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집 제8권 별집/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자서(自序)
자서(自序)
오륜 끝에 벗이 놓인 것은 / 友居倫季
보다 덜 중시해서가 아니라 / 匪厥疎卑
마치 오행 중의 흙이 / 如土於行
네 철에 다 왕성한 것과 같다네 / 寄王四時
친(親)과 의(義)와 별(別)과 서(序)에 / 親義別敍
신(信) 아니면 어찌하리 / 非信奚爲
상도(常道)가 정상적이지 못하면 / 常若不常
벗이 이를 시정하나니 / 友迺正之
그러기에 맨 뒤에 있어 / 所以居後
이들을 후방에서 통제하네 / 迺殿統斯
세 광인이 서로 벗하며 / 三狂相友
세상 피해 떠돌면서 / 遯世流離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논하는데 / 論厥讒諂
그들의 얼굴이 비치어 보이는 듯하네 / 若見鬚眉
선비들이 먹고사는 데에 연연하면 / 士累口腹
온갖 행실 이지러지네 / 百行餒缺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해도 / 鼎食鼎烹
그 탐욕 고치지 못하거늘 / 不誡饕餮
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嚴自食糞
하는 일은 더럴망정 입은 깨끗하다네 / 迹穢口潔
민옹은 사람을 누리같이 여겼고 / 閔翁蝗人
노자(老子)의 도(道)를 배웠네 / 學道猶龍
풍자와 골계로써 / 託諷滑稽
제멋대로 세상을 조롱하였으나 / 翫世不恭
벽에 써서 스스로 분발한 것은 / 書壁自憤
게으른 이들을 깨우칠 만하네 / 可警惰慵
선비란 바로 천작이요 / 士迺天爵
선비의 마음이 곧 뜻이라네 / 士心爲志
그 뜻은 어떠한가 / 其志如何
권세와 잇속을 멀리하여 / 弗謀勢利
영달해도 선비 본색 안 떠나고 / 達不離士
곤궁해도 선비 본색 잃지 않네 / 窮不失士
이름 절개 닦지 않고 / 不飭名節
가문(家門) 지체(地體) 기화 삼아 / 徒貨門地
조상의 덕만을 판다면 / 酤鬻世德
장사치와 뭐가 다르랴 / 商賈何異
홍기는 대은이라 / 弘基大隱
노니는 데 숨었다오 / 迺隱於遊
세상이야 맑건 흐리건 청정(淸淨)을 잃지 않았으며 / 淸濁無失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았네 / 不忮不求
광문은 궁한 거지로서 / 廣文窮丐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聲聞過情
이름나기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 非好名者
형벌을 면치 못하였거든 / 猶不免刑
더구나 이름을 도적질하여 / 矧復盜竊
가짜로써 명성을 다툰 경우리요 / 要假以爭
아름다운 저 우상은 / 孌彼虞裳
옛 문장에 힘을 썼네 / 力古文章
서울에서 사라진 예(禮)를 시골에서 구한다더니 / 禮失求野
생애는 짧아도 그 이름 영원하리 / 亨短流長
세상이 말세로 떨어져 / 世降衰季
허위만을 숭상하고 꾸미니 / 崇飾虛僞
시를 읊으면서 무덤을 도굴하는 / 詩發含珠
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愿賊亂紫
은자인 체하며 빠른 출세를 노리는 짓을 / 逕捷終南
예로부터 추하게 여겼느니 / 從古以醜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하면 / 入孝出悌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 하리니 / 未學謂學
이 말이 비록 지나치지만 / 斯言雖過
거짓 군자를 경계할 만하네 / 可警僞德
공명선(公明宣)은 글 읽지 않았어도 / 明宣不讀
삼 년을 잘 배웠으며 / 三年善學
농부가 밭을 갈며 / 農夫耕野
아내를 손님같이 서로 공경하니 / 賓妻相揖
글자를 읽을 줄 몰라도 / 目不知書
참된 배움이라 이를 만하네 / 可謂眞學
[주D-002]마치 …… 같다네 : 오행설(五行說)에서는 봄에는 나무〔木〕의 기운이 왕성하고, 여름에는 불〔火〕의 기운이 왕성하고, 가을에는 쇠〔金〕의 기운이 왕성하고, 겨울에는 물〔水〕의 기운이 왕성한 것으로 본다. 흙〔土〕만 그에 해당하는 계절이 없는 셈인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 계절 90일에서 18일씩을 덜어서 흙에 배당함으로써 오행에 맞추어 각 계절이 모두 72일씩으로 고루 안배될 수 있게 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3]상도(常道)가 …… 시정하나니 : 인의예지(仁義禮智)에다 신(信)을 보태어 오상(五常)이라 한다. 본래 신은 오행설의 유행에 따라 인의예지에 추가된 것이었다.
