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조부 지돈녕부사 장간공 박필균(朴弼均) 가장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13

조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증시(贈諡) 장간공(章簡公) 부군(府君) 가장(家狀)

 

 


부군의 휘는 필균(弼均), 자는 정보(正甫)요, 초휘(初諱)는 필현(弼賢)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으며,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에서 성(姓)을 얻어 반남인이 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낸 휘 상충(尙衷)이 맨 먼저 상소를 올려 명(明) 나라를 받들 것을 청하였는데 그 사실이 《고려사》 본전(本傳)에 실려 있으며, 우리 왕조에서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였다. 문정공의 아들 휘 은(訔)은 우리 태종대왕을 도와 좌의정에 올랐고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여러 대를 지나 휘 소(紹)는 사간(司諫)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인데, 세상 사람들이 야천선생(冶川先生)이라 불렀으며 부군에게는 6세조가 된다. 휘 응복(應福)을 낳았는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고조(高祖)는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휘 동량(東亮)인데, 공훈을 세워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증조(曾祖)인 금양위(錦陽尉) 휘 미(瀰)는 선조(宣祖)의 제 5 녀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조부는 첨정(僉正)을 지낸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태길(泰吉)인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종숙부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뛰어난 행실로 명성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자자하였으나 일찍 졸(卒)하였다. 비(妣)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진사 선적(宣績)의 따님으로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부군은 숙종 11년 을축년(1685) 정월 1일에 태어났다. 다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중부(仲父)인 교리공(校理公) 태만(泰萬)도 곧이어 졸하였으므로 부군은 종형(從兄)인 금녕군(錦寧君) 필하(弼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금녕군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 사익(師益)과 참판공(參判公) 사정(師正)이 모두다 부군보다 나이가 많았다. 부군이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약관에 이르러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들을 따라 배운 덕분이었다.
금녕군이 오랫동안 담화병(痰火病)을 앓던 중에도 부군을 사랑한 것은 유독 지성(至性 극히 선량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병이 심하게 되자 발자국 소리와 문소리를 특히 싫어하였으나 부군의 발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만은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군이 그 안색을 먼저 살핀 다음에 아들들을 데리고 와 뵙게 하였으며, 아들들이 매일 밤늦은 시각에 땔감을 가지고 아궁이 앞에 서 있다가 부군이 몰래 전하는 기침 신호를 받은 뒤에야 감히 불을 지피곤 하였다. 혹 그 틈을 얻지 못하면 날이 차고 눈이 얼어붙어도 문 안팎에서 함께 날을 새며 서로 가엾이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릇 이와 같이 하기를 8, 9년이 되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그래서 판서공 형제는 부군의 은덕이 골육보다 낫다고 감격해하였으며, 부군이 비단 양육해 준 이에게 효도를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효를 실천하도록 만들어 주기까지 한 것을 온 집안이 모두 칭송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대부들 사이에 언론이 서로 엇갈려 각각 자기가 어질게 여기는 이를 스승으로 삼아, 비록 한집안일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으면 나가는 길이 서로 달라지곤 하였다. 부군의 사촌 형제 수십 명 중에 부군의 나이가 가장 적었지만 명론(名論 명분론)은 가장 고명하였다. 종형 여호선생(黎湖先生) 필주(弼周)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는, 장차 한강 밖으로 은둔할 계획으로 부군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 양자를 삼고 가사(家事)를 모두 부군에게 맡기면서 출처(出處 벼슬길에 나서는 문제)로써 부군을 권면하여 말하기를,
“나는 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몸이라 - 선생이 태어나자마자 모부인(母夫人)이 첫 국밥도 들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지냈는데 지금 허명(虛名)으로 자신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부득불 한강을 경계로 삼아 그 너머에서 몸을 마치려 하네. 우리 아우는 재주나 학식이 모두 넉넉한데도 평생토록 과거를 보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몸과 집안을 일으킬 작정인가?”
하니, 부군은 썩 즐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지만 끝내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은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조야(朝野)에서 이익을 농단(壟斷)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만약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잘못 끌어들여 이익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우리 집안의 의론(議論)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우리 집안의 양대(兩代) 비갈(碑碣)은 대로(大老 송시열(宋時烈))께서 지은 것이요, 우리 중부(仲父 박태만(朴泰萬))께서 청한 것입니다. 우리 중부께서 불행히 세상을 일찍 떠나셨으나, 예전부터 팔학사(八學士)의 칭호를 받았는데 세상에서 국시(國是)를 어기는 자들이 멀리서 받들어 존중하였으니, 이를 어찌 변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이 각자 제 몸을 위하는 꾀를 내어 사론(邪論)을 주창했으니 이는 진실로 해독을 백세에 끼칠 것입니다. 그런데 유상운은 우리 집안의 외손이므로 그에 연루되어 점차 물들고 있으니,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는다면 이 어찌 우리 집안의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집안의 명론(名論)이 진실로 바르게 된다면, 내가 과거 보는 것이 아무리 늦더라도 다시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급기야 경종(景宗) 초년에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가 크게 무옥(誣獄)을 일으켜 건저(建儲)한 여러 대신을 죽이고 사류(士類)들을 마구 없애자 부군은 통진(通津)의 묘소 아래 은거하였다.
영종(英宗) 원년 을사년(1725)에 비로소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들었으니, 이때 나이 벌써 41세였다. 대개 한 번의 응시로 급제하는 경우는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해에 왕세자를 책봉하고 시강원(侍講院)의 요속(僚屬)들을 엄선하였는데, 참하관(參下官 7품 이하 관원)은 청망(淸望)으로서 겸함(兼銜)을 더욱 중히 여겼다. 이때 부군은 아직 분관(分館)이 되지 못하였는데도 상례(常例)를 뛰어넘어 특별히 겸설서(兼說書)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한림(翰林 예문관)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대교(待敎)에 올랐다.
병오년(1726)에 모친 윤부인(尹夫人)의 상을 당하여 삼년복을 마치고, 도로 한림에 들어와 봉교(奉敎)로 올랐다. 무신년(1728) 이전에 제수받은 것은 다 구명(舊名 필현(弼賢))으로 받은 것이고 봉교 이하의 관직부터는 지금 이름으로 받은 것이다.
기유년(1729)에 《경종실록(景宗實錄)》이 완성되자 4월에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수장하고 이어 선조(先朝 경종(景宗))의 사첩(史牒)을 고출(考出)하였다. 임금이 한림을 새로 추천할 것을 재촉하여, 부군이 추천을 맡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혹자가 김약로(金若魯)를 넣어 달라고 부탁하자 부군이 말하기를,
“내가 예전에 김사직(金士直 김약로의 아버지 김유(金楺))을 조상(弔喪)하였는데 여러 아들 가운데 눈이 붉은 자가 있더니 이자가 바로 그자인가?”
하였다. 분향고사(焚香故事)에 추천을 맡은 자는 추천장을 소매에 넣고 한림의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는데, 예문관에 소속된 하인이 먼저 문으로 들어가 소리 높여 손님을 물리치라고 하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찾아온 사람과 주인이 처음부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새 추천장을 꺼내 보여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 추천 완료)이 되었으니, 그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중히 여긴 까닭이다.
