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09:45

광문자전(廣文者傳)

 

광문(廣文)이라는 자는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鐘樓)의 저잣거리에서 빌어먹고 다녔는데, 거지 아이들이 광문을 추대하여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소굴을 지키게 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날이 몹시 차고 눈이 내리는데, 거지 아이들이 다 함께 빌러 나가고 그중 한 아이만이 병이 들어 따라가지 못했다. 조금 뒤 그 아이가 추위에 떨며 거듭 흐느끼는데 그 소리가 몹시 처량하였다. 광문이 너무도 불쌍하여 몸소 나가 밥을 빌어 왔는데, 병든 아이를 먹이려고 보니 아이는 벌써 죽어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돌아와서는 광문이 그 애를 죽였다고 의심하여 다 함께 광문을 두들겨 쫓아내니, 광문이 밤에 엉금엉금 기어서 마을의 어느 집으로 들어가다가 그 집 개를 놀라게 하였다. 집주인이 광문을 잡아다 꽁꽁 묶으니, 광문이 외치며 하는 말이,

“나는 날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온 것이지 감히 도적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영감님이 믿지 못하신다면 내일 아침에 저자에 나가 알아 보십시오.”

하는데, 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집주인이 내심 광문이 도적이 아닌 것을 알고서 새벽녘에 풀어 주었다. 광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떨어진 거적을 달라 하여 가지고 떠났다. 집주인이 끝내 몹시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밟아 멀찍이서 바라보니, 거지 아이들이 시체 하나를 끌고 수표교(水標橋)에 와서 그 시체를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는데, 광문이 다리 속에 숨어 있다가 떨어진 거적으로 그 시체를 싸서 가만히 짊어지고 가, 서쪽 교외 공동묘지에다 묻고서 울다가 중얼거리다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집주인이 광문을 붙들고 사유를 물으니, 광문이 그제야 그전에 한 일과 어제 그렇게 된 상황을 낱낱이 고하였다. 집주인이 내심 광문을 의롭게 여겨, 데리고 집에 돌아와 의복을 주며 후히 대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광문을 약국을 운영하는 어느 부자에게 천거하여 고용인으로 삼게 하였다.
오랜 후 어느 날 그 부자가 문을 나서다 말고 자주자주 뒤를 돌아보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자물쇠가 걸렸나 안 걸렸나를 살펴본 다음 문을 나서는데, 마음이 몹시 미심쩍은 눈치였다. 얼마 후 돌아와 깜짝 놀라며, 광문을 물끄러미 살펴보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다가,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만두었다. 광문은 실로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날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지냈으며, 그렇다고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부자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와 부자에게 돌려주며,

“얼마 전 제가 아저씨께 돈을 빌리러 왔다가, 마침 아저씨가 계시지 않아서 제멋대로 방에 들어가 가져갔는데, 아마도 아저씨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자는 광문에게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에게,

“나는 소인이다. 장자(長者)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니 나는 앞으로 너를 볼 낯이 없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러고는 알고 지내는 여러 사람들과 다른 부자나 큰 장사치들에게 광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두루 칭찬을 하고, 또 여러 종실(宗室)의 빈객들과 공경(公卿) 문하(門下)의 측근들에게도 지나치리만큼 칭찬을 해 대니, 공경 문하의 측근들과 종실의 빈객들이 모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밤이 되면 자기 주인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두어 달이 지나는 사이에 사대부까지도 모두 광문이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과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당시에 서울 안에서는 모두, 전날 광문을 후하게 대우한 집주인이 현명하여 사람을 알아본 것을 칭송함과 아울러, 약국의 부자를 장자(長者)라고 더욱 칭찬하였다.
이때 돈놀이하는 자들이 대체로 머리꽂이, 옥비취, 의복, 가재도구 및 가옥ㆍ전장(田庄)ㆍ노복 등의 문서를 저당잡고서 본값의 십분의 삼이나 십분의 오를 쳐서 돈을 내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광문이 빚보증을 서 주는 경우에는 담보를 따지지 아니하고 천금(千金)이라도 당장에 내주곤 하였다.
광문은 사람됨이 외모는 극히 추악하고, 말솜씨도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은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하고, 만석희(曼碩戲)를 잘하고 철괴무(鐵拐舞)를 잘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할 때면, “니 형은 달문(達文)이다.”라고 놀려 댔는데, 달문은 광문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이 길을 가다가 싸우는 사람을 만나면 그도 역시 옷을 홀랑 벗고 싸움판에 뛰어들어, 뭐라고 시부렁대면서 땅에 금을 그어 마치 누가 바르고 누가 틀리다는 것을 판정이라도 하는 듯한 시늉을 하니, 온 저자 사람들이 다 웃어 대고 싸우던 자도 웃음이 터져, 어느새 싸움을 풀고 가 버렸다.
광문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머리를 땋고 다녔다. 남들이 장가가라고 권하면, 하는 말이,

