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예종 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의 역모 사건'
재위 기간이 14개월밖에 안 된 예종 대에도 대대적인 숙정 작업이 있었다. 이 숙정
작업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승정원 원상 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남이, 강순의 역모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 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고,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촌수로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났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이
광경을 보면서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변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로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자였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이 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 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유자광은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별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며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남이 측근들에 대한 문초는 강해질 수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남이와 함께 겸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를 시인했다. 문효량은 여진 출신
장수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었다.
문효량은 '언젠가 남이의 침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남이는 하늘의 변화를 기화로
간신들이 모란할 징조가 엿보이므로 자신과 함께 이들을 몰아내 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제의를 했으며, 그리고 이 거사에 영의정 강순도 뜻을 함께 하고 있으니 왕이 산릉에 갈 때
도중에 두목격인 한명회 등을 제거한 다음 영순군과 구성군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문효량의 이 진술은 남이로 하여금 역모를 시인하게 만들었다. 버텨봐야 문초만 더
당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는 역모 관련 내용을 모두 인정했고, 영의정 강순
역시 시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조경치의 장인인 김개가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측근 30여 명도 함께 죽였다. 그리고 이 밖의 가솔들과 친분 관계가 있는 자들은
공신녹권이 몰수당하고 종으로 전락시키거나 변방에서 종군하게 하였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이 때의 역모 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까지 오른 그가
예종이 즉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더구나
남이가 무인이었고 역모 사건 발각 당시에 가까이 지내던 영의정 강순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무인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한명회, 노사신 등의 훈구 대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서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조선 중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이의 역모'는 단지 그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극이라고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현재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설화들은 그의 출생, 결혼, 입공,
죽음 등의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4단계는 모두 원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남았다는 등 대개는 그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 때문에 민간과 무속에서는 남이 장군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돼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이는 용맹을 떨쳤던 남이의 위용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남이 [南怡, 1441~1468]
조선 전기의 무신. 도적떼를 토벌하였고, 이시애의 난 때 우대장으로 이를 진압하였다. 서북변의 건주위를 정벌했다. 공신의 대우를 받았고 병조판서에까지 올랐으나, 역모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어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본 관 : 의령
시 호 : 충무
활동분야 : 군사
본관 의령(宜寧). 시호 충무(忠武). 태종의 외손자(外孫子)로서 어머니가 태종의 네째 딸 정선(貞善) 공주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였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13)에는 경기도 포천, 영평 일대의 도적떼를 토벌하였다. 또한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평정하였고 그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 야인을 토벌하고, 강순·어유소 등과 함께 이만주(李滿住)를 처치하였다. 무관으로서의 여러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이등군공(軍功)을 받아 공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에는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예종이 즉위한 해인 1468년에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의 세력에 의하여 이시애 난 때 등장한 신진 세력을 제거하면서 남이도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강등당하였다. 그 후 유자광(柳子光)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예종에게 고하여 정승 강순(康純)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과 그 외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였다(남이의 獄).
남이가 여진토벌(女眞討伐)을 할 때 읊은 시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가 전해지고 있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세조가 떠나고 남이를 벽안시하던 예종의 등장으로 급락하게 된 남이는 경쟁세력의 투기 속에서 역모라는 죄목으로 몰락하였다. 그들의 가시적 움직임이 있기 전에 제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후대에 전설적 이야기나 해석이 나오기도 하였다.
1818년(순조 18) 그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신원되었다
[출처] 남이 [南怡 ] | 네이버 백과사전
4.<예종실록> 편찬 경위
<예종실록>은 총 8권 5책으로 되어 있으며, 원명은 '예종양도대왕실록'이다. 여기에는
1468년 9월에서 1469년 11월까지 예종 재위 1년 2개월 동안에 일어난 각 방면의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다른 실록과 함께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는 <예종실록>은 예종이 죽은
다음해인 1470년 2월에 내려진 왕명에 따라 사초를 꺼냈으나, 당시 <세조실록>이 아직
편찬되지 못한 관계로 편찬 작업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1471년 12월 <세조실록>이
완성되자 곧바로 편찬에 착수하여 반년 뒤인 1472년 5월에 완성되었다. <예종실록>편찬
작업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춘추관 영관사로 하여 최항의 감수 아래 강희맹, 양성지 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당시 작성된 것 중 현재 남아 있는 <예종실록>은 전주사고에 봉안하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필사하여 5부가 있었으나, 1624년 이괄의 난(인조2년) 때 춘추관본은 타서
없어지고 나머지 4부만 전해지고 있다.
#예종 시대의 세계 약사
예종이 즉위하던 1468년 독일에서는 서양 최초로 인쇄본을 간행한 구텐베르크가
죽었으며, 예종이 죽던 1469년에는 영국 작가 말로리가 <아더왕의 죽음>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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