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제16대 인조실록]:4.인조 시대의 변란들(이괄의3일천하,정묘/병자호란), 5.인조실록편찬경위
4. 인조 시대의 변란들
이괄의 '삼일 천하’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조선 사회는 한동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란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또 다른 반란을 염려하는 한편,
사분오열 되어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각 계파들은 반대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계략짜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급기야 역모설을 퍼뜨려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 같은 계파간의 갈등이 빚어낸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는 등극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신세가 된다. 고전 끝에 가까스로 난은 평정되지만 이
사건으로 조선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사회는 극심한 혼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결국 왕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며 군신 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진다.
인조 시대의 혼란과 국치의 전주곡이 된 '이괄의 난'은 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대한 이괄의
불만에 의해 야기된 사건이라는 것이 사관들의 통평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좀더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이 사건은 이괄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서인들의 세력 다툼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인조실록의 한 사론은 이 사건을 이괄이 인조반정
때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등 공신에 책록된데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밀려난 것에 앙심을 품고 일으킨 변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론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감안하지 않고 기술되어 있다. 이괄이 평안병사로
부임하던 시기는 누루하치가 후금을 일으켜 명의 요동 지방을 함락시키고 조선에 위협을
가해오던 때였다. 이 때문에 친명정책을 쓰고 있던 조선은 변방 방어에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변방 방어의 주력 부대 지휘관인 평안병사 이괄에게 국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인조가 이괄을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외직으로 내쫓아 그의 불만을 야기시켰다는
논평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오히려 인조는 그의 풍부한 전투 경험과 용병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
그에게 북방 수비군의 주력 부대를 맡겼다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 논리에 맞다.
당시 변방 수비를 책임졌던 사람은 장만이었다. 인조는 그 때의 상황을 준전시 상황으로
규정하고 전시에나 임명하던 도원수에 장만을 세웠고, 부원수에 평안병사 이괄을 임명했다.
사실 이 때 부원수 물망에 오른 사람은 이서와 이괄 두 사람이었다. 인조는 두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해야 될지 몰라 도원수 장만에게 부원수를 지명하도록 했는데, 이 때 장만은
이괄을 지명했다.
북방 수비대의 병력은 약 1만 5천명 정도였다. 그 중에 주력 부대 1만 명은 부원수인 이괄의
지휘 아래 영변에 주둔하고 있었고, 지원 부대 5천명은 장만의 지휘 아래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편제는 곧 부원수가 변방 수비의 실질적인 총책임자라는 것과, 따라서 도원수
못지않게 전략에 밝고 통솔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괄의 부원수 임명은 신중한 논의 끝에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괄은 이러한 자신의 중요한 책무를 통감하고 임지에 도착하여 군사 조련, 서책 보수,
진영의 경비 강화 등 여진족의 내침 방어에 몰두했다.
이괄이 이처럼 변방 수비에 몸을 아끼지 않고 있을 때 중앙의 서인들은 이괄이 변방에서 군사
1만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남아 있던 북인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1624년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그리고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변란을 꾀하고 있다고 왕에게 고변했다.
이들은 모두 한때 광해군과 친분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기자헌은 영의정까지 지낸 정치
원로였고, 이시언은 훈련 대장을 역임하고 인조 즉위 이후에는 순변 부원수로 재직중이었다.
하지만 기자헌은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귀양을 갔고, 이시언은 인조반정 때 협조한
공로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비교적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서인들에게는 위협적인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반란으로 집권한 인조는 역모에 대한 고변이 들어오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이괄을
신임하던 터라 쉽사리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조사관을 구성하여 엄중하게 조사를
진행시키도록 했는데, 조사끝에 이 고변이 무고임이 밝혀졌다. 조사 담당관들은 조사 결과를
보고하며 문회, 허통, 이우 등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 역시 이들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서인 집권 세력의 반대에 부딪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김류, 김자점 등의 집권 세력은 자기편 당인들의 고변이 무고임이 밝혀졌는데도 이괄을
부원수직에서 해임하고, 중앙으로 소환하여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인조는 이괄을
국문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 등을 중앙으로 압송하여 국문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또한 그 외에 기자헌 등 역모 혐의가 있는 40여 명의 중앙 관료들은
하옥시켰다.
