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 新독보강호 제2권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06. 4. 23. 13:02

 

■ 新독보강호 제2권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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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2장 세대교체(世代交替)

 
     제 13장 개파대전(開波大典)

 
     제 14장 뇌령일식(雷靈一式)

 
     제 15장 흔들리는 여인들

 
     제 16장 빙하선자(氷河仙子)와 빙정(氷精)

 
     제 17장 화중지병(畵中之餠)


     제 18장 전운(戰雲)

 
     제 19장 이상한 살신성인(殺身成仁)

 
     제 20장 여난(女難)

 
     제 21장 선상(船上)의 향연(饗宴)

 
     제 22장 대단원(大團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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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12장 세대교체(世代交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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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불수는 황실에서 전래되어 오는  무공으로 중원 무림에는 잘 알

     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백가람이 한눈에 알아보았

     는지 기이한 일이었다.

 
     쾅!
 

     폭음이 일었다. 주위에 자욱한 흙먼지 소용돌이가 일며 그 속에서

     세 마디의 답답한 듯한 신음이 울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양자위는 낭패한 표정

     으로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서 있었으며, 두 명의 라마는 꼿꼿하

     게 서 있었다.
 

     일견하기에 양자위의 패배로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라마들의 발목이 지면에 들어가 있었다. 발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면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과연 황불수의 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백가람의 눈썹이 꿈틀했

     다. 그가 막 뭐라 말하려는 순간.

 
     "모두들 손을 멈추시오!"

      노구룡이었다.

 
     그는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의아해하는 중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이렇게 시끄럽게 굴면 영물이 나타나지 않을 거요. 제발 좀 조용

     히 할 수 없소?"

 
     중인들이 멍청히 그를 바라보자 노구룡은 이번에는 주자경과 희수

     봉을 향해 걸어갔다. 두 여인은 설전(舌戰)을 벌이다 어느새 전투

     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아가씨도 그만두시오!"

 
     "흥! 그럴 수 없어요!"


     "흐흥! 저 천한 계집을 징계해야겠어요!"

 
     희수봉은 희수봉대로, 주자경은 주자경대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

     다는 듯이 치열하게 손발을  써 가며 상대를 공격했다. 두 여인의

     싸움은 가히  신랄했다. 비록 병기를  사용하진 않았으나, 상대의

     치명적인 요혈만을 노려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노구룡은 머리를 긁적였다.

 
     "할 수 없지. 억지로라도 말릴 수밖에."

 
     백가람은 기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저자의 어떤  점이 그토록 매력 있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평범한 데다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데.......'

 
     백가람의 뇌리에 부친이 한 말이 떠올랐다.
 

     '중원에 가면 노 씨 성(姓)을 지닌 자를 주의해야 한다. 아니, 그

     자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그의 후손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네

     또래의 노 씨 성을 가진 아이를 만나면 절대로 겉모습만으로 섣불

     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백가람은 준미한 눈썹을 찌푸렸다.

 
     '어찌하여 아버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설마 저 노구룡이

     란 작자가 바로 그자란 말인가?'
 

     이때였다.

     "앗!"
 

     "어머멋!"
 

     두 마디의 호들갑스런 여인의 비명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백가

     람은 고개를 돌리다 멍청해졌다.
 

     그야말로 진풍경이 벌어져 있었다.
 

     주자경과 희수봉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두  여인의 치마가 싹둑

     잘려 늘씬한 다리가 훤히 노출되어 있었다. 잘려져 나간 치맛자락

     은 그녀들의 발아래 조각조각 떨어져 있었다.

 
     "헤헤! 더 이상 싸우면 이번엔 좀더 짧게 잘라 주겠소. 하지만 그

     렇게 되면 좀 추울 거요."

 
     노구룡은 수중의 소도(小刀)를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꺅!"
 

     "아, 안 돼욧!"

 
     두 여인은 후다닥 두 손으로 다리를 가렸다.

 
     "헤헤! 그럼 둘이 화해하시오."

 
     주자경과 희수봉의 입에서 똑같이 '흥!' 하는 코웃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두 여인은 서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분명한 것은 더 이

     상 싸우지는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백가람은 의혹을 느꼈다.

 
     '대체 무슨 수법을 썼기에  두 여인의 치마를 거의 동시에 잘랐단

     말인가? 짧은 도로 일 초에 동시에 치맛자락을 베는 것은 그리 어

     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잘려져 나간  치맛자락이 저렇게 많은

     조각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백가람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림의 모든

     종류의 도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떤 도법도 그 같은 수법을 구

     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저 바보 같은 놈이 도의 숨은 달인이었단 말인가?'
 
     이때였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계속 황명을 거역하면 네놈들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주겠다!"

 
     양자위였다.

 
     어느새 관군  수백 명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일단 명만 떨어지면  수백 대의 화살이

     우박 떨어지듯 날아올 기세였다.

 
     백가람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뿐만 아니라 네 명의 라마승 눈

     에서도 흉광이 번쩍였다.

 
     바야흐로 유혈극이 벌어질 참이었다.


     "이거야 어디 시끄러워서 영사(靈蛇)가 자정수를 마시러 오겠소?"

 
     노구룡이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을 흔들듯 말했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해졌다. 노구룡은 마치 산보 나

     온 늙은이인 양 느릿느릿 걸어 백가람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당신이 저 중들의 두목이오?"
 

     백가람은 흠칫했다. 이때 희수봉이 재빨리 대신 답했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에요."

     노구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보시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자정수가 솟아나는 영천(靈泉)

     이 있소.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 난동을 부리니 곧 나타날

     영사가 놀라 달아나겠소. 당신도 영사를 얻으러 왔소?"

 
     백가람은 도무지 제멋대로인 듯한 노구룡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바보 같기도 하고, 어찌 보

     면 은연중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는 힘이 있는 것도 같은 노구룡이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영사를 탐내서  그런 게 아니오. 내게  필요한 것은 자정수일

     뿐이오. 세 동이 정도만 길어 가면 되오."

 
     노구룡은 눈을 크게 떴다.

     "자정수는 어디다 쓰려고?"

 
     "검을 제련하는 데 쓰려고 하오."

 
     "검?"

 
     노구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검을 만드는데 왜 자정수가 필요하단 말이오?"

 
     백가람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

     았다. 사방에는 수백 명의  관군이 활을 겨누고 있었고, 양자위를

     비롯한 복마신니 등은 여전히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두려운 게 아니라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설명했다.

 
     "당신도 자정수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자고로 신

     검, 명검을 벼르는 데는 중수(重水)가 많이 쓰여 왔소. 내게는 만

     년한철(萬年寒鐵) 한 덩이가 있소. 그것으로 검 한 자루를 만들려

     는 것이오.  감로자정수는 달빛의  정기와 지정(地精)을 흡수하고

     있어 극음(極陰)의 정화가 깃들어 있소. 자정수로 검을 달궈 담금

     질하기를 천 번을 반복하면  천하의 명검이 되오. 그렇게 되면 낙

     뢰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소."
 

     여기까지 말한 백가람은 내심 아차 싶었다. 대충 이야기한다는 것

     이 어찌 된 셈인지 자신도 모르게 술술 털어놓고 만 것이다.

 
     보통 무림인들은 재물에는  별 욕심이 없어도 신병이기(神兵利器)

      등은 목숨을 걸고 탐한다. 그러므로 이런 비밀은 절대로 털어놓아

     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신검을 벼르려는 것은 오랜 숙원이자 비밀이었다. 그가 중원

     에 온 목적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니, 수십 년에 걸친 가문의 비

     원을 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노구룡 앞에서 술술 그 비밀을 털어놓고만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복마신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양조위도 마찬가지였다.

     "아미타불! 그 신검을 어떤 용도로 쓰려 하는가?"

 
     복마신니의 추궁에 백가람은 안면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오. 아무튼 난 용무를  밝혔소. 자정수 세

     동이를 가지고 가면  그뿐이오. 당신들이 막으면 그땐 무력으로라

     고 밀고 들어가겠소."
 

     그는 4인의 라마승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입밀로 말했으므

     로 중인들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크크크!"
 

     라마승들은 괴소를 흘리더니 돌연 훌쩍 신형을 날렸다.


     "앗! 막아라!"
 

     "쏴라!"

 
     슈슈슈슉!
 

     수백 대의 강전(强箭)이 허공에 뜬 라마승들을 향해 쏘아졌다. 라

     마승들은 홍색 가사의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후두두둑!
 

     놀랍게도 바위조차  뚫는다는 강전이 무형의  벽에 막히기라도 한

     듯 허공에서 퉁겨져 사방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 광경에 양조위

     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가 막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냥 놔두세요, 양 태감."

 
     주자경이 그를 만류했다.

 
     "공주님?"
 

     "저들과 싸우면 우리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거예요. 저들의 목

     적이 자정수에 있으니  우리와는 상관없잖아요? 서로가 필요한 것

     을 취하면 될 거예요."
 

     노구룡은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고 말고. 전하의  몸보신을 하는 데는 자정수를 먹은 영

     사가 필요할 뿐이오."


     이렇게 되자 양조위는 머뭇거리게 되었다.
 

     "자, 갑시다. 영사가 나타날 시간이오."

 
     노구룡은 하늘을 보더니 앞장  서 계곡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주

     자경이 따랐다. 뒤질세라 희수봉도 따라갔다. 이어 양조위와 복마

     신니 순으로 계곡을 향해 걸어갔다.

 
     백가람은 노구룡의 뒤를 바짝  쫓아가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묘한 질투심이 일어난 것이다. 

 
     '대체 저자의 어떤 면이  좋다고....... 아니, 뭐라고 꼭 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기이하게 사람을 끄는 힘은 있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 그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흐흐, 아버님과 나는 다르다. 내 앞을 막는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영천.

 

     계곡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에서 샘이 솟고 있었다. 그곳에서

     는 신비한 오색 광채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오오! 정말 신비하구나!"

     양조위는 탄성을 발했다. 복마신니도 합장한 채 연신 불호를 외웠

     다.

 

     노구룡은 백가람을 향해 말했다.

 

     "어서 길어 가시오. 자정이 넘으면 샘은 곧 말라 버릴 것이오."

 

     백가람은 품속에서 가죽부대를 꺼내더니 샘 속에 담그었다.

 

     '읏......!'

 

     샘물에 손이 닿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뼈를 엘 듯한 한기가

     피부를 뚫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던 것이다.

 
     만일 정순한 내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가죽부대를 놓쳤을 것

     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손가락이 그대로 얼어 버렸을 것이

     다.

 
     백가람은 내공을 끌어올려  한기를 몰아내면서 가죽부대에 자정수

     를 가득 담은 후 일어섰다.

 
     "됐소이다."

 
     그는 노구룡 앞으로 걸어온 후 공수했다.

 
     "만나서 반가웠소.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소."

 

     "나도 반가....... 어엇?"

 
     쿵!


     노구룡은 볼썽사납게 두 다리를  번쩍 들어올리며 뒤로 벌렁 넘어

     졌다. 백가람을 향해 마주  공수하는 순간, 갑자기 기이한 기운이

     밀려오는 바람에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이것 참......, 바닥에 이끼가 있었군."

 
     노구룡은 뭉그적거리며  일어나려다 다시 한  차례 넘어지고 말았

     다. 그의 발 밑에는 이끼가 파랗게 낀 돌이 깔려 있었다.

      백가람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내 손을 잡으시오."

 
     그는 노구룡에게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 그는 노구룡을 시험하기 위해 공수하면서 진기를 쏘아 냈

     다. 적어도 상대가 그 진기에 맞상대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상대의 내공 정도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

     런데 어이없게도 노구룡은 완전  무방비 상태로 그의 진기를 얻어

     맞고는 뒤로 벌렁 자빠진 것이다.

     노구룡은 이끼 낀 돌에  자꾸만 미끄러지자 백가람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백가람은 그의 손목을 잡으며 신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서 은

     은한 단향(檀香) 냄새가 풍겼다.

 
     노구룡은 갑자기 손목을 통해  서늘한 기운이 밀려들자 전신의 맥

     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가슴이 짓눌린 듯이 답답해져 왼

     손으로 가슴을 쳤다.

 
     "아이구, 답답해! 갑자기 왜 이러지?"

 
     순간 백가람의 안색이 변했다. 순조롭게 상대의 손목을 통해 밀려

     들어가던 백단신공(白檀神功)의 기운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빨

     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상대의 손목에서  기이한 흡인력이 발생하여  그의 내공이 자석에

     이끌리듯이 흡수되고 있었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해 노구룡의 손

     을 뿌리치고 말았다.

 

     "아이쿠!"

     노구룡은 그가 갑자기 손을 놓는 바람에 막 일어서려다 다시 엉덩

     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야말로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이만 가겠소!"
 

     백가람은 차갑게  한 마디 하고는 걸어갔다.  그는 희수봉의 곁을

     휑하니 지나갔다.
 
     희수봉의 얼굴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녀는 버둥거리며 간신히 일

     어서고 있는 노구룡과 아미를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주자경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어. 일단은 소군(小君)을 따를 수밖에.......'

 
     그녀는 미련에 찬 눈빛을 노구룡에게 던진 후 백가람의 뒤를 따랐

      다. 4인의 라마들도 신형을 날렸다.

      장내에는 양조위, 복마신니,  주자경을 비롯하여 노구룡만이 남게

     되었다.
 

     "아미타불......, 저자는 아무래도  위험 인물인 것 같아요. 앞으

     로 주의해야 할 겁니다."
 

     복마신니의 말에 양조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저자에 대해 좀더 알아 봐야겠소이다."

 
     "괜찮아요, 노 소협?"

 
     주자경은 걱정스러운 듯 노구룡에게 다가갔다. 노구룡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볼멘 소리로 말했다.

 
     "그자의  손은  얼음장  같더군.  원,  사람  손이  그렇게  차서

     야......."
 

     "......?"

 
     주자경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사실 백가람은 비전의

     백단신공으로 그를 제압하려다 도리어 낭패를 당한 것이었다.

      그가 익힌 백단신공은 서역(西域)의  한 신비 문파의 무공으로 음

     (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가 암암리에 펼

     친 중수법(重手法)으로 인해  치명적인 내상을 입거나, 최소한 혈

     맥이 손상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노구룡은 만년석척(萬年  )의 내단을 복용한 바 있었다.

     만년석척의 내단은 극양지물(極陽之物)로,  사실상 그의 체내에서

     가공할 내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채  내단이 융화되지 않은

     상태라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음에 해당하는 백단신공의 기운이 밀려오자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것은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가슴의 단중혈(壇中穴)에 녹지 않

     고 뭉쳐 있던 만년석척의  기운이 풀리면서 체내로 유입된 백단신

     공을 융화시켜 버린 것이다.

 
     불과 물은 극성이다. 어느  쪽이 강하냐 하는 것은 내공의 심후함

     정도에 달려 있다.
 

     만년석척의 내단을 복용한  노구룡의 극양지공은 백단신공의 기운

     을 고스란히 녹여 버렸고,  그로 인해 백가람은 자신의 내공이 흡

     수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가 황망히 자리를  뜬 것은 이 같은  불가사의한 일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구룡 본인은 그 같은 사

     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영사요!"

 
     "쉿! 떠들면 달아난단 말이오!"

 
     영천 주위에 잠복하고 있던 양조위는 절벽의 틈바구니에서 투명한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가 노구룡에게

     무안을 당하고 말았다.

     노구룡은 바위에 납작 엎드린 채 영사가 샘을 향해 기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놈이 감로자정수를 배불리 마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그런 후

     놈을 사로잡읍시다."

 
     양조위는 무안당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품속에서 그물을 꺼냈다.

 
     "이걸로 놈을 단숨에 포획하겠네."

 
     노구룡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잘 안 될 텐데?"
 

     "안 되다니?"

      "약선 사부님 말씀에 설상사란 놈은 워낙 빨라 쉽게 잡을 수 없다

     고 하셨소."

 
     양조위는 코웃음쳤다.

 
     "흥! 빨라 봐야 뱀이지. 날개가 달렸다면 몰라도......."

 
     그는 말을 멈추었다. 설상사가 자정수가 솟아나는 샘 속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일행은 숨을 죽인 채  샘을 주시했다. 설상사는 샘 위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오색의 광휘를 발하던 샘물이 설상사의

     몸 주위로 소용돌이쳤다.


     휘류류류.......

 
     마치 설상사가 자정수의 정기를 흡수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양조위는 그물을  단단히 잡고 위치를 이동했다.  샘을 향해 좀더

     가까이 접근해 간 것이다.  복마신니는 행여 그가 실수할까 봐 괴

     장을 움켜쥔 채 뱀의 퇴로를 차단했다.

     주자경은 노구룡을 돌아다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노구룡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절벽

     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디 있긴 있을 텐데......."

 
     "뭐가요?"

 
     "암컷이 근처에 있을 텐데......."

 
     "네?"

 
     이때였다.
 

     "잡았다!"

 
     양조위의 득의에 찬 외침이 울렸다.

 
     주자경은 고개를 돌렸다.  양조위가 그물에 갇힌 설상사를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활짝 미소지었다.

 
     "잘했어요, 양 태......!"

 
     그녀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물이 북 찢기더니 흰빛이 번쩍 하

     고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엇?"

 
     양조위는 어이가 없어  멍해졌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천잠사(天蠶

     絲)로 짠 그물이었다. 칼로 찢으려 해도 찢기지 않는다는 천잠 그

     물이 너무나 간단히 찢겨져 나가고 설상사가 빠져나간 것이다.

 
     "이놈! 미물이 감히 어딜 달아나려고?"


     위잉!

 
     복마신니가 괴장을  휘둘렀다. 설상사는 지면에서 한  자 가량 뜬

     채 그녀의 옆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복마신니는 최대한으로

     절기를 펼쳐 설상사를 내리쳤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설상사는 번개보다 빨랐다.  괴장을 스치며 복마신니의 옆구리 사

     이로 빠져나가 버렸다.

      마침 설상사가 달아나는 곳에는 노구룡이 있었다. 그는 바위에 걸

     터앉아 있었는데, 흰빛이 쏘아 오자 느리게 허리춤에서 비수를 뽑

     아 냈다. 그것은 태성왕에게서 하사받은 웅룡도(雄龍刀)였다.


     탁!

 
     둔탁한 소리가 났다.

 
     중인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빛살처럼 빠르게 달아나던 설상

     사가 어이없게 웅룡도를  얻어맞고 바닥에 추락했다. 그것도 웅룡

     도의 칼등을 맞고 혼절한 채 떨어진 것이다.

 
     중인들은 노구룡이  비수를 아무렇게나 허공으로  그어 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슨 절묘한 도법(刀法) 따위가 아

     니었다. 그저 허공을 향해 그어 댄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설상사는 여지없이 칼등에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채 떨

     어진 것이다.

     "헤헤! 이젠 네가 암놈을 불러 줘야겠다."

 
     노구룡은 손가락으로  설상사의 머리를 잡은  후 절벽으로 다가갔

     다.

 
     "......?"

     중인들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노

     구룡은 설상사를 잡은 채 흔들며 말했다.
 

     "암놈아! 네 남편이 여기  있다. 안 나오면 이놈의 껍데기를 벗겨

     구워 먹겠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킥!"

 
     주자경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복마신

     니는 인상을 잔뜩 썼으며, 양조위는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뭐 하자는 수작인가? 뱀이 사람 말을 어떻게 알아......."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쉭!

 
     파공성과 함께 절벽 틈새에서  한 줄기 흑선이 뻗어 나왔다. 너무

     나 빠른 속도라 검은 선(線)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노구룡은 다시 웅룡도를 휘둘렀다. 그저 막대기 휘두르듯 휙휙 허

     공에 대고 휘둘렀다. 중인들은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상황이 달랐다.

     검은 선은 분명 뱀이었다. 설상사와는 반대로 온몸이 칠흑같이 검

     었다. 길이는 두 자, 굵기는 엄지손가락 세 개쯤 합친 크기로, 설

     상사보다 두 배나 되는 몸집이었다.

     "엇! 제법 빠른데......."

 
     노구룡은 연신 웅륭도를 휘둘렀다. 이번에도 칼등만을 썼다. 뱀은

     그의 얼굴을 노리고 허공을 날면서 공격했다.

     노구룡은 연신  뒷걸음질치며 웅룡도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뱀은

     교묘하게 몸을 틀었고, 집요하게 노구룡의 목을 물려고 했다.

 
     "안 되겠군. 네놈의 껍데기를 벗겨 주마!"

 
     휘리리리릭!

 
     웅룡도가 허공으로  던져지더니 다시  노구룡의 손으로 떨어졌다.

     순간 칼 빛이  번쩍번쩍 빛났다. 웅륭도는 바람개비처럼 노구룡의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
 

     중인들은 어리둥절했다.
 

     칼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노구룡은  어느새 웅룡도를 거두었다.

     대신 그의 손에는 껍질이 홀랑 벗겨진 뱀이 쥐어져 있었다.

 
     "쯧쯧, 얌전히 굴었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노구룡은 알몸(?)이 된 뱀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는 벗겨진

     뱀가죽을 허리춤의 피낭에 간직한 후 중인들을 향해 돌아섰다.

 
     "됐소. 이놈을 푹 고아 폐하께 드시게 하면 만병이 치유될 것입니

     다."

 
     양조위는 그가  건네주는 알몸뚱이 뱀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방금  보여 준 노구룡의 뱀 잡는 신기는

     혀를 내두를 정도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미타불!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만 산을 내려갑시다."

 
     복마신니가 괴장으로 바닥을 쿵쿵 찍으며 말했다.

 
     "그래요, 어서 내려가요."

 
     주자경은 한시라도  빨리 산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인지라 서둘러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노구룡이 그녀

     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군주, 방금 전 설상사의 내단을 슬쩍해 두었는데 먹어 보겠소?"

 
     "......?"

 
     주자경은 어리둥절했다. 언제  그가 설상사의 내단을 슬쩍했단 말

     인가?
 

     "헤헤! 내단은 삶으면 아무  효력이 없어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

     껍질 벗길  때 슬쩍  빼 두었소.  내단의 효력으로 말할  것 같으

     면......."
 

     노구룡의 음성이 더욱  낮아졌다. 주자경의 얼굴은 갑자기 홍당무

     가 되고 말았다.

 
     "싫어요! 당신이나 드세요! 그런 징그러운......."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기 때문에 양조위와 복마신니는 깜

     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자경은 실수를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싫으면 마시오. 비록 맛은 고약해도 먹으면 피부가 고와질 뿐 아

     니라, 정력이  샘솟듯 솟아나는 기막힌  효력이 있는데....... 할

     수 없지. 그럼 내가 먹겠소."

 
     노구룡은 천연덕스럽게 말하곤 뭔가를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양조

     위와 복마신니는 그가 무엇을  먹는지 몰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

     다.
 

 

     무릇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천하를 제패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기

     마련이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고자  함은 무림인의 당연

     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나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인간들 속에서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한낱 물거품  같은 욕망의 부질없음으로  명멸하다 사라지는 것이

     곧 무림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인륜을 파괴하고 천륜을 부정한 사나이 한천이 전 무림을 향해 한

     장의 초대장을 날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으니.......

 

     <중원 무림에 고(告)하노라!

      철기방과 대륜표국은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무림을 바로잡기 위

     해, 정월 보름에  무산(巫山) 요대곡(腰帶谷) 천인평(天刃坪)에서

     군웅 제현을 모시고 무림  평화를 논코자 하니, 초대장을 받은 제

     위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왕림하기 바란다.>

 

     초대장의 논조는 완곡했다.  아니, 협박장에 가까운 것이었다. 초

     대장은 무림의  명문대파는 물론, 흑백  양도의 내로라하는 문파,

     인물 모두에게 빠짐없이 전달되었다.

 
     이 한 장의 초대장이 일으킨 파문은 전 무림을 뒤흔들기에 충분했

     다. 무림은 때아닌 폭풍으로  무섭게 흔들렸다. 수십 년간의 평화

     는 한순간에 깨어지고 민심은 흉흉해지고 말았다.

 
     패륜아 한천!

 
     그가 자신의 가문인 당가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철기방을 세

     운 사실은 이미 전 무림을 진동시킨 바 있었다. 거기에 강북 도상

     의 표국들을 제압한 대륜표국의  위명 또한 강호계를 경악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세력이 손을 잡고 강호를 제패하려 하고 있었다. 바

     야흐로 무림은 온통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다.

 
     무림의 명문들은 명문대로,  흑도 문파들은 흑도 문파대로 끊임없

     이 회합을 열었고, 한천의  초대에 응할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를

     놓고 갑론을박했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가져 무산의 집회에 참여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철기방과 대륜표국이 전 무림에 발부한 초

     대장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들의 독주를  인정한다는 결론을 낳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더 이상 크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또한

     흑도 제파들이 속속 무산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제보도 그들의 마

     음을 불안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대로 둔다면 흑도의 세력

     은 거대한 규모로 팽창하여, 자칫하면 오랜 무림의 평화가 깨어질

     지도 몰랐다.

 
     소림사는 적요에 잠겨 있었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숭산 일대는 온통 백설 천지가 되어 있었다.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으로 향하는 길도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그곳에 어지러운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은 하루 전 무림 각파의 인

     물들이 소림사로 집결한 흔적이었다.

 
     소림사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취해져 있었다.

 
     평소에는 향화(香火)를 지피기 위해 찾아오는 신도들의 발길이 잦

     은 곳이었으나, 며칠 전부터는 그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소실봉으로 오르는 길목은 관자놀이가 불쑥 치솟고 안광이 형형한

     소림의 무승들이 수 장 간격으로 계도(戒刀)와 방편산을 든 채 감

     시했다.

 
     "아미타불.......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여러분."

     소림사 방장실.

 
     당금의 소림  장문인은 요공선사(了空禪師)로,  전대의 소림 신승

     천광선사(天光禪師)의 제자였다. 눈썹이  온통 하얗게 세 양쪽 귀

     까지 뻗쳐 있어 달리 장미선사(長眉禪師)로도 불렸다.

 
     그의 나이는 칠순(七旬)이 넘었다.

 
     그는 방장실에 모여 있는 구 인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

     다. 구 인은 하나같이  당금 무림을 대표하고 있는 구파일방의 장

     문인들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들 모두 젊다는 것이었다. 적게는 30대에서 많게는

     40대 정도의 나이였다.  이는 무림의 세대교체가 단행되었다는 것

     을 의미하는 현상이었다.


     20년 전 무림이 금륜맹(金輪盟)에 의해 혈겁을 맞이했을 때, 그들

     은 대부분  무림의 후기지수들로  활약하던 인물들이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대부분 각 문파의 장문인이나 영수급으

     로 자리잡은 것이다.

 
     무당파의 장문인 일양자(一陽子)는  과거 십대 후기지수의 일원이

     자, 칠용(七龍) 중 한 명인 무당출룡(武當出龍) 진금표(陳金標)였

     다. 그는 당시 무림 삼봉(三鳳) 중 한 명이던 남궁옥과 사랑을 이

     루지 못한 후 도문(道門)에 들어 무당의 대통을 이었다.

 
     아미파의 장문인은 뇌우선사(雷雨禪師)로,  40대의 중년 승려였으

     며, 화산파의 장문인은 20년  전 칠용의 한 명이던 신기일화검(神

     氣日火劍) 낙혼성(駱渾星)이었다.

     청성파도 역시 칠용의  일원이던 신검수사(神劍修士) 악능소(岳能

     素)가 장문인이 되었고, 점창파와 종남파도 마찬가지로 칠용의 일

     원었던 전광일도(電光一刀)  장무기(張武基)와 환광검(幻光劍) 사

     도욱(査刀旭)이 장문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공동파는 독검선자(毒劍仙子)  담수련(澹秀憐)이 장문인이 되었는

     데, 그녀는 무림 삼봉의 일원이었다.

 
     곤륜파는 당시 금륜맹에  의해 멸망했으나, 꾸준한 노력으로 재기

     에 성공하여  비천신룡(飛天神龍) 일원자(一元子)가  젊은 문주로

     각광받고 있었다.

 

     한편 개방의 방주는 개존( 尊) 임충(林忠)의 제자인 일진풍(一塵

     風) 독고랑(獨孤郞)이 남북 개방의 장문인으로 자리를 굳혔다.

 
     아무튼 당대 정도 무림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구파일방의 장문인

     들은 세대교체를 이루었다.  다만 소림사만 여전히 요공선사가 장

     문인을 맡고 있었다.

     "그동안 무림은 평화로웠소. 이 모두가 여러분들이 불철주야 무림

     을 위해 노력하신 결과일  것이오. 하지만 이제 다시 무림 평화가

     위협받기에 이르렀으니,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외다."
 

     요공선사의 말에 구 인은 모두 경청했다.

 
     같은 장문인이지만 무림에서  소림사가 차지하는 위치로 보나, 연

     배로 보나 요공선사는 확실히  구파일방을 대표할 만한 자격이 충

     분했다.

 
     "아미타불....... 철기방과 대륜표국이  손을 잡고 무산 천인평에

     서 무림 평화를 논의한다니,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요공선사의 말에 개방 장문인 일진풍 독고랑이 코웃음쳤다.


     "흥!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놈들은 필경 음모를 꾸미고 있음

     이 틀림없습니다."

 
     청성 장문인도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놈들에게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필경 꿍꿍이속이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선사, 자신의  혈족인 당가보를 피로 씻은 한천이란

     패륜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놈입니다. 더구나 강북의 표국

     을 강제로 통합시킨  대륜표국도 마찬가집니다. 놈들은 무림 평화

     를 위협하는 존재들입니다."

 
     "맞습니다!"

     "지당한 말씀이오!"

 
     중인들은 일제히 탁자를 치며 언성을 높였다.

 
     요공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빈승도 그리 생각하고 있소이다. 어쨌든 그들은

     초청장을 보내 왔소이다. 그래서 무림령(武林令)을 내려 여러분들

     을 소집한 것이 아니오?"

 
     "......."

     장내는 조용해졌다.

 
     방장실에 모인 사람들은 각파의 장문인들이었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긴 지난 20년 동안 무림은 지

     극히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해 왔으므로 각파 장문인들이 한자리에

     회동할 일이 없기도 했다.
 

     그만큼 이번 모임이 중대하다 할 수 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초청에 응해야 할지, 아

     니면 응하지 말아야 할지 말씀들 해 보시오."

 
     "......."

 
     장내는 조용해졌다. 모두들 서로의  눈치를 볼 뿐, 아무도 나서서

     말하는 자가 없었다.

      요공선사는 내심 탄식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느냐는 문제로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요공선사의 머리에는 한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에도 무림에는 인재가 없었지.  만일 그때 그분이 나서지 않

     았다면 중원 무림이 금륜맹에 짓밟혀 회생 불능의 상태가 되지 않

     았을 것이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아아! 한데 이십 년의 세월이 흐

     른 지금도 그분만한 인재가 무림에 없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요공선사는  눈을 번쩍 뜨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들은 당시 칠용삼봉이라  불리는 후기의 제일인자들이었다. 오

     늘날에는 각파의 장문인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무림을 책임지고

     있는 기둥들인데, 어찌하여 모두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요공선사는 각파 장문인 중 가장 연장자였다. 또한 무림의 사정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20년 전 금륜맹 혈겁 당시의

     일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각파 장문인들은 당시 후기지수들로 이름

     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이 오늘날 각파의 장문인이 되어있는 것은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고,  일대의 신인(新人)이 구인

     (舊人)을 밀어내듯 당연한 현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림이 다시 위기에  처했는데도 그들은 아무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닌가!
 

     "아미타불....... 노납은 그들의 초대에 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마침내 요공선사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보았다.

     각파 장문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물쭈물하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그들은 무림에 사람이 없다고

     떠들어 댈 것이며,  사도의 무림인들을 규합하여 머지않은 시기에

     무림을 혈풍으로 몰아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무림 동도들은 뭐라

     고 하겠소? 정도의  기둥이라는 구파일방을 비겁자라고 비난할 것

     이오. 그래도 좋단 말이오?"

 
     각파 장문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요공선사는 마침내 장탄식하고 말았다.

 
     "아아! 당년의 노팔룡 대협께서  계셨다면 결코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어찌하여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도 무림엔 사람이 없단 말인고!"

 
     그 말에 각파 장문인들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마침내 그들의 얼

     굴에 부끄러움의 빛이 떠올랐다.
 
     무당 장문인 일양자가 도호를 외우며 나섰다.
 
     "무량수불....... 장문인의 말씀이 맞소이다. 우리는 무산 천인평

     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들이  멋대로 날뛰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공동 장문인 독검선자 담수련도 찬동했다.

 
     "맞아요. 이대로 놔두면 그들은  백도 무림을 얕볼 거예요. 더 이

     상 크기 전에 백도의 힘으로 그 집회를 무산시켜야 해요!"

 
     일진풍 독고랑도 주먹으로 다탁을 치며 외쳤다.

 
     "옳소이다! 무산으로 갑시다. 놈들이 다시는 허황한 꿈을 꾸지 못

     하도록 응징해야 하오!"

 
     마침내 공분(公憤)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실상 각파가 움직이기를 꺼려했던 것에도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

     다. 20년 전 금륜맹으로  인해 무림 제파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

     졌던 것이다.

     이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각파는 당시의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어 무공을  단련하고 체제를 정비하면서  자파의 힘을 배양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일에 섣불리 나섰다가 치

     명타를 입을까 봐 몸을 사렸던 것이다.

 
     "아미타불! 좋소이다. 그럼  무산의 집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결정

     내리겠소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즉시 자파로 돌아가 준비를 해 주

     시오. 정월 보름에 무산에서 만나길 바라오."

 
     요공선사는 결론을 내렸다.

     무림령에 의해  소집된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회합은 이렇게 끝났

     다. 향후 무림의 생사를 가늠하는 중대한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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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13장 개파대전(開波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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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곡양장(九曲羊腸)의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굽이치는 무협

     (武峽)의 골짜기 아래로는 깊이를  모를 강물이 급류를 이뤄 흘러

     내렸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절벽 사이로는 원숭이들이 꽥꽥

     대며 오갔다.
 

     예로부터 무산은 신녀(神女)가 사는 성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있었

     다. 무산의  운무(雲霧)는 신비하기  그지없어 사시사철 봉우리를

     감싸고 떠나지 않았으며,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산봉들은 마치 인

     간의 군상(群像)처럼 그 형용이 기기묘묘하기만 했다.

 
     "이 빌어먹을 놈아! 대체 언제까지 헤맬 작정이냐!"

 
     갑자기 '쨍!' 하는 메아리가 쳤다. 복마신니였다.

 
     그녀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저만치 앞서 가는 노구룡을 지팡이로

     가리키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노구룡은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글쎄, 난들 헤매고 싶어 헤매나? 어찌 된 놈의 길이 자꾸만 끊어

     지니 별수 있겠소?"

      "이놈아! 그럼 진작 길을 모른다고 할 것이지, 왜 앞장을 서 늙은

     이 고생시킨단 말이냐?"

 
     "풍경이 하도 기막혀 감상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걸 가지고 뭘 그리

     화를 내슈?"

 
     "저......, 저놈 봐라! 꼬박꼬박 말대답할 거냐?"

 
     복마신니의 코와  귀에서 연기가  날 듯했다. 주자경은  옆에서 '

     킥!' 하고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진땀이었다.

 
     "헤......, 온갖  진귀한 요리란 요리는  잘 받아먹으면서 웬놈의

     불평은 그리도 많단 말이오?"

 
     노구룡의 말에 복마신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 무슨 헛소리냐?  네놈의 요리가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런 산중에 뭐 먹을 게  있다고 그러느냐? 어쩔 수 없이 먹은 거

     지......."

 
     노구룡은 문득 빙글 돌아서며 물었다.

 
     "사실 난 놀랐소. 할멈이 그렇게 식성이 좋을 줄이야."

 
     "뭐......, 뭐? 저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마지못해 먹은

     걸 가지고......."
 

     "헤헤! 할멈이 지난 삼 일  동안 먹은 게 뭔지 아시오? 난 출가한

     사람들은 그런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는 줄 알았지 뭐요. 앞으론

     그런 고정 관념은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오."


     "......!"

 

     복마신니는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듯했다.

 
     "원숭이 골을 주원료로 한  후뇌( 腦) 요리는 그렇다 치고, 무협

     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잉어 요리며, 거북이 창자와 뱀 골을 볶아

     만든 거며, 독수리 날개에 메뚜기 튀김, 개구리 뒷다리에 여우 염

     통찜, 두더지 허벅다리 살에 가재탕. 어디 그뿐인가? 뱀장어 요리에......."

 
     "그......, 그만! 노신이 언제  그런 걸 먹었단 말이냐? 이, 이놈

     이 사람을 모함해도 유분수지......."
 
     위잉!
 

     지팡이가 날아왔다. 무시무시한 바람을 일으키며 머리통을 박살낼

     듯 떨어지는 괴장을 슬쩍  옆으로 피해 버린 노구룡은 복마신니를

     향해 혀를 쑥 내밀었다.

 
     "헤헤! 다 아시면서. 요리할 때야 슬쩍 자리를 피해 못 봤다고 변

     명하지만, 요리 재료를 잡는 건 다 봤지 않소?"

 
     "저......, 저놈이 그래도!"
 

     복마신니는 팔짝팔짝 뛰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승포

     까지 부풀어오를 정도였다.

 
     이때 주자경이 슬며시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사부님, 말해 봤자 손해예요.  저 사람 말이 틀리진 않았잖아요.

     사실 첨엔  좀 뭣  했지만, 천하일미라고  사부님도 인정하셨잖아요."

 
     "자......, 자경아!"

 
     복마신니는 당황한 나머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호호! 걱정  마세요, 사부님. 불문의  제자도 사람은 사람이잖아

     요. 살기 위해 이 깊은 산중에서 고기를 좀 먹었기로서니, 부처님

     도 그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거예요."

 
     "너......, 너까지......."
 
     복마신니는 울화가 치민 듯  지팡이를 휘둘러 애꿎은 소나무를 후

     려쳤다.

 
     쾅! 우지끈!

 
     소나무는 대번에 부러져 쓰러졌다. 노구룡은 이미 저만큼 앞서 가

     고 있었다.
 

     "할멈, 좀 있으면 해가 떨어질 것 같소. 늦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

     야겠소."

 
     노구룡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커다란 바위 뒤로 사라져 버렸다.

 
     "어서 가요, 사부님."

     주자경은 급히 교구를 날렸다. 그 광경에 복마신니는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잉, 계집애가 저 바보 같은 놈에게 푹 빠져 버렸군."

 
     복마신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얼른 지팡이로 바닥을 치고는

     신형을 날렸다.

