인생 백년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으니 가슴속에 애착을 둘 것은 아니지만, 매양 한번 생각하면 아쉬움으로 마음에 걸릴 뿐이외다.
오늘날의 수령된 자들은 읍황(邑貺)이 후하고 박한 것으로 좋고 나쁜 기준을 삼을 뿐, 산수의 승경(勝景)으로 좋고 나쁜 기준을 삼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이른바 후하고 박하다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킨답니까? 저는 고을살이한 지가 벌써 3년이지만, 날마다 책상 머리에서 읍총(邑摠)을 뒤져 보아도 - 원문 빠짐 - 도무지 먹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답니다.
하루는 저의 아들더러 이르기를,
“너는 예서(禮書)를 읽었느냐? 한 조각 고기가 비뚤게 잘린 것을 먹는다고 입과 배에 무엇이 해로우며, 잠시 쉴 때 한쪽으로 기댄다고 엉덩이와 다리에 무엇이 나쁘겠느냐마는, 성인은 임신했을 때에 대해 간곡히 훈계하시기를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말고, 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앉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양생(養生)하는 데 바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했지요.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합(蓋)에서 받는 만종(萬鍾)의 녹봉도 반드시 꽥꽥거리는 거위처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고, 낙읍(洛邑)의 구정(九鼎)도 어찌 백이(伯夷)로 하여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리게 만든 시골 사람의 갓처럼 바르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지금의 이른바 양반이란 옛날의 이른바 대부와 사(士)요, 지금 이른바 ‘좋은 태수’란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이니, 그가 먹고 입는 것에 명색이 부정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겠소이까? 백이와 오릉중자(於陵仲子)로 하여금 태수로서 처신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여길 뿐이겠소.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이외다. 하지만 까마귀는 온갖 새가 다 검은 줄로만 믿고, 개구리는 온갖 벌레가 다 같은 소리를 내는 줄로만 의심하는 법이오.그런데 지금 형은 벼슬길에 나섰소.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좋은 태수’가 되고 싶어서이고, 좋은 태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장차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오. 모르겠소만 그대가 스스로 처신하는 바는 백이도 아니고 도척(盜跖)도 아닌, 옳고 그름의 중간쯤인가요?
그렇다면 소 잡는 칼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는 이 안의현만 한 데가 없을 거외다.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는 산음(山陰)과 흡사하고,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는 것은 난정(蘭亭)에 못지않으며, 지금 한창 죽순이 껍질을 벗고 은어가 그물에 들고 있으니, 비록 백이로 하여금 현감이 되게 하더라도 응당 기뻐하며 배를 한번 불릴 거외다. 깊이 바라건대 그대는 꼭 돈 많이 생기는 ‘좋은 태수’를 바라지 말고, 앉아서 이 옛 친구와 임무 교대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술이 약간 취했길래 남을 시켜 적었소이다. 우선 이만 줄입니다.
去秋仲存袖傳一書。繼又聖緯來留。五一亦來會。雙池水淸。氷梨火棗。磊落盈庭。况復滿園高種柹。不减越中紅雲社。日夜娓娓者。半是松園。
