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의 역사

국문학사 방송강의 15강 내용입니다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2. 6. 2. 13:57

 

15강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제2기

작품구조상 고대소설 방식으로 창작된 신소설. 1910년대에 접어들어 출판업이 활발해지자 신소설, 근대소설이 쏟아져 나왔다. 이같은 문학사의 교체기에서 고전소설에 익숙해 있던 독자들을 상대로 그들의 취향에 맞는 작품들이 새로 간행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신작구소설이라 한다. 그 중에는 이미 있던 고대소설의 내용을 첨삭하고 변용하여 개작한 작품도 있고, 완전히 새로 창작한 작품도 있다. 1913년 덕흥서림에서 간행한 《서동지전(鼠同知傳)》은 《서대주전(鼠大州傳)》의 개작이며, 1914년 유일서관에서 낸 《봉황대(鳳凰臺)》는 《이대봉전(李大鳳傳)》의 개작이다. 《신계후전》 《강릉추월(江陵秋月)》 《봉황금(鳳凰琴)》 《옥소기봉(玉簫奇逢)》 등도 모두 개작이거나 번안작이다. 새로 창작된 작품으로는 1913년 광동서국 간행의 《약산동대(藥山東臺)》, 1915년 신구서림 간행의 《형산백옥(荊山白玉)》 등이 있으며, 잘 알려진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나 《청년회심곡(靑年悔心曲)》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이 시기에는 역사상의 위인이나 영웅을 다룬 작품들도 활발하게 창작되었는데, 이들도 모두 신작구소설이다. 고전소설과 신소설을 함께 간행했던 출판사의 사정과 함께 확대된 독자의 요구에 수응하기 위해서는 이미 있던 작품을 적당히 개작하는 것이 손쉬운 방편이었고, 그러한 일을 박건회(朴健會)와 같은 출판과 창작을 겸했던 인물들이 맡았던 것이다. 신작구소설은 대부분 저급한 독자들을 상대로 한 통속적인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소설독자의 저변확대라는 측면에서는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 창악인(唱樂人)들이 조직한 예술단체. 발생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없으며 다만 판소리 연구가인 박황(朴晃)이나 한말의 명창인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등에 의하면, 협률사라는 이름은 1902년(광무 2)에 설립된 희대(戯臺:舞臺)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며, 1860년을 전후하여 판소리의 명창들이 중국 청(淸)나라의 협률창희(協律唱戯)에서 따온 것으로 주장한다. 이 단체에서 상연한 내용은 주로 판소리 ·줄타기 ·가무음곡 ·재담 ·농악 등의 연예물로서 창극은 상연되지 않았다. 이처럼 창악인들의 연예활동이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자 자연히 대중의 연희(演戯)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정부에서도 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1902년 고종의 어극사십년 칭경례식(御極四十年稱慶禮式)을 대대적으로 가질 계획을 세우고, 고종의 칙허를 얻어 희대를 만드는 한편 이를 관장하는 협률사(協律司)를 두게 되었다. 협률사에서는 가무녀(歌舞女)를 조직했고 한편 고종의 칙명을 받은 김창환(金唱煥) ·송만갑 등은 전국의 명인(名人) ·명창(名唱)을 서울로 모았는데, 그 수가 17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한국 연예계에 처음으로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가 했으나 그 해의 콜레라 만연에 이은 농산물의 흉작, 그리고 일본·러시아 등과의 국제적 문제로 이러한 꿈은 사라지고 협률사(協律司)도 협률사(協律社)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1903년에는 경영권도 정부에서 민간의 손으로 넘어가 사설극장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예술단체인 협률사가 연희하던 희대도 똑같이 협률사로 부르게 된 듯하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일컬어진다. 이후 협률사는 공연장의 풍기문제 등의 이유로 1906년 정부로부터 폐지령을 받았고 따라서 예술단체의 활동도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에는 벌써 서양의 새로운 문물 바람이 점차 일면서 개방적이 되어 갔고 연희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 극장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되어 1908년을 전후해서는 원각사(圓覺社)를 비롯하여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등의 연극전용극장이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생겨났다. 이해 이인직(李人稙) 등이 중심이 되어 협률사를 연희장(演戯場)으로 다시 사용하도록 정부의 인가를 얻어 이름도 원각사로 바꾸었다. 앞에서 말한 원각사는 바로 이 원각사를 일컬으며 새롭게 단장한 원각사는 주로 신극만을 상연하였고 이에 생업에 위협을 받게 된 전속 창극단체이던 협률사는 지방 순업(地方巡業)으로 전락하여 해산되었다.