      아닌게 아니라 무산의 깊은  산중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면 보통 일

     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겨울이라  온통 눈이 쌓여 있어 방향을 분

     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 있어요, 노 대협?"

 
     계곡이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올  듯한 절벽이 위태롭게  좌우로 기울어져 있는

     협곡 입구에서 주자경은 당황한 듯 소리지르고 있었다. 뒤늦게 도

     착한 복마신니도 사방을 둘러보며 눈살을 잔뜩 찡그렸다.


     "대체 이곳이 어디냐? 그 놈팽이는 어디 가고?"

 
     "모르겠어요. 분명 이쪽으로 간 것 같았는데 사라졌어요."

 
     복마신니는 코웃음치며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그놈이 우릴 버리고 간 거야!"
 

     주자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안으로 들어가 봐요."

 
     두 여인은  조심스럽게 계곡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방이 온통

     은세계(銀世界)였다. 바닥에는  언제 내렸는지  모를 눈이 무릎이

     빠질 정도로 쌓여 있었고,  양쪽 절벽에는 투명한 얼음이 덮인 데

     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고드름의 길이는 긴 것은  수 장이나 되었으며, 끝은 날카롭기 이

     를 데 없어 무시무시한 창(槍)과 같았다.

      계곡 안으로 들어서자 두 여인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눈

     앞이 탁 트이더니 거대한 분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곳은 분화구 형태로, 사방이 병풍처럼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가운데에는 완전히 얼어 버린 호수가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주자경은 넋을 잃었다.  복마신니도 신비하기 그지없는 계곡 형태

     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그 놈팽이는 어디로 간 거지?"

 
     그때였다.

 
     쩌어어억!

 
     "앗!"
 

     주자경은 대경실색했다. 그녀는  얼어붙은 호숫가에 서 있었는데,

     바로 발아래  얼음이 갈라지며 무엇인가 불쑥  튀어 오른 것이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대체 무엇이 튀어나온 것인지 보다

     가 그만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꺄아아악!"

 
     그것은 길이가 1장이 넘는  거대한 괴어(怪魚)로, 몸 전체가 온통

     시뻘건 비늘로 덮여 있었다. 괴어는 주자경을 향해 날아왔다.

 
     "이놈!"
 

     위이잉!
 

     옆에 있던  복마신니는 가슴이 철렁하여  황급히 괴장으로 괴어를

     후려쳤다. 그런데  괴어는 교묘히 몸을  틀어 피하더니, 지면으로

     훌쩍 뛰어올라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

 
     두 여인은 경악을 금치 못해 괴어를 바라보았다. 괴어는 주먹만한

     눈알을 끔뻑거리며 두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괴어의 배가 갈라지며 사람의 주먹이 툭 튀어나오는 것

     이 아닌가?
 

     "아악!"

 
     너무나 괴이한 상황에 주자경은  비명을 지르며 혼절해 버리고 말

     았다.

 
     빨갛게 타오르는 모닥불이 동굴 안을 훈훈하게 만드는 가운데, 노

     구룡은 물고기의 가죽을 벗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

     보는 복마신니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계곡 안의 호수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는 천년화리(千年火鯉)였다.

     노구룡은 얼음을 깨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 천년화리를 잡은 것이다.

     그는 웅룡도로 천년화리의 뱃가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천년화리

     를 잡았다. 화리의 배에서 주먹이 튀어나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세상에......,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주자경은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듯 가슴을 손으로 쓸

     어내리고 있었다.
 

     "헤헤! 운이 좋았소. 이런 곳에서 천년화리를 잡게 될 줄이야. 화

     리의 가죽으로 말할  것 같으면 피독(避毒), 피수(避水), 피화(避

     火)의 기능이 있는 데다,  질기기가 철갑을 능가해 웬만한 보검이

     아니고서는 끄떡도 없다는 보물이오."

 
     노구룡은 벗겨 낸 가죽을 웅룡도로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솜씨

     는 능숙하기 그지없어  반 식경도 안 되어  두 벌의 단의(短衣)를

     만들어 냈다.
 

     그는 한 벌은 자신의 옷  속에 껴입고, 한 벌은 든 채 복마신니와

     주자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 벌밖에 없어 어느 분에게 줘야 할지 모르겠구려?"

 
     복마신니는 보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너나 가져라. 노신은 관심 없다."
 

     "헤헤! 그럼 공주께 드리겠소."

 
     주자경은 기겁했다.


     "시......, 싫어요!"

 
     아직 채 피가 마르지도 않는 단의를 입는다는 것은 고귀하게 자라

     난 주자경에게는 무리인  듯했다. 노구룡은 잠시 생각하다가 단의

     를 접어 갈무리했다.
 

     "그럼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달라고 하시오."

 
     그는 다시 천년화리에 달려들어  회를 떴다. 그의 손에서 몇 차례

     칼날이 번뜩이는가 했더니 금방 먹음직스런 회가 떠졌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으니 마음껏 드시오. 천년화리의 살은 향

     긋하고 소화가 잘 돼서 예로부터 천하일미로 알려져 왔소."

      이번에는 주자경도 사양치 않았다.

      무산으로 오는 동안 그녀는  하루하루 천하의 진미란 진미는 모두

     맛보았다. 노구룡의 요리 솜씨가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

     양하지 않고 화리의 회를 맛있게 먹었다.

 
     "할멈도 드시오."
 

     "이놈아! 자꾸 할멈, 할멈 하지 마라!"

 
     "그럼 뭐라 부른단 말이오?"

 
     "신니라 불러라!"

 
     회를 집어먹다 눈알을 부라리는 복마신니를 보고 노구룡은 히죽거

     렸다.
 

     "헤헤! 글쎄 회를 먹는  신니라....... 어쩐지 어울릴 것 같지 않

     아서 말이오."

 
     "저, 저놈이......!"


     복마신니는 화를 발칵 내려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꾹 참고 회를 먹

     는 데 열중했다. 그녀는 그녀대로 생각이 있었다.


     '이제 곧 천인평에 당도할 텐데, 체력을 보충해 두지 않으면 낭패

     를 당하기 십상일 거야. 든든히 먹어 둬야지."

 
     노구룡은 그런 복마신니를 힐끗  보며 몸을 돌렸다. 그는 한 손으

     로는 회를 집어먹으며 한  손으로는 화리의 배를 갈라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쯧쯧, 아까운지고! 아직 천 년이 채 못 되어 내단이 형성되다 말

     았군. 할 수 없지. 아쉬운 대로 요리 재료로나 쓸 수밖에."

 
     그가 꺼낸  것은 용안(龍眼)만한 구슬  형태였는데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화리의 회로 포식한 일행은 동굴 벽에 기댄 채 휴식에 들어갔다.

      노구룡 일행이 무산에 온 것은 바로 무산 천인평에서 열리는 집회

     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양조위는 설상사와 감로자정수를 갖고 황실로 돌아갔다. 복마신니

     는 노구룡과 헤어지려고  했으나, 주자경이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주자경은 태평왕 주성으로부터 강호 주유에 관한 허락을 받았으므

     로 이번 기회에 폭넓은 견문의 기회를 넓히겠다고 우겼다. 하필이

     면 노구룡과 동행하느냐는  복마신니의 핀잔이 있었으나, 마침 철

     기방과 대륜표국이  무산 천인평에서 집회를  연다는 소문이 퍼져

     어쩔 수 없이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노구룡 또한  그 소문을 듣고 천인평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실상

     그가 강호에 나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노팔룡이 그로 하여금  넓은 세상으로 나가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두 어머니, 즉 하여령과

     도운하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혼기가 찬 그가 아직도 여인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을 보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강호에 나간 김에 신부

     감을 얻어 오기를 희망했다.

      노구룡은 부친인  노팔룡을 닮아서  매사에 낙천적이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낚시와  사냥을 하면서 태평하게 지냈다. 두 어머

     니는 그 점이 적지 않게 걱정된 것이다.

      한편 강호에 나온 노구룡은 나름대로 목적을 세워 두었다. 입맛이

     유난히도 까다로운 작은어머니  도운하를 위해 천하의 4대 진미를

     반드시 익히고 말겠다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던가. 그는  무산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부친의 당부를 떠올렸다.

     '사내 대장부라면 세상에 나가  두루 견문을 넓혀야 한다. 강호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사귀어 친구로 만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가는

     곳마다 싸워야 하고, 그것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너도 언젠

     가는 혼례를 치르게 될  터. 친구를 많이 사귀면 혼례식장에 하객

     도 많이 올 테니 그 얼마나 기쁘겠느냐?'

 
     부친 노팔룡이 아들을  강호에 내보낸 이유나, 노구룡이 천인평의

     집회에 참가하려는 이유나,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 부자는 진지했다. 그러니 노구룡이 이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천인평에 정사 고수들이 모두  모인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친구

     를 많이  사귀어 혼례식장을 발 디딜  틈도 없이 만들어야겠구나.

     그렇게 되면 아버님도 기뻐하시겠지.'

     인산인해를 이룬 하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급기야 밀

     려드는 하객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가 없어 장원 앞에 임시로 막사

     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막사는 무려 100여 개를  지었으나, 그래도 부족하여 하객들은 인

     근 시진의 객점에도 꽉꽉 들어찼다.

     "허허허! 구룡이 놈이 그래도 인심을 잃지 않았군. 하객들이 이렇

     게 많으니 기분이 무척 좋구나."

 
     노팔룡은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여령과 도운하도 하객들 접대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연신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혼례식도 혼례식이지만, 당대의 영웅 노팔룡 대협의 얼굴을 한 번

     만이라도 보기 위해 구천십지(九天十地), 대륙 18만리에서 무림인

     이란 무림인들은 앞을 다투어 몰려왔다.

 
     마침내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신랑 입장이오!"


     "와아아아―!"

 
     혼례식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렸다.

 
     노구룡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식장에 나타났다. 그는 구름같이 모

     여든 하객들을 향해 절을 꾸벅한 후 걸어갔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혼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신부를 기다렸다.
 

     "신부 등청이오!"

 
     드디어 신부가 나타났다.

     "......?"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신부는 하나가 아니었다. 맨  선두에는 한껏 신부 단장을 한 군약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홍의선자 희수봉이 따르고 있었

     다. 어디 그뿐인가? 연이어  주자경이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는 것

     이 아닌가?
 

     아니다. 또 한 명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신

     부복을 입고 있었다.

 
     "와아아아―!"


     "신부가 넷이나 되다니....... 하하핫! 과연 노구룡 대협답구나!"

 
     장내가 왁자지껄해졌다. 노구룡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네 명이라니?'

 
     그는 상상도 못 한 사태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노팔룡 대협

     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런 가운데 혼례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밤이 되자 장원에

     는 홍등이 수없이  밝혀지고, 하객들은 객원이건 마당이건 막사건

     가릴 것 없이 꽉 들어찬 채, 술잔을 기울이며 한껏 축제 분위기를

     돋우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웃음소리와 떠들어 대는 소리로 장원은 그야말

     로 저잣거리를 방불케 했다.

 
     한편 노구룡은 신방(新房)에 들어 있었다. 원앙촉(鴛鴦燭)이 뜨거

     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신방에는 네 명의  신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노구룡은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다.

 
     '이, 이거야 원....... 누구부터 먼저 옷을 벗기지?'

 

     그는 안절부절못한 채 초조한 표정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나 먼저 벗기면 어때?'

     그는 되는 대로 군약명의 옷부터 벗기려 들었다.

 
     "안 돼요! 제가 먼저예요!"

 
     느닷없이 제동을 건 사람은 희수봉이었다.

 
     "제 나이가 가장 많으니 당연히 먼저 해야 해요!"

 
     그러자 군약명이 발칵 화를 냈다.

 
     "무슨 소리! 내가 먼저 저이를 알았으니 당연히 제일 먼저야!"

 
     이번에는 주자경이 나섰다.
 

     "흥! 이 나라의 공주인 내가  가장 지체가 높으니 당연히 내가 먼

     저지! 어림없는 소리들 말아요!"
 

     "......!"
 

     노구룡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신부들이 저마다 자기가 먼저라고

     다투니 대체 어찌해야 옳단  말인가? 눈알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

     리던 그는 문득 이제까지 말없이 앉아만 있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옳거니, 차라리 저쪽부터.......'

 
     그는 위엄 있게 헛기침을 했다.

 
     "험!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첫날밤에 부군 앞에서 이 무슨 추태

     요. 내가 고를 테니 그대들은 얌전히 기다리시오."

     효험이 있었을까? 신부들은 모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말

     에 복종하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노구룡의 입이 벌어졌다.

 
     '그럼 그렇지.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인데, 어찌 부군의 말을

     듣지 않겠는가?'
 

     그는 몸을  일으켜 맨 왼쪽의 신부에게  다가갔다. 신부는 얼굴에

     흰 망사를 쓰고 있었다.

 
     '초례를 치르는 밤에 흰 망사라니?'

 
     그는 약간 의아했으나, 이제 곧 환희에 찬 초례를 치를 생각을 하

     니 이만저만 흥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리 가까이 오시오."

 
     "예."

 
     신부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대답하고 다가왔다. 신부에게서

     는 난향(蘭香)이 풍겼다.

      노구룡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신부를 번쩍 안아다 침상에 눕

     혔다. 신부는 여전히 다소곳이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

     다.

 
     노구룡은 가슴의 고동 소리를 느끼며 침상에 올랐다. 그는 면사를

     벗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신부가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부끄럽소?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초야를 치를 순 없지 않

     소?"

 
     그는 너스레를 떨며 면사를 벗겨 버렸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커졌다.


     신부의 얼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왜 그래요? 노 대협!"

 
     깜짝 놀란 주자경이 노구룡의 어깨를 흔들었다. 노구룡은 두 손을

     마구 내젓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귀, 귀신―!"


     탁!

 

     "악!"
 

     주자경은 노구룡의  손에 얻어맞고  저만치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엉덩방아를 세게 찧어 그만 오만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노구룡은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야, 이놈아! 또 무슨 미친 병이 도진 거냐? 갑자기 비명은 왜 내

     지르고 난리냐!"

 
     복마신니가 욕설을 퍼부었다.  노구룡은 비로소 완전히 정신이 든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우! 꿈이었구나."

 
     그는 생각하기도 싫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저만치

     서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주자경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얼굴이 없는 신부라니....... 하마터면 귀신과 혼례를 치를 뻔했으니.......'

 
     주자경은 아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요?"

 
     "아......, 아무것도 아니오. 악몽을 꿨을 뿐이오."

 
     노구룡은 얼버무리면서도 야릇한  눈빛으로 주자경을 바라보았다.

     비록 꿈속이긴 하지만  분명히 주자경이 신부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는 가재 눈을 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았다.

 
     '흐흐......, 어쨌든 네 번째  신부만 빼고는 모두가 아는 여자였

     어. 공주도 내게 시집을 왔단 말이지.......'

 
     "......?"

 
     노구룡의 생각을 알 길이 없는 주자경은 그의 야릇한 표정에 더욱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녀석아, 날이 밝았다! 늦기 전에 어서 가자!"


     "아, 알겠소, 할멈."

 
     노구룡은 벌떡 일어섰다. 아닌게 아니라 동굴 안으로 겨울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천인평은 무산 요대곡 내에 있었다.

      요대곡은 문자 그대로  허리띠처럼 생긴 계곡으로, 산봉우리 사이

     로 구불구불 한없이 들어간 곳이었다. 계곡 안쪽에서 마치 거대한

     칼로 깎아 낸 듯  평평한 분지가 나타났는데, 그곳이 바로 천인평

     이었다.

     천인평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석전(石殿)이  있었다. 대충 보아도

     1,000명 이상이 능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대전

     이었다.
 

     "......!"
 

     석전에는 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석전의 처마 아래에는 사해방(四海幇)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황금을 부어 만든 듯 번쩍이고 있었다.

 
     석전 안에는 수백 명의  인물들이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 탁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석전 중앙에는 철기방의 방주인 한천과 대륜표

     국의 국주인 야율함(耶律銜)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들 옆의 특별히  마련된 듯한 자리에 세 명의 홍의

     라마승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초청을 받고 이곳에  온 중원 무림인들은 대략  오백 인 정도였는

     데, 그들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비롯하여 각 지방 명문정파들

     의 수뇌급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가히 중원 무림의 정예가 거의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전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비록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고,  향기로운 미주(美酒)가 있었으나

     손대는 이 한 명 없었다.

     철기방과 대륜표국이 통합하여  사해방이란 이름으로 개파대전(開

     派大典)을 여는 것이나 다름없는  집회였다. 실상 무림 평화를 논

     의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석전의 주위에는 병장기를 찬  채 수백 명의 사해방도들이 전광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정도  무림인들을 포위하고 있었으며, 석전 아

     래의 넓은 연무장도 마찬가지였다.
 

     석전에 오른 무림인 등은 대개가 일파의 지존급 위인들이었고, 그

     보다 신분이 낮은  무림인들은 연무장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연무

     장 주위도 겹겹이 사해방의 무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영도자는 소림사의 요공선사였다. 그는 석전에 들어선

     순간 이미 상황이 극히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해방은 사전

     에 치밀한 준비를 하고 그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아미타불....... 오늘은 길보다는 흉이 많겠구나.'


     비록 구파일방이  사전에 회합을 갖고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했으

     나, 막상 이곳에 와 보니  인원 숫자로나, 기세 면으로 열세인 것

     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때였다.

 
     "하하하! 여러분들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본인이 술 한 잔 받들겠

     소이다!"

 
     침묵을 깨고 대소를 터뜨린 사람은 한천이었다.

     그는 이제 겨우 20세  전후에 불과한 젊은 나이였으나, 눈빛이 날

     카롭고 살기가 흘러 중인들의  가슴을 써늘케 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한천은 물소 뿔로 된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번쩍 치켜들었다.
 

     "자, 예까지 오신 노고에 감사드리며 한 잔 올리오!"

 
     "......."

 
     그러나 아무도 술잔을 드는 자가 없었다.

 

     한천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술잔을  '탕!'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음산하게 말했다.

     "본인의 술을 마다하다니....... 여러분은 이 한천의 얼굴에 먹칠

     을 할 셈이오?"

 
     "......."

 
     여전히 군웅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요

     공선사에게 향했다.
 

     이 자리의 대표자인 요공선사는 합장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 전에 시주께서 우리들을 초대한 이유를 먼저

     묻고 싶소이다."
 

     한천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음침하게 말했다.

 
     "좋소. 그럼 본론부터  들어가겠소이다. 오늘 이 자리는 사해방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향후 무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여

     러분들과 긴한 상의를 하기 위함이오."
 

     한천은 옆에 앉아 있는 야율함을 슬쩍 본 후 말을 이었다.

 
     "본인은 철기방의 방주로서 대륜표국과 통합하기로 결정했소이다.

     아울러 향후 사해방이 앞장서 무림계의 질서를 바로잡아 항구적

     인 무림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겠소이다."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한천의 의도가 너무나 노골적이었

     던 것이다.

     그의 말인즉 사해방이 무림을 지배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본인은 야율국주와 상의한 결과, 무림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서

     는 평화를 쟁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오. 그래서  사해방의 기치 아래 전 무림이 단

     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오?"

 
     "아미타불......!"

 
     요공선사의 진기가 실린 불호가 중인들의 귀를 울렸다.

 
     "시주의 말씀은 지나치게 광오하오이다. 노납은 일찍이 무림을 힘

     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무림인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소이

     다. 평화란 덕(德)으로 이루는  것이지, 무력으로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오."

 
     요공선사의 백미가 위엄 있게 치솟아 올랐다. 그는 낮으면서도 힘

     있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따라서 귀방이  새로이 무림에 적을 올리고  출발하는 이 자리를

     축하하는 것은 무림  동도의 예의겠으나, 귀방이 추구하고자 하는

     일에는 반대하는 바이오."

 
     "뭣이?"

 
     한천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야율함의 눈에서는

     흉광이 번쩍 일어났다.
 

     "흑이면 흑, 백이면 백이오! 사해방을 따르는 자는 살 것이고, 거

     역하는 자는 죽음뿐! 이  자리에서 본인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하겠소."

 
     한천은 품에서 두 개의 삼각 기를 꺼냈다. 하나는 검은 깃발이요,

     하나는 붉은 깃발이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슉!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깃발은 각각 대전의 좌우에 꽂혔다.

 
     "본방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흑기 앞에 서고, 죽음을 원하는 자

     는 홍기 앞에 서라!"

 
     "......!"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상황은 급박하게 치닫고

      있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고, 암암리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사실 그들은 석전에 오른 순간 살아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

     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석전을  포위한 사해방도들의  흉험한 기세도 기세려니와,

     그들 중에는 무림에 널리  알려진 흑도 고수들이 수두룩하게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해방은 이미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지난  20년 동안 무림은 태평성대를  유지해 왔다. 금륜맹이

     무너진 후 무림은 백도천하(白道天下)로 돌아섰고, 강호의 흉마들

     은 모두 꼬리를 감추고 깊이 숨어 버렸다.
 

     일찍이 무림이 백도천하로 완전히  기울어 버린 것은 드문 일이었

     다. 그것은 모두 노팔룡이 이룩한 성과였다.

      그런데 사해방은 출범하자마자  은밀한 활동을 전개해, 그동안 심

     산으로 깊이 숨어 버린 흑도의 거마(巨魔)들을 모두 끌어내었다.

      이 같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정도 무림인들은 천인평에 와

     서야 흑도인들이 대거 사해방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도록 군웅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미타불......."

 

     요공선사의 불호가 장내를  흔들었다. 그는 정명한 눈빛으로 한천

     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시주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소이다.  고금 이래로 중원

     백도의 혼은 한 번도  사마 외도에 굴복한 적이 없소이다. 귀방이

     표방하는 무림 평화란 명분일 뿐,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욕에 불과

     하오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귀방의 취지에  동참할 수 없소이

     다. 이 자리가 그런  억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당장

     돌아가겠소이다."
 

     요공선사는 말을 마친 후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오백여 명의 군

     웅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옳소! 돌아갑시다!"

 
     "이런 미친 집단에 한시라도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소이다!"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군웅들의 외침이 울렸다.

 
     한천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운 후 잔을 던져 버렸다.
 

     "좋다! 그대들이 기어이 죽음을 택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상황은 급변했다.

      석전의 사방에 포진하고 있던 사해방도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석전 아래의 군웅들도 사해방도들에게 포위

     된 채 일촉즉발의 태세로 돌입하고 말았다.

 
     혈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20년이래 처음 있는 대혈전이었다.

 
     차차차창!
 

     "으아악!"
 

     "크아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단말마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쉬지 않고

     일어났다. 정도 무림의  고수들은 혈로(血路)를 뚫기 위해 삼각진

     (三角陣)의 형태로 석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해방은 이미 완벽한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그들은 처

     음에는 학익진(鶴翼陣)의 형태로 정도 무림인들을 포위했으나, 곧

     대차륜진(大車輪陣)으로 형세를 바꾸어  크게 원을 그리며 공격했다.

 
     "비켜라! 막는 자는 죽는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가호를!"

 

     정도 무림인들은  처음에는 사해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낙관했다.

     나름대로 정예 고수들인 데다, 사전에 소림사에 모여 이번 집회에

     대해 대비를 해 두었기 때문이다.

      혈전의 초반전은 정도 무림  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은 대략 반 마

     장 정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둥! 둥! 둥!
 

     문득 고(鼓)  소리가 군웅들의 고막을 두드렸다.  그 순간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듯한 말발굽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앗! 철기대(鐵騎隊)다!"

 
     군웅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앞을 가로막던 사해

     방도들이 길을 트는 가운데  흙먼지를 자욱히 일으키며 수백 기의

     철기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말도 사람도 온통 번쩍이는 철갑(鐵甲)으로 무장한 철기병들이 장

     창(長槍)과 감산도(坎山刀),  구절편(九折鞭), 비륜(飛輪) 따위의

     중병기를 휘두르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이닥쳤다.

 
     두두두두두!
 

     철기병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군웅들을 덮쳤다.

 
     위이잉!
 

     "크아아악!"

     군웅들의 진형은 삽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철기대는 철기방의

     정예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공격 전술은 무림인들의 방식과는 완

     전히 틀렸다.

      아무리 고절한 무학을 지니고 있어도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마대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바람을 가르며 떨어지는 장

     창에 목이 날아갔고, 감산도가 허리를 끊고 지나갔다.

 
     어디 그뿐이랴?

 
     철갑으로 중무장한 말이 미친  듯이 뛰어드는 바람에 말발굽에 밟

     혀 복부가 터져 죽는 사람, 머리가 으깨져 죽는 사람 등으로 삽시

     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힘을 내시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후 복수합시다!"

     군웅들 중 누군가 호기방장하게 외쳤으나, 삼각진은 이미 그 진형

     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후였다.

 
     "으핫핫핫! 가소로운 놈들! 한 놈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

     다!"
 

     한천은 대청에 우뚝 선  채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대륜표국의 야

     율함과 나란히 선 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실 그들은  사해방의 개파대전을 열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초청장을  받고 참가하는 무림의 군웅들과 구파일방

     의 인물들에 대해 치밀한 분석을 해 둔 터라, 이변이 발생하지 않

     는 한 그들을 무산 요대곡에 묻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차차차창―!

 
     "으아악!"

 
     "크으윽......!"

 
     요란한 음향과 비명 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상황은 한천의 예상대

     로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야율함을 돌아보며 득의의 미소를 흘

     렸다.
 

     "흐흐! 어떻소? 저녁 안으로 축배를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야율함은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주의 지략은 대단하오. 일거에 중원의 고수들을 끌어들이는

     솜씨나, 그들을  이곳에 파묻는  전략은 정말  감탄스러울 따름이오."

 
     "후후! 두고 보시오.  이번 일로 소주(小主)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테니."

 
     이때였다.

 
     히히히힝!
 

     갑자기 처절한  말울음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의아한 눈으로

     장내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철기대의 후방에서 갑자기 대혼란이 일

     어난 것이었다. 말이 날뛰고 마상의 철기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

     어지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일이지?"

 
     한천은 눈을 부릅떴다.

 
     보였다. 철기대 사이로  번쩍번쩍 도광(刀光)이 일어나는 것이 아

     닌가? 도광이  일어날 때마다 철기대는 맥도  못 추고 주저앉거나

     와르르 허물어졌다.

     반면 군웅들은 숨통이 트인 탓인지 용기 백배하여, 철기대의 일각

     이 허물어진 곳으로 진형을 새롭게 갖춘 채 함성을 지르며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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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14장 뇌령일식(雷靈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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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놈은 누구냐?"

 
     한천은 우스꽝스러운 몰골의  사나이를 노려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의 눈앞에는 주방에서나 씀직한  둔탁한 칼을 손에 쥔 노구룡이

     히죽거리며 서 있었다.  노구룡은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움은 어느덧 멎어 있었다. 철기대가 물러난 것이 아니라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판국이었다.  군웅들은 여전히 포위망을 뚫지 못한

     상태였고, 다만 잠시나마 숨을 돌리고 있었다.

 
     "나 말이냐?"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이냐?"

 
     한천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야 많은 사람들이 있지. 네  옆에 있는 말 대가리처럼 생긴 작

     자도 있고 저기 또....... 어? 당신들은 언제 이곳에 왔소?"

 
     노구룡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손가락질하는 곳에는 세 명의 홍

     의 라마승이 있었다.

     라마승들은 얼마 전  백가람과 함께 있던 자들이었다. 라마승들은

     그를 바라보며 저희들끼리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뭣이? 말 대가리?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대륜표국의 국주  야율함이 핏대를  세우며 대청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대뜸 허리춤에서 일월도(日月刀)를 뽑으며 다가갔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인지  몰라도, 내 네놈의 버릇을 단단

     히 가르쳐 주마!"
 

     노구룡은 칼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당신은 살을 발라내면 꽤  굵직한 뼈가 나오겠는걸? 하지만 너무

     더러워. 목욕한 지 얼마나 됐소?"

 
     "......!"

 
     야율함은 기가 막혔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더니, 갑자기 나타

     난 노구룡으로  인해 싸움이 중단된 것은  그렇다 치고, 사사건건

     그를 모욕하니 코와 귀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피부가 검기는 검었다.

 
     한편 한천은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저 멍청한 놈이  겉보기보다는 꽤 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철기대를 이렇게 빨리  뚫고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좀

     더 지켜 봐야겠다.'

 
     그는 야율함을 바라보았다. 야율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  는지,

     두 눈에 살광을 번쩍이며 노구룡을 향해 다가갔다.
 

     "이놈! 네놈의 주둥아리부터 도려내 주마!"

 
     번쩍!

 
     일월도가 허공을  갈랐다. 한데 노구룡은 멍청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놈이 호랑이 간을 삶아 먹었나?'

 
     야율함은 어이가 없었으나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일월도의 차디

     찬 도기가 노구룡의 안면을 갈랐다.
 

     "엇?"

 
     야율함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노구룡의 모습이 사라

     진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아랫도리가 허전했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사

     타구니 사이로 부는 것 같았다.

 
     "와하하하핫―!"
 

     사방에서 폭소가  터졌다. 어리둥절해진  야율함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았다.

 
     맙소사! 하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얼굴이 더욱 시커매졌다.

 
     "이, 이놈이......."

 
     그는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노구룡을 노려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둔탁한 칼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뒈져랏!"
 

     위잉!

 
     일월도가 가공할 기세로  도광을 뿜었다. 이번에는 혼신의 공력을

     다한 것이라  사방이 온통 번쩍이는 광채로  가득 찼다. 노구룡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수중의 칼로 허공을 십자로 그었다.

 
     "헉!"
 

     야율함은 기겁을 했다. 그물처럼 전개된 자신의 공세를 뚫고 써늘

     한 도기가  파고든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엉성한 도법 같았으나

     소름이 오싹 돋았다.

 
     "으으으......."

 
     야율함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공포 탓만이 아니라 혹독한 추

     위 탓도 있었다. 어느새 그는 알몸으로 서 있는 것이었다. 바닥에

     는 갈갈이 찢겨진 옷이 떨어져 있었다.


     "역시 목욕 좀 해야겠소. 이거 칼이 더러워져 요리나 제대로 하겠소?"

 
     노구룡은 여전히 이죽거리고 있었다.

 
     야율함은 수치가 극도로 오른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야아아아아아!"

 
     그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사이로 노구룡이 빠져나갔다.

 
     야율함은 분명 그를  베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

     다. 그는 허공을 베었고, 어깨 위에서 무엇인가가 툭 떨어져 바닥

     에 나뒹굴었다.
 

     "와아아아―!"

 
     군웅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두 사람이 교차하는 순간 야율함

     의 수급이 깨끗이 잘려 땅에 떨어진 것이다.

 
     "저럴 수가......!"

      한천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두 눈 부릅뜨고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 보았다. 그런데도 노

     구룡이 무슨 수법으로 야율함을 베었는지 보지 못한 것이다.

 
     이때였다.

 
     휙휙휙!

 
     홍영(紅影)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노구룡의 앞뒤로 삼 인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홍의 라마승들이었다.

     라마승들은 한어(漢語)를 할 줄 몰랐다. 그들은 넓은 가사를 펄럭

     이며 노구룡을 둘러싸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휙휙휙!

 
     노구룡은 한가운데 선 채 엉성한 자세로 서 있었다. 눈 깜짝할 사

     이에 라마승들은 일곱 바퀴 반이나 그의 주위를 회전했다. 얼마나

     빠른지 육안으로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노구룡은 문득 중얼거렸다.

 
     "그만 좀 도시오. 어지럽지 않소?"

 
     노구룡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중의 칼을

     내민 것이다.

 
     "큭!"

     묘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홍의 라마승 중 한 명의 어깨에서 피 분수가 치솟았다. 정확히 견

     정혈(肩井穴)을 찔린 것이다.
 

     그 바람에 라마승들의 회전은  멈추고 말았다. 세 명은 서로 몸을

     부딪친 후 비틀거렸다.
 

     "......!"
 

     라마승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세가 어

     떻게 깨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펼친 것은 풍

     륜겁(風輪劫)이란 것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이제 또 어떤 춤을 출 거요?"

     노구룡은 칼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잡으며 물었다.

 
     라마승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파라라라락!
 

     문득 그들의 홍색 가사가  바람을 맞은 듯 펄럭이기 시작했다. 가

     사는 팽팽히 부풀어올라 마치 공처럼 변했다. 그들은 서서히 쌍수

     를 치켜들었다.

     순간 그들의 쌍수가  붉게 변하더니 점점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부풀어 오른 쌍수는 급기야는 세 배로 커지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에 소림의 장문인 요공선사(了空禪師)가 경악성을 발했다.


     "아미타불....... 천축(天竺)  마불사(魔佛寺)의 혈수인(血手印)!

     조심하시오!"

 
     우우웅!

 
     세 쌍 여섯 개의 핏빛 손이 일제히 뻗어졌다. 순간 노구룡은 천지

     가 온통 핏빛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장세가 닿기도 전에 가슴

     이 울렁거리며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기

     이한 것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라마승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


     군웅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뒤로 물러나도 라마승들의 혈수인

     을 감당할까 말까 한 판국에 도리어 다가가다니?

      노구룡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온몸의 피란 피는 모두 얼굴로 몰리

     는 듯했다. 그는 괴로운  듯 한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더니 갑자기

     '웩!' 하고 무엇인가를 토해 냈다.

 
     "으왁!"

 
     비명이 터졌다. 군웅들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라마승들의 거

     대한 손이 노구룡의 전신을 강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아―!"

 
     괴성이 울렸다. 군웅들은 눈을 떴다.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

     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의당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어야 할 노구룡은  멀쩡히 서 있

     고, 반대로 홍의 라마승들이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마승들의 두 팔은 부자연스럽게 축 늘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의 두 팔이  부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과 온몸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피는  노구룡이 토해 낸 것이었다.  그는 라마승들의 혈수인이

     전개되자 갑자기 온몸의 혈관이 짓눌리면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끓

     어올랐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증폭되면서 임독양맥을 뚫고 백회혈로 올라갔

     다. 동시에 가슴에  답답하게 맺혔던 어혈(瘀血)이 갑자기 목구멍

     을 통해  토해져 나왔다. 그 피를  고스란히 라마승들이 뒤집어써 버렸다.
 
     바로 그때 라마승들의 혈수인이 그의 몸에 떨어졌다. 순간 체내에

     들끓고 있던 잠력(潛力)이  폭발했다. 그 바람에 라마승들의 팔이

     뒤로 꺾여 버린 것이다.
 

     "끄으으......."

 
     라마승들은 비틀거리며 괴성을  발했다. 문득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

     았다.


     이렇게 되자 한천은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갑자기 그는

     두 팔을 내저으며 고함쳤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쳐라!"

 
     철기대는 흠칫했다. 그러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와아!"
 

     "쳐라!"
 

     철기대는 일제히 군웅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철기대

     가 동시에 공격을  펼치자, 군웅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비명을 지르

     며 쓰러져 갔다.

     한편 노구룡은 여전히 멍청히 서 있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체

     내에서 일어났던 기현상에 대해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기실 알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해남도의 한 동굴에서 만

     년석척의 내단을 복용한 적이 있었다. 그 내단은 완전히 용해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마불사 라마승들의 공격을 받자 체내의

     잠력이 격발되면서 급격히 녹아 들어갔다. 그로 인해 폭발적인 반

     탄력이 일어나 라마승들의 공격을 되돌려 보낸 것이다.

 
     "아악!"

 
     뾰족한 여인의 비명에 노구룡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주자경이 철기대의 창을 막느라 비틀대고 있었다. 중심을 잃

     고 뒤로 물러서던 그녀의 뒤로 또 하나의 창이 떨어졌다.


     노구룡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일월도를 발

     견하고 발끝으로 걷어찼다.

 
     슉!

 

     일월도는 빛살처럼 날아가 막  창으로 주자경의 등을 찌르려던 철

     기대 무사의 미간에 박혔다.

 
     "크아악!"
 

     노구룡은 신형을 날려  철기대의 중앙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때였다.

 
     번쩍!

 

     우르르르릉―!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며 뇌성이 울렸다. 곧

     이어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노구룡은 칼을 휘저었다.

 
     휘리리릭!
 

     사방으로 도광이 번쩍번쩍 일어나자 한꺼번에 대여섯 명의 철기대

     가 마상에서 떨어졌다.  그들은 비록 철갑으로 중무장하고 있었으

     나, 정확히 목이 잘려 황천으로 직행했다.

 
     그러나 워낙 수효가 많았다. 비록 노구룡이 분전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군웅들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노구룡은 문득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먹구름은 더욱 짙어졌고, 폭

     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멀리서 뇌성이 연달아 울렸다. 노구룡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공격

     을 멈추더니  칼을 번쩍 들어올렸다.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칼을

     세우고 있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저놈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 광경에 한천은 어리둥절했다. 그때였다.

 
     번쩍!

 
     암천에서 뇌전이 쳤다.  뇌전은 정확히 노구룡의 칼끝으로 떨어졌다.

 
     짜자자자작!

 
     가공할 일이 일어났다.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칼을 중심으로 그의

     전신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어났다. 노구룡은 칼을 휘둘렀다.

 
     "이야아아아아!"

 
     일성 대갈이 터진 순간 사방으로 시퍼런 뇌전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크아아아악!"

 
     철기대 사이로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아아! 놀랍게도 수백 명의 철기대가 시퍼런 불꽃에 휩싸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철기마도 온통 불꽃에 휩싸여 삽시간에 시커

     멓게 타 버리고 말았다.

 
     "......!"

 
     군웅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금시초문(今時初聞)! 아니,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공할 일이 벌

     어진 것이다.

 
     수백 명의 철기대는 완전히 숯이 돼 버린 채 나뒹굴었다.

 
     "으으......."
 

     한천은 공포에 질려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편 노구룡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미처 몰랐는지, 넋 나간 표

     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뇌령검(雷靈劍)....... 뇌진자의 뇌령일식이다!"

 
     뇌진자(雷震子)!

 
     뇌령일식(雷靈一式)!

     그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백 년 이래 무림사상 최고의 고수라는

     뇌진자의 전설적인 검법이 아닌가?

 
     오늘날까지 뇌령일식을 익힌 자는  20년 전의 노팔룡 대협 이후로

     는 아무도 없었다. 그 뇌령일식이 또 다시 무림에 등장한 것이다.

 
     "그, 그럼 저놈....... 아니, 저 아이가......."

 
     피를 흠뻑 뒤집어쓴 복마신니가  노구룡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비로소 느껴지는 바가 있는 듯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미타불! 그렇구나  노구룡이란 이름이 어쩐지  귀에 익다 했더

     니....... 이제 보니 노팔룡 대협의 후인이었구나!"