이때에 문벌(門閥)과 재학(才學)이 막상막하인 자가 오륙 명이었는데 급기야 신만(申晩)과 윤급(尹汲)을 한원(翰苑 예문관)에 추천해 들이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여 모두 부군을 허물하며 ‘오로지 외모만 취하였다.’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관옥(冠玉)같이 아름다운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실을 갖춘 것은 아니다.’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어찌 그리 기탄이 없는 것이 그렇게도 제 외숙을 닮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위하여 걱정하며 ‘눈이 붉은 자가 두렵다.’ 하더니, 마침내 이것이 구실이 되어 원망하는 뭇사람 중에 김약로가 특히 심하였다. 얼마 안 가서 마침내 대간(臺諫)의 진언(進言)으로 추천이 폐기되었고 부군은 이로 인하여 삭직되었다가, 곧 서용(敍用 복직)되어 6품에 올랐다. 경술년에 비로소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전에 임금이 새로 즉위하자 제일 먼저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 등 여러 역적을 베고 네 충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두어 해가 못 가서 저쪽 사람들이 다시 국권을 잡게 되어 네 충신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으니, 이를 정미진퇴(丁未進退 정미환국)라 한다. 무신역변(戊申逆變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은 이후로 구신(舊臣)들을 거두어 서용하여 차츰차츰 조정에 다시 서게 하였지만, 이로부터 충역(忠逆)이 뒤섞이게 되고 시비(是非)가 똑같아지는 등 당파 간의 조정(調停)에만 힘을 쏟아 마침내 탕평책(蕩平策)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충민공(忠愍公)과 충익공(忠翼公)의 관작만을 회복시키고 충헌공(忠獻公)과 충문공(忠文公)은 죄안(罪案) 속에 그대로 두었음에도 그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더니, 부군이 상소를 올려 극언하기를,
“두 신하가 신원(伸寃)되지 못하면 성상(聖上)에 대한 무고도 씻을 수 없고, 뭇 흉적(凶賊)을 그대로 키우면 임금의 원수 역시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한(漢) 나라와 역적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리가 본시 두 가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 신하는 바로 한 몸인데, 반은 신원이 되고 반은 신원이 되지 않아 두 갈래로 나눠진다면, 이는 비유컨대 중풍을 앓는 사람이 몸의 반만 마비가 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불인(不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이를 남의 일 보듯이 하여 조금도 구제하려 하지 않으니 그 ‘불인’이 너무 심하다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어찌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비(是非)를 전도시키고 억지로 호대(互對)를 찾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 것입니다.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관직을 임명하고 토죄(討罪)를 명하는 것이 올바른 천리(天理)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마침내 사의(私意)를 면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본원(本源)을 다지는 입장에서 만약 이 병폐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다스리고자 하여도 아마 그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장령(掌令) 윤흥무(尹興茂)가 이를 두고 부군이 당을 비호한다고 질책하면서 삭직을 요청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신해년(1731)에 비로소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소명(召命)을 어겼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7월에 다시 정언에 제수되자 상소를 올리기를,
“선왕(先王 경종(景宗))께서 병이 있으시고 후사마저 없으므로 당시 대신들이 선왕의 수필(手筆)을 받들고 자성(慈聖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언교(諺敎 언문 교서)를 받들어 종사(宗社)를 위하여 왕세제를 세웠으니 이는 대신으로서 해야 할 정상적인 직임인데, 불행히도 세도(世道)가 뒤바뀌어 새 죄안(罪案)을 억지로 첨가했으니, 어찌 거듭 원통할 일이 아니리까.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신원을 청한 것은 온 나라의 공통된 정론(正論)인데, 윤흥무가 갑작스레 ‘당을 비호한다’ 일렀으니, 그가 비록 감히 그 일을 바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과 언사에서 그 정상이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특명으로 상소를 돌려주고, 소명을 어긴 죄로 파직시켰다.
임자년(1732)에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나갔으며, 계축년(1733)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선발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고, 또 옮겨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수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다 취임하지 않았다.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 겸사서(兼司書), 문학(文學), 보덕(輔德)을 지내고, 그 사이에 학교수(學敎授 사학(四學)의 교수), 별겸춘추(別兼春秋), 훈국랑(訓局郞 훈련도감의 낭관(郎官)),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맡았다.
경신년(1740)에 부응교(副應敎)에 제수되고 그해 6월에 효종(孝宗)의 휘호(徽號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할 때 대축(大祝 축관의 우두머리)의 직임을 맡은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받았다. 8월에 임금이 존호를 받을 때 예방승지(禮房承旨)를 맡은 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9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10월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
신유년(1741) 8월에 지방관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는데, 임금이 능(陵)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양(高陽)에 이르러 궁시(弓矢)와 호피(虎皮)를 하사했다. 10월에 당시 정승이 표재(俵災)의 일로 논계(論啓 잘못을 따져 아룀)하여 파직되었다. - 가을에 장단(長湍)을 순시하였는데, 부사 윤경룡(尹慶龍)이 재해 보고를 사실보다 지나치게 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아전을 추궁하고 내사하자 윤경룡이 세도 재상 조현명(趙顯命)에게 부탁하여 조현명이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린 것이다. - 곧이어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으며, 좌윤(左尹)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호조 참판으로 옮겼다.
갑자년(1744)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병인년(1746)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고, 무진년(1748)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경오년(1750)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무인년(1758)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입시(入侍)하자 내시를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올라오게 하며 말씀하기를,
“경을 본 지 지금 몇 해가 지났도다.”
하고는, 앞으로 나와 용안(龍顔)을 쳐다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용수(龍鬚)를 쓰다듬으며,
“똑똑히 보이지 않소? 수염과 털이 이렇게 다 희었다오.”
하고서, 이어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이 사람은 염담(恬淡)하여 내가 늘 가상하게 여겨 왔다. 마땅히 한(漢) 나라에서 탁무(卓茂)를 봉한 예를 본떠 특별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하여 예전부터 노인을 존대하던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경진년(1760)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 그 사이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총부(摠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괴원(槐院 승문원)의 제거(提擧)를 겸임하였다. 무릇 한 벼슬에 거듭 제수된 것은 다 기록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초이튿날에 세상을 뜨시니 수(壽)는 7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조제(弔祭)를 내리고, 며칠 후에 교서를 내려 돌아가신 이를 애도하고 유사(有司)에게 별도로 명하여 쌀과 포목을 더 하사하여 상사(喪事)에 쓰도록 하였다. 10월 초이렛날 광주(廣州) 초월면(草月面) 학현(鶴峴)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 계해년에 양주(楊州) 별비면(別斐面) 성곡(星谷) 술좌(戌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
부군은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고 담박하여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털끝만큼도 세속의 영욕을 가슴속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선비의 평소 행실을 논하여 말하기를,
“그릇이나 물건 따위를 남에게 줄 경우에 반드시 이를 깨끗이 씻고 여러 겹 싸서 조심스레 만지거늘 하물며 임금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고자 하면서 먼저 자신을 더렵혀서야 되겠는가. 이는 그 임금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부군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30년이 되도록 전답이나 자산이 백금(百金 100냥)도 되지 않았으며, 성 아래 있는 허름한 집이 값으로 치면 돈 30꿰미에 불과했으나 죽을 때까지 거처를 바꾸지 않았다. 오직 늙은 종 하나를 두었는데 거친 밥이나마 배를 채우지 못했음에도 죽는 날까지 주인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진신(搢紳 높은 벼슬아치)들과도 왕래하는 일이 전혀 없어서, 이병태(李秉泰)ㆍ정형복(鄭亨復)ㆍ황재(黃榟) 등 세 분이 부군과 가장 친한 사이라 하는데도 일 년에 대개 한두 차례 오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겉과 속이 진솔하여 격의를 두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權道)에 따라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명예나 이익이 따라붙을 것 같으면 이 또한 어찌 의리를 세운 본뜻이겠는가.”
하였다. 세간에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유감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조만간 부군이 이조(吏曹)의 관직에 제수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여, 물의(物議)가 자못 비등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체하였다. 전법(銓法)에 당하관(堂下官)의 통색(通塞 승진 문제)은 붓을 잡은 낭관이 주관하게 되어 있다. 낭관이 후임자를 자천(自薦)할 때가 되자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느닷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낭관을 주시하니 낭관이 두려워 일어나 뒷간으로 나갔다. 김취로가 갑자기 부군을 홍문관 응교로 의망(擬望)하니 아전이 옛 규례를 고집하며 곧바로 승차(陞差 승진 임명)할 수 없다고 하자, 김취로가 꾸짖어 말하기를,
“낭관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 나갔으니, 오늘 승차를 의망한 것은 바로 옥당(玉堂 홍문관)의 구차(久次 오래 승진이 지체되는 자리)이다.”
