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九人會)와 1930년대 문학
이상진(국문과)
<일러두기> 이번 학보특강에서는 교재에 소개된 시인과 소설가 이상, 정지용, 이태준, 박태원이 회원으로 활동했던 구인회에 대해 소개한다. 구인회는 1933년 8월 15일에 문단의 중견급 작가 9명이 결성한 문학동인회로서,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1930년대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단체의 성립 배경 및 그 활동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카프 해체 이후 한국문학의 흐름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
- 이상/ ?시와 소설? 창간호, 1936.3.
1. <구인회>의 탄생
1920년대 후반에 문단에서 맹위를 떨치던 문단 조직 카프(KAPF)는 1931년 제1차 대검거를 당하여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 이념을 중시하는 문학 활동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전에는 카프의 이념적 배타성이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왔으나 카프가 힘을 잃게 되면서 작가들은 오로지 작품의 수준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에 대한 반발로 신흥예술파 운동이라는 순수문학운동이 일어나 ‘13인 구락부’(1929)가 조직되었다. 사실상 우리 문단 내에서도 지극히 미미하나마 계급문학에 대한 저항으로서 예술파적인 움직임이 있어왔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반 정지용, 김기림 등의 모더니즘 문학운동과 시문학파와 ?문예월간?을 중심으로 한 서정시운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카프의 해체 위기와 순수문학에 대한 관심 확대 등의 변인에 힘입어 탄생한 것이 바로 <구인회>이다.
구인회 초기 회원이었던 조용만의 회고에 의하면, 처음에 카프에 관여한 적이 있었던 이종명과 김유영이 발기하여 카프에 대항하는 문예단체를 만들자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던 이태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이던 조용만, ?조선일보? 기자이던 김기림, ?조선문학? 초기 발행인이자 ?동아일보? 객원기자이던 이무영, 그리고 ?카톨릭청년? 문예면 담당자이던 정지용, 그리고 이효석과 유치진이 창단멤버로 합류하였다. 이들은 ‘순연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을 목적’으로 한다는 창립기사를 냄으로써 처음부터 거창한 강령이나 강제적인 조직을 만들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1933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2. 열다섯 혹은 아홉 명의 문인들
구인회의 최초의 발기인은 이종명, 김유영이다. 이종명은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로서, 조용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 헨
리의 단편을 연상시키는 경묘한 필치를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김유영은 영화감독으로 본명은 김 철이다. 그는 좌익색채를 띤 영화 <유랑>, <지하촌>, <화륜>을 만들기도 했다. 발기인이었던 김유영과 이종명은 처음부터 프로문학에 직접적으로 대항하자는 적극적 의지를 보였고, 이를 위해 프로문학에 대해서는 강력한 비평을 서슴지 않았던 염상섭을 리더로 삼기 바랐다.
하지만 함께 한 이태준과 정지용 등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순수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여준 월북 문인인 상허 이태준은 인물에 대한 뛰어난 내면 묘사를 보여준 소설가이며, <향수>로 잘 알려진 정지용은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 구사와 이미지 묘사가 뛰어난 시인인데, 이 두 사람은 구인회를 일종의 문인친목 단체나 구락부형태로 유지하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1934년 김유영과 이종명이 탈퇴를 하면서 이태준과 정지용이 구인회를 이끌다시피 한다. 이들과 함께 이효석도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새로 입회하게 된다. 이태준, 이상과 함께 끝까지 멤버로 남아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한 박태원은 이상과는 교분이 두터웠다. 둘 다 서울 태생으로 현대 예술에 대한 강렬한 욕구, 실험정신, 전위적인 측면에서 유사한 문학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박팔양은 전원을 그린 자연시와 사회참여적인 경향시를 쓴 월북시인이다. 1935년을 전후하여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게 되지만, 김상용, 김유정, 김환태가 가입하였다. 김유정은 따뜻한 웃음과 세상에 대한 비판이 어울어진 단편을 창작한 1930년대 대표적인 소설가이며, 김환태는 순수문학을 적극 옹호하고 카프의 공리적인 문학을 배격한 비평가이다. 이렇게 구인회에는 모두 열다섯 명의 문인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지만, 탈퇴와 가입을 조정하여 항상 아홉 명의 회원을 유지하였다.
영화감독인 김유영과 극작가인 유치진이 중도에 빠지게 됨으로써 구인회는 자연스럽게 시인과 소설가 중심으로 단체가 되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구인회의 성격을 모더니즘에서 찾기도 하나, 실상 모더니즘 계열에 포함될 수 없는 작가도 많아서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문학의 자율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문인들의 모임으로서 개개인이 뛰어난 문학적 역량과 어울리지 못할 고집스러움을 지녀서, ‘천재병에 가까운 교만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3. 기관지 ?시와 소설?과 작품 활동
특별한 목적이나 지향을 드러내지 않았던 만큼 구인회의 이름으로 행해진 활동도 사실은 미미했다. 구인회는 매달 그 달에 발표된 회원의 작품합평회를 가졌다고 하나 어느 정도 지속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쨌든 조용만의 회고에 의하면 초반에는 각자의 작품 평 외에 ‘카프’ 측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판을 주로 했다고 한다.