     그 말에 주위에 있는  군웅들, 특히 구파일방의 수뇌들 모두의 안

     색이 변하며 부르짖었다.

 
     "저분이 노팔룡 대협의 후인이란 말이오?"

 
     "오오, 어쩐지......!"
 

     "노팔룡 대협의 후인이 나타나셨구려!"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다. 지난날 무림을 환난에서

     구해 낸 영웅 노팔룡. 풍진 속에 사라져 버린 전설의 기인이 이제

     그 후인을 무림에 내보낸 것이다. 이 사실은 군웅들을 흥분시키기

     에 충분했다.

     한편 노구룡은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아버님께서 신분을 밝히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는 대청 쪽을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한천의 모습

     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주자경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공주, 한천이란 자를 잡아오겠소."

 
     "잠깐만요......."
 

     주자경은 다급히 그를 불렀으나  노구룡은 이미 신형을 날린 뒤였

     다. 그는 냅다 줄행랑을  놓아 버렸다. 표면적으로는 한천을 추적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기실은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내

     심이었다.

 
     "노 대협, 노 대협!"
 

     등 뒤에서 주자경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노구룡은 못들은 척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내달렸다.


     평화롭기만 하던 무림에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전 무림을 경동시킨 첫번째  사건은 무산 요대곡에서 벌어진 사해

     방의 개파대전에 관한 소식이었다. 철기방과 대륜표국이 사해방으

     로 통합하면서 무림의  패주(覇主)로 군림하겠다는 선언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해방의  개파대전에 참여했던 구파일방의 인물들과

     각계의 군웅들이 그곳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전달하면서 무림은 온

     통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 버렸다.

     당시 요대곡에서 군웅들이  전멸될 위기를 건져 낸 일대구성(一代

     求星)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20년 전에 무림을 누

     란의 위기에서 건져 낸 영웅인 노팔룡 대협의 후인이라고 했다.

     소문은 소문을 낳는다. 또한  소문이 꼬리를 물게 되면 과장이 보

     태지게 마련이다.

 

     '그분의 존함은 노구룡이다!'

     '노구룡 대협은 가히 신인(神人)과도  같은 분으로, 단 일도로 천

     명의 철기대를 몰살시켰다!'
 

     '노구룡 대협은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모는 조화를 부리며, 뇌정

     지기(雷霆之氣)를 모아 단 일도에 사해방도를 전멸시켰다!'

 
     '노구룡 대협은  천하 제일의 미남자(美男子)이며,  키는 구 척이

     넘고, 눈빛은 전광과도 같고, 음성은 천둥과도 같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전

     중원으로 퍼졌으며, 노구룡이란 이름은 세 살 먹은 아이들도 알게

     되었다.

 
     노구룡!

 
     이제 그는 전 무림의 희망이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선망

     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노구룡의 소식은 그후로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머리만 보이고 꼬리를 보이지 않는 신룡(神龍)인 양 무산 요

     대곡 사건 이후로는 행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과벽(大戈壁).

 
     중원의 서북쪽 만리장성을  넘으면 끝없는 사막 지대가 펼쳐진다.

     그 사막을 한없이 가다 보면 대과벽이 나온다.

 
     휘류류류류.......

     사풍(砂風)이 분다. 끝없는 모래 언덕을 휩쓸며 부는 바람에는 잘

     디잔 모래알들이 섞여 있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모래  바람은 평소에는 잔잔하게 불지만, 이따

     금 광풍을 일으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시무시한 죽음의 광사

     풍(狂砂風)으로 화하곤 한다.

 
     하룻밤 사이에 수십 개의 사구(砂丘)를 만드는가 하면, 말과 사람

     은 물론, 사물을  온통 빨아올리는 용권풍(龍卷風)이란 죽음의 회

     오리바람까지 일으키는 것이다.

 
     대과벽의 한 곳.

 
     스스스스스.......

     묘하게도 스산한 음향이 울리고 있다. 자세히 보면 모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거대한 강물처럼 모래가 흐

     르고 있는 곳. 이른바 유사(流砂)다.

 
     유사에 잘못  발을 딛으면 무엇이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유사는 그 폭이 넓을  뿐더러, 수시로 흐름이 바뀌어 웬만큼 노련

     한 사람이 아니면 유사 지대를 통과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섬(島)?
 

     아니다. 사막 한가운데 섬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유사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는 한가운데에 마치  섬처럼 존재하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다. 이른바 오아시스로 불리는 곳

     으로,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이곳은 사막에서 이따금 만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아시스 한가

     운데에는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이고 명경지수처럼 맑은 호수가 있

     고, 호수 한 켠에는 백색 대리석으로 축조된 궁(宮)이 있다.

 
     이 궁의 유래를  아는 이는 없다. 경험  많은 대상들 중에는 간혹

     이 궁을 먼 발치에 보았다는 이도 있기는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

     면 이 궁이 생긴 것은 지금부터 십여 년 전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이곳은  대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거론되었으나, 그들이

     쉬어 가는 곳은 되지  못했다. 깃털조차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리는

     유사가 오아시스 주변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그곳에 접근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는데, 지금부터

     십여 년 전에 백색 대리석만으로 신비의 궁이 세워진 것이다.

 
     그 궁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사는 곳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개중 호기심 많은 대상들이 궁의 정체를 알아 보기 위해 근

     처까지 접근해 보기는 했지만,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유사에 휩쓸려 사라졌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

     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오아시스 일대

     는 죽음의 땅으로 인식되어 자연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말았다.

 

     두두두두.......
 

     문득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하나의 점이 사구 위에 나타났다. 그

     점은 오아시스를 향해 달렸다.  잠시 후 드러난 모습은 한 마리의

     흑마를 탄 얼굴이 검고 각진 흑의 중년인이었다.

      매부리코에 부리부리한 눈을 지닌 중년인은 유사가 흐르는 지역에

     서 정확히 멈추었다. 중년인은 유사 건너편의 울창한 수림을 바라

     보더니, 품속에서 짧은 철피리(鐵笛)를 꺼내 입에 대고 불었다.

 
     삐이이이익!

 
     철피리에서는 괴이한 소리가 났다.  일각 후, 중년인 앞에서 유사

     가 갑자기 솟구쳤다.

 
     촤아아아!

 
     유사 위로 솟구친  것은 하나의 철판(鐵板)이었다. 중년인은 말을

     몰아 철판 위로 올라섰다.  철판은 정교한 기관 장치가 되어 있는

     듯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쏴―!
 

     빠른 속도로 철판이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유사의 너비는 대략 삽

     십 장.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철판은 건너편에 무사히 당

     도했다.

 
     백색의 대전(大殿).

 
     바닥도, 천장도,  벽도 온통 백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대전이었

     다. 대전 상단부에는 태사의가  있었는데, 그곳에 한 명의 중년인

     이 앉아 있었다.

 
     중년인의 의복 역시 백색이었다. 순백의 문사의를 입은 그는 머리

     에 흰 관(冠)을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었다. 영준한 용모에 짙

     은 검미,  심유한 눈빛은 만인을 꿰뚫어보는  듯한 기품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중년인의 앞에는 흑의인이 바닥에 부복하고 있었다. 방금 전 흑마

     를 타고 도착한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냐?"

 
     중년 문사의 음성은 유현했다.

 
     "속하, 방금 장성(長成) 밖에서 중원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음, 무슨 소식이냐?"

 
     흑의인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사해방의 개파대전이 무산됐다고 합니다."

 
     "......."

 
     중년 문사의 안색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심

     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대전 안에는 무거운 침

     묵이 깔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유는?"

 
     "뜻밖의 고수가  나타나 파연(破宴)됐을 뿐더러,  칠백 명이 넘는

     철기대가 몰살당했습니다. 그 와중에 대륜표국주 야율함마저 죽었

     습니다."

     중년 문사의 검미가 부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야율함이 죽어......?"

 
     그의 안색이 비로소 변했다.

 
     "한천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다고 합니다."

 
     중년 문사는 눈을 반쯤  감았다. 반개한 그의 눈에서는 측량할 길

     없는 신비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성급했다. 중원 무림은  그리 만만하게 볼 대상이 아니

     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흑의인은 황송한 듯이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전은 성공적이

     었다고 합니다. 한데 마지막 순간에 그만......."
 

     중년 문사의 눈이 번뜩 뜨여졌다.

 
     "어떤 자기에 그 정도란 말이냐?"

 
     "보고에 의하면......, 한 자루의  도로 뇌전을 당겨 일도에 칠백

     명의 철기대를 숯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뭣이?"

 
     중년 문사는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섰다. 충격을 받은 듯 그의 백

     삼이 바람도 없는데 부르르 진동했다.

 
     "그......, 그가 나타났단 말인가?"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급히 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노팔룡이라고 하지 않더냐?"

 
     흑의인은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자는  노팔룡의 아들로,  노구룡이란 자였습니다."

 
     "......!"
 

     중년 문사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경직시켰다. 한동안

     그의 눈은 허공을 헤집었다.

 
     "노팔룡의 아들 노구룡이라고......?"

 
     문득 중년 문사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허허......,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단 말인가?"
 

     문사는 휘청거리더니 태사의에 주저앉았다.

 
     "악연(惡緣)이다. 이런 악연이 이어질 줄이야......."

 
     흑의인은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공(主公).  소주께서 계시지 않습니

     까? 감로자정수를 얻었다는  연락이 왔으니 머지않아 빙령신검(氷

     靈神劍)이 완성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뇌령일식을 두려워하지 않

     아도 될 겁니다."

 
     중년 문사는 눈을 감았다.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은 어찌 하고......."

 
     "예?"

     중년 문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있지도 않은 검법이지. 하지만 없다고 할 수도 없고....... 한데

     그 친구 정말 그것을 터득하긴 했을까?"

 
     중년 문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뇌리에 20년 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백선결(白仙缺).

 
     소림 제일의 신승 천광선사의 수제자로 장래가 촉망됐던 불세출의

     젊은 기인인 그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인생을 살 희망도 의욕도 나지 않았다.

 
     사랑도, 명예도, 자신감도  물거품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것도 비

     교하려 해도 비교할 수조차 없는 바보 같은 인간으로 인해 비롯되

     었다는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없이 비참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

     게 부끄러웠다.
 

     무엇이 부족했단 말인가? 무공? 자질? 용모? 인내심?

 
     없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바보 같은 노팔룡이란 인

     간에 비해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벽하게 패했으며, 사랑하는 여인 도운하조차 빼앗겼다. 중원 무

     림의 후기제일인(後期第一人)이란  찬란했던 명예조차  두 손으로

     바쳐야 했었다.

 
     결국 그는 중원 무림을 떠났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하염없이 북

     상하던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만리장성이었다.

 
     장성은 중원과  변방을 갈라놓고 있었다. 장성을  넘기만 하면 한

     많은 중원을 등지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장성을  넘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대했을 때 가슴속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분루(憤淚)를 삼키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을 걸어 서북쪽으로  한없이 걸어갔다. 한 발자국마다 고통의

     걸음이었고, 눈물의 걸음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사막의 도적인  대사족(大砂族)을 만나게 되었

     다. 그들은 마침  사막을 여행하던 대아국(大牙國)의 공주 아라사

     (阿羅思) 일행을 약탈하던  중이었다. 이백 명이 넘는 대사족들은

     대아국의 아라사 공주 일행을  무참히 도륙하며 광란의 축제를 벌

     이고 있었다.

 
     백선결은 그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는 분연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생의 목적도 희망도 없는 상

     태에서 대사족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대로 산화하고 싶었다. 사막의 모래알로 스러지고 싶었다. 그는

     무의식 상태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대사족의 피로 목욕을

     하다시피 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에는 이백 명의 대사족 시체가 즐비하

     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봉두난발에  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한 아수라귀의 모습으로

     하늘을 우러러 포효했다.  그리고 피로 물든 모래밭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를 따라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수행 무사들을 모두 잃은 대아국

     의 공주 아라사였다. 그녀는 한 마디 말도 없이 피의 발자국을 찍

     으며 걸어가고 있는 백선결의 뒤를 따랐다.

      백선결은 그녀를 무시했다. 그는 세상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았

     다.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여인 도운하를 잃은 지금 아무리 절세

     미녀라도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순 없었다.

 
     뜻을 잃은 영웅이기에 삶에 대한 의욕도, 야망도 없었다. 오직 이

     세상 끝까지 걸어가 대지의 끝으로 떨어져 사라지는 일몰(日沒)처

     럼 스러지고 싶을 뿐이었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멈춰요!"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백선결은 잠깐 걸음을 멈췄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멈춰요, 제발....... 더 이상 못 가겠어요!"

 
     백선결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갈 곳으로 가시오. 누가 날 따라오라고 했소?"

 
     "당신......, 당신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군요. 여기다  날 버리

     면......, 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거예요. 이렇게 무책임

     하게 버리고 가도 되나요?"


     백선결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서서히 돌아서며 말했다.

 
     "내 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사람이오. 그러니  당신을 돌 볼

     능력은 더욱 없소. 운이 좋다면 지나가는 대상을 만날 수 있을 것

     이오. 그럼......."

 
     백선결은 다시 몸을 돌렸다.

 
     "당신이 능력이 없다고요? 그럼  어떻게 그 많은 대사족들을 죽였

     죠?"
 

     "그건......."

 

     백선결은 하늘을 보았다. 모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들을 물리칠 마음이 없었소.  만일 그들이 강했다면 지금쯤 쓰

     러져 있는 사람은 내가 됐을 것이오. 당신을 구해 주기 위해서 싸

     운 것이 아니오. 어쩌면 난......, 누군가 날 죽여 주기를 원했는

     지도 모르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요?"

 
     백선결은 고개를 저었다.

 
     "관심 없소. 당신이 누구든......."

 
     "난 대아국의 공주예요."
 

     "......."


     백선결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그를 놀라게  할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날  대아국으로 데려가 주기만  하면, 당신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생각을 돌리지 않겠어요?"

 
     "후후후! 부귀영화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의 내겐 아

     무것도 필요치 않소."

 
     "다,  당신......,  정말  끝까지  이럴  거예요?  난......,  나

     는......."

 
     풀썩!
 
     무엇인가 모래밭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막 걸음을 옮기려던 백

     선결은 고개를 들었다. 북쪽 하늘이 컴컴해지고 있었다.

 
     휘류류류륭!
 

     바람이 거세졌다. 뺨에 부딪치는 바람이 따갑게 느껴졌다.
 

     '사풍이 부는군.......'

 
     그는 돌아섰다. 저만치에 대아국의 공주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

     였다. 만일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공주는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는 마음이 움직였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는 의협

     (義俠)의 기질이 남아 있었다. 그는 공주에게 다가가 그녀를 어깨

     에 둘러멨다.

 
     대아국의 공주 아라사.

 
     그녀는 백선결에게 극적으로 구해져 무사히 대아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백선결에게 또 하나의 운명을 건네준 결과를 낳게

     되었다.
 

     아라사는 백선결에게 구애했다.

     중원의 풍습과는  달리 대아국의 여인들은  활달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사막을 횡단하는 동안 백선결에게 반했고, 마침내

     노골적으로 그에게 구애하기에 이르렀다.

     백선결은 그녀의 사랑을 거절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사막처럼 메

     말라 있었던 것이다.

 
     아라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아국으로 온 후 매일 술독에 빠져

     지내는 그에게 찾아와 지칠 줄도 모르고 구애를 한 것이다.

      대아국 왕은 공주의 은인인 그에게 소궁(小宮)을 내렸고, 평생 써

     도 다 못 쓸 정도의 금은보화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원하기

     만 하면 대아국의 장군(將軍) 자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백선결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매일같이 소궁에 틀어박혀 술

     로 세월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술에  만취한 그는 정자에 큰 대자로 드러

     누워 있었다. 이국(異國)의  달빛이 황홀할 정도로 정자를 비추었다.


     '운하.......'

 
     달 속에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운하였다.

      어릴 적부터  도운하와 맺어지는 꿈을 꾸며  자란 그였다. 지금은

     남의 아내가 되어  버린 도운하의 영상은 아직도  그를 놓아 주지

     않고 있었다.
 

     "운하......."

 
     "운하가 누구죠?"

 
     문득 한 가닥 청아한 음성이 들려 왔다. 고개를 돌린 백선결의 눈

     에 한 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야가 흐릿했다.

 
     "당신은......."
 

     문득 미녀의 얼굴이 다가왔다.  백선결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전신

     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운하!"

 
     꿈에도 그리던 도운하였다. 그녀가  온 것이다. 그는 격동을 금치

     못하며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운하! 와 주었구려. 오오, 내게 와 주었소!"

 
     그날 밤.......

     달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대아국의 밤은 뜨거웠다. 취중에 도

     운하로 착각한 여인은 대아국의  공주 아라사였다. 단 한 번의 정

     사(情事)였으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백선결은 대아국의 부마(夫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

     아국의 부마이자 대장군이 되어 인근의 소국들을 정벌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대아국의 국세는 강대해지게 되었다.

      그 사이  아라사 공주는 아들을 낳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백가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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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15장 흔들리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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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갈이(丹喝爾).

 
     청해(靑海)의 동쪽에 위치한 시진으로, 비교적 물산(物産)이 풍부

     하고, 온갖 인종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곳이 교역의 중심지 역할

     을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몰려드는 사람은  주로 몽고인을 비롯한 강인(姜人), 당항

     인(黨項人), 색목인(色目人) 등으로,  그야말로 인종 전시장을 방

     불케 했다. 따라서  시장이 발달하고 객잔(客棧)과 주점이 즐비했다.

 
     단갈이의 한 객잔에 일남일녀가 들어섰다.

 
     "어서 옵....... 아이쿠! 소공자 아니십니까!"
 

     객잔의 점원은 막 들어서는  일남일녀를 보고 인사하다 말고 넙죽

     절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계산대에서 주판을 퉁기고 있던 주

     인도 안색이 변하더니, 주판을 내던지고 달려와 절을 하는 것이었

     다.

 
     "아이고,  소공자께서 납시다니.......  이거  본점의 영광입니다요!"


     백의를 입은 미청년은 검미를 살짝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조용한 방 하나를 주게."

 
     주인은 연신 허리를 굽혔다.

 
     "예, 예! 그러구 말굽쇼......."

 
     그러다 미청년의 옆에 서 있는  홍의 여인을 본 그는 눈알이 튀어

     나올 정도로 놀랐다.

 
     '세, 세상에....... 이런 미녀가 있다니......!'

 
     일남일녀는 다름 아닌 백가람과 홍의선자 희수봉이었다. 희수봉은

     타는 듯이 붉은 홍의를 몸에 찰싹 붙게 입고 있어 터질 듯이 풍만

     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 차림이었다.

     그동안 희수봉은 백가람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실 항주에 홍화루란 기원을 열었던 그

     녀는 녹림18채의 총표파자 연자추와  함께 비밀 조직에 속해 있었

     다. 그 조직에는  해상을 주름잡는 흑룡방(黑龍 )도 포함되어 있었다.

      희수봉은 본시 녹림도  출신이었으나, 그녀의 출중한 미모와 자질

     로 인해  조직에 발탁되었고, 항주의 홍화루를  맡게 되었던 것이

     다. 백가람은 바로 그녀의 소주였고, 따라서 감히 그의 명을 따르

     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희수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을 하나만 달라고?'
 

     그녀는 노구룡에게 반해  그를 쫓아다녔으나, 백가람을 만난 이후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백가람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자신의 소주인 줄을 몰랐

     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이 속해 있는 비룡천(飛龍天)의 소천주

     가 아니던가!

 
     비룡천은 3년 전 극비리에 조성되었다. 심지어 조직원들조차 비룡

     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결성되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소천주란  인물이 조직을 직접 관리한다는 것뿐

     이었다.


     그러니 희수봉이  백가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

     다. 그러나 그를 따라 다니는  동안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녀

     의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비룡천을 배신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백가람

     은 그 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다.

 
     '혹시 소천주께서 나를......?'

 
     점원의 안내를  받아 객잔의 후원으로  들어서던 희수봉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후원에서도 가장 큰 별실로 안내되었다. 점원이

     물러가고 방안에 단 둘이 남게  되자 희수봉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앉으시오, 희 소저."

 
     "아, 네......."

 
     희수봉은 더욱 얼굴이 빨개져 어정쩡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방

     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거실이고, 안쪽으로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둔 침실이 있었다.

     백가람은 창 밖의 화원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희수봉은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젊은 남녀가 객

     잔의 한 방에 있으니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희 소저."

 
     "네?"

 
     희수봉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순간 전신에 전류가 관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백가람의 서늘한 두  눈이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소?"

 
     "네? 무, 물어 보세요, 소주."
 

     "아, 이건 사적인 질문이니 마음을 놓으시오."

 
     "네......."

     백가람은 찻잔에 차를 따른 후 그녀 앞으로 밀었다.

 
     "차를 들며 얘기합시다."

 
     "네에......."

 
     차를 한 모금 마셨으나 맛이 단지 쓴지 도무지 감각이 없었다. 희

     수봉은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판결을  기다리는 수인의 입장이었

     다.

 
     "그자의 어디가 그리 매력이 있는 것이오?"

 
     "네......? 그, 그자라면?"

     "노구룡이란 자 말이오."
 

     "......!"
 

     희수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백가람은 정색을 했다.

 
     "희 소저도 그렇고 그  군약명이란 여인도 마찬가지였소. 내가 보

     기에는  그자의  뛰어난  점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데....... 대체  무슨 매력이 당신 같은  미인들의 관심을 사는지

     무척 궁금하오."
 

     "그, 그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노구룡의 매력? 그것은 말로 표

     현할 수 있는  것이 절대 못 되는  것이다. 그의 곁에만 다가가면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그와 밤새도록 나누었던 그 황홀함을

     어찌 입 밖으로 낼 수 있단 말인가?


     희수봉이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백가람은 몸을 일으켜 창

     가로 다가갔다. 화원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쓸

     쓸해 보였다.
 

     "난 어렸을 때부터 줄곧 무공만 연마하며 세월을 다 보내 버렸소.

     그래서 인생의 달콤한 낙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소."

     "......."

 
     희수봉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본국을 떠나 중원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소. 비룡천을 조직하느

     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풍류를  즐기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소.

     그런데 그자를 만난 후 내 마음에 변화가 생겼소."
 

     백가람은 문득 몸을 돌렸다. 그는 서늘한 눈으로 희수봉을 바라보

     며 말했다.

 
     "특히 희 소저 같은 미인이 그 작자에게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내

     인생의 어떤 한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 그자는

     인생을 희희낙락하며 사는데 반해, 나란 사람은 어째서 늘 혼자인

     지 회의하게 되었소."


     "소주님......."

 
     희수봉은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흔

     들렸다.

     그녀는 백가람에 대한 소문을 벌써부터 듣고 있었다. 그가 절세의

     미남이면서도 여인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

     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언젠

     가 그를 유혹해 보리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 전에 노구룡을  만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벌써 백가람의

     품속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몰랐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황혼 빛이 방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들었다.

 
     "내겐 야망이 있소. 그래서 여인에 관한 생각은 내 가슴속에서 쫓

     아내었소. 하지만 지금은......."

 
     백가람이 돌아섰다.
 

     '......!'

 
     희수봉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백가람의 눈빛이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어찌 된 셈

     인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백가람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나는 한가하게  여인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소. 그자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도 못하오.  그렇다고 전혀 매력이 없다고는 생각하

     지 않소."
 

     백가람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학처럼 긴 목덜미를 간질이기 시

     작했다.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그녀는 온몸이 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안 돼!'
 

     그녀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그녀의 세포는 아우성을

     쳤다.


     "처음 볼 때부터 그대가  마음에 들었소. 일찍이 비룡천에서 홍의

     선자야말로 절세 미인이란 말을 들었지만, 볼 기회가 없었지."

      백가람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김이 느껴지자 희수봉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에 온몸이 쩌릿쩌릿해졌다.

 
     "억지로 내 여자로 만들 생각은 없소. 그대가 자발적으로 내 여자

     가 되어 준다면 좋겠소."

 
     "흡!"

 
     백가람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뜨거운 입김이 닿자 그

     녀는 온몸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백가람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을 물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한 사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늘 실없이 웃

     는 사내 노구룡이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가람의 손가락이 소리 없이 퉁겨졌다.

      순간 희수봉은 코끝에 한  가닥 향기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

     은 어디선가  맡아 본 듯한 향기였다.  무슨 냄새일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전신이 근질근질해져 왔다.

      '이건.......'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방중술에 달통한 그녀였다.  세간에는 쾌락을 증진시키는 미약(媚

     藥)이 무수히 나돌고 있었다. 그 중 녹림도나 흑도인들이 자주 사

     용하는 것에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켜 쾌락에 몸부림치게 만드는

     분말 형태의 미약이 있었다.  방금 그녀가 맡은 것은 바로 그것들

     중 하나인 연향분(戀香粉)이란 미약이었다.

     희수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

     지만 이내 두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침실로 가겠소."


     백가람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희수봉은 온몸을 비틀어 대고 있었다.

      침상 위를 뒹구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옷은 반 이

     상 벗겨져 나가 있었고, 가슴을 풀어헤친 채 터질 듯이 풍만한 가

     슴을 쥐어짜듯 어루만지는 모습은  사내의 혼을 빼고도 남음이 있

     는 모습이었다.

     "제발......, 소주......."

 
     희수봉은 눈자위가 반 이상  돌아간 채 애원했다. 침상 앞에는 백

     가람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얄미운 모습이었다. 희수봉은 연향분에 중독되어 온몸이 불덩이처

     럼 달아오른 채 보채었다.

     하지만 백가람은 그녀를 지켜  보기만 할 뿐이었다. 대체 그의 목

     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흐윽! 제발......."

 
     희수봉은 마침내 옷을 찢기 시작했다. 홍의가 찢겨 나가며 눈부신

     피부가 드러났다.

 
     마침내 그녀는  전라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젖가슴을 움켜쥔 채

     허리를 뒤트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요염했다.

 
     "......."

 
     백가람의 냉정하던 눈동자에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몸을 일

     으켜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붓이 쥐어져 있

     었다.  그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소주......."
 
     희수봉은 애타게 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붓이 슬쩍 움직이자

     그녀는 힘없이 침상에 쓰러졌다.

     혈도가 찍힌 그녀는 의혹에 찬 눈으로 백가람을 올려다보았다. 백

     가람의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결심한  것이 있지. 천하의 사대  미녀를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것이야.  후후! 과거  부친께서는 실패했지만,  난 달라."

 
     슥!

 

     붓이 움직였다. 붓끝의 부드러운 털이 희수봉의 유실을 슬슬 문질

     렀다.

     "학......."

 
     희수봉은 신음을 발했다. 가뜩이나 미약에 취한 상태인데, 붓끝이

     성감대를 자극하니 어찌 견딘단 말인가?

 
     "사대 미녀를 내  여자로 만드는 것은 선대에  못 이룬 한을 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남자로서의 야망이기도 하지."

 
     슥슥!
 

     붓이 계속 움직였다. 유실이  점점 딱딱해져 갔다. 여체는 허리를

     비틀고 있었다. 풍만한 젖가슴이 파도를 타듯 아래위로 흔들렸다.

     붓끝을 뗄라 치면 허리를 들어 따라붙었고, 붓끝을 움직이면 허리

     가 춤추듯 움직였다.

     "사대 미녀 중 한 명인 그대가 비룡천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았을 때, 본  공자는 한 명은 쉽게 얻을  줄 알았지.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작자가 먼저였어."
 

     붓이 아래로 내려갔다.  유지(乳脂)로 뭉쳐진 듯한 아랫배에서 원

     을 그리며 움직이던 붓이 배꼽에 이르러 지긋이 눌러졌다.

 
     "흑! 으흑!"

 
     희수봉은 오열에 가까운  신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대리

     석 같은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벌어졌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붓은 그녀의 배꼽을  집요하게 희롱하다 다시 아래로 미끌어졌다.

     붓보다 부드러운 체모를 슬며시  스쳐 지나간 붓은 그녀의 허벅지

     위를 오르내렸다. 격렬하게 몸을 떨어 대던 희수봉의 동공이 사라

     지며 흰자위가 드러났다.
 

     "난 결심했지. 네 몸과 마음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본 공자가 그자보다 부족한  것이 뭐가 있다고 뒤진단 말인가? 후

     후후, 그래서......."

 
     붓이 멈추었다. 파도처럼  출렁이던 여체가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다.

 
     백가람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는 붓끝으로 그녀의 혈도를 찍었다.
 
     "으음......."

     신음과 함께 희수봉의  눈까풀이 열렸다. 그녀의 눈에는 안타까움

     과 분노가 동시에 떠올랐다.

 
     "오늘 밤 널 정복하겠다. 그런 연후 다른 여인들도......."

 
     희수봉의 동공이  열렸다. 붓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사라졌다.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그녀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백가람은 붓을 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옷을 벗어 던진 후 침

     상 위로 올랐다.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근육질의 육체였다.
 

     "흐윽!"

 

     희수봉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혈도가 풀린 것이다. 뱀처럼

     팔과 다리로 백가람의 몸을 휘감은 채 희열에 몸을 떨어 댔다.

 
     백가람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희수봉의 둔부를 쓰다듬으며 그

     녀 스스로 성문을 열 때까지 애를 태웠다.

 
     한데......, 세상일이란 왕왕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소주님!"
 

     문득 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누구냐?"

 
     백가람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 급보입니다. 무산 요대곡에서......."

 
     백가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희수봉의 혈도를 짚은 후 침

     상에서 일어섰다.
 

     "기다려라!"

 
     백가람은 옷을 걸친  후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 그는

     뒤를 향해 손가락을 퉁겼다. 흰 분말이 희수봉의 콧속으로 들어갔

     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흑의 장한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네. 철기대가 전멸하고,  대륜표국의 국주가 사망했습니다. 그로

     인해 개파대전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으으......, 그럴 수가!"

 
     쾅!

 
     백가람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가 박살나 날아갔다.

 
     "그자가 노구룡이란 말인지?"

 
     "그렇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펼친 뇌령검법은 이십 년 전 노

     팔룡의 독문무공이라 합니다.  한데 그자의 경지는 당년의 노팔룡

     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으으......."

 
     백가람은 신음을 발했다.

     어쩐지 예감이 이상하다고 했다. 처음 노구룡을 만났을 때부터 기

     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부친의 숙적 노팔룡의 아들이었다니!

 
     "물러가라!"

 
     "넷!"

 
     흑의 장한은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곤

     사라졌다.

     백가람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신중한 위인

     이었다. 부친의 실패담을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듣고 또 들었다.

     그는 절대로 부친의 패배를 답습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놈의 뇌령검법이 노팔룡을 능가한다고?'

 
     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도 놈을 꺾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참아 왔다.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다. 시간이 조금 더 지연된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지 않은가?'
 

     '뇌령검법은 당년의 천하  제일 고수 뇌진자가 창안한 천하무적의

     검법이다. 그것을 꺾으려면 빙령신검을 완성해야 한다. 이미 만년

     한철과 감로자정수를 얻었으니, 북해(北海) 빙궁(氷宮)의 빙정(氷

     精)만 구하면 된다.'

     백가람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뿜어져 나

     오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희수봉이 들어섰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묶

     고 찢어진 홍의를 대충 걸치고 있었다.

 
     "소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백가람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수봉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말

     했다.

 
     "절 죽여 주세요."

 
     백가람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누가 널 죽이겠다고 했느냐?"

 
     "전 이미 마음에  둔 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소주의 명이라 해도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절 죽여 주세요."

 
     희수봉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백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붓 한 자루에

     온몸을 뒤틀어 대며  환희에 몸부림치던 여인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그의 자존심에 못을 박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작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기에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

     냐?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라도 대 보아라.'

      한참 후에야 그가 한 말이었다. 희수봉은 고개를 숙였다.

 
     "말씀 드릴 수 없어요. 그저 절 죽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후후후....... 수봉, 너는 비룡천의 수하다. 비룡천의 수하가 항

     명하면 어떤 조치가 내려지는지를 모른단 말이냐?"

 
     "알고 있사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사지를 자르고, 유방을 도려내고, 혀와 눈알을 뽑아도 말이냐?"

 
     "......!"

 
     희수봉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 잔인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심을 굳힌 듯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녀도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

     릅니다. 소주 뜻대로 하옵소서."

 
     "으으......."

 
     백가람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는  화를 참느라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마에는  심줄이 돋고  눈알이 벌겋게 충혈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물러가라! 꼴도 보기 싫다!"

 
     "그럼......."

     희수봉은 고개를 숙인 후 물러났다.

      백가람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뇌리

     에는 노구룡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바보 같은 놈

     이라고만 느꼈는데, 시시각각 그의 존재가 커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꺾어  버리고 싶지만, 아버님의  실패를 답습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뭘 더  망설이는가? 가람아, 가람아! 군자의 복수

     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느냐?'

 
     그는 번쩍 눈을 떴다.

 
     "빙궁으로 간다!"

 
     "아아! 대체 그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흥, 한천인지 뭔지 하는 놈을 쫓아간

     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건 핑계인지도 몰라요. 그이는 일부러 절 떠난 거예요."

     "자경아! 그놈이 그렇게도 좋단 말이냐? 넌 엄연한 일국의 공주인

     데, 그 따위 불한당 같은 놈이 뭐가 그리 좋다는 거냐?"

 
     "사부님, 그런 말씀 마세요. 사부님도 똑똑히 보았잖아요? 그분의

     그 놀라운 무위(武威)를.......  겉으로는 바보인 척하지만, 그분

     이야말로 전설적인 노팔룡 대협의 전인이니, 저 같은 것과 비교나

     할 수 있겠어요?"
 

     "자경아?"
 

     복마신니는 걸음을 멈추며 놀란 듯 돌아섰다. 그녀의 뒤를 힘없이

     따라오던 주자경도 어쩔 수  없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

     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너......, 그놈을 사랑하는 게냐?'


     "모, 몰라요. 흑......."

 
     주자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무산 요대곡을 떠난 것은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노구룡의 이름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사해방을 격파시킨 후 노구

     룡은 일약 무림의 대영웅으로 떠오른 것이다.

      주자경은 그날 이후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노구룡을 찾아 헤맸

     다. 복마신니가 돌아가자고 수없이 말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쯧쯧......, 아서라. 사랑은  고해이거늘, 어째서 스스로 빠지려

     는 게냐?"

 
     복마신니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주자경은 멍하니 뭉게구름

     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뭉싯거리며 움직이더니 한 사나이의 얼굴

     로 화했다.

 
     "구룡......."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다.

 
     그때였다.

 
     "흠흠......, 이게 무슨 냄새지?"

 
     앞서 가던 복마신니가 코를 킁킁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마침 배가 고픈 터라 복마신니

     의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미타불!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구나. 자경아, 인근에 민

     가가 있나 보다. 어서 가 보자!"

 
     그 말에 주자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긴 첩첩산중이에요, 사부님. 민가가 있을 리가 있나요?"
 

     "민가가 없다면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난단 말이냐? 어쩌면 사냥꾼

     들의 움막이라도 있겠지.  아무튼 민생고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

     느냐?"
 

     "사부님,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죠. 이 냄샌 고기 굽는 냄새잖

     아요? 불가인으로서 가릴 건 가려야지요?"

 
     복마신니는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얘야, 불가인은 사람이  아니냐? 옛적에 한 고승께서는 한겨울에

     부처님 목상을 도끼로 패  장작으로 쓴 적도 있단다. 모름지기 불

     법이란 것도 알고  보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겠느냐? 자,

     잔말 말고 어서 가 보자."

 
     휙!

 
     복마신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신형을 날려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갔다. 주자경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

     설레 젓다가 마지못한 듯 신형을 날려 쫓아갔다.

      움막 주위에는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늑대,

     곰, 여우, 승냥이, 오소리를  비롯, 맹금류인 독수리가 하늘을 빙

     빙 맴돌고 있는가 하면, 개미떼들이 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평소라면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릴 놈들이 움막

     을 둘러싼 채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휙!

 
     무엇인가 날아와 바닥에 떨어졌다.

 
     크아앙! 크워웍!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움막에서 날아온 것은 커다란 멧돼지 통구

     이였다. 늑대와 곰, 여우 등이 다투어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온통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것도 아니야.  너무 짜단 말이야. 게다가  너무 익었어! 아아!

     난 언제나 사부님의 약선  요리법을 통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

     다 어느 천 년에 천하  사대 진미를 만든단 말인가? 구룡아, 구룡

     아! 넌 정말 석두야!"

 
     휙! 휙!

 
     움막 안에서 통닭, 나물  요리, 물고기 요리, 병전, 회무침, 오리

     찜 따위의 진귀한  음식들이 날아왔다. 그때마다 짐승들은 앞다투

     어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난리통을 이루었다.

 
     그때였다.
 
     숲에서 복마신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움막을 에워싸고 먹이를 다투는  짐승들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인영이 번뜩이더니 주자경이 떨어져 내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요?"

 
     "아미타불....... 보고도  모르느냐? 네가  밤낮으로 잊지 못하는

     그 바보 주방장이 요리  실습을 하느라 짐승들을 온통 불러들이지

     않았느......."
 

     복마신니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의 눈이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

     다. 먹음직스럽기 그지없는  돼지 뒷다리 구이가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휘익!

 
     그 순간 허공을 맴돌던 독수리가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독수리

     가 날카로운 발톱을 뻗으며 돼지 뒷다리를 낚아채려는 순간!

 
     "어딜! 빈니의 주린 배부터 채워야겠다!"

 
     허공으로 인영이 전광처럼  날아갔다. 막 돼지 뒷다리를 움켜쥐려

     던 독수리는 '카악!' 하는 괴성을 발하더니 부리로 인영의 머리를

     쪼았다.
 

     "아미타불! 아서라, 미물아! 만물의 영장에게 양보하거라."

 
     펑!

 
     폭음과 함께 독수리는 괴장에 한 대 얻어맞고는 비명을 지르며 저

     만치 쫓겨나  버렸다. 인영은 허공에서 돼지  뒷다리를 잡아챈 후

     유유히 내려섰다.

      복마신니였다. 그녀는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돼지 뒷다리를 덥석

     베어 물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히야!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머리 깎은 후 처음이네!"
 

     한편 주자경은 온통 희열에 찬 표정으로 움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움막의 주방에서 들려  오는 노구룡의 음성을 황홀한 듯이

     듣고 있었다.

 
     "아니야....... 이것도 뭔가 빠진 듯한데....... 쯧쯧, 오늘은 최

     악이군.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니........"

 
     "노 대협!"
 

     마침내 주자경은 환희에 찬 외침을 발하며 교구를 날렸다.

 

 
     "헤헤......, 그게 말이오,  천하 제일의 요리술을 익히려면 아무

     래도 천하를 방랑해야 하는지라....... 미안하게 됐소."

