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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5월 28일 오후 7시 30분, 아기의 울음소리가 덕수궁이 떠내려 갈 듯 울렸다. 그 옛날, 유모가 임금앞에서 들어 누워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었다. 하지만 옹주에 대한 사랑이 '임금'이 아닌 한 '아버지'로서의 고종황제를 만들게 한 것이다. 고종은 덕수궁에 유치원을 설치했고 옹주는 양반자제들과 같이 공부를 하였고, 마음껏 뛰어 놀았다.히 예뻐하는 자식이 었다고 한다. 옹주는 남을 배려 하던 마음이 깊었다고 전해 지는데, 한 급우가 놀다가 치마에 얼룩이 묻어 울상을 짓자, 옹주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덕수궁 안으로 들어 가서 자신이 입던 치마와 바꿔입었다고 한다. '걱정마, 내가 입던 치마와 네가 입던 치마를 바꿔 입으면, 아무도 얼룩이 묻은 것을 모를 거야. 그럼 넌 집에서 어머니께 혼나지 않아도 될꺼야.'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서거하시고, 아버지 고종황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붕어를 맞이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가장 가까이에서 고종황제의 독살을 지켜본 사람이 덕혜옹주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덕혜옹주는 하루 하루를 외롭게 지낸다. 결국 덕혜옹주는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덕혜옹주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다.
심지어 어느 한 일본 학생이 자리로 돌아가는 덕혜옹주의 발을 걸어 넘어 뜨리며,'어머! 조선의 공주는 내게 절도 하네~' 라고 놀리며 치욕을 주곤했다고 전해진다 주변의 황족 및 친척들도 모두 독살로 살해되자, 옹주는 매일 학교에 있는 식수를 마시지 않고 집에서 물을 담아 가지고 왔다고 전해진다. 물이 다 떨이지면 아무리 목이 말라도 학교에 있는 식수를 절대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옹주님, 옹주님께서는 왜 식수를 마시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어보자 '식수에 독이 있을까봐 마시지 않습니다. 전 오빠들처럼 독을 먹고 죽기는 싫습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불안하고 외로운 나날들을 보내며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성장했다. 이렇게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성장하던 덕혜옹주는 그때 당시로는 모두가 꺼려하던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받기에 이른다. 진단명은 '조발성 치매증'이었다.
. 그러나 일본은, 덕혜옹주의 이미지를 조선인들에게서 지워버리고자, 결혼식 당일 덕혜옹주의 결혼소식에 관련한 기사는 모두 신문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조선에서의 충격을 뒤로하고,둘의 관계는 의외로 잘 굴러가는듯 보였고 둘 사이에는 '마사에'라는 딸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둘의 관계 는 덕혜옹주가 '정신분열증'을 앓기 시작할 때 부터 틀어 지기 시작한다. '당신이 내 어머니라는게 역겹고 짜증나. 애들이 뭐라는줄 알아? 나보고 더러운 조센징의 딸이래. 왜 날 낳은거지? 왜!!!'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가 믿고 따른것은 아버지 '소 다케유키'뿐이었으며, 그로인해 그녀는 자기가 조선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일본인이라는것을 증명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남편인 '소 다케유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게된 덕혜옹주는, 얼마 후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마사에의 나이 24살때의 일이다. 지금도 그녀가 정말 자살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시댁에 의해 살해 당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덕혜옹주는 딸 마사에의 소식도 전해듣지 못한채, 정신병원에서 지내던 도중 딸의 소식을 듣고 안그래도 심했던 병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나의 예쁜 딸이 나보다 먼저 가버리다니...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일본인이 죽였어... 일본인이 죽였어... 일본인이 죽였어... 일본인이 죽였어... 아니겠지...? 사실이 아닐꺼야... 그래... 또 날 놀리는거야... 놀리는거야... 놀리는거야...' 라며 중얼거리는 나날들을 보냈다고 한다.
'그건 안되지. 자유당 민주당이 다 못해도 나는 해야겠소' 라고 말하며 덕혜옹주의 환국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당시 박정희 의장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의 환국이 이루어 진 것으로 이후 박정희는 공화당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두달후, 1962년 1월 26일, 마침내 덕혜옹주는 김포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돌아오게 된다. 3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덕혜옹주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겨, 이방자 여사와 함께 지냈다.
덕혜옹주가 환국하고 10여년이 지난후,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가 보고싶다며 만나달라는 편지를 썼지만,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가 지난날 당신에게 받은 정신적인 충격과 학대때문에 옹주의 병세가 더 심해질까봐 염려된다'며 '소 다케유키'의 청을 거절하였으며, 후에 낙선재로 직접 찾아왔지만 문앞에서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그의 소식은 알 수 없었고, 둘은 이후 영원히 만나보지 못했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과 왕진 치료를 번갈아 하며 지내던 덕혜옹주. 그녀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며, 맑은 정신이 되돌이 올때 마다 늙은 궁인들의 도움을 받아 낙선재주변을 나들이를 하거나, 옛일을 이야기 하시곤 했다고 한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생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얼마 전에 훙서한 회은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비전하는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지칭함) "나는 낙선재 살고 싶어요"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983년 어느 정신이 맑았던날,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라는 낙서를 남기고, 이후 덕혜옹주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6년후, 파란만장하고 슬픈 삶을 뒤로한체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부부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의민황태자, 의친왕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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