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연암 박지원의 반성문이 된 이방익의 <표해가>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21. 7. 19. 17:48

1542(중종 37년)~1546년(명종 1년) 제주사람 박손의 4년 유구(류큐) 체류기인 유대용의 <유구풍토기>가 있다. 제주인 고상영의 안남(베트남) 표류기(1687~1688년)는 역관 이제담의 구술정리 내용을 그대로 실은 정동유(1744~1808)의 문집(<주영편>)에 수록돼있다. 이지항은 하급무관(수어청군관·6품) 신분임에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표류경험(1756~57)을 기록(<표주록>)을 남겼다.

또 이방익이라는 인물은 1796~97년 사이 제주 앞바다에서 뱃놀이 도중 대만-복건-소주·양주 등을 거쳐 북경을 통해 귀국했다. 그런데 이방익의 표류기인 <표해가>를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쓰게 된 동기가 흥미롭다. 즉 1792년(정조 16년) ‘타락한 문체를 바라잡겠다’는 이른바 문체반정을 외치면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해서 문책한 바 있었다. 그런 정조가 이방익 표류사건이 일어나자 박지원에게 “내가 전에 문체를 바꾸라고 타일었는데 과연 바꿨냐”고 물으며 ‘이방익 사건’을 기록해보라고 지시했다. 정조가 박지원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려고 이방익 사건의 문자화를 지시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방익의 <표해가>는 박지원이 정조에게 바치는 반성문이었던 것이다.

조선 표류민의 다양한 표류기. 위 왼쪽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여휘의 <유구표류기>와 이지항의 일본 홋카이도 표류지(<표주록>), 최두찬의 중국표류기인 <승사록>, 장한철의 유구(류큐) 표류기(<표해록>) 등.|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