@ 신구 문학관의 대립과 교체

* 한문학 세대의 주장

; 전통적인 원칙론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위기에 몰리기 시작한 한문학을 오랜 권위에 힘입어 옹호할 필요가 있었다. 한문학이 아니고서는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마땅한 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수구파의 보수적인 노서을 합리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수기와 안민의 도로써 나라 안팎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가 하는 반문이 있게 마련 이다. 이에 대해 확신에 찬 대답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위기를 타개하는 도를 말하고자 했다기보다는 도에 의해 권위가 보장된 한문학에서 정신적 안주처를 찾고자 했다고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 한문학의 마지막 대가들은 한 길로 나아갔다. 시국관이나 정치의식에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지만, 품격 높은 한문학을 계속 갈고 닦아야 정신적 가치를 유지하고 혼란에 빠진 세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았다. 창작 방법론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거고 그 준칙을 명확하게 정리하려고 애쓴 것이 그 때문이다.

; 국문문학론(구문공용론)주도

- 이기,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

; 한문학 수호

- 김윤식, 여규형, 정만조, 윤희구 등

; 황현과 김택영이 택한 한문학 노선

-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갑오경장 이후 "관보나 각도의

문서가 모두 한국과 국문을 섞어서 자구를 만든 것은 일본글 쓰는 법을 본받은

탓"이라고 했다. 국한혼용문이 일본식 표기법이라고 한 말은 다소 근거가 있다

하겠지만, 바로 그 점을 한문이 정통임을 입증하는 논거로 삼기만 하고, 국문을

쓰는 바람직한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새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시

"경박하게 날뛰는 사람들이 한문을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는 의논에 앞장섰으나

추세가 그렇지 못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공식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문학이 지속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도 했다.

- 김택영(1850-1927) 은 "언문과 해문(蟹文)이 세상에 유행하면서, 유담지사(游談之 士)들이 떠들어대면서 국세가 미약해진 책임을 문자에 돌린다." 하고 했다. 국세가 미약해진 이유는 한문을 잘못 쓴 데 있고 한문 자체에 있지는 않다고 했다.

'해문'이라는 것은 게가 기어가듯이 옆으로 쓰는 글이다. 서양글의 이상스러운

모습을 빈정대려고 지어낸 말이다. '언문'이라고 지칭한 국문을 서양글과 동류로

취급하면서 한문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옹호하고자 했다.

* 국문문학으로서의 전환 논리

; 장지연의 문학론 전환의 논리

- <문약지폐>(文弱之弊)라고 한 것에서, 천여 년 동안 자랑해온 문의 유산을 과감하게 비판했다. 한문 자체뿐만 아니라 한문을 써서 이룩한 창조물을 모두 문이라고만 일컬 어, 용어 사용세서는 전통을 그대로 이었다. 그러나 평가는 반대로 내려, 문을 너무 숭 상하면 망국, 멸종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극언했다. 文이 盛하면 禮가 번거로워지고, 예 가 번거로워지면 거짓이 흥하고, 풍속이 타락하고 백성이 나약해진다는 인과론을 한참 펴서 이유를 밝혔다. 그 모든 책임을 문에 돌려야 한다고 했는데, 비판의 표적이 된 문 은 한문학의 거의 전폭에 해당한다.

