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조지 로스가 찍은 숭례문 앞, 거리 시장. 사진출처 : 호주 사진작가의 눈을 통해 본 한국]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역시 박지원이 스무 살 때인 1756년에 지은 글이다.
<자서(自序)>
선비가 먹고사는 데에 연연하면
온갖 행실 이지러지네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해도
그 탐욕 고치지 못하거늘
엄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하는 일은 더러울망정 입은 깨끗하다네
이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1을 짓는다.
선귤자(蟬橘子)2에게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3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 안의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엄행수(嚴行首)라
불렀다. ‘행수(行首)’란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칭호요, ‘엄’은 그의 성(姓)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따져 묻기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벗의 도를 들었는데, ‘벗이란 함께 살지 않는 아내요, 핏줄을 같이하지 않은 형제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이란 이같이 소중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이름난 사대부들이 선생님을
따라 그 아랫자리에서 노닐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지만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엄행수라는 자는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막일꾼으로서 열악한 곳4에 살면서 남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을 하고 잇는 사람인데, 선생님께서는 자주 그의 덕(德)을 칭송하여 선생이라 부르는 동시에
장차 그와 교분을 맺고 벗하기를 청할 것같이 하시니 제자로서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러하오니 문하에서
떠나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선귤자가 웃으면서
“앉아라. 내가 너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 말해 주마. 속담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 한다' 했다. 사람마다 자기가 스스로 잘한다고 여기는 것이 있는데 남들이 몰라주면, 답답해하면서
자신의 허물에 대해 듣고 싶은 체를 한다. 그럴 때 예찬만 늘어놓는다면 아첨에 가까워 무미건조하게 되고,
단점만 늘어놓는다면 잘못을 파헤치는 것 같이 무정하게 보인다. 따라서 잘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변죽만 울리고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크게 책망하더라도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니,
상대방의 꺼림칙한 곳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비슷한 물건을 늘어놓고 숨긴 것을
알아맞히듯이 자신이 잘한다고 여기는 것을 은근슬쩍 언급한다면,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처럼
진심으로 감동할 것이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 등을 토닥일 때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어루만질 때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뜬구름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결국 자신에 대한 칭찬이 들어 있다면,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을 알아준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벗을 사귄다면 되겠느냐?” 하였다.
자목은 귀를 막고 뒷걸음질 치며 말하기를,
“지금 선생님께서는 시정잡배나 하인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가지고 저를 가르치려 하시는군요.” 하니,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과연 전자가 아니라 후자로구나. 무릇 시장에서는
이해관계로 사람을 사귀고 면전에서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귄다. 따라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누구나 친하게 되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사귀게 되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갈 수 없는 법이지.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다.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道義)로 사귀는 것이지. 위로 천고(千古)의
옛사람과 벗해도 먼 것이 아니요,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사귀어도 먼 것이 아니라네.
저 엄행수란 사람은 일찍이 나에게 알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항상 그를 예찬하고 싶어 못
견뎌했지. 그는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네. 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덩이를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얼음이 얼 때쯤이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 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아래에 떨어지 닭똥이며,
개똥과 거위똥, 그리고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 따위를 주옥인 양 긁어 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구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끌리는 법이 없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지. 부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지. 따라서 그에 대해 예찬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울 것도 없으며,
헐뜯는다 해서 욕될 것도 없다네.
왕십리의 무와 살곶이5의 순무, 석교(石郊)6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이며 연희궁(延禧宮)7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8며 청파(靑坡)9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10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11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천 푼12이나 된다네. 하지만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하고, 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했다더군.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 엄행수와 같은 이는
아마도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사는 대은(大隱)13이라 할 수 있겠지.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부귀를 타고나면 부귀하게 지내고 빈천을 타고나면 빈천한 대로 지낸다.’
하였으니, 타고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경』에, ‘이는 새벽부터 밤까지
공소(公訴)에 있으니, 진실로 명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라14’ 하였으니, 명(命)이란 그 사람의 분수를
말하는 것이다. 하늘이 만백성을 낼 때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명을 타고난 이상 무슨 원망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런데 새우젓을 먹게 되면 달걀이 먹고 싶고 갈포옷을 입으면 모시옷이 입고 싶어지게
마련이니, 천하가 이로부터 크게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고 농토가 황폐하게 되는 것이다.
