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21대 영조실록]:1. 연잉군 금(영조)의 멀고도 험한 재위(51년7개월)의 길 2. 영조의 탕평 정국과 조선 사회의 변화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7. 11. 03:28



[21대 영조실록]

 

1. 연잉군 금의 멀고도 험한 재위의 길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를 맞이 했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다준 사람은 천비 소생의 두 후궁이었다.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와 무수리(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는 종) 출신의 숙빈 최씨가 바로 그들이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균이고,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금이었다. 균은 1688년에

태어났고, 금은 1694년에 태어났으니 그들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었다.

왕자 균은 14세가 되던 1701년 생모인 희빈 장씨를 잃었다. 부왕 숙종에 의해 어머니가

사사되는 것을 본 그는 그 때부터 병을 얻었다. 또한 생모 장씨가 사약을 받는 자리에서 균의

하초를 못 쓰게 만들어 생산 능력마저 상실했다. 왕자 균의 이같은 결점은 이복동생 금에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안겨 주었고, 한편으로는 그에게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했다.

왕자 균은 생후 2개월이 될 무렵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희빈 장씨가 사사된 14세 때부터 병을 얻어

세자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세자 균이 제왕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1717년 노환으로

병약해진 숙종은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 금을 세자 균의 후사로

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병약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야 하겠지만 세자 역시 건강이 좋지 못하므로 연잉군이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

대리청정을 하라고 명했다.

연잉군의 세자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세자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측은 세자를 바꾸려 한다고

비난하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 때부터 조정은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에 의해 일대 당쟁에 휘말렸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720년 세자 균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니 그가 경종이었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금의 세제 책봉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지 않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조정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자 소론측의 대대적인 반대 상소가

이어졌다. 우의정 조태구를 비롯해 사간 유봉휘 등도 시기 상조론을 펴며 왕세제 책봉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노론측의 대세에 밀려 소론측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연잉군은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 때가 경종 즉위 1년 만인 1721년이었다.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자 노론은 실권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 이번에는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노론측이 이러한 주장을 펴자 경종은 일단 비망기를 내려 왕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소론의 찬성 최석항, 우의정 조태구 등은 대리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줄 것을

경종에게 강력하게 간언했다. 이어 중앙 조정은 물론 지방의 수령, 감사, 찰방과 성균관 학생 및

각 도의 유생들까지도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또한 대리청정 명령을

받은 왕세제 연잉군도 네 번이나 청정 명령의 회수를 청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노론측 중신들도 의례상 백관의 청정을 베풀고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경종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몰라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고 하교를 내렸다.

시실 경종은 이 때 노론측 백관들이 한 번 더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할 것을 기대했다.

 

관례상 세 번에 걸쳐 이같은 청이 왔을 때 왕은 못 이기는 척 자신의 말을 거둬들이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 왕의 체면이 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론측은 대리청정이 왕의 확고한 의지라고 판단하고 청정 명령을 거두라는 의식을

파해버렸다. 그리고 곧장 왕명을 쫓는다는 명분을 내걸며 숙종 말년의 세자 대리청정의 절목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를 급히 올렸다.

노론의 태도가 이같이 급변하자 당황한 경종은 소론 대신 조태구를 불러들여 사태를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세자 대리청정은 숙종이 연로하고 병이

중하여 부득이하게 내린 조처였지만 경종은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고 즉위한 지도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였다.

이같은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측 역시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노론 대신들은

종전에 대리청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차서가 잘못임을 인정하고, 또 다시 청정 명령의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노론측은 이같은 일관성 없는 행동 때문에 소론측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 처음에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전국 유생과 관료들의 반발이 있자 청정

명령을 거두라는 청을 하고, 다시 청정 명령의 하교가 내려지자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명분이

좁아지자 또 다시 청정 요구를 거둬들이고 청정 명령 취소를 요구했던 것이다. 노론의 이같은

행동은 결국 소론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일로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입지를 다진 소론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죄하여 축출시켰다. 이 때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도 모역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연잉군은 갖가지 고초를 겪게 된다.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던 장세상이 소론측 사주를 받은

내관 박상검, 문유도 등의 모함으로 쫓겨나고, 소론측 대신들에 의해 경종을 문안하러 가는

것도 금지 당했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왕후 김씨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 대비는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전횡을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으로 연잉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2. 영조의 탕평 정국과 조선 사회의 변화

   (1694-1776, 재위 기간 17248-17763, 517개월)

 

,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 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권 지향적인 무리들에 의해

당쟁은 지속되고, 급기야 왕권에 도전하는 변란이 발생하기도 한다. 영조는 이같은 난국을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타개하며 지속적으로 조정을 탕평 정국으로 이끌고 나가는 데 성공한다. 한편,

영조의 탕평 정국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재야에서는 실사구시의 학문이 일어나 사회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영조는 1694년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무수리 출신 화경숙빈 소생으로 이름은 금이다.

이후 1699년 연잉군에 봉해지고, 1717년에는 숙종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한 바 있으며, 1721

(경종 1)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248월 이복형 경종이 죽음에 따라 조선 제21

왕으로 등극하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이에 노론측의 이의연이 경종 집권 당시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장하다 처벌된 대신들을 신원해야 한다는 성급한 주장을 펴다가 소론측의 탄핵을 받아

오히려 유배되고 말았다.

