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북한 향토사학자가 쓴 개성 이야기(실학사상의 대가 박지원)|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0. 6. 28. 17:50

 

북한 향토사학자가 쓴 개성이야기(실학사상의 대가 박지원)

 

개성에서 동대문을 지나 삼댐자리(덕암자리)를 건너가면 밋밋한 고개가 나선다. 이 고개를 황토 고개라고 부른다.

이 황토고개 약간 북쪽 후미진 곳에 우리나라 실학사상가의 대가 인 연암 박지원의 묘가 있다.

지난날 이묘는 상당히 컸는데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

박지원은 1737년 3월 5일 서울 안국방에 사는 량 반 가정에서 태여 났다. 그의 가문은 “관문대록”으로 더욱이 당시 집권 당파인 서인 노론에 속하는 집안임으로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으나 연암은 일찍부터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열여덟 살 때부터 창작활동에 열중하였다.

박지원은 서른세 살 때 장풍군 (당시는 금천군) 연암협에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창작에 몰두하였다.
마흔네 살 때 6촌 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사신으로 갈 때 그의 수행원으로
열하에 갔다 왔다.

그는 청나라에 갔다 와서 <열하일기>라는 작품집을 집필하였다.
여기에는 방대한 작품과 정론이 실려 있다.
박 연암은 마흔아홉 살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가 말년에는 벼슬을 내놓고 서울 집에서 저술사업에 몰두하다 1805년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박 연암은 자기 묘에 비석도 세우지 말며 아무런 치장도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박 연암의 무덤에는 상돌 하나 놓이지 않았다.

이곳사람들은 그 묘가 누구의 묘인지 모르면서도 ‘대감 묘’ 라 부르면서 봄가을 정성껏 성묘를 했고또 자기 집에 환자가 생겨도 이 묘에 와서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1955년 12월 김일성 주석은 <사상사업에서 교도주의와 형식주의를 극복하고 주체를 세울 데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잘 알고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야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전쟁시기 자신이 어느 인민군 휴양소에 가보니 풍경화를 걸었는데
시베리아의 눈 덮인 곳에 있는 백곰의 그림이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금강산, 묘향산 등 경치 좋은 곳이 많은데 그런 풍경화는 걸려 있지 않고 외국의 풍경화를 걸어 놓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학교들에 들어가 보니 뿌쉬낀 아니 마임중스끼 같은 외국사람의 초상화는 걸려 있는데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 등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연설이 있은 후 연암 박지원에 대한 소개 선정사업이 활발히 진행 되었다.
당시 박 산운 시인이 박지원은 자기의 선조인데 어려서 부모를 따라 개성에 와서 박 연암의 묘를 찾은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근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리하여 문예총 중앙위원회에서는  박 연암  묘를 확인하는 사업을 하였다.
황토고개에 와서 박 연암의 묘라고 인정되는 묘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 마을 노인들에게 묘주가 누구인가고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다만 전해오는 말이 ‘서울대감의 묘’라는 것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묘에는 반드시 지석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봉분을 파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상당히 큰 지석이 있었는데 뚜렷이 ‘박 지원 묘’라고 새겨져있었다. 이리하여 박 지원 묘를 확인했다.

그 후 문예총에서는 묘를 왕릉 못지않은 호화무덤으로 꾸리었다. 봉상도
더 우람차게 만들고 둘레에 화강석 판석으로 병풍석도  둘렀고 두껍고 큰
상돌도 놓고 비석을 괴임석 위에 상당히  크게 세웠다. 또한 묘 가까이에
아담한 정자도 지어놓았다.

그 후 이곳으로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박 연암
묘지는 하나의 새로운 유원지로 되어 휴식일이나 명절날에 이 곳에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품위 있게 개건된 박 연암 묘는 1960년대 말부터 차츰 버림을
받게 되었다.