진승(陳勝), 오광(吳廣), 항적(項籍)의 무리들은15 그 뜻이 어찌 농사일에 안주할 인물들이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짐을 짊어져야 할 사람이 수레를 탔으니 도적을 불러들일 것이다’ 한 것도 이를
두고 말한 것이란다. 그러므로 의리에 맞지 않으면 만종(萬鍾)의 녹을 준다 하여도 불결한 것이요,
아무런 노력 없이 재물을 모으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그 이름에 썩는 냄새가 나게 될 걸세.
그런 까닭에 사람이 죽었을 때 입속에다 구슬을 넣어 주어16 그 사람이 깨끗하게 살았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엄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며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다.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떠헥 처신할지는 알 만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나는 깨끗한 가운데서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서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먹고사는 일에 아주 견디기 힘든 경우를 당하면 언제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데, 엄행수를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일이 없었다. 진실로 마음속에 좀도둑질할 뜻이 없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엄행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더 확대시켜 나간다면 성인의 경지에도 이를 것일세.선비로서 곤궁하게 산다고 하여 얼굴에까지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요, 출세했다 하여 몸짓에까지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엄행수와 비교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거의 드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엄행수에 대하여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다. 어찌 감히 벗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엄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였다.
이 글에 등장하는 선귤자(蟬橘子)를 이덕무라고 주(註)를 단 것은 신호열, 김명호가 옮긴 『연암집』의 주를
인용한 것인데, 의문이 남는다. 박지원이 이 글을 지었다는 1756년은 이덕무의 나이가 불과 16세에 불과한
때이다. 그 나이에 이덕무가 제자를 두고 가르쳤다는 것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이덕무가 총명하여
가학(家學)으로써 6세에 이미 문리(文理)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서자로써 전통적인 정규 교육을 거의
받은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또한 글에 제자를 가르치는 내용의 깊이로 미루어도
등장하는 선귤자(蟬橘子)가 16세의 이덕무가 아닐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선귤자(蟬橘子)를 이덕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이덕무가 선귤당(蟬橘堂)이라는 당호(堂號)를 갖은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 글이 쓰여진 때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오히려 이덕무가 이 글에서 영향을 받아
‘선귤당’이라는 당호를 짓게 되었을 개연성이 더 높다. 이덕무는 청장관(靑莊館)이라는 호(號)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젊은 시절부터 삼호거사(三湖居士), 경재(敬齋), 팔분당(八分堂), 형암(炯菴), 영처(嬰處),
을엄(乙厂), 감감자(憨憨子), 범제거사(汎齋居士), 탑좌인(塔左人) 등 많은 호가 있었다. 이덕무는 자신이 쓴
선귤헌명((蟬橘軒銘)에서 ‘매미는 바람을 타고 높이 오르되 멈춰야 할 곳을 알고, 귤은 껍질로 그 속살이
추해지거나 훼손되지 않게 아름답게 보호한다’고 선귤(蟬橘)의 의미를 설명했다. 『연암집』에는 박지원이
지은 <선귤당기(蟬橘堂記)>도 실려 있다. 박지원은 이덕무가 선귤당(蟬橘堂)이라는 당호를 짓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나파인/박천규 사진]
영처자(嬰處子)17가 당(堂)을 짓고서 그 이름을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하였다. 그의 벗 중에 한 사람18이
이렇게 비웃었다.“그대는 왜 어지럽게도 호(號)가 많은가? 옛날에 열경(悅卿)19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俗名)을 버리고 법호(法號)를 따를 것을 원하니,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열경더러 이렇게 말을 했네.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木比丘)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灰頭陀)라 부르려무나.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육체가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지만, 이름은 본래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니 장차 무엇을 버리려 한단 말이냐?
네가 정수리를 만져 머리카락이 잡히니까 빗으로 빗은 것이지,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 이상 빗은 있어 무엇
하겠느냐.
