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곤일초정은 없었다.
건곤일초정은 없었다.
-면천의 乾坤一艸亭은 오해, 醉翁喜雨又斯亭이 있었다.
면천 향교앞 저수지에 볏집으로 지붕을 한 정자가 하나 있다.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면천 군수 시절 저수지 한 가운데에 축대를 쌓고 소박한 정자를 짓고 이름을 건곤일초정(乾坤一艸亭)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려 2006년 당진시(당시는 군)에서는 1억6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저수지안에 현재의 정자를 짓고 다리를 놓아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을 위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건곤일초정은 박지원의 명성에 힘 입어 건립즉시 전국의 언론의 주목을 받아 면천= 박지원= 건곤일초정이라는 문화 스토리 라인이 만들어 졌다. 건곤일초정이 등장한 것은 2천년 초, 과정록이라는 박종채(朴宗采1780-1838)의 책이 국역이 되고 나서다. 박종채는 박지원의 아들로 아버지 박지원의 행적을 기록한 과정록을 남겼는 데 그 속에 박지원이 면천군수 시절 향교앞 저수지에 대를 쌓고 초가지붕을 한 정자를 짓고 건곤일초정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온뒤로 면천 박지원 건곤일초정을 연결하는 논의가 일어 났고 당진시는 현재의 정비된 모습의 저수지와 건곤일초정의 모습을 만들게 된다. 박지원이 면천 군수를 역임 한 것은 맞고 향교앞 저수지에 정자와 다리를 놓아 휴식의 공간으로 삼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자의 이름이 건곤일초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박지원은 1798년 7월(음력)경 정자를 완성한 후 당시 충청 관찰사로 박지원의 깨복둥이 친구였던 이태영(李泰永)에게 정자의 현판을 써 줄것을 청하는 편지를 쓴다. 이 편지는 박지원의 자료 공작관문고에 남아 있다.
[옛날 정자를 지은 사람중에 늙은 몸에 머리까지 희면 작은량의 술에도 취해 취옹이라 했고 지겨운 비가 사흘동안 내리다 정자를 짓는 공사를 마치자 비가 그쳤다 하여 희우정이라 했으니 오늘 이 정자가 두가지 사연을 다 가추었기에 취옹희우우사정(醉翁喜雨又斯亭)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자료(1)동작관문고 답사순서(答使巡書)
박지원은 구양수와 소동파의 고사를 인용하여 취옹과 희우의 의미를 담은 정자 이름을 지어 친구이자 명필인 이태영에게 현판을 써 달라는 청을 하고 있다. 박지원은 편지속에 손바닥만한 글씨로 일곱자(仰焉此掌大七字) 현판을 써 보내달라 덪붙인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향교앞의 저수지는 둘레가 1056척(尺)으로 물이 마르고 토사가 쌓여 수십기의 말무덤으로 가득했고 뱀과 온갓 곤충이 서식하는 폐저수지였다. 박지원은 이 저수지밑에 수십마지의 농토를 주목하고 흙을 파내고 둑을 쌓는 한편 한가운데에 축대를 쌓고 육각형의 정자를 짓고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아 저수지의 용도를 살리면서 풍류까지 생각하는 공간을 만든다.
박지원은 정자에 단청까지 고려 했다고 했고 둑주변에 버드나무를 심고 살구 오얏나무 씨를 대여섯말 뿌려 놓고 복숭아 나무를 수십구루 심어 훗날의 조경을 고대하기도 했다.
사실은 이것이다.
이 역사적 사실이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에 의해 왜곡된다. 박종채는 16살에 아버지를 따라 면천에 와 17살에 한양 집으로 돌아 간 사실이 있다. 박종채가 훗날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하며 건곤일초정을 운운 한 것은 당대 유행 했던 선비문화의 하나인 탈속과 은일을 고려한 때문인듯 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초가 정자 하나 짓고 은인자중 하겠다는 인식의 건곤일초정을 아버지 박지원이 이름 지은 취옹희우와 비슷한 의미로 생각했거나 아니면 착오일 것이다. 건곤일초정을 하나쯤 짓고 싶다는 인식은 이황 홍대용등 조선의 선비들의 인식이기도 했다.