      노구룡은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해했다.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로 간다는  말 한 마디쯤은

     하고 떠나야 할 것 아니냐?  아이구, 이런 멍충이 같은 놈이 뭐가

     좋다고 자경이 넌 애가 닳아 안달이냐?"

 
     한껏 포식을 한 뒤라 복마신니의 험구(險口)는 한이 없을 듯했다.

      노구룡은 주방 한쪽에서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주자경을 힐끗 보

     며 쓴 입맛을 다셨다.

     기실 그는 사해방 개파대전 이후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강호

     에 나온 후로는 온통 여인들에게 휘말려 이렇다 하게 요리 수업을

     할 시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작 한 달여 만에 다시 발목을 잡히고 만 것이다. 

     "그래, 네놈의 그 잘난 요리술은 진전이 있었느냐?"

 
     노구룡은 주방 안을 가리켰다.

 
     "보다시피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했소. 열흘씩이나 이곳에 머무르

     며 수련했지만......,  역시 약선 사부님에 비하면  난 아직 멀었소."

 
     주방 안에는  요리 재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각종 요리

     기구까지 빠짐없이 갖춰진 것이  대형 반점의 주방 풍경이나 진배 없었다.
 
     "끌끌, 네놈처럼 어이없는 놈은  처음이다. 아, 지금 강호에서 어

     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나 아느냐?"


     노구룡은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소?"

 
     "에구, 이 한심한 화상아!  대체 노팔룡 대협께서 어쩌다 너 같은

     자식을 두었는지, 속깨나 터지겠구나."

 
     노구룡은 움찔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아버님의 속이 터지다니......?"

 
     보다 못한 주자경이 나섰다.
 

     "사해방 사건  이후로 강호에는 노 대협의  위명이 쟁쟁하게 울려

     퍼졌어요. 게다가  사해방의 개파대전이  무산되면서 사해방 배후

     세력의 일부가 드러났고....... 그들이 머지않아 대대적인 공세를

     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요.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노 대협

     께서 전면으로 나서서 무림의  위기를 타개해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노구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해방 배후 세력이라니? 그건 또 뭐요?"

 
     "철기방의 한천이란 자는 본래 사천 당문의 인물이었잖아요? 그런

     그가 자신의 가문을 멸절시킨 이면에는 분명 배경이 있을 거예요.

     또한 그가 대륜표국과 손을 잡은 것만 봐도 조직적으로 중원 무림

     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엿보여요. 중원의 원로들은 한천이란 자도

     누군가의 하수인일  것이란 얘기들을 해요. 어쩌면  이십 년 전의

     그 사건과  관계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도  하고 있어

     요."

 
     "이십 년 전 그 사건?"
 

     "노 대협의 부친이신  노팔룡 대협께서 금륜맹을 물리치셨잖아요?

     혹 그들의 잔여 세력이 나선 게 아닌가 의심하는 거예요."
 

     "아! 난 또......."
 

     노구룡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점이라면 걱정할 것 없소이다."

 
     "네? 무슨......?"

 
     "그야 아버님께서 나서기만 하면 깨끗이 처리될 게 아니겠소?"

 
     주자경은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하기야 말인즉 틀

     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태평하기 짝이 없는 노구룡의 반

     응에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정말 바보란 말인가? 아니면 바보를 가장한 현자일까?'

 
     그것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밤이었다.

 
     숲 속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온통 별들의 차지였다. 그믐밤이라

     사위가 어두워야 정상이겠으나, 보석을 흩어 놓은 듯 휘황하게 빛

     나는 별빛만으로도 숲 속은 황홀한 빛으로 둘러싸였다.
 

     "무슨 생각을 해요?"


     주자경은 바위 위에 무릎을 안은 채 앉아 있었다. 노구룡은 큰 대

     자로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소."

 
     "작은어머님이라면......?"

      "그분은 고결하신 분이오. 늘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기품 있는

     태도로 변함없이 날 사랑해 주셨소. 하지만 몸이 약하셔서 음식을

     제대로 못  드실 때가 많소. 그래서  난 어려서부터 작은어머님이

     맛있는 음식을 드시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소."

 
     "......."

     "강호에 나왔을  때 방백이란 분을  만났소. 그분에게서 요리법을

     배웠소. 그분은  일대 고인이신 범천신승의  제자로, 천하 제일의

     요리법과 천하 제일 도법인 자비공공무한도법을 익히신 분이었소.

     그때부터 난  결심했소. 그분의 요리법을 통달하여  꼭 천하 사대

     진미를 작은 어머님이 맛보시게 해야겠다고....... 휴우우!"

 
     노구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갈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드오. 아무래도 난 자질이 없는

     인간인 것 같소."
 

     "그렇지 않아요!"
 

     주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노구룡은 그녀를 돌아다보

     았다.


     "당신은......, 당신은 할 수 있어요. 틀림없이 해 낼 수 있을 거

     예요."

 
     "그게 정말이오?"

 
     노구룡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순간 주자경은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바람이 그녀를 향해

     불었다. 바람결에  야릇한 향내가 실려  있었다. 사향(麝香) 같은

     향기였다. 그 향기를 맡는  순간 가슴이 뛰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노구룡은 상반신을 일으켜 주자경을 향해 기울였다.

 
     "정말 내가 해 낼 수 있겠소?"
 

     "무......, 물론이에요. 으음!"

 
     주자경은 신음을  흘렸다. 가슴이 마구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왠지 온몸이  근질근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나도......, 할 수 있어요."

 
     "응! 뭘 말이오?"

 
     "다, 당신과....... 흐응."
 

     주자경은 머릿속이 마비되는 듯한 야릇한 쾌감을 느끼며 노구룡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노구룡은 눈을 크게 떴다.

 
     주자경은 눈을 꽉 감고  있었다. 별빛 아래 뜨겁게 달아오른 여인

     의 얼굴이 열기를  발산했다. 오똑한 코에서는 새근거리는 숨결이

     느껴졌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앵두 입술은 약간 벌어진 채 그

     사이로 희고 깨끗한 치아가 살짝 보였다.

 
     "정말 할 수 있소?"
 

     "으......, 응."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슨  뜻으로 주자경은 대답한 걸

     까?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지면

     서 해답이 풀렸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들

     은 입술을 뜨겁게 부딪쳤다. 노구룡의 혀가 주자경의 입술 사이로

     먼저 파고  들어갔고,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치열이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다.

 
     혀와 혀가 만나 춤을 추었다.  봉황의 춤이랄까? 암수 한 쌍의 봉

     황이 서로의 화려한 날개를 활짝 벌린 채 원앙의 춤을 추듯 두 사

     람의 혀와 혀가 얽혔다.

 
     "아아......."
 

     노구룡은 백단산에서 산록의 향낭을  삼킨 적이 있다. 그 이후 그

     의 몸에서는 사향 냄새가 났다.

 
     사슴의 향낭에 일종의 최음  효과가 있다는 것은 민방에서 전래되

     는 상식이다.  한데 노구룡은 산록의 향낭을  통째로 삼켜 체내에

     그 향기가 스며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그의 곁에 다가간 여인들

     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자세가 몇 번 바뀌는 사이에 주자경의 옷이 끌러져 나갔다.

      노구룡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수밀도  같은 젖가슴을 주물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작은 유실을  간질였고, 주자경은 온몸을

     비틀며 신음 소리를 냈다.

     마침내 노구룡의 손이 그녀의 치마를 벗겨 버렸다. 미끈한 허벅지

     가 별빛 아래 눈부시게 떠올랐다. 그는 입술로 대리석처럼 매끄러

     운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갔다.

 
     "아아......."
 

     주자경은 신음을 높이며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녀의 손이 노구

     룡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온몸의 혈관이 뜨겁게 부풀었고, 미친

     듯이 뜨거운 피가 흘렀다.
 

     그때였다.

 
     "아미타불!"
 

     벼락 같은 불호성이 두 사람의 뇌리를 강타했다.

     "어머나!"

 
     "......!"
 

     두 사람은 후닥닥 떨어졌다.  주자경은 자신의 반나가 된 것을 뒤

     늦게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가리기에 바빴다.

 
     "험! 험......."

 
     노구룡은 연신 헛기침을 발하며 돌아앉았다. 저만치 숲 속으로 사

     라지는 복마신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음날 아침.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새벽부터 승강이가 벌어졌다. 주자경이 노구룡을 따라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반면 노구룡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황상께 드릴 보약도 해 드렸고, 사해방도 해산시키지 않았소? 그

     러니 더 이상 공주와 함께 있을 이유가 없지 않소?"

 
     주자경은 눈을 상큼 떴다.

 
     "그게 이유예요?"

 
     노구룡은 머리를 긁적였다.

 
     "게다가 난 할 일이 있소. 아무래도 공주와 함께 있으면 불편하단

     말이오."

 
     "뭐가 불편하단 말인가요?"

 
     "그건 음....... 공주는 고귀한  신분이라 험난한 강호 생활에 적

     응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또....... 아무튼 불편해서  안 되겠소."

 
     "흥! 그건 이유가  안 돼요. 난 어차피  황궁에서 나온 몸이에요.

     일반 백성과 똑같이 고생하며 강호  생활을 할 각오가 돼 있단 말

     이에요. 분명히 말해요. 내가 싫은 거죠?"

 
     주자경은 허리춤에 두 팔을 척 걸치고는 따지듯이 물었다. 곁에서

     보는 복마신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예 외면을 하고 있었다.

      노구룡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주자경과 함께 행동한다는 것

     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여자인 데다 사사건건 그의

     행동에 걸리적거릴 게 아닌가?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렇소. 사실 난 공주가 싫소."

 
     "뭐, 뭐라구요?"

 
     주자경은 충격을 받았다. 자존심이 일격에 무너져 버린 그녀는 그

     만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지

     만, 황실에서 곱게만 자란 그녀에게 이런 모욕은 치명적이었다.

 
     "흐, 흐흥! 그렇군요. 그래요, 결국 당신이란 사람은......."

 
     그녀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다. 급기야 주자경은 몸을 홱 돌려

     버리고 말았다.
 

     "가요, 가! 누가  당신 같은 바보가 좋아서 그런  줄 알아? 가 버

     려! 어서 가 버리라고!"
 

     "그럼 이만 가겠소."

 
     노구룡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자경

     은 몸을 돌린 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편 복마신니는 주자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 복마신니는 한숨을 푹 쉬더니 부드러

     운 음성으로 말했다.
 

     "자경아, 어서 그를 따라가거라."

 
     "싫어요! 사부님, 그는 날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따라간단

     말이에요?"


     "자경아,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주자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복마신니를 바라보았다. 복마신니는 탄

     식을 발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늙은이가 왜 불가에 귀의했는지 아느냐? 모두가 다 젊은 날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란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인해 이렇게 평

     생을 후회하며 살게 됐단다.  제발 너만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았

     으면 좋겠구나."
 

     주자경의 얼굴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날......."

     "바보 같은 애야, 그럼 노력해서  널 좋아하게 만들면 될 게 아니

     냐? 중요한 건 네 마음이란다.  그가 정말 좋다면 어떤 희생을 치

     르더라도 네 사람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 남녀간에 중요

     한 건 자존심이 아니라 진실이니라."

 
     "사부님......."
 

     주자경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녀는 감동을 받은 듯 한동

     안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사부님의 깨우침에 경아, 감사드려요."

 

     복마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쫓아가라.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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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16장 빙하선자(氷河仙子)와 빙정(氷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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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산(泰山).
 

     중원오악(中原五嶽) 중 동악(東岳)에  해당되는 태산은 성지로 널

     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평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산으로 오르

     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유난히 많은 무림인들이 태산으로 향했다. 그

     것은 태산 관일봉(觀日峰)  중턱에 있는 청운관(靑雲館)에 무림의

     기인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 중원 무림을  위기에서 구해 내고 불세의 영웅 칭호

     를 받았던 노팔룡  대협과 그의 두 부인이  그동안의 은거를 깨고

     청운관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아무도 노팔룡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무림에

     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무림인들은 그저

     청운관 앞에서 선물을 바치고, 자신의 명패를 바치는 것으로 만족

     해야만 했다.

 
     그래도 노팔룡이  무림에 현신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무척 기뻐했

     다. 특히 사해방 사건  이후 동요하기 시작한 무림의 분위기가 그

     가 나타남으로써 어느 정도  진정되는 기미를 보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노팔룡의 현신은 무림의 양상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지난날 금륜

     맹의 중원 무림 침공을 막아 낸 그가 건재하다는 사실이 무림인들

     에게 든든한 의지가 되어 준 것이다.

      청운관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군약명이었다. 그녀는 청운관의  대문에서 명부를 받아 적고 있던

     도인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해남궁의 소궁주예요.  청운관주님을 만나러 왔으니 기별해

     주세요."

 
     중년 도인은 그 말에 얼굴을 활짝 폈다.


     "무량수불....... 이제 보니  군 소저였구려. 마침 기다리고 있었

     소이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오."

 
     "고마워요."

 
     군약명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명부에 이

     름을 적기 위해  줄을 서고 있던 무림인들은  그녀를 부러운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군약명은 곧바로 청운관주를 만났다.

 
     "백부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허허허! 이게 누구냐? 네가 약명이란 말이냐? 허허, 코흘리개 때

     와는 영 딴판이구나. 벌써  이렇게 컸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래, 군 아우는 잘 있고?"

 
     "네, 아버님께서는 건강하셔요.  백부님께 안부 전해 달라고 하셨

     답니다."
 

     "허허! 소문에 네가  중원 사화(四花)에 꼽힌다는 말은 들었다만,

     이렇게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했을 줄은 몰랐구나."

 
     청운관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청운관주는 해남궁주 군불락과는 막역한 친교를 나누는 사이

     로, 오래 전부터 의형제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군약명은 노팔룡

     부부가 청운관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한편 노팔룡은 청운관주와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이십 년 전

     강호에서 은퇴하면서 적당한 은거지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중, 동

     해의 한 섬을 발견하고 그곳을 은거지로 결정했다.

      그곳은 고작  수십여 호의 어촌이 형성된  섬으로, 좀처럼 인적이

     드문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섬이야말로 청운관

     주가 수양을 위해 자주 들르는 곳이었고, 청운관에서 관리하는 도

     장(道場)이 있는 곳이었다.

     청운관주는 노팔룡 부부가 이곳에 자리잡는 것을 물심양면으로 도

     와주며 정성을  다해 주었다. 노팔룡은 그에게  소문을 내지 않을

     것을 당부했고, 그것을 기화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이래저래 군약명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노구룡에게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한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노팔룡이 누누이 말해  왔기에 비장한(?) 각오를 품고 청운관으로

     찾아온 것이다.
 

     '흥, 먼저 그분 부모님의 환심을 사 버리면 다른 계집들이 아무리

     꼬리를 쳐도 소용없을 거야.'
 

     그녀는 청운관주에게 부탁하여 노팔룡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손

     을 써 놓았다.

 
     "백부님, 그분들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청운관주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이, 잘 아시면서 왜 그래요, 백부님."

 
     "허허허! 뭐가 말이냐?  그분들은 세외의 이인이신지라 좀처럼 외

     인을 접견하시지 않는다. 이 백부에게도 특별히 당부하셨다. 절대

     로 외인을 들이지 말라고 말이다."

 
     "백부님, 약명은 외인이 아니란 말이에요."

 
     "응? 외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잉, 전 그분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란 말이에요."

     군약명은 얼굴을 붉히며 애교를 떨었다.

 
     "뭐? 그게 사실이냐?"

 
     기실 청운관주는 그런 관계는  잘 몰랐으므로 놀라는 표정을 지었

     다. 그저 군약명이 노팔룡  부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군약명은 할 수 없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노구

     룡이 해남도에 찾아온 것부터 시작해, 해남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 그가 해남궁의 위기를  구해 주었던 일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와  노구룡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은 차마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었다.


     청운관주는 비록 도가에 몸을 담은 인물이었으나, 그 이전에는 산

     전수전 다  겪은 강호의 구렁이였다. 비록  군약명이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투에서 능히 노구룡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허허허,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러니까 노 대협에게 먼저 환심을

     사서 그분 며느리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겠단 말이로구나?"

 
     "아이, 잘  아시면서....... 어서요. 그분들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있을까?

     청운관의 후면은 하나의 계곡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지상낙원처

     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계곡 입구에서부터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

     이는 옥류(玉流)가 흘렀고,  대리석으로 된 구름다리를 건너면 온

     갖 꽃이  만발한 꽃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꽃밭 사이를 가로질러

     한참을 가다 보면  청죽림(靑竹林)이 나타나는데, 죽림 사이로 띠

     처럼 가느다란 길이 뻗어 있었다.

     죽림이 끝나는 곳에서 아늑한 구릉이 나타났고, 그곳에 잘 가꾸어

     진 채전(菜田)이 있었다. 조금  더 가니 몇 채의 모옥(茅屋)이 옹

     기종기 보였다.

     모옥 한가운데에는 역시 물빛이 맑은 호수가 있었으며, 호수로 유

     입되는 물은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그 근원이었다.

 
     쏴아아.......

 
     폭포수 소리가 그 어떤 악기의 연주 소리보다 아름답게 들리는 것

     은 그것이 자연의 합주이기 때문이리라.

      청운관주는 본래부터 호사가였다.  이곳은 그가 오래 전부터 공을

     들여 가꾼 곳으로, 특별히 노팔룡 부부를 위해 내놓았다.


     "며느리 약명이 문안드리옵니다."

      모옥의 대청에서 군약명은  큰절을 올렸다. 대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있던 하여령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군약명을 쏘아보았다.

     "며느리? 그게 무슨 소리냐?"

 
     하여령.

 
     이십여 년 전 무정랑자  일점홍이란 별호로 강호에 찬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여검사  하여령의 모습은 지난날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괄괄한 성격과 날카로운 눈매 등은 여전히 일대 여검객으

     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팔룡은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을  참오한답시고 절벽 아래

     폭포수로 나가 있었고, 도운하는 그를 시중들기 위해 모옥을 떠나

     있었다. 그래서  혼자 남아 모옥을 지키고  있던 그녀는 느닷없이

     찾아와 큰절을 올리며 자신을 며느리라고 소개하는 군약명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저어......, 소녀는 노구룡 대협과 백년해로를 언약한 해남궁 출

     신의 군약명이옵니다."

 
     "뭐? 백년해로를 언약해?"
 

     하여령의 버들가지 같은  눈썹이 역팔자로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의자 손잡이를 탁 치며 음성을 높였다.

 
     "아니, 누구  맘대로 백년해로를  언약해? 구룡이  그놈이 그러더냐?"

 
     군약명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하여령이 노구룡의 친모

     이며, 도운하가 작은어머니라는 사실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게다

     가 일점홍 하여령의 성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강호계에 나도

     는 소문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녀는 얼른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녀는 그에게서 어머님에  관해 들었사옵니다. 어머님께서 허락

     하셔야만 며느리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어머님을

     뵙기 위해 달려왔사옵니다."
 

     그제서야 하여령은 약간 화가 풀리는 듯 얼굴이 풀어졌다. 그녀는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래, 구룡이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자세히 말해 봐라."

 

     군약명은 기회가  왔다 생각하고 해남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고해

     바쳤다. 물론 자신에게 불리한  것들은 빼고, 당시의 일들을 부풀

     려 이야기했다.  노구룡이 자신을  유린(?)했으며, 분명히 아내로

     삼겠다고 맹세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강조했다.

 
     "그, 그놈이......? 아이구, 그놈이 그랬단 말이냐?"

 
     내친김이었다. 군약명은 그가 중원으로 건너와 홍의선자 희수봉을

     건드린 일과 황궁의 공주인 주자경과도 관계가 복잡하게 얽혔다는

     것들을 낱낱이 설명했다. 이  역시도 상당 부분 과장한 것은 물론이었다.

 
     하여령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그놈이....... 부전자전이라더니....... 강호에 나가 견문을

     쌓아라 했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바람을 피우는 거라구? 내 이놈

     을 그냥......."

     안 그래도 하여령은 노팔룡의  바람기에 진력이 난 바 있었다. 그

     런데 그의 아들인 노구룡마저 무림에서 춘풍(春風)을 몰고 다닌다

     는 말에 노기가 팽천하고 말았다.

 
     "흐흐흑......, 소녀는 더 이상 어찌 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래

     서 어머님을 뵙고 사정 말씀을 드리려고 감히 찾아왔사옵니다."

 
     하여령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군약명의 손

     을 잡아 일으켰다.
 

     "걱정 마라. 내 다른 계집들은  얼씬도 못 하게 해 주마. 넌 아무

     걱정 말아라."
 

     "정말이옵니까, 어머님?"
 
     "정말이고 말고. 이 하여령의 이름을 걸고 책임......."

 
     "으하하하핫!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것이오, 여령?"

 
     문득 대청의 천장과 기둥이  흔들릴 정도로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

     려 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중년인과 우아하고 기품 있게 생긴

     부인이 나란히 모옥의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훤한 이마, 큼지막한 코, 다소 멍청한 듯하면서도 밝은 안광이 흘

     러 나오는 눈, 너털웃음을  웃느라 쩍 벌어진 입술....... 한눈에

     보기에도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인이야말로 저 유명한 노팔룡 대

     협이었다.

     물론 그의 옆에 있는  다소곳하고 정숙한 차림새의 부인은 도운하였다.

     하여령은 그를 바라보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 잘 왔어요. 글쎄, 구룡이란 놈이......."

 
     노팔룡은 대청으로 올라오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알고 있소. 내 청운관주에게 다 들었소. 그래, 이 아이가 구룡이

     가 찍은 아이라고?"

 
     "뭐예요? 찍어요......?"

 
     하여령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입을 벌렸고,  곁에 있던 도운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렸다.

     한편 군약명은 기가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이제 보니  이분 대협은 그 사람보다  한술 더 뜨는구나!'

 
     노팔룡은 군약명을 가운데 두고 뒷짐을  진 채 몇 바퀴나 맴을 돌

     았다. 그는 군약명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낱낱이 살펴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흠! 역시 내  아들답군. 잘 골랐어. 물찬  제비 같은 몸매며, 이

     우윳빛 피부.......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군. 허허! 역시 계

     집 보는 눈 하난 이 애비를 쏙 빼닮았단 말씀이야."

 
     "기가 막혀서! 아, 체신 좀 차리지 못하겠어요?"

     하여령이 고함을  빽 내지르자 그제서야  노팔룡은 헛기침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연신 입을 벌리며 기뻐했다.

 
     "그래, 이  아이가 내 며느리란 말이지?  거참, 신통하단 말이야.

     내게 며느리가 생기다니......."

 
     군약명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다시 큰절을 올렸다.

 

     "며느리 군약명이 아버님과 작은어머님께 문안 인사 올리옵니다."

 
     "오냐! 내가 바로 네 시애비다."

 
     노팔룡은 연신 헛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군약명의 눈에는 도무

     지 그가 지난날에 중원 무림을 위기에서 건져 냈던 대영웅으로 보

     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는 얼른

     하소연에 들어갔다. 노팔룡이 얼마나 대단한 바람둥이며, 그의 곁

     에서 여인들이 어떻게  알랑대는가를 말했다. 과장을 보태 미녀들

     만 보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군침을 흘린다고 누누이 역설했다.

     그녀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하여령의 얼굴은 붉어졌다 푸르러졌다

     했으며, 심지어는 현숙하기  그지없는 도운하조차 몇 차례 안색이

     변했다.
 

     이윽고 군약명의 말이 끝났다.

 
     "으하하하핫―!"

 
     "......?"


     중인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노팔룡이 앙천대소를 터뜨렸기 때문

     이다. 그의 웃음은 근 일 각이나 계속되다가 간신히 멎었다.

 
     "역시 내 아들놈이야! 내 아들놈이구 말구!"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노팔룡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

     더니 자못 기대가 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석 정말 재주가 좋군. 그렇게  되면 자식도 많이 낳을 수 있

     겠군. 안 그렇소, 여령? 운하?"

 
     꽈당!
 

     그것은 군약명이 쓰러지는 소리였다.

     꽈르르릉!

 
     폭음이 북해의 빙궁이 있는 빙하곡(氷河谷)을 뒤흔들었다. 빙하곡

     은 양쪽 절벽이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계곡으로, 무림에는

     금역(禁域)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북해 빙궁은 중원  무림과는 교류가 전무하다시피 하였으나, 빙궁

     특유의 독문절기인 빙하신공(氷河神功)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널

     리 알려져 있는 문파였다.

     지금 한 사람으로 인해 빙하곡이 붕괴되고 있었다.

 
     "하하하하핫―!"
 

     웃음소리.
 

     단지 소성(笑聲)뿐이라면 이렇게  엄청난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

     을 것이다. 소성에는 웅후한  진기가 실려 있어 빙하곡의 좌우 절

     벽에 쌓여 있던 만년설과 빙벽들이 일시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누......, 누구냐?"

 
     "어떤 놈이 난동을 부리느냐!"

 
     휙휙휙!

 
     빙하곡 안쪽에서 수십 명의 인영들이 날아왔다.

 
     완전히 무너져 버린 빙하곡의 곡구(谷口)에서는 한 청년이 허공에

     둥실 뜬 채 걸어오고 있었다.

 
     "......!"

 
     인영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대체 어떤 신법을 썼기에 허공을 걸

     어온단 말인가?

 
     청년은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밟듯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

     다. 그는 오만한 눈으로 인영들을 둘러보았다.

 
     백삼을 걸친 청년의 용모는  수려했다. 두 눈은 예기를 품고 있었

     으며, 한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은 그의 성품이 완벽주의에 가깝다

     는 것을 보여 주었다.

 
     "빙궁주 설완상(雪完相)은 어디 있느냐? 당장 나와서 명을 받들어

     라!"
 

     "뭣이?"
 

     "네가 뭔데 감히 궁주님을 오라 가라 하........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무너진 빙벽 더미 위로 수십 개의

     인영이 솟구쳐 오르더니 대뜸 살수를 전개한 것이다. 그들은 다짜

     고짜 살인하기 시작했다.

 
     "으흐흐흐! 빙궁 따위는 일 각도 안 돼 무너뜨릴 수 있다! 소천주

     님의 발아래 무릎꿇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앞장 서 살수를 전개하는  자는 다름 아닌 한천이었다. 그는 철기

     방의 방주였다가 사해방 개파대전 때 달아났던 인물이었다.

      느닷없이 빙궁에 출현한 인물들은 바로 비룡천의 인물들이었으며,

     백삼 청년은  비룡천의 소천주인  백가람이었다. 그는 빙령신검을

     완성하기 위해 빙궁이 소장하고  있다는 빙정을 얻으려 이곳에 온

     것이다.
 

     "멈춰라!"

 
     문득 냉랭한 일갈과 함께  백영이 나타났다. 그는 피를 토하며 쓰

     러지는 수하들을 둘러보며 만면에 노성을 드러냈다.

     나이는 오순 가량, 일신에  백곰 가죽옷을 걸쳤으며, 유난히 검은

     머리카락에 화색이 감도는 붉은 대춧빛 얼굴을 한 위풍 당당한 위

     인이었다.

 
     "노부가 바로 빙궁주다. 네놈들은  누구기에 감히 본궁에 와서 살

     인을 하는 것이냐?"

 
     그 말에 한천이 앞으로 나서며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네놈은 비룡천도 못 들어 봤느냐? 저분이 바로 비룡천의

     소천주시다. 어서 무릎꿇지 못하겠느냐?"
 
     너무나 모욕적인 언사에 빙궁주  설완상은 피가 거꾸로 도는 듯했

     다. 비록 중원 무림과 교류는 없었으나, 빙궁은 당당한 문파로 인

     식되어 온 지 오래였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비룡천이란 곳에서 예고도 없이 쳐들어와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으니,  아무리 수양이 높은 인물이라도 참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거리다

     니....... 네놈은 애비도 없느냐?"
 

     "으흐흐흐......, 지금 뭐라고 했느냐?"

 
     한천의 눈에서 시뻘건 광채가 흘러 나왔다.

     그는 자신의 가문인 사천 당가를 몰살시킨 위인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존장이니 부모니 하는 말이었다. 그의 부친인

     비천일룡 당립은 바로  숙부인 실심객(失心客) 당정환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당시 당립은  무림 삼봉의 일원이었던  미나찰 남궁옥을 겁탈하다

     당정환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바 있었다. 남궁옥은 원치 않았

     던 겁탈로 임신을  했고, 그후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지금의

     한천인 것이다.

      한천은 그후 원한을 불태웠고,  급기야 철기방의 방주가 된 후 자

     신의 가문인 사천 당가를  폐허로 만들고 말았다. 하늘 아래 패륜

     아인 한천이 설완상의 말에  살기를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인

     지도 몰랐다.

     "흐흐......, 내가 네놈을 죽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위이잉!

 
     한천은 쌍장을 교차시키며  장력을 날렸다. 그의 장력에는 무시무

     시한 경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흥!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 같으니!"

 
     설완상은 빙궁의  궁주였다. 아무리  상대가 고수라지만 그에게는

     빙궁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빙하신공이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의 장심에 투명한 반점이 형성되더니,

     만년빙굴이 뿜어내는 듯한 냉기가 뻗어 나갔다.
 
     콰쾅!

 

     두 가닥 장력이 격돌하자 폭음이 일었다. 동시에 새햐얀 눈보라가

     회오리쳤다.

 

     "음!"

 

     "으으......."

 

     묵직한 신음이 동시에 울렸다.

 

     설완상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난  채 경악에 찬 눈빛으로 상대를 바

     라보고 있었다. 한편 한천은  한 걸음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듯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광경에 백삼 청년 즉, 백가람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러나라, 한천."

 
     한천은 즉각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원독의 빛이 흘

     러 나오고 있었다.  백가람이 아니었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울 기세였다.

     "빙궁주, 꼭 피를 보아야겠소?"

 
     설완상은 놀라움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백가람을 바라보며

     염두를 굴렸다.

 
     '저놈의 무공도  가공스러운데, 저놈이 저렇듯  깍듯이 대하는 걸

     보면 대체 이놈의 무공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는 몰래 한숨을 쉰 후 물었다.

 
     "대체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백가람은 담담히 말했다.

 
     "한 가지, 빙궁에서 소장하고 있는 빙정이 필요하오."

 
     "뭣이?"

 
     설완상은 안색이  싹 변했다. 빙정은  빙궁의 보물이었다. 빙정을

     내준다는 것은 곧 빙궁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빙정을 내주느니 차라리 노부의  목을 내놓겠다. 어림도 없는 소

     리!"

 
     "할 수 없지. 그럼 귀하의 목부터 취할 수밖에."

 
     백가람은 두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설완상은 무형의 압

     력이 전신을 옥죄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 걸음 물

     러나고 말았다.

 
     "서, 서라!"

 
     "빙정을 내놓겠소?"

 
     "그럴 순 없다!"

 
     "불행을 자초하는군."
 

     스스스!

 
     백가람의 손이 소매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손은 투명한 옥빛을 띠

     고 있었다. 동시에 은은한 단향목 향기가 풍겼다. 그 손이 허공에

     원을 그리자 갑자기 진공 상태가 형성되었다.

 

     우우우웅!

 

     주변의 눈보라가 휘말려  올라갔다. 눈보라의 회오리는 곧장 설완

     상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빙천장(氷天掌)!"

 

     설완상은 일생 일대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느끼고 전력을 다해 빙

     천장을 전개했다. 그의 쌍장에서 음랭한 한기가 날아갔다.

 

     꽈꽝―!


     천지가 붕괴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으아아아악!"

 

     설완상은 입과 코로 피를 뿜으며 삼 장 밖으로 날아갔다.

 

     "아악! 아버님......!"

 

     문득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 소리와 함께 한 가닥 백영이 날아올랐

     다. 백영은 막 바닥에 떨어지려던 설완상을 안고 내려섰다.

 

     "......!"

 
     백가람은 흠칫했다.


     설완상을 안고 내려선  인영은 여인이었다. 일신에 은여우의 털옷

     을 입고, 역시 은여우의 털모자를 쓴 절세의 미녀였다. 피부는 빙

     설보다 희고  투명했으며, 붉고 도톰한 입술에  두 눈동자는 마치

     보석을 박아 넣은 듯 영롱하게 빛났다.

 
     "아버님....... 흑흑, 아버님! 정신 차리세요."

 
     미녀는 의식을 잃은 설완상을 흔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백가람의 뇌리에는 강호에 떠도는 말이 떠올랐다.
 

     '북해 빙궁에  무림 사화 중 한  명인 빙하선자(氷河仙子) 설경경

     (雪耿耿)이란 미녀가 있다더니....... 그럼 저 여인이?'

     빙하선자 설경경.

 
     나이 이십 세에 막 접어든 그녀는 중원에 한 번도 발을 딛은 적이

     없었으나, 이미 그 미명을 천하에 떨치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중

     원 여인과는 다른 외모로 인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족  여인이 아닌 색목국의 미녀였다. 부모에게

     서 각각 다른  핏줄을 물려받은 설경경의 머리카락은 금발이었고,

     피부는 하얗다 못해  투명했다. 눈동자는 벽안(碧眼)에 가까워 마

     치 푸른 산호초를 보는 듯했다.

      특히 몸매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한족 여인들의 몸매는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그러나 설경경은  달랐다. 키도 훌쩍 클 뿐

     더러, 허리는 한 줌밖에 안  될 정도로 가늘었다. 가슴은 터질 듯

     이 풍만했고,  팽팽한 둔부와 늘씬한 두  다리는 사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흐음,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백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천을 비롯한 수하들이 모두  넋을 잃은 채 연신 침을 삼

     켜 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다가갔다.

 
     "낭자가 바로 빙하선자 설경경 소저요?"

 
     설경경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벽안에 살기가 감돌았다.

     "흥! 네가 아버님을 이렇게 했느냐?"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릴 정도로 싸늘한 음성이었다. 백가람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래는 이럴 생각이 없었소. 서로 약간의 오해가 있었을 뿐이오.

     소저와 대화가 된다면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도 있소이다."

 
     백가람으로서는 최대한 예의를 다한 말이었다.

 
     기실 그는 무림 사화에  대해 강한 집착을 지니고 있었다. 선대에

     서 못 이룬 꿈을 당대에서 이루어 보겠다는 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구룡으로 인해 벌써 무림  사화 중 삼화가 물 건너간 상

     태가 되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번만은 결코 놓칠 수 없다는 생각

     이었다.
 

     "흥! 어떻게 하면 적이 되고, 어떻게 하면 친구가 되죠?"
 

     설경경은 부친의 혈도를 짚어 임시 조치를 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야 간단하오."

 
     백가람은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막상 일어서고 보니 키가 그

     와 비슷할 정도로 컸다.  중원 여인으로서는 가히 보기 힘든 장신

     이었다. 그럼에도 들어가고 나올 곳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기막힌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런 미녀가 있었다니.......'

 
     어떻게든 환심을 사야 했다.

 
     "소생에게는 귀궁의  빙정이 필요하오. 그래서  빙정을 잠시 빌려

     쓸까 하오. 그뿐이오.  사용한 후에는 틀림없이 돌려주겠소. 그렇

     게만 해 준다면 오늘의 오해를 풀고 귀궁과 혈맹의 관계를 맺겠소이다."

 
     설경경은 몇 차례 눈을 깜박였다.

 
     "그 말이 진심인가요?"

 
     백가람은 자신의 가슴을 쳤다.
 

     "남아일언중천금이오."

 
     "좋아요, 그럼 절 따라와요."

 
     설경경은 부친을 안고 몸을 돌렸다.


     백가람은 그녀가 이렇게 쉽게  응할 줄은 몰라 반신반의했으나 어

     쩔 수가 없었다.
 

     "고맙소. 역시 소저는 말이 통하는구려."

 
     문득 설경경이 돌아서며 말했다.

 
     "우선은 부친의 상세부터  돌봐야겠어요. 수하들에게 맡겨도 되겠

     지요?"
 

     "그야......."
 

     설경경은 손짓하더니 서너  명의 수하들을 불렀다. 그녀는 설완상

     을 수하들에게 맡기며 나직이 말했다.

     "너희들은 궁주님을 빙혼동(氷魂洞)으로 모셔라."

 
     수하들은 그  말에 움찔했으나, 설경경이 눈짓을  하자 곧 힘차게

     대답하고는 설완상을 메고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한천이 그들

     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백가람이 제지했다.
 

     "놔두어라."

 
     한천은 불만인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백가람의 눈에서 냉엄한 빛

     이 흘러 나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따라오세요."

 
     설경경이 앞장 섰다.

     백가람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가슴속에서 더운 기운이 솟구

     치는 것을 느꼈다. 설경경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설경경은 은여우 털가죽으로 된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엉덩이 옆

     부분에서 갈라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늘씬한 다리의 맨살이 그대

     로 노출되었다. 더구나 터질  듯이 부푼 엉덩이가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미묘하게 움직였다.


     일 각 후 일행은 빙궁에 당도했다.

 
     "오오......!"

 
     비룡천의 인물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북

     해의 빙궁은 가히 찬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동그란 지붕과 뾰족
     한 첨탑(尖塔)은 이국의 정취를 물씬 풍겼는데, 햇살 아래 번쩍번

     쩍 빛나고 있었다.
 

     빙궁은 다름 아닌 얼음으로 만든 궁전이었다. 벽이나 지붕, 기둥,

     바닥에 이르기까지 온통  얼음만으로 만들어진 궁전! 그야말로 신

     비롭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오."

 
     백가람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탄성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설경경은 힐끗 그를 돌아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본궁은 한 번도 외인을 들인 적이 없어요. 오늘만은 예외이니 당

     신은 행운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거예요."

     "하하! 이거 영광이오.  더구나 소저같이 아름다운 미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금생에 다시없는 행운이외다."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었다. 실제 백가람은 빙하선자 설경경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특히 가까이에서 보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가히 매혹적이었다. 말

     할 때마다 방싯거리며 열리는  붉은 입술과 풍만한 가슴이 솟았다

     꺼졌다 하는 모습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빙전을 두  개 지나자 회랑이 나타났다.  회랑의 바닥이나 천장도

     모두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당신 혼자서 와야 해요."

     설경경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건 안 돼오!"

 
     한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으나 백가람은 느긋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하지만......."

 
     백가람은 한천의 말을 묵살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앞장 서시오, 설 소저."
 
     회랑 끝에 이르자 역시  얼음으로 된 문이 나타났다. 설경경은 문

     앞에서 설명했다.

 
     "빙정이 있는 곳은 본궁의  절대 금지 구역이에요. 이제껏 아버님

     을 제외한 그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어요."
 

     설경경은 문  앞에 선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는 바둑판

     모양의 빙판이 깔려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의 빙판이었다.