- 논의를 더욱 구체화해서 진실성이 없는 허문(虛文), 말만 아름답게 꾸미는

위문(僞文), 실상과 어긋난 부문(浮文), 거짓되게 쓴 가문(假문), 수다스럽기만 한

번문(繁文)의 폐단을 지적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쓸어없애고 진실되고 유익한 실질 지문(實質之文)을 이룩해야 한다고 했다. 동서양 각국 문명이 발달한 나라는 모두

실질지문에 힘쓰는 데 동참해야 힘을 길러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 새로운 지혜를 길러 국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문학은 한문학이 아닌 국문문학이 어야 한다는 것이 장지연의 결론이었다. <국문관계론> 또한 한문으로 써서, 국문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말과 글은 일치해야 한다고 한 것이 논의의 기본 전제 이다. 국문으로 교육을 해야 온 국민이 어리석고 연약한 기풍에서 벗어나 독립을

찾을 수 있다고 한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한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폈다. 우리말과 다르고 너무 난삽한 한문을 배우느라고 세월을 허비하는 것이 참으로 애석 하다고 했다. 한문은 폐지하지 말고 전문학교를 특설해 재주 있는 사람들을 선발해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 신채호의 郎家思想

- 낭가사상이라고 명명한 민족 고유의 주체의식을 새롭게 계승해 유학을 비판하는 과업을 다각도로 철저하게 수행하고자 했다. 절충이나 종합을 거부하고,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민족주의 이념을 독자적으로 수립하려고 분투했다. 장지연이 전통

유학과 깊이 연결되고, 박은식이 양명학에 입각해서 유학을 혁신하고자 한 것과 큰 거리를 두고, 신채호는 유학이 근대사상일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선언 했다.

- 민족의 위기를 타개하자면, 영웅이 나와야 하고 영웅을 기리는 문학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 동안의 경과를 보면 집안싸움이나 동족상쟁을 일삼은 다, 외적에 아첨한 자, 심지어는 침략의 길에 나선 적국의 장수까지 영웅이라고 해왔으니, 영웅 두 자를 위해서 한바탕 곡을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당대까지 이루어진 영웅소설을

비판하고, 민족영웅을 예찬하는 문학을 해서 민족의식의 각성에 기여하는 것이

최상의 과제라고 했다.

* 소설에 대한 관심과 논의

; 박은식의 소설 효용론

- 소설이 독자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감동력을 거듭 강조해 지적하면서, 나타내는 사조가 기이하고 필력이 웅건한 작품이면 도덕적인 감화를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소설은 아직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 널리 읽힌 재래의

국문소설은 허황된 내용으로 인심과 풍속을 어지럽히기만 한다고 했다.

- 동시대에 공존하는 수많은 문학 갈래 가운데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 소설이라고 해서, 소설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평가의 근거는 두 가지에다 두었다. 소설은 사람을 감동시키기 가장

쉽고, 감동이 가장 깊다고 햇다. 지난 시기의 소설 글정론에서도 했던 말이지만,

명확한 논리를 갖춘 것이 커다란 진전이다. 소설은 또한 계급풍속, 교화정도,

인심풍속, 정치사상 등의 용어로 거듭 일컬은 사회적 의의가 대단하다고 했다.

효용론적 문학관을 이었으면서, 유교의 덕목이 아닌 근대적인 사회인식으로 효용의 척도를 삼고자 한 점이 전과 다르다.

; 演劇論의 전환 : <劇界改良論>

- 협률사, 원각사 등의 극단이 생겨 허다한 연희를 공연하는데 모두 다 음란한 내용이 어서, 청년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기상을 타락시킨다고 개탄했다. 그렇게 말한 연 의는 판소리이거나 판소리를 개작한 창극이다 판소리의 성장과 변모에 대한 인식은 갖추지 않고, 모두 학문에 뜻을 둔 자가 학문을 버리고, 실업에 뜻을 둔 자가 실업 을 버리게 하는 저질 공연물이라고일방적으로 매도했다. 역사적인 영웅의 모범적인 행위를 다루어 충성스럽게 씩씩한 정신이 눈에 비치고 마음에 옮겨져 국민의 심리와 정서를 바르게 하는 것이 연극의 임무라고 했다.