하였다. 이처럼 부군이 벼슬길에서 낭패를 본 까닭은 실로 한천(翰薦) 한 가지 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판서공(判書公 박사익)이 일찍이 여호선생(黎湖先生 박필주)에게 질문하기를,
“이여오(李汝五)가 저에게, ‘그대의 집안에 명사(名士)가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해오라기가 가을 물가에 서 있어 겉에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모습과 같고, 또 한 사람은 소나무가 아스라한 낭떠러지 위에 솟아나 넝쿨들이 타고 오르기 어려운 모습과 같다.’라고 하자, 이희경(李熙卿)이 이 말을 듣고는 참 좋은 말이라 하면서,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나약한 자에게 뜻을 세우게 할 수 있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만들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유로 말한 저 두 인물 가운데 누가 나은가요?”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과연 그렇겠다! 시숙(時叔)은 꼿꼿하고 정보(正甫 박필균)는 담박하지. 담박한 사람은 어리숙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꼿꼿하고, 꼿꼿한 사람은 오만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담박하니, 이들은 대체로 두 사람이면서도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겠지.”
하였다. 시숙(時叔)은 참판공(參判公 박사정)의 자(字)이다.
급기야 참판공의 아들 명원(明源)이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로 봉해지고, 참판공이 얼마 후 돌아가시자 집안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조정에 선 자가 없게 되었다. 부군은 등과(登科)하여 16년이 지난 뒤에도 백발의 늙은 학사(學士)로 지냈으며, 늦게서야 비로소 당상관에 올랐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의 평범한 진출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임금의 촉망을 받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승정원에서 숙직할 때에, 밤에 임금이 부군을 불러 물으시기를,
“승지는 지금 나이가 몇이며, 집은 어디에 있는가? 왜 집을 성안으로 옮겨 살지 않는가?”
하였다. 이때 우사(右史)만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임금이 우사에게 밖으로 나가서 정명(政命)을 전달하라고 명하자, 부군이 황공하여 물러나려고 하니 임금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는 말씀하기를,
“존호(尊號)를 받는 것이 내가 즐겨하는 바는 아니지만 동조(東朝)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여러 신하들의 청을 마지못해 따른 것인데 이제(李濟)가 소를 올려 경계의 말을 하였으므로 나는 실로 부끄러웠다. 내시들이 이것(존호를 받는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저들이 어찌 감히 조정의 논의에 간여한단 말인가. 승지는 친인척(親姻戚)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니 바깥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하였다. 부군이 물러나서 생각해 보니 황송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하루아침에 두 자급(資級)을 뛰어오르는 은택을 입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규례에 따라 도승지에 오르게 되자 열이레 동안 병을 핑계 대고는 마침내 나아가 숙배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다시는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화평옹주가 처음 시집을 올 때 의식을 가례(嘉禮 사가(私家)의 혼례)와 똑같이 하여 당시에 종족(宗族)과 빈객(賓客)들이 모두 다 모였다. 그들의 생각에, 부군이 벽제(辟除)를 잡히고 초헌을 타고 와서 상석(上席)을 맡게 된다면 비단 이날에 문호(門戶)를 빛내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부마를 위해서도 빛이 나리라 여기어, 느지막에 종질(從姪) 아무개가 와서 부군에게 권하기를,
“숙부가 오시지 않으면 자못 실망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하니, 부군은 놀라며 하는 말이,
“옹주의 집을 외인이 어찌 함부로 갈 수 있느냐?”
하였다.
얼마 후 옹주가 정안옹주(貞安翁主 박미(朴瀰)의 부인)의 사당을 알현하였는데, 정안옹주의 후손 중에 지위가 잘 알려진 사람이 사당의 문에서 예의를 갖추라는 중지(中旨)를 받은 데다, 장차 정안옹주에게 치제(致祭)하여 영광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부군이 병으로 오지 못하여 향(香)을 받을 자가 없어서, 마침내 치제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종중(宗中)의 여러 장로(長老)들이 모두 부군을 나무라기를,
“어찌 병을 무릅쓰고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온 집안의 은영(恩榮)이 되도록 아니 했소.”
하였다.
명원(明源)이 병이 깊어 일 년이 넘자 어의(御醫)가 밤낮으로 간호하고 친척들이 찾아와 문병을 하였으며 날마다 병세를 기록하고 보고하였는데, 유독 부군은 이상하게도 한 차례 안부도 물은 적이 없었다. 명원 역시 일찍이 서운히 여기어 원망하기를,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은 생각지도 않는가.”
하였다.
종질(從姪) 아무개가 일찍이 부군에게 와서 말하기를,
“숙부께서는 밖으로는 산림(山林)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고 안으로는 왕실의 친척과 관계를 맺고 있어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앉아서 풍속(風俗)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 지금의 국시(國是)를 쥐고 있는 자가 어느 누군들 옷깃을 여미고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섯 사람이 설원(雪寃)되지 못하고 세 흉적이 토죄(討罪)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숙부께서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여러 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이 성상의 은총을 받고 앞길이 확 트여 세도(世道)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 탕평파(蕩平派)의 신하들까지도 우리 집안의 동정을 몰래 엿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니, 부군이 깜짝 놀라며,
“너는 본래 우둔한 자인데, 누가 너에게 이 말을 가르쳐 주었으며, 산림이란 너에게 있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위로는 어진 부형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을 망치려 들려고 하느냐? 이른바 세도라는 것이 어찌 너처럼 일개 늙은 음관(蔭官)이 알 수 있는 바이겠느냐.”
하니, 아무개가 무색하여 말하기를,
“숙부께서 답답하게도 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여론을 접하지 않으시기에 특별히 와서 진심을 토로한 것인데, 도리어 성을 내신단 말씀입니까.”
하자, 부군이,
“돌아가 지금 세도를 행하는 자에게 말하라. 숨바꼭질하듯이 몸을 숨기는 것을 도깨비〔罔兩〕라 이르고, 구차스레 득실을 걱정하는 자를 비부(鄙夫 비열한 인간)라 이른다. 나는 진실로 답답하거니와, 어찌 너처럼 자질구레한 자 때문에 지조가 무너지겠느냐. 세상에 공정한 여론이 있다면, 지난번에 내가 갑자기 승진한 것에 대해서 논박을 달게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추측컨대 당시 사람들이, 부군이 이미 누차 중지를 어긴 줄을 알지 못하고 근거 없는 소문에만 주목하여 남몰래 청탁할 일이 있게 되자 임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타진해 본 것인 듯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본시 세상에 영합하여 뜻을 이루었는데, 임금의 마음이 한번 옮겨지고 정대한 여론이 마침내 펴지는 날이면 자신도 한 패거리로 몰려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다시 두려워하여,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보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부군이 홀로 세상과 영합하지 않아 예전에는 김씨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얼마 전에는 또 요상(僚相)이 모함을 한 사실을 생각하고는, 자주 부군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부군은 그의 언론이 항상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을 평소에 비루하게 여겨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여호선생을 천거하여 이조 판서를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세상에 영합하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임금은 본래 생각하기를 ‘산림에 묻혀 뜻을 닦는 자는 세상에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잠깐 나왔다 곧바로 떠나곤 하여 절차만 번거롭게 할 뿐이다. 게다가 조야(朝野)가 편안하지 못한 것도 대개는 이에 연유한다.’고 하였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초빙이 되었으므로, 여호선생이 부군(府君)의 집에 와서 처소를 정하니, 처소에 모이는 자가 매일 조정의 절반은 되었다. 정승 조현명(趙顯命)이 찾아오자, 방과 대청이 협착하고 누추하여 여러 조신(朝臣)들이 피해 있을 곳이 없었다. 이에 조현명이 여러 조신들에게 읍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은 선생님을 모시고 강론하고 싶은 대목이 있어 여러 분들과 더불어 함께 듣고자 하니, 조정의 예(禮)로써 서먹서먹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소매 속에서 《대학(大學)》을 꺼내 혈구장(絜矩章)을 강론하기 시작하자 부군이 웃으며,
하자, 조현명이 히히 웃다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그쳤다. 이날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들 부군을 위해 걱정하였다.