      그녀는 흑백의 빙판을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며 밟았다. 그 광경을

     백가람이 유심히 바라보자 그녀는 비웃음을 흘렸다.

 
     "봐도 소용없어요. 문을 여는 장치는 매일같이 바뀌니까요."

 
     그르르르릉!
 

     기이한 음향과 함께 문이  좌우로 열렸다. 문이 열린 순간 자욱한

     안개가 흘러 나왔다.

 
     '읏!'

 
     백가람은 숨을 멈추었다. 흰 안개에서 지독한 냉기가 느껴졌던 것

     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냉기에 쏘이기만 해도 그대로 고드름이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한기였다.
 

     "따라오세요."

 
     설경경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넘어서자  경사진 얼음 계단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대략 이십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바닥에 닿았다.

 
     "오오......!"

 
     백가람은 탄성을 터뜨렸다.

 

     계단 아래에는 또 하나의  대전이 있었다. 대전은 온통 투명한 얼

     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마장 가량 되는 대전의 사방에는 얼

     음으로 조각된 각종  신상(神像)들이 서 있었는데, 신상들의 모습

     은 동물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생생한 모습의 동물 신상들은 역동적인 자세

     를 취하고 있었다.

 
     "호오, 빙궁의 무공 내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군."

 
     백가람의 말에 설경경은 안색이 변했다. 그의 말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동물 신상들의 자세는 바로 빙궁의 독문무공인 빙하신장과 현음십

     이수(玄陰十二手)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한눈에 그것을 알아본

     백가람에 대해 그녀는 언뜻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스스스.......

 
     대전 한가운데는 넓은 연못이었다. 그런데 연못에는 물 대신 자욱

     한 백무(白霧)가 흘렀다.

 
     백가람은 전신의  피부가 갈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저곳에 빙정이 있소?"

 
     설경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곳은 만년빙담(萬年氷潭)이에요. 빙정은 저 빙담 속에

     있어요."

 
     백가람은 빙담을 노려보며 물었다.

 
     "빙정은 어떻게 꺼내야 하오?"

 
     "빙담에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백가람은 자욱한  백무가 일렁거리는 빙담을  노려보다 고개 돌려

     설경경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아시오?"

 
     "물론 당신 능력으로는 충분히 빙정을 취할 수 있을 거예요. 분명

     히 말하지만 직접  꺼내 가야 해요. 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후후후......."

 
     백가람의 입에서 묘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
 

     설경경이 의아해하는 순간 그의 손이 쾌속하게 뻗어 왔다.

 
     "무슨 짓이에요!"
 

     설경경은 경악하며 뒤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백가람의 손은 마

     치 고무줄처럼  늘어나더니 그녀의 손목에  있는 완맥을 거머쥐었다.

     "후후! 물론 소저를 믿고  싶소. 하지만 매사에 안전을 기하는 것

     이 내 성격이오. 자, 함께 들어갑시다."

 
     "아, 안 돼!"

 
     설경경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백가람에게 질질 끌려  빙담으로 다가갔다. 빙담 주변에는 백무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백무에 접하는 순간이었다.

 
     쩌, 쩌엉! 쩌저적!

 
     돌연 청아한 음향과 함께  주변에 얼음이 맺히는 것이 아닌가? 그

     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사람의 주변은 삽

     시간에 얼음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되자 두 사람은 얼음  속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산 사

     람이 얼음 속에  갇히니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얼음

     속에서도 백가람은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

 
     그는 입을 쩍 벌렸다.

 
     콰콰쾅!

 
     폭음과 함께 그를  가두고 있던 얼음이 산산조각  나 날아가 버렸

     다.

 

     "하하하하핫! 이까짓 것으로 이 백모를 막을 수 있을 줄 알았소?"

     그는 앙천대소를  터뜨리더니 설경경의 손목을  잡고 빙담 속으로

     뛰어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음 속에 갇혀 영원히 고드름 덩어

     리가 되어야 했으나, 백가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스!

 
     자욱한 백무 속으로 뛰어든  백가람은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

     를 느꼈다.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 한기를 밀어내면서 빙담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갔다.

      그러면서도 한 손은 여전히  설경경의 완맥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

     었다. 설경경은 그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두 사람의 눈에 찬란한  광채가 보였다. 만년빙담의 수중 깊은 곳

     에서 빙산(氷山)이 보였다. 그 빙산은 투명했는데, 빙산의 중심부

     에 주먹만한  구체(球體)가 있었다. 눈이 부실  듯한 광채는 바로

     그 구체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빙정이로군!'

 
     백가람은 한눈에 알아보고 흥분을 느꼈다.  

      그는 더 깊이 잠수하여 빙산에 접근했다. 만년빙담의 물은 인간의

     체력으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차디찼으나,  빙산의 온도는 그

     이상이었다. 가까이 접근하자 온몸이 마비가 될 것만 같았다.

      '굉장하군!'

 
     그는 빙산을 만져 보았다. 순간 온몸이 찌르르 진동했다.

      빙정을 얻기 위해서는 빙산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한 그는 설경경의 완맥을 놓아주었다.

 
     '허튼 생각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전음으로 경고한 그는 심호흡을  한 후 쌍장을 빙산에 갖다 댔다.

     백단신공을 극성으로 일으킨 그는 일시지간에 진기를 뻗어 냈다.

 
     쩌, 쩌저저적!

 
     굉장한 소리와 함께  빙산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

     미줄처럼 미세한 금이 간 빙산은 점차 균열이 커져 가더니 마침내

     굉음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콰콰콰쾅―!

 
     엄청난 폭발이었다. 거대한  빙산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날아

     가 버렸다.

 
     "아아아악!"

 
     폭발력은 근처에 있던 설경경도 날려 버렸다. 그녀는 처절한 비명

     을 지르며 마치 태풍을 만난 연처럼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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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17장 화중지병(畵中之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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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담은 병든  피를 없애고(破血) 탁한 피를  맑게 해 주며(淸血),

     새로운 피를 생성해  주고(生血) 균을 소멸시켜 주며(殺蟲), 독성

     을 해소해 주는(解毒) 작용을 한다.

 
     그 밖에도 웅담의 효능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예로부터 웅담을 희귀한  약재로 분류하지 않았던가? 용한 의원이

     라면 천금을 들여서라도 웅담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사냥꾼

     들도 곰을 잡으면 제일 먼저 웅담부터 꺼낸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그러나 웅담이라고 다 같은 웅담은 아니다. 웅담이 곰의 쓸개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곰도 곰 나름이다.

 
     천산의 백곰이나 절강의 흑곰, 십만대산의 불곰 등 곰에도 종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북해 지역에는  특이한 종의  곰이 살고 있으

     니.......

 
     털빛이 눈처럼 희어 설웅(雪熊)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곰이 사

     는 지역이 특이하다.

 
     북해의 서남 지역에는 광대한 넓이의 염산(鹽山)이 있는데, 이 염

     산은 수백만 년 전 바다가 육지로 화하면서 바닷물이 증발하여 이

     룬 거대한 소금 산이다. 이곳에 사는 곰은 짠 소금을 많이 섭취하

     여, 이 곰의 웅담이야말로  특이한 약효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쿠워어억......!

 
     눈과 소금으로 뒤덮인 계곡이  흔들릴 정도로 우렁찬 포효가 울렸

     다. 천염곡(天鹽谷)이라 불리는  소금 계곡에서 인간과 곰의 일대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쐐애액!

 
     퍼펑!

     키가 일 장이 넘는 거구의 설웅이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소금으로

     이루어진 바위가 산산조각 나 날아갔다. 그 앞에서 설웅에 비하면

     왜소한 한 여인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검으로 설웅을 공격하

     고 있었다.
 

     여인은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미녀였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무르익은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인은 이를 악문 채 검을 휘두르

     며 설웅을 공격했다.
 

     설웅은 만만치 않았다. 이따금 검이 곰의 어깨나 허리를 스치기도

     했으나, 바늘처럼  빳빳한 털이 일종의 갑주  역할을 하는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반면 곰이  휘두르는 앞발에는 위맹한 기운이  담겨 있어, 근처의

     소금 바위와 절벽들이 깎여 나가며 자욱한 소름 가루를 날렸다.

 
     "백룡출해(白龍出海)!"

 
     "파천일식(破天一式)!"

 
     차차창!

 
     검광이 번쩍거리며 날카로운  금속성이 고막을 울렸다. 여인은 혼

     신의 힘을 다해 설웅을 공격했다. 그러나 설웅을 상대하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설웅은 가소롭다는  듯이 양손을 휘휘  내저으며 여인을 밀어붙였

     다. 여인은 진땀을 흘리며 계속 뒷걸음질쳤다.

 
     그런데 여인의 뒤쪽은 천야만야한 낭떠러지가 아닌가!

 
     "아아......."

 
     여인은 절망의 신음을  발했다. 그녀는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

     진 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쿠워억!

 
     설웅이 갑자기 양손을 빠르게 휘저으며 공격했다.

 
     챙!

 
     "아앗!"
 
     여인이 쥐고 있던 검이 지푸라기처럼 꺾여 날아가 버렸다.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뒤로 두 걸음 밀려났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

     이 없었다.

 
     설웅은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성큼성큼 여

     인에게 다가갔다.
 

     절체절명의 위기!
 

     "하하핫! 한낱 미물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내몰다니....... 이 놈!"

 
     쐐애액!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흰빛이 날아왔다.


     퍽!

 

     크와악!

 

     설웅은 펄쩍 뛰었다. 설웅의 한쪽 눈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치솟았

     다. 주먹만한 소금 덩어리가 설웅의 왼쪽 눈알을 맞춘 것이다. 그

     로 인해 졸지에 한쪽 눈을  잃은 설웅은 고통과 분노에 무섭게 포

     효했다.

 
     "조심하시오!"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허공에서 뛰어내리더니 여인의 허

     리를 낚아챘다.

 
     "앗!"

 

     여인은 놀란 나머지 뒤로 물러나다가 한쪽 발을 절벽의 허공에 딛

     는 찰나였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구해진 여인은 청년의 힘에 의해

     저만치 날아갔다.

 

     그때였다.

 

     위이잉!

 
     분노에 찬 설웅의 공격이 청년에게 떨어졌다. 거대한 몽둥이 같은

     설웅의 앞발이 청년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청년은 민첩했다. 어느새 뽑았는지 한 자루의 주방용 칼로 설웅의

     앞가슴으로 파고들더니,  하나 남은 설웅의 오른쪽  눈에 푹 꽂아

     넣는 것이 아닌가?

 
     크와아아아악!

 
     두 눈을 실명하게 된 설웅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거대한 설웅의  몸부림은 볼 만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양발을 마구 휘두르며 고막이 터질 듯한 포효를 울부짖었다.

 
     "하하핫! 바보 같은 놈, 그런다고 겁먹을 줄 알았느냐?"

 
     청년은 마치 놀리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우르르르르......!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울리며 지축이 흔들렸다.

 
     "앗! 무너져요!"

 
     여인의 뾰족한 비명이 울렸다.

 
     눈사태였다. 아니, 거대한 소금 산을 이룬 절벽의 한 면이 설웅의

     포효에 진동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청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콰르르르릉!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소금 덩어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

     다. 설웅과 두 사람이 딛고 있던 절벽의 지면도 균열이 가며 떨어

     지려 했다.

 
     설웅은 그것도 모른 채 여전히 앞발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포효했

     다.
 

     꽈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소금 절벽이 와해되었다. 산더미 같

     은 소금 덩어리가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청년은 여인을 끌어안고

     신형을 날렸다.

 
     설웅 또한 소금 덩어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청년은 혼신의 힘

     을 다해 신형을 날렸으나,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소금 덩어리를

     다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등에 엄청난 타격을 받으며 그만 소금 덩어리와 함께 추락하

     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경경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물질이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를 물질이 목구

     멍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거부했으나,  부드러운 물질이 그녀의 꽉 다

     문 치아를 열고 입  안으로 막무가내로 밀어넣었다. 그 바람에 어

     쩔 수 없이 이상한 물체를 목구멍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어렴풋이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악!'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누군가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난생 처음 보는 웬 사내가 그녀

     를 안고 입술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나쁜 놈!'

 
     그녀는 손을 들어 사내를  밀치려 했으나, 어찌 된 셈인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사내는 열심히 그녀의

     입에 자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입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혀로 그녀의 입술을 열고 치아마저 벌린

     후, 무엇인가 진득한 물체를 입 안으로 밀어넣는 것이 아닌가?

 
     '으웩!'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토하려 해도 토할 수도 없었다. 사내는 한

     참 동안 그녀의 목구멍 속으로  자신의 입 안의 것을 밀어넣은 후

     입술을 뗐다.

 
     그때였다.

 
     설경경은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물질이 목구멍을 통해

     넘어간 후 뱃속에서 알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으윽! 아아......!'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사지가 굳어 있어 비명조차 나오

     지 않았다. 뱃속의 이물질은 자꾸만 부풀어오르는 듯했고, 거북함

     과 함께 혈기마저 뒤틀리기 시작했다.
 

     한편 설웅의 쓸개를 채취해  설경경에게 복용시킨 사내는 다름 아

     닌 노구룡이었다.

 
     소금 사태(?)에도 그들은 다행히  소금 더미 사이에 생긴 틈 속에

     갇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요행이랄까? 설웅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추락해 죽었으므로 그는  제일 먼저 설웅의 웅담부터 채취했다.


     기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천하 사대 진미의 하나인 천염설웅탕

     (天鹽雪熊湯)의 재료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설웅

     과 싸우는 설경경을 발견한 것이다.

      천염설웅탕이란 암염(巖鹽) 지대에  사는 설웅의 웅담을 주재료로

     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설웅의  웅담을 구하는 것이 필수였다. 이

     웅담을 암염 가루에 절여 48종의 약초와 함께 탕으로 끓이는 것이

     천염설웅탕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운 좋게 설웅의 웅담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설웅

     의 웅담은 그  양이 충분해서 중상을 입은  설경경을 구하기 위해

     입으로 잘게 씹어 복용시켰다. 대저 웅담의 약효는 무궁무진한 것

     으로 알려져 있어서 설경경의  중상도 치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

     던 것이다.


     "거참, 이상하군.  웅담을 꽤  많이 복용시켰는데도  차도가 없다

     니......."
 

     노구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경경은 도무지 깨어날 조짐을 보

     이지 않는 것이었다.

     기실 그녀의 의식은 돌아왔으나, 온몸이 얼어붙은 상태였다. 빙정

     의 기운이 체내에 흡수된 데다, 백가람의 백단신공에 혈맥을 다쳤

     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웅담  성분은 그녀의 뱃속에서 제대로  용해될 수 없었

     다. 아니, 도리어 뱃속에서 응고됨으로써 기혈의 유통이 이루어지

     지 않아  사지가 더욱 뻣뻣해졌고,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노구룡은 손으로 설경경의 이마를 짚어 보다가 깜짝 놀랐다.

 
     "엇! 얼음장이로군!"

 
     그는 난처한 듯 고민에 잠겼다.

 
     문득 지난날의 일이  떠올랐다. 해남도에서 군약명을 치료했던 일

     이 선명히 떠오른 것이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설경경을 훑어보

     는 그의 눈빛이 묘해지더니 입가에 이상한 미소가 번졌다.

 
     "조금만 참으시오, 낭자. 곧 치료해 줄 테니까."

 
     '......?'

 
     설경경은 몰래  실눈으로 그의 표정을 보았다.  실실 웃으며 하는

     말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앗! 뭐, 뭐 하는 거야!'

 
     그녀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갑자기 노구룡이 그녀의 옷을 벗

     기는 것이 아닌가?

 
     '안 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그만두지 못해?'

 
     고함을 지른다고 질러 댔지만,  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손가

     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입장이라 마음만  다급할 뿐, 조금도

     반항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전라가  되고 말았다. 노구룡은 인정사정없이 실오

     라기 한 올 남기지 않은 채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겨 버렸다.

 
     "내 특별한 비법으로 낭자를 치료해 줄 테니 조금만 참으시구려."

 
     노구룡은 손가락을 뚝뚝 꺾더니  대뜸 그녀의 팽팽하게 부풀어 오

     른 유방부터 양손으로 덥석 움켜쥐었다.

     손바닥 가득 팽팽한  탄력이 느껴졌다. 노구룡의 눈동자가 묘하게

     돌아갔다.

 
     "헤에......, 지금껏 만져 본  가슴 중에서 가장 큰데? 촉감도 좋

     고......."
 

     노구룡은 눈마저 지그시 감은  채 촉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양이었

     다. 그러면서 손가락은 쉬지 않고 움직여 댔다.

      그는 설경경의 유방을  다섯 손가락으로 규칙적으로 주물러 댔다.

     그러다가는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탁탁 퉁겨 보기도 했다.

 

     '이......, 개 같은 놈이!'

 
     설경경은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만일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머리통을 부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수난은 고작 시작일 뿐이었다. 노구룡의 손이 거침

     없이 움직이며 그녀의 전신을 떡 주무르듯 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구룡은 그녀의 기름진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압박하면서 원을 그

     리듯 쓰다듬었다. 치료를  위한 엄숙한 행위이면서도 그는 나름대

     로 기막힌 피부의  촉감을 즐기듯 눈을 반개한  채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문득 그의 손이 배꼽 아래로 내려갔다. 금잔디처럼 부드러운 섬모

     가 손끝에 느껴지자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그 부분을 유심

     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헤......, 머리카락만 금발인 줄 알았더니 이곳도 금색이구나!"

 
     그는 희한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치모를 어루만졌다.

 
     '야, 이 새끼야! 손 치우지 못해!'

 
     설경경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여인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

     는 소중한 부분을 마치 물건 만지듯이 주물러 대며 중얼거리는 사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대갈통을 으스러뜨리고 싶었다.

     이제 노구룡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두둑한 계곡을 덮더니 꾹꾹 누

     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으시오. 곧 깨어나게 될 거요. 물론 이래도 안 되면 다

     른 수를 쓰겠지만......."

 
     설경경의 몸이 들썩거렸다.  노구룡이 그녀의 치골 부위를 압박할

     때마다 어찌 된 셈인지 자발적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아아.......'

 
     설경경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녀의 백짓장 같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사내의 손

     이 소중한 그곳을 눌러 댈  때마다 평생 처음 느끼는 야릇한 쾌감

     이 전류처럼 번졌다.

 
     그녀는 치욕과 흥분이 교차하며 전신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 광경

     을 본 노구룡은 더욱 신난다는 듯이 바쁘게 손을 움직여 댔다.

 

     그는 위치를 옮겨 설경경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더니 한쪽 다리를

     치켜세웠다.

 

     '맙소사!'

 

     설경경은 기절하지 않는 자신의 강심장을 원망했다.

 

     그 자세라면 여인의 소중한 곳이 사내의 눈에 여실히 드러나 보이

     지 않겠는가? 자신도  한 번도 자세히 본  적이 없는 곳을 사내의

     정면에 내놓게 되다니.......

 
     노구룡은 빤히 눈을 뜬 채 설경경의 다리 사이를 바라보며 치켜세

     운 한쪽 다리를 끌어안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부지런히

     종아리에서 무릎까지,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오르내렸다.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으로 손을  밀어넣을 때는 살짝살짝 여인의 비부를

     스치곤 했다.

 

     '하악!'

 

     그때마다 설경경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대체 어쩌

     자는 건지 몸과  마음이 뜻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마음은 천 리

     밖으로 달아나고 싶은데,  몸은 이상하게도 사내의 손길을 적극적

     으로 받아들이며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아아......, 죽고 싶어!'

 

     치욕에 그녀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옳지, 이제 화색이 도는군. 역시 이 방법이 제일 효과가 있어."

 
     노구룡은 창백했던 그녀의 안색이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 신이 났

     다. 그는  이번에는 다른 쪽 다리를  치켜세우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엄마야!'


     설경경은 비명을 토했다. 느닷없이 그녀의 몸이 엎어진 것이다.

      반듯이 누운 자세에서 엎드린  자세가 되더니, 두 다리가 번쩍 뒤

     로 들리는 것이 아닌가?

 
     노구룡은 그녀의 두 다리를  안고 몸을 일으키더니 좌우로 다리를

     활짝 벌렸다.

 
     "이렇게 해야 피가 잘 통하지."

 
     노구룡은 설경경의 대리석 같은 두 다리를 잡고 힘껏 벌렸다가 모

     으고, 반쯤 구부렸다가 펴고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치료 행위를 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경경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인의 몸으로 이런

     고초를 겪을 줄은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혀

     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문득 몸이 구부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젖가슴 밑으로 사내의 손이

     들어오더니 상체를 당기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은 활처

     럼 뒤로 휘어졌다.

 

     젖가슴을 받친 사내의 손가락이 꼬물거리더니 젖꼭지를 꼬집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통증에 절로 발한 비명이었

     으나, 지금까지  목에 걸려만 있던 소리가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것이다.
 

     "헤......, 이제 깨어나는군. 그것 보시오. 내 치료법이......."
 

     노구룡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우르르릉!
 

     굉음과 함께 맞은편 소금  벽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무너진 구멍

     에서 한 인영이 뛰어 들어오다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주자경이었다.

      주자경은 노구룡이 떠난 후 갈등했다. 그러다 복마신니의 말에 결

     심을 굳혔다.

 
     '나처럼 평생 후회하지 말고, 사랑한다면 끝까지 그를 따라가라.'

 
     복마신니의 말에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서 노구룡

     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끈질기게 따라온 끝에 마침 암염 지대의 절벽 아래에서 곰과 싸우

     고 있는 노구룡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구경하는 사이에 그

     만 사태가 일어나더니 절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절벽 아래 파묻혀 버린 노구룡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만 이틀 동

     안이나 밥 한  끼 못 먹고 소금 더미를  파헤친 끝에 마침내 그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노구룡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장면

     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노구룡이  한 여인을 발가벗겨

     놓고 괴상망측한 자세로 올라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꺄아아아악―!"

 
     설웅의 포효는 저리 가라 였다.
 

     노구룡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주자경도

     놀랍거니와, 그녀가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내지른 비명에 그는 넋

     이 나갈 지경이었다.

 
     꽈르르릉!

 
     진동 때문이었는지 눈앞에서 다시 소금 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주

     자경과 그 사이에 소금이 무너지면서 비명 소리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노구룡은 귀를 막은 손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거참, 여자의 고함이 설웅보다 더 큰 줄 몰랐군."

 
     그는 설경경을 살펴보았다. 설경경의 얼굴은 도화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코에 대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어. 한숨 자고 나면 좋아질 거요."

 
     기실 설경경은 벌써 회복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치심으로 인해 감

     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뱃속에 뭉쳐 있던 이물감은 어느새 용해

     되어 전신의 혈액으로 퍼져  나갔고, 그로 인해 빙정의 기운이 녹

     았을 뿐만 아니라, 웅담의 효능으로 백가람의 백단신공에 다친 상

     세도 완치되면서 도리어 내공이 급격히 향상되었다.

 
     노구룡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갑자기 손가락으로 혈도를 눌러 버렸다.

 
     '기왕 자는 김에 푹 자시오. 그럼 완치될 거요.'

 
     설경경은 땅을  치고 싶었다. 수치심이 어느  정도 지나가면 당장

     일어나 그를 요절낼 생각이었는데 그만 수혈을 짚일 줄이야!

 
     그녀는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려 애를 썼으나, 결국은 가볍게 코까

     지 골며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참, 이거야 어디.......'

 
     노구룡은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소금 더미를 치우

     고 주자경이 있는  곳으로 가 보니 그녀는  혼절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끌고 와 설경경의 옆에 나란히 눕혀 놓고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그녀의 막힌 혈기를 뚫어 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에는 설경경이 누워  있었다. 대충 옷가지로 덮어 놓긴 했

     지만, 그녀의 늘씬한 하체가  옷 밖으로 드러나 있는 요염한 모습

     이었다.

      노구룡은 주자경의 전신을 주무르며 연신 힐끔힐끔 설경경의 몸매

     를 훔쳐보았다.

     '중원 여인과는  확실히 틀리단 말이야. 저  긴 다리 하며.......

     피부는 또 어떻구?'

 

     그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으으음......."

 
     주자경이 신음을 발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얼

     른 그녀의 혼혈(昏穴)을 짚었다. 그녀가 깨어나면 일대 소동을 벌

     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흐흑흑......!"
 

     설경경은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노구룡은 손바닥을  비비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주위를 몇  바퀴나 빙빙 돌았으나, 어떻게 해야 울음

     을 멈추게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설경경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치켜들며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무엇이오?"

 
     노구룡은 얼른 그녀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저에게 설웅의 쓸개를 조금 나눠 줄 수 없나요?"

 
     노구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어렵지 않은 일이오. 그럼 이젠 울음을 그치겠소?"

 
     "흐흐흐흐흑!"
 

     그러자 이번에는 더욱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노구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왜 또 우는 것이오? 웅담을 나눠 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흐흑......, 웅담은 아버님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에요. 하

     지만......, 전 그래도 죽을 수밖에 없어요."

 
     "아니, 왜요?"
 

     "몰라서 물어요?"
 

     설경경은 고개를 들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나참......, 모르니까 묻는 것이 아니오?"


     설경경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더듬거렸다.
 

     "당신이 날 마음대로 만지고......, 볼 데 못 볼 데를 다 봤어요.

     그러니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노구룡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그야 치료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그 때문에 죽겠다

     면, 난들 어찌 하란......."
 

     노구룡은 말을 끊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당신도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군. 좋아, 그럼 내가 책임지면

     되지 않소?"


     "책임지다니?"

 
     설경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구룡은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다른 여인들도 다 마찬가지였소. 까짓것 소저를 부인으로 삼으면

     되지 않소? 그럼 다 해결되는 거 아니오?"

 
     "......!"

 
     설경경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노구룡의 아래위를 바

     라보던 그녀는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안 돼요. 전 결혼할 수 없어요."

 
     "무엇 때문이오? 내가 맘에 안 든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전 빙궁을 이어야 해요. 아버님의 뒤를 이어

     빙궁주가 되려면 설 씨의 후예를 만들어야 해요. 당신과 결혼하면

     설 씨 아이를 낳을 수가 없잖아요?"

 
     노구룡은 멍한 표정이었다.

 
     "설 씨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당신과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설 씨가 아니잖아요. 흑흑!

     그러니 전 죽을 수밖에 없어요."


     "자, 잠깐!"

 
     노구룡은 다급히 말한 후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와 결혼해서도 아이의 성을  설 씨로 정해야 한다면 데릴사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그의 머릿속에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모친 하여령

     의 차가운 얼굴이었다.
 

     '이크......, 어머님께서 허락하실까?'

 
     다시 하나의 인자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작은어머님이라면.......'

 
     그는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소저,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소. 소저가 나와 혼인한 후 우리

     둘 사이에 태어나는 첫번째 아이에  한해서 설 씨 성을 붙이면 어떻소?"

 
     "정말인가요?"
 

     "그,  그게.......  물론 두  분  어머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

     만......."

 
     "두 분 어머님이라고요?"
 

     설경경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다른 부인들에게서도 아이가 태어날 테니, 한 아이쯤 설 씨

     를 붙인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오만....... 설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오."


     "다른 부인들......!"
 

     설경경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돌연 노구룡을 향해 쌍장

     을 날렸다.
 

     펑!

 
     너무나 갑작스런 기습이라 노구룡은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정통

     으로 가슴을 얻어맞고 붕 날아가 맞은편 벽에 부딪쳤다.

 
     "아이쿠! 왜......, 왜 이러는 것이오?"
 

     노구룡은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설경경은

     만면에 살기를 띤 채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네놈은 상습적인 파렴치한이었구나!  내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

 
     위잉!
 

     다시 싸늘한  한풍이 날아왔다. 노구룡은 펄쩍  뛰어 피하며 외쳤다.

 
     "이거 왜 이러는 거요? 생명을  구해 준 대가를 이런 식으로 갚다

     니....... 취소요, 취소! 당신  같은 부인을 얻었다가 매일 밤 폭

     력을 행사하면 난 뼈도 못 추릴 것이오."

 
     펑! 퍼펑!

 
     설경경은 그가 피하자  재차 쫓아가며 빙하신장을 발출했다. 빙하

     장으로도 통하지 않자 쌍수를 현란하게 휘두르며 현음십이수를 시

     전했다.

 
     쐐애애액! 펑펑!
 

     와르르릉!
 

     한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만두시오! 이러다 깔려 죽겠소!"

 
     노구룡은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굴렸다. 그는 데굴데굴 굴러 우측

     으로 피했다가 한쪽 벽을 차고 신형을 날렸다.

 
     설경경은 그가 이렇게 변칙적인 신법을 구사할 줄은 몰랐다. 게다

     가 중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어 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

     다.

 
     "앗! 놔! 놓지 못해?"

 
     노구룡은 어느새 그녀의  맥문을 거머쥐고 있었다. 노구룡은 품속

     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그녀의 코앞에 들이밀며 물었다.
 

     "설웅의 쓸개가 필요하지 않으면 내가 다 먹어 버리겠소."

 
     "아......, 안 돼! 그건 제발......."

 
     "그럼 제발 좀 얌전하시오.  당신을 부인 삼지도 않을 테니, 설가

     의 아이를 낳든 말든 알아서 하면 될 것 아니오. 그리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것이니, 아무에게도  말 안 하면 될

     것 아니오?"

 

     "......."

 

     그 말에 설경경은 금세 얌전해졌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

     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여자는 또 누구죠?"

 

     노구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 부인이 되겠다고 쫓아다니는 여자요."

 
     설경경은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저런 여인이 또 있나요?"

 
     "음......, 그건 왜 묻소?"

 
     "대체 당신에게는 몇 명의 여자들이 있는 거죠?"

 
     "글쎄, 그게 계산을 해 봐야....... 억!"

 
     찰싹!

 
     노구룡의 뺨에 손바닥 도장이 찍혔다. 노구룡은 펄쩍 뒤로 물러나

     며 소리쳤다.
 

     "왜 때리는 거요?"


     "당신 같은 바람둥이는 맞아도 싸요."

 

     "어? 언제......?"

 

     방금 전의 말은 설경경이  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 깨어났는지 주

     자경이 일어나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동이 일어나

     는 바람에 동굴 천장이  무너져 내렸고, 그 충격에 그녀의 혈도가

     풀렸던 것이다.
 

     주자경은 설경경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저 사람은 천하를  돌아다니며 여인들이란 여인들은 모두 건드리

     고 다니는 바람둥이에요. 그러니 앞으로는 상대하지 말아요, 알았

     죠?"


     여심이란 미묘한 것이었다.  주자경이 그렇게 말하자 설경경의 눈

     알이 사르르 구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왜 저 사람을 쫓아다니는 거죠?"

 
     "그건......."

 
     주자경은 말문이 막힌 듯 더듬거리기만 했다.

 
     여자들은 참으로 이상했다.  죽겠다고 난리를 피우던 설경경은 언

     제 그랬냐는 듯 노구룡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특히 주자경

     이 출현한 뒤부터는 마치 그의  부인이라도 된 양 한 치도 떨어지

     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노구룡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주자경이 어디  보통 여인인가? 죽자 사자  이곳까지 쫓아온 것만

     해도 그녀의  집요함을 알만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곁에 설경경이란 여인이 붙어  있으니 주자경의 심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두 여인은 온종일 투닥거리며 말다툼이었다. 그 사이에 낀 노구룡

     은 천 리 만 리  달아나고 싶었지만, 두 여인이 눈 부릅뜨고 감시

     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끄응!"

 
     "휴우!"

     한숨 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노구룡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눕자니 왼쪽

     에서 옆구리를 꼬집어  비틀지를 않나, 왼쪽으로 눕자니 오른쪽에

     서 엉덩이를 마구 쥐어뜯지를  않나. 그러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반듯이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그것도 여의

     치가 않았다. 간신히 잠이  들라 치면 왼쪽에서 슬며시 손이 뻗어

     나와 그의 허리춤을  간질였고, 그러다가는 다시 오른쪽에서 손이

     조심스럽게 뻗어 와 가슴을 더듬었다.

 
     가만히 있으면 위아래의 손이  오르내리다 만나 서로의 손등을 꼬

     집어 뜯느라 난리가 아닌가?

     이런 사태는 밤이면 밤마다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방을 두 개 얻

     어 주자경과 설경경을 함께  재우고 혼자 잠을 청해 보았지만, 이

     역시 소용없는 일이었다. 두  여인은 도무지 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슬며시 한 여인이  그의 방으로 기어들어 오는가  싶으면 다시 또

     한 여인이 따라 들어와  서로 그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자기 아닌 다른  여자가 그와 함께 자는 것을 도저

     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사흘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운 노구룡은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살려 줘! 계속 이러면 죽어 버릴 거야!"

     결국 한 방에서 함께 자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 것이 이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맙소사! 둘만 갖고도 이  지경이니, 장차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

     인가?'

 
     노구룡은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객방 밖으로 나와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절 버리지 않을 거죠?"

 
     언제 나왔는지 설경경이 그의 뒤에서 다소곳한 음성으로 물었다.

      노구룡은 흠칫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겁에 질린 채

     객방 쪽을 힐끔거렸다.


     "안심해요. 그녀는 자고 있어요."

 
     "......?"

 
     설경경은 한숨을 쉬었다.

 
     "우린 합의를 봤어요. 이러다  정말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을 했어요. 그래서 하루씩 번갈아 가며......."
 

     부끄러운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구룡의  입이 쩍 벌어졌

     다.

 
     "그래, 하루씩 서로 양보하겠다는 말이오?"

 
     "말하자면......, 그래요."

 
     "끼야호!"

 
     노구룡은 환호성을 지르며 덥석 설경경을 껴안았다. 그는 마구 그

     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설경경은 순순히 그가 하는 대로 내

     버려 두었다.

      달빛이 은은하게 두 사람을 비추었다.

 
     노구룡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여인의 입술을 마음껏 농락하다가

     그만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

     니 덥석 설경경을 안고 걸어갔다.

     잠시 후 그는 화원의 나무에 그녀를 기대 세워 놓고는 히죽거리며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설경경은 눈을 반쯤 내리  감은 채 숨을 할딱거렸다. 그녀는 노구

     룡의 몸에서 풍기는 야릇한 체취에 온몸이 녹아 나는 듯한 기분이

     었다.

 
     "음......, 날 버리지 않을 거죠?"

 
     "그럼, 그럼."

 

     노구룡은 그녀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안심한 듯 슬며시 그

     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손바닥 가득 뭉클거리는 감촉에 그는 히죽

     거리며 용기를 내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달빛에 눈부시게  흰 젖가슴이 드러났

     다. 한족 여인들에  비해 두 배나 큰  풍만한 젖가슴이었다. 그는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입술을 그녀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두 개의 유실에 번갈아 가며  입맞추던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치마 속으로  슬며시 손을 밀어넣었다. 대리석처럼 매끄러

     운 허벅지 위를 기어오르던 손이 여인의 은밀한 부위를 가리고 있

     는 고의에 걸렸다.

 

     그는 고의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흐윽, 이 감촉.......'

 

     손가락 끝에 걸리는 부드러운  섬모에 그는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다.

 

     설경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노구룡의 애무와 그에게서 풍

     기는 향기에 도취되어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 깨닫

     지 못하고 있었다.

 

     사르륵.......

 

     옷자락이 하나 둘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설경경은 반라가

     된 채 나무에 기대어 몸을 비틀어 대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 위로

     노구룡의 입술이 거침없이 오르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구룡은 설경경의 한쪽 다리를  들고 마지막 자세를 취하고 있었

     다. 그런데.......

 

     "흥!"

 
     어디선가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막 운우(雲雨) 속으로 젖어들던 설경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녀는 화들짝 놀라며 냅다 노구룡을 떠밀었다.

 
     "안 돼요!"
 

     노구룡은 그만 볼썽사납게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어기

     적거리며 일어나 퉁명스럽게 외쳤다.

 
     "왜 안 된단 말이오? 분명 합의를 봤다고 하지 않았소?"


     설경경은 얼른 옷자락을 주워 몸을 가리며 엄숙하게 말했다.

 
     "우린 약속을  했어요. 당신과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누구도 당신을 먼저 차지하지 않는다고. 만일 약속을 어기면 당신

     곁에서 떠나기로 했단 말이에요."

 
     "맙소사!"

 
     노구룡은 절망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달빛은 환장할 정도로 밝기만 했다.

      방금 전  코웃음을 터뜨렸던 주자경이  저만치에서 전음을 보내었다.


     '명심해요. 앞으로  당신은 나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를 때까지는

     어떤 여자와도 일을 벌이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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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18장 전운(戰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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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무림에 평화가 도래한 지  이십여 년. 무림을 삼키려 했던 금륜맹

     의 혈풍을 잠재웠던 노팔룡  이후로 지금까지는 그런 대로 태평성

     대를 구가했던 무림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노팔룡의 아들 노구룡이 무산 요대곡에서 사해방의 개파대전을 무

     산시킨 이후 줄곧 떠돌던 새로운 패도 세력의 정체가 공공연히 무

     림에 회자되고 있었다.

     바로 비룡천이었다.

      철기방과 대륜표국이 세우려 했던 사해방 역시 비룡천의 선발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무림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룡천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것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다만 비룡천이 오래 전부터

     중원 무림을 암암리에 잠식하고  있다는 소문이 더욱 빠르게 퍼져

     갈 뿐이었다.

     무림인들이 전운을 느끼게 된 것은 중원 전역에서 일고 있는 심상

     치 않은 움직임 때문이었다.

      무산에서 패퇴했던 철기방이 다시 북방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

     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강북 무림의 표국을 장악했던 대륜표국

     도 철기방에 흡수된 채 중원 전역의 표국을  한 손에 틀어쥐었다.

      어디 그뿐이랴?

     황하와 양자강의 수로도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속속 넘어가고

     말았으니....... 동해를 주름잡던  흑룡단에 의해 장강수로십팔채

     가 넘어간 것을 계기로 수로 무림은 완전히 그들의 휘하에 떨어지

     고 말았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녹림마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림 총표파자 연자추가 돌연 휘하

     의 십만 녹림도에게  동정군산(洞庭群山)으로 집결하는 명령을 내

     렸던 것이다.


     급기야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던 녹림도들이 일제히 발호했다. 그

     들은 서슴없이 백주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동정군산으로 집결하는

     동안 온갖 만행(蠻行)을 일삼기도 했다.

 
     이런 일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결코 볼 수 없었던 작태였다. 녹림

     도는 도둑, 사기꾼, 점쟁이,  창녀, 산적 등으로 이루어진 무림의

     하류 잡배들로, 정도 무림인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감히 고

     개조차 들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수십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이러한 상황들은 장차 다가올

     대변란의 조짐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무림은 온통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도  무림은 아연 긴장했으며, 문하 제자들을

     속속 불러들여 머지않아 벌어질지도 모를 무림 대회전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림은 일촉즉발의 상태!