是時。雖未奉謝一字。足想足下兩耳癢癢。伊後。仲存逼歲起去。聖緯亦趁春科。一鞭馳還。始覺此身忽在嶺南八百里外。寧不慨然哉。庚炎比酷。仕履起居神相。令從兄時可氏。奄作故人。痛矣如何。元禮之訃。又至矣。此兩人者。皆吾弱冠友也。氣可以崩山岳。辯可以决河漢。不知天地間。有甚難事。可以學神仙。可以做將帥。文章功業。指日可建。四十年都會計。不過怱怱做俗吏。纔樹若干屋子。人生百歲間。忽如遠行客。非可黏滯於胸中。每一念至。悵然耿結耳。今之爲守令者。以邑貺厚薄。爲好否。未聞以山水勝槪爲好否也。所謂厚薄指得何物。弟之居官已三載。日閱案頭之邑摠 缺。都不見可食之物。一日謂家兒曰。汝讀禮乎。片肉之仄切。何害於口腹。小憩之偏倚。何妨於尻股。聖人丁寧垂訓於在姙之時曰。割不正不食。席不正不坐。是自胞胎養生。莫不正也。推是類也。葢祿萬鍾。未必非鶂鶂之鵝。洛邑九鼎。豈不是望望之冠乎。今
之所謂兩班。古之所謂大夫士。今之所謂好太守。古之所謂盜臣。其所喫著。能有不名色不正者乎。使伯夷於陵處之。奚但如坐塗炭。必將出而哇之矣。然而烏信百鳥皆黑。蛙疑萬蟲同聲。今吾兄出而仕矣。出而仕者。將欲爲好太守也。欲爲好太守者。將以多喫也。未知足下所自處。不夷不跖可否之間乎。然則牛刀一試。莫如此縣。茂林脩竹。酷似山陰流觴曲水。不讓蘭亭。今方龍籜解䙀。銀唇入網。雖使伯夷爲監。還應欣然一飽矣。深願足下不必希多錢之好太守。坐待老友之交承如何。少醉倩筆。姑此不宣。
[주C-001]김계근(金季謹) : 계근은 김이도(金履度 : 1750~1813)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송원(松園)이며,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으로, 그의 형 김이소(金履素)와 함께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1800년(정조 24)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경기도 관찰사, 예조 판서, 형조 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주D-001]성위(聖緯) : 이희경(李喜經 : 1745~?)의 자이다. 그의 부친 이소(李熽)는 서자로, 생원(生員) 급제하였다. 이희경은 아우 이희명(李喜明)과 함께 연암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중국을 다섯 차례나 다녀왔다. 그가 남긴 《설수외사(雪岫外史)》는 박제가의 《북학의》에 비견될 만한 저술이다.
[주D-002]오일(五一) : 윤인태(尹仁泰)의 자이다. 윤인태는 연암의 문하생으로 전서(篆書)를 잘 썼다.
[주D-003]쌍지(雙池) : 연암은 안의 관아 서북쪽에 백척오동각(白尺梧桐閣)을 지으면서 북지(北池)를 만들었고, 그 남쪽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지으면서 남지(南池)를 만들었다고 한다. 《연암집》 권1 백척오동각기(百尺梧桐閣記), 공작관기(孔雀館記),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참조.
[주D-004]고종시(高種柹) : 알이 다소 작지만 껍질이 얇고 씨가 거의 없으며 당도가 월등히 높으면서 육질이 연한 감이다. 산청ㆍ함양ㆍ하동 등지에서 생산되는 지리산 곶감은 모두 이 고종시로 만들어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주D-005]월중홍(越中紅) : 홍시의 일종인데,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D-006]운사(雲社) : 연암이 이재성ㆍ이희경ㆍ윤인태 등과 함께 시주(詩酒)의 모임을 갖고 그 모임의 명칭을 ‘운사’라고 붙인 듯하다.
[주D-007]시가(時可) : 김이중(金履中 : 1736~1793)의 자이다. 그는 김조순(金祖純)의 부친으로, 1771년(영조 47) 36세로 뒤늦게 진사 급제 후 음직으로 중앙의 하위 관직과 지방관을 전전하여 용인 현령, 고양 군수, 평양 서윤, 과천 현감, 서흥 부사를 지냈다. 연암과는 소싯적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1793년 음력 9월 29일 사망하였다. 《楓皐集 卷12 先府君墓表》
[주D-008]원례(元禮) : 한문홍(韓文洪)의 자이다. 그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1736년에 태어났다. 1765년 진사 급제 이후, 벼슬은 1787년에서 1790년까지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재임하는 등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한 듯하다. 그의 몰년은 1792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로 미루어 보면 1794년이 아닌가 한다. 연암과는 젊은 시절에 같이 과거 공부를 했던 친구였다. 《연암집》 권3 ‘대은암에서 창수한 시의 서문〔大隱菴唱酬詩序〕’ 참조.
