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대 순조실록]
5. 조선왕조와 세도 정권을 부정한 홍경래의 난
조선 사회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급격하게 변화되어갔다. 광범위하게 진행된 토지 겸병과
농사법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었고,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일당 전제로 삼정이
문란해져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일부 농민들은 농업 기술과 상업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부농이나 지주가 되는 등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다.
신분 질서가 급격하게 와해되어가던 당시에 이렇게 성장한 부농들은 지방의 유지로 활동하면서
사회 변동의 변수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상업에서도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이 등장하여 대상인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홍경래의 난에서도 지도층 가운데는
이렇게 성장한 부농층과 대상인이 다수 끼어 있었다.
세도 정권에 의한 과거 제도와 국가 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 등에 대항하여,
몰락한 양반과 지식인 등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사상인들의 물력과
조직력 등을 결합하여 10여 년 간의 준비 끝에 일어난 것이 홍경래의 난이다.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본디 양반 출신으로 과거에서 수차례 떨어지면서 그것이
서북인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 대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과거를 포기한다. 당대의 제도적
모순에 눈을 뜬 그는 평안도 가산에서 서자 출신 지식인 우군칙과 만나게 된다. 현실에 대한 두
사람의 불만은 곧 변혁 의지로 바뀌어 봉기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우선
평안도 내의 부농층에게 접근하여 그들과 제휴하였고 자금 마련을 위해 상인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사상인들은 평소에 중앙 정부에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들은 또 가산 다복동의
부호 이희저를 포섭하여 봉기를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풍수적으로도 천혜의 요새인 그곳을
근거지로 삼는다. 또 봉기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어 유민층을 흡수하여
군대로 삼는다. 이 밖에도 당시 세도 정권에 대하여 불만이 깊었던 재상 출신의 김재찬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평안도 일대의 지역 실력자 및 지방 관속들, 그리고 유랑 지식인과 유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하여 봉기 세력으로 조직했다.
1811년 12월 20일을 거병일로 잡고 홍경래는 자신을 평서대원수라 칭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새어나가자 거사일을 12월 18일로 앞당겨 출병한다.
그들이 출병에 앞서 내건 격문은 크게 세 가지로
첫째가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
둘째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타도,
셋째가 신인 정씨가 출현했으니 그를 참임금으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남진군, 북진군으로 나뉜 봉기군은 거병한 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청천강 이북의 10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는 특히 각 지역의 내응
세력들이 적극 호응해 준 결과였다. 내응 세력은 좌수, 별감, 풍헌 등 관리와 별장, 천총, 별무사
등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돈을 내고 신분 상승을 이룬 계층들이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의 추격이 시작된다.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박천, 송림,
곽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된다. 봉기군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세력이
약화된 것은 봉기군 자체의 취약성 때문이었다. 붕기군은 대다수가 급여를 받는 임금 노동자 및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 관계와, 봉기 지도층인 부호, 상인,
지식인층이 가지고 있는 이해 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소농, 빈민층이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고 다시 정착 농민으로서 안정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바랐다면, 지도부는 단순한 제도 개혁 차원이 아닌 정권 전복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세도 정권의 횡포에 대해 일어선다는 공동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표가 각기 달랐기에
하층민의 자발적인 유도를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정주성에 들어간 봉기군은 이제까지의 소극적 참여자나 돈받고 고용된 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와는 다른 적극적이고 사나운 군대로 변모하게 된다.
소극적이던 봉기군이 이렇게 강인한 군대로 변화된 것은 관군의 잔혹한 초토화 전술로 정주성
일대의 양민이나 농민들이 인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된 것에서 기인한다. 관군의 횡포와 무자비한
살육을 피해 정주성으로 들어온 농민들이 적극적인 반군 세력이 되어 싸웠고 봉기군 지휘부도
부자들의 재산에 대한 징발을 단행하여 농민 각자에게 평등한 분배를 제공했기 때문에 지휘부에
대한 농민들의 신뢰가 형성된 것이다. 비자발적 참여자로 이루어진 봉기군의 사기가 낮아지고
하나둘 정주성을 빠져나갈 때에 이렇게 주변 농민들이 합세하자 정주성의 봉기군은 순식간에
자발적 농민 봉기군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서부터 홍경래의 난은 불만 세력의 정권 전복 기도가 아니라 자발적 농민 항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렇게 결속된 농민 봉기군은 보급로가 끊기면서도 군비나 숫자면에서 몇 배나
우세한 관군을 맞아 4개월간이나 밀고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로
1812년 4월 19일 성이 폭파되고 1917명의 농민군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잡혀 처형당했다.
이리하여 그 해 1월초부터 시작된 정주성 전투는 3개월 15일로 마감되고 말았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표방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난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면, 홍경래의 난에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했던 소농, 빈민층들이 철종조에 일어나는 임술민란에서는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난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950년 이전에는 당쟁사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라든가 홍경래 일파의 정권 탈취 기도로
평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 사상인, 몰락 양반 및 지식인 등의 지도층이 임금 노동자와 빈농을 동원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6. '순조실록' 편찬 경위
'순조실록'은 전 32권 부록 2권 총36책으로 되어 있으며, 1800년 7월 4일에서 1834년 11월
13일까지 재위 34년 4개월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부록에는 왕의 행록,
시책문, 애책문, 비문, 지문, 행장, 천릉지문 등을 수록했다.
편찬 작업은 1835년 헌종 1년 5월에 시작하여 1838년 윤4월에 완성되었다. '순조실록'은 첫
부분에 '순종대왕실록'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순조의 원묘호가 순종이기 때문이다. 1857년 철종
8년에 그 묘호를 순조로 추존한 까닭에 '순조실록'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본래는 부록이
1책이었으나 1865년 '철종실록' 편찬 때 추가 편찬하여 2권이 되었다.
이상황, 심상규, 홍석주, 박종훈, 이지연 등을 총재관으로 하여 만 3년에 걸쳐 완성되고 각
사고에 봉안되었다.
순조 시대의 세계 약사
순조 시대엔 동아시아의 청과 일본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해 있었던
반면에, 유럽은 한동안 나폴레옹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17, 18세기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나라들은 각자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느라 분주했으며, 남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이때 독립한다.
문화 예술면에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를 거친다. 음악에서는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
활약했고, 문학에서는 괴테와 실러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한편 산업혁명의 여파로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증기기선과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고, 운송의
혁신을 가져오는 교통수단인 철도가 놓여 본격적인 자본주의 상공업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