당시 당중앙위원회의 지도적 지위에 있던 박 금철, 김 도만 등이 주체를
세운다고 하면서 복고주의적으로 나갔다. 이들은 다산의(목민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정하고 의무적으로 읽으라고 지시했다. 주체를 세우며 민족성을 살닌다 하면서 결혼식도 옛날식으로 남자들은 사모관대로 차려입고 여자들은 큰머리에 쪽도리를 쓰고 활옷을 입혔다. 그리고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타게 하였다.
이렇게 복고주의적 경향이 심해지자 김일성 주석은 이를 비판하면서 민족유산을 계승 발전시킴에 있어서 복고주의를 경계하며 시대정신에 걸맞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복고주의 반대, 봉고유교사상 반대라는 구호를 들고 또 좌경적으로 나갔다. 이 바람에  연암의 묘는 차츰 냉대를 받게 되었으며 여기에 배치되었던  관리선 편레도 없애버렸다. 
이렇게 되자 복고주의 광신자들은 묘를 개건하면서 잘 다듬어 썼던  석재를 떼어가기 시작했는데  심지여 병풍석도 떼어가고 상돌도 갈라갔다. 비석도 나 딍굴고, 아담하게 지었던 정자의 마루바닥도 뜯어가고 심지여 기와까지 벗겨가서 정자는 볼품없이 되었다가 그 후 기둥도 돌보지 않아 다 없어졌다.

이렇게 되여 호화무덤으로 꾸려진 지 10여 년 만에 묘는 황폐 화 되였다. 
차라리 개건하기 전의 소박한 금잔디로 덮여있던 아담하던 무덤 모습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복고주위 반대, 봉건유고사상 반대 바람에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되고  없어졌다.
개성 송악산에 있는 안화사에는 5백좌한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어느 무지막지한  자들에 의하여 5백좌한도 참변을 당했다.

해방 후 이북에서는 우리나라의 고전들은 거의 다 번역출판하거나 원문 그대로 춣판하여 광범히 보급되였다. 그래서 시 군급 도서관은 물론 공장기업소의 도서실들에도 장서되고 있었다.
그런데 도서후열사업이 벌어질 때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들에 의하여 도서후열에서 회수삭제 목록에 없는 귀중한 책들을 제멋대로 폐기하여 제지공장의 종이생산원료로 충당하였다. 그리하여 지금 고전들을 보려면 큰 도서관이나 학습연구기관, 고등교육기관 도서실에 가야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건설공사를 하거나 관개수로를 째는 작업을 하다가 ‘고려자기’를 비롯한 가치 있는 유물도 발굴하면 그것을 해당 학술기관에 보내는 대신 봉건   통치배들의 유물이라고 깨버리고 망동도 벌였다.
이렇듯 무식하고 아둔한 자들의 책동에 의하여 많은 문화유물들이 없어졌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사실을 료해하고 또 심려하였다. 그리하여 안화사의 5백좌한도 수복되어 다시 진열대에 오르게 되였다.

 

연암인격자평
내가 내 몸 아끼기는 양주(楊朱)와 같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기는 묵자(墨子)와 같고, 꼼짝 않고 앉아 있기는 노자와 같고, 마음이 넓어 구애 받지 않기는 장자와 같고, 참선을 하기는 석가와 같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기는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술을 퍼 마시기는 죽림칠현의 유영(劉令)과 같고,  남에게 밥을 얻어먹기는 한신(韓信)과 같고, 잠을 잘 자기는 진박(陳搏)과 같고, 거문고를 잘 타기는 자상호(子桑戶)와 같고, 책을 저술하기는 양웅(揚雄)과 같고, 스스로 유명 인물에 비유하기는 제갈량과 같으니 ,나는 아마도 성인일 것인데,  다만 키만 크고 무능하기는 조교(曺交)에게 겸손해야 하고 , 3일 굶어도 염치 찾기는 어릉중자(於陵仲子)에 양보해야 하니 그게 부끄럽다. 그게 부끄러워. 

송 경 록 지음 - 개성 이야기 중에서.....

최초로 북한의 저자와 직접 출판계약을 맺어 발간한 책 중의 일부 입니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송경록

저자는 1932년 남강원도에서 태어나 전후 개성 송도대학을 졸업한 후 교원 생활을 하였고 틈틈이 군중문화사업에도 종사하였다. 저자는 1952년부터 개성에 살면서 유서 깊은 고도 개성의 특유한 풍습과 민속 그리고 많은 유물, 유적을 보면서 개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개성에 얽힌 신화, 설화, 구전 등을 발굴하였다.

 

저자는 지금 북한의 개성에 살고 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