     폭풍 전야와도 같은 고요함이  질식할 듯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번쩍!
 

     고오오오......!

 
     뇌전인가? 아니다. 그것은  한 줄기 검광(劍光)이었다. 빛보다 빠

     르며, 뇌전보다  강한 검기가 허공 높이  솟구치더니 거대한 원을 그렸다.
 

     놀랍게도 그 원 속으로 삼라만상이 온통 빨려 들어갔다.
 

     쿠쿠쿠쿠.........

 
     꽈르르르릉!


     천지 개벽이 이러할까? 하늘과  땅은 온통 칠흑처럼 검게 변했고,

     고막을 울리는 굉음에 이어 지축이 흔들렸다.

 
     "아아......!"

 
     "오오......!"

 
     거대한 폭풍이 가라앉은 후 주위의 경물은 다시 광명을 되찾았다.

     그 가운데 수십 명이 일제히 부르짖는 탄성이 연이어졌다.

 
     보라!

 
     높이 백 장이  넘는 거대한 암벽이 마치  거울처럼 반반해져 있었

     다. 본래의 모습은 기암괴석이  솟아 있는 거친 암벽이었으나, 지
     금은 깨끗이 깎여 나가  거울처럼 매끄럽게 변해 버렸다. 단 일검

     (一劍)이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소천주시여! 축하드리옵니다!"

 
     "대공을 이룩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수십 명의 인물들이 일제히  바닥에 부복하여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암벽 앞.
 

     백삼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투명한 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스스스......!

 
     검 끝에서 서리와도 같은 예기가 흘러 나왔다.

 
     "으하하하하핫―! 드디어 빙령신검이 탄생했다. 이제 두려워할 것

     은 아무것도 없다! 기다려라. 이 백가람이 곧 천하를 접수하러 갈 테니."

     백가람이었던가?

 
     그는 빙글 돌아섰다.  그의 영준한 얼굴에서는 자신만만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그는 두 눈에 신비한 안광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비룡첩(飛龍帖)을 날려라!"
 

     "옛! 소천주님!"
 

     엎드려 있던 수하들 중 한 명이 복명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

     름 아닌 한천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가의 패륜아 한천을 위시하여

     흑룡방의 방주 흑룡신군, 녹림  총표파자 연자추 등이 모두 그 자

     리에 있었다.

     백가람은 한 명의 흑의 중년인을 향해 명을 내렸다.

 
     "각파에 심어 놓은  비룡대(飛龍隊)로 하여금 즉각 명을 수행하라

     고 일러라.  아울러 오는  중양절(重陽節)에 동정군산에서 비룡제

     (飛龍祭)를 연다고 선포하라. 그날 천하 무림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할 것이다."

 
     "복명!"
 

     흑의 중년인은 힘차게 복창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한천, 너는 아버님께  전서구를 날려라. 중양절 동정군산에서 아

     버님이 못다 이루신 한을 이 아들이 이루겠다고 말이다."

 
     한천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소천주."

 
     백가람은 돌아서 암벽을  우러러보았다. 그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

     이 흘러 나와 암벽을 녹여 버릴 듯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뇌령검법이 아무리 천하 제일의 검법이라 해도, 빙령신검이 완성

     된 이상  결코 내 적수가  아닐 것이다.  후후후, 기다려라, 노구룡!"

 
     휘류류륭.......

 
     백가람의 주위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경악(驚愕)!

      경천동지할 사태가 일어났다.
 

     구파일방을 위시하여  중원 정도 무림 387개  문파가 발칵 뒤집혔

     다. 각파의 장문신부를  상징하는 영부, 신물(信物)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각파의 상징이자 문주의 권위를 나타내는 생명보다 귀중한

     보물들이었다. 어떤 문파는  장문인의 영부가, 또는 신검이, 또는

     장문인에게만 전해져야 하는 비전의 무공 비급들이 감쪽같이 사라

     져 버렸다.


     대체 누가, 왜 그것들을 훔쳐 갔는가?

 
     원인은 곧 밝혀졌다. 각파의  진산보물들을 훔쳐 간 것은 바로 신

     비의 방파인 비룡천의  짓이었다. 진산보물들이 비장되어 있던 곳

     에 다음과 같은 첩지 한 장이 달랑 남겨졌던 것이다.


     <귀문(貴門)의 신물을 잠시 가져가니, 되찾으려면 오는 중양절 동

     정군산으로 와 비룡제에 참석하여 경배하라!

 
                                ― 비룡천 소천주 백가람 서.>

 

     쿠쿠쿠쿵.......


     무림은 흔들렸다.

      각파의 진산보물들을 강탈당한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비룡

     제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비록 짧은  문구였으나 첩지의 내용이  시사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진산보물들을  미끼로 무림의 정도세력들을

     일거에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구월 구일 중양절까지는 불과 이 개월 남짓 남아 있었다. 정도 무

     림인들은 대책을 세우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천하에 산재해 있

     는 구파일방을 위시한 387개 정도 문파에서 감쪽같이 신물이 사라

     진 일이 바로 그  점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룡천이 이

     미 오래 전부터 치밀한 계획하에 무림을 장악하기 위한 수순을 밟

     아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 정도 무림은 금륜맹 격퇴 이후 지나친 오만과 안이함에 빠

     져 있었다. 희대의 영웅  노팔룡 대협이 무림을 도탄에서 건져 낸

     후 다시는 무림에 위기가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자족에 빠져 있었

     던 것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 진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각파는 뒤늦게 나마

     전열을 가다듬어  중양절의 무림 대회전에  참여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문제는 비룡천의 소천주인 백가람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므로 그

     의 역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까

     지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과거 무림을 위기에 빠뜨렸던 금

     륜맹을 능가하는  초유의 힘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무림에는 본격적으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허허......, 웬일이오, 여령?"

 
     태산 관일봉 중턱에 있는 청운관.

 
     정자에서 느긋이 양광(陽光)을  쪼이며 쏟아지는 오수(午睡)에 끄

     덕끄덕 졸던 노팔룡은 화원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하여령을 보자

     고개를 들며 물었다.

     요즘 들어 그가 청운관 후면에 있는 별원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정

     자에 앉아 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과연 그가 지난날의 대협 노

     팔룡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검법 수련은 물론이려니와, 당금 무림을 휩쓸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대해서도 그는 일언반구 말이 없을 뿐더러,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도운하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한담을 나누는 것이 그의 소일

     거리였기에, 수십  차례나 그에게 당금 무림의  위기에 대해 입이

     닳도록 고하던 청운관주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당신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여령은 정자에 오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뭘 생각하다니?"
 

     노팔룡은 눈을 멀뚱거리며 하여령을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무림의 안위에  대해 눈곱만치라도 걱정하긴 하는 거냐구요?"

 
     "무림의 안위라니?"

 
     "답답한 양반! 아, 전  무림이 비룡천인가 뭔가 하는 단체 때문에

     발칵 뒤집혔는데도 아무 생각도 없단 말이에요?"

 
     하여령은 자못 흥분한 어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전에  볼 수 없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

     은색 경장에 오래 전부터 착용하지 않던 검까지 메고 있었다.

 
     "허허......, 그렇게 차리고 보니 지난날이 생각나는구려."

 
     "......?"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말이오. 그때 그  폭포에서 소백과 싸울

     때의 당신 모습이 생각나는구려. 그때......."
 

     "그만둬요!"
 

     하여령은 고함을 빽 내질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노팔룡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팔룡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느물거렸다.

 
     "그때 당신은 천사같이 예뻤지. 난 당신이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줄 알고 열심히 치료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날 걷어차고 구박했지."

 
     "그만 하라니까요!"
 

     하여령은 펄쩍 뛰며 소리쳤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질 일이었다.

      당시 그녀는 천하  제일 여검객이 되기 위해  강호를 떠돌 때였으

     나, 정말 재수 없게도 노팔룡이란 바보 인간을 만나 그 고고한 뜻

     이 좌절되지 않았던가?  아니, 좌절 정도가 아니었다. 여인으로서

     는 말도 못 할 치욕적인 놀림감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도대체가 여자란 존재를 몰라도  그렇게 모르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가슴이 부었다느니, 소백이  따먹어서 달려 있어야 할 것

     이 없다느니....... 치료를 한답시고 멀쩡한 그곳에 웬 진득한 고

     약을 자꾸만 밀어넣던 그 어이없는 짓이라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과거사를 새삼스럽게 들추며 키들

     거리는 노팔룡의 얼굴을 향해  급기야 그녀는 손바닥을 휘두를 수

     밖에 없었다.

 
     "이크! 진정하시오, 여령."
 

     노팔룡은 앉은 채 빙글  좌측으로 돌아가더니 어느새 그녀의 뒤쪽

     에서 덥석 허리를 껴안는 것이 아닌가?


     "이러지 마시오. 당신도  이젠 나이를 생각해야지. 지아비의 뺨을

     치면 쓰겠소?"
 

     "노, 놓지 못하겠어요?"

 
     하여령은 몸을 마구 비틀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노팔룡은 유들유들해지기만 했다. 그는 두 손으

     로 하여령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당신은 여전히  매력적이란 말이야. 흠

     흠......, 아니야. 구룡이 놈을 낳은 이후로 당신 가슴은 더욱 커졌어."

     "이 양반이......."
 

     하여령의 음성이 풀리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그녀

     는 전신에 맥이 빠지며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비틀거렸다.

 
     "자, 햇살이 좋지 않소. 꽃향기도 진동하니 우리 이곳에서 오랜만에......."

 
     가슴 옷섶을 쑥 뚫고 거침없이 파고드는 투박한 손. 그 손은 터질

     듯이 영근 하여령의  수밀도 같은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꼬물거리는 사이에 하여령은 그만 신음을 내고 말았다.

 
     "으음......."

 
     "그것 보시오. 여령도 좋으면서......."


     노팔룡은 신이 나는 듯 이번에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좋은 냄새야. 꽃향기도 여령의 체취에 비할 바가 아니지."

 
     어느새 하여령의 옷이  풀어헤쳐지고 있었다. 이곳은 신성한 도장

     이었으나, 청운관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어 아무도 올 사람이 없었다.

 
     팔랑.......

 
     노란 나비  한 마리가 화원에서 날아올랐다.  나비는 정자 안으로

     호르르 날아들었다가 무엇에 놀란  듯 화들짝 치솟아 저만치 사라

     졌다. 

     "아아......."

 
     여인의 열락에 젖은  신음 소리가 나른한 햇살을  타고 흘러 나갔다.

      정자의 난간 밖으로 여인의  희디흰 팔이 걸쳐진 채 흔들렸다. 그

     뒤에서 노팔룡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희열에 젖어 있다. 그의 두

     손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영글어 있는 하여령의 젖가슴을 움켜

     쥔 채 이따금 위치를 바꾸었다.

 
     "난 말이오, 여령."

 
     "으응......."

 
     하여령의 콧소리가 자못  미묘롭다. 언제 앙칼지게 굴었느냐는 듯

     머리칼 몇 올이  흘러내린 그녀의 이마 아래  오뚝한 콧날에는 몇

     가닥 신열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가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소.

     이렇게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으니 말이오."

 
     하여령은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폭발할 듯한 열락이 그녀의 내부

     깊은 곳에서 파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을 벌려 뭐라 대답하려 했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오. 나보다 더  행복한 놈이 있더란 말이오. 그가 누

     구냐 하면......."

 
     하여령은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내부에 꽉 찼던 무엇인가가 힘

     찬 분출을 시작했다.
 

     "바로 구룡이란 생각이 든단 말이오."
 

     "아아!"

 
     하여령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녀는 머리가 텅  비고 온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끼며 전신을 쭉 뻗었다.

     노팔룡은 땀에 젖어 이마  위에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떼어

     주며 말했다.

 
     "그러니 그 아이의 행복을 지켜 주도록 합시다. 응, 여령?"

 
     하여령은 그의 품에 나른한 몸을 맡기고 있다 갑자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요! 그 아이마저 당신 같은 바람둥이로 만들 순 없어요!"

 
     "허허......, 어쩌겠소? 놈도 아비를  닮은 것을. 이제 와서 어떻

     게 한단 말이오?"
 

     하여령은 발끈 하며 그의  품에서 몸을 뗐다. 그녀는 서둘러 흐트

     러진 옷을 여미며 야멸차게 말했다.


     "천하의 바람둥이 같으니! 아들마저 난봉꾼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난 그렇게 못 해요!"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단정짓듯 말했다.

 
     "내 며느리는 오직 약명 그 아이뿐이에요. 그러니 당신도 그런 줄

     아세요."
 

     노팔룡은 히죽 웃었다.
 

     "약명이란 아이가 당신 곁을 떠나지 않더니 든든한 후원자를 얻었

     구만. 허허......, 하지만 잘 될까?"
 

     "안 되면요?"


     하여령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으나 노팔룡은 껄껄 웃을 뿐이었다.

      하늘에 뭉게구름이 흐르는 평화로운 여름날이었다. 노팔룡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한 뒤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구룡이 이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기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거지?"
 


     "내 이름은 노구룡이오."

 
     "......?"

 

     "......?"

 

     두 여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구룡을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무슨 말인가? 누가 노구룡이 아니라고 했단 말인가?

 
     "내 아버님의 존함은 노팔룡이오."

 
     노구룡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그의 앞에는 주자경과 설경경

     이 눈을 크게 뜬 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남이녀가 있는

     곳은 복우산(伏牛山)의 한 산동(山洞)이었다.

      동굴은 본래 산짐승의 거처인 듯했으나, 바닥에는 마른 짚이 깔려

     있었고, 솥 단지를  비롯한 가재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왜 구룡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냐 하면 말이오, 아버님께서

     직접 지으신 이름이기  때문이오. 아버님께서는 날 당신의 분신으

     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구룡이란 이름을 지어 주셨단 말이오."

 
     "그런데요?"

 
     주자경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

     을 잡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노구룡은 손가락으로 동굴 안쪽을 가리켰다.

 
     "우리 세 사람이 이곳에서 함께 기거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단

     말이오."

 
     "그게 어쨌단 말인가요?"

      이번에는 설경경이 물었다.

 
     "밤이면 밤마다 난......, 난  잠을 잘 수가 없었소. 이러다간 진

     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을 깨우치긴커녕  뼈다귀도 못 추리겠단 말이오!"

 
     두 여인이 동시에 외쳤다.

 
     "아니, 왜요?"

 
     노구룡은 울상을 지었다.

 
     "몰라서 하는  말이오? 내 아버님이 누구요?  노팔룡 대협이 아니

     오? 그리고 내 이름은 노구룡이란 말이오!"
 

     노구룡의 말은 비명에 가까웠다.  두 여인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어쨌단  말이에요? 노팔룡 대협과  노구룡이란 이름이 무슨

     관계가......."

 
     주자경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갔다.

      노구룡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바지 앞섶을 가리켰다. 그의 앞섶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난 참을 수가 없단 말이오.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그 방면

     에 남다른 체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밤마다 서로를 감시하며 잠도  자지 못하게 하니, 난들 어쩌란 말

     이오? 내 두  분 어머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으셨소.  사이 좋은 두

     분은 아버님과 더불어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해 오셨단 말이오. 그

     런데 당신들은 내가 말라 죽어야 속이 시원하단 말이오?"

 
     "......!"

 
     두 여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존심

     강하기로 치면 일국의 공주인 주자경이나 빙궁의 소궁주인 설경경

     이나 오십 보  백 보가 아닌가? 그런  그녀들이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신경전이 벌써 수개월 째 지속되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미 노구룡에게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였다. 하지만 고

     고한 자존심이 최후의 선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한 사람 만이라면 벌써 쌀이 익어 밥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

     다. 하지만 번연히 두  여인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는 이것도 저것

     도 허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행여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노구룡과 일(?)이 벌어질까

     봐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고 서로를 감시했다. 그 바람에 노구룡

     은 천하 절색인  두 미녀와 자나깨나 함께  지내면서도 아직껏 손

     한 번 대 볼 수 없었다.

     잠을 잘 때도 그는 두  여인 사이에 누워 자야 했다. 이쪽으로 돌

     아누우면 저쪽에서  꼬집어 뜯고,  저쪽으로 돌아누우면 이쪽에서

     꼬집어 뜯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노구룡의 이유(?) 있는 항변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가는 듯했다.

     내친김에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당금 무림의 상황을 말이오. 한낱 사사로운

     애정 따위로 시간을 끌며 대사를 망쳐서야 쓰겠소? 애당초 당신들

     은 뭐라고 했소?  비룡천의 겁난을 구해 낼  사람은 나밖에 없다.

     더구나 백가람이 빙령신검을 완성했으니 열심히 진우주천상천하유

     아독존검법을 익혀 그의 손에서 무림을 구해 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

 
     "......."

 
     두 여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그들은 비룡천이 전 무림을 상대로 선전 포고한 사실을 알고 있었

     다. 특히 설경경은 비룡천의 소천주 백가람이 빙궁에서 빙정을 강

     탈해 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노구룡의 뇌령검법을  격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빙정

     을 가져갔으니 뇌령검법과는  상극인 빙령신검이 완성됐음은 불문

     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녀들은 노구룡으로 하여금 이곳 산동에서 백가람을 이기

     기 위한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을 익히라고  설득했던 것이

     다. 그것만이  무림을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노구룡은 가자미눈을  하고 두 여인의 기색을  살폈다. 어느 정도

     씨가 먹혀 가는 듯이 보이자 그는 더욱 처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데 검법을 익히기는커녕  나날이 수척해지기만 하니 무슨 수로

     백가람이란 자를 이기겠소? 이것 좀 보시오."

     노구룡은 상의를 훌러덩 벗어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

     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갈비뼈가 온통 드러나 있지 않소?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삐쩍 말

     라만 가니 이러다간 싸워 보기도 전에 죽고 말 거요."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당황스

     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어떻게 하죠?"

 
     동시에 똑같은 질문을 쏟아  낸 주자경과 설경경은 곧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인  특유의 질투심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제발 부탁이오. 날 혼자 내버려 두든가, 아니면 선택을 하시오."

 
     "선택이라니요?"
 

     두 여인은 다시 똑같이 반문했다.

 
     노구룡은 두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야릇해지고

     있었다.
 

     "두 분 중 한 명이 양보하란 말이오."

 
     "뭘......, 뭘 양보하란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음......."

     노구룡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나 용기를 낸 듯 손가락으로 아

     랫도리의 불룩한 물건을 툭 치며 말했다.

 
     "이놈을 잠재워야  마음을 가다듬고 검법을 완성할  수 있단 말이

     오. 그러니 두 사람 중  한 명이 살신성인하는 기분으로 날 좀 도

     와 달란 말이오."
 

     살신성인이라니? 그 말이 이런 데 쓰는 말이었던가?

      두 여인은 안색이  변하더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똑같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거의 동시에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내가 살신성인을......."

 
     '맙소사, 틀렸군!'

 
     노구룡은 절망에  빠져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그는 말하다 말고

     서로 삿대질을 해 대는 두 여인을 뒤로 하고 동굴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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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19장 이상한 살신성인(殺身成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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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쏴아아아!

      쿠쿠쿠쿵!

      폭포수가 지축을 진동하며 쏟아져 내렸다. 복우산 등선폭(登仙瀑)

     의 물줄기는 웅장한 기세로 삼십 장 아래 담으로 쏟아졌다.

     자욱한 물보라는  인근 백여 장을 물안개로  뒤덮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담의  물은 끊임없이 파도치며 계곡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복우산 서쪽 능선을 따라 가다  도끼로 찍어 낸 듯한 절곡으로 접

     어들면 등선폭이 나온다.  지형이 워낙 험해 일  년 가야 인적 한

     번 볼 수 없는 곳이다.

 
     "휴우......."

 

     노구룡은 폭포 아래 널찍한 바위에 주저앉은 채 연신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웅장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의욕도 없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옷은 물에 푹 젖어 있었다. 벌써 한 달째 등선폭을 뚫어지라

     바라보았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휴우우우!"

 
     한숨 소리가 폭포수 소리를 덮을 정도였다. 노구룡은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시피 했다.

 
     '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넷이나 되다니....... 앞으로

     의 일이 캄캄하기만 하구나.'

 
     노구룡은 백  번을 생각해도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주자

     경, 설경경에게 붙들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더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진 것이다.
 

     '아버님께서 아시면 분명 내  아들 될 자격이 없는 놈이라고 욕하실 거야.'

 
     그는 다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널찍한 바위는 마치 침상 같았고, 물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어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웅장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선명하게

     보였다. 폭포수를 바라보던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 많은 양의 폭포수는 모두 어디서 오는 걸까?'

 
     단순한 의문이었다. 폭포수야  절벽 위쪽에서 떨어지는 물이 아니겠는가?

 
     '하늘에는 구름이 있다. 구름이  모여 비가 되고, 비가 내려 개울

     을 이루고, 개울이 흘러내려  폭포수가....... 그럼 이 폭포는 어

     디로 흘러갈까?'
 

     자연 순환의 법칙.

 
     그것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대자연의 순리였다. 노구룡은 멍하

     니 폭포수의 물을 바라보다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 검법도  마찬가지.......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 행하면

     그것이 곧 천하 제일의 검법이 된다!"

     크게 외친 노구룡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폭포는 폭포일 뿐이었다.

      그는 풀죽은  눈으로 웅장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바라보았

     다. 어린 시절 검법을  익히기 위해 바닷가에서 수없이 목검을 휘

     둘렀고, 그때마다 숨이 차 헉헉거리곤 했다.

      부친인 노팔룡이 가르쳐 준 검법은 하나같이 이상하기만 했다. 그

     것은 일정한 법도도 없었고, 형식조차 괴상망측하기만 했다.

 

     그는 십육 세가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목검을 휘두르기만

     했는데, 그때마다 모친 하여령이  그 광경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차곤 했다.

 
     하여령이 검법을  가르쳐 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검법상의 원리를

     어느 정도 익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노팔룡은 고개

     를 가로젓곤 했다.

 
     "쯧쯧! 아니야....... 그래 가지고서는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

     법을 익힐 수 없어."

 
     노구룡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부친은 분명 무림을  위기에서 건져 낸 대영웅이자 대협객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가르쳐 주는 검법은 도무지 쓸모가 없는 것뿐이었다.

     노팔룡은 그가 머리가 나쁘다고 투덜댔고, 노구룡은 그 말이 맞다

     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체질이 강건했고, 작은어머니 도운하로

     부터 소림의 정종심법(正宗心法)을  전수받아 튼튼한 내공의 기초

     가 있어서 그런 대로 무공을 쌓아 나갈 수 있었다.

      강호에 나왔을  때 그는 우연히  방백을 만나 자비공공무한도법을

     익히게 되었다.

      천하 제일의 요리사인 방백의  도마질하는 도법은 그의 생리에 맞

     았다. 그는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보다 자비공공무한도법이

     더욱 마음에 들었기에 틈만 나면 주방용 칼을 휘두르며 연습을 했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에 부닥쳐 있었다.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설경경의 말은 그에게 자극을 주었다.

 
     '그자가 빙정(氷精)을 가져갔으니  곧 빙령신검을 완성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뇌령일식으로도  그자를 꺾을 수가  없게 돼요.'

 
     부친에게 익힌 검법 중  가장 쓸모 있는 것은 뇌령일식이었다. 지

     난날 천하 제일 기인이었던 뇌진자가 남긴 무공이었다.

     현재 그의 최고  무공인 셈이었다. 그런데 뇌령일식으로도 백가람

     을 꺾을 수 없다니.......

     노구룡은 우울한 눈빛으로  폭포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던 중 무

     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저건......?'
 

     촤촤촤 !

 
     웅장한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떼

     가 있었다. 팔뚝만한 크기의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폭포수를 거슬

     러 오르고 있는 것이다.

     노구룡은 얼핏 이해가 안 되었다.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다니.......'

 
     그렇다.
 

     폭포수의 압력은 능히 천만  근이 넘는다. 그런 엄청난 수압을 어

     찌 물고기가 거슬러 오른단 말인가?

 
     벌써 삼 일째였다.

      노구룡은 폭포수 아래  바위에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

     다. 그는 뚫어져라 폭포만을  노려보며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주자경과 설경경이 수십 번이나 찾아와 먹음직스런 음식을 권했지

     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이러다 죽겠어요. 조금만 들어 보세요, 네?"

 
     노구룡은 그녀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넋이 나간 듯 폭포만

     을 노려볼 뿐이었다.
 

     촤촤촤아악!
 
     그의 눈에는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떼만 보였다. 물고

     기들은 거침없이  삼십 장 높이의  폭포수를 가로지르며 올라가고 있었다.

 
     "......."

 
     사 일째.

 
     노구룡의 얼굴은 패여 가고 있었다.  두 눈은 십 리는 더 기어 들

     어갔으며 부쩍 말라 버렸다. 그러나 눈빛만은 초롱초롱한 빛을 발했다.

      이따금 그는 누운 채  손을 움직였다. 가로 세로 가로지르는 손짓

     은 도무지 두서가 없어 보였다. 일정한 법도도, 방식도 없이 그저

     허우적거리는 것에 불과해 보였다.

     "어떡하죠? 저러다 미쳐 버리기라도 하면......."

 
     "글쎄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노구룡을  바라보고 있는 두 여인의 얼굴

     에는 수심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

     구룡이 왜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식사도

     거부한 채 헛손질만  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두 여인은 똑같이 부르짖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여

     인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 그것 때문에?"

 
     그것 때문이라니?
 

     두 여인은 서로의 생각을 읽어 내고는 그만 똑같이 얼굴이 빨개지

     고 말았다. 한동안 얼굴을  붉힌 채 서로를 탐색하듯 빤히 바라보

     던 두 여인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 내가 양보할게요."

 
     "아니, 내가......."

 
     "내가 양보하겠어요."

 
     "무슨 소리! 내가 양보한다니까요!"

 
     두 여인은 이마를 마주 대고 으르렁거렸다. 한동안 팽팽하게 서로

     를 노려보던 두 여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야아아아―!"

 
     돌연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엄청난 고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

     다. 두 여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치떠졌다.

 
     "저......, 저럴 수가!"

 
     노구룡이었다. 바위에  누워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폭포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천 근

     이 넘는 압력으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꽈르르르릉!
 

     폭포수는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렸다. 자욱한 포말을 뿜어내는 폭

     포수 속에 뛰어든 노구룡의 몸이 찰나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으아아아아아―!"

     폭포수의 굉음 속에서 노구룡의 고함이 간헐적으로 흘러 나왔다.

 
     "어머머!"

 
     두 여인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노구룡의 사라졌던

     몸이 폭포수 속에서 보였다. 그는 삼 장 가량 폭포수를 거슬러 올

     라간 것이다.
 

     "우아아악!"
 

     돌연 멱따는 듯한 비명과  함께 노구룡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그

     는 폭포수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했다. 폭포수 아래의 담으

     로 떨어진 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휙!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여인의 몸이 날아갔다.
 

     첨벙!

 
     두 여인은 담  속으로 뛰어들었다.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자연적으

     로 형성된 담은 무척  깊었다. 두 여인은 수중으로 잠수하며 노구

     룡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노구룡은 혼절한 듯 사지를 늘어뜨린 채 빙글빙글 돌며 담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두 여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잠수하여 거의 동

     시에 그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쏴아아!

 
     두 여인은 동시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위 위에 노구룡을 내려

     놓은 두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두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서로 똑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주자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선 동굴 안으로 옮겨야겠어요."

 
     "그래요."

 
     노구룡은 동굴 안으로 옮겨진 뒤에도 좀처럼 깨어날 줄을 몰랐다.

     기실 그는 사 일 동안  탈진할 대로 탈진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

     력을 끌어올려  폭포수로 뛰어든 탓에  기맥(氣脈)이 흩어져 버린

     것이었다.

 
     사 일 동안 폭포수를  바라보며 검법의 오의(奧意)를 참수하던 그

     는 홀연히 머릿속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폭포수를 거슬러 오

     르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보고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체력이 바닥난 것을 알지 못한 채 뛰어들었다가 폭

     포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퉁겨져 나갔다.

 
     "어떡하죠?"

 
     설경경은 노구룡을 내려다보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주자

     경이 조금 나았다.
 
     "일단 뭘 좀 먹여야겠어요."

 
     "알았어요. 그럼......."

 
     설경경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밖으로 사라졌다.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그녀는 무엇인가를  받쳐 들고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김이 나는 죽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어죽(魚粥)이에요. 이걸 먹이면 기운을 차릴지도 몰라요."

      설경경은 어죽 그릇을 든 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먹이죠?"

     주자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끓여 왔으니 직접 먹여요."
 

     "......?"
 

     "이 사람은 의식을  잃고 있으니 직접 먹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난 밖에 나가 있겠어요."
 

     주자경은 설경경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설

     경경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래......, 일단 이분을 깨어나게 하고 볼 일이야."

     그녀는 노구룡의 옆에 주저앉았다.

      어죽을 한 숟갈 떠서  노구룡의 입술로 가져가 보았으나 노구룡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설사  억지로 입술을 벌린다 한들 어죽을 목

     구멍으로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설경경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어죽을 한 입 머금은 후 노구룡의 입

     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혀끝으로 살며시  노구룡의 입술을 벌렸다. 단단한 치아가

     혀끝에 부딪치자 혀로  치아 사이를 밀어붙였다. 마침내 노구룡의

     치아가 열리자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어죽을 흘려 넣었다.

      그런 식으로 어죽 한 그릇을  다 먹일 때까지 그녀는 혼신의 힘을

     쏟느라 전신이 땀으로 젖고 말았다.

      본래 그녀는 북방  미녀의 피를 받아 중원  여인과는 피부 빛이나

     몸매가 확연히 틀렸다. 피부는 백설같이 희었으며, 머리카락은 금

     발이었고, 육체의 선은 들어가고 나올 곳이 뚜렷하게 구분될 정도

     로 굴곡이 풍부했다.

 
     "하아......."
 

     설경경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입을 맞춘  채 어죽을 먹이느라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땀으로 젖은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노구룡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겼고, 그  향기를 맡자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비볐다. 어죽

     을 다 먹였지만, 그녀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몸부림쳤다.

     문득 노구룡의 손이 스르르  움직이더니 그녀의 커다란 둔부를 더듬었다.

 
     "아......."

 
     노구룡의 손이 그녀의 팽팽한  둔부 사이로 파고들자 설경경은 고

     개를 젖히며 숨넘어가는  신음을 발했다. 그녀의 눈빛은 몽롱하게

     풀렸고, 입술은 크게 벌어졌다.

      노구룡의 손이 그녀의  치마를 들추었다. 이윽고 비단결처럼 매끄

     러운 허벅지 사이로 그의 손이 사라졌다.

 
     "아학!"
 

     설경경은 다시 숨넘어가는  소리를 발하며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힘이 풀리며 노구룡의 가슴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노구룡의 몸이 움직이더니 그녀를 깔아 눕히고는 위로 올

     라탔다.

 
     "아아......."

 
     설경경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연신 백치 같은 신음을 발했다. 노구

     룡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오르

     고 있었다.

 
     기실 그는 벌써부터 깨어  있었다. 다만 일부러 의식을 잃은 척하

     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죽을 먹이기 위해 설경경의 부드럽고 달콤

     한 입술이 다가올 때마다  그는 짜릿한 쾌감을 맛보았고, 그 느낌

     을 즐기기 위해 혼절한 척했던 것이다.


     사르륵!

 
     옷이 벗겨져 나갔다. 설경경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느끼

     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몸에서 옷이 하나씩 벗겨져 나가고 있

     음에도 가느다란 신음만 흘릴  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까

     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전라가 되고 말았다.

 
     "히야!"

 
     노구룡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설경경

     의 나신은 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젖가슴은 마치 수박 덩이

     를 얹어 놓은 듯 풍만했다. 노구룡의 머리만큼이나 컸다.

     어디 그뿐이랴?

 
     기름기가 자르르 도는  피부며, 쭉 뻗어 내린  대리석 같은 다리,

     풍요로운 아랫배였다.  비밀의 삼각주에는  머리칼과 같은 금색의

     삼림이 짙게 우거져 있었다.

 
     노구룡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기막히구나!"

 
     그의 고개가 떨어졌다.

 

     그는 수박만큼  큰 유방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겁고 물컹한

     젖가슴 사이에서 미친 듯이 고개를 움직였다.

     그때 홀연히 입 안으로 빨려 드는 것이 있었다. 앵두같이 붉고 달

     콤한 유실(乳實)이었다.

      그는 유실을 이빨 사이에 넣고 가볍게 깨물었다.

 
     "아!"
 

     설경경의 입에서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

     시에 그녀의 허리가 위로  퉁겨졌다. 그 바람에 노구룡도 훌쩍 뛰

     어올랐다가 떨어졌다.

      그는 입 안  가득 빨려 온 유실을 힘껏  빨아 당기며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은 묻어날 듯 부드러운  나신을 연신 아래위로

     쓰다듬기에 바빴다.


     어느 한 순간 그의 손끝에 고실고실한 감촉이 와 닿았다.

 
     '히익.'
 

     숲은 젖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 하나가 숲 사이의 옹달샘으로 빨

     려 들어갔다.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아아!"

 
     설경경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더니  그의 손가락을 무섭게 빨아 당겼다.

      노구룡은 깜짝 놀랐다. 그는 황급히 손을 뗀 후 고개를 돌려 아래

     쪽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삼림에 이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동안 금빛 숲을 노려보던 그의 고개가 서서히 숙여졌다.

 
     '오오......, 이대로 죽어도 좋아!'
 

     그의 머리는 설경경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파묻힌 채 흔들렸다. 설

     경경의 손이 허공을 가로젓더니 그의 목을 낚아챘다.

 
     "윽!"

 
     노구룡은 비명을 질렀다.  목덜미에 날카로운 손톱이 파고든 것이

     다. 어찌나 세차게 박혔는지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깟 아픔이 대수랴!
 
     마침내 그는 황급히 옷을  벗어 던졌다. 그의 대물은 지금까지 본

     것보다 몇 배나 늠름한 모습으로 힘차게 허공을 휘저어 대고 있었다.

 
     '아버님! 소자 드디어 아버님의 자식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구룡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설경경을 노려보다가 서서히 무릎

     을 꿇었다. 설경경의 대리석  같은 다리가 저절로 문을 열고 있었

     다. 황금빛 사원의 문도 그에 따라 활짝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눈을 스르르 감으며 힘차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꺄아아아아악!"


     불현듯 비명이 터져 나오자  동굴 밖에서 서성이던 주자경은 깜짝

     놀라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흐아아아아악!"

 
     뒤이어 나온 비명은 노구룡의 것이었다.

     주자경은 안색이  변해 땅을 박차고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막 동굴 안쪽에  들어서던 그녀는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오오! 세상에!'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너무나 민망한 풍경이었다. 노구룡은 바닥

     에 큰 대자로 누워 있었고,  그의 배 위에 설경경이 올라탄 채 말

     을 타듯이 힘차게 구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주자경은 처음에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두 사람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것이 뜨악했을 뿐이었다.

     곧 그녀의 눈이 두 사람의 겹쳐진 부분으로 향하는 순간.......

 
     "어머머멋!"

 
     그녀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퉁

     겨지듯 동굴 밖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세상에, 세상에....... 그럴 수가......!'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단숨에 십 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신형을 멈추고도 그녀의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될 줄을 몰랐다.

     발랑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꼬옥 누르고 연신 가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쏴아아.......

     달빛이 비치는 폭포수.

      주자경은 담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낮에 본 장면이 자꾸만 눈

     에 어른거려 도무지 쿵쾅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동굴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홀로 이곳으로 와 목욕을 하는 중이었다.
 

     '어쩜, 그럴 수가 있지......? 어쩜.......'

 
     그녀는 물속에 머리를 담갔다가 한참만에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

     래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였다.

 
     '......?'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노구룡이 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얼른 작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

     이 가빠 왔다.


     '다행이야....... 어쨌든 회복되었으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옷을 벗어 둔 곳으로 가기 위

     해서였다. 그런데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저런.'

 
     그녀는 기겁했다. 노구룡이 갑자기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달빛 아래 노구룡의 우람한 근육이 드러났다. 상체는 마치 바위처

     럼 단단했고, 하체도 기둥처럼 튼튼했다.

      주자경은 얼굴이 화끈거려 눈  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어찌된 셈

     인지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노구룡을 바라보았다.

      노구룡은 벌거벗은 채 폭포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우람한 나

     신을 바라보던  주자경의 눈길이 차츰 아래로  내려오다가 그만 '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사나이의 다리 사이에서 장대한 육괴가

     보였던 것이다.

 
     그때였다.

 
     풍덩!
 

     노구룡의 모습이 사라졌다. 담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주자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살며시 누르며 조심스럽게 움

     직였다. 옷을 벗어 둔  곳으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헤엄

     쳐 갔다.
 

     그녀는 들키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손발을 움직였다. 순간 갑자

     기 무엇인가가 다리를 확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엄마야!"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몸이 쑥 하고 물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졸지에 수중으로  끌려간 그녀는 공포감으로 인해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이......, 이무기?'
 

     무엇인가 차가운 것이 그녀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녀는 불현듯 폭

     포수 아래 담에는 천 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민간 전설이

     떠올랐다.

 
     '아아! 이무기야, 이무기!'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발버둥쳤다. 그러나 다리를 휘감은 이무

     기는 좀처럼 떨어져 나갈  줄 몰랐다. 아니,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더 그녀의 다리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주자경은 입을 벌려 비명을 토하려는 순간 왈칵 물을 삼키고 말았

     다. 그 바람에 전신에 맥이  탁 풀리며 힘이 빠졌다. 그러자 이번

     에는 미끈한 물체가 그녀의 허리를 휘감는 것이었다.

 
     '사람 살려!'

 
     수중이니 비명이  나올 리가 없었다. 물을  먹은 데다 공포감으로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그때였다.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는 손길이 있었다.

      '악!'

 
     그녀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달빛이 교교하게 떨어져 내렸다.

 
     '......?'

 
     주자경은 살며시 눈을 떴다. 휘황한 달빛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

     녀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무기?'

 
     벌떡 일어서려는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정말 아름답구려, 공주."
 

     "누......, 누구?"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노구룡이었다. 그는 헤벌쭉 웃고 있었다.

 

     "꺄악! 당신......."
 

