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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고종 덕혜옹주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4. 6. 2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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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5월 28일 오후 7시 30분, 아기의 울음소리가 덕수궁이 떠내려 갈 듯 울렸다.
환갑이 넘은 고종이 그토록 사랑하던 귀인양씨가 예쁜 딸을 낳은것이다.
고종황제가 환갑이 넘어서 본 딸이라, 특별히 예뻐하는 자식이 었다고 한다

그 옛날, 유모가 임금앞에서 들어 누워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었다.

하지만 옹주에 대한 사랑이 '임금'이 아닌 한 '아버지'로서의 고종황제를 만들게 한 것이다.

고종황제의 옹주에 대한 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아, 옹주가 6살 되던해,

고종은 덕수궁에 유치원을 설치했고 옹주는 양반자제들과 같이 공부를 하였고, 마음껏 뛰어 놀았다.히 예뻐하는 자식이 었다고 한다.

옹주는 남을 배려 하던 마음이 깊었다고 전해 지는데, 한 급우가 놀다가 치마에 얼룩이 묻어 울상을 짓자, 옹주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덕수궁 안으로 들어 가서 자신이 입던 치마와 바꿔입었다고 한다. '걱정마, 내가 입던 치마와 네가 입던 치마를 바꿔 입으면, 아무도 얼룩이 묻은 것을 모를 거야. 그럼 넌 집에서 어머니께 혼나지 않아도 될꺼야.'
이렇게 마음 따듯하게 자라나던 덕혜옹주였다.
그러나, 옹주의 행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서거하시고, 아버지 고종황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붕어를 맞이 했다.
얼마전 사료에서 발견 되었지만, 고종황제는 친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문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발표에서, 친일파 및 일본사람들은 '뇌진탕'으로 급사했다고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가장 가까이에서 고종황제의 독살을 지켜본 사람이 덕혜옹주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뇌진탕이 아닌 일본사람 및 친일파들에게 독살당했다고 죽을 때까지 믿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덕혜옹주는 하루 하루를 외롭게 지낸다.
그러던 중, 덕혜옹주는 일본관리들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있는 학교에 유학을 가게된다. '이제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쓸쓸해... 무서워... 어마마마... 아바마마... 보고싶어요...'

결국 덕혜옹주는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덕혜옹주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다.


일본에서의 덕혜옹주의 학교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일본 아이들은 덕혜옹주를 '조센징의 공주' 라며 심한 따돌림을 당했고,

심지어 어느 한 일본 학생이 자리로 돌아가는 덕혜옹주의 발을 걸어 넘어 뜨리며,'어머! 조선의 공주는 내게 절도 하네~' 라고 놀리며 치욕을 주곤했다고 전해진다

주변의 황족 및 친척들도 모두 독살로 살해되자, 옹주는 매일 학교에 있는 식수를 마시지 않고 집에서 물을 담아 가지고 왔다고 전해진다. 물이 다 떨이지면 아무리 목이 말라도 학교에 있는 식수를 절대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본 담임 선생은

'옹주님, 옹주님께서는 왜 식수를 마시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어보자

'식수에 독이 있을까봐 마시지 않습니다. 전 오빠들처럼 독을 먹고 죽기는 싫습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나를 괴롭히고 있어... 학교가기가 너무 무서워... 오빠들도 다 죽고 이제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어... 하지만, 난 조선의 옹주야. 이런일로 기죽어 있으면 조선의 옹주가 아니야...'

  

불안하고 외로운 나날들을 보내며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성장했다.

이렇게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성장하던 덕혜옹주는 그때 당시로는 모두가 꺼려하던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받기에 이른다. 진단명은 '조발성 치매증'이었다.


덕혜옹주가 어느덧 시집갈 나이가 되자, 일본에서는 쓰시마섬의 도주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로 결혼을 시키게 된다.


