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옛날에 승려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총명하고 영특하고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한번이라도 임금이 그의 계행(戒行)을 존경하고 불전(佛典)에 마음을 두어 그에게 호(號)를 내리고 예를 달리하여 빈객으로 대우하고 스승으로 맞아들이는 일이 있으면 당시의 사대부들 역시 모두가 그와 함께 어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고행을 하며 숨어 지내고 조용히 있어도 도리어 부귀와 영화가 뒤따른다. 이것이 본디 불문(佛門)의 본분은 아니지만 불교를 권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와 문장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국조(國朝) 이래로 유교를 전적으로 숭상하여 사대부들이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 엄격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체득하는 선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이른바 이단의 학설마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그 황폐된 사찰에는 살고 있는 승려들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는 있으나, 모두 궁핍한 백성과 굶주린 종들로서 군역(軍役)을 도피하여 머리 깎고 검은 장삼을 입는 자들이라, 비록 이름은 승려라 하지만 어리석고 혼몽하여 눈으로는 글자 하나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불교를 금지하지 않아도 그 도(道)가 거의 사라질 지경이다.
나는 항상 명산(名山)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산의 태반을 둘러보았다. 일찍이 특이한 중을 만나 방외(方外)의 교유를 해 보고자 생각하였으나, 산수(山水)에 등림(登臨)할 적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해 쓸쓸히 배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친구인 신원발(申元發 신광온(申光蘊))ㆍ유사경(兪士京 유언호(兪彦鎬))과 어울려 백화암(白華菴)에서 함께 잔 적이 있었다. 그때 준(俊)이란 중이 깊은 밤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불등(佛燈)은 밝게 빛나고 선탑(禪榻)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과 《법화경(法華經)》 등 여러 불경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준에게,
하고 물었더니,
하고 사과하기에, 또
하고 물었더니,
하고 또 사과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했더니, 대답이
하였다.
그 이튿날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서 일행끼리 말하기를,
하면서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일어섰다.
이번에 풍악대사(楓嶽大師) 보인(普印)의 시문(詩文)을 보다가, 미처 다 보기도 전에 탄식하기를,
하였다. 대체로 그는 내원통(內圓通)에서 수행을 하였는데, 그 시기가 바로 내가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던 때였다. 그의 문집을 보았더니 준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시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준은 확실히 그의 벗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보인(普印)이라는 특이한 중이 있다고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가? 준이 아마도 나를 속인 것이리라. 나는 여기에서, 보인이 본디 고승이었으나 준이 과연 그를 위하여 말해 주지 않은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준이 과연 시에도 능하고 불경의 담론에도 능한 자일 것이니, 준 역시 고승이었을 것이다. 나는 함께 놀았던 준도 몰라보고 놓쳤는데, 하물며 직접 보지도 못한 인공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불교를 권장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 도(道)를 믿고 스스로 수행한 것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인공처럼 내가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산에 있어서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북으로는 장백산(長白山), 남으로는 지리산(智異山), 서로는 구월산(九月山)이 있다. 내 장차 두루 유람하여 혹시 그런 이를 한번 만나게 된다면 준공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선 이 시집에다 서문을 지어 놓는 바이다.
[주D-002]일찍이 …… 있었다 :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에 의하면, 연암은 1765년(영조 41) 몇몇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였다.
[주D-003]보인(普印) : 1701~1769. 호가 풍악(楓嶽)으로, 금강산의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염불과 참선에 전념하다가 법랍(法臘) 51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비가 금강산 유점사에 세워졌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풍악당집(楓嶽堂集)》 1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