네가 장차 이름을 버리려고 한다지만, 이름은 옥이나 비단도 아니요 땅이나 집도 아니며, 금이나 주옥이나
돈도 아니요 밥이나 곡물도 아니며, 밥솥이나 가마솥도 아니요 큰 가마나 큰솥도 아니며, 광주리도 술잔도
아니요 곡식 담는 각종 제기(祭器)도 고기 담는 제기도 아니다. 차고 다니는 주머니나 칼이나 향낭(香囊)처럼
풀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비단 관복이나 학을 수놓은 흉배(胸背), 서대(犀帶)20나 어과(魚果)21처럼
벗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쪽 끝에 원앙을 수놓은 베개나 술이 달린 장막처럼 남에게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때나 먼지처럼 물로 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물까마귀 깃으로
토해 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스럼이나 마른 딱지처럼 손톱으로 떼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나,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 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힘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 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아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저 울리는 종에 비유해 보자. 북채를 멈추어도 그 소리는 울려 퍼진다. 그렇듯이 사람의 몸이 백 번
죽어도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매미의
허물이나 귤의 껍질과 같아서,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外物)에서 매미 소리를 찾거나 귤 향기를 맡으려
한다면 이는 껍질이나 허물이 저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처음 태어나서 강보에서 응애응애 울 때에는 이러한 이름이 없었다. 부모가 아끼고 기뻐하여
상서로운 글자를 골라 이름을 지어 주고, 다시 더럽고 욕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22, 이 모든 게 다 네가
잘 되기를 축원한 것이다. 너는 이때만 해도 부모에 딸린 몸이어서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성장하고
나서야 네 몸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 ‘나’를 입신(立身)하고 나서는 ‘그’가 없을 수 없으니, ‘그’가 ‘나’에게
와서 짝이 되어 몸이 홀연 한 쌍이 되었다. 한 쌍의 몸이 잘 만나서 자녀를 두니 둘씩 짝을 이루는 것이
마치 주역의 팔괘와 같았다23.
그리하여 몸이 이미 여럿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되어 무거워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비록 명산이 있어 좋은
물에서 놀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움이 그치고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며, 사이좋은 친구들이 술상을 차려
부르면서 이 좋은 날을 즐기자고 말을 해도 부채를 들고 문을 나서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이 몸에
딸린 것을 생각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네 몸이 얽매이고 구속을 받는 것은 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이는 네 이름과 마찬가지여서, 어려서는
아명(兒名)이 있고 자라서는 관명(冠名)24이 있으며, 덕을 나타내기 위해 자(字)를 짓고 사는 곳에 호(號)를
짓는다. 어진 덕이 있으면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덧붙인다. 살아서는 높은 관작(官爵)25으로 부르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시호(諡號)26로 부른다. 이름이 이미 여럿이라 이처럼 무거우니 네 몸이 장차
그 이름을 감당해 낼지 모르겠다.‘
이는 『대각무경(大覺無經)』27에 나온 이야기일세. 열경은 은자(隱者)로서 이름이 아주 많아 다섯 살 적부터
호가 있었지28. 때문에 대사(大師)가 이로써 경계한 것이네.갓난아기는 이름이 없으므로 영아(嬰兒)라 부르고 시집가지 않은 여자를 처자(處子)라고 하지. 따라서
영처(嬰處)라는 호는 대개 은사(隱士)가 이름을 두고 싶지 않을 때 쓴다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선귤(蟬橘)로써 자호(自號)를 하였으니 자네는 앞으로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일세. 왜냐하면 영아는 지극히 약한 것이요 처자란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어서 사람들이 자네의 유약함을 보고는 여전히이 호로써 부를 것이요, 매미 소리가 들리고 귤 향기까지 난다면 자네의 당(堂)은 앞으로 시장처럼 사람이 모이게 될 걸세.“
이에 영처자(嬰處子)가 말하기를,
“대사가 한 말과 같이, 매미가 허물을 벗어 그 허물이 말라붙고 귤이 시들어서 그 껍질이 텅 비어 버렸는데,
어디에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있겠소? 이미 좋아할 만한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없는데 사람들이 장차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나를 찾겠소?” 하였다.
『연암집』 <선귤당기(蟬橘堂記)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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