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인조실록]
1. 무력 정변으로 광해군을 폐출시킨 능양군
선조의 선위 교지를 받지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등극하자 곧 자신의 불안정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왕권 강화책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소북파와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618년
인목대비마저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그 동안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고 역모를
도모하고 있던 세력들은 이 사건을 명분으로 무력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이것이
1623년 3월 12일 밤에 일어난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인물은 능양군이었다. 능양군은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이자 1615년
'신경희의 옥사' 가 일어났을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죽은 능창군의 친형이다. 여기서
그가 반정을 도모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광해군에 의한 동생 능창군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광해군과 인빈 김씨의 관계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선조는 인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다. 그래서 한때 정철이 건저 문제를 제기했을 때
선조는 광해군을 반대고 인빈 소생인 신성군을 지목했다. 하지만 선조의 바람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들은 신성군이 아직 어려서 국사를 논할 입장이 못 된다면서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광해군이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선조와 대신들의 이같은 견해 차이로 한동안
세자 책봉이 미루어지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자 선조는 할 수 없이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을 세자로 앉혔다.
인빈 김씨를 비롯한 그녀의 소생들은 이것이 불만이었다. 때문에 광해군이 등극한 이후에도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게 되었는데, 광해군으로서는 당연히 이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성군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그 이외에도 인빈 소생의 아들은 셋이나 더 있었다. 특히 신성군의
동복 아우인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왜냐하면 능창군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된 상태인데다가 사람들로부터 군왕의 자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세인들의 평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제거해 왕권 안정을 도모했던 광해군과 대북파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신경희 사건이 일어나자 능창군을 그들과 연루시켜 유배시키고 끝내는
죽여버렸다. 이 때부터 능창군의 맏형 능양군은 광해군과 대북 세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인물들과 접촉하면서 무력 정변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명분으로 역모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능양군과 함께 무력 정변을 도모한 인물들은 대개 서인 세력이었다. 서인은 정치, 외교적
차원에서 철저하게 대북파와 대치했다. 그들은 특히 외교론에서 극단적인 견해 차이를 드러냈다.
대북파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노선을 걷고 있던 반면에 서인은 철저한 대명
사대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또 서인 세력은 정치적으로 선조의 유명을 받들어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었다. 이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대북파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결국 대북파와 서인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광해군 역시 서인의 척결 없이는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폐출했던 계축옥사 때 서인의 중심 인물들을 정계에서 내몰았고,
이후 인목대비 유폐사건 때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서인 세력도 사형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정계에서 밀려난 서인 세력은 역모를 계획해 이미 능창군의 죽음으로
역모를 꿈꾸고 있던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능양군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귀,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이괄 등이었다. 이들 모두는 이이, 성혼의 문하였다.
이 역모에 군사를 동원하기로 한 사람은 이귀와 김류, 이괄 세 사람이었다. 이귀는 당시
평산부사로 재직중이었고, 이괄은 함경도 병마사에 제수되어 임지로 떠나야 할 입장이었다.
그리고 김류는 강계부사를 역임한 바 있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이들 세 사람 중 이귀와 김류는 오래 전부터 역모를 함께 도모해 온 인물이었고, 이괄은
김류와 교분이 깊던 효성령별장 신경진에 의해 거사에 합류한 상태였다.
반정을 일으키기 1년 전인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로 있었다. 이 때 평산 지방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자 이귀는 범 사냥을 하는 군사들이 도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무장한 채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상소를 하였다. 이는 무장한 채로 바로
도성으로 밀고 올라갈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모의는 사전에
누설되어 연기되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정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버렸다.
상황이 이처럼 급변하자 능양군을 비롯한 역모 세력들은 이듬해인 1623년 3월 13일 새벽에
거사를 도모하기로 확정하고 12일 밤부터 홍제원에 모여 대오를 가다듬고 군사 행동지침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이미 조정에서 그들의 거사 계획을
눈치채고 훈련도감 이확으로 하여금 역모 가담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귀는거사 시간을 앞당겨 출병을 서둘렀다.
