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대한 진지한 성찰 고북구 장성을 나온 연암 일행은 다시 물가에 다다르고 말을 타고 물을 건너며 다시금 연암은 도를 깨닫는다. 정덕을 위한 이용후생의 시선으로 조선의 말 다루는 법에 대한 여덟까지 위태로움을 논한다. 첫 번째 위태로움: 옷소매는 넓고 한삼(소매 끝에 붙여 드리우는 흰 헝겊) 역시 긴 탓에 두 손이 휘감겨 고삐를 잡거나 채찍을 휘두룰라치면 거추장스럽다. 말에 관한 이와 같은 위태로움은 단지 이용후생의 실용적 관점만이 아니다. 연암은 무엇보다 말의 입장에서 그리고 사람의 입장에서 즉 말과 사람의 관계의 입장에서 위태로움을 이야기하니 이것이야 말로 정덕을 위한 이용후생의 시선이라 할 만이다. ▲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다. 연암은 눈을 감은 것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눈을 뜬 사람이 오직 눈 하나만 믿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위태로움이라고 말한다. 물론 눈으로 보는 것 역시 세상과 소통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방식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오직 한 가지라고 믿는 것이 진짜 위태로움이다. 깊은 밤에 물을 건너며 수역이 주부한테 말한다. “옛사람이 위태로운 것을 말할 제 ‘소경에 애꾸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물가에 섰는 것’이라 했지요. 실로 오늘 밤 우리가 그같은 꼴이구려.” 연암이 이렇게 대꾸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나, 위태로움을 제대로 아는 거라고 하긴 어렵소”(연암) 연암의 비슷한 논거. 1.소경이 비단옷을 입고 가는 것과 눈뜬자가 밤에 비단옷을 입고 가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 이와 같은 연암의 물음은 사유를 다양하게 하여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따라가지 말라는 일종의 수수께끼이다. 물가에 있는 소경의 위태로움은 소경 자신의 위태로움이 아니라 바로 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위태로움일 뿐이다. 물론 소경 역시 위태로움을 느낄 수 있으나 소경은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위태로움을 판단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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