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제4대 세종실록] 4. 천문학 발전을 통한 조선의 과학 혁명
4. 천문학 발전을 통한 조선의 과학 혁명
세종 시대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도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천문학에서부터 농학, 인쇄술, 화기 제작, 의학, 아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적인 변혁이 시도됐다. 이 중에서 특히 천문학 분야의 발전은 가히 '과학 혁명'으로 불릴 만하다.
천문학을 주관하던 곳은 서운관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된 석축간의대는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천의는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정인지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천문학의 발전은 시계의 발명을 가져왔다. 당시의 시계는 해시계와 물시계로 대표된다.
해시계는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이 있었으며, 물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해시계를 일구(해그림자)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솥을 받쳐놓은 듯한(앙부)'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해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해시계는 이처럼 조선의 시계 문화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기능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해시계는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과 절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었기에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시계가 물시계였다.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 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해시계, 물시계와 더불어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뜻깊은 발명품은 측우기였다.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천문관측대,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세계 과학사에 빛나는 이와 같은 업적들은 세종의 뛰어난 지도력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문은 물론이고 기술적인 측면에도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세종은 측우기의 제작에 왕세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열성을 보였는가 하면, 출신 성분에 관계 없이 능력에 따라 학자와 기술자를 등용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세종의 열정에 힘입어 정인지, 정초, 정흠지, 김담, 이순지 등과 같은 집현전 학자들은 과학 서적들에 대한 번역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고, 이 번역서를 바탕으로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은 기술 학자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세종의 왕도 정치와 문인들의 탐구 정신, 그리고 기술 학자들의 땀이 일체가 되어 일궈낸 값진 결실이 곧 세종 시대의 과학 혁명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