이전을 한성으로 압송하기 위하여 금부도사가 영변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괄은 몹시
분노하였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변방 수비에 전력을 쏟고 있는 자신을 역모자로
몰고간 서인 세력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괄은 자신의 아들이 역모 혐의를 쓰고 압송되어 만약 고문을 못 이겨 거짓 자백이라도
한다면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했다. 기왕에도 중앙의 서인 관료들을
좋아하지 않던 그였다. 마침내 그는 아들을 잡아가기 위해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괄은 우선 자신과 함께 역모 혐의를 쓰고 한성으로 압송되던 한명련을 구출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휘하에 있으면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이었다. 출중한
용병력과 뛰어난 무인 정신을 소유한 그는 당시 최전방에서 순변사로 재직하다가 불시에
압송되던 중이었다.
한명련을 합류시킨 이괄은 자신에게 항복하여 수하가 된 왜병 포로 100명을 선봉으로 삼고
전병력 1만 명을 이끌며 영변을 출발하여 도성으로 진격했다. 이 때가 1624년 1월 22일로
인조 즉위 10개월 만이었다.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해 곧바로 도성으로 향했다. 장만은 이괄에게
잡혔다가 풀려난 군관 남두방을 통해서 이괄의 반란 사실을 듣고 있었으나 5천명의 지원
부대로 1만 명의 주력 부대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단 자기 휘하의
군졸들을 결집시켜 성문을 닫은 뒤 이괄 부대의 기습에 대비하면서 중앙에 반란 소식을 알렸다.
이괄 부대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한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진군은 철저히
샛길을 통해 이루어져 황해방어사나 경기방어사의 부대도 미처 그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진압군과 처음으로 접전이 이루어진 곳은 황해도 황주였다.
그곳에서 이괄 부대를 가로막은 것은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끄는 부대였다. 그들 두사람은
이괄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이괄은 가급적이면 정면 돌파를 피하고 급습을 통해
그들을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괄은 우선 부하 장수 허전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진압군에 투항하게 하여 적의 경계를
늦춘 다음 급습하였다. 결과는 이괄의 대승이었다. 진압군을 누른 이괄은 관군 선봉장
박영서를 죽이고 다시 도성을 향해 재빠르게 진군하였다. 그토록 도성 진입을 서두른 것은
아마 도성 내에 살고 있던 가족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성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아내와 동생 이돈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괄 부대의 두 번째 전투는 개성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평산에서 벌어졌다. 이때
관군은 방어사 이중로와 평산부사 이확이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여울을 경계로 삼고 이괄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잠복 정보를 입수한 이괄 부대의 급습으로 관군은 다시 대패했다.
세 번째 전투는 임진강 나루터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이괄은 한명련의 노련한 조언에
힘입어 관군을 대파하고 벽제로 진출했다.
한편 임진강 전투에서 관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와 서인 세력은 기자헌 등 옥에
갇혀 있던 수십 명의 대북 세력들이 반란군에 내응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하고 그들을 모두
처형시켰다. 그리고 한성을 버리고 서둘러 공주로 피난을 떠났다.
이괄의 부대가 마침내 한성에 당도한 것은 출군 19일 만인 2월 10일이었다. 그들은 도성에
당도하자 우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반란군이 승리하여 새로운 왕이 즉위할 것임을 알렸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사상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하기는 처음이었다. 그 때까지 도성을
점령하면 승리한 것으로 간주했던 만큼 이괄 부대는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곳곳에 방을 붙여 주민들이 생업에 충실하도록 민심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들의 한성
점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이 도성을 점령하자 곧 뒤쫓아온 장만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만과 정충신, 남이홍 등은 작전을 짠 끝에 북산의
길마재에 진을 쳤다.
