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숙종실록]
1. 숙종의 환국 정치와 왕권의 안정
(1661-1720, 재위 기간 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숙종 시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다. 그러나 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따라서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되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조선 사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숱한
옥사를 유발하여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숙종은 현종의 외동아들로 명성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순, 자는 명보였다. 이후 1667년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
숙종의 치세 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 되어온 붕당 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붕당 내부의
파행적 운영이 심화되어 자체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러한 붕당의 자체 파탄을
심화시킨 사건이 현종 이후 숙종 대까지 계속 이어진 예송 논쟁이었다. 숙종은 즉위하자
곧바로 현종 시대 정쟁의 핵심 사안이었던 이 예론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1674년 정월,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1차 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그리고 인선왕후를 차자비로 다루어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9개월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공설을 주장했다. 반면 남인측은 여전히 효종이 왕위 계승자임을 내세우며
1년 장자부 기년설을 내세우며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인 바 있었는데, 현종이 그 해 8월에 죽자 그 때까지도 인선왕후의 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서인에 의해 다시 복상 문제가 거론되었던 것이다(현종실록 '예송 논쟁'
부분 참조).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 세력이 다시 복상 문제를 들고 나오자 그 해 9월에 남인의 지지
세력인 영남학파의 진주 유생들은 송시열의 예론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기호학파를
지지하던 성균관 유생들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며 진주 유생들을 공격했고, 이
때문에 전국 유생들은 모두 예론 시비에 휩싸이고 말았다.
숙종은 예론 정쟁이 발발하자 즉각적으로 부왕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을 유배시켜버렸다. 그것을 기화로 서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조정은 남인에 의해 장악된다. 그러나 기호세력의 유생들이 집결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 구명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선비 사회는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재야 선비 사회의 이같은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자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
세력을 견제해 나갔다.
김석주는 원래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제2차
예송 때 남인 쪽을 응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을 제거하자 많은 서인들이 함께
제거되었고 그 때문에 서인 세력은 극도로 약화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서인 세력의 발언권이
정계에서 완전히 상실될 지경에 이르자 김석주는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을 잡고 남인을
몰아내려 했다.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짠 계략은 이른바 '삼복의 변'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의
영수 허적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남인 세력의 축출 사건을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이라고 한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를 서둘러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데, 서인측이 정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 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인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되기에 이른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권은 민암, 이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은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그 기간은 5년밖에 가지
못한다.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이것을 기화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폐비 복위 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또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등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은 남구만 등의 소론 세력이 장악했으나 이들은 7년 뒤에 발생한 '무고의
옥'으로 노론계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갑술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가 있어 대신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소론의 남구만이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고 간언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 사실을 안 숙종은 진노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 또한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비롯한 궁녀 및 무속인들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의 소론 세력까지 귀양보내거나 파직시켜 정치 일선에서 제거해 버렸다. 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을 무속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후 조정은 노론과 소론의 불안한 연정이 계속 이어지다가 1711년 윤선거와 유계가 공동
집필한 '가례원류'에 대한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의 저자 논쟁으로
소론측이 위축되자 1716년부터 노론측이 노골적으로 소론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사건은 원래 윤씨와 유씨의 집안 싸움이었는데 각자 몸담고 있던 정파가 달랐기 때문에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가례원류'는 원래 '가례'를 본문으로 삼아 의례, 주례, 예기 등
삼례에 관계되는 사항을 뽑아 '원'이라 하고, 주희 이후 여러 학자들의 사례에 관한
예절을 나누어 모아 '류'라 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서인 유계와 윤선거가 함께 집필하고 윤증이 증보한 것이었는데, 유상기가
저자를 유계 단독으로 표시하여 숙종에게 품신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윤증은 유상기를
비방하게 되었고, 유상기 또한 반론을 제기하며 윤증을 비난했다. 당시는 서인 사이에서 노론,
소론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기에 이들의 집안 싸움이 확대되어 소론과 노론의 정쟁으로
번졌고, 결국 윤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으로써 소론측이 위축되었다.
숙종 대에는 이미 열거한 당쟁 이외에도 정권을 주도하기 위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복제와
관련하여 송시열의 오례 문제를 둘러싼 '고묘논란', 김만기, 김석주, 민정중 등 외척 세력의 권력
장악과 정탐 정치에 대한 유생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임술삼고변' 공방, 존명 의리와
북벌론의 허실을 둘러싼 명분 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비롯된 왕과 신하들간의 충돌, 그리고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일컫는 '회니시비' 등 수많은 정쟁들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소론과 노론 사이에 왕세자(경종)과 왕자(영조)를 둘러싼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경종, 영조실록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러한 수많은 정쟁은 당대의 숱한 명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붕당 정치의 폐단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정쟁의 격화는 붕당 정치의 갖은 폐단들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 보면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벌인 환국 정치의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은 현종 대의 예송 논쟁으로 손상을 입은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환국 정치를 감행했다. 즉, 왕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을 행사하여 정치 국면의 전환을 꾀함과 동시에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던 것이다.
이렇듯 숙종 대는 대신들 사이의 정쟁이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던 사회 체제 전반의 정비 및 복구 작업이 거의 종료되었다고 할 만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이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써 광해군 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같은 경제 정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 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쳤다. 이 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정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저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 폐위사건으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하여
그것을 정치 쟁점화시켜 당쟁을 격화시키는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통치
전반을 평가해 볼 때 왕권 강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반복하던 환국 정치의 일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결과만을 놓고 볼 때 그의 외척과 아내까지도 철저하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같은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키며 조선을 안정시켰던 숙종은 1720년 약 4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6명의 아내에게서 9명의 자녀를 얻었다. 능호는 명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에 있다.