* 일본 유학 세대의 논리

; 이광수의 < 知情意論>

- 사람 마음에서의 '지정의'는 각기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知'는 진(眞)을, '

情'은(美)를, '意'는 선(善)을 추구한다는 이론까지 곁들여놓고, '정'의 만족을 찾고

미를 목표로 하는 예술의 하나인 문학이 진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의 부당한

구속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의의가 인정되고 찬양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문학의 독자적인 의의를 찾는 데서는 획기적인 의의가 있는 견해이지만, 진리나 도덕에서 멀어질수록 문학의 가치가 더 커지는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약점을

가진다. 그 점에 관해서는 절충적인 태도를 취해서, 문학이 "지'와 '의'를 버리지않고 그 둘을 구현하는 것을 부산적(副産的) 실효(實效)로 삼는다고 했다.

@ 국문시가의 새로운 양상

* 1890년대의 독립가, 애국가 : 대한제국의 악장 역할 담당

- 조선왕조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은 세계사의 진행에 동참라려고 하는 결단이었다.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황제가 문명권마다 하나만 있어 각국 국왕을 책봉해온 중세의 관습을 거부하고 배타적 주권국가를 이룩해 근대로 들어서는 대열에 그리 늦지 않게 들어섰다. 각국의 국왕이 모두 황제라고 선포해 통치체제를 종식시킨 것이 동아시아 유교문명권이 택한 방식이다.

-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만든 것은 아닌다. 변혁의 주제가 불분명해 갑 오경장에서 선포한 개혁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중국이 중세 동안 지켜온 원칙을 어기고 군대를 파견해 직접 간섭을 하는 데 맞서서 일본이 여양력을 키우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책봉체제를 부인하고 독립 선언을 하도록 촉구했다. 대한제국은 그런 이유가 겹쳐 허약할 수밖에 없는 탓에, 역사를 창조를 새롭게 하는 지표를

알리는 악장을 제정하지 못했다.

-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민가에서 맡았다. 정권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의 선각자들이 바람직한 변혁을 요구하는 신문을 내면서 국문으로 지은<독립가>난 <애국가>를 다수 게재해 대한제국의 악장으로 삼았다. 국가에서 민간으로 주체가 교체되고, 한문악장이 국문악장으로 바뀐 것은 민본과는 다른 민주 시민사회의 근대 민족문화운동이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 1900년대 이후의 唱歌

; 독립신문의 창가

- 4.4조 기본율격. 이미 공인된 주장을 내세우는 노래여서 단순하고 낙관적인

발상에 머물렀음.

; 대한매일신보의 창가

- 독서를 통한 감동을 목적으로 삼아 내용과 표현을 갖추는 데에 중점을 둠.

- 우혜(雩兮)의 <활동가> : 민요풍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이따금 행의 길이를 반으로 줄여 감탄구 노릇을 하게 함. 심각한 사태를 직접 그려 분발을 촉구하는 방법을 쓰 지 않고, 말을 둘러서 해 탄압을 줄이고 설득 효과를 높이는 방식을 택함. 창가의 영역을 넓혀 풍자시를 만든 사례.

* <대한 매일신보>의 기사

- 가사는 실제로 있는 일을 다루면서 주장하는 바를 곁들이기에 알맞은 갈래여서

기사나 논설에 못지않은 구실을 할 수 있고, 독자층이 널리 확보되어 공감을 얻어내 기 쉬운 이점도 지녔다. 전통적인 가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대적인 요구와 밀착되게 했다. 지나치게 유장해지는 폐단을 시정하고 시대적인 상황이 긴박해진 데 호흡을 맞추었다. 몇 줄마다 한 번씩 반복구를 두고 연이 나누어지게 해서 창가와

근접시켰다. 지난 시기의 가사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던 풍자적인 수법을 개척해, 언론 검열이 가혹하게 이루어지는 조건에서도 항거가 가능하게 했다.

- 주제의식의 측명에서 사회의 비리와 일제침략으로 인한 갖가지 병폐를 드러내고,

항일의 투지를 가다듬게 했을 뿐 아니라 매우 효과적인 풍자의 수법을 사용하여

높이 평가된다.

(민족의 수난에 대처하는 주체적인 근대문학적 성격을 지닌 좋은 사례가 된다.)

; <매국경축가>(賣國慶祝歌) 1905년 12월 1일자

- 작가는 매국대신이라고 해서 이미 있는 작품을 수록하는 듯이 꾸며 반어적인 설정에 의한 풍자의 효과를 가중시킴

- "경축일새, 경축일새"라는 말을 일정한 위치에 다 되풀이해 연이 나누어지게 함.