홍계희(洪啓禧)는 척분(戚分)이 있어 날마다 선생을 모시고 잤는데, 부군이 몰래 선생에게 말하기를,
“은(殷) 나라 수레와 주(周) 나라 면류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순서가 바뀐 듯합니다.”
하자, 선생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부군이,
“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하라〔遠佞人〕’는 대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홍계희가 밤에 부군에게 의견을 묻기를,
“어제 여호선생이 등대(登對)하셨을 적에 임금께서 친히 손을 잡으시고는 개정(開政)할 것을 독촉하셨으니 한번 명(命)을 받드는 것이 그만둘 수 없는 일인 듯싶습니다만, 부제학 자리를 만약 신통(新通 새 인물을 후보로 결정함)한다면 피차간에 어려운 점이 있어 중통(重通)만 못합니다. 그렇다면 김상로(金尙魯)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의 말이 비록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본심은 실로 자기가 맡으려는 것이었다. 이에 부군이 말하기를,
“이른바 집이 가까워도 사람은 멀다는 격이군요. 그대는 왜 곧장 이조(吏曹)에 가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요?”
하였다. 이튿날 홍계희가 우암(尤庵)의 고사를 다분히 끌어대어 여호선생에게 넌지시 말하자, 부군이 버럭 소리를 치기를,
“우암이 정사(政事)를 했다면 김상로는 제주 목사가 되고 정익하(鄭益河)는 부령 부사(富寧府使)가 되었을 것이오.”
하자, 좌중 사람들이 몸이 오싹하여 서로 쳐다보았다. 이때 홍계희는 벌써 여러 김씨(金氏)들에게 달려가 고자질하여 부군을 위태롭게 하고자 꾀하고, 나아가 선생에게까지 위험이 미치게 하려 하였다. 그러자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제주 목사를 부풀려서 강계 부사(江界府使)니 영월 부사(寧越府使)니 하면서 다투어 상대를 지목하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모두들 부군을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선생이 직접 차자(箚子)를 올리고 진신(搢紳)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耈) 등을 토죄(討罪)할 때 유독 김상로 형제만 참여하지 않았으며, 박문수(朴文秀)가 상소를 올려 여호선생을 쫓아냈을 때에 여러 김씨들의 힘이 작용하였으니, 이는 다 홍계희가 한 짓이었다.
9월에 비로소 유봉휘, 조태구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자 세간에서 부군을 편론(偏論)의 도가(都家)로 지목하는 일이 있게 되니, 부군은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아 지방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방어영(防禦營)을 철원(鐵原)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두어 달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죽자 임금이 갑자기 왕림하시니 백관들이 허둥지둥 걸어서 뒤를 따랐다. 중지(中旨)가 내리기를,
“시가(媤家)의 존속(尊屬) 한 사람이 입장(入帳)하고 상사(喪事)를 감독하게 하라.”
하였으나, 부군이 성명(成命 공식 왕명)이 내리지 않았다 하여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상이 이틀 밤이 지나도록 환궁하지 않아 대신들이 누차 환궁할 것을 청했으나 거듭 엄한 분부만 듣고 모두 문밖에서 대기하였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원망하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정(情)으로 보나 의(義)로 보나 어찌 유독 오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장차 명정(銘旌)을 설치하려고 부군에게 와서 글씨를 요청하자, 부군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대고서 쓰지 않았다. 이어 붉은 비단을 그대로 돌려보내면서, 도위(都尉 박명원)에게 편지를 써 나무라기를,
“듣자니 삼공(三公)이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마구간 사이에 줄지어 있다 하니 이게 무슨 거조(擧措)란 말인가. 오늘날 조정이 아무리 비루하다 한들 어찌 너희같이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갖추고 도탄(塗炭)에 앉아 있는 무리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어이해 제 머리를 깨부수고 제 목을 찌를 듯이 하여 임금의 마음을 빨리 돌리지 않고 내시들과 함께 앉아서 겨우 눈물이나 흘리고 있단 말이냐?”
하였다. 이때 군사 호위가 너무도 엄하여 뭇 신하들을 들여놓지 않았으므로 도위가 실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다가, 급기야 이 편지를 보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뜰에 내려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니, 임금이 몹시 성을 내며,
“너도 또한 조정 신하들을 흉내 내느냐? 파직시켜라, 파직시켜라!”
하였다. 얼마 후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파직을 시킨다면 결국 맹만택(孟萬澤)의 경우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고는, 곧바로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부군이 도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고는 외판(外辦)할 것을 하명하니, 대신이 그제야 비로소 진현(進見)할 수 있게 되어 바야흐로 진언을 드리려 하였으나, 임금이 갑자기 신사철(申思喆)을 꾸짖으며 도로 다시 편전(便殿)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제야 비로소 임금이 치미는 울화가 있어서 다른 일에다 성을 낸 것을 조정의 안팎에서 알게 되었다.
당시에 사대부로서 처신에 능란한 자들에게는 기회를 엿보기에 모든 것이 좋은 때였으나 홀로 부군만이 꿋꿋이 자신을 지켜 조금도 자리를 옮겨 앉지 않았으니, 19년 동안 한산직(閑散職)을 전전한 것만 보아도 그 본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욕(榮辱)의 사이에도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방촌(方寸 마음)의 사이에 담연(澹然)하여 얽매임이 없었던 것은 오직 부군만이 그러했으니, 비록 당세에 부군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도 또한 청신(淸愼)하고 개제(愷悌 온화함)하다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우윤(右尹) 응(膺)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사유(師愈), 사헌(師憲), 사근(師近)인데, 사근은 현감을 지냈으며 여호선생에게 출계(出繼)했다. 딸은 판관(判官) 어용림(魚用霖)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희원(喜源)과 지원(趾源)인데 지원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손녀는 감역(監役) 이현모(李顯模)와 현감 서중수(徐重修)에게 출가했는데, 다 큰아들 소생이다. 진원(進源)은 일찍 죽고 수원(綏源)은 부사요, 손녀는 황형(黃馨)에게 출가했는데, 사근(師近)의 소생이다. 외손(外孫)에는 군수 어재소(魚在沼)와 어재운(魚在雲)이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불초 손(孫) 지원이 삼가 쓰다.