이들의 활동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기성 작가들에 대한 태도이다. 1934년 6월 ?조선중앙일보?에 「격(檄)!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一彈)을 날림」을 발표하여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주요한 등 선배작가들의 부진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한편 이들의 문학적 성과를 인정하였으나, 창작에서 부진하거나 창작내용이 진부하다고 비판을 가했다. 이것은 자신의 문학적 역량에 대한 과대평가인 동시에 선배문인들에 대한 기대감의 표현이라도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두 차례에 걸쳐 문예 강연회도 가졌는데, 강연회는 이태준이 학예부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1회는 1934년 6월 <시와 소설의 밤>이고, 2회는 1935년 2월에 있었던 <조선 신문예강좌>로, 2회 때에는 신문을 통해 비판했던 김동인과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다. 이 점에서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문인에게 문호를 개방하려 했고, 무엇보다 선배 작가들과 연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인회는 1936년 3월에 동인지의 성격을 띤 ?시와 소설?을 간행하였다. ?시와 소설?은 이상이 다방경영에 실패한 후 서양화가 구본웅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하다가 구본웅의 후원을 얻어 창간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40쪽 남짓한 이 창간호가 바로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시와 소설?에는 정지용, 김상용, 백석, 이상, 김기림의 시와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의 수필, 그리고 박태원과 김유정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은 구인회회원이 아닌 백석이 두 편의 시를 게재한 것으로 이들의 개방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발간 당시 회원가운데는 예술비평을 주도한 김환태가 포함되어 있으나, 비평문은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이는 구인회가 이념이나 사상을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실린 작품은 전체적으로 이질적이고 제각각 개성이 강하다. 김기림의 시에서는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나타나는가 하면 김상용의 시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이다. 그런가하면 박태원의 소설이 실험성이 두드러지는 반면 김유정의 소설은 자전적인 성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박태원의 소설 「방란장 주인」은 원고지 약 30매의 분량이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고, 이상의 시 「가외가전(街外街傳)」은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행 구분도 없이 쓴 시로서 이들의 언어형식 실험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구인회의 최초의 구성원은 주로 문단 권력에 밝고 문학적 감각이 있는 당시 4대신문의 학예부장 혹은 기자 출신들로서 구인회 회원들에게 게재지면을 확보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상은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었던 이태준의 도움으로 「오감도」를 연재했고, 자매지인 ?중앙?에 「날개」를 게재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김기림의 「기상도」 등의 작품들이 함께 게재되면서 이들의 문학적 경향이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조직 활동보다는 각자의 창작에 몰두하여 비록 기관지를 단 한 권밖에 발간하지 못했지만 1930년대 전반을 이끌 문제작들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구인회 회원들은 발표매체의 확보로 순수문학을 중심으로 한 문학시장을 확대하고 수요를 창출했으며, 이로써 회원들의 문학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며, 문인들을 결집시키는 힘이 되었다. 특히 김기림, 정지용, 이상, 박태원등의 작품에는 각종 언어실험과 문학적 기법의 세련성 추구,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 등의 문학적 특성이 드러났는데 이는 한국문학을 현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4. 한국 현대문학과 구인회
구인회는 당시 백철로부터 ‘현실적으로 존재할 아무 적극적 의의를 갖고 있지 못’하고, ‘의지와 방향을 잃고 있는 존재’이며, ‘일시적 흥분이 없어지면 자연소멸’될 ‘무의지파’ 라고 비판받았다. 또한 프로문학측의 박승극은 ‘조선문학계에 있어서 카프에 버금가는 문제의 문학단체’라고 하면서 ‘신흥부르조아지 문예’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구인회는 순수문학 단체라는 점, 개개인이 뛰어난 문학적 역량을 가진 문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구인회는 근대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 근대를 지향하였고 이것을 미적인 노력 속에서 이루려 하였다. 그 결과 예술적인 차원에서 일정하게 모더니티를 구현할 수 있었고, 한국 근대문학양식을 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서구적인 모더니즘으로 우리의 특수한 현실을 드러낼 수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그들의 문학은 단독정부 수립 이후 남한 문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원류가 되었다. 구인회를 이끌었던 이태준, 정지용이 1930년대 말부터 주관했던 잡지 ?문장?은 일제말기 신세대 문인들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순수문학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직된 지 3년도 채 못 된 1936년 3월 동인지 ?시와 소설?을 발간한 후, 동인간의 작품 경향의 불일치와 분열이 동기가 되어 결국 문학적으로 큰 공적은 남기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문학사는 구인회를 ‘순수문학을 1930년대 이후의 이 땅의 문학적인 주로 끌어올린 중대한 역할의 중심세력’으로 기록하였고, 지금까지도 이 정체불명의 단체가 벌였던 문학 활동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 읽을거리>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박헌호, 「구인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상허학보? 3집, 1996.9.
현순영, 「회고담을 통한 구인회 창립과정 연구」, ?비평문학? 30호, 2008. 12.
현순영, 「구인회와 카프(1)」, ?비평문학? 31호, 2009. 3.
이선미, 「‘구인회’의 소설가들과 모더니즘의 문제-이태준과 박태원의 경우」, ?상허학보? 3집, 1996.9
이명희, 「?시와 소설?과 ‘구인회’의 의미」, ?상허학보? 3집, 1996. 9.
유철상, 「구인회의 성격과 순수문학의 의의」, ?현대문학이론연구? 25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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