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 이 부분의 본문은 박지원 연보입니다.
어린 시절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박사유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조부가 사망했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5]
젊은 시절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 때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 때 ),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29세 때 과거에 낙방한 이후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5]
1777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청나라 방문과 열하일기 저술
1780년(정조 4) 44세 때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5]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관직 활동
1786년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고, 1789년 사복시 주부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 판관을 거쳤다. 이후 안의(安義) 현감 · 면천(沔川) 군수(1797년) · 양양(襄陽) 부사(1800년)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정조 15년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5]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으며, 1801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죽음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사후 영향
그의 묘는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년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박필균(朴弼均)
- 아버지 : 박사유(朴師愈)
- 형 : 박희원(朴喜源, 1730년 - 1787년)[9]
- 첫째 아들 : 박종의(朴宗儀, 1766년-1815년)[10] - 박지원의 형인 박희원의 양자로 입적.[11]
- 둘째 아들 : 박종채(朴宗采, 1780년-1835년)[12]
- 박종채의 장남 : 박규수
- 처남 : 이재성(李在誠) : 열하일기에 '중존'(仲存)이라는 자로 논평을 달았다.
- 삼종형 : 박명원(朴明源)
주요 저서와 관련서
- 《열하일기》(1780-1793) : 호질, 허생전 수록
- 리상호 역, 열하일기. 보리. 1780-1793/1955/2004 ISBN 89-84-28187-5 : 완역
- 김혈조 역, 열하일기. 돌베개. 1780-1793/1955/2009 ISBN 8971993588 : 완역
-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역,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 (하). 그린비. 1780-1793/2008 ISBN 89-76-82102-5 : 발췌역
- 《연암선생 서간첩》(1796-1797)
- 박희병 역,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게. 1796-1797/2005 ISBN 89-71-99211-5
- 《과농소초》(課農小抄, 1799)
- 최홍규 역, 국역 과농소초. 1799/1987. ISBN 2004246000419
- 《과정록》(過庭錄, 1826) : 차남 박종채가 쓴 박지원 평전
- 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826/1998 ISBN 89-71-99107-0
- 《연암집》(1900년 초간) : 양반전 수록
- 신호열/김명호 역, 연암집. 돌베게. /1900/2007 ISBN 89-71-99267-0 : 완역
- 홍기문 역,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보리. /1900/2004 ISBN 89-84-28190-5 : 발췌역
-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주요 문학작품
- 《마장전(馬駔傳)》
- 《민옹전(閔翁傳)》
- 《양반전(兩班傳)》
-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 《허생전(許生傳)》
- 《호질(虎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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