 

大考資憲大夫知敦寧府事贈謚章簡公府君家狀

 



 

府君諱弼均。字正甫。初諱弼賢。我朴氏。系出新羅。得姓於羅州之潘南縣者。爲潘南人也。高麗恭讓王時。判典校寺事諱尙衷。首疏請尊皇明。語載麗史本傳。我朝追謚文正。生諱訔。佐我太宗。位左議政。謚平度。累傳至諱紹。司諫贈領議政。謚文康。世號冶川先生。爲府君六世祖。生諱應福。大司憲。高祖右參贊諱東亮。勳封錦溪君。贈領議政。謚忠翼。曾祖錦陽尉諱瀰。尙宣祖第五女貞安翁主。謚文貞。祖僉正諱世橋。贈吏曹判書錦興君。考諱泰吉。贈吏曹判書。師事從叔父文純公世釆。有卓行。名高士友間。早卒。妣漆原尹氏。進士宣績之女。贈貞夫人。府君以肅廟十一年乙丑正月一日生。生五歲而孤。仲父校理公泰萬相繼隕逝。府君受育於從兄錦寧君弼夏。錦寧君諸子判書公師益。參判公師正。皆長於府君。府君自幼始學。至弱冠。博通經史。皆肩隨師資也。及錦寧君久患痰火。而愛府君。獨出至性。疾甚則尤忌跫音戶響。然步履開闔。獨聽府君。府君伺顔色。引見諸子。諸子每夜深。擁薪立竈下。得府君密傳警欬。乃敢熅火。或未得間。則天寒凍雪。戶內外共達曙。未甞不相憐也。凡若是者。積八九歲如一日。判書公兄弟。德府君。恩踰骨肉。一門共稱。府君非獨移孝所育。爲能達人之孝也。先是。士大夫言議岐貳。各師其所賢。雖其一室之中。趍向不同。則門路相殊。府君從父昆弟十數人。府君年最少。然名論最高。從兄黎湖先生弼周。被徵而將屛跡江外。取府君幼子爲嗣。悉付家事于府君。以出處相勉曰。吾生而負釁。 先生纔脫胞。而母夫人未進羹飯而歿。絶意當世。乃今以虛名自誤。不得不畫江而爲沒身之限。吾弟才學俱優。而平生不應擧。將何以立身家耶。府君愀然不樂曰。天下之義理無窮。而終未有兩是雙非也。世之龍斷於朝野者多矣。若謬援文純公。以爲罔利之資。則吾家之言議。其將安所出乎。吾家之兩世碑碣。大老之所撰。而吾仲父之所謁也。吾仲父不幸早世。而舊有八學士之號。世之背馳國是者。遙相引重。此惡得無辨而已哉。南九萬,柳尙運自爲身謀。鼓唱邪議。是固將流毒百世。而柳是吾家之外孫。則牽連漸染。當斷而不斷。此豈非吾家之大累歟。同室之名論。苟得其正。則吾應擧雖晩。亦復何恨。及景廟初載。南,柳之徒。大起誣獄。殺建儲諸大臣。殲刈士類。府君隱居通津墓下。英宗元年乙巳。始赴庭試。中丙科。時年已四十一。葢一擧中第。世所罕也。是年冊王世子。極選侍講僚屬。而參下淸望。尤重兼啣。時府君未及分舘。則越例特拜兼說書。尋薦入翰林。爲藝文舘檢閱。陞待敎。丙午。丁尹夫人憂。服闋。還入翰林。陞奉敎。戊申。以前除拜皆舊名。而自奉敎以下。乃今諱也。己酉。景廟實錄成。四月奉藏于赤裳山。仍考出先朝史牒。上促新薦。府君辭不獲。或以金若魯來屬者。府君曰。我甞吊金士直諸孤。有赤眼者。此其人耶。焚香故事。主薦者。袖薦牘。歷抵翰林。先進舘隷。先入門高聲辟客。雖大官。自非宿趼。例皆謝去。賓主初不交一語。出示新剡。無毫髮疵摘。然後始爲完薦。其嚴如此。所以重史事也。當是時。地閥才學莫相上下者五六人。而及薦申晩,尹汲入翰苑。則擧世譁然。咸咎府君。專事貌取。或言美如冠玉者。其中未必有。或言何無忌。酷似其舅。或爲府君憂之曰。赤眼可怕。遂成口實。衆怨之中。金尤甚焉。未幾竟以臺言敗薦。府君坐削職。旋叙陞六品。庚戌。始拜司諫院正言。初上新卽位。首誅鏡虎等諸賊。爲四忠立祠。不數年。一番人復執國。命追奪四忠爵。是爲丁未進退。及戊申逆變以後。收叙舊臣。稍稍復列於朝。然自是混忠逆。齊是非。務爲調停。遂有蕩平之號。而只復忠愍忠翼爵。仍置忠獻忠文于案中。莫有訟其寃者。府君上䟽。極言兩臣未伸。則聖誣莫雪矣。群凶是長。則君讎自在矣。所謂漢賊不兩立者。義理本無二致故也。四臣一軆。而半伸半屈。分作兩截。譬如風痺之人。半身偏枯。不識痛癢。謂之不仁。今之體國者。視若秦瘠而莫之恤焉。其亦不仁甚矣。殿下所欲爲者。豈非建極之治乎。然而顚倒是非。强覔互對。是所謂不揣其本。而齊其末。惡在其建極也。故秩叙命討。不出乎天理之正。則終未免私意而已矣。本源之地。若不亟去此病。雖欲爲治。恐無其道也。掌令尹興茂斥以護黨啓削職。辛亥。始叙拜正言。坐違召罷。七月。復拜正言。上䟽曰。先王有疾無嗣。當時大臣奉先王之手筆。承慈聖之諺敎。爲宗社建儲副。此乃大臣之常職。不幸世道反覆。新案勒添。豈不重可寃乎。臣之向䟽請伸。乃擧國共公之論。而尹興茂輒謂之護黨。彼雖不敢直擧其事。而卽其俯仰呑吐之間。情態敗露。有不能掩者。疏入。特命還給。坐違召罷。壬子。出爲龍仁縣令。癸丑。選入弘文舘爲副修撰。陞校理。移除司憲府持平。還除修撰。皆不就。歷侍講院司書兼司書,文學,輔德。間帶學敎授。別兼春秋,訓局郞,司僕寺正。庚申。除副應敎。六月。加上孝廟徽號。以大祝勞。進階通政。拜同副承旨。八月。上受尊號。以禮房。進階嘉善。由左承旨。陞都承旨。九月。拜漢城府右尹。十月。拜刑曹參判。遷兵曹。辛酉八月。持節爲京畿觀察使。上謁陵。還至高陽。賜弓矢虎皮。十月。時相以俵災事。論啓罷職。秋巡到長湍。府使尹慶龍。以報災濫過事覺。推吏按驗。慶龍屬權相趙顯命啓罷。旋叙拜司諫院大司諫。辭遞。拜左尹。尋移戶曹參判。甲子。拜司憲府大司憲。辭遞。丙寅冬。出爲春川府使。戊辰。拜禮曹參判。庚午。拜工曹參判。戊寅。拜同知敦寧府事。特命入侍。令內侍扶腋上殿曰。見卿今過幾年矣。命進前仰瞻。上自捋龍髯曰。視不審乎。鬚髮盡白矣。因下傳敎曰。此人恬淡。予常嘉尙。宜效漢封卓武。特除知中樞府事。以示予惟昔尊年之意。是日入耆社。庚辰。拜知敦寧府事。間兼摠府金吾。提擧槐院。凡一官重除。皆不錄。以其年八月初二日。棄世。壽七十六。訃聞。賜吊祭。後數日。下敎隱卒。別飭有司。加賜米布。以庀喪事。十月初七日。葬于廣州草月面鶴峴坐卯原。癸亥。移厝于楊州別斐面星谷戌坐原。府君姿性雅潔恬簡。自少至老。未嘗以一毫世累嬰懷。甞論士子素行曰。以器物相贈者。必洗拭裹襲。謹其操執。况欲致身於君。而先自玷壞乎。是不敬其君者也。立朝三十年。田產無百金之資。城下弊廬。直不過緡錢三十。而沒世不易居。獨一老僕。糟糠不充。然至死無怨色。搢紳間絶無過從。李公秉泰,鄭公亨復,黃公榟最稱相善。而歲中率不過一再往還。表裏坦白。不設畦畛。常與人言。古來身中淸廢中權者有之矣。若夫因此而名利並附。則亦豈立義本旨耶。世有聞是言。而終身不能釋憾者。朝暮將入選部。而每爲人先占。