“잘생긴 얼굴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여자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남들이 집을 가지라고 권하면,

“나는 부모도 형제도 처자도 없는데 집을 가져 무엇 하리. 더구나 나는 아침이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저자에 들어갔다가, 저물면 부귀한 집 문간에서 자는 게 보통인데, 서울 안에 집 호수가 자그만치 팔만 호다. 내가 날마다 자리를 바꾼다 해도 내 평생에는 다 못 자게 된다.”

고 사양하였다.
서울 안에 명기(名妓)들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광문이 성원해 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어치도 못 나갔다.
예전에 궁중의 우림아(羽林兒), 각 전(殿)의 별감(別監),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청지기들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운심(雲心)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운심은 유명한 기생이었다. 대청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거문고를 타면서 운심더러 춤을 추라고 재촉해도, 운심은 일부러 느리대며 선뜻 추지를 않았다. 광문이 밤에 그 집으로 가서 대청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자리에 들어가 스스로 상좌(上坐)에 앉았다. 광문이 비록 해진 옷을 입었으나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의기가 양양하였다. 눈가는 짓무르고 눈꼽이 끼었으며 취한 척 게욱질을 해 대고, 헝클어진 머리로 북상투〔北髻〕를 튼 채였다. 온 좌상이 실색하여 광문에게 눈짓을 하며 쫓아내려고 하였다. 광문이 더욱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춰 높으락나지락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이 곧바로 일어나 옷을 바꿔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한바탕 추었다. 그리하여 온 좌상이 모두 즐겁게 놀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

 

광문전 뒤에 쓰다

 

