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내가 維新을 한 이유"
복지국가 터전 만들어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박정희 / 대통령
*1973년도 지방 연구 순시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국정의 방향에 대해서 이런 술회를 했다.
청와대가 그의 육성 지시를 정리한 「1973년 지방연두순시 지시사항」의 공통사항 부분을 소개한다.
1. 10월 유신과업수행과 우리의 자세
가. 10월 유신의 목표와 기본정신
(1) 10월 유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또 여러 가지 각도로 설명할 수 있지만 10월 유신의 이념과 목표를 한마디로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가 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보다 더 열심히 일하여,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고 나아가서는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데 있다.

(2) 오늘날 이 지구상에 있는 나라들은 모두가 복지국가건설을 국가개발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나라들 중에는 이 목표 달성에 앞선 나라도 있고, 가는 도중에 있는 나라도 있으며, 뒤떨어진 나라도 있다. 우리가 남보다 뒤지지 않고 앞서 나갈려면, 남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더욱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으며,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배양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복지 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그 터전 위에서 평화통일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자는 것이 바로 10월 유신인 것이다.
(3) 10월 유신은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본다면, 민족의 主體性을 되찾자는 것이다. 이 점이 있어서는 5·16혁명과 그 기조를 같이하고 있지만, 5·16 혁명보다 그 차원을 한층 더 높여서, 민족주체성에 입각,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0월 유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4) 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립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한다면 과거의 우리 역사, 오늘의 우리 현실과 처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나갈 進路를 올바로 알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지를 알고 미래의 진로를 올바로 안다면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세대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사명의식도 생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명과 과업을 남이 시켜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요, 또 남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깨닫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해 나가는, 즉 우리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수행해 나가는 정신과 자세가 바로 주체적 민족사관의 정립인 것이다.
(5) 10월 유신의 정신은 새마을 정신과 통하는 것이며 새마을 정신은 곧 10월 유신의 기본정신인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특히 우리 농민들이 즐겨 부르는 새마을 노래의 가사 중에는 『서로 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이 한 구절에 10월 유신의 정신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서로 서로 도와서』라는 말은 협동이요, 단결이다. 『땀 흘려서 일하고』라는 말은 農家에는 소득 증대요 국가적으로는 생산하고 增産하고 수출해서 저축하여 국가의 소득을 증대한다는 뜻이다.『부자마을 만드세』라는 말은 우리 농촌의 마을이 전부 부자마을이 되면, 국가는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뜻이다.『살기 좋은 내 나라』는 바로 복지국가요, 복지사회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10월 유신은 곧 새마을 운동이며 새마을 운동은 바로 10월 유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와 그 창조적 발전도 우리 실정에 맞는 생산적인 민주제도를 가꾸어 나가자는 기본정신에서 그와 일치하는 것이다.
나. 자발적 참여와 솔선수범의 자세
(1) 지금 우리는 새마을 운동을 한 사람의 방관자나 낙오자도 없이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데 10월 유신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 국민 모두가 범국민적으로 나서서 한 사람도 방관자나 낙오자가 있어서는 안되겠으며, 모든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적극 참여해야 하겠다.
(2) 모든 국민들은 보다 더 근면하고, 보다 더 왕성한 自助정신을 발휘하고 보다 더 협동단결하여 과거의 비능률적이고, 비생산적이며 낭비적인 요인들을 제거하여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조직화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몇 사람만 애써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국민들이 일대분발 하여 유신과업 수행에 적극 참여하고 협력해 나가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3) 특히 나는 민족의 死活과도 직결된 10월 유신과업은 일차적으로 公職을 맡은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에 그 성패가 달렸다고 보고 이제부터 모든 공직자는 막중한 책임과 숭고한 사명을 더욱 절감하고 공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유신대열에 앞장서서 솔선수범의 자세를 견지해 나가야 하겠다는 것을 강조해 두는 바이다.
3. 全국민의 과학화 운동
가. 생활의 과학화
(1) 나는 금년도 연초 기자회견에서 『全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제창한 바 있다. 과학화다, 기술화다 하면 흔히 전문적 이론이나 기계기술을 연상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국민의 과학화 운동은 우리들의 가정과 생활주변에서 쉽고, 가까운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즉 우리들의 가정생활부터 과학화 하고 농사 짓는 방법을 과학화 하는 것이 전국민 과학화 운동의 제1단계 목표인 것이다.
(2) 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방의 온도는 몇 도 정도가 알맞는가? 우리가 먹는 음식의 주된 성분은 무엇이며, 어떤 작용을 하는가? 뜰에 서 있는 나무나, 꽃밭의 화초는 무슨 거름을 주어야 할 자라는가? 집의 방향은 南向이 좋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農路의 폭은 몇 미터로 하는 것이 좋으며, 최소 5미터 이상이어야 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것 등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늘 하고 있는 일부터 그 이치와 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이를 응용해 나가도록 해야겠다.
(3) 앞으로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자발적이며 적극적으로 이 과학화 운동에 참여하여, 자기 위치에서 맡은 일을 더 연구하고 공부해서 많이 알아야 하고, 기술에 숙달하여, 우리 생활의 과학화를 통하여 근대화 과업을 보다 빠른 시간 안에 완수하도록 해야겠다.
