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대 철종실록]:5. 삼정의 문란과 민란(진주민란)의 발생, 6.조선 말기의 사상운동(동학의 탄생),7.철종실록 편찬경위
[제25대 철종실록]
5.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발생
철종 연간은 지배층에 의한 농민 수탈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농민 수탈의 주내용은 삼정의
문란으로 요약되는데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바로 그것이다.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 1결당 전세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물게 되어 있었으나 전라, 경상 지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되었다.
한편 군정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의 증가로 말미암아 계속 가난한 농민에게만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 황구첨정
등을 강행했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게 되어 있는 곡식인데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환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일은 세도 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기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토호 세력의 횡포 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삼정의 문란이 겹쳐 백성들이
부담해야 되는 결세가 높아져만 갔고 그것이 결국은 민란의 커다란 원이이 되었다.
1862년 철종 13년 단성에서 시작하여 전국에서 37차에 걸쳐 민란이 거세게 일어나는데 이 해에
일어난 민란을 통칭해 '임술민란'이라 한다.
당시는 조선 후기의 납속제 실시에 따른 신분제의 붕괴와 더불어 농민층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아울러 외척 세도 정치의 폐해가 전국 각지에 미치지 않는 데가 없던 시기였다. 또한
계속되는 재해로 수입은 감소하는 반면에 구휼 등에 쓰이는 재정 지출은 크게 늘어 국가 재정이
적자를 면치 못하였고, 이에 따른 세수 증가로 관리들의 수탈이 크게 늘어 농촌 사회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집과 농지를 버리고 떠도는 유민이 되거나 유민 직전에
관에 항의하는 식으로 봉기하였다. 임술년에 일어난 민란이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흔히 '삼정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2월 18일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만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 동안 23개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의 경위도 대개 이 진주민란과 비슷했다.
농민 봉기는 보통 2일에서 7일간 계속되었으며, 민란이 3월에서 5월 사이 춘궁기에 집중되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민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기한
농민들은 한결같이 관리들의 횡포와 경제적 수탈을 막고 삼정의 폐해를 거두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관아를 습격, 수탈의 원흉인 관리와 아전들을 처단하는가 하면 장부를 불태우고 창고를
탈취하였다. 또한 관리와 결탁해 농민을 못 살게 굴던 양반과 토호의 집을 때려부수고 곡식과
재화를 탈취하는가 하면 죄수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임술민란의 피해 상황을 보면 지방
이속으로서 살해된 자가 15명 이상, 부상자는 수백 명에 달하고 가옥이 불타거나 파괴된 것은 약
1천 호, 피해 액수는 100만 냥을 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긴급 대책으로 안핵사와 선무사를 파견하여 난을 수습하고 민심을
가라앉히도록 하는 한편, 봉기 지역의 수령은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진주에 파견된 안핵사
박규수의 상소로 시정책이 건의되고, 그 결과 1862년 5월 26일 민란의 근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조정 대신들로 구성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윤8월까지 4개월 동안
'삼정이정절목'41개조를 제정하여 반포, 시행하였다. 그 주요 골자는 전정, 군정은 민의에 따라
현황을 시정하고 환곡은 파환 귀결에 따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교구책으로 민란은 한때
진정되는 듯했으나 5월과 6월의 가뭄과 7월의 심한 물난리 때문에 민심은 계속 흉흉하였다.
그 뒤 삼정이정청의 업무가 비변사로 넘어간 10월에는 새 정책을 페지시키고 삼정 제도로
돌아감으로써 농민군이 바라던 근본적인 제도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창원, 황주,
청안, 남해 등지에서 항쟁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6. 조선 말기의 사상운동 - 동학의 탄생
철종 대는 안팎으로 변화가 휘몰아치는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 지진, 역질 등이 창궐하여 전국적으로
농민 반란의 양상이 나타나던 시기였으며, 밖으로는 이양선의 출현과 천주교의 전래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외적인 위기 시대에 그에 대응할 만한 사상으로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다. 민생은
뒷전에 있고 몇몇 세도가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왕조에 실망한 백성들에게 인간 평등과 존중의
길을 제시한 동학이 나타나자, 그것은 영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조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이 널리 서민층의 반왕조적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사상
운동이자 종교로 대두된 데에는 나라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 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양반 사회의 신분 차별과 적서 차별을 반대하던 서민층에서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대해 공명하는 자가 많았던 것은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최제우 자신
또한 몰락 양반가의 서출로 태어났으니 그러한 교리가 세워진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체득하고 이치를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 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 촉진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 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관계가 상하 주종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자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들여져 그 후 교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
해 11월 20일 최제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한다.
7. '철종실록'편찬 경위
'철종실록'은 총 16권(부록1권)으로 되어 있으며 1849년 6월부터 1863년 12월 8일까지 철종
재위 14년 6개월간의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부록에는 행록, 시책문, 애책문, 비문, 지문,
행장 등을 기록하였다.
이 책은 1864년, 고종 1년 4월 29일에 편찬을 시작하여 1865년 윤5월에 출판되고 각 사고에
봉안되었다. '철종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실록청 당상은 총재관에 정원용, 김흥근, 김좌근,
조두순, 이경재, 이유원, 김병학, 각방당상에 김병기, 김병국 등이었다.
'철종실록'은 어느 면에서 보자면 조선왕조의 마지막 실록이라 할 수 있다. 뒤에 편찬된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설치한 이왕직에 의해 편찬됨으로써 사실의
취사 선택 기준이 이전의 실록과 달랐으며, 서술의 객관성도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실록 본래의
편찬 방법 및 기준에 따라 편찬된 실록으로는 '철종실록'이 마지막이다.
편찬 담당자에 철종 대에 권세를 잡았던 안동 김씨 일문이 많아서인지 '철종실록'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왕에 대한 일화나 칭송을 자자하게 싣고 있다.
철종 시대의 세계 약사
철종 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직면해 있던 시기였기에 수많은 전쟁들이 터지고, 서구열강의
식민지 침략이나 이권 쟁탈이 가속화되는 등 제국주의적 침략주의가 횡행했던 시기다.
청나라가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서구 열강들에게 이권을 넘겨주는 등
안팎곱사등이의 위기에 놓이고,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열강의 식민지가
된다. 일본은 서구 열강들과 화친을 맺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조선보다 근대화에 한발 앞서게
된다.
유럽에서는 작은 나라들의 합병과 독립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며,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은
새로운 식민지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북군의 승리로 노예해방이 선포되어 획기적인 변혁기를
맞게 된다.
한편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어 세상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하면, 파스퇴르의 미생물
분석 등 과학적 연구성과들이 많이 나타나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