- 매국대신이 나라를 팔아 넘긴 것을 스스로 경축한다는 사설을 늘어놓아, 매국을

분하는 것보다 독자를 더욱 분개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려 함.

* 시조의 변모

; <대한매일신보>에는 시조도 많이 실려 있어 총수가 300여 편에 이른다. 작자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 밝혔다 해도 가명인 것이 가사의 경우와 같다. 시조 또한 신문사 논설진이 지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를 서 자 또는

넉 자로 된 한자어로 요약한 제목을 달았는데, 고시조에서는 볼 수 없던 방식이다.

시조를 석 줄로 나누어 적었다. 처음 두 줄에서는 반줄이 끝날 때, 마지막 줄에서는

첫 토막 다음에, 다시 반줄이 끝날 때 쉼표를 찍었다. 한 줄이 끝날 때에는 마침표를 찍었다.

- 율격의 짜임새를 명확하게 인식한 증거이다. 그리고 마지막 줄의 마지막 토막은

시조창의 관습을 따라 생략한 것이 많다. 창을 하기 위한 작품은 아니며, 시조가

읽고 생각하게 하는 시일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천뢰자(天賴子)의 <포곡성>(布穀聲) 이하 12수

( <조선문예> 1918년 10월 제 2호)

- 대부분 사설시조의 형식.

- "외사씨왈"이라는 평을 첨가.

- <경춘맥>(耕春麥)

살구꽃 봉실봉실 핀 밭머리에/이랴 하는 저 농부야.

이 무슨 곡식을 심으려고 봄밭을 가요?

/예주리, 찬자강이, 홀아비콩, 누꿈적이팥,녹주,기장, 청경차조,새코깨르기,참깨

,들깨,동부,쥐눈이,찰수수를 갈려 하나?

그 무엇을 심으려 하노?/그것도 저것도 아니요.

구곡 장진 시니곡 미등할 때에 /제일 농량이 긴한 봄보리 가오.

外史氏曰 ㅇ得好 ㅇ得好

( 사설시조의 수법과 흥취를 제대로 이었으며, 음미할 만한 뜻을 지닌고 있다. 평하는

말에서 "잘 읊엇다"고 거듭 감탄한 것이 적절하다. 구경하면서 묻는 이가 온갖 진기한 곡식을 다 들먹이며 무슨 농사를 짓는냐고 떠벌리는 말이 썩 야단스러운데, 가장 요긴한 농량인 봄보리를 심는다고 했다. 개화를 하네, 신학문을 하네 하고 수선을 떨며

이상스러운 노래난 지으면서 근본은 돌보지 않는 풍조를 나무랐다고 보면 묘미가 있다. 설익은 주장을 내세우기에 바쁜 시절에 내실을 다진 작품도 있었음을 알려준다.)

; 어문풍월 : 한시와 같이 글자 수와 운자를 맞춰 짓는 울리말 노래.

- 1908년 10월에 나온 <태극학보> 네25호를 보면, 한시가 잔뜩 실려 있는 문예란에 <국문풍월삼수>가 있다. 한시와 같은 자리를 차지해 격이 높아지고, 국문풍월이라는 이름을 얻어 낮추는 뜻(諺文)이 없어졌다. 작자를 호로 지칭해 작자는

목단산인(牧丹山人), 송남(松南), 동초(東初)라고 해서 앞뒤의 한시와 다를 바 없다.

- 전에 볼 수 있던 언문풍월은 칠언시를 따르되 기껏해야 네 줄로 칠언절구를

흉내 냈을 따름이었는데, 여덟 줄로 늘여 칠언율시처럼 만들었다. 말투가 자못

진지하고 말장난과는 거리가 멀러, 한시를 조롱하는 구실은 버리는 대신에

국문풍월이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발휘하도록 했다. 나라를 근심하는

말을 우리 시를 써서 나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국문풍월을 택했다고 생각된다.