物議頗騰。而府君若爲不聞焉。銓法堂下通塞。秉筆郞主之。臨當自代。判銓金取魯忽默然目視郞。郞懼起如廁。金遽擬府君。弘文舘應敎。吏堅持舊規。不可徑陞。金叱曰。郞投筆起。今日陞擬。乃玉署久次也。府君所以蹭蹬世路者。實由翰薦一事也。判書公甞質黎湖先生曰。李汝五爲言。君家二名士。一則鷺立秋水。一鹿不到。一則松挺絶壑。衆蘿難援。李煕卿聞而善之曰。有一於此。足以立懦廉頑。彼兩喩孰賢。先生曰有是哉。時叔矯亢。正甫恬簡。恬簡者似拙。而其實矯亢。矯亢者近傲。而其實恬簡。葢二人而一身也。時叔參判公字也。及參判公小子明源尙和平翁主。封錦城尉。參判公尋卒。無科甲立朝者。府君釋褐十六年。皤然老學士。而晩始緋玉。乃素門平進。則初未悟上意有屬也。坐直喉院時。夜召對。問承宣年幾何。家何在。何不移家處城內。時獨有右史。上命右史。出傳政命。府君惶恐將退出。上遽命進前曰。受號非予所樂。而爲奉歡東朝。勉從群請。李濟疏論。予實慚焉。內侍有言。此淸朝美事。渠何敢干預朝論乎。承宣猶親姻故言之。勿令外人知也。府君旣退出。且惶且愧。不自意一朝超躐兩階恩遇。有以也。及例陞知申。則引疾十七日。遂不出肅。自此不復入銀臺矣。翁主始出閣。儀同嘉禮。時宗族賓客悉會。意謂府君鳴騶轉軺來主席。不獨是日侈門戶。抑爲禁臠生輝。向晩從姪某來。勸府君曰。叔父不來。則殊多敗意者。府君驚曰。主第豈可外人輒至。頃之。翁主廟見。貞安翁主。貞安孫有位著者。廟門禮貌有中旨。且將致祭貞安主以榮之。及府君病不來。無受香者。遂寢致祭。宗中諸長老。咸咎府君何不强疾對揚。爲闔門恩耀。明源沉疾歲餘。太醫日夜護視。親戚顧存。日有錄啓。獨怪府君一無問訊。明源亦嘗戚戚恨望。我先世亦姻天家。今何疎絶我若凂也。獨不念我先人。以少庇其孤露哉。從姪某甞來語府君曰。叔父外負山林之望。內托肺腑之親。不出戶庭而坐鎭雅俗。則今之秉國是者。孰不斂衽而歸重哉。五人未雪。三凶莫討。叔父所以鐵限於三司者幾年矣。顧今新被寵命。進退方亨。有可以主張世道。雖彼蕩平諸人。竊覸吾家動靜。府君大駭曰。若素戇誰敎汝此語者。山林於汝何人也。欲以上累賢父。下賊穉子耶。所謂世道。豈汝一老廕所知。某憮然曰。叔父沓沓。面郭而坐。物議不接。特來情話。乃反怒爲。府君曰。歸語今之爲世道者。迷藏幽隱。謂之罔兩。苟患得失。謂之鄙夫。我固沓沓。豈由汝瑣瑣者所壞。世有公議。則頃來驟升。甘受駁正。葢時人不識府君已屢失中旨。而睢盱於影響之外。陰有所囑付。以診其眷注淺深。左相宋寅明。本以希合得志。復恐天意一移。大論終伸。則同流合汙。無以自拔。欲稍示異同。而念府君獨與世不合。舊旣見忤諸金。頃又爲僚相所陷。則數致意府君。府君素鄙其言議甞持兩端。不之答焉。於是遂薦黎湖先生。爲吏曹判書。此其所以希世之術也。上本謂尙志邱園者。不適世用。而乍致旋去。徒煩儀文。且以朝野不寧。率由於此。然業已招延。則先生來主府君。在席者日常半朝廷。趙相顯命至。室宇狹陋。諸公無回避處。趙揖諸公就席曰。今日得陪凾丈。欲有所講論。願與諸賢共聽。毋以朝禮見外。袖出大學講挈矩章。府君笑曰。相公挈矩。自有鹿皮。惡用是騎蒭講學。趙笑嘻嘻。色變而止。是日觀者愕然。莫不爲府君危之。洪啓禧有戚分。日侍宿先生。府君私語先生曰。殷輅周冕。恐是易次。先生曰。何謂也。府君曰。當先遠佞。啓禧夜間於府君曰。日昨先生之登對也。上親執手。勉其開政。一番承膺。恐未可已。副學若新通。則有難彼此。莫如重通。然則無出金尙魯語。雖爲人。意實自寄。府君曰。所謂室邇人遐。君何不直叩銓家。明日啓禧。多援尤庵故事。以諷先生。府君遽曰。尤庵而爲政。則金尙魯爲濟州牧使。鄭益河爲富寧府使。坐者悚然相視。啓禧已走惎諸金謀。危府君以及先生。於是浮囂者增衍。濟牧如江界寧越。競相指目。當路者莫不怨府君次骨。及先生上袖箚。而搢紳聯䟽。討輝耈等。獨尙魯兄弟不參。及朴文秀䟽逐先生。而諸金有力焉。皆啓禧所爲也。九月。始追奪輝耈等官爵。而世有偏論都家之目。府君不自安。求出外得春川。而防營之移設鐵原。自此始居數月。棄紱歸。和平翁主卒。乘輿遽臨。百官蒼黃步隨。有旨舅家尊屬。一人入帳。董護喪事。府君以無成命。稱疾不來。上經兩夜。不還宮。大臣屢請回鑾。荐被嚴敎。皆待罪門下。或怨府君此何時也。以情以義。何獨不來也。將設銘旌。來要府君筆。府君稱疾篤。不書。因以紅還乃書責都尉曰。聞三公不敢退。累累槽櫪間。此何擧也。今日朝廷雖卑。豈容汝塗炭衣冠。何不碎首刎頸。亟回天心。而共婦寺坐。垂泣但已。時兵衛甚嚴。毋納群臣。都尉實不知外間事。及得書不知所爲。下庭免冠叩頭。上怒甚曰。爾亦效外廷耶。罷職罷職。旣而泣曰。罷職則是萬孟澤也。旋命還收。時上微聞府君有書。因下外辦。大臣始得進見。方有所奏。言上遽罵。申思喆還復閉閤。中外始知上有所激惱而移怒也。當時士大夫工於進取者。投間抵隙。罔非幸會。而獨府君介然自守。坐不移席。則觀乎十九年。居閒處散。有可以默徵本末矣。寵辱之際。確乎不拔。方寸之間。澹然無累。惟府君爲然。雖當世不悅於府君者。亦莫不以淸愼愷悌稱之。配貞夫人驪州李氏。右尹膺之女。生三男一女。師愈,師憲,師近縣監。出繼黎湖先生。女判官魚用霖。孫喜源,趾源府使。女監役李顯模。縣監徐重修。長房出。進源早歿。綏源府使。女黃馨。師近出。外孫魚在沼郡守。魚在雲。餘不盡錄。不肖孫趾源。謹狀。


 



 

[주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을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주C-001]조부 …… 가장(家狀) : 연암이 만년에 지은 글이다.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당시 연암은 눈이 어둡고 팔이 마비되어 아들 박종채에게 구술해서 이 글을 완성했다고 한다. 《純祖實錄》에 의하면 순조 5년(1805) 1월 7일 박필균에게 장간(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연암은 그 해 10월 20일에 별세했으므로, 이 글은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었을 것이다.