나. 營農의 과학화
(1)농촌에서도 우리 농민 자신들이 항상 농사 지식과 기술을 익히도록 힘써 나가야 하겠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영농기술이 개량되고 발달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옛날 조상 때부터 해오던 영농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많다. 영농기술의 연구개량은 농촌진흥청이나 농과대학의 연구원만이 하는 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전문적인 시험연구 사업은 전문가들이 할 일이지만, 직접 영농에 종사하는 농민도 스스로 머리를 쓰고 연구하는 자세로 농사 일을 다루어 나가야 한다.
(2) 예컨대 『작년에 우리 집에서 이런 방법으로 비료를 주고, 농약을 뿌렸더니 농사가 잘 되더라』하는 경우에 그 잘못된 원인을 찾아서 연구하고 하나, 하나 고쳐 나가야 한다. 영농의 과학화는 먼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서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같은 면적의 농경지에서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겠는가 하는 방법을 찾아 연구하고, 응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농사의 과학화인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금년에는 異常煖冬으로 보리가 너무 많이 자라서 늦추위가 엄습해올 경우 얼어 죽을 염려가 있다고 걱정들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것도 과거의 경험을 거울 삼아 보리를 밟아 주고, 골에 흙을 넣어 주는 등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여 凍害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농에 있어서 조상들이 해 내려오던 방식에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연구하고, 또 선진 농업 기술을 배우고 읽혀 나아가 같은 면적에서 같은 노력을 하더라도, 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도록 힘써야 하겠다.

,,,,,,,,,,,,,,,,,,,,,,,,,,,,,,,,,,,,,,,,,,,,,,,,,,,,,,,,,,,,,,
유신시대가 깨끗했던 이유
'정치자금을 거두는 창구가 청와대로 단일화되었고 액수도 줄었으며 代價性이 없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을 모셨던 金正濂 전 비서실장은, 유신시대(1972년에서 79년까지)에 정치가 깨끗해졌다고 주장한다. 정치자금을 거두는 창구가 청와대로 단일화되었고 액수도 줄었으며 代價性이 없었다는 것이다.
'제가 1972년부터 78년12월에 그만둘 때까지 年20억원 정도의 정치자금을 모아서 대통령께 드렸습니다. 그 전에는 공화당에서 도맡아 했는데 정치가 행정에 간여하게 되어 말썽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로 제가 일반 獻金식으로 받기 시작한 후로는 불미스런 일이 없었습니다. 돈을 낸 분들에게는 아무런 반대급부도 없었습니다. 대통령 덕분에 경제발전이 되어서 사업이 잘 되니까 예의상 얼마씩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대기업체 회장 20여명에게 국한해서 부탁했습니다. 제일 큰 것이 2억원 정도였는데 3~4명이었고, 기타는 5000만원 또는 3000만원 어떤 분은 2000만원 정도였습니다.
공화당에 매월 1억원, 유정회에 2~3000만원, 추석 연말연시 비용으로 1억 내지 2억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서 대통령의 승인하에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대통령께서는 절대로 헌금을 직접 받으신 적이 없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농민하고 관련된 사업을 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대통령께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화당의 기구축소를 지시하셨습니다'
朴대통령이 유신을 한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정치코스트를 줄이는 것이었다. 1971년 金大中 후보와 싸울 때 朴대통령 캠프에서 쓴 大選자금은 약700억원이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이런 낭비와 함께 정치논리가 행정에 강제되어 쓸 데 없는 사업에 예산이 낭비되는 것을 싫어했다. 아울러 정치인들이 행정관료들의 인사에 개입하는 것도 차단했다. 한 검사출신 변호인은 이렇게 말했다.
'유신 전에는 검사들에 대한 인사에 국회의원, 특히 법사위원들의 청탁이 많았습니다. 청와대쪽에서 법사위원들에겐 한 건씩의 인사청탁 이권을 주라고 권할 지경이었습니다. 유신 이후 이런 것이 사라지니 실력있는 검사들이 요직에 앉게 되었습니다'
유신선포 직후 朴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구속되었던 한 야당 국회의원 출신 인사는 '유신 전에는 철도청의 말단 직원 인사에도 국회의원이 개입하는 판이었다. 그런 부패상을 알았다면 내가 朴대통령이라도 유신을 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朴대통령이 엘리트 행정관료들을 정치인들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해주니 오직 국가적 차원의 필요성, 효율성, 생산성을 기준으로 행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 자유를 제한한 代價가 경제 행정의 생산성 향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19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 그 요인중의 하나이다.
金正濂씨는 이렇게 말했다.
'朴대통령은 특정 집단이가 계층을 위해 산업정책을 쓰지 않고 농민 근로자 전체를 위해서 정책을 썼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세계은행 부총재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南美의 경우에는 대지주와 도시의 수입대체공업家 위주로 정책을 썼기 때문에 小農들의 불만이 있어 정치가 불안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朴대통령이 정경유착을 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경제가 커지니까 대기업이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잘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신상필벌식으로 정부가 지원해주었으니까 재벌도 생긴 것입니다. 방위산업을 80여개 분야로 나눠 건설할 때, 기술적으로 어렵고 투자도 많이 드는 분야는 자연히 대기업에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대기업은 끝끝내 소극적이었습니다. 돈이 많이 드는 중화학 공업을 시장경제에 맡기고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 '수도이전 계획' 36년만에 공개…후보지는? (0) | 2013.02.26 |
---|---|
[스크랩] 100년에 한번 개화하는 신기한 고구마꽃 행운 듬북 담아 가세요. (0) | 2012.09.28 |
멕시코 상공서 ‘불타는 UFO’ 충격포착 (0) | 2011.07.16 |
술의 신 바카스 (0) | 2011.06.19 |
생명과 환경 자료 (0) | 2011.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