[주D-009]겨우 …… 불과했습니다 : 예컨대 한문홍은 1789년(정조 13) 음력 12월 마전 군수로서 경내에 있는 고려 태조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을 중건하였다. 그 부근 잠두봉(蠶頭峯)에 그가 지은 ‘중작숭의전(重作崇義殿)’이라는 칠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주D-010]인생 …… 같으니 : 원문은 ‘人生百歲間 忽如遠行客’인데, 《문선(文選)》의 고시(古詩) 19수 중 제 3 수에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살아가는 것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네.〔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1]읍황(邑貺) : 읍황(邑況)과 같은 말로, 고을의 판공비 명목으로 전세(田稅)에 부가하여 거둬들이던 쌀이나 돈을 가리킨다. ‘邑況’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2]읍총(邑摠) : 고을의 재정 현황을 적은 작은 책자이다. 《목민심서》 부임(赴任) 사조조(辭朝條)에, 읍총에는 녹봉으로 받는 쌀과 돈의 액수를 기록하고, 농간을 부려 잉여분을 사취하는 방법을 갖가지로 나열하고 있어, 수리(首吏)가 이를 바치면 신임 사또는 조목조목 캐 물어서 그 묘리와 방법을 알아내니, “이는 천하의 큰 수치이다.”라고 하였다.
[주D-013]자른 …… 말라 : 《논어》 향당(鄕黨)에서 공자는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드시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고 하였고,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姙)의 태교(胎敎)를 예찬하면서, “옛날에 부인이 자식을 임신하면 ……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고 하였다. 《열녀전》의 이 대목은 주자(朱子)가 찬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등 예서(禮書)에 전재(轉載)되어 있다.
[주D-014]합(蓋)에서 …… 없고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오릉중자(於陵仲子)의 고사에 출처를 둔 말이다. 오릉중자는 제(齊) 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蓋)에서 만종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 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주D-015]낙읍(洛邑)의 …… 아니겠소이까 : 낙읍은 주 나라의 수도이고, 구정(九鼎)은 우(禹) 임금 때 중국의 구주(九州)에서 바친 쇠로 만들었다는 귀중한 솥으로, 은 나라 상읍(商邑)에 있던 것을 주 나라 무왕(武王) 때 낙읍으로 옮겼다고 한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고 하였다.
[주D-016]도척(盜跖) : 고대 중국의 유명한 도적으로 많은 무리를 이끌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사기》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백이와 같은 선인(善人)과 대비되는 악인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었다.
[주D-017]소 잡는 칼 : 지방관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는 것을 뜻한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에서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焉用牛刀〕”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論語 陽貨》
[주D-018]무성한 …… 못지않으며 :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산음현(山陰縣)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한 일을 기록한 난정기(蘭亭記)에 “높은 산 험준한 고개와 무성한 숲 긴 대나무가 있다.〔有崇山峻嶺 茂林脩竹〕” 하고, “물을 끌어다가 술잔을 띄우는 곡수를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앉는다.〔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고 한 것을 끌어다 쓴 말이다.
[주D-001]성위(聖緯) : 이희경(李喜經 : 1745~?)의 자이다. 그의 부친 이소(李熽)는 서자로, 생원(生員) 급제하였다. 이희경은 아우 이희명(李喜明)과 함께 연암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중국을 다섯 차례나 다녀왔다. 그가 남긴 《설수외사(雪岫外史)》는 박제가의 《북학의》에 비견될 만한 저술이다.
[주D-002]오일(五一) : 윤인태(尹仁泰)의 자이다. 윤인태는 연암의 문하생으로 전서(篆書)를 잘 썼다.
[주D-003]쌍지(雙池) : 연암은 안의 관아 서북쪽에 백척오동각(白尺梧桐閣)을 지으면서 북지(北池)를 만들었고, 그 남쪽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지으면서 남지(南池)를 만들었다고 한다. 《연암집》 권1 백척오동각기(百尺梧桐閣記), 공작관기(孔雀館記),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참조.
[주D-004]고종시(高種柹) : 알이 다소 작지만 껍질이 얇고 씨가 거의 없으며 당도가 월등히 높으면서 육질이 연한 감이다. 산청ㆍ함양ㆍ하동 등지에서 생산되는 지리산 곶감은 모두 이 고종시로 만들어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주D-005]월중홍(越中紅) : 홍시의 일종인데,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D-006]운사(雲社) : 연암이 이재성ㆍ이희경ㆍ윤인태 등과 함께 시주(詩酒)의 모임을 갖고 그 모임의 명칭을 ‘운사’라고 붙인 듯하다.