@ 소설의 변화

* 방각본, 필사본 소설의 변모

- 소설은 필사본, 목판본, 활자본의 형태로 존재하고 유통되어 왔다. 필사본은 처음부터 있었고, 다른 둘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한문소설은 무상으로 배부하는

목판본 문집에 수록될 수 있었다. 국문소설은 목판본을 판매용으로 만들 때 비로소 인쇄되었다. 활자본 출판은 최근에 등장해, 국문소설을 이윤 증대를 위한 긴요한

상품으로 삼았다.

; 방각본

- 방각본은 상업 발달의 중심지이며, 중이가 많이 생산되는 곳에서 자라났다.

그런 조건을 갖춘 서울, 안성, 전주에서, 중인 이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출판업자로 나서서 대를 이어 영업을 했다. 방각본은 한 번 판각해 맣은 부수를

찍어 팔아야 이익이 커질 수 잇어 처음에는 서당 교과서를 택하다가 차차 소설에

상당한 비중을 두게 되었다. 그런 변화는 사대부분화와의 경쟁에서 시민문화가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 활발하게 출판된 방가본소설이 시장의 연결망을 타고 널리

보급되어 전국을 단일문화권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 세책가(貰冊家)에서 돈을 받고 빌려주는 필사본은 방각본과 상통하는 영리적인

상품이면서, 장편일수록 이문이 커질 수 있는 점이 아주 달랐다. 세책가는 사대부

및 시민층의 부유한 집 부녀자들을 일차적인 고객으로 해서 서울에서 1890년대까지 번창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계속 보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세책가 또한

활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차차 활기를 잃고 1830년대에 와서는 거의 다 폐업을

하게 되었다.

* 구활자본 소설과 신작 구소설

; 신작 구소설

- 1912년 신구서림본 <추풍감별곡>/1913년 신구서림본<부용의 상사곡>/ 1914년

신국서림본 <청년회심곡> : 여주인공을 기생으로 설정해 사회적인 갈등을 문제

삼고, 자유로운 사랑을 보여주었다. 지체 높은 남주인공과 기생인 여주인공이 부부가 되어 해로했다고 하고서,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의지를 확인했다. 삽입가사의 애절 한 사연에 얽혀 있는 사겅으로 낭만적 사랑의 사회적인 의의를 주장했다 하겠다.

구소설처럼 전개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깨인 생각을 동시대 신소설에서보다 더욱

설득력있게 나타냈다.

구활자본 간행(원본). <추풍>만 필사본(사본) 현존.

- 역사상의 위인과 영웅를 다룬 계열

: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킨 선각자들이 국난극복의 민족적 영웅의 전기를 다수 펴낸

데 자극을 받고, 그런 작품을 원하는 독자의 요구를 의식해서 그 비슷한 소설을

내놓았다 하겠는데, 전기와 소설은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소설은 허국적인 설정에 따라 흥미로운 사건을 보태 사실에서 멀어졌음은 물론이고, 망국 후에 일제의 출판 검열을 받으면서 출간했으므로 구국을 주장하는 주제를 대폭 약화시켜야만 되었다.

강감찬(고려강시중전) 뒤에 김유신, 남이, 김덕령 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계속 나왔는데, 야담과 역사소설의 중간물 정도에 머물렀다.

* 한문소설의 마지막 모습

; 한문소설과 한문야담

- 공동문어로서의 문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여 독자층의 확대가 불가능해짐.

- 야담집(동야휘집)의 초경험적인 요소의 강조 : 야담이 소설로 발전했던 성과를

과거로 되돌려 놓음.

; 한문소설의 변모와 부정적 양상

- 한문소설의 마지막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이 백화체를 섞은 것은, 중국의 전례를 분별 없이 따른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백화체 소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국문소 설에서 언문일치를 이미 이루었는데 필요하지 않은 흉내를 내서 혼선을 일으켰다.

백화 때문에 읽기 더 어렵게 만들어 한문소설의 종말을 촉진하고 말았다. 한문단편의 절묘한 구성으로 세태를 풍자하고 근대적인 자각을 촉구하는 전통을 계승하는 데 힘 쓰지 않아, 국문소설의 새로운 모형을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 매몰시켰다.