출병 당시 반란군의 숫자는 겨우 7백 명 정도였다. 반란군 대장을 맡기로 했던 김류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반란군은 예상 인원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로 눌러앉아
있어봤자 결과는 진압군에게 당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귀는 일단 이괄에게 대장직을 권유했다.
이괄은 대장직을 맡자 반란군으로 하여금 머리에 '의'자가 쓰여진 띠를 두르도록 하고
군사를 지휘했다.
한편 김류는 거사 계획이 탄로났다는 소릴 듣고 주저하고 있다고 뒤늦게야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에 합류했다. 이 때 이괄은 김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귀의 중재에 의해
합병하고 김류가 총지휘를 맡은 다음 궁궐을 향해 진격했다.
반란군이 창의문을 향해 진격했을 때 진압군은 문을 굳게 닫고 궁을 수비했지만 반란군을 곧
창의문을 뚫고 창덕궁에 도달하였다. 창의문 안에는 이미 능양군이 자신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훈련도감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
주위에 매복하고 있었으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반란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훈련대장 이홍립은 대궐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반란군에 내응하기로 약속한
터였기에 간접적으로 반란군 진입을 돕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군은 순식간에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에 이르렀다. 금호문 역시 수문장 박효립이 내응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쉽게 통과한
반란군은 돈화문에 이르러 불을 질러 승리를 알렸다. 광해군은 그제서야 반란군이 대궐을
점거했음을 알고 몇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재빨리 궁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해서 반란군은
쉽게 궁궐을 접수해 버렸다.
반란에 성공한 능양군은 대궐을 장악하자 곧 광해군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빠져나오고 난
다음이었다. 능양군은 먼저 서궁으로 달려가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찾았다. 능양군을 맞이한
인목대비는 반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패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색을 하며 기뻐하면서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이유로 다음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첫째는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 둘째는 과도한
토목 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여 정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 등이었다.
이같은 폐위 이유는 곧 반정 세력들의 거사 명분이었다. 이 거사 명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반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정사 운영을 악정으로 매도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이유로 내세운 것 중에 선왕을 독살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인목대비가 줄곧
주장해 오던 것이다. 인목대비의 이 말은 곧 그녀 자신이 서궁에 유폐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세운 과도한 토목 공사는 궁궐 재건 사업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정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광해군이 궁궐을 개축, 신축한 것은 왕권을
바로 세우고 정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광해군이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그들 서인 세력이 자신들의 외교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겨우 벗어나 안정기로 막 접어들 순간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서인 세력은 자신들을 정계에서 축출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이 겨우
다져놓은 안정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이 사건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거사 이틀 후 광해군이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붙잡힘으로써 능양군의 계획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이로써 능양군이 조선 제16대 왕에 오르니 그가 곧 인조다.
2. 굴욕의 왕 인조의 등극과 조선의 끝없는 수난
(1595-1649, 재위 기간 1623년 3월-1649년 5월,26년 2개월)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그동안 득세했던 대북파 인사들에게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며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괄의 난, 청의 침입 등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군신 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다. 이후 조선의 경제는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고 민간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빈 소생인 정원군의 맏아들이다. 광해군의 서조카이고
인목대비의 서손자인 셈이다. 그는 1595년에 태어났으며, 1607년 능양도정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이후 1615년 막내동생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죽자 역모를 도모 1623년
3월 서인 세력과 함께 무력 정난을 일으켜 조선 제1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 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우선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했으며 광해군 시절
정권을 독점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대북 세력 200여 명을 모두
숙청하였다. 그리고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에 유배중이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앉히고 반정에 가담했던 서인의 김류, 이귀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분리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그는 또한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을 신원하고,
나머지 희생자들도 대부분 관직을 복구시켰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이
되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여 그동안 광해군이 유지해 오던 중립 외교의
틀을 깨뜨렸다.
인조는 이렇듯 광해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조정과 사회를 안정시켜 자신의 정치 사상을
펼치려 했지만 이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반정 정권이 들어선 지 채 일 년도 못되어 다시 한 번 반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
사건은 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일으킨 것으로 1624년 1월에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인조에게
이괄이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간언을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내부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떠난 사건은 처음이어서 민간과 조정은 한 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민간에 대한 사찰이 강화되어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게다가
이괄이 북방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내려옴으로써 변방의 수비에 허점이 생겨 후금의 침략을
용이하게 했다.