[주D-007]시가(時可) : 김이중(金履中 : 1736~1793)의 자이다. 그는 김조순(金祖純)의 부친으로, 1771년(영조 47) 36세로 뒤늦게 진사 급제 후 음직으로 중앙의 하위 관직과 지방관을 전전하여 용인 현령, 고양 군수, 평양 서윤, 과천 현감, 서흥 부사를 지냈다. 연암과는 소싯적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1793년 음력 9월 29일 사망하였다. 《楓皐集 卷12 先府君墓表》
[주D-008]원례(元禮) : 한문홍(韓文洪)의 자이다. 그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1736년에 태어났다. 1765년 진사 급제 이후, 벼슬은 1787년에서 1790년까지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재임하는 등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한 듯하다. 그의 몰년은 1792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로 미루어 보면 1794년이 아닌가 한다. 연암과는 젊은 시절에 같이 과거 공부를 했던 친구였다. 《연암집》 권3 ‘대은암에서 창수한 시의 서문〔大隱菴唱酬詩序〕’ 참조.
[주D-009]겨우 …… 불과했습니다 : 예컨대 한문홍은 1789년(정조 13) 음력 12월 마전 군수로서 경내에 있는 고려 태조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을 중건하였다. 그 부근 잠두봉(蠶頭峯)에 그가 지은 ‘중작숭의전(重作崇義殿)’이라는 칠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주D-010]인생 …… 같으니 : 원문은 ‘人生百歲間 忽如遠行客’인데, 《문선(文選)》의 고시(古詩) 19수 중 제 3 수에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살아가는 것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네.〔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1]읍황(邑貺) : 읍황(邑況)과 같은 말로, 고을의 판공비 명목으로 전세(田稅)에 부가하여 거둬들이던 쌀이나 돈을 가리킨다. ‘邑況’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2]읍총(邑摠) : 고을의 재정 현황을 적은 작은 책자이다. 《목민심서》 부임(赴任) 사조조(辭朝條)에, 읍총에는 녹봉으로 받는 쌀과 돈의 액수를 기록하고, 농간을 부려 잉여분을 사취하는 방법을 갖가지로 나열하고 있어, 수리(首吏)가 이를 바치면 신임 사또는 조목조목 캐 물어서 그 묘리와 방법을 알아내니, “이는 천하의 큰 수치이다.”라고 하였다.
[주D-013]자른 …… 말라 : 《논어》 향당(鄕黨)에서 공자는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드시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고 하였고,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姙)의 태교(胎敎)를 예찬하면서, “옛날에 부인이 자식을 임신하면 ……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고 하였다. 《열녀전》의 이 대목은 주자(朱子)가 찬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등 예서(禮書)에 전재(轉載)되어 있다.
[주D-014]합(蓋)에서 …… 없고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오릉중자(於陵仲子)의 고사에 출처를 둔 말이다. 오릉중자는 제(齊) 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蓋)에서 만종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 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주D-015]낙읍(洛邑)의 …… 아니겠소이까 : 낙읍은 주 나라의 수도이고, 구정(九鼎)은 우(禹) 임금 때 중국의 구주(九州)에서 바친 쇠로 만들었다는 귀중한 솥으로, 은 나라 상읍(商邑)에 있던 것을 주 나라 무왕(武王) 때 낙읍으로 옮겼다고 한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고 하였다.
[주D-016]도척(盜跖) : 고대 중국의 유명한 도적으로 많은 무리를 이끌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사기》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백이와 같은 선인(善人)과 대비되는 악인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었다.
[주D-017]소 잡는 칼 : 지방관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는 것을 뜻한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에서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焉用牛刀〕”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論語 陽貨》
[주D-018]무성한 …… 못지않으며 :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산음현(山陰縣)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한 일을 기록한 난정기(蘭亭記)에 “높은 산 험준한 고개와 무성한 숲 긴 대나무가 있다.〔有崇山峻嶺 茂林脩竹〕” 하고, “물을 끌어다가 술잔을 띄우는 곡수를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앉는다.〔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고 한 것을 끌어다 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