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21대 영조실록]:5.실학의 선구자들-안정복,홍대용 6. '영조실록' 편찬 경위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7. 11. 03:31



[21대 영조실록]

 

 

5. 실학의 선구자들

 

역사학의 아버지 순암 안정복(1712-1791)

안정복은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낸 안극의 아들로 성화 이익의 문인이다. 그는 1712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717년에 외조모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영광의 월산에 갔다가

그 곳 농장에서 2년간 생활한다. 그리고 1717년 조부 안서우가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남대문 밖 남정동으로 이사와서 10세가 되던 1721년부터 학문을 시작한다.

그는 그 뒤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173625세 때 선영이 있는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 정착하였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남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때부터

당쟁에 휘말려 벼슬길이 끊겼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경학은 물론 역사, 천문, 지리, 의약 등

다양한 부분에 걸쳐 깊은 식견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닦은 학문을 바탕으로 26세 때 '치통', '도통' 등의 책을 엮었다. 전자는 우리 나라

역대 왕조의 변천을 기록한 것이며, 후자는 유교 사상의 계승 계통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3

뒤에는 그 동안 연구해온 고전에 관한 연구서로 '하학지남'이라는 저서를, 31세 때에는 여성의

행동 규범에 관한 책인 '여범'을 저술하였다.

이같은 저서를 만든 이후에 그는 자신의 학문이 미진함을 깨닫고 35세에 스스로 남인 집안

출신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심취하였던 학문은 이황의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황의 보수적 경향이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던 이익을 찾게 되었다.

안정복은 비록 늦깎이로 이익을 찾았지만 그의 학자적 기풍과 사상의 위대성을 흠모하였기에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배움에 임했다. 그가 이익의 문하로 찾아들었을 때 이익은 이미 66세의

고령이었지만 학구적 열정만은 대단했다. 그리고 성실한 자세로 자신에게 학문의 진리를 구하는

제자에게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익은 그의 질문에 대해 세세하고 정확하게 대답했으며 혹 대답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여지없이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이익의 이러한 세밀하고 성의 있는 가르침 덕분으로 학문의

연구 방법을 터득하였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고와 사회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실천적

행동의 범위 등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비록 재야에 묻힌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 전반에 대해 당시의 어떤 학자보다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익혔던 사학, 천문, 지리, 의약, 종교 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자주 교류하는 유생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뛰어난 자질과 학구적 능력에 대한 소문은 어느새 한성에까지 퍼져 그는 174938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이 때 그가 받은 직책은 강화도에 있는 영조의 별장인

만령전의 참봉이었으며, 이어 내직으로 들어가 조정의 식량 창고의 참사, 중종의 묘를 지키는

직장, 사헌부 감찰, 익위사익찬 등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와 65세 때 목천현감이 되었다.

관리 생활 중 특히 한직에 속했던 중종의 묘지기(직장) 시절에 그는 왕릉이 있던 경기도

광주의 역사 및 지리에 관한 자료를 모아 '광주지' 두 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이익의 영향을

받아 집필한 최초의 실학적 성과로서, 상세하고 정확하게 작성되었기에 전국 각 부와 군, 현의

지방지 편찬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이 기간에 그는 또한 역사학에 심취하여 '임관정요'를 완성했다. 이 책은 지방 행정에 관한

위대한 정치가와 학자들의 교훈을 담은 정어, 지방 행정의 모범적인 실례를 기록한 정적, 그리고

현실 속에서 지방 행정의 이상형을 묘사한 시조 등 세 편으로 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실학자

들의 정책론을 집약하는 한편, 부패한 지방 관리의 범죄적 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복의 획기적 성과는 '동사강목'의 집필이었다. 175645세에 집필에 들어간 이

본격적인 역사서에는 그의 사상뿐만 아니라 이익의 사상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 책을 쓰기에

앞서 여러 번에 걸쳐 스승 이익과 역사 문제에 대해 토론했으며, 스승의 호응 속에 집필을

진행하였다.

