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음력 1월 4일 ~ 1645년4월 26일)는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적장자이다.
이름은 조(溰)이고, 효종(봉림대군)의 동모형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 강씨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의 한사람으로 잡혀갔으며 베이징에서 만난 천주교선교사아담 샬 등과
서구 문명을 접하고는 반청 사상을 버리고 친청으로 돌아섰다. 1644년11월에 석방되어 3개월만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반청 사상을 고수하던 아버지 인조와 갈등하던 중 33살의 나이로 독살되었다.
볼모로 심양에 가다.
1636년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달 여를 버티다가 성을 내려와 삼전도에 주둔하던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항복을 하면서 청과 12개조로 된 조약을 맺었다. 역사책에서는 이를‘성 아래에서의 맹약(城下之盟)’이라고 기록하였다. 소현세자는 인조가 항복하는 자리에 동석하였다가 바로 볼모의 길을 떠났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청과 맺은 조약에는 조선 국왕의 장자와 차자, 여러 대신의 아들(아들이 없는 사람은 동생)을 인질로 보낸다는 조문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세자빈 강씨와 두 대군의 부인들이 모두 인질의 몸으로 심양으로 갔던 것이다. 삼학사로 알려진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붙잡혀 간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심양관의 조선인 정부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4월이었다. 이들이 심양에 도착한 직후에는 조선 사신을 접대하던 동관에 머물렀고, 5월에 심양관(瀋陽館) 건물이 완성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1644년까지 심양관은 소현세자 일행의 숙소이자, 조선과 청의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 대표부로 활용되었다. 심양관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을 비롯하여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운 조선인이 거주하였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공방(工房) 기구를 조직하였고, 각 기구가 은의 출입, 물품 및 의약의 공급, 사람과 말의 관리, 물건 제조 및 수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렇게 보면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대표로 하는 조선인의 미니 정부가 있었던 셈이다. 또한 심양에는 볼모로 잡혀온 조선 고관들의 자제가 있는 질자관(質子館)이나 조선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던 동관과 서관이 있었으므로, 심양은 조선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활발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외교 활동을 벌이다.
청이 소현세자를 볼모로 둔 이유는 조선과 명의 긴밀한 관계를 끊고,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조선 군대와 물자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과 맺은 조약에는 조선이 명과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이 명나라 군대가 머물던 가도를 정벌하거나 명 본토를 공격할 때 구원병을 파견해야 한다는 조문이 있었다. 과연 청은 명나라 본토를 공격하면서 소현세자를 통해 군대와 병선, 군수 물자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 소현세자는 이처럼 민감한 사안을 조선 정부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인조대의 조선 정부는 청의 요구를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동아시아의 주도권이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광해군은 명과 청의 상반된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군사적인 충돌을 피해 가는 실리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은‘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한다(崇明排淸)’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이 비록 청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하였지만, 명 왕조의 재기를 기대하며 청과 맺은 조약의 실행을 연기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 대한 청의 불신은 날로 깊어졌고, 소현세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점차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1639년(인조 17) 청이 명나라 금주를 공격할 때, 조선에서 마지못해 파견한 임경업 장군의 군대는 명의 군대와 내통하여 청 군대의 동태를 알렸고, 이를 알아차린 청 태종이 소현세자에게 사람을 보내 엄중하게 항의했던 것도,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소현세자는 청과의 교섭을 담당하면서 양국간에 발생하는 모든 사무를 조선의 승정원에 알려 인조의 지시를 받았으며, 시간이 촉박한 경우에는 세자가 직접 평안감사나 의주부윤에게 명령을 내려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파악된 주요 정보를 조선 정부에 알려 대책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세자가 보고한 내용에는 만주 지역 팔기군의 동향, 산해관과 북경 일대의 청 군대 동향, 심양과 의주에서의 무역, 청 황실의 후계자 문제, 청이 일본과 외교를 맺으려는 의도, 청과 몽고의 관계 등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소현세자는 특별히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기밀 문건을 별도로 작성하거나 사람을 통해 구두로 전달하였는데, 이는 청 정부 쪽으로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다.