     그녀는 더 말할 수  없었다. 노구룡의 두터운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그녀는 발버둥치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야릇한 향기가 훅 풍기더니 그만 전신이 노곤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음."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 미끈한 혀가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설육을 맞이해 나갔다.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말할 수

     없이 짜릿한 느낌이 전류처럼 전신을 관통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젓더니 노구룡의 목을 휘감았다. 갑자기 몸이

     일으켜지더니 노구룡의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바위 위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실오

     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주자경은 자연스럽게 노구룡의  무릎 위에 걸터앉게 되었다. 노구

     룡은 그녀의 둔부를 껴안은 채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쏴아아....... 쿠쿵쿵.......

 
     달빛이 휘황한 가운데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굉음이 고막을 울

     렸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입술과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내는 야릇한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이 전부였다.

     문득 다시 한 번  몸이 번쩍 들려지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주자경

     은 찌르는  듯한 통증을 하반신에서 느꼈다.  그녀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고운 아미가 찌푸려지는 순간 귓전에 뜨거운 숨이 퍼부어졌다.

 
     "사랑하오, 자경."


     "아......."

 
     아픔은 순간에 불과했다. 무엇인가  그녀의 내부를 꽉 채웠고, 그

     느낌은 곧 중추신경을 타고 올라 짜릿한 전류로 바뀌며 그녀의 혈

     관을 부풀게 했다.

     그녀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이상야릇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

     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아아아아......."

 
     기묘한 노랫가락과도 같은 소리를 들으며 설경경은 돌아서고 있었

     다. 휘황하게 빛나는 달빛  아래 남녀의 화음이 귓전으로 흘러 들

     어왔다. 설경경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폭포수 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이야아아아―!"

      천지가 붕괴될 듯한 기합성이 폭포수의 굉음을 압도했다.

     주자경과 설경경은 놀란 토끼  눈을 치뜬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구룡의 행동이 너무도  이상했다. 그는 웅룡도를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이렇다 할 법도나 형식조차  없었다. 그저 파리를 쫓는 듯한 동작

     으로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뭐 하는 거지요?"

 
     "그......, 글쎄요."

 
     두 여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노구룡을 바라보았다. 노구룡은

     폭포수 앞의 널찍한 바위 위에서 폭포수를 마주 보며 웅룡도를 휘

     두르고 있었다.

 
     번쩍! 번쩍!

 
     보이는 것은  햇살 아래 반사되는 도광이었다.  그런데 그 도광이

     하나로 뭉쳐지더니 점차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순간 노구룡의 신형이 솟구쳐 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아!"

 
     아니, 솟구쳐 오른다기보다는 총알처럼 퉁겨져 나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치 한껏 참고  참았다가 무엇인가에 격발된

     듯한 그의 신형은 무섭게 퉁겨져 나갔다.
 

     "앗?"
 

     두 여인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노구룡의 신형이 곧장 맞은

     편 폭포수를 향해 쏘아 간 것이다.

 
     며칠 전에도 폭포수에 뛰어들었다가 중상(?)을 당하지 않았던가?

     두 여인은 노구룡이 또 다시 폭포수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그만

     자지러지고 말았다.

     폭포수의 압력은 천 근, 아니  만 근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뼈와

     살로 된 인간의  몸으로 받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아연실색할 일이 벌어졌다.

 
     촤촤촤촤 !
 

     두 여인의  입이 딱 벌어졌다. 노구룡이  폭포수의 물살을 가르며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웅룡도를 현란하게 휘둘러  대며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거대

     한 폭포수를 가르며 오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용이 승천하

     는 것과도 같았다.

      물살은 그의 몸을 스치며  좌우로 쩍 갈라졌다. 그는 승천하는 용

     처럼 웅룡도의 도광을 번쩍이며 일 장, 이 장, 삼 장....... 그는

     무려 십여 장이나 솟구쳐 올랐다.

      마침내 그는 삼십 장 높이의 폭포수를 완전히 거슬러 올라갔다.

 
     "......!"

 
     두 여인은 넋을 잃었다.

 
     착각이었을까? 무서운 힘으로 떨어져 내리던 폭포수가 한 순간 딱

     정지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두 갈래로 갈라진 채 폭포수가 정지

     된 것이다.

 
     "저럴 수가......."

 
     두 여인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 멍청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으하하하하하, 해냈다! 드디어 해냈어! 이 노구룡이 드디어 진우

     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을 익히고 말았다!"

 
     까마득한 폭포수 위!
 

     노구룡이 우뚝 선 채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웅룡도를 번쩍 치켜들고 기쁨에 넘쳐 대소를 터뜨렸다.

 
     우르르르릉!
 

     폭포수의 굉음이 울렸다.

 
     돌연 노구룡의 몸이 기우뚱하는 것 같았다.

 
     "와아아악!"
 

     그는 뒤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의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외마

     디 비명을 지르며 그만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앗! 상공!"

 
     "여보!"

 
     두 여인은 자지러질 듯 놀라 비명을 지르며 교구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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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20장 여난(女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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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를 불태우며 작렬하던 태양의 위력도 어느덧 그 힘을 잃어 가

     고 있었다. 성하(盛夏)의 계절이  가고, 숲의 색이 서서히 단풍으

     로 물들어 갔다.

 
     무림은 폭풍 전야의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정도 무림이나 사도 무림 모두 몸을 잔뜩 사리고 있었다. 그런 가

     운데 서서히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조용한 가운데 동정군산으로 향하는 무림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

     났다. 정도 무림의 각  문파가 잃어버린 신물을 찾기 위해 동정군

     산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전통을 지닌 문파들로서는 신물을 되찾

     지 않으면 조상을 볼  면목이 없었다. 비룡천이 각파의 신물을 탈

     취하고 동정군산에서 무림의 패자로 등극하겠다는 선언을 한 터였다.

     무림인들에게 명예는 목숨보다  중했다. 따라서 신물을 되찾기 위

     해 동정군산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녹림을 비롯한  사도 무림인들은 벌써부터  동정군산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어쩌면 이 길이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도 무림인들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동정군산

     으로 출발했다.

 
     "정말 안 갈 거예요?"
 

     "글쎄, 안 간다니까."

 
     "아니, 당신은 무림이 이대로 망하는 걸 팔짱 끼고 구경만 하겠다

     는 거예요?"
 

     "허허......, 망하긴 누가 망한단 말이오?"


     "참나, 답답해서....... 소문도  못 들었단 말이에요? 백가람인가

     뭔가 하는 아이가 동정군산에서 정도 무림을 짓밟겠다고 호언장담

     하고 있다잖아요!"
 

     "그래서?"

 
     "그래서라니......? 당신은 무림의  대영웅 아니에요? 영웅이라면

     도탄에 빠진 무림의 위기를 보고 나서야 하지 않나요?"

 

     "허허......, 나 말고도 무림을  구할 놈이 있지 않소? 나야 이젠

     편안히 누워 맛있는 것이나 먹으면 그만이지."

 
     노팔룡은 청운관의 후원 정자에 누운 채 과일을 우적우적 씹고 있

     었다. 그 앞에서 팔팔 뛰는 사람은 성미 급한 하여령이었다.

     그녀는 벌써 흑색 경장에 검을 둘러멘 차림이었다. 지난날 무정랑

     자 일점홍 하여령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록 세월은 흘렀어

     도 그녀의 미모는 여전했고,  살얼음 같은 냉오한 기질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차리고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구려."

 
     "......?"

 
     "헤헤......, 왜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

 

     "꺅! 또 그 소리!"

 
     하여령은 주먹을 불끈 쥐고 꽥 고함을 질렀다.


     "아이쿠, 귀야."

 
     노팔룡은 손으로 양쪽 귀를 감쌌다.

      한편 정자 아래에는 군약명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녀는 강호의

     대영웅 노팔룡과 그의 부인인 하여령의 말다툼을 바라보며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운관에 머무른 지 어언 두 달여.

      그동안 그녀는 마음이 이만저만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하여

     령의 눈에 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 노구룡이 없

     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어디서 어떤 계집과 히히덕거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그녀

     는 한시라도 빨리 청운관을 떠나고 싶었지만, 노팔룡 대협이 움직

     이지 않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강호에서 들려 오는  소식은 하루하루 엄청난 것뿐이었다. 백가람

     이란 젊은 효웅이 비룡천을 세우고 무림을 독패(獨覇)하려 한다는

     것이다. 비룡천은  이미 무림 각파의  신물을 탈취하였고, 그들을

     초청하여 정식으로 무림의 패주로 군림하려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 가서 틀어박혔기에 소식 하나 들리지 않는 거야!'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천하의 바람둥이 노구룡의 소식은 어디서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

     런 가운데 비룡천이 선언한  구구 중양절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하여령을  졸라 청운관을 떠나기로 했다. 동정군산에

     가면 필경 노구룡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혈기가 팔팔한 하여령은 그녀의 편을 들었다. 안 그래도

     노팔룡과 함께  은거한 지 이십 년이  넘은지라, 하여령은 답답한

     마음도 풀  겸 동정군산으로 떠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차제에

     청운관주도 무림을  위해 노팔룡이 동정군산으로  가야 한다고 수

     차례에 걸쳐 종용한 터였다.

      그런데 노팔룡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허허......, 화내니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구려."
 

     "이......, 이거 놓지 못해요?"

 

     군약명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다가 그만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노팔룡이 하여령의 허리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귀밑까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읍....... 으음!"

 
     하여령의 음성이 수그러들더니 그녀의 몸이 난간 밖으로 기울어지

     고 있었다. 군약명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돌

     리고 말았다.

     그녀는 콩당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내심 중얼거렸다.

 
     '노구룡 그 인간이 누굴 닮았는지 알겠어!'

 
     결국 단 둘이 떠나기로 했다.

 
     "얘야, 어쩔 수 없게 됐다. 일단 우리끼리 먼저 떠나도록 하자."

 
     하여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노 어른께서는 안 오시는 건가요?"

 
     "흥! 그 인간처럼 게으른 작자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하지만 아

     비가 돼서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 우리끼리 먼저 가자. 아마 뒤

     늦게라도 따라올 거야."
 

     하여령은 등에 멘 검을 손으로 툭 치며 앞장 서 청운관을 나섰다.

     눈부신 초가을의 햇살이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비추고 있었다.

 
     군약명은 서운한 생각이 들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하여령의 뒤

     를 따르며 작은  음성으로 힘없이 중얼거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일 따름이었다.

 
     "그 사람은 올까요......?"


     대홍산(大洪山)을 지날 때였다.

 
     작은 시진에 들어서자 마침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하여령은 바라보

     이는 객잔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곳에서 쉬다 가자."

     "네."

 
     군약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없는 음성이었다.

      그녀는 청운관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강호에 나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노구룡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강호인들은 백가람의 무예가  천하 제일이라는 둥, 동정군산의 대

     회전이 끝나면 무림 패권은  백가람의 손에 떨어진다는 둥 말들이

     무성했지만, 정작  노구룡에 대한 말은  들리지 않았다. 노구룡의

     소식은 바다에 빠진 돌멩이인 양 감감하기만 했던 것이다.

 
     입맛이 통 없던 그녀는 저녁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소녀는 먼저 객방으로 가겠어요."

 
     하여령은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렴. 난 좀 있다 가겠다."

 
     기실 하여령은 방랑벽이  있었다. 지난날 강호 제일의 여검객이던

     그녀는 오랜만에  무림에 나오니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주루에 머물며 강호 소식이나 듣기로 한 것이다.

     객방으로 들어선 군약명은 우울한  기분에 빠져 침상에 몸을 던졌

     다. 공연히 야속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났다.

 

     '얄미운 사람! 날 버려 둔 채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그때였다.

 
     문득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방에서 들려 오

     는 여인의 교성이었다.

 
     뒤이어 물소리도 들렸다. 누군가 수욕(水浴)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하......."

 
     남자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뒤이어  들려 온 것은 또 다른 여인의

     비명이었다.

 
     "꺄악! 어딜 만져요!"

     군약명은 귀를 틀어막았다. 가뜩이나 심난한 터에 남녀가 함께 목

     욕을 하며 음탕한 짓거리라니....... 그것도 여자가 한 명도 아니

     고 둘이라니.......

 
     '가만......?'

 
     군약명은 화들짝 놀라며 귀를  틀어막았던 손을 떼고 청력을 기울여 보았다.
 

     "경경의 피부는 찰떡  같고, 자경의 피부는 비단결 같으니.......

     헤헤......, 이놈이 이러는  건 내 탓이 아니란  말이오. 이건 다

     아버님 닮아서 그런 거지, 나와는 무관하단 말이오."

 
     "어머머, 어딜 만져요?"

     "흥흥!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

 
     군약명의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돌연 그녀는 침상에서 벌떡 몸

     을 일으켰다.

 
     '세......,   세상에  쇠신이   닳도록  찾아   헤맸더니  이곳에서.......'

 
     군약명은 분노로  인해 전신을 파들파들 떨었다.  주먹을 불끈 쥔

     그녀는 와당탕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회랑을 나선 그녀는 귀를 기울이며 회랑에 나란히 붙어 있는 방문

     들을 노려보았다. 그  중 한 방문 앞에  우뚝 선 그녀는 새파랗게

     독기가 서린 눈으로 방문을 노려보았다.


     쾅!
 

     그녀는 발로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

     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에 먼저 눈길이 떨어졌다. 남자 옷

     한 벌과 여자 옷 두 벌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으으......."


     군약명은 치솟는 분노로 인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의 눈길

     이 오른쪽에 나 있는 문에 꽂혔다. 그 문은 욕실로 연결된 문이었다.

 
     "까르르......."

 
     "어머어머, 난 몰라!"
 

     문 안쪽에서  여인들의 교성이 흘러 나왔다.  군약명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악을 쓰며 부르짖었다.

 
     "나......, 나오지 못해! 이 더러운 놈아!"

 
     "......!"


     욕실 안이 조용해졌다.

      군약명은 두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뜨고  욕실 문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뛰어들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그녀가 처녀였기 때문이다.

 
     끼익.......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뒤이어 누군가의 얼굴이 쏘옥 내밀어졌다.

 
     "억!"

 
     얼굴이 재빨리 사라지더니 문이 닫혀 버렸다.

     노구룡이었다. 그는 방 안에서  군약명이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

     는 모습을 보고 기겁해 도로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나와! 당장 나오지 못해!"

 
     군약명은 다시 악을 쓰며 부르짖었다.

      욕실 안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군약명은 너무나 화가 치민

     나머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더니 노구룡이 엉거주춤 걸어 나왔다.

 
     "꺄악!"

 
     군약명은 비명을  질렀다. 노구룡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

 
     "오......, 옷 입지 못해요?"

 
     "지금 입으려고 하는데."

 
     노구룡은 머리를 긁적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 그러

     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옷은 도로 놓고, 여인의 옷 두 벌

     을 집어 들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뭐......, 뭐 하는 거얏?"

     "잠시만 기다리시오. 나야 괜찮지만  안에 자경과 경경이 있단 말이오."

 
     "자......, 자경? 그런데 경경은 또 누구야?"

 
     군약명은 그야말로 팔짝팔짝 뛸 지경이었다. 하지만 감히 욕실 문

     을 열 생각은 하지 못하고 파랗게 독기가 서린 눈으로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먼저 노구룡이 두 손으로 아랫도리를 가린

     채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뒤이어 두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란히 걸어 나왔다.
 

     군약명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더......, 더러운  것들 같으니.......  부끄러움도 모르고 함께

     목욕해......?"

 
     문득 한 여인이 고개를 발딱 치켜들며 쏘아붙였다.

 
     "당신은 누군데 욕을 하는 거지?"

 
     설경경이었다. 금발이 물에 젖은 채 허리까지 늘어져 있는 벽안의

     미녀였다.  군약명은 기가 막혔다.
 

     "너야말로 어디서 온 잡종인데 내 남자를 가로챈 거냐? 오랑캐 년

     이라 수치심도 없겠구나!"

     "뭣이? 보자보자하니까......."

      설경경은 대뜸 소매를 걷어붙이며 달려들려 했다.

 
     "잠깐!"

 
     노구룡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히죽 웃으며 군약명을 달래려는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쪽은 빙궁의 소궁주인 설경경 누이요. 그리고 이쪽은 알다시피 주......."

 
     "흥! 일국의 공주라 정숙한 줄로만 알았지, 파렴치한 색녀인 줄은

     몰랐어!"

     "뭐......, 뭐라고?"

 
     주자경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러나 명조의 공주인 그녀는 체

     면상 차마 막말은 할 수 없어 얼굴을 붉힌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한편 노구룡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는 복우산을  떠나 동정군산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복우산에서

     두 여인의 도움(?)으로 검학을 깨우친 그는 강호에 나도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여인과 함께 그

     길로 동정군산으로 떠난 것이다.
 

     복우산에서 동정군산은 그리  먼 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는 일부러 느리게  움직였다. 천하 절색의 두 여인이 동행하

     기 때문이었다.

      한쪽은 일국의 공주인 고귀한 여인이요, 한쪽은 북국 미녀의 피를

     받아 폭발적인 몸매를 지닌 요염 무비한 여인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는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힘겹게 두 여인

     을 정복했으니, 지금부터라도 과거에 못다 한 즐거운 놀이를 실컷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도 아닌 둘을 데리고 다니며 마

     음먹은 대로 즐거운  놀이를 한다는 것은 보통  머리를 굴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입이 닳도록 설득을 했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도 했다. 그러다

     급기야 오늘 밤에야 설득이 통했다.

     동정군산에 다 왔으니 정신을 집중하여 일생의 호적수 백가람과의

     일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호소(?)였다. 자신의 말을 들

     어주지 않으면  얼마 전처럼 정신력이  흩어져 주화입마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백가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결국 주자경과 설경경은 그의  설득에 못 이긴 척 넘어갔고, 오늘

     밤에야 셋이 함께 목욕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바로 옆방에 군약명이 묵고 있을 줄이야....... 귀신이 아닌 다음

     에야 죽었다 깨어난다 한들 미리 예견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험험! 싸우지들 마시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약명."
 

     "......?"

 
     군약명은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가 아직도

     벌거벗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오......, 옷부터 입지 않고 뭐 하는 거예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노구룡은 점잖게 말한 후  세 여인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은 군약

     명에게 향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겠소. 자고로 여자란 지아비의 뜻

     을 따라야  하는 것이오. 당신이 지금  행동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군약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손가락으

     로 노구룡의 얼굴을 가리켰다.

 
     "당신......, 그걸 말이라고 해요?"

 
     "엄밀히 말해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니지 않소?  무슨 자격으로 날

     간섭한단 말이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게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군약명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런 말을......."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다. 커다란 눈에

     금방 눈물이 그렁해졌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노구룡과 혼인을 한 것도 아니니, 그가 무슨

     짓을 하던 간섭할 자격은 없는지도 모른다.

 
     "하......, 하지만 당신은 날......, 내 모든 걸 봤으니......."

 
     군약명은 고개를 떨군 채 더듬거렸다.

     해남도에서 처녀의 몸을 낱낱이 노구룡에게 다 보여 주었다. 그러

     니 어떻게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란 말인가? 그녀는 야속한 나

     머지 마침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이때였다.

 
     노구룡이 두 여인에게  눈짓을 했다. 주자경과 설경경은 발끈했으

     나, 노구룡의  애절한(?) 눈짓에 한숨을  쉬더니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두 여인은 가슴을 쳤다.

 
     "그럼......, 벌써 몇 명째인 거야?"

 
     주자경의 말에 설경경은  손가락으로 자신과 주자경, 방문을 가리

     키며 물었다.

 
     "셋이에요......?"

 
     "흥! 셋이면 말도 안 해!"

 
     "......!"

     "깔깔, 간지러워요. 아이. 거기는......, 아아......."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여인의 교성.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

     고 있는지 모른다면 바보이거나 천치일 것이다.

      화원을 서성이는 두  여인의 안색은 제각각이었다. 달빛이 교교한

     가운데 화원에는 추국(秋菊)의 향기가 그윽했지만, 가슴은 바짝바

     짝 타 들어가기만 했다.

     주자경과 설경경은 연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방을 빼앗겼으니 들어갈 곳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

     차지였던 따뜻한 욕실에는 지금  다른 여인이 노구룡과 한창 즐거

     운 놀이에 빠져 있지 않은가? 두 여인은 달을 보고, 하늘을 보고,

     추국을 보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다.

     한편 객방으로 돌아온 하여령은  방 안에 군약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어딜 갔지?'

 
     그러나 별반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군약명이 본신에 지닌 무예도

     만만치 않고, 청운관에 있을  때 그녀가 직접 지도하여 부쩍 무예

     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잠시 나간 모양이군.'
 

     하여령은 침상에 올랐다.

     "어머, 거긴......, 아하!"

 
     문득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간드러지는  여인의 교성이 벽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하여령은  귀가 쫑긋해졌다. 벽을 사이에 둔

     데다 물소리에  섞여 들려 온 음성이라  명확하진 않았다. 그러나

     무슨 소린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여령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젊은 남녀가 옆방에 들었나 보군.'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났다.

     노팔룡은 틈만 나면 그녀와 목욕을 하자고 조르지 않았던가. 당시

     에는 민망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지나고 보니 모두가 아름답고 달

     콤한 추억들이었다.

     그녀는 벽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불현듯 노팔룡이 그리워졌다.

      군약명의 몸이 축 늘어졌다.

      노구룡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 그녀의 나신은 땀으로 흠씬 젖어 있

     었다. 은밀한 곳에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그보다는 난생 처

     음으로 느끼는 성숙한 여인의 기쁨이 더 컸다.

      노구룡은 천장을 바라보며 반듯이 누워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아......, 아무것도."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뭐가?"

 
     군약명은 노구룡을 향해 돌아누우며 섬섬옥수로 그의 가슴을 쓰다

     듬었다.

 
     "저기......, 말이에요."

 
     "으응."
 

     "누가 제일 좋아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군약명은 노구룡의  가슴에 상체를 얹으며  빤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공주와 그 금발 계집 말이에요. 약명보다 더 좋아요?"

 
     "그럴 리가 있겠소?"

 
     노구룡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손을 뻗어 군약명의 토실토

     실한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제일 좋소."

 
     "정말?"
 

     "정말이고 말고."

 
     여인은 이렇게 단순한 것인가? 노구룡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아버님께서도 평소에 늘  말씀하셨지. 침상에서는 거짓말을 해도

     죄가 아니라고.'

 
     매끄럽고 통통한 엉덩이를 어루만지다 보니 다시 아랫도리에 서서

     히 힘이  갔다. 노구룡은 슬며시 군약명을  자신의 위로 끌어올렸다.

 
     "또?"

 
     군약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니, 싫

     기는커녕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매김을 해 놔야겠다는 결의를 다

     진 그녀는 말 타듯 노구룡의  배를 타고 앉아 단숨에 고삐를 당겨

     버렸다.

 
     "이랴!"

 
     "어흑!"

 
     노구룡은 신음을 터뜨렸다.

     미녀가 말을 탔다. 흑발을  휘날리며 사납게 그의 가슴을 치며 말

     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렸다. 말할 수 없는 쾌감으로 전신

     이 경직되고 있었다.

 
     문 소리에 하여령은 눈을 떴다.
 

     "어딜 다녀오는 게냐?"

 
     군약명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콧소리를 냈다.

 
     "네에, 어머님....... 바람 좀 쐬고 왔어요."

 
     "그래? 어서 자거라. 내일은 일찍 길을 떠나야겠다."

 
     "네, 어머님."

 
     군약명은 한숨을  쉬며 침상으로  걸어갔다. 군약명이 조심스럽게

     침상으로 기어 들어오는 순간 그녀에게서 묘한 냄새가 났다. 싸아

     한 땀 냄새 같기도 하고 후끈한 단내 같기도 했다.

     하여령은 그 냄새를 어디선가 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막

     선잠이 깬 터라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군약명은 그녀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어머님.'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손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노구

     룡과 뜨거운 사랑을 나눈  그녀는 자신이 비로소 성숙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노구룡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노구룡이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오. 제발......, 날 봐서라도."
 

     "안 돼요. 당신 어머님이 옆방에 와 계셔요. 인사도 안 드릴 건가요?"

     "아이쿠......, 제발. 어머님께서 날 보시면 아마 패 죽이려 들것이오."

 
     "흥! 알긴 아는군요?  멋대로 호색질을 하고 다녔으니 어머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
 

     "제발 부탁이오.  오늘은 못 본 척해  주시오. 어머님께는 나중에

     용서를 빌겠소."


     "뭘 빌겠다는 거죠?"

 
     "그......, 그건."

 
     노구룡은 할 말이 궁했다.

 
     그렇다. 뭘 빈단 말인가. 하지만  분명히 잘못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님께서 이미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절 며느리로 삼으신다고 했어요."

 
     "그......, 그거 잘됐군."

     "잘 들어요. 다른 여인들은 어머님께서 받아 주시지 않을 거예요.

     오직 이 약명만 정식 며느리로 인정해 주신다고 했어요."

 
     "......."

 
     "당신이 허락도  없이 다른 여인들과 함부로  어울려 다닌다는 걸

     아시면 가만 계시지 않을 거예요."

 
     "......."
 

     "흥! 그 여인들이 그렇게 좋나요?"

 
     "아......, 아니오. 약명보다는......."
 

     "보다는 뭐죠?"


     "내......, 내겐 약명이 제일이오."

 
     "그 말 정말이죠?"

 
     "사나이 말을 못 믿는다는 거요?"

 
     노구룡의 손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군약명은 고양이 같

     은 신음을 발했다.
 

     잠시 후 그녀는 주섬주섬 일어나 옷을 입었다.

 
     "좋아요, 오늘 한 번만 참겠어요. 당신도 동정군산으로 올 거죠?"

 
     노구룡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그, 그야 여부가 있겠소?"

 
     "어머님과 먼저 가 있겠어요.  동정군산의 일이 끝나면 성대한 혼

     례식을 올려요. 그럼......."

 
     군약명은 수많은 군웅들이 하객으로 참가한 가운데 노구룡과 화려

     한 혼례를 치르는 상상을 하며 달콤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과연 그렇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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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21장 선상(船上)의 향연(饗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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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양절.

 
     구구 중양은 중원의 명절 중 하나다. 하늘은 높고 청명하며, 만산

     홍엽(滿山紅葉)이 대륙을 불태우는가 하면, 수확의 풍성한 계절이

     기도 하다.

     중원 오대호 중 으뜸인 동정호(洞庭湖)의 가을은 하늘만큼이나 맑

     은 호수의  수면에서부터 온다. 동정호는 바다처럼  넓어 그 끝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이 대호(大湖)는 예로부터 물고기가 풍부하

     여 족히 어장(漁場)이 형성될 뿐더러, 명승 고적지가 즐비하여 중

     원 전역에서 오는 유람객들의 발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저 유명한 황학루(黃鶴樓)는 동정호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풍류객

     들이 남긴 시구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으며, 호수 주변의 언덕에는

     수양버들이 휘늘어져 아름다운 풍광을 더욱 빛내 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동정호  일대로 무림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선남선녀들이 호변을 산책하는  모습은 며칠 전부터 뚝 끊겼

     다. 뿐만 아니라 호수를 점점이 수놓던 유선(遊船)들의 모습도 보

     이지 않았다.

     험상궂게 생긴 흑백 양도의 호걸들과 갖가지 병장기를 꿰어 찬 구

     레나룻의 사나이들이 속속 모여들더니, 중양절이 가까워지자 온통

     무림인 천지가 되고 말았다.


     주루나 객잔도 온통  무림인들로 북적거렸다. 비룡천이 백도 무림

     을 향해 패업을 선언한 날이 바로 중양절이기 때문이었다.

 
     군산(君山)은 동정호에 떠 있는 섬이었다.

 
     비룡천의 무리들은  군산 앞에 거대한  좌대(座臺)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좌대는 무려 한 마장이  넘는 크기로, 그 위에 최소한 천

     명 이상은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좌대  주변에는 수백 척이 넘는  선박들이 빽빽하게 떠

     있었으니....... 대부분의 선박에는 검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깃발에는 용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무림에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

     는 사람이라면 그  깃발이야말로 저 무시무시한 해적 흑룡단(黑龍

     團)의 상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녹림도의 무리들도 크고 작은  수백 척의 배에 타고 있었다. 그리

     고 철기방의 철갑인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좌대 위.


     높다란 단상 위에는 수십 개의 깃발이 펄럭였는데, 깃발에는 금방

     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황금빛의  비룡(飛龍)이 수놓아져 있었으

     며, 패(覇)자가 새겨진 검은 깃발도 길게 휘날렸다.

 
     둥둥둥.......
 

     문득 고(鼓) 소리가 울렸다.

 
     "와아아아아―!"
 

     천지를 무너뜨리는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한 척의 거대한 범선에서 누군가 좌대 위로 오르고 있었다. 두 명

     의 궁장을 입은 시녀들이  차양(遮陽)을 받쳐 든 가운데 곤룡포를

     입은 청년이 좌대의 상단으로 올랐다.

 
     그는 영준하기 그지없는  이십대 가량의 미남자였다. 바로 비룡천

     의 천주인 백가람이었다.

 
     백가람의 뒤에는 타는 듯이 붉은 홍의를 입은 절세 미녀가 수행하

     고 있었는데, 그녀는 홍의선자 희수봉이었다.
 

     둥! 둥! 둥!

 
     고 소리는 더욱 높아졌고, 함성이 동정호를 뒤흔드는 가운데 백가

     람은 상단에 마련되어 있는 금박을 입힌 태사의에 좌정했다.

      홍의선자 희수봉은 그의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

 
     그녀는 초조한 눈빛으로  멀리 동정호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이.

 
     "누굴 찾는 것이오?"


     백가람이 검미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노구룡이란 자를 찾소?"

 
     "......."
 
     희수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가람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시선을 돌려

     중천으로 이동하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강렬하게 빛나는 태양!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태양을 직시했다. 태양을 정면

     으로 바라보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필경 눈이 멀었으리라!

 
     "후훗......, 무림에  사대 가화가 있다고 들었지.  당신도 그 중

     한 명이고. 하지만 당신을  포함한 사대 미녀가 모두 그자에게 정

     신이 팔렸소. 이 백가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소."

 
     희수봉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미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분에게는 인간미가 있어요. 당

     신이 비록 그보다 백 배나  무공이 강하고 모든 면에 뛰어나다 해

     도......, 여인의 마음을 그처럼 사로잡지는 못할 거예요.'

 
     "지난날 아버님께서도 그랬소. 그분이 사랑하던 여인이 다른 자에

     게 갔소. 아버님은  평생을 통해 그 일을  두고 가슴 아파하셨소.

     하지만 나는 다르지."

 
     백가람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대 미녀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 한들 상관없어. 그자를 꺾은 후

     그대들을 내 시녀로 삼을  테니까. 그것이 아버님의 한을 푸는 것

     이고, 나 백가람의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이지."

 
     '시녀라고?'

 
     희수봉의 눈썹 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녀는 가슴 밑바닥에서 일

     어나는 서늘한 공포를 느꼈다.

      지금까지 그녀는 백가람의 곁을  한 걸음도 떠날 수 없었다. 그녀

     는 백가람이 무림에  은밀히 뿌리내린 조직의 일원이었다. 때문에

     그의 명에 반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백가람 곁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그가 얼마나 철저한 위인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심지어

     는 측간에 갈 때도 그녀는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요, 고통이었다. 그동안의 생

     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이 희수봉은 백가람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져만 갔다. 특

     히 그의 불가사의한 무공에 대해서는 경이를 금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빙령신검을  완성한 후부터 백가람의  무공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발 오지 말아요, 구룡.......'

 

     희수봉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심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노구

     룡이 나타나면 백가람과  환우일전을 벌여야 한다. 노구룡은 절대

     백가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온다......!"

 
     문득 흑룡단의 선단에서 함성이 울렸다.

 
     희수봉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과연 수평선에 까만 점

     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점은 점점 커지더니 수십 척의 선박 모

     습을 드러냈다.

     흑룡단의 선단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일향각(一香刻)

     이 지나자 선박들의 모습이 완연히 눈에 들어왔다.

     선박의 갑판 위에는 군웅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중의

     모습도 있었고,  도사의 모습도 있었다.  한결같이 긴장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오는군."

 
     백가람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 일순 태양보다 강렬

     한 빛이 솟아 나왔다가 사라졌다.

      흑룡단이 터 준 물길을 가르고 다가온 것은 백도 무림인들의 무리

     였다. 소림사를 위시하여 무당,  청성, 아미, 공동파 등 구파일방

     이 중심이 된 백도의 군웅들이었다.

     최근 백도  무림은 무림맹을 결성한 바  있었다. 백가람이 이끄는

     비룡천에 대항하기 위해 백도가 하나로 뭉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도  무림맹은 구심점이 없었다. 소림을 위시한

     구파일방의 수뇌들은  무림맹주를 공석으로  비워 두었다. 그것은

     군웅들을 압도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림의 일각에서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한 영웅을 무림맹주로

     지명했다고 했다.

      바로 노구룡이었다.

     무산에서 사해방의 개파대전을  무산시키고 일약 무림의 태양으로

     떠오른 노구룡이야말로 진정한 무림맹주 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구룡은 나타나지 않았다. 중양절이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도 무림을 구원할 노구룡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백도 무림은 무림맹주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 둔 채 동정군산

     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마도 무리들의 기세가 대단하구려......."

 
     "무량수불.......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랄 뿐이오."

 
     선두의 선박에서 법의를 입은  노승과 도복 차림의 도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촤아아.......

 
     선박은 좌대를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좌대  앞에서 닻을 내리자

     선박에서 발판이 내려와 좌대에 걸쳐졌다.

      소림사의 장문인을 필두로  십팔나한과 삼십육금강, 칠십이호법승

     들이 차례로 좌대로  내려섰다. 뒤이어 무당의 장문인과 무당오검

     (武當五劍), 삼십육천강검수(三十六天 劍手)들도 내려섰다.

      구파일방의 정예 고수들이  잇따라 좌대로 내려왔다. 그들은 정면

     의 상대와 맞은편에 설치된 천막으로 향했다.

      태양은 중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군산에서의 회동은 정사 무림의 향방을 결정짓는 무림사상 최대의

     대회전이 될 것이다.

 
     "......."

     쌍방간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상대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백가람은 차양 아래  느긋하게 앉아 묵묵히 수평선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는 구파일방의 정예  고수들과 장문인들이 모두 도착했지만, 그

     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리

     고 있었다.

     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노구룡이었다. 그는 노구룡이야말로 자신의

     호적수라고 여겼으며, 노구룡을  꺾으면 진정한 무림의 패자로 군

     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노구룡이 무림사상 최고의  검법인 뇌령일식을 지니고 있다면, 그

     는 뇌령일식의 극성인 빙령신검을 완성했다. 그는 선대에서 못 이

     룬 패배의  한을 이번에야말로 설욕하겠다는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태양이 마침내 중천에 다다랐다.

 
     둥! 둥! 둥!

 
     고 소리가 울렸다. 고  소리에 따라 정사 양도의 진영에서는 일제

     히 함성이 일어났다.

 
     "와아아아아아―!"

 
     "우우우우우우―!"
 
     각자 함성으로 상대의 기를 꺾으려는 듯 그들의 함성은 근 일향각

     이 지나도록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삘리리리리.......

 
     문득 한 가닥 청아한 피리 소리가 울렸다. 피리 소리는 어찌나 맑

     고 청아한지 정사 양도 일만  여명이 질러 대는 함성 소리를 일시

     지간에 뚫고 고막으로 흘러들었다.

 
     "......!"

 
     정사 양도의 군호들은 일제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척의 소선(小船)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군호들의 선박에

     비한다면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불과할  정도로 하찮게 보이는 조

     각배였다.

     소선은 유유히 좌대를 향해 다가왔다. 정사 군호들의 시선은 소선

     에 집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좌대 위의  구파일방 인물들도 숨을

     죽인 채 소선을 바라보았다.

     상대 위의 태사의에 앉아 있던 백가람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백가

     람의 짙은 검미가 부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무정랑자 일점홍 하여령 여협이시다!"

 
     백도의 진영에서 누군가 부르짖었다.


     "일점홍......!"

 
     뒤이어 녹림 진영에서도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흘러 나왔다.

      백가람은 눈썹을 꿈틀했다. 처음으로 그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일점홍이라면......?"

 
     지난날 무림을 한 자루  장검으로 풍미했던 검각(劍閣) 출신의 여

     검객에 대한 소문은 그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작금에 이르러 하여령의 존재는 그녀의 남편에 의해 다소 빛 바랜

     느낌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무림을 금륜맹으로부터 구해 낸 태

     양과도 같은 존재 노팔룡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오오! 일점홍 여협께서 오시었소!"

      "나무관세음보살.......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소!"

      백도 진영에서 기쁨에 찬 탄성이 여기저기 흘러 나왔다.

     소선은 마침내 좌대에 당도했다. 작은 조각배에서 두 여인이 걸어 나왔다.

      앞장 선 여인은 흑색 경장에 긴 검을 어깨에 멘 하여령이었다. 그

     녀는 입술에서 비취빛 옥소(玉簫)를  뗀 후 좌대를 훑어보더니 서

     서히 올라섰다.

     그녀의 뒤에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가 따르고 있었다.

      백가람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해남도의 꽃이로군."

 
     그 말에 희수봉의 입에서 질투의 코방귀가 흘러 나왔다.

 
     "흥!"

 
     이때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앞다투어 일어나더니 하여령을 향해

     깊숙이 절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여협!"

     "먼 길을 왕림하시느라......."

 
     하여령은 가볍게 아미를  찌푸렸다. 본래부터 그녀는 사람들과 사

     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개만 까딱해 보인 그녀는  청성파 장문인이 내주는 상석에 앉았

     고, 군약명은 바로 그녀의 곁에 자리잡고 앉았다.

      하여령은 상대를 힐끗 바라보더니, 백가람은 보지도 않고 그의 옆

     에 앉아 있는 희수봉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계집이 네가 말한 희수봉이란 천한 계집이냐?"

 
     군약명은 신이 나는 듯 종알거렸다.

     "네, 어머님. 보세요. 언제는  그 사람을 죽자 사자 쫓아다니더니

     지금은 괴수 옆에  앉아 있네요. 흥! 저런  천하고 더러운 계집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걱정 마라. 노 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데 음탕한 계집을 받아들이

     겠느냐? 내 단단히 혼을 내 쫓아 버리겠다."

 
     하여령은 도무지 정사대전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한편 희수봉은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여우 같은 군약명이 하여

     령 곁에 붙어 앉아 자신을 험담하는 것을 보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듣고 보니 군약명 옆에 앉아 있는 흑삼의 여검객은 노구룡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녀는 좌불안석, 어쩔 줄 몰라 했

     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벙어리 냉가슴을 앓을 뿐이었다.