[주D-001]《고려사》 …… 있으며 : 《고려사》 권112 열전(列傳)25에 실려 있다. 박상충(1332~1375)은 이곡(李穀)의 문인이요 사위였으며, 신진 성리학자이자 친명파(親明派)로 활약하다가 반대파에게 암살되었다.
[주D-002]모두 …… 덕분이었다 : 원문은 ‘皆肩隨師資也’인데,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가 다섯 살이 많은 사람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뒤를 따라간다.〔五年以長 則肩隨之〕”고 하였다. 나이 차이가 그 정도밖에 나지 않는 사이였지만 박사익ㆍ박사정 형제를 스승처럼 여겨 본받았다는 뜻이다.
[주D-003]사대부들 …… 하였다 :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이 송시열(宋時烈) 등을 추종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 등을 추종하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진 사실을 말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도 박세채(朴世采 : 1631~1695)는 소론에 속하였고, 박필주(朴弼周 : 1665~1748)는 노론에 속하였다.
[주D-004]우리 …… 것입니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1에 박동량의 묘표인 ‘금계군 박공 동량 묘표(錦溪君朴公東亮墓表)’와 권163에 박미의 신도비인 ‘금양군 박공 미 신도비명(錦陽君朴公瀰神道碑銘)’이 수록되어 있다. 박미의 신도비는 그 손자인 박태만(朴泰萬)이 송시열에게 지어 주기를 청한 사실이 본문에 밝혀져 있다. 박동량의 묘표는 그 손자인 박세채(朴世采)가 송시열에게 지어 주기를 청한 글이었다.
[주D-005]팔학사(八學士) : 송시열의 고제(高弟) 8인을 뜻하는 듯하다. 참고로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한원진(韓元震)ㆍ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었다.
[주D-006]남구만(南九萬)과 …… 것입니다 : 소론의 지도자였던 남구만(1629~1711)과 유상운(柳尙運 : 1636~1707)은 숙종 20년(1694) 합세하여,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처형하는 데 반대하고 그를 유배에 처하는 유화 조치를 취하여 노론의 지탄을 받았다. 또한 이 두 사람은 숙종 27년(1701) 노론에 맞서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경형(輕刑)으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사사(賜死)를 내리자, 노론의 탄핵을 받고 함께 파직당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왕위 계승 문제에서 소론이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후일의 경종)를 추대한 반면, 노론은 세자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 후일의 영조)을 추대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유상운은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외손자였다.
[주D-007]경종(景宗) …… 없애자 : 남구만과 유상운은 소론의 초기 인물이다. 이 사건은 경종 초기에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워 대리청정을 하게 한 노론을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과격파들이 공격하여 대대적으로 숙청을 가한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1722)를 가리키는 것으로, 남구만과 유상운이 이미 죽고 난 후의 일이다. 따라서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는 이들의 영향을 받은 김일경 등 소론 과격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D-008]청망(淸望) : 청환(淸宦)의 의망(擬望)이란 뜻으로, 명예로우면서도 중요한 벼슬자리, 즉 청요직(淸要職)에 삼망(三望) 즉 3인의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는 경우를 말한다. 시강원의 참하관으로는 설서(說書), 겸설서, 자의(諮議)가 있다.
[주D-009]아직 …… 못하였는데도 : 과거 급제자를 박사(博士)의 채점에 따라 삼관(三館) 즉 승문원과 성균관과 교서관에 차례로 배치하는 것을 분관(分館)이라 한다. 소정의 점수를 얻지 못해 다음번 분관을 기다리는 사람을 미분관인(未分館人)이라 한다.
[주D-010]고출(考出) :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 취래(取來)ㆍ고출(考出)ㆍ개장(改粧)ㆍ개궤(改櫃) 등의 작업을 하는데, 고출은 실록의 내용을 초록(抄錄)하는 것을 뜻한다. 실록의 포쇄관(曝曬官)으로는 예문관 봉교ㆍ대교ㆍ검열이 파견되었다.
[주D-011]김약로(金若魯) : 1694~1753.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박세채ㆍ송시열의 문인으로 이조참판 겸 양관의 대제학을 지낸 김유(金楺 : 1653~1719)의 아들이다. 김약로는 영조 3년(1727)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정자가 되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냈다. 판서를 지낸 그의 형 김취로(金取魯), 우의정을 지낸 아우 김상로(金尙魯), 영의정을 지낸 사촌 형 김재로(金在魯)와 함께 고위직에 있으면서 한때 세도가 매우 컸다.
[주D-012]분향고사(焚香故事) : 분향은 예문관에서 한림의 새 후보자를 추천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에 분향하여 고하는 절차를 말한다. 그러나 후보자에게 소시(召試)를 보게 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분향하던 절차도 없어졌다. 그러므로 고사(故事)라 한 것이다. 《연암집》 권3 왕고수서한림천기(王考手書翰林薦記)에서도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주D-013]이것은 …… 까닭이다 : 예문관의 봉교(奉敎) 이하는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주D-014]신만(申晩)과 윤급(尹汲) : 신만(1703~1765)은 판중추부사 신사철(申思喆 : 1671~1759)의 아들이다. 1726년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득세할 때 파직당했다. 후일 영의정까지 지냈다. 윤급(1679~1770)은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의 문인으로 1725년 과거 급제 후 이조 판서, 우참찬까지 지냈으나, 탕평책에 반대하여 누차 파직 또는 좌천되었다.
[주D-015]관옥(冠玉)같이 …… 아니다 : 《사기(史記)》 권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서 유방(劉邦)의 총애를 받던 진평(陳平)을 헐뜯는 자들이 “진평은 비록 미남자이지만 모자를 장식하는 옥과 같을 따름이니, 그 내실을 반드시 갖춘 것은 아니다.〔平雖美丈夫 如冠玉耳 其中未必有〕”라고 한 말에서 따온 표현이다.
[주D-016]네 충신 : 경종 때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사대가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주D-017]저쪽 사람들 : 소론을 가리킨다. 영조 3년(1727) 소론 측의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우의정이 되고, 노론 측의 정호(鄭澔), 민진원(閔鎭遠)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주D-018]한(漢) 나라와 …… 못한다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선제(先帝 : 유비)는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先帝慮漢賊不兩立〕”고 하였다. 한 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촉(蜀)은 한 나라의 역적인 위(魏)의 조조(曹操)를 토벌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D-019]나라의 …… 정치 :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하나로 “임금이 원칙을 세움〔建用皇極〕”을 들었다.
[주D-020]호대(互對) :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을 취한 인사정책을 말한다. 노론 측 인사를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측 인사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는 식이다.
[주D-021]그 …… 맞추려는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예(禮)보다 식색(食色)이 중요하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 맹자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不揣其本而齊其末〕” 궤변이라고 비판하였다.
[주D-022]표재(俵災) : 재해를 입은 논밭에 대하여 그 비율에 따라 조세의 감면을 할당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3]염담(恬淡) : 명예나 이익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을 뜻한다.
[주D-024]탁무(卓茂) : ?~28.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였으므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특별히 불러 태부(太傅)를 삼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다.
[주D-025]이병태(李秉泰)ㆍ정형복(鄭亨復)ㆍ황재(黃榟) : 이병태(1688~1733)는 1723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탕평책에 반대하다 파직되었고, 1730년 경상 감사ㆍ우부승지에 취임하기를 거부하여 합천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청백리로서 합천의 청천서원(淸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정형복(1686~1769)은 1725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강원도ㆍ전라도ㆍ황해도 감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폈고 판서까지 지냈다. 황재(1689~?)는 1718년 과거 급제 후 1721년 설서(說書)가 되었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그 후 이조 참의ㆍ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노론의 청류(淸流)로 명망이 높았다. 두 차례 중국을 갔다 온 뒤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과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을 남겼다.