소현세자는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 군대는 조선인 포로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하였고, 수십만 명의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갔다. 청의 군대는 일반 백성보다 종실이나 양반집 부녀자를 많이 잡아가려 하였는데, 이들을 풀어줄 때에는 거액의 보상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포로가 몰려든 심양에는 포로를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났고, 보상비가 싼 경우에는 1인당 25~30냥, 보통은 150~250냥이었고, 귀한 신분의 사람이면 천냥을 상회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재력을 가진 친척을 둔 포로들은 돈을 내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가난하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구제될 길이 없었다. 풀려나지 못한 조선인 포로들은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관으로 몰려들었고, 국가에서 공금을 내어 자신들을 구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날마다 울부짖는 조선이 포로를 보며 살아야했던 소현세자는 청과의 무역이나 농업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활용하여 많은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이 때 심양관의 경제 활동은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아담 샬과의 만남
1644년 청이 북경에 입성하자 소현세자 일행은 청 군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 심양에 있을 때부터 청 태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현세자를 연회석이나 전쟁터로 불러들였다.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될 세자에게 날로 강성해지는 청의 위용을 과시하고, 세자와의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였다. 청이 북경을 장악하면서 청 조정은 조선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마다 청에 바쳐야했던 공물을 줄이고, 조선에 귀화한 한인이나 여진인의 송환을 면제하며, 상당수의 조선인 인질을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9년 동안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청이 북경을 장악하는 대업을 이루었으므로 세자를 붙잡아 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직전 70일 정도를 북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독일인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아담 샬은 1628년 북경에 들어와 명 의종의 신임을 얻었고,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 세조의 신임을 받아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는 중국의 황제에게 접근하여 문화적, 종교적인 영향을 줌으로써 천주교를 전국으로 전파시키려는 포교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는 천문학, 수학, 역학 등에 상당한 지식을 갖춘 과학자가 될 것을 요구받았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이들의 과학 지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아담 샬 역시 예수회 소속의 신부로서 시헌력을 만들어낸 과학자였는데, 소현세자가 바로 그를 만난 것이다. 아담 샬은 조선인이 만난 최초의 독일인이자 과학자였다. 이보다 앞서 이탈리아 신부인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이수광이 명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고, 그가 만든 『천주실의』만 구입하여 돌아왔다.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는 청에서 간행된 천주교 서적과 서양 문물을 세자에게 주었고, 세자가 귀국을 할 때에는 천주상과 지구의, 천문관련 서적을 선물하였다. 소현세자는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종교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세자는 북경의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에서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갑자기 사망하다.
1645년 1월 18일, 소현세자는 서울 땅을 밟았다. 오랫동안 이국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온 세자였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조정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2개월 후 소현세자는 갑자기 사망하였다. 실록에서는‘세자의 시신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기록하였다. 독살의 혐의가 크다는 말이다. 정국의 흐름으로 볼 때, 소현세자의 외교 노선은 당대 집권 세력의 노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정부는 청에 대해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청 황실과 긴밀한 친분을 맺고 청에 협조적이었던 소현세자의 개방 노선이 국왕 인조의 왕권까지 넘보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또한 소현세자가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세자가 사망한 후 세자빈 강씨는 국왕 독살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고, 그의 세 아들은 모두 유배되었다가 막내아들만 살아남았다.
소현세자는 17세기초 급변하던 동아시아의 정세에 가장 정통한 조선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국토가 유린되는 참상을 목격하였고, 패전의 책임때문에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며, 국제 정세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또한 그는 북경에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아담 샬을 만났고,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조선으로 들여올 것을 결심했다.소현세자는 격동의 현장에서 풍부한 외교 경험을 쌓았고 국제 정세의 동향에 대해 남다른 식견도 가졌지만, 고국에서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글 | 김문식 (문학박사, 서울대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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