* 신문, 잡지의 국문소설 등장

- 1905년 11월 17일자에서 12월 13일자까지의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

- 1906년 2월 20일자부터 3월 7일자까지의 <거부오해>

- <만세보>와 이인직

- 신문의 주필 이인직이 1906년 7월3일부터 제목은 없이 '단편'이라고 한 것을 발표 한 데 이어서, 7월22일자에서 10월 10일자까지 <혈의 누>를 연재했다. 그 작품은 다음해 3월 17일에 광학서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시문 연재 후 단행본이 된 소설의 첫 예를 마련했다. 당대를 무대로 하고, 작자 이름이 밝히고, 활자본 단행본 으로 출판된 소설을 신소설이라고 규정한다면,<혈의루>가 최초의 신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인직은 그 뒤를 이어 <귀의 성>을 그 신문 1906년 10월14일자에서 1907년 5월 31일일자까지에 연재하고, 상, 하권으로 나누어 각기1907년 10눨 3일, 1908년 7월25일에 단행본으로 내놓아 소설 발표의 새로운 관례를 정착시켰다. 단행 본이 될 수 있는 분량과 많이 팔릴 수 있는 흥미를 갖춘 소설이라야 신문 연재 수 단행본으로 낼 수 있다. 이인직의 소설사적 위치는 그런 소설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데 있다고 우선 규정할 수 있다.

@ 민속극, 창극, 신파극

* 민속극의 발전과 변모

; 18세기 동안 교역의 중심지로 자라난 상업도시에서 상인들이 많은 사람을 모아

들이는 데 도움이 되는 탈춤을 육성하고, 또한 자기네 취미에 맞는 구경거리로

즐겼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떠돌이탈춤을 초빙해오는 번거로움을 덜고 떠돌이탈춤에서 볼 만한 요소를 받아들여 각기 자기네 도시의 탈춤을 큰 규모로 육성 하는 경쟁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성립된 도시탈춤은 농촌탈춤이나 떠돌이탈춤보다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훌류하고 주제가 선명한 연극으로 정착되어 계속 발전하는

추세를 보였다. 떠돌이탈춤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도시탈춤이 민속극 발전의 최고

단계를 보여주던 시기가 1900년경이었다.

- 그런 사정을 경남 일대의 오광대와 들놀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떠돌이탈춤

<밤마리오광대>는 쇠퇴하고, 각 지방의 오광대와 들놀음이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이 중요한 변화였다. 수영과 동래의 들놀음은 1870년경, 부산진의 들놀음,

진주, 창원, 김해, 고성, 통영 등지의 오광대는 189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시기에 각 지방 재래의 탈춤이 <밤마리오광대>의 영향을 섭취해 도시탈춤으로 현저한 성장을 보였다는 말이다.

; 꼭두각시놀음과 사당패

- 사당패 또는 남사당패의 여러 패거리의 활약을 구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00년경에 안성 청룡사를 거점으로 바우덕이 일명 김암덕이 중심이 된 패거리가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그 맥락을 이은 목만이패, 원윤덕패 등이 1930년대까지 활동 했다. 1900년경에 진위패라는 것도 있었던 사실을 그 기반을 물려받은 심선옥패가 알려주었다. 복만이패는 경기 이북지방에서 공영하고, 심선옥패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순회했다. 황해도 쪽에는 오명서패가 있었다한다 사당패, 남사당패, 걸립패와 혼성된 남사당패가 다양한 공연종목을 가지고 여러 곳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대 이후에는

거의 다 사라지고, 일부만 남아 오늘날까지 맥락이 이어졌다.

* 민속극의 수난과 쇠퇴

- 1920년부터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고 명절놀이와 민속행사를 제한된 범위
안에서 관청의 승인을 받다 할 수 있게 했으나 때가 늦었다. 전국 각처의 농촌탈춤 거의 전부, 도시탈춤 가운데 대부분이 10여 년 동안의 탄압을 받아 전승이 중단되고 말았다.