내 나이 열여덟 살 적에 몹시 병을 앓아서, 늘 밤이면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을 불러 놓고 여염(閭閻)에서 일어난 얘깃거리 될 만한 일들을 묻곤 하였는데, 대개는 광문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어렸을 적에 그 얼굴을 보았는데 너무도 못났었다. 나는 한창 문장을 배우기에 힘쓰던 판이라, 이 전(傳)을 만들어 여러 어른들께 돌려 보였는데, 하루아침에 고문(古文)을 잘 한다는 칭찬을 크게 받게 되었다.
광문은 이때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명성을 남겼고, 더 이상 서울에 올라오지 않은 지가 이미 수십 년이나 지났다.
바닷가에서 온 거지 아이 하나가 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에서 빌어먹고 있었다. 밤이 되어 그 절의 중들이 광문의 일을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며 흠모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그 거지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그 거지 아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마침내 광문의 아들이라 자칭하니, 그 절의 중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이때까지 그에게 밥을 줄 때는 박짝에다 주었는데, 광문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씻은 사발에 밥을 담고 수저에다 푸성귀랑 염장을 갖추어서 매번 소반에 차려 주었다.
이 무렵에 영남에는 몰래 역모를 꾀하는 요사한 사람이 있었는데, 거지 아이가 이와 같이 융숭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대중을 현혹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여 가만히 거지 아이를 달래기를,
“네가 나를 숙부라 부르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저는 광문의 아우라 칭하고 제 이름을 광손(廣孫)이라 하여 광문의 돌림자를 땄다. 어떤 사람이 의심하기를,
“광문은 본래 제 성도 모르고 평생을 형제도 처첩도 없이 독신으로 지냈는데, 지금 어떻게 저런 나이 많은 아우와 장성한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고변(告變)을 하였다. 관청에서 이들을 모두 다 잡아들여 광문과 대질심문을 벌였는데, 제각기 얼굴을 몰랐다. 이에 그 요사한 자를 베어 죽이고 거지 아이는 귀양 보냈다.
광문이 석방되자, 늙은이며 어린애들까지 모두가 가서 구경하는 바람에 한양의 저잣거리가 며칠 동안 텅 비게 되었다.
광문이 표철주(表鐵柱)를 가리키며,
“너는 사람 잘 치던 표망둥이〔表望同〕가 아니냐. 지금은 늙어서 너도 별 수 없구나.”
했는데, 망둥이는 그의 별명이었다. 서로 고생을 위로하고 나서 광문이 물었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과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은 무고들 하신가?”
“모두 다 세상을 떠나셨다네.”
“김군경(金君擎)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지?”
“용호장(龍虎將)이 되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말했다.
“이 녀석은 미남자로서 몸이 그렇게 뚱뚱했어도 기생을 껴안고 담을 잘도 뛰어넘었으며 돈 쓰기를 더러운 흙 버리듯 했는데, 지금은 귀인(貴人)이 되었으니 만나 볼 수가 없겠군. 분단(粉丹)이는 어디로 갔지?”
“벌써 죽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탄식하며 말했다.