집필 도중 그는 종이값이 모자라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그는

스승 이익의 격려를 구했다. 물론 이익 역시 엄청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제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목차를 만들어 결점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마다

않고 이에 응해 주었고, 초고를 보내 잘못된 곳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역시 정성을 다하여 이에

응해 주었다.

스승의 극진한 애정과 격려로 가까스로 집필을 이어가던 안정복은 작업을 시작한지 3년 만인

1759년 드디어 20권의 '동사강목'을 완성하게 된다.

'동사강목'은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 서술 내용이 과거의

것과는 판이하다. 우선 이전의 역사서들이 한결같이 '삼국사기''고려사', '동국통감' 같은 정사를

베끼거나 추려낸 것인데 비해 '동사강목'은 이 정사에 잘못 기록된 내용들을 찾아내 통렬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그 때까지 일개 스님의 저작으로 사서 편찬에 전혀 참조조차 하지 않았던

일연의 '삼국유사'의 내용과 고대사에 관련된 야사들을 과감하게 인용하였다. 그리고 각 책들을

대조하며 그 문헌의 출처를 명확히 하고 내용에 관한 비판을 곁들였다. 한 예로 전라도에 사는

기씨가 기자의 자손으로 기술되어 있는 역사서를 통렬히 비판하며, 전라도의 기씨와 기자와는

전혀 무관하며 이는 기씨 자손들이 스스로 기자의 자손인 것처럼 꾸며 역사를 위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한 후 다시 한 번 대단히 위험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당시 일체

금지되어 있던 조선의 역사에 대한 책을 집필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기존의 역사 학자들이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당시로 보면 현대사의 기술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 책의 이름은 '열조통기'

였다. 조선 태조부터 영조까지의 조선사에 해당하는 이 책의 편찬을 위해 그는 9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그 사료들을 기초로 176756세 때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역대의 각종 저술에 있는

논설을 발췌하여 그대로 인용하고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전혀 첨가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책을

편찬하였다. 말하자면 철저한 객관적인 시각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는 이미 이익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에 그를 격려할 사람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의 고독한 작업은 계속되어 마침내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위대한

저서가 세상에 유포되지도 못한 채 초고 상태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만 그의 독특한 편찬

방법은 세간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역사서 편찬 방법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밖에 야사적인 측면이 강한 '잡동산이', '성호사설유선' 등도 안정복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저작들이다. 또한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고', '천학문답' 등은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 박해와 그와 비슷한 전통적 조선 학자의 서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살면서 사상적으로 무던히도 고민하였던 그는 이같은 많은 저서들을 남겨놓고

1791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의 전통적 봉건 체제가 위협받고 중국으로부터 서학이 밀려들어 가치관이 혼재되고

세계관이 충돌하는 가운데, 그는 유교적 견지에서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에 아주

민첩하지는 못했고, 여전히 유학에만 매달려 있었기에 자체적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끈질긴 실학 정신은 후대로 이어져 민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새 하늘을 연 홍대용(1731-1783)

홍대용은 서인 노론파로서 목사를 지낸 바 있는 홍역의 아들로 1731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덕보, 호는 담헌, 홍지이다.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다를 바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으로부터 배웠으며, 그의 사상은 북학파의 실질적 모체인

박지원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몇 번에 걸쳐 과거에 응시한 바 있으나 그 때마다 실패하였다. 177443세 때 음보로 종

9품의 선공감 및 세손익위사시직이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이어 1777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그 뒤 태인현감, 영천군수 등을 지내다가 1783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가 이른바 북학론을 주창할 수 있었던 것은 1765년 겨울에 북경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던

덕분이다. 성인이 된 뒤 천문학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는 선진의 학문과 서학을 접하고