또한 노론의 송재후는 김일경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임인옥사에 대한 진상 조사 결과를 기록한

교문의 초고 중에서 3건의 문건을 들어 세제 시절의 영조를 모욕한 것이니 단죄할 것을

상소했다. 3건의 문건이란 종무(노환공자가 자신의 형을 죽인 것), 사구(진시황제가 맏아들

부소를 죽이고 작은 아들 호해를 세운 것), 접혈(당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것) 등으로 모두

영조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김일경의 이 같은 문건은 사실 세제 연잉군이 경종을 죽이려 한

극악무도한 인간으로 몰고가는 것이어서 김동필 같은 소론 내부의 인물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송재후의 상소가 있자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가 전국 각 처에서

빗발쳤다. 그래서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하였으며, 김일경은 끝까지 불복하여

사형되었다. 또한 고변으로 임인옥사를 유발하여 공신이 된 목호룡의 문건 중에도 영조에 저촉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국문당하였고, 끝까지 불복하다가 처형되었다.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 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노론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정미환국으로 정권을 잡게 된 소론측은 다시 임인년 사건을 들고 나와 4대신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이에 영조는 그들 4대신의 죄명은 씻어주고 관작만 삭탈하는 선에서 소론측과

타협을 보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1728년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급진 세력이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 교체를 기도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 사건은 경종이 갑자기 죽자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들이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하여 밀풍군 탄

(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자 한 모반이다.

군사 동원 계획까지 마련되었던 이 역모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노론이 밀려나고

온건 소론 세력이 기용되자 동조자가 줄어들고 모의가 노출되어 최규서, 양성인, 김중만 등의

고변으로 탄로나고 말았다.

모반 계획이 탄로나자 이인좌를 비롯한 역모 세력들은 반군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각 읍에 격문을 띄워 병마를 모집하고,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앞세우고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안성, 죽산, 청주, 상당성 등에서 대패하여 궤멸되고 말았다.

이인좌가 반군을 일으켰을 때 영남의 정희량, 호남의 박필몽 등이 이에 호응하여 반군을

일으켰으나 안성, 죽산 싸움에서 이인좌,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됨에 따라 타격을 입어

관군에게 패하여 궤멸되었다.

이 난의 평정에는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측 인사였기 때문에 이후의

정국에서 소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반면에 영조는 이 사건으로 탕평책의 명분을 강화시킬 수

있었으며, 왕권의 강화와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729년에는 기유처분으로 노, 소론 내의 탕평 세력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 때 영조가 취한 정책은 쌍거호대였다. ,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고,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 뒤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자 한층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쌍거호대 방식을

극복하고 유재시용(惟才是用), 즉 인재 중심으로 인사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 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본 궤도에 오르자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

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그런데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도세자 사건'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다. 하지만 큰아들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요절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 사도세자 선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영조는 더 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1761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친히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아들을 죽인 자신의 행동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한편 사도세자 사건으로

조정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한 벽파와 동정한 시파로 분리되어 새로운 당파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영조는 정치적 신념으로 이끌던 탕평 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해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간의 결혼을 금지시킨 이른바 '동색금혼패'를 집집마다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영조의 이같은 철저한 탕평 정책으로 왕권은 강화되고 정국은 안정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죄수의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우선 1725년에 주리를

틀어서 국문하는 압슬형을 폐지했으며,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 죄를 추죄하여 죽이는

형벌을 금지하였고, 1729년에는 사형수에 대해서는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 기했다.

또한 1774년에는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남성의 포경을 자르는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 하였다.

영조 시대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균역법의 시행이었다. 양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균역법의

시행으로 일반 양민들의 의무인 양역의 불균형에 따른 백성들의 군역 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1725년부터 각 도의 방죽을 수축하여 가뭄 피해에 대비했고, 1729년에는 궁궐에 속한

전답과 병영의 둔전에도 정해진 양 이상을 소비했을 경우 세금을 부담시켰다.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오가작통은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은

마을의 최소 단위를 말하며, 理正은 마을의 책임자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마을의 사건이나

인적 변화를 관아에 반드시 알릴 의무가 있게 한 제도였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정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분에 따른 국가에 대한 의무 사항을 더

분명히 한 점이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천민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해 신분에 맞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시켰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려 양역의 증가를 꾀하였는데, 1730년에는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면 양인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고, 여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방 정책을 살펴보면 1725년 화폐 주조를 중지하고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 제작, 배치하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맹위를 떨쳤던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이같은 국방 정책은 변방에도 적용돼 요새 구축을 늘리는 한편, 1727년에는 북관군병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훈련시켰으며,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

개축 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했다.

여러 분야에서 시도된 이같은 변화 이외에도 영조 시대에는 문화적인 성과도 많았다.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기도 하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민간에 반포시켜 일반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감란록'을 만들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였으며,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

세계를 담은 '퇴도언행록'을 간행케 하였다. 그리고 1736년에는 '경국대전'을 보강했으며, 여성들을

위해 네 권의 책을 묶은 '여사서'를 언역하고, 1742년에는 '천문도', '오층륜도', 이듬해에는

균역의 전형인 '양역실총'을 인쇄하여 각 도에 배포했다.

이외에 '경국대전'을 보수한 뒤 새롭게 제도적으로 바뀐 것들을 반영한 '속대전', 1747년의

'황단의 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 1749년에 만들어진 '속병장도설', 1753년에 편찬된

'누주통의', 영조 자신의 왕위 승통의 정통성을 천명하는 1754년의 '천의소감', 1747년의

'삼국기지도', '팔도분도첩', '계주윤음' 등과 1765년의 '해동악장', '여지도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 사전인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 등이 있다.

영조 자신이 친히 쓴 글로는 '악학궤범 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해 쓴

'위장필람', 그리고 '어제경세문답', '어제경세편', '백행원' 등 십여 권의 책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재야에서는 실학이 확대되면서 신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영조의 후원을 받아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신경중의 '도로고' 등이 편찬되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이처럼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했으며,

17763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517개월),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그는

83세를 사는 동안 정성왕후 서씨를 비롯한 6명의 아내에게서 27녀의 자녀를 얻었다. 능은

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