      이때 다시 소란이  일어났다. 또 한 척의  배가 미끌어져 온 것이다.

     이번 배는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배가 다가옴에 따라 정사 양도

     에서는 거의 동시에 탄성이 터졌다.

 
     "저 배는......!"

 
     평범한 배가 아니었다. 돛대에는  황실의 문장이 걸려 있었고, 갑

     판에는 번쩍거리는 갑주를 차려입은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황실에서 온 배요!"
 

     누군가 외치는 순간 장내에는 소란이 일어났다.

 
     배는 빠르게 다가오더니 좌대 앞에서 멈추었다. 좌대와 십장 간격

     을 두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군약명이 코웃음쳤다.

 
     "흥! 누군가 했더니 저 계집들이었군!"

 
     하여령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는 사람이 있느냐?"
 

     "흥, 공주인가 뭔가 하는 여자와 빙궁 출신의 계집이에요."

      하여령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녀는  이미 군약명에게서 주자경과

     설경경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갑판 위에는  주자경과 설경경이 나란히 서서 좌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자경의 뒤에는 그녀의 사부인 복마신니

     와 동창 영반 양자위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하여령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희수봉과 주자경, 설경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나 둘도  아니고 넷이라니....... 대체  구룡이 이놈이 아비의

     못된 점을 닮았다 해도 정도가 있지. 내 보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기실 주자경과 설경경은  동정호 근처에서 노팔룡과 헤어졌다. 노

     팔룡이 긴히 다녀올 곳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침 복마신니와

     양자위도 동정호로 오던 중이라 두 여인은 그들과 합류하게 된 것이다.

      태양은 중천에서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 가고 있었다.

      정사 양도는 팽팽하게  대치했다. 비룡천의 천주인 백가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상태였다.

      양 진영은 겉보기에도 그  세력 차이가 완연했다. 만일 싸움이 벌

     어진다면 숫자로나 실력으로나, 정도 쪽이 밀리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수평선상에 작은 점이 나타났다. 군호들은 모두 시선을 집중

     했다. 두 개의 점이었다. 하나는 좌측에서, 하나는 우측에서 다가

     오고 있었다.

     그 점은 각각 다른 모습의 배였다.

      왼쪽에서 나타난 선박은 화려하게 장식된 특수한 모양의 선박이었

     다. 앞부분이 뾰족했고, 돛대는 번쩍이는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반면 우측에서 나타난 배는 규모가 작았는데, 차양을 드리우고 있

     었고, 갑판 위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버님께서......!"
 

     지금까지 미동도 않던 백가람이 벌떡 일어섰다. 뒤이어 그의 주변

     에 있던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태상천주(太上天主)님이 오셨다!"

     비룡천의 인물들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렇다. 좌측의 선박 갑판  위에는 백삼 자락을 표표히 날리는 청

     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오오! 저분은 백선결 대협이 아닌가?"

 
     백도 진영에서도 술렁거리는 소란이 일어났다.

      놀라운 일이었다. 백삼 문사의를 입은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은 바

     로 지난날 백도의 기린아였던 백선결이었다. 소림 제일의 신승 천

     광선사의 수제자로 무림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그가 나타난 것이다.

     백도인들은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백선결의 출현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바로 지금 백도 무림을 궁

     지에 몰아넣고 있는  비룡천의 태상천주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더

     구나 백가람이 그의 자식이라니......!
 

     백도인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뒤덮이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돌연 백도 진영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이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오오! 노팔룡 대협이시다!"
 

     "노팔룡! 노팔룡 대협께서 오셨다!"

      그렇다.


     우측의 작은 선박이 가까워지자 갑판 위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  모습이 확연히 들어왔다. 수수한  백의를 입은 미녀와

     호골상(虎骨相)의 중년인이었다.

     그들은 바로 도운하와 노팔룡이었다.

     좌대 위의 인물들은 물론 흑룡단, 녹림도의 수천여 군호들은 경악

     을 금치 못했다. 설마 전대의 기인들이 한꺼번에 나타날 줄이야!

      이렇게 되자 군산의 풍운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

     어들게 되었다.

     "허허....... 오랜만이오, 노 대협."

 
     "핫핫핫....... 정말 오랜만이오, 백 대협."

 
     두 사람.

 
     한때 천하를 풍미했던 기인들의  만남은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이렇게 호수 위에서 이루어졌다. 두 척의 선박은 마주 보며 멈

     추었고, 일세의  풍운아이자 호적수였던 두 기인은  삼 장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선결의 시선은 선상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백의 미녀에게 향했

     다. 도운하였다.

 
     "......!"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여인 도운하를 바

     라보는 그의 눈 가장자리에 잔물결이 일었다. 이제는 남의 여인이

     된 도운하.

     그 얼마나 사랑했던가?

      천광선사의 수제자로 밤낮없이 무공 수련에 땀을 흘리면서도 오직

     도운하가 있었기에 희망을  가졌고, 언젠가는 무림의 영웅이 되어

     그녀와 함께 중원 십팔만 리를 나란히 질주하리라는 꿈을 키워 오

     지 않았던가?
 

     '저 사내........, 지금 도운하 곁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저

     사내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지.......'

 
     백선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흘러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

     리를 스치고 있었다.

     지나간 세월은 붙잡을 수  없고, 추억만이 남아 가슴을 아프게 후

     비고 지나간다.


     "오랜만이에요, 백 사형."

 
     도운하가 몸을 일으켜 다소곳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사매......."
 

     백선결의 검미가 흔들렸다.

 
     "예전 모습 그대로군요, 사형.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도운하의 입가에 흐르는 미소는 예전보다 훨씬 완숙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천하 제일의  지녀(智女)였던 도운하였다.  과거의 애틋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더욱더 온화하고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이십 년의 세

     월이 흘렀어도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기만 했다.

      백선결은 호칭을 바꾸며 정중히 포권했다.

 
     "도 부인의 미색은 여전하시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기쁘기 한

     량없소이다."
 

     이때 노팔룡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이리 오르시지요. 백  형의 모습도 과거와 똑같은데 뭘 그러

     시오? 여기 술상을 봐 놨으니 한잔 합시다."

 
     백선결의 눈길은 다시 노팔룡에게 향했다.

     "맹주의 위풍은  갈수록 현묘해지는 것  같소이다. 이렇게 뵈오니

     과거의 내 모습이 새삼 부끄러워지는구려."

 
     "핫핫핫! 그 무슨 소리요?  난 촌부(村夫)에 불과하오이다. 백 형

     이야말로 신선 같은데 뭘 그러시오?"

 
     백선결의 눈에서 서늘한 빛이 흘러 나왔다.
 

     "맹주께선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을 완성하시었소?"

 
     그 말에 노팔룡의 눈동자가 가운데로 몰리는 듯했다.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

 
     문득 그는 파안대소했다.


     "으하하하하핫! 있지도 않은 검법을 어떻게 완성하겠소?

 
     노팔룡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큰 머리를 가리켰다.

 
     "백 형도 알다시피  내 머리가 어디 보통  딱딱한 머리요? 머리를

     짜내 봤자 애꿎은 머리카락만  빠질 뿐이오. 포기한 지 벌서 오래외다."
 

     백선결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자는 과거에도 그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저 말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하하! 뭐하고 있소? 어서 이쪽으로 건너오시오."

     노팔룡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짓했다.

      백선결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시선은 흘낏 좌대로 향했다.

      백가람이 태사의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도 진영에

     서도 군웅들이 모두 몸을 일으킨 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선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중천에서 약간  기운 태양은 눈부신 빛을  뿌리고 있었다. 호수의

     수면은 파도 한 점 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홀연히 그의 가슴에 미풍이 일었다.

     '그렇군. 세상은 변한 것이  없어. 언젠가 오늘의 일을 두고 사람

     들은 회상하겠지. 백선결과  노팔룡....... 그들이 동정호에서 이

     십 년 만에 만났다고.......'
 

     백선결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이십 년 만에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백선결의 몸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기보다는 스르르 미끄러

     져 나갔다고 표현함이 옳으리라.  그는 배의 갑판에서 한 자 가량

     떠오른 후 노팔룡의 배를 향해 미끄러져 갔다. 

     두 배는 삼장  거리를 격하고 있었다. 그리  먼 거리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백선결은 허공을 향해 걸음

     을 내딛고 있었다.


     "오오......!"

 
     "신기(神技)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정사  군호들은 넋을 잃은 채 부르짖었다. 백

     선결의 신법은 가히 듣도  보도 못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는 마

     치 허공에 보이지 않은 발판이라도 있는 양 옷자락을 유유히 휘날

     리며 걸어가는 것이다.

     잠시 후 백선결은 노팔룡의 배 위에 내려섰다.
 

     "하하하핫! 자, 이리 앉으시오, 백 형."

 
     노팔룡은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착석했다.

      그 광경에 좌대 위의  백가람은 검미를 잔뜩 찌푸렸다. 상황이 이

     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노팔룡은 부친의 호적수였다. 의당 두 사람은 원수지간으로,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생각으로는 그러했다.

      한데 예상이 틀어졌다.

     백선결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도 그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부

     친은 그동안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나타났을 때  백가람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필경 부친

     이 자신의 사기를 돋궈 주기 위해 현신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데 노팔룡과 술잔을 마주하다니......?


     "저......, 저 양반이?"

 
     한편 하여령은 두  사람이 마주 앉는 모습에  아미를 잔뜩 찡그렸다.

      노팔룡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내심 '그럼  그렇지!' 하고 기뻐했

     다. 군산의 무림 대회전에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청운관을 먼저 떠나오면서도 필

     경 그가 늦게라도 출발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예상대로 노팔룡이 도운하와 함께 나타나자 그녀는 은연중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군산에 도착하고 보니 비룡천의 기세가 상상 이상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하의 숙적과 대작(對酌)이라니?

 
     "껄껄껄! 이렇게 백 형과 술잔을 나누게 되니 정말 기분이 삼삼하구려?"

 
     노팔룡은 연신 너털웃음이었다.  백선결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이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주 앉은  두 사람이었다.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과거 소림사에서 두 사람이  몰래 내려와 기방에 든 적이 있었다.

     그때 노팔룡은 기녀와  뒤엉켜 시시덕대었다. 당시 얼마나 당황했던가?

     "날씨도 좋고,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하는 사람도 저렇게 많고!"

 
     노팔룡은 술병을 불쑥 내밀었다.

 
     "자! 한잔 드시오, 백 형."

 
     백선결은 술잔을 들어올렸다. 술잔에 가득 호박색 술이 채워졌다.

     백선결도 노팔룡의 술잔에 잔을 채웠다.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올렸다.

 
     "하하핫! 이십 년 만의 재회를 축하하며......."

 
     그때였다.


     촤아아아......!

 
     불현듯 뱃전 위로 물기둥이 솟구쳤다. 물방울을 튕기며 불쑥 검은

     머리 하나가 수면에서 튀어나오더니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만요, 아버님!"

 
     "엉?"
 

     노팔룡의 눈이 동그래졌다.  수면 위로 솟아난 머리통이야말로 자

     신이 봐도 똑같이 닮은 얼굴이 아닌가?

 
     "구룡이 아니냐?"

     그렇다.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우직한 용모의 청년은 바로 노구룡이었다.

     노구룡은 불쑥 무엇인가를  들어올렸다. 가죽으로 된 커다란 자루였다.

 
     쿵!

 
     배 위로 자루를 던진  그는 어기적거리며 올라오더니 노팔룡과 도

     운하를 향해 넙죽 절을 했다.

 
     "아버님, 작은어머님 그간 강녕하시었습니까?"

 
     "용아야!"
 
     도운하는 반색을 하며 인자한 표정으로 노구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어찌 된 것이냐?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나는 것이냐? 사람들

     이 모두 널 기다렸는데?"

 
     노구룡은 히죽 웃으며 자루를 들어 보였다.

 
     "헤헤......, 이걸 구하느라 늦었습니다."

 
     "......?"

 

     이때 백선결은 눈을 가늘게  한 채 노구룡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의 눈썹이 미미하게 경련했다.

     그의 시선은 좌대로 향했다. 상대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백가람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선결의 눈은 다시 노구룡에게 향했다.

      노구룡은 연신 벙글거리며  자루를 풀고 있었다.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아니, 그는 도무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신경조차 쓰

     지 않는 것 같았다.

 
     "작은어머님을 위해 소자 천하 사대 진미의 요리법을 배우느라 늦

     었습니다. 재료를 구하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이때 노팔룡이 버럭 외쳤다.

 
     "이놈아, 무슨 헛소리냐? 어서 백 대협께 인사부터 올리거라."

 
     노구룡은 '이크!' 하는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더니, 백선결을 제대

     로 살펴보지도 않고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미천한 노구룡, 어르신께 인사드립니다."

 
     기실 노구룡은 백선결이 누군지 몰랐다. 그저 부친인 노팔룡이 인

     사하라고 해서 인사를 할 뿐이었다. 

 
     "허허! 난 백선결이라 하네."


     "옛?"

 
     노구룡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백선결!

 
     그 이름을  어찌 모르랴? 그는 잠시  헷갈리는 표정으로 백선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힐끗  좌대 쪽을 바라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기 있는 백 형의 부친이시군요?"

      "허허허! 또한 자네 영존과 막역한 친우이기도 하다네."

     노구룡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  술상을 보더니 눈빛을 반짝 빛냈다.

 
     "아하! 잘됐습니다.  두 분  어르신께 안주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

 
     백선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노구룡은 자루를 급히 풀더니  줄줄이 무엇인가를 술상 위에 벌려

     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슨 음식 재료 같은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루 속에는 주방용구까지 들어  있었다. 크고 작은

     솥 단지들과 도마, 그릇을 위시하여 웬만한 반점의 주방에서 사용

     하는 거의 모든 주방도구들이 줄줄이 갑판 위에 나열되었다.

     도운하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노팔룡도 어이가  없는 듯 꾸짖었다. 노구룡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작은어머님의 몸이 허약하셔서 소자가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기

     초 체력을 보충하고  음과 양의 기운을 북돋우는  천하 사대 진미

     요리법을 체득했습니다. 마침 아버님의 죽마고우께서 함께 계시니

     술안주도 할 겸 함께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강호에 나가 견문을 쌓아라 했거늘, 기껏 했다는 게 사대 진

     미 요리......?"

 
     노팔룡의 눈썹이 완전히  역팔자로 솟구쳤다. 그가 씩씩거리며 막

     주먹을 날리려 할 때였다.
 

     "아이, 여보! 절 생각해서 한  일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요? 더구

     나 보는 눈도 많으니 고정하세요."

 
     그 말에 노팔룡은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금방 표정을 바꾸었다.

 
     "험험! 그래, 천하 사대 진미란 무엇이냐?"

 
     다다다다닥!
 

     노구룡은 벌써  칼질을 하고 있었다. 도마  위에 야채를 올려놓고

     칼을 움직이는데, 손도 칼도 보이지 않았다.

 
     번쩍번쩍 도광이  이는 가운데 야채는 잘게  썰어졌다. 그 크기나

     모양이 한 호리의 차이도 없이 일치했다.

 
     '......!'

 
     백선결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그는 노구룡이 칼질하는 동작

     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어찌나 빠른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사대 진미란 첫째  연왕삼계탕(燕王蔘鷄湯), 둘째 자오녹용탕(子

     午鹿茸湯), 셋째  천삼설사탕(天蔘雪蛇湯), 넷째 천염설웅탕(天鹽

     雪熊湯)을 말합니다. 연왕삼계탕은  해남도에서만 사는 제비의 왕

     연왕과 장백삼(長白蔘), 닭을  주재료로 하는 것이고, 자오녹용탕

     은 녹용을 주원료로 하는데, 여기에 서른여섯 가지의 약재를 증탕

     (蒸湯)하여......."

 
     노팔룡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후 급히 물었다.

 
     "그래, 네가 그 뭐라는 요리를 다 할 수 있단 말이냐?"

 
     "천하 사대 진미 말입니까?"
 

     "그래, 사대 진민지 뭔지를 지금 먹을 수 있단 말이냐?"
 

     노팔룡은 벌써부터 침을 흘리고 있었다.

 
     "헤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버님."

     노구룡은 숯에 불을  붙였다. 중간 크기의 솥  단지 네 개가 걸렸

     다. 뒤이어  눈부시게 빠른 동작으로 온갖  재료들을 썰고 다지고

     하더니 차례로 솥 단지에 넣었다.

 
     부글부글.......

 
     이윽고 솥 단지가 끓기 시작했다.

 
     "흠흠......, 거 죽이는군!"

 
     노팔룡은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네 개의 솥 단지

     에서 김이 오르면서 향긋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백선결까지 회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도운하는 입가에 미

     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냄새야?"

 
     "햐! 정말 기막힌 냄새로군!"

 
     한편 멀리 떨어져 있는  선단은 물론, 좌대에 있던 군호들까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냄새는 구수하고, 향긋하고, 청신했으며,

     몇 차례 숨을 들이키는 사이에 침이 꿀꺼덕 넘어갈 정도로 식욕을

     자극했다. 하여령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저 아이가 뭐 하는 거냐?"

 
     그 말에 군약명이 설명해 주었다.

 
     "천하 사대 진미인가  하는 요리법을 배워 작은어머님께 드린다는

     말을 들었어요. 아마 지금 그걸 만드는가 봐요."

 
     "뭐? 작은어머니에게?"

 
     하여령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아니, 지어미는 제쳐 두고 작은어머니만 챙긴단 말이냐? 내 구룡

     이 이놈을......."

 
     하여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털

     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하매가 몸이 허약하니 내가 양보할 수밖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여령의  얼굴에는 못내 서운한 표정이 감돌았다.

 
     쨘!
 
     노구룡은 자신이 요리한 사대  진미를 술상 위에 벌려 놓았다. 각

     각 다른 그릇에 연왕삼계탕, 자오녹용탕, 천삼설사탕, 천염설웅탕

     을 담아 올린 것이다.
 

     "저어......, 작은어머님께서 먼저 시식을......."

 
     노팔룡의 입가에는 이미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연신 침

     을 삼켜 대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꾹꾹 참았다. 보기만 해도 황홀

     한 요리를 앞에 두고  한시라도 빨리 먹고 싶었으나, 노구룡이 굳

     이 '작은어머님  먼저!' 하고 말을 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먼저 들어 보세요."

 
     도운하는 저를 들어 두 손으로 노팔룡에게 건넸다.


     "허허......, 당신이 먼저 들구려."

 
     도운하는 생긋 웃더니 저를 들어 먼저 연왕삼계탕을 맛보았다.

 
     "......!"
 

     세 쌍의 눈이  일제히 도운하에게 향했다. 아니,  세 쌍이 아니었

     다. 노구룡, 노팔룡, 백선결 뿐 아니라, 군산에 몰려온 수천 쌍에

     달하는 눈동자가 일제히 도운하게 집중되었다.

     천지를 진동하는 향기로운 요리 냄새에 위장은 온통 난리를 쳤고,

     뱃가죽은 아래위로 요동을 쳤으며, 턱 밑으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도운하의 해맑은 눈동자가 또륵또륵 굴렀다.

 
     "아......."

 
     그녀는 탄성을 발하며 눈을 사르르 감았다.

 
     "......."

 
     천지가 숨을 죽였다. 태고의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얘야."

 
     도운하는 눈을 살며시 뜨며 노구룡을 불렀다.

 
     "옛, 어머니!"


     "정말 기가 막히는구나. 이처럼 맛있는 요리는 난생 처음이란다."

 
     쩍!
 

     벌어졌다. 노구룡의 입이 그만  귀밑까지 벌어진 것이다. 그는 얼

     른 두 번째 그릇을 들이밀었다.

 
     "이번엔 자오녹용탕입니다. 어서 드세요, 어머니."

 
     도운하는 이제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국자로 국물을 뜨더

     니 맛을 음미했다. 다시 수천 쌍의 눈길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뭐랄까......?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은 물론, 목으로 넘어가

     는 감촉은  비단처럼 매끄러우며, 입 안에  향긋한 향기가 감도는

     것이 마치 천상의 감로수를 마시는 것 같구나."

 
     도운하의 평에 노구룡은 신바람이  났다. 그는 세 번째 그릇을 내

     밀었다.
 

     "이번엔 천삼설사탕입니다."

 
     "온몸에 청량감이 감도는구나.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신선계에 들어

     선 느낌이 이러할까? 한 모금 먹으니 신선이 된 듯 싶고, 두 모금

     맛보니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구나, 얘야."
 

     "천염설웅탕이옵니다!"
 

     사대 진미의  마지막 요리인 천염설웅탕을  올리며 노구룡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도운하는 아예 그릇째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천염설웅탕을 두 모

     금 한꺼번에 마신 그녀는 눈을 반짝 떴다.

 
     "얘야......."

 
     "옛?"

 
     노구룡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염설웅탕이라고 했느냐?"

 
     "예......."

 
     노구룡의 음성은 덜덜 떨렸다. 혹시나 뭐가 잘못됐는지 지극히 불

     안한 표정이었다.
 

     "이걸 먹으니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드는구나. 저기 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느냐? 그런데 나만 이렇게 황홀한 요리를 먹으니 어쩐지

     죄인이 된 느낌이구나."

 
     "아......."

 
     노구룡은 철렁했던 가슴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일시지간 맥이 빠진

     듯했다. 허나 곧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직  재료를 남겨 두었으니까요. 어머님께는 집

     으로 돌아가는 즉시 요리를 해 드릴 생각이거든요."

 
     "오! 그래야지. 우리 구룡이의 효심을 내 잠깐 의심했구나."


     도운하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비로소 노팔룡과 백선결을 바라보았다.

 
     "두 분께서는 어서 맛을 보세요.  정말 천하의 사대 진미라 할 만

     하답니다. 인생의 낙이 아무리 많다 한들 미식(美食)을 대하는 낙

     보다 더한 것은 없을 듯싶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팔룡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이

     그릇 저 그릇으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아이, 백 대협께도 권해야지요."

 
     "어......, 어서 드시오, 백 형."

     백선결도 호기심이 동한 듯 저를 움직였다.

 
     일다경이 흐르는 동안 노팔룡과  백선결은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

     았다. 심지어는 술을 마시는  것조차 잊고 오직 요리를 먹는 행위

     에만 열중했다.

      천하 사대 진미!

      마침내 노구룡의 손에서 정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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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독보강호 2권 제22장 대단원(大團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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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억!"

 
     "크윽!"

 
     사람이 다르니 트림 소리도 달랐다.

      노팔룡과 백선결은 마주 보고 트림을 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만족

     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배가 부르면  마음도 여유롭게 되는 법인가?  두 사람은 마주보고

     히죽 웃고 있었다. 도운하도  웃었고, 노구룡도 연신 헤벌쭉 웃었다.

 
     "자식 농사 한번 잘 지었소이다, 노 맹주."

 
     "핫핫핫! 글쎄 다른 건  몰라도 효자는 효자지요. 안 그래도 요즘

     입맛이 없어 고생했는데, 어디서  이런 요리법을 배워 와 이 아비

     를 기쁘게 해 주니 말이오."

 
     그 말에 백선결의 얼굴이  험해지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멀

     리 바라보이는 백가람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한편 좌대 위의 정사  군호들은 모두 의혹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전대 맹주였던 노팔룡과 과거 십절서생으로 유명했던 백선결

     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백선결이 비룡천주 백가람의 부친

     이란 것도 이미 밝혀졌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숙명의 적수여야만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술과 요리를 들며 연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도무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뭐 하는 거지?"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더욱 곤혹스런 입장에 빠진 사람은 다름 아닌 백가람이었다.

     노구룡이 나타났을 때 그는 전신에 투지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천

     하 군웅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보란 듯이 그를 꺾고, 자신이 천하

     제일 고수의 자리를 차지하며 무림 독패를 선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노구룡은 좌대로 오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솥 단

     지를 걸어 요리를 하질 않는가?

     더더구나 기막힌 것은 부친 백선결의 태도였다. 노구룡이 만든 요

     리를 들며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확실했다.

     백가람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연자추!"

     "옛! 천주님."

      녹림 총표파자 연자추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께 다녀와라."

      연자추는 이마를 바닥에 찧은 후 고개를 들었다.

 
     "하오시면?"

 
     "아버님께 전해 드려라. 곧 공격을 개시하겠다고."

 

     "복명!"
 

     연자추는 재차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

 
     연자추가 탄 소선이 빠르게 다가왔다. 소선은 노팔룡의 배 앞에서

     일 장쯤 되는 거리에서 멈췄다.

     연자추는 갑판 위에서 바닥에 엎드린 채 소리쳤다.

 
     "태상천주님! 천주님의 전갈이옵니다."

 
     백선결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천주님께서는 곧 공격을......."


     백선결은 그의 말을 중도에서 끊었다.

 
     "가서 전해라. 무림 각파에서 탈취한 신물들을 주인들에게 돌려주라고."

 
     "네엣?"

 
     "귀가 먹었느냐? 신물들을 돌려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건........."

 
     백선결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덧붙였다.
 

     "그리고 조카인 구룡이와 일검을 나눌 준비를 하라고 일러라."


     백선결은 노구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카의 생각은 어떤가? 내 아들과 한판 겨룰 의사가 있는가?"

 
     노구룡은 히죽 웃었다.

 
     "아저씨께서 바라신다면 조카가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곧 준비하

     겠습니다."

 
     이때 도운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백선결은 마음에 걸린 듯 그녀

     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 부인께서는 못마땅한 표정인 것 같소이다?"

     도운하는 수심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솔직히 그래요. 천하에 자식  걱정 안 하는 어미가 어디 있나요?

     꼭 두 아이가 겨루어야만 하나요?"

 
     백선결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얼굴에는 갈등이 떠올랐다.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소. 그럼 명령을 철회하겠소."

 
     이때였다.
 

     "무슨 소리요?"

 
     느닷없이 노팔룡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나섰다. 그는 노구룡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라. 사내 대장부가  도전을 회피해서야 쓰겠느냐? 당당히 겨루

     어야지. 단......."

 
     노구룡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팔룡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쓸모없는 검법은 사용하지 말아라. 알겠느냐?"

 
     그 말에 도운하는 펄쩍 뛰었다.

 
     "아니, 당신은 아직도 뇌령검법을 쓸모없는 검법이라 생각한단 말이에요?"
 

     노구룡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시끄럽고 경망스런 검법일 뿐이잖소."

 
     "세......, 세상에......."

 
     이때 노구룡은 휙 하고 신형을 날렸다. 그는 연자추가 타고 온 배

     위에 떨어졌다.
 

     "아버님, 어머님! 꼭  이기고 돌아오는 자랑스런 아들이 되겠습니다!"

      노구룡의 우렁찬 음성은 어찌나  컸는지 좌대에 있는 군호들의 귀

     에도 생생하게 울렸다.


     두 사람.

      정사를 대표하는 한 시대의 양웅(兩雄)이 마주 보고 섰다.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정사 양도의 군호 수천 명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주시했다.  한 산에 양호(兩虎)가 살 수 없듯,

     그 두 사람 중 한 명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 그것은 곧 정도 무림과 사도 무림의 운명

     과도 같은 것이었다.

 
     태양은 중천에서 약간 비켜서  있었으나, 여전히 밝은 빛을 온 누

     리에 뿌리고 있었다.

     백가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뇌령검법은 이런 맑은 날씨에는 시전하기 어려울 텐데?"

 

     노구룡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뇌령검법은 쓰지 않을 것이오."

     그 말에 백가람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가

     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무슨 현묘한 검법을 쓸 생각이오?"

 
     노구룡은 의젓하게 말했다.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

 
     그 말에 백가람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의 정사 군호들 사이

     에서도 웅성거림이 번져 나갔다.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을 쓴다니......?"

      "오오, 왕년의 노팔룡 맹주께서 사용하신 전설의 검법이 아니오?"

     "과연.......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노구룡 대협께

     서도 전설의 검법을 익히셨나 보오!"

 
     웅성거림은 선상의 삼 인에게도 전해졌다.

      노팔룡과 도운하, 백선결의 표정도  묘하게 변해 갔다. 어디 그뿐이랴?

 
     '저......, 저 아이가!'

 
     하여령의 얼굴에는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노팔룡의

     아내였다.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노구룡이 있지도 않는 진우주천상천하유아독존검법을 사용

     하겠다고 선언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술렁거림은 점차 가라앉았다.

      백가람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그런 검법이 정말 있단 말이오?"

 
     노구룡은 엄숙하게 말했다.

 
     "도(道)란 어느 검법에나 존재하는 것이오. 마찬가지로 지고 무상

     한 절대 순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그게 바로 진우주천상천하

     유아독존검법이 되는 것이오."

     백가람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칼 도마질로 절대 순수의 경지에 도달했단 말인가?"

 
     노구룡은 문득 껄껄 웃으며 허리춤에서 웅룡도를 뽑아 들었다.

 
     "보면 알걸?"

 
     "후후훗! 좋아, 과연 도마질의 위력이 어떤지 견식해 보겠다."

      그는 손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연자추가  빙령신검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

 
     스르르릉!

     빙령신검을 뽑자 차디찬 서기가 소용돌이쳤다.

 
     "천지합기(天地合氣)!"

 
     휘류류류류륭!

 
     놀라운 일이었다. 주위의  모든 기운이 회오리치더니 온통 빙령검

     의 검극(劍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으으......!"

 
     "으헉!"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군호들은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뒤로 물

     러갔다. 내공이 약한 자들은  금세 기혈이 역류하며 입과 코로 피

     를 흘렸다.

 
     그들은 황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운공을 하여 역류하는 기혈을 막

     아야만 했다.
 

     노구룡은 어정쩡하게  선 채 멀뚱한  눈으로 백가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손에는 웅룡도가 들려 있었으나 아무런 조짐도 일어

     나지 않았다.

 
     휘류류류륭!

 
     빙령신검으로 빨려 드는 기운은  더욱더 밀도가 높아지며 그 반경

     을 넓혀 나갔다.
 

     파라라라라락!

     마침내 노구룡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서운 흡인력으로 인해 주춤 한 걸음 앞으로 끌려갔다.
 

     휙휙!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칼을 휘둘렀다. 자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

     었다. 그저 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그런 동작이었다.

      백가람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노구룡의 칼질에 무슨 내력이 있

     을까 하여 뚫어져라 노려봤지만, 아무런 형식도 느껴지지 않는 너

     무나 평범한 칼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 보던 백선결의 안색이 급변했다. 노구룡의

     두 발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사방의 기류는 빙령검으로 더욱 세차게 빨려 들어가 있었으나, 노

     구룡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휙휙!

 
     노구룡은 다시 몇 차례 칼을 휘둘렀다. 동작이 조금 빨라졌을 뿐,

     역시 헛손질하는 듯이 보였다.

 
     '......!'
 

     백선결의 미간에 어두운 그늘이 덮였다. 노구룡의 옷자락이 더 이

     상 펄럭이지  않는 것을 본 것이다.  노구룡의 칼질에 빙령검에서

     발산되는 검기(劍氣)의 맥이 가닥가닥 끊기고 있었다.

     "폭(爆)!"
 

     콰아아아아!

 
     백가람은 빙령검을 휘둘렀다.

     순간 천지를 무너뜨리는 듯한  폭음과 함께 가공할 검기가 폭사되

     었다. 그야말로 태산이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엄청난 검기였다.
 
     노구룡은 웅룡도를 들어 동그란 원을 그렸다.

      순간 은은한 금빛의 후광이 그의 칼에서 형성되었다. 첫번째로 몰

     려온 빙령검의 검기는 후광을 맞이하는 순간 좌우로 갈라졌다.

 
     "광(光)!"

 
     백가람은 더욱 공력을 끌어올려 빙령검을 수평으로 갈라 쳤다.

 
     쩌저저저저저적!

 
     천지 개벽을 하는 듯한 전광이 하늘과 땅을 두 개로 갈라 버렸다.

      백가람은 이번 공격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번개가 치는 듯한 전

     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갔다. 한 번 뿜어져 나간 전광의 뒤를 이

     어 곧바로 두 번째 전광이  뻗어 나갔고, 다시 세 번째 전광이 꼬

     리를 물었다.
 
     설사 첫번째 공격을 물리친다  해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전

     광을 물리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오오......!"

 
     "아......!"

 
     정사 군호들은 각각 다른 의미의 탄성과 탄식을 뿜어냈다.

 
     노구룡의 모습은 눈부신  검광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노구룡

     은 칼로 동그라미를 연속적으로 그려 내었다.

 
     그의 동작이 점점 빨라졌다. 종래에는 마치 도마질을 하듯 칼질이

     빨라졌다.

 
     다다다다다닥!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도마라도  있는 듯 칼을 저며 대던 그가

     문득 입을 딱 벌리더니 고함을 질렀다.

 
     "이야아아아―!"
 
     군호들은 깜짝 놀랐다. 너무나  큰 고함에 고막이 터질 듯했으며,

     가슴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노구룡은 칼을 마구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저......, 저건......!"

 
     이십여 년 전의  똑같은 광경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난날 노팔룡이 금륜맹주를 향해 바로 그처럼 괴성을 내

     지르며 돌진하지 않았던가?

     노구룡은 빙령신검의 폭광(爆光) 속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폭광이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아니, 폭광은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노구룡은 한 자루의 소도를  휘두르며 마치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

     는 물고기처럼 유유히 진격하고 있었다.


     '으으으......?'
 

     백가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이 익힌 빙령신검의  최고 단계를 펼쳤으나, 어찌 된 셈

     인지 상대방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의 수중에서 빙령

     검이 진동하고 있었다.

 
     "야아아아아아―."

 
     노구룡의 고함 소리가 그의 고막을 울렸다.

      아무렇게나 웅룡도를 휘두르며  돌진하는 노구룡의 모습이 아프게

     눈을 찔렀다. 그는 벌써 삼 척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쩌엉!

 
     갑자기 빙령검이 산산조각 났다.

 
     "크으으으윽!"

 
     백가람은 가슴으로 터질 듯한 압력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붕 떠

     올랐다. 그는 울컥 피를 토하며 삼 장이나 날아가 버렸다.

 
     쿵!
 

     바닥에 떨어진 그는 한동안 일어설 줄을 몰랐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한 쌍의 발이 그의 앞에 멈췄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검을 망가뜨리려는 게 아니었는데."

 
     노구룡이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백가람의 손에는 자루만 남은 빙령검이 들려 있었다. 검신은 산산

     조각 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노구룡은 수중의 웅룡도를 들고 잠시 망설이더니 불쑥 내밀었다.

 
     "괜찮다면 이거라도 가지시오. 이래 봬도 고기 써는 데는 꽤 쓸모

     가 있는 칼이오."

 
     "......!"

 
     백가람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노구룡이 내민 웅룡도

     를 탁 치며 힘겹게 일어섰다.

 
     "내가 졌다."

     그는 충혈 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부딪친 사

     도 고수들은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널 꺾으러 다시 오겠다."
 

     말을 마친 백가람은 신형을 날렸다.

 
     "우우우우......!"

 
     울분에 찬 장소성과 함께 백가람은 좌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는 한 척의 소선에  올라타더니 쏜살같이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와아아아아―!"
 
     "노구룡 대협 만세!"

 
     "노 대협 만세!"

 
     군산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정도 무림인들은 일제히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반면 사도 무림인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저었다. 어

     떤 이들은  병기를 손에서 놓아 버렸으며,  어떤 이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노구룡은 웅룡도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거참, 좋은 칼인데."

      태양은 절반 이상 기울었다.

      눈부신 빛은 동정호의 수면에 떨어져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백선결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는 빈 술잔을 노팔

     룡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들의 성정이 후하군요."

      노팔룡은 술잔을 받았다.
 
     "비무는 비무일 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어서야 쓰겠소?"

      옆에서 도운하가 그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백선결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끄럽구려.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소이다. 솔직히 패배를 시인

     하지 않고, 앙심을 품어  달아나다니....... 모두가 이 아비가 못난 탓이오."

 
     도운하가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란 말이  있지요. 사람들은  대부분 모든

     것을 배워서 알게 되지만, 개중에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깨닫는 사

     람도 있는 법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백선결의 앞으로 옮기며 잔

     잔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백선결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렇소. 대지(大知)는  곧 무지(無知)요,  대용(大用)은 무용(無

     用)이란 말이 떠오르는군......."
 

     그는 술잔이 채워지자 다시  단숨에 마셔 버렸다. 술잔을 비운 그

     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두 분, 내내 강령하시기 바라오."


     백선결은 정중히 읍한 후 걸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수면 위를  걸어갔다. 동정호의 푸른 수면 위를 마

     치 평지처럼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환상처럼 신비해 보였다.

 
     "......."

 
     노팔룡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도운하가 그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사형의 무공 경지는 반인반선(半人半仙) 지경에 이른 것 같아요.

     정말 축하할 일이에요."

 
     노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젠 내가 그를 이기지 못할 것 같소."

 
     이때였다.

 
     촤아아아아!
 

     물방울이 사방으로 솟구치며 불쑥 머리통 하나가 뱃전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노구룡이었다.

     도운하는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노팔룡의 귀에 대고 말했다.

 
     "당신 부자에겐 천하  제일의 검법이 있잖아요. 진우주천상천하유

     아독존검법 말이에요."

     노구룡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불쑥 물었다.

 
     "아버님께 배울 게 하나 있습니다."

 
     노팔룡은 눈을 가늘게 한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노구룡은 뱃전으로  기어 오르더니 노팔룡의  귓전에 대고 뭐라고

     말을 했다. 잠시 후 노팔룡의 눈빛이 게슴츠레해졌다.

 
     "푸흐흐......, 그거 말이냐? 이따 밤에 아비에게 오너라. 자세히

     가르쳐 주마, 흐흐흐.......  자고로 여자란 말이야, 겉으로는 싫

     다면서도 속으로는 좋다 하는 요상한 동물인 고로, 그저 눈 딱 감

     고 꾹꾹 눌러 주면 만사......."

     "뭐에욧!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욧!"

 
     "아이쿠!"

 
     노팔룡은 벌렁 자빠졌다. 언제  왔는지 이쪽 배로 옮겨 온 하여령

     이 싸늘한 얼굴을 코앞으로 들이밀었던 것이다.
 
     그녀의 뒤에는 네 여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군약명, 주자경, 설경경,  희수봉이었다. 무림 사화로 불리는, 천

     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네 여인의 눈이 한 사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노구룡은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중얼거렸다.

 
     "나......, 난 잠시 가 볼 곳이 있어서......."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풍덩!

 
     동정호에 떨어진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어딜 가는 거예요!"

 
     "나오지 못해욧!"

 
     무림 사화가 동시에 외치는 소리가 짜랑짜랑하게 동정호의 수면에

     파랑을 일으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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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독보강호 제1권  (0) 200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