[주D-026]자신의 …… 사람 : 《논어》 미자(微子)에서 공자가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을 평하여 그들은 “은거하여 기탄없이 말하면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에 따라 벼슬하지 않았다.〔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고 하였다.
[주D-027]전법(銓法) :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을 말한다. 이조의 낭관이 사면(辭免)하려면 반드시 후임자를 추천하여 직책을 대신하도록 하게 한 규정이다.
[주D-028]붓을 잡은 낭관 : 전랑(銓郞)이라고도 한다.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말한다.
[주D-029]한천(翰薦) 한 가지 일 : 앞서 김약로를 예문관 검열에 추천하지 않았던 일을 가리킨다.
[주D-030]이여오(李汝五) : 여오는 이병상(李秉常 : 1676~1748)의 자이다.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검소하게 살았다. 이병태(李秉泰)의 족형(族兄)이다.
[주D-031]이희경(李熙卿) : ‘희경’은 이재(李縡 : 1680~1746)의 자이다. 대제학과 참판을 지냈으며, 탕평책에 반대하였다. 낙론(洛論)계의 저명한 성리학자였다.
[주D-032]나약한 …… 있다 : 원문은 ‘立懦廉頑’인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 및 진심 하(盡心下)에서 맹자는 백이(伯夷)를 예찬하면서 그의 기풍에 관해 들은 자라면 “탐욕스러운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울 수가 있게 된다.〔頑夫廉 懦夫有立志〕”고 하였다.
[주D-033]학사(學士) :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여기서는 예문관의 하급 관원을 말한다.
[주D-034]늦게서야 …… 올랐으니 : 원문은 ‘晩始緋玉’인데, 비옥(緋玉)은 홍포(紅袍)에다 옥관자를 붙인 당상관의 차림새를 말한다.
[주D-035]우사(右史) : 고대 중국의 사관으로 좌사(左史)와 우사(右史)가 있어 각각 기언(記言)과 기사(記事)를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사관(史官)을 가리킨다. 주로 예문관의 봉교 이하가 춘추관의 사관을 겸임하였다.
[주D-036]동조(東朝) : 왕대비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숙종의 계비(繼妃)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를 가리킨다.
[주D-037]승지는 …… 때문에 :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朴明源)이 부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D-038]하루아침에 …… 입은 : 박필균은 영조 16년(1740) 6월 정 3 품 통정대부에 오른 데 이어 8월에 다시 종 2 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주D-039]중지(中旨) : 임금이 조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어필로 써서 내린 명령을 말한다.
[주D-040]나를 …… 말인가 : 원문은 ‘疎絶我若浼也’인데, 백이(伯夷)는 관을 올바로 쓰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한다. 《孟子 公孫丑上》
[주D-041]다섯 …… 있다 : 신원되지 못한 다섯 사람이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경종(景宗) 시해 음모 혐의로 처형된 김용택(金龍澤 : 김창집의 아들), 이천기(李天紀 : 이이명의 아들), 이희지(李喜之), 심상길(沈尙吉), 정인중(鄭麟重)을 가리키며, 토죄되지 못한 세 역적이란 소론 대신인 이광좌(李光佐), 최석항(崔錫恒), 조태억(趙泰億)을 가리킨다.
[주D-042]삼사(三司)에 …… 것 : 원문은 ‘鐵限於三司’인데, 철한(鐵限)은 철문한(鐵門限) 즉 얇은 철판으로 문지방을 감싼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출입의 제한을 엄중하게 하는 비유로 쓰였다.
[주D-043]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 원문은 ‘面郭而坐’인데,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다는 면장이립(面牆而立)과 비슷한 표현이다. 소견이나 견문이 좁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044]송인명(宋寅明) : 1689~1746. 영조 때 조현명(趙顯命 : 1690~1752)과 함께 탕평책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주D-045]김씨들 : 김약로, 김취로, 김상로 등을 가리킨다.
[주D-046]요상(僚相) : 정승이 다른 정승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좌의정 송인명이 앞서 표재의 일로 박필균의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렸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을 가리켜 한 말이다.
[주D-047]혈구장(絜矩章) : 《대학장구》 전(傳) 10장에 “이른바 평천하(平天下)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니 백성들이 효심을 일으키며,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니 백성들이 공경심을 일으키며, 위에서 고아를 돌보니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의 도〔絜矩之道〕가 있다. 위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위를 섬기지 말며, 앞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뒤에 먼저 하지 말며, 뒤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앞이 따르게 하지 말며, 오른쪽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왼쪽에 건네지 말며, 왼쪽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오른쪽에 건네지 말라. 이것을 혈구의 도라 이른다.”고 하였다. 혈구(絜矩)란 곡척(曲尺)으로써 잰다는 뜻으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도덕 규범을 뜻한다. 여기서는 언행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D-048]상공(相公)의 …… 드시오 : 조현명의 호가 귀록(歸鹿)인 점과 ‘녹비(鹿皮)에 가로왈’이라는 속담을 연계시켜 탕평파인 그를 신랄하게 풍자한 말이다. 사슴 가죽에 쓴 날 일(日) 자는 가죽을 잡아당기면 가로 왈(曰) 자도 되므로, 조현명의 처신이 바로 그처럼 주견이 없이 세상에 영합함을 풍자한 것이다. 또한 ‘사슴을 타고 와서〔騎蒭〕’라고 한 것은 조현명의 호가 백록을 타고 다니는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뜻의 ‘귀백록(歸白鹿)’에서 유래한 점을 비꼰 것이다.
[주D-049]홍계희(洪啓禧) : 1703~1771.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737년 과거 급제 후 우의정 조현명의 천거로 교리에 특진되었으며, 좌의정 송인명의 천거로 공조 참의가 되었다. 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탕평파나 척신(戚臣)에 접근하여 출세했으므로 지탄을 받았다.
[주D-050]은(殷) 나라 …… 말입니다 : 안연(顔淵)이 공자(孔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하 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 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 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를 쓰고, 정 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정 나라 음악은 인심을 음탕하게 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말재주 있는 사람’은 홍계희를 빗대어 한 말이다.
[주D-051]개정(開政) : 이조에서 관원들의 인사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 6월과 12월에 시행하였다.
[주D-052]집이 …… 멀다 : 《시경》 정풍(鄭風) 동문지선(東門之墠)에 “동문 옆 평지 지나 언덕에 꼭두서니 자라는 곳. 그 집은 가까워도 그 사람은 몹시 멀어라.〔東門之墠 茹藘在阪 其室則邇 其人甚遠〕”라고 하였다.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홍계희가 인사 문제 청탁차 사처(私處)로까지 찾아온 것을 풍자하기 위해 이 시의 일절을 인용하였다.
[주D-053]편론(偏論)의 도가(都家) : 다른 당파를 비난하는 편파적인 여론 조성을 도맡아 한다는 뜻이다.
[주D-054]입장(入帳) : 기장(記帳), 즉 명부(名簿)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주D-055]조의(朝衣)와 …… 있는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백이(伯夷)는 “악인의 조정에 서서 악인과 함께 말하는 것을 마치 조의와 조관을 갖추고 도탄에 앉아 있는 듯이 여겼다.〔立惡人之朝 與惡人言 如以朝衣朝冠 坐於塗炭〕”고 하였다.
[주D-056]맹만택(孟萬澤)의 경우 : 맹만택은 맹주서(孟冑瑞)의 아들로 현종(顯宗)의 딸 명선공주(明善公主)에게 장가가기로 되어 신안위(新安尉)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주가 미처 시집오기 전에 죽었다 하여 그 작호를 환수당하였다. 《顯宗實錄 12年 12月 27日》
[주D-057]외판(外辦) : 임금이 행차하기 위해 호위들을 소집하여 정돈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D-058]신사철(申思喆) : 1671~1759. 노론계 중신으로 영조 때 평안 감사, 예조 판서,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745년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