덕혜옹주의 결혼발표가 있자 조선에서 민중의 우상이자 황실의 마지막 상징이었던 덕혜옹주가 일본인에게 시집을 간다는 사실에 조선은 일대 충격에 빠지게 된다. 1931년 5월 덕혜옹주의 결혼에 조선인들은 비탄했고 또 분노했다. 당시 조선일보에 기사에는 덕혜옹주의 결혼소식을 전하며, 결혼사진에서 아예 남편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신문에 개제하는등 조선에서 덕혜옹주가 일본인에게 시집을 간다는 소식은 당시 큰 충격이자 국민적 치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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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은, 덕혜옹주의 이미지를 조선인들에게서 지워버리고자, 결혼식 당일 덕혜옹주의 결혼소식에 관련한 기사는 모두 신문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조선에서의 충격을 뒤로하고,둘의 관계는 의외로 잘 굴러가는듯 보였고 둘 사이에는 '마사에'라는 딸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둘의 관계 는 덕혜옹주가 '정신분열증'을 앓기 시작할 때 부터 틀어 지기 시작한다.
덕혜옹주는 어렸을 때 부터 부모를 잃은 슬픔과, 학우들에 의한 노골적인 따돌림로 인해 점점 정신질환을 얻게 되고 가끔씩 이상한 행동을 했다.
당시 '정신병'이라는 병은 부끄러운 병으로 인식되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한 남편 '소 다케유키'는 처음에는 그녀를 치유하려 했으나, 그도 점점 지쳐가서 뒤에 가서는 옹주를 방에 가두고 묶어 두는등의 학대를 했고 점차 덕혜옹주에 대한 사랑도 식어갔다. 딸 '마사에' 또한 이런 엄마를 매우 수치스러워 했으며, 덕혜옹주가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딸 마사에 또한 학교에서 어릴 적 덕혜옹주가 당했던 것 처럼 심한 이지메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신이 내 어머니라는게 역겹고 짜증나. 애들이 뭐라는줄 알아? 나보고 더러운 조센징의 딸이래. 왜 날 낳은거지? 왜!!!'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가 믿고 따른것은 아버지 '소 다케유키'뿐이었으며, 그로인해 그녀는 자기가 조선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일본인이라는것을 증명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남편인 '소 다케유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게된 덕혜옹주는, 얼마 후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하게 된다.


'내가 왜 당신을 사랑했는지 모르겠어. 이런 미친 조센징 여자였다면 처음부터 결혼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을꺼야.'


덕혜옹주의 딸인 마사에는 성장하여 젊은 나이에 일본인 청년과 결혼했으나, 결혼 후 2년뒤 유서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실종되었다고 전해 진다.


'나를 속박하던 모든것들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날아갈꺼야. 이제 아무도 날 괴롭힐순 없어.'


온 식구가 동원되어 그녀를 찾으려 애를 썼으나...

결국 그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마사에의 나이 24살때의 일이다.

지금도 그녀가 정말 자살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시댁에 의해 살해 당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덕혜옹주는 딸 마사에의 소식도 전해듣지 못한채, 정신병원에서 지내던 도중 딸의 소식을 듣고 안그래도 심했던 병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딸의 자살소식을 듣고 덕혜옹주는,

'나의 예쁜 딸이 나보다 먼저 가버리다니...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일본인이 죽였어... 일본인이 죽였어... 일본인이 죽였어... 일본인이 죽였어... 아니겠지...? 사실이 아닐꺼야... 그래... 또 날 놀리는거야... 놀리는거야... 놀리는거야...' 라며 중얼거리는 나날들을 보냈다고 한다.


시간은 흘러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전 '국가재건회의' 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을때,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그건 안되지. 자유당 민주당이 다 못해도 나는 해야겠소'

라고 말하며 덕혜옹주의 환국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당시 박정희 의장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의 환국이 이루어 진 것으로 이후 박정희는 공화당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두달후, 1962년 1월 26일, 마침내 덕혜옹주는 김포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돌아오게 된다.

3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덕혜옹주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환국당시 덕혜옹주의 유모였던 '변상궁'이 공항에 마중나가 눈물을 흘리며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너무도 쓸쓸한 환국길이었다.
'아이고... 옹주님, 저를 알아보시겠사옵니까? 어쩌다 이 지경이 되신 것 입니까... 아이고... 가엾은 옹주님...'이라며 눈물을 흘렸으나, 덕혜옹주는 자신의 유모였던 변상궁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겨, 이방자 여사와 함께 지냈다.

 

덕혜옹주가 환국하고 10여년이 지난후,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가 보고싶다며 만나달라는 편지를 썼지만,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가 지난날 당신에게 받은 정신적인 충격과 학대때문에 옹주의 병세가 더 심해질까봐 염려된다'며 '소 다케유키'의 청을 거절하였으며, 후에 낙선재로 직접 찾아왔지만 문앞에서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그의 소식은 알 수 없었고, 둘은 이후 영원히 만나보지 못했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과 왕진 치료를 번갈아 하며 지내던 덕혜옹주.

그녀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며, 맑은 정신이 되돌이 올때 마다 늙은 궁인들의 도움을 받아 낙선재주변을 나들이를 하거나, 옛일을 이야기 하시곤 했다고 한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생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얼마 전에 훙서한 회은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비전하는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지칭함)

"나는 낙선재 살고 싶어요"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1983년 어느 정신이 맑았던날,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라는 낙서를 남기고, 이후 덕혜옹주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6년후, 파란만장하고 슬픈 삶을 뒤로한체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홍유릉 뒷편에 모셔진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그녀 스스로도 정말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부부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의민황태자, 의친왕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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