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28. 10:59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옛날에 승려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총명하고 영특하고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한번이라도 임금이 그의 계행(戒行)을 존경하고 불전(佛典)에 마음을 두어 그에게 호(號)를 내리고 예를 달리하여 빈객으로 대우하고 스승으로 맞아들이는 일이 있으면 당시의 사대부들 역시 모두가 그와 함께 어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고행을 하며 숨어 지내고 조용히 있어도 도리어 부귀와 영화가 뒤따른다. 이것이 본디 불문(佛門)의 본분은 아니지만 불교를 권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와 문장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국조(國朝) 이래로 유교를 전적으로 숭상하여 사대부들이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 엄격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체득하는 선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이른바 이단의 학설마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그 황폐된 사찰에는 살고 있는 승려들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는 있으나, 모두 궁핍한 백성과 굶주린 종들로서 군역(軍役)을 도피하여 머리 깎고 검은 장삼을 입는 자들이라, 비록 이름은 승려라 하지만 어리석고 혼몽하여 눈으로는 글자 하나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불교를 금지하지 않아도 그 도(道)가 거의 사라질 지경이다.
나는 항상 명산(名山)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산의 태반을 둘러보았다. 일찍이 특이한 중을 만나 방외(方外)의 교유를 해 보고자 생각하였으나, 산수(山水)에 등림(登臨)할 적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해 쓸쓸히 배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친구인 신원발(申元發 신광온(申光蘊))ㆍ유사경(兪士京 유언호(兪彦鎬))과 어울려 백화암(白華菴)에서 함께 잔 적이 있었다. 그때 준(俊)이란 중이 깊은 밤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불등(佛燈)은 밝게 빛나고 선탑(禪榻)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과 《법화경(法華經)》 등 여러 불경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준에게,

“네가 불경을 좀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모릅니다.”

하고 사과하기에, 또

“네가 시율(詩律)을 알고 지을 줄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못합니다.”

하고 또 사과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이 산중에 더불어 교유할 만한 특이한 중이 있느냐?”

했더니, 대답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 이튿날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서 일행끼리 말하기를,

“준공(俊公)은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니, 만약 문자를 조금만 알았다면 시를 꼭 잘 짓지는 못하더라도 시축(詩軸)에 연서(聯書)할 정도는 될 것이요, 담론(談論)이 반드시 심오하지는 못하더라도 회포를 풀기에는 충분할 것이니, 어찌 우리들의 풍류를 돋우어 주지 않았겠는가.”

하면서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일어섰다.
이번에 풍악대사(楓嶽大師) 보인(普印)의 시문(詩文)을 보다가, 미처 다 보기도 전에 탄식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특이한 중을 만나서 방외의 교유를 해 보고자 했으면서도 인공(印公)을 놓쳤구나!”

하였다. 대체로 그는 내원통(內圓通)에서 수행을 하였는데, 그 시기가 바로 내가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던 때였다. 그의 문집을 보았더니 준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시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준은 확실히 그의 벗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보인(普印)이라는 특이한 중이 있다고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가? 준이 아마도 나를 속인 것이리라. 나는 여기에서, 보인이 본디 고승이었으나 준이 과연 그를 위하여 말해 주지 않은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준이 과연 시에도 능하고 불경의 담론에도 능한 자일 것이니, 준 역시 고승이었을 것이다. 나는 함께 놀았던 준도 몰라보고 놓쳤는데, 하물며 직접 보지도 못한 인공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불교를 권장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 도(道)를 믿고 스스로 수행한 것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인공처럼 내가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산에 있어서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북으로는 장백산(長白山), 남으로는 지리산(智異山), 서로는 구월산(九月山)이 있다. 내 장차 두루 유람하여 혹시 그런 이를 한번 만나게 된다면 준공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선 이 시집에다 서문을 지어 놓는 바이다.

 

 

古之爲浮屠者。類多聰明英偉雋傑之士。一有世主高其戒行。留心釋典。錫號殊禮。賓遇師迎。而于時士大夫亦莫不樂與之遊。則苦枯沈沒寂寞之行焉。而乃反安富尊榮。此固非空門本分。而有可以勸於其術。其言語文章燦然可觀。國朝以來。專尙儒敎。士大夫嚴於斥異。由是而世無獨行自得之士。並與所謂異端之學而不可見焉。今其荒寺廢刹。不絶居僧。而皆窮氓餓隷。逃竄丁役。削髮被緇。雖名浮屠。頑愚昏蒙。目不知書。則不待禁絶而其道幾乎息矣。余常樂遊名山。足跡殆半。甞思得異僧。以爲方外之遊。而登山臨水。未甞不悵然裴徊。甞與友人申元發,兪士京。同宿白華菴。有緇俊者。深夜獨坐。佛燈炯然。禪榻明凈。几上有般若,法華諸經。因問俊爾頗曉經否。謝不知。又問爾能解作詩律否。又謝不能。又問山中有異僧可與遊乎。對曰。無有。明日坐眞殊潭下。相與言。俊公眉眼淸朗。若能粗解文字。詩不必工。可與聯軸。談不必玄。足以寫懷。則豈不趣吾輩事耶。因相顧嘆息而起。今覽楓嶽。大師普印詩文。未及卒業而歎曰。余向所欲遇以爲方外之遊者。失之印公歟。盖其禪定在內圓通。而卽余東遊時也。及見集中有與緇俊唱酬者。則俊固其友也。何不以印答余之問也。俊其欺余哉。吾於是益知印固高僧。而俊果爲之諱之也。由是觀之。俊果能詩也。俊果能談經也。俊亦高僧也歟。吾旣失之於同遊之緇俊。則况於未見之印公乎。無可以勸於其術。而其信道自修也如此。則其未見而如印公者何限。吾於山猶北有長白。南有智異。西有九月。吾將遍遊。庶幾一遇。則儻不爲俊公之所侮爾。姑爲之序此集。




 

[주D-001]방외(方外)의 교유 : 세속의 예법에서 벗어나 승려나 도인(道人), 은자(隱者)들과 사귀는 것을 말한다.
[주D-002]일찍이 …… 있었다 :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에 의하면, 연암은 1765년(영조 41) 몇몇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였다.
[주D-003]보인(普印) : 1701~1769. 호가 풍악(楓嶽)으로, 금강산의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염불과 참선에 전념하다가 법랍(法臘) 51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비가 금강산 유점사에 세워졌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풍악당집(楓嶽堂集)》 1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