이괄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관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반란군의 선봉장은
백전노장인 한명련이 맡았다. 하지만 지형상 유리한 지역을 고수하고 있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관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자 이괄은 부상당한 한명련과 패잔병을 이끌고 급히 도성을
빠져나가 이천에 다시 진영을 조성했다. 하지만 2월 15일 이천에 도착했을 때 반란군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러자 전세를 회복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괄의 부하들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해 버렸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조선 사회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내부 반란으로 왕이 쉽게
도성을 비우자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고, 이러한 정서는 난이 평정된 이후에도
조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또한 반란으로 인해 변방의 주력 부대가 상실되어 북방
수비가 허술해졌고, 이는 후금의 침략욕을 자극시켜 결국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정묘호란은 다시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왕이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정묘호란
이괄의 난이 평정된 지 3년 만인 1627년 1월 그동안 호시탐탐 내침을 노리던 여진족이
대대적인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던 조선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임진강 이북을 점령당했다가 화의 조약을 맺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있는 틈을 타서 건주위
추장 누루하치를 추대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 1610년 후금을 세웠다. 이후 그들은 비옥한
남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명나라를 침략하였다. 그러자 명은 10만의 대군을 조성해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명의 요청을 받고 출병하긴 했으나 명이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세에
몰리자 광해군은 중립주의 외교 노선을 취해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과 휴전을 맺도록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단 전란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명과 후금의 싸움을 관망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국방을 강화시키고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광해군의 이런 전략 덕분으로 조선은 한동안 전란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출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천명함으로써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조선은 대명 사대주의의 길을 걸으며 공공연히 명을 후원하며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보호해 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이 같은 배금 정책은 결국 후금을
자극하였고, 조선이 이괄의 난으로 국방이 허술해지자 후금은 3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기에 이르렀다.
후금의 장수 아민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은 것은 1627년 1월 중순이었다.
압록강을 넘은 그들은 순식간에 의주를 점령한 다음 주력 부대는 용천, 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했고, 일부 병력은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의 모문룡 부대를 공략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을 비롯 여러 곳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후금군을 저지하는
데에 실패했고, 모문룡 역시 가도에서 대패하여 신미도로 패주하였다.
이렇듯 후금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해오자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대신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이 때 평산에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던 장만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예성강 남쪽인 개성에 진을 치고 적과
대치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김상용을 유도대장에
명하여 한성을 지키게 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후금군은 후방의 위협을 염려한 나머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평산에 머무르며
조선에 화의를 제의하였다.
후금은 화의를 제의하는 서신에서 일곱 가지의 침략 이유를 대며 세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후금에 압록강 이남 변경 지역 땅을 할지할 것, 둘째, 명의 장수 모문룡을
잡아보낼 것, 셋째, 명나라 토벌에 조선 군사 1만 명을 지원할 것 등이었다. 후금은 2월 9일
후금의 부장 유해와 후금에 항복해 있던 조선 장수 강홍립을 보내 이 서신을 전달하고 화친의
뜻이 있음을 전했다.
조선 대신들은 이 서신을 받고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자와 이를 반대하는 척화론자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후금군을 상대할 여력을 상실했음을 실감한
대신들은 최명길 등 주화론자의 주장에 따라 그들과 화의 교섭을 하기에 이르렀다.
화친 과정에서 후금은 명나라 연호인 천계를 사용하지 않고, 왕자를 인지로 달라고 몇 가지
조건을 더 덧붙였다. 이에 조선은 왕자는 아직 어려서 보낼 수 없다며 종친 이구를 왕제라고
하여 후금 진영에 보내고 병조판서 이정구, 이조판서 장유 등으로 하여금 교섭을 진행하도록
했다.
조선의 화의 조건은 첫째 후금군이 평산을 넘지 않을 것, 둘째 맹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군할 것, 셋째 후금군은 철병 후에 다시 압록강을 넘어서지 않을 것, 넷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다섯째 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 것을 인정할
것 등이었다.
조선의 화친 조약은 한마디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테니 더 이상 조선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후금이 조선의 이 제의를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이 때
조선과 후금이 맺은 조약을 흔히 정묘약조라고 한다.