특히 박종채의 현장감은 박지원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박종채는 향교앞의 저수지의 둘레가 백보(70미터정도)라 하면서 저수지 아래의 농토가 수백묘라 했으나 박지원은 1053척(330미터정도)에 전답이 이십석 지기라 특정하며 사실성과 정확성을 담보 하고 있다.
박종채의 기록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나 그렇다하여 박지원이 설계하여 짓고 이름까지 지은 [취옹희우우사정]이 [건곤일초정]일 수는 없다. 박종채의 '과정록'보다 박지원의 '답순사서'가 선행 자료이고 자료의 공개도 먼저 제시된 상태에서 이런 착오가 생긴 것은 참으로 면구(?)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의 건곤일초정의 재현의 모습은 정말로 아니다. 연암선생은 저수지 가운데 작은 초가정자를 짓고 향교쪽으로 나무 다리 세개를 세워 판자를 걸친 통행로를 놓았다. 동양화에 등장하는 원두막의 모습인 것이다.
이 사실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역사의 왜곡인 동시에 지역문화 역량이 시험 받는 것이기도 하다.
자료(1)박지원 자료 동작관문고 답순사서.
아래의 글은 박지원선생이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에게 면천 향교앞 저수지에 지은 정자 이름을 '취옹희우우사정'이라 짓고 현판 글씨를 청하는 편지로 해석을 하면 이렇습니다.
지난 18일 혜경궁홍씨의 생일을 맞아 공주 쌍수정에 모여 나라의 태평성세를 바라는 행사를 가졌다는데 (저는) 계속되는 더위와 감기몸살에 걸려 참가치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우리 성의 동쪽에 버려진 저수지가 있는데 둘레가 천오십육척이고 저수지 아래에는 씨를 뿌리면 족히 20여석은 나올 땅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버려져 물은 마르고 말무덤 10여기가 넝쿨속에 있고 뱀 곤충등이 우글거렸습니다.
이번 봄에 흙을 파네고 말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축대를 다시 쌓고는 저수지 중앙에 대를 쌓고 위에 육각형의 나무 정자를 짓고 짚으로 지붕을 올렸습니다. 붂쪽으로 다리 세개를 세워 판자다리를 놓으니 (중략)
예날에 한 늙은이가 짚으로 지붕을 한 정자를 짓자 삼일간 비가 내려 물을 가두게 되니 취옹정 희우정 고사를 따라 나의 정자의 이름도 취옹희우우사정(翁喜雨又斯亭)이라 했습니다. (중략)
이름은 지었으나 일곱자 현판을 내려써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十八飾喜。率土同情。雖無盛速。固當翼趨於拱北雙樹之間。共歡此太平萬歲之樂。而顧今中暑暴下。飮啖全廢。多日委頓。無以自力。只自慊恨而已。郡郭之東。校宮之前。有廢堰周一千五十六尺。堤下蒙利者。可苗種二十餘石。年久塡塞。堤內馬塚累累。荊榛之所蕪。虫蛇之所藏。春間䟽鑿。盡去其馬塚。中築小臺。臺上樹一笠六面草亭。爲三空長橋。屬之北塢。雲水空濛。連山遠沉。平疇莽濶。或乘月蕩舟。或凭欄垂釣。雖其結搆鋪置。未免寒儉。至若景物風致。不讓昔人。昔人之名亭者。蒼顔白髮。飮少輒醉。則曰醉翁。一雨三日。吾亭適成。則曰喜雨。今此所搆實兼 二事。則遂敢題之曰 醉翁喜雨。又斯亭 欲刻揭此七字。而非但筆意本自荒拙。年來久患風痺。積拋筆硯。迺者臨池。濃爲墨猪。焦爲枯藤。易數十紙。終不成字。玆敢忘其僭妄。仰丐此掌大七字。倘蒙不鄙。則其爲湖右侈觀。當復如何。非但下邑無刻手。畵者難得。更乞亟付剞劂令畵裨。略施顔色。俾得成就斯亭。幸甚幸甚。環堤植柳。又種杏子李核五六斗。又囑官僮。拾秋桃遺仁。爲列樹計。未甞不自笑其迂。然亦奈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