2. 숙종의 가족들
숙종은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6명의 아내에게서 9명의 자녀를 얻었다. 이들 중에서
인경왕후 김씨가 3녀, 인현왕후 민씨와 인원왕후 김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희빈 장씨가
경종을 비롯 1남 1녀, 숙빈 최씨가 영조를 비롯 1남 2녀, 명빈 박씨가 1남을 낳았다. 이들 중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의 중전들과 많은 물의를 일으켰던 희빈 장씨의 삶을
요약하고 경종, 영조는 각 실록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인경왕후 김씨(1661-1680)
김장생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이다. 1670년 열 살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별궁에 들어갔으며, 다음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고, 1676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 증세가
보였는데, 이 때 숙종은 천연두를 겪지 않은 터라 약방도제조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에 따라
편전을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20세를 일기로 경덕궁에서 세상을
떴다. 이후 경덕궁 영소전에 위패가 모셔졌고, 능은 익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다. 1681년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당시 소의였던 희빈 장씨가 왕자 균을 출산하자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움을 당해야 했다.
숙종은 1689년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노론의 송시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의 진노를 사서 사사되었다.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인현왕후
역시 왕의 미움을 받아 서인으로 강등되어 폐출된다. 이후 그녀는 안국동 본가에서 지내게
되었고, 희빈 장씨가 중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폐비 복위운동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는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복위되었다.
복위 후 그녀는 다시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와 화합을 도모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1701년
소생없이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궁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능호는 명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다. 후에 숙종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인원왕후 김씨(1687-1757)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가
다음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회생했고 2년 뒤에 혜순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720년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올랐고 1724년 경종이 죽은 뒤 다시
대왕대비에 올랐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명릉으로 인현왕후, 숙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에 묻혔다.
희빈 장씨(1659-1701)
이름은 옥정이며, 역관 장형의 종질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때 그녀가 장렬왕후의 동생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와 조사석이 내연의 관계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는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으며,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이 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숙종이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 때 서인의 노, 소론 대신들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 상소를 올려 후일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1689년 정월에 균을 세자에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시킨다.
기사환국 이후 같은 해 5월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이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 사건 후 숙종은 민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1694년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이를 눈치채고 폐비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이 이 문제를 기화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 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서인들을 옥사로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 후 사사시켰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환
등을 등용했다. 그리고 중전으로 올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왕비에 앉혔는데,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갑술옥사 이후 숙종은 사사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작시켰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몰려날 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속에 폐비 민씨와 관련된 문구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소론의 남구만, 윤지완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 뒤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되었다. 숙종은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로써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 버리기까지 했다. 희빈 장씨가 죽자
그녀를 지지하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 세력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희빈 장씨의 소생으로는 경종과 옹주 하나가 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에 용두동
서오릉에 있다.
3. 노론과 소론의 성립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신 세력과 이를
관망하던 세력으로 분리되었다. 공신 세력을 공서 또는 훈서라 했고, 관망파를 청서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훈서파의 영수는 정사공신 김류였으며, 청사파의 거두는 김상헌이었다.
훈서와 청서로 갈린 두 파는 다시 훈서는 노서, 청서는 소서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서인 세력은 인조말에 이르러 훈서파는 원두표를 당수로 하는 원당과 김자점을 당수로 하는
낙당으로 분파되고, 청서파도 사림의 청의를 주장하는 사류(사림)들이 중심이 된 산당과 권력
지향적인 한당으로 분리되어 서인은 사분되었다.
그러나 효종, 현종 대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서인이 다시 규합되어 서인 일당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다시 둘로 갈라서고 말았는데, 이것이 노론과 소론이다.
분당의 계기는 1680년에 발생한 경신환국 때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남인의 영수
허적의 유악(기름 천막) 남용 사건과 서인 김석주, 김익훈 등에 의하여 고변된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 사건(삼복의 변)으로 남인이 대거 숙청된 이른바 경신환국(경신대출척) 이후
서인은 남인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놓고 일대 지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다.
1683년 서인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추진했는데, 한태동을
중심으로한 소장파는 오히려 김익훈을 탄핵했다. 그래서 송시열 등의 노장파는 이 탄핵
상소를 반박하며 소장파와 대립하였고, 특히 송시열은 제자 윤증과 사적인 감정까지 좋지
않아 분파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서인은 노장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소장파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분파되었다. 이리하여 조정은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붕당이 성립되었다.
노, 소론에 속하는 사람들은 원래 예악의 태두 김장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고, 한편으로는
청의를 생명으로 하는 산림 사림들의 정치 집단이었던 산당에 속하였던 서인들이다. 노론의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김익훈 등이었고, 소론의 대표적
인물은 김춘택, 남구만, 박세채, 박태보, 오도일, 윤증, 한태동 등이었다.
서인은 분파 이후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며 정국을 운영해가다가 1689년 노, 소론이 함께
희빈 장씨 소생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대거 숙청되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써 실각하게 된다(기사환국). 이 때 노론의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배당해 죽고 소론
인사들도 대거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5년 후 갑술 옥사로 남인의 대거 쫓겨나자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희빈 장씨와 관련하여 1701년 무고의 옥이 일어나면서 소론이 밀려나고 노론이 대거
등용되면서 노, 소론이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며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그래서 경종, 영조 때에는 노, 소론의 당세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국이 되었다. 경종 대에는
주로 소론이 우세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인 4대신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이었다. 그리고 노론이 우세했던 영조 대의 4대신은 민진원, 이관명, 정호, 홍치중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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