“옛날에 풍원군이 밤에 기린각(麒麟閣)에서 잔치를 벌인 후 유독 분단이만 잡아 두고서 함께 잔 적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 대궐에 들어갈 차비를 하는데, 분단이가 촛불을 잡다가 그만 잘못하여 초모(貂帽)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라 하였네. 풍원군이 웃으면서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하고는 곧바로 압수전(壓羞錢) 5000문(50냥)을 주었었지. 나는 그때 분단이의 수파(首帕)와 부군(副裙)을 들고 난간 밑에서 기다리며 시커멓게 도깨비처럼 서 있었네. 풍원군이 방문을 열고 가래침을 뱉다가 분단이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저 시커먼 것이 무엇이냐?’ 하니, 분단이가 대답하기를 ‘천하 사람이 다 아는 광문입니다.’ 했지. 풍원군이 웃으며 ‘바로 네 후배(後陪)냐?’ 하고는, 나를 불러들여 큰 술잔에 술을 한 잔 부어 주고, 자신도 홍로주(紅露酒) 일곱 잔을 따라 마시고 초헌(軺軒)을 타고 나갔지. 이 모두 다 예전 일이 되어 버렸네그려. 요즈음 한양의 어린 기생으로는 누가 가장 유명한가?”
“작은아기〔小阿其〕라네.”
“조방(助房)은 누군가?”
“최박만(崔撲滿)이지.”
“아침나절 상고당(尙古堂)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네. 듣자니 집을 둥그재〔圓嶠〕 아래로 옮기고 대청 앞에는 벽오동 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아래에서 손수 차를 달이며 철돌(鐵突)을 시켜 거문고를 탄다고 하데.”
“철돌은 지금 그 형제가 다 유명하다네.”
“그런가? 이는 김정칠(金鼎七)의 아들일세. 나는 제 애비와 좋은 사이였거든.”
이렇게 말하고 다시 서글퍼하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는 다 나 떠난 후의 일들이군.”
하였다. 광문은 머리털을 짧게 자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쥐꼬리처럼 땋아 내리고 있었으며, 이가 빠지고 입이 틀어져 이제는 주먹이 들락거리지 못한다고 한다.
광문이 표철주더러 말하였다.
“너도 이제는 늙었구나. 어떻게 해서 밥을 먹고사나?”
“집이 가난하여 집주릅이 되었다네.”
“너도 이제는 궁함을 면했구나. 아아! 옛날 네 집 재산이 누거만(累鉅萬)이었지. 그때에는 너를 ‘황금투구’라고 불렀는데 그 투구 어따 두었노?”
“이제야 나는 세상 물정을 알았다네.”
광문이 허허 웃으며 말하기를,
“네 꼴이 마치 ‘재주를 다 배우고 나니 눈이 어둡다’ 이로구나.”
하였다.
그 뒤로 광문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廣文者。丐者也。甞行乞鍾樓市道中。群丐兒。推文作牌頭。使守窠。一日天寒雨雪。群兒相與出丐。一兒病不從。旣而兒寒專纍。欷聲甚悲。文甚憐之。身行丐得食。將食病兒。兒業已死。群兒返乃疑文殺之。相與搏逐文。文夜匍匐入里中舍。驚舍中犬。舍主得文縛之。文呼曰。吾避仇。非敢爲盜。如翁不信。朝日辨於市。辭甚樸。舍主心知廣文非盜賊。曉縱之。文辭謝請弊席而去。舍主終已恠之。踵其後。望見群丐兒曳一尸。至水標橋。投尸橋下。文匿橋中。裹以弊席。潛負去。埋之西郊之墦間。且哭且語。於是舍主執詰文。文於是盡告其前所爲及昨所以狀。舍主心義文。與文歸家。予文衣。厚遇文。竟薦文藥肆富人作傭。保久之。富人出門。數數顧。還復入室。視其扃。出門而去。意殊怏怏。旣還大驚熟視文。欲有所言。色變而止。文實不知。日默默亦不敢辭去。旣數日。富人妻兄子持錢還富人曰。向者吾要貸於叔。會叔不在。自入室取去。恐叔不知也。於是富人大慚廣文。謝文曰。吾小人也。以傷長者之意。吾將無以見若矣。於是遍譽所知諸君及他富人大商賈。廣文義人。而又過贊廣文諸宗室賓客及公卿門下左右。公卿門下左右及宗室賓客。皆作話套。以供寢數月間。士大夫盡聞廣文如古人。當是時。漢陽中皆稱廣文。前所厚遇舍主之賢能知人。而益多藥肆富人長者也。時殖錢者。大較典當首飾璣翠衣件器什宮室田僮奴之簿書。參伍本幣以得當。然文爲人保債不問。當一諾千金。文爲人貌極醜。言語不能動人。口大幷容兩拳。善曼碩戱。爲鐵拐舞。三韓兒相訾傲。稱爾兄達文。達文又其名也。文行遇鬪者。文亦解衣與鬪啞啞。俯劃地若辨曲直狀。一市皆笑。鬪者亦笑。皆解去。文年四十餘。尙編髮。人勸之妻則曰。夫美色。衆所嗜也。然非男所獨也。唯女亦然也。故吾陋而不能自爲容也。人勸之家則辭曰。吾無父母兄弟妻子。何以家爲。且吾朝而歌呼入市中。暮而宿富貴家門下。漢陽戶八萬爾。吾逐日而易其處。不能盡吾之年壽矣。漢陽名妓窈窕都雅。然非廣文聲之。不能直一錢。初羽林兒各殿別監駙馬都尉傔從垂袂過雲心。心名姬也。堂上置酒皷瑟。屬雲心舞。心故遲不肯舞也。文夜往彷徨堂下。遂入座。自坐上坐。文雖弊衣袴。擧止無前。意自得也。眦膿而眵。陽醉噎。羊髮北髻。一座愕然。瞬文欲敺之。文益前坐。拊膝度曲。鼻吟高低。心卽起更衣。爲文釖舞。一座盡歡。更結友而去。