재현하고자 애쓴 것들도 1930년대까지 겨우 이어지가가, 문화통치를 버리고

군국주의 노선을 택해 혹심한 탄압이 자행되자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 사회경제적인 변화 또한 탈춤의 전승을 어렵게 했다. 도시탈춤의 발전을 가져온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상공업이 근대사회를 창출하지 못하도록 억압되고, 일본에서

가져온 자본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철도가 개통되고

, 상업 중심지가 바뀌고 탈춤을 키우던 상업도시가 몰락하자 탈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일제의 경제적 침투와 함께 새롭게 자라난 도시의 예속적이고 매판적인 시민은 일본 에서 수입한 흥행물의 수용자 노릇을 했다.

* 창극의 등장과 시련

- 1860년대 서울에 모여든 판소리광대들은 흥행을 더욱 성공시키는 길을 두 방향에서 찾았다. 한편으로는 대원군을 포함한 상츤 애호자들에게 인정받아 지위 상승을 하고 판소리가 고급 예술일 수 있게 하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정인을 상대로

공연을 하면서 보다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대중화를 택한 광대들이 협률사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협률사라는 말은 중국의 창극을 일컬어 '협률창회'라고 한 데서 따왔다. 청나라 군대가 진주하고 거류민이 늘어나자 그 쪽 창극단이 와서

공연하는 기회가 더러 있어, 배역을 나누어 창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큰 매력을 느낀 협률사의 광대들이 창극을 만들고자 했다.

; 판소리의 창극화에 대한 논란

- 판소리의 오랜 격식의 파괴와 인기 영합의 산물

- 판소리의 맛을 즐기면서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찾고자 하는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시대적인 요청의 산물

- 창극은 탈춤과 신파극 사이 중간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토착적인

민족자본이 일제가 육성한 예속자본에 패퇴되면서 탈춤이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고 한 말이 창극엣는 반쯤 해당된다. 창극은 민족자본 성장과 더불어 축적한 역량을 예 속자본과의 타협 속에서 발휘하고자 해서 만들어낸 연극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예속자본의 연극이라고 규정해 마땅한 신파극과 가까운 위치에서 경쟁을 한 일종의 구파극이었다.

* 신파극으로 가는 길

- 일본에서 구식 연극 가부기와 구별된다는 뜻으로 신파극이라고 이른 것이 1890년대 후반에 생겨나 처음에는 정치적인 주제를 취급하다가, 1900년대 이후에는 군사극, 탐 정극과 함께 여자의 비운을 다루는 가정극을 마련해 흥행에서 성곡했다. 서양 근대극 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 형식이나 내용이 일본 특유의 성향을 짙게 나타냈다.

가부기에서 물려받은 과장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불합리한 사회구조에서 빚어지는 인권유린에 자학적인 눈물로 대응한 것이 특징이다.

- 성숙되지 못한 일본 시민사회의 유흥적인 기품에 맞게 통속적인 구경거리로 자라난 격정극이며, 엽기적인 흥미를 내세워 관객을 모아 들였다.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어 일본인 다수가 이주해오자 자기네 관객을 상대로 한 일본 신파극 극장이 서울에

여러 군데 생겨 이식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서울에서 공연하는 일본 신파극을 본떠서 유사품을 만들어냈다.

- 임성구(1877-1921) 와 극단 革新團

; 신파극의 폐해

-신파극은 대강 정해놓은 줄거리에 따라 주연 배우가 즉석에서 연극을 이끌어가면서 과장된 몸짓과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연극이다. 풍속의

개량이니 하는 그럴 듯한 말을 앞세우고서 통속적이며 엽기적인 흥미로 인기를

얻으려고 했다. 선인과 악인, 행운과 불운을 극단적으로 갈라놓고, 악인의 악행 때문에 시달리는 선인의 불운에 동정을 하며, 불운이 행운으로 바뀌는 기적을 바라도록

하는 것이 기본 구성이다.

- 탈춤이나 판소리에서처럼 관중의 반응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해학이나

익살이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경직된 상황을 조성했다. 극적인 갈등이 그

자체로서 제시해 관중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볼 수 있게 하지 않고, 위압적인

설명으로 단선적인 ㄴ사건을 몰고 갔다. 그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지칭하는 말이

신파조이다. 신파조가 신파극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널리 퍼져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로 남은 것이 일제의 문화 침투가 빚어낸 심각한 피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