싶은 욕구에 가득 차 있었고, 이 때문에 평소 청나라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조정이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청나라 사절단에 그의 숙부인 홍억이 서장관으로 지명되자 그는

홍억의 비서역으로 북경을 방문한다. 12월에 북경에 도착한 사절단 일행은 이듬해 2월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그곳의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홍대용과

교류를 나눈 사람은 육비, 엄성, 반정균 등 청나라 문인이었다. 그는 이들과 필담을 주고받으며

유학에 관한 이론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역사, 종교, 풍속 등에 관해 집중적으로 토론하였다. 그는

이 필담을 정리하여 '건정필답'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한편 그는 북경에 체류하면서 청나라의 국립 천문대인 '흠천감'을 방문하여 그 책임 부성에

있는 두 사람의 독일인에게서 서양의 지식을 직접 전해듣고, 자신이 홀로 연구해온 천문학에

관한 의견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소개로 북경의 천주교 교회에 있던 많은 천문학

전문서와 천체 관측 시설을 돌아본다.

흠천감에서 특히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관상대였다. 그 내부는 외부인에게 공개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는 밤을 새우며 그곳 관리에게 부탁해 마침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중국 역대의 천제 관측 기구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들여온 것들도 많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그는 그 기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한 감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후 북경에서 돌아온 홍대용은 청에서 사귄 친구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학문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자신의 경험담에 감동을 받아 북경 방문을 염원하던 이덕무,

박제가 등이 사절단으로 청나라를 방문할 때 북경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안내를

부탁하기도 했다.

홍대용은 북경의 세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들을 모아 '항전척독'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었다. 그리고 북경 방문의 내용을 집약시켜 '연기'를 편찬했는데, 이는 박지원에게 영향을 미쳐

'열하일기'를 탄생시키게 된다.

또 그의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담' 역시 북경 방문에서 얻은 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의무려산에 사는 실옹과 조선의 학자 허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모든 저서들은 60여 일 동안 머물렀던 북경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게는 북경 방문이 새 하늘이 열리는 일이었고, 새땅을 꿈꿀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고,

그런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문집이 '담헌서'이다. 여기에서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을 주장했고, 인간도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생명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는 무한하다는 우주무한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상대주의적 자연관에 근거한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 사상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중국과 서양을 모두 같은 선상에 놓고 상대화하여 서구에 대한 오랑캐 개념을

부정했으며,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든 더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종래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상대화하여 평등한 존재로 보았다. 또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면서 교육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직업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회 정치 이론을 펼쳤다.

그의 사상과 과학관은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론 서양 과학과 도교 사상의 영향이

컸겠지만 양반 가문에 태어난 학자가 계급 철폐를 주장하고, 균등한 교육과 능력에 다른 관리

등용을 주장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전설과 우주무한론 등은 비록

그 감상주의적 일면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과학 발전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6. '영조실록' 편찬 경위

 

'영조실록'은 총 1278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248월부터 17763월까지 영조 재위

517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7782월에 시작되어 17818월에 완료되었다. 편찬 인원은 총재관 김상철,

서명선, 이은, 이휘지, 정존겸 등 5인을 비롯하여 도청당상 17, 도청낭청 19, 각방당상 27,

각방낭청 58, 등록낭청 37, 분판낭청 30인을 합해 총 183인이었다.

 

영조 시대의 세계 약사

영조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는 서서히 유럽과의 무역을 허락하고, 인도는

영국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해간다. 한편 유럽에서는 영국의 힘이 강성해지고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힘이 약화된다. 그리고 많은 근대 사상가들이 나타나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속화되어 마침내 대륙회의가

조성된다.

문화면을 살펴보면 문학적으로는 독일의 괴테와 레씽이 부상하고, 음악적으로는 모짜르트,

바흐, 헨델, 하이든 등의 대가들이 활동한다. 한편 증기기관, 방적기 등의 산업 관련 발명품들이

쏟아지고, 화학적 원소들을 발견하는 등 과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