書廣文傳後
余年十八時。甞甚病。常夜召門下舊傔。徵問閭閻奇事。其言大抵廣文事。余亦幼時。見其貌極醜。余方力爲文章。作爲此傳。傳示諸公長者。一朝以古文辭。大見推詡。葢文時已南遊湖嶺諸郡。所至有聲。不復至京師數十年。海上丐兒。甞乞食於開寧水多寺。夜聞寺僧閒話廣文事。皆愛慕感嘆。想見其爲人。於是丐兒泣。衆恠問之。於是丐兒囁嚅。遂自稱廣文兒。寺僧皆大驚時甞予飯瓢。及聞廣文兒。洗盂盛飯。具匙箸蔬醬。每盤而進之。時嶺中妖人。有潛謀不軌者。見丐兒如此其盛待也。冀得以惑衆。潛說丐兒曰。爾能呼我叔。富貴可圖也。乃稱廣文弟。自名廣孫以附文。或有疑。廣文自不知姓。生平獨。無昆弟妻妾。今安得忽有長弟壯兒也。遂上變。皆得逐捕。及對質驗問。各不識面。於是遂誅其妖人。而流丐兒。廣文旣得出。老幼皆往觀。漢陽市數日爲空。文指表鐵柱曰。汝豈非善打人表望同耶。今老無能矣。盖望同其號也。因相與勞苦。文問靈城君,豐原君無恙乎。曰皆已下世矣。金君擎方何官。曰爲龍虎將。文曰此兒美男子。軆雖肥。能挾妓超墻。用錢如糞土。今貴人不可見矣。粉丹何去。曰已死矣。文嘆曰。昔豐原君夜讌麒麟閣。獨留粉丹宿。曉起將赴闕。丹執燭。誤爇貂帽惶恐。君笑曰。爾羞乎。卽與壓羞錢五千。吾時擁首帕副裙。候闌干下。黑而鬼立。君拓戶唾。倚丹而耳曰。彼黑者何物。對曰。天下誰不知廣文也。君笑曰。是汝後陪耶。呼與一大鍾。君自飮紅露七鍾。乘軺而去。皆昔年事也。漢陽纖兒誰最名。曰小阿。其助房誰。曰崔撲滿。曰朝日尙古堂遣人勞我。聞移家圓嶠下。堂前有碧梧桐樹。常自煑茗其下。使鐵突皷琴。曰鐵突昆弟方擅名。曰然。此金鼎七兒也。吾與其父善。復悵然久之曰。此皆吾去後事耳。文斷髮猶辮如鼠尾。齒豁口窳。不能內拳云。語鐵柱曰。汝今老矣。何能自食。曰家貧爲舍儈。文曰。汝今免矣。嗟呼。昔汝家貲鉅萬。時號汝黃金兜。今兜安在。曰今而後吾知世情矣。文笑曰。汝可謂學匠而眼暗矣。文後不知所終云。


