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2대 혜종(惠宗) 왕무(王武), 제3대 정종(定宗) 왕요(王堯), 제4대 광종(光宗) 왕소(王昭)
왕무(王武), 왕요(王堯), 왕소(王昭)
제2대 혜종(惠宗) 왕무(王武) 재위기간 943∼945(2년)
제3대 정종(定宗) 왕요(王堯) 재위기간 946∼949(3년)
제4대 광종(光宗) 왕소(王昭) 재위기간 949∼975(26년)
제2대 혜종[惠宗 914∼945(신덕왕 1∼혜종 2)]
제2황후 장화황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의 맏아들
고려 제2대 왕. 재위 943∼945.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 태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제2황후 장화황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이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의 통일에 큰 공을 세웠으나, 재위기간 호족세력에 억눌려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왕규(王規)의 시해음모와, 지방 호족 세력 및 이복형제들의 도전을 제압할 만한 독자적 세력기반이 없었으므로 항상 신변에 위협을 느꼈고, 재위 2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능은 개성(開城) 순릉(順陵)이다. 시호는 의공(義恭).
제3대 정종[定宗 923∼949(태조 6∼정종 4)]
제4대 광종(光宗) 왕소(王昭)의 친형(동복형제)
제3황후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劉氏)의 둘째아들로 태조의 셋째아들이었으나
형 태자 왕태(太子 王泰)가 어려서 죽어 유씨의 첫째아들이 되고 태조의 둘째 태자가 된다.
고려 제3대 왕. 재위 946∼949. 이름은 요(堯), 자는 의천(義天). 태조의 둘째 아들[3왕자이나 형 태자 왕태(太子 王泰)가 어려서 죽어 둘째가 됨]로 어머니는 제3황후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劉氏)이다.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 그해 왕규(王規)의 난을 평정하여 호족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잔존하고 있던 개경(開京) 호족들의 반발과 도참설의 영향으로 서경천도(西京遷都)를 단행하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불교를 깊이 믿었다고 전해진다. 시호는 문명(文明).
제4대 광종[光宗 925∼975(태조 8∼광종 26)]
제3대 정종(定宗) 왕요(王堯)의 친동생(동복형제)
제3황후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劉氏)의 둘째아들로 태조의 셋째아들이었으나
형 태자 왕태(太子 王泰)가 어려서 죽어 유씨의 둘째아들이 되고 태조의 셋째 태자가 된다.
고려 제4대 왕 재위 949∼975.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日華). 태조의 셋째 아들[4왕자이나 형 태자 왕태(太子 王泰)가 어려서 죽어 셋째가 됨]로 어머니는 제3황후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劉氏)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연호를 광덕(光德)이라 했다가 이듬해 후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했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고, 근친결혼을 장려하여 외척의 폐해를 없애려 했다.
956년(광종 7)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주인과 노비와의 분쟁을 해결해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으며, 958년(광종 9)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초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다. 963년(광종 14)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폈으며, 관리의 복제(服制)를 정하였다.
또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을 서도(石)라 했다. 국토개척에도 주력하여 변경인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는 등 왕권확립과 국력증강에 치적을 남겼으나 재위기간 동안 무고한 살육이 많았다. 시호는 대성(大成), 능은 헌릉(憲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