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박지원과 유한준의‘백년만의 화해’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21. 7. 19. 19:14

중국 후한시대 반고(班固)와 부의(傅毅)는 문장으로 자웅을 겨루었다. ‘한서’를 지은 반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의 역시 뛰어난 글솜씨로 당대를 주름잡았다. 그러나 라이벌 관계인 둘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은근히 상대방을 헐뜯었다.

요즘도 회자되는 ‘문인상경’(文人相輕)’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문인들은 서로 상대를 경멸하는 버릇이 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과 고문(古文)의 대가 창애 유한준(1732~1811) 사이도 ‘문인상경’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문학공부를 같이하며 세상일을 함께 토론한 문우(文友)이자 학문의 도반(道伴)이었다. 그러나 문학적 명성이 높아지자 두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게 되고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암은 창애의 문장을 두고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고 혹평했다. 반면 창애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이라며 몰아붙였다. 게다가 이 무렵 공교롭게도 묘지분쟁 문제가 일어나 두 집안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갈등은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아버지 전기인 ‘과정록’(過庭錄)에서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대의 원수’라고 규정했다. 창애의 아들 유만주는 자신의 일기집인 ‘흠영’(欽英)에서 연암을 ‘매우 잡스러운 사람’으로 적었다.

두 집안이 화해를 이루게 된 것은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였다. 1871년 홍문관 대제학 박규수는 향시(鄕試)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를 보고, 그 시의 주인공을 불러들였다. 시를 쓴 사람은 16세의 소년 유길준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가 할아버지 박지원의 ‘원수’였던 유한준의 5대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집안의 불화를 잊고 유길준의 뛰어난 재주를 거듭 칭찬하였다. 또 힘써 공부할 것을 신신당부하면서 자주 찾아올 것을 권하였다. 오랫동안 쌓인 구원(舊怨)이 봄눈 녹듯 풀리는 순간이었다. 뒷날 유길준은 박규수의 집을 방문, ‘해국도지’ 한질을 받고 개화사상에 눈뜨기 시작한다.

문장의 명가(名家)인 두 집안이 극적으로 화해했다는 소식은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문제의 장원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말 문장가 김윤식은 박규수가 감탄했다는 시를 뽑아 유길준의 시집 ‘구당시초’에 실었다. 유길준이 15세에 썼다는 그 시는 이미 두 집안 화해의 기운을 잉태하고 있었다.

‘잠시 전에 달이 구름에 덮였더니/구름 걷히자 다시 달빛 환해졌네/삼라만상의 변화란 한순간도 쉬는 일이 없으니/이는 한 빛을 밝히기 위함이런가’(俄看雲蔽月 雲去月還生 萬變都務定 終能一色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