[주D-004]그들의 …… 듯하네 : 《순자(荀子)》 해폐(解蔽)에, 인심(人心)을 대야의 물에 비유하면서, 대야의 물을 안정시켜 혼탁한 것들을 가라앉히면 “수염과 눈썹을 볼 수 있다〔足以見鬚眉〕”고 했다.
[주D-005]호화롭게 …… 해도 : 정식(鼎食)은 솥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식사하는 것을 뜻하고, 정팽(鼎烹)은 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당하는 것을 뜻한다.
[주D-006]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過庭錄)》에는 “엄 행수는 제힘으로 먹고살았으니〔嚴自食力〕”로 소개되어 있다.
[주D-007]노자(老子)의 도(道)를 배웠네 :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용과 같다〔猶龍〕’고 감탄했다고 한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주D-008]천작(天爵) : 인작(人爵)의 대립 개념으로, 천부적으로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孟子 告子上》
[주D-009]선비의 …… 뜻이라네 : ‘지(志)’라는 글자의 구조를 ‘士’와 ‘心’의 결합으로 풀이한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풀이는 이와 다르다.
[주D-010]대은(大隱) : 은자에도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의 등급이 있다. 산중에 숨어 사는 은자가 소은이라면, 진정으로 위대한 은자인 대은은 하층 민중이나 다름없이 시중에서 산다.
[주D-011]남을 …… 않았네 : 《시경(詩經)》 패풍(邶風) 웅치(雄雉)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12]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했다.
[주D-013]서울에서 …… 구한다더니 : 《한서(漢書)》 권30 예문지(藝文志) 10에 공자(孔子)가 한 말로 소개되어 있다. 《연암집》 권3 자소집서(自笑集序)에서도 이 말을 인용하면서, 양반 사대부들의 글에서 사라진 고문사(古文辭)를 역관(譯官)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개탄하였다.
[주D-014]시를 …… 도굴하는 :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시경》의 시를 읊조리면서 무덤을 도굴하여 죽은 사람의 입에 물려진 구슬을 훔치는 타락한 유자(儒者)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D-015]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향원(鄕愿)은 덕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다.〔鄕愿 德之賊也〕”라고 했으며, 또한 “자줏빛이 붉은빛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고 했다.
[주D-016]은자인 …… 짓을 : 당 나라 노장용(盧藏用)이 수도 장안(長安)의 종남산에 은거함으로써 고사(高士)라는 명성을 얻어 도리어 재빠르게 출세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주D-017]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적에 관한 전기(傳記)라는 뜻이다.
[주D-018]집에서 …… 하리니 :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자제들은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해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悌〕”고 했으며, 자하(子夏)는 “어진 이를 좋아하여 호색하는 마음을 바꾸며 …… 벗과 사귈 때 말이 믿음직하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하겠다.〔賢賢易色 ……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고 했다.
[주D-019]공명선(公明宣)은 …… 배웠으며 : 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로, 그의 문하에서 삼 년이나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공명선은 스승인 증자의 모범적인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답했으므로, 증자가 감복(感服)했다고 한다. 《說苑 反質》
[주D-020]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50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의하면, 황해도 봉산에 사는 어느 무식한 농민이 한글밖에 모르지만 《소학언해(小學諺解)》를 읽고 그의 모든 언행을 이에 준해 실천했다고 한다.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반드시 서로 절하기로 아내와 약속하고, 부부가 같이 날마다 《소학언해》를 읽었으므로, 그 고을의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봉산학자전은 이 사실을 소재로 한 전기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