호시탐탐 내침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이 3년 뒤인 1627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키자 후금군의 기세에 위험을 느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 때 후금은 조선측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들의 침략 이유 일곱 가지를 밝히며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 내놓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 것 등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립시키자 후금은 철군하였다.
이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 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이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 때 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사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인조는 삼전도에서 당한
굴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반청의 색깔을 더욱 짙게 드러내는 한편 망해가고 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노선을 한층 강화시켰다.
인조의 그같은 모화 정책은 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의 의견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소현세자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에 말려들어
급기야 볼모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소현을 독살하는 극악한 일면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 대의 서인과 남인 사이에 치열한
정쟁으로 비화된 예송 논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효종실록과 소현세자에서 다루기로 한다).
조정은 이 때부터 귀인 조소용 소생의 옹주를 손자며느리로 맞아들인 김자점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횡포를 일삼아 조정에 대한 민간의 불신은 강해지고 정국은 더욱 혼란으로 치달았다.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계속된 조정과 사회의 혼란을 일소하고자 한때 병권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624년에는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했고, 이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했다. 이로써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1628년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왔는데, 그의 이름을 박연으로 고치고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 넣어 대포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해 조선군의 화력을 증강시키기도
했다.
한편 민생 안정책으로 광해군 당시 경기도에 한정해서 실시하던 대동법을 1623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해 징세의 일원화를 꾀하고 민간의 부담을 줄였으며, 1634년에는 삼남 일대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경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세금 수입을 확대시켰다. 또한 농토세 징수
규범인 전세법을 폐지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화폐 사용을 위해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했으며,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었다(경원개시,
중강개시).
이같은 인조의 노력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또한
대부분의 정책들은 이미 광해군 대에 실시한 것들이어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오히려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현세자가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책들이
간행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학자들은 현종, 숙종 대에 걸쳐 예송 논쟁을 일으켜
조정을 일대 파란으로 몰고가게 된다.
인조는 이처럼 굴욕과 고통으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649년 재위 24년 만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를 비롯 3명의 아내에게서 6남 1녀를 낳았고, 능은
장릉으로 왕비 인렬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는데, 처음에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다가 영조 때 탄현면 갈현리로 옮겨졌다.
3. 인조의 가족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를 비롯한 세 명의 아내에게서 7명의 자녀를 얻었다. 인렬왕후 한씨가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4남을 낳았으며, 계비 장렬왕후 조씨는 후사가
없었고, 귀인 조씨가 숭선군, 악선군, 효명 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다. 이들 중 두 왕후와 소현,
인평대군 등의 삶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봉림대군은 효종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인렬왕후 한씨(1594-1635)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로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 능양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에 봉해지고 1623년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슬하에 소현, 봉림, 인평, 용성 등 네 아들을 낳고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장릉으로 인조와 함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영조 때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로 옮겨졌다.
장렬왕후 조씨(1624-1688)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1635년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고 1659년 효종이 죽자 다시 대왕대비가 되었다. 이 때 그녀가
입어야 할 상복이 정치 문제화되어 서인이 만 1년만 착복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하여 그
절차대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착용해야
한다는 3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을 공격했다. 이에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아들이므로 복상은 1년만 착용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다시 주장했고, 남인 윤후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맏아들과 다름없다고 반박하며 3년설을 주장했다.
결국 이 복상 문제는 양당간의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고,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설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입지가 약해지고 서인의 입김이 강해졌다. 하지만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다시 이 복상 문제가 대두되어 남인은 기년설을, 서인은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하였는데, 이 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1688년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능은 휘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소현세자(1612-1645)
인조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왕,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이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같은 외교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소용과
세지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인다.
입국 후 2달 뒤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지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34세의 혈기 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 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인평대군(1622-1658)
인조의 셋째아들로 이름은 요, 자는 용함, 호는 송계이다.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7년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심양을 다녀왔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했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산수도>,
<노승하관도>, <고백도> 등이 있다. 이러한 미술품 이외에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의 저서가 남아 있다. 사후에는 효정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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