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1대 태조실록] 8. '태조실록' 편찬 경위 : 태조 시대의 세계 약사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7. 11. 01:30



 8. '태조실록' 편찬 경위


  '태조실록'은 총 1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392년 7월부터 1398년 12월까지 6년 5개월 12일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원명은 '태조강헌대왕실록'이며, 지금 남아 있는 강화도 정족산본은 필사본이고 태백산본은 인쇄본이다.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조가 1398년 9월에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정종시대)과 태상왕(태종시대)을 지내다가 1408년에 74세로 일기를 마치자, 태종은 이듬해 8월에 태조실록 편찬 작업을 시작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춘추관 기사관 송포 등은 조선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이 처음인데다가 시대가 멀지 않고 그 당시 활동하던 인물들이 대부분 살아 있다는 이유로 실록 편찬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태종은 찬수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사관들에게 태조 원년부터 정종 2년까지의 사초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초 제출 기한은 서울 거주자 10월 15일, 지방 거주자 11월 1일까지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사초가 잘 들어오지 않자 태종은 사초를 제출하지 않은 자에 대해 자손을 금고하고 벌금 20냥을 징수하도록 하는 처벌 규정을 마련해 사초 제출을 독려했다. 그래서 1410년 정월부터 하륜, 유관, 정이오, 변계량 등을 중심으로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1413년 3월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태조실록'은 완성된 후에도 곧바로 출판되지 못했다. 실록을 살펴본 조정 대신들이 중복된 기사가 많다면서 수정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때 중신들이 지적한 것은 제1차, 2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편찬 책임을 맡았던 춘추관 관료들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아 태조실록은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출판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1438년(세종 20년)에 변계량이 지은 헌릉(태종의 능)의 비문 가운데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에 대한 내용이 잘못 기술되었다는 주장이 대두하자, 세종은 이를 고치도록 명하였고, 아울러 '태조실록'과 '공정왕실록(정종실록)'을 함께 고치게 되었다.

 

  그러나 실록 개수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4년 뒤인 1442년이었다. 이 작업이 완료되자 '태조실록'은 '공정왕실록', '태종실록'과 함께 고려시대의 실록을 보관해둔 충주사고에 봉안되었다. 하지만 충주사고 하나만으로 영구 보존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자 1445년까지 삼조 실록 3부를 더 필사하여 전주사고와 성주사고에 각각 1부씩 봉안했다. 현재 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본의 삼조 실록은 전주사고에 봉안한 것이다.

 

  '태조실록'은 태조가 즉위한 1392년 7월 17일부터 1398년 12월말까지 약 6년 6개월간에 있었던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연월일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다.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인 1398년 9월 5일에 정종에게 양위하였기에 그의 재위 기간은 실제로 이때까지지만 '태조실록'에는 그 해 말까지를 수록 범위로 잡고 있다.



  태조 시대의 세계 약사


  태조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의 중국에서는 원이 밀려나고 명이 일어나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일본에서는 남북이 황통을 합일하고 황위는 북조 계통으로만 세습토록 했다.

 

  한편 유럽은 프랑스에서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의 싸움이 벌어졌고, 독일에서는 한자동맹이 체결되었으며, 영국의 리차드 2세와 프랑스의 왕녀 이사벨라가 결혼함으로써 두 나라는 화해 국면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