조선과 후금의 이 조약은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 동안
야인으로 배척해 오던 여진족과 형제 관계를 맺은 것은 힘에 밀려 패전한 입장에서 취한
치욕적인 조치였을 뿐만 아니라 후금에 대해 세폐를 바쳐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마저 안게
되었고, 후금 역시 비록 조선과의 맹약으로 세폐를 통해 물자 조달을 약속받았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궤멸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금 경향이 더욱 고조되어 여전히 배후에 불안의 씨앗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군사력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고 후금은 명과의 싸움 때문에 섣불리
조선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런 양국의 내적인 어려움이 결국 양쪽
모두 불만스러운 정묘약조를 성립시킬 수밖에 없게 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병자호란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고 식량을 공급해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 왔다.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 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 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의 요구 사항이 이처럼 터무니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 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 해 2월에 용골대, 마부대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 인조비 한씨 문상을 겸할 요량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들은
맹약을 바꿔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개약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후금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이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극간했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민가의
마필을 빌려 급히 본국으로 도주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선 조정이 평안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그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 이 유문은 전시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유문을 읽은 후금 태종은 조선을 재차 침략할 뜻을 비친다. 그리고 이 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였으며,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은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하지만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조선 조정은 그들의 제의를 묵살해 버린다. 그 해 11월 청은 다시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내세우는 인물들을 심양으로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이번에도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시해 버렸다.
그 해 12월 1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2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부윤 임경업의 장계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이었다. 그리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청군이 그렇게 빨리 밀고 내려올지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장계로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고,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4일
개성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인조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에게 주사대장을 겸직시켜
강화도 수비를 명령했다. 또한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원손, 둘째아들 봉림대군, 셋째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 자신도 그날 밤 도성을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와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를 포기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사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최명길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끌게 하고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 등은 그곳이 지리적으로 불리하다는 이유를 대며 야음을 틈타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했다. 다음날 15일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떠나려
했지만 폭설로 인해 말을 움직일 수가 없어 포기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남게 되자 한성 주변의 관리들은 각기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집결하였고, 이에 총병력은 약 1만 3천이 되었다. 이 때 성 안에 있는 식량은 양곡 1만 4천
3백 석, 장 220항아리 정도로 약 50일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한편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청 태종은 1월 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성 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조선군들은 싸움에서 모두 대패하여 패주하고, 명에 청한 원군도 내부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이리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 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수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인조가 출성하여 항복할 결심을 굳히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은 적진을 왕래하며 조선측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청군 진영에서는 용골대, 마부대 등의 사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회담에 응하였다.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 요구 사항은 총 열 한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세폐(공물)를 보낼 것 등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단도의 동강진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 때 청 태종은 패륵 아탁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으로 하여금 병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 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유림을 수장으로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으로 하여 청군을
도와 싸우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를 몰래 보내어 명제독
심세괴에게 피하도록 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청군에 의한 군사적 피해 못지 않게 민간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군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군하면서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낼 만한 입장이 못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꽤나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 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인조실록' 편찬 경위
'인조실록'은 총 50권 50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23년 3월부터 1649년 5월까지 인조 재위
26년 2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50년 8월 1일에
시작되어 1653년 6월에 끝마쳤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총재관 이경여, 김육을 비롯하여 도청당상 3명, 도청낭청 25명,
일방당상 5명, 일방낭청 7명, 이방당상 3명, 이방낭청 6명 그외 실무진 15명 등 도합 66명이었다.
* 인조시대의 세계 약사
당시 중국에서는 명이 서서히 몰락하고 청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서구와의 교역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일본 문화와 서구 문화의 접목이 시도되고 있는 시기였다. 또한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의 힘이 약화되고 영국의 침탈이 가속화 되었다.
유럽은 30년 전쟁 및 종교전쟁 시대를 끝냈으며,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증대시키고
아메리카에 도시를 건설하고 뉴질랜드 등 남태평양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또 이 시기에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홉스의 <시민론>, 밀턴의 <언론의 자유>,
갈릴레이의 <천문대화>, 뒤마 피스의 <춘희> 등의 저작들이 나왔고, 파스칼은 유체의 압력에 대한
'파스칼의 법칙'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