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제4대 세종실록] 1. 폐위되는 양녕과 세자로 책봉되는 충녕, 2. 세종의 왕도 정치와 조선의 영화|조선왕조실록
[제4대 세종실록]
1. 폐위되는 양녕과 세자로 책봉되는 충녕
태종은 재위 기간 중 네 번에 걸쳐 선위 파동을 일으킨다. 첫 번째 선위 파동은 1406년에 일어났는데 이때 양녕의 나이 불과 13세였다. 어린 양녕을 대상으로 태종이 선위 표명을 한 것은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무구 형제가 어린 양녕을 포섭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하려 했다는 탄핵 사건이 일어나 민무구의 옥이 발생하면서 태종은 선위 문제를 뒤로 미룬다.
그 이후에도 태종의 선위 표명은 세 번이나 계속된다. 태종이 마흔도 안 된 나이에 계속해서 선위 표명을 한 것은 건강에 대한 불안감과 조선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 같다. 태종 자신이 일찍 상왕으로 물러앉아 왕이 성장할 때까지 왕을 보좌하면서 왕이 정사를 처리할 능력이 생기면 군정의 안정에 주력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한편으로 태종의 이런 계획은 자신의 갑작스런 병사에 대비한 측면도 있었다. 자신이 갑자기 죽는다
하더라도 왕권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처럼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지만 선위 문제는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곧 태종이 양녕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네 번째 선위 파동으로, 이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양녕이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4년 만에 폐위된 것은 순전히 태종의 뜻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녀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아들 충녕이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제4대왕 세종이다.
양녕의 폐세자 사건과 관련하여 야사에는 실록의 기록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궁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2. 세종의 왕도 정치와 조선의 영화
(1397-1450, 재위 기간 1418년 8월-1450년 2월, 31년 6개월)
1418년 6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은 폐위된 양녕 대신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두 달 후인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니, 그가 곧 조선 제4대왕 세종이다.
태종은 '충녕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면서 세자에 책봉했다. 이처럼 태종은 충녕의 학문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 대는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한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세종 집권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 있었기에 정치는 아직 태종의 영향 아래 있었다.
1422년 태종이 죽은 다음부터 세종은 놀라운 정치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종 대에는 개국 공신 세력이 거의 사라졌고, 그 덕분에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학자와 유학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왕도 정치를 꿈꿀 수 있었다.
세종 시대의 권력 구조나 정치적 양상은 세종 19년(1437년)을 분수령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세종은 이때를 전후하여 국가 기강의 중심이었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재결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쳐나갔다. 또 언관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이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없어졌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분위기는 일차적으로 유교 정치의 진전에 의한 것이었다.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 유교적 제도의 정리가 가능했고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유교 정치의 기반이 안정되었다. 그래서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 형태인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 체제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세종의 건강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세종은 젊은 시절부터 소갈증(당뇨병)을
앓고 있었기에 정무가 과다한 육조직계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지만 의정부서사제의 정착에 힘입어 오히려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 정치를 이끌어냈다. 이는 황희를 비롯하여 맹사성,최윤덕, 신개 등 의정부 대신들의 신중하고 치밀한 보좌와 관료들의 탄탄한 정치 기강, 언관들의 이상적인 유교 정치 구현 노력 덕분이었다.
세종 대의 이러한 업적은 집현전의 효율적 운영에 따른 것이었다. 집현전은 이미 고려시대에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정종 시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지만 세종조초에 이르러 기능이 대폭 확대되었다.
세종 3년(1421년) 3월에 확대, 개편된 집현전은 단순한 학문적 사업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재의 양성과 새로운 문화의 정착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하는가 하면 집현전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 서연관, 시관, 사관 등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편찬 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세종은 이들 관원 중에 학술에만 몸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관직에 이직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 또는 20년씩 머물도록 해주었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과학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단 이런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 또한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정책 중의 하나였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어냈다.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에 편중하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개발, 성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제사의 예전)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다.
세종 대가 이와 같은 빛나는 유산과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을 훌륭하게 보필한 신하들과 학자들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세종이 이들의 보필을 수용할 만한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와 유교 정치에 대한 깊은 소양, 다양하고 깊은 학문적 성취와 탐구력,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 문화에 경도되지 않는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시키는 추진력과 신념, 백성과 신하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인간애 등을 고루 간직했던 세종의 뛰어난 인성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학문적 업적을 일구어내는 구심체였다.
천부적인 능력과 뛰어난 인성 그리고 넓은 덕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기틀을 닦아놓은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세종은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6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18남 4녀의 자녀를 얻었다. 능은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