 


 

[주D-001]추위에 …… 흐느끼는데 : 원문은 ‘寒專纍欷’인데, ‘寒專’은 ‘寒戰’ 또는 ‘寒顫’과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纍欷’는 거듭 흐느껴운다는 뜻으로, 《연암집》 권10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에도 ‘’累欷掩抑‘이란 표현이 있다.
[주D-002]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 원문은 ‘辭甚樸’인데, 이본에는 ‘辭甚款樸’이라고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말이 몹시 진실되고 순박하므로’이다.
[주D-003]수표교(水標橋) :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의 하나로, 홍수에 대비하여 수심을 재는 눈금이 교각(橋脚)에 표시되어 있었다.
[주D-004]만석희(曼碩戲) : 개성 지방에서 음력 4월 8일에 연희되던 무언 인형극이다. 이 놀이는 개성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미색과 교태에 미혹되어 파계하였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조롱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는 속전이 있으며, 일설에는 지족선사가 불공 비용을 만 석이나 받은 것을 욕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고도 한다.
[주D-005]철괴무(鐵拐舞) : 중국 전설상의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이철괴(李鐵拐)의 모습을 흉내 내어 추는 춤이다. 이철괴는 그 모습이 머리를 산발하고 얼굴에는 때가 자욱하고 배는 훌떡 걷어 올리고 다리는 절뚝거리며 쇠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한다.
[주D-006]비록 …… 마찬가지다 : 원문은 ‘唯女亦然’인데, 이 경우 ‘唯’ 자는 ‘비록’이란 뜻으로 ‘雖’ 자와 같다.
[주D-007]우림아(羽林兒) : 궁궐의 호위를 맡은 친위(親衛) 부대 중의 하나인 우림위(羽林衛) 소속의 군인들을 말한다. 우림위는 영조 때 용호영(龍虎營)에 소속되었다.
[주D-008]별감(別監) : 궁중의 하례(下隸)로서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 등에서 잡무를 수행하는 한편 국왕이 행차할 때 시위와 봉도(奉導)를 맡았다.
[주D-009]북상투〔北髻〕 : 여자의 쪽머리(낭자머리)를 모방하여 뒤통수에 상투처럼 묶은 머리 모양을 가리킨다. 《硏經齋集 外集 卷5 蘭室譚叢 北髻》
[주D-010]광문에게 …… 하였다 : 원문은 ‘瞬文欲敺之’인데, 여기서 ‘敺’는 ‘驅’의 고자(古字)로 ‘쫓아내다’로 새겨야 한다.
[주D-011]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 : 개령은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에 속하는 고을이고, 수다사는 그 이웃 고을인 선산군(善山郡)에 있다. 신라 때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주D-012]광문이 석방되자 : 영조 40년(1764년)에 일찍이 나주(羅州) 괘서(掛書) 사건으로 처형된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하징(李夏徵)의 서얼 이태정(李太丁)이란 자가 달손(達孫) 즉 광문의 동생을 자처하면서, 광문의 아들이라는 자근만(者斤萬)을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덩달아 체포되었던 광문은 역모 혐의는 벗었으나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推案及鞫案 卷22》 《英祖實錄 40年 4月 17日》
[주D-013]표철주(表鐵柱) : 실존 인물로서 당시 서울의 무뢰배 조직인 검계(劍契)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자칭 왈짜〔曰者〕라고도 하는데, 노름판과 사창가 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살인과 약탈, 강간 등을 자행하였다.
[주D-014]용호장(龍虎將) : 용호영(龍虎營)의 정 3 품 벼슬이다.
[주D-015]압수전(壓羞錢) : 부끄러움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주는 돈이다.
[주D-016]수파(首帕)와 부군(副裙) : 수파는 여자들의 머리를 감싸는 머릿수건이고, 부군은 덧치마를 가리킨다.
[주D-017]후배(後陪) : 뒤를 따르는 하인을 말한다.
[주D-018]홍로주(紅露酒) : 소주에다 멥쌀로 만든 누룩과 계피 등을 넣고 우려 만든 약주로, 감홍로(甘紅露), 감홍주(甘紅酒)라고도 부른다.
[주D-019]조방(助房) : 기생의 기둥서방으로, 조방(助幇)이라고도 한다.
[주D-020]상고당(尙古堂) : 김광수(金光遂)의 호이다. 숙종 22년(1696)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서른 살에 진사 급제 후 잠시 인제 군수(麟蹄郡守)를 지냈다. 서화에 뛰어났으며, 골동품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암집》 권3 필세설(筆洗說), 권7 관재소장청명상하도발(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주D-021]둥그재〔圓嶠〕 : 서대문 밖 아현동 부근에 있었던 고개로, 원현(圓峴)이라고도 한다.
[주D-022]철돌(鐵突) : 거문고의 명수로 알려진 실존 인물로, 김철석(金哲石)이라고 한다.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 가기(歌妓) 추월(秋月)ㆍ매월(梅月)ㆍ계섬(桂蟾) 등과 한 그룹을 이루어 직업적인 연예 활동으로 자못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주D-023]너도 …… 면했구나 : 원문은 ‘汝今免矣’인데, 곤궁에서 벗어나는 것을 ‘면궁(免窮)’이라 한다.
[주D-024]재주를 …… 어둡다 : ‘복이 박하다’는 뜻의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권62 열상방언(洌上方言)에 “기술 익히자 눈에 백태 낀다.〔技纔成 眼有眚〕”는 유사한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