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나의 아버지 박지원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0. 8. 10. 19:53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

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터이다. 그는 중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대문호이다. 아니 중세기만이

아니라 근대문학까지 포함시키더라도 박지원을 능가하는 문호는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구

한말의 유수한 문장가 김윤식은 박지원의 문장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그의 문장은 천마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법도에 다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은 문장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며. 후생이 배워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박지원은 한갖 문장만 신품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도저한 학문과 높은 식견을 가

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글에는 심중한 사상이 담겨 있다. 그가 대문호인 건 바로 이 때

문이다.

이 책은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가 쓴 박지원의 전기이다.  박종채는 아버지의 위대한 문

학가로서의 면모만이 아니라 그 인간적 면모와 함께 목민관 시절의 흥미로운 일화들도 자세

히 들려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박지원이 활동했던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지성사와 사회사

에 대한 풍부하고 생동감있는 보고서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과정록이다. 과정록은, 자식이 아버지의 언행과 가르침을 기록한 글이라는

뜻이다. 박종채는 4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 책의 초고를 집필했으며, 그 후 몇 년에  걸

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를 통해 박종채가 아버지 박지원을 후세

에 제대로 전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중세 전기 문학의 금자탑

이라 이를 만하다.

역자는 1996년 2학기와 1997년 1학기의 두 학기에 걸쳐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 개

설된 한국고전비평연습 과목에서 과정록의 강독을 진행하였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열의를

갖고 참여했는데, 이 책은 그 성과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번역이나 주석 작업을 끝낼 무렵이면 늘 하는 결심이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

다는 다짐이다. 창조적인 일만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학문적

상황이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나 몰라라'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퍽 미안한 일이다. 모

든 게 마뜩찮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역자가 처한 이러한 난처함의 산물이다.

출판사의 세심한 배려로 이 책은 두 가지 형태로 간행될 수 있었다. 그 하나는 한문 원문

과 그에 대한 교주를 첨부한 책이요, 다른 하나는 한문 원문 없는 책이다. 일반 독자라면 추

자 쪽이 부담이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정록 초고본 자료는 임형택 선생님께 빌려볼 수 있었던바,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원문에

대한 교주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데다 퍽 까다로운 작업인데 정길수 군의 도움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 책에 정군의 손길이 스며들어 있음을 몹시 기쁘게 생각한다.

끝으로 보기 좋은 책을 만들어준 김혜경  씨를 비롯한 돌베게 편집부 여러분들의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1998년 7월 27일

박희병


일러두기

1.이 책은 연암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가 저술한 과정록을 번역한 것이다.

2.과정록에는 초고본, 1차 수정본, 완성본의 세가지가 있는데, 이 책은 완성본의 완역이다.

초고본은 대전의 후손가에 소장된 수초본을 말하며, 1차  수정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

장된 본을 말한다. 완성본은 열상고전연구 제8집에 수록된 본을 말하는데, 4권 1책이다.

3.이 책은 과정록의 제1권을 제1부, 제2권을 제2부라 하였다. 그리고 각 부마다 적당한 제

목을 붙여주었다. 

4.쉬운말로 번역하고자 고심했다. 어려운 한자어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용이 불

가피할 경우 간단한 주석을 달아주었다.

5.본문이나 각주에 나오는 작품들의 제목을 원제 그대로  제시할 경우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풀어서 제시했다. 원제는 따로 밝혀주었다.

6.본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비교적 자세한 주석을 붙였다.

7.한번 주석을 달아준 사항이라 하더라도  독자의 편의를 위해 뒤에  다시 달아준 경우도

있다.

8.인명의 풀이는 원칙적으로 주석에서 하지 않고 부록인 인명해설에서 했다. 그러나  본문

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에서 언급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인

명해설로 돌리지 않고 주석에거 언급했다.

9.원문에는 원래 번호가 붙여져 있지 않으며 새로운 조목이  시작될 때마다 한 자씩 내어

쓰기를 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조목별로 번호를 붙였다. 다만 제4권의 맨 끝은 추기로 간

주해 번호를 붙이지 않았다



 


제1부 꿈에 붓을 얻다


자서

아아! 외삼촌 지계공(이재성)께서 작고하신 후로는 아버지의 지장(고인의 성명과 나고  죽

은 날, 행적, 무덤의 소재 등을 적은 글. '지문'이라고도 한다. 이런 종류의 글은 죽은 사람과

가까운 이가 짓는 게 관례였다. 박지원은 1805년, 이재성은 1809년에 타계했다. 이재성은 박

지원의 처남이자 그의 평생 지기였다.)을  부탁 드릴 분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서

남기신 자취를 모아서 후손에게 전하고자 하나. 생각건대 식견이  낮고 문장은 짧으며 보고

들은 일 가운데 잊어버리거나 빠뜨린 게 많다.

일찍이 옛사람이 자기 부친에 대해 쓴 글, 이를테면 소백온의 문견록(소백온은 북송의 철

학자 소강철의 아들. 문견록은 소백온이 그 부친의 일을  기록한 책.)이나 여씨의 가숙기(송

나라 여공저의 아들인 여희철이 지은 책으로  주론 견문을 기록하였다.)등을 읽어보니 자잘

한 일이라도 버리지 않고 모두  기록하였는데. 고인의 모습을 상상하기에는  근엄한 글보다

도리어 나았다. 이에 그것을 본떠 집필하여 조각글이나 짧은 메모라도 쓰는 대로 다 모았으

니, 마치 옛날 사람이 감나무  잎에다 글을 써서 항아리에 차곡차곡  모으듯 하였다.(옛날에

종이가 없어 감나무 잎에 글을 써서 항아리에 모았다는 고사가 있다.) 이 일은 계유년(1813)

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4년이 되는 셈이다. 마침내 번잡한  것을 깎아내고 중복된 것을 없

애니 2백여 조목이 남았다.

자못 들은 대로 기록하여 신중함이 결여된 듯도 하지만, 감히 함부로 덜거나 깎아내지 않

은 것은 아버지의 풍채와 정신이 오히려 이런 곳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읽

는 사람들은 아무쪼록 너그럽게 헤아려주길 바란다.

병자년(1816) 초가을에 불초자 종채가 울며 삼가 쓴다.


1

아버지의 함자는 지원. 자는 미중(박지원은 자신이 쓴 글들에서 그 자를 중미라고 적어놓

고 있지만, 친지들은 대개 미중이라 불렀다. 원문에는 자에 해당하는 두 글자가 가려져 있으

며, 그 옆에 조그만 글씨로 '미중'이라  적어놓았다. 규장각본에는 글자를 가림이 없이  바로

'미중'이라 명기해놓았다.) 호는  '연암'이시다. 우리 박씨는  신라에서 비롯되었는데, 나주의

반남현(지금의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백제 때  '반내부리'라 하였는데 이는 '큰 마을'이란

뜻이다.)을 본관으로 삼아 반남 박씨가 되었다. 집안의 계보는 여기에 싣지 않는다.


2

아버지는 영조 13년(1737) 2월  5일 새벽에 서울 서부  반송방(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밑에

동,서,남,북,중의 5부를 두었고 부 밑에는 방,  방 밑에는 계를 두었다. 반송방은 서부의  8방

가운데 하나다.) 야동(서소문 밖에 있던 동네) 집에서 태어나셨다. 훗날 집안 사람이 사주를

적어 북경의 점쟁이한테 가 길흉을 물었다. 그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사주는 마갈궁(춘분을 기점으로  황도를 12등분하여 만든  12궁의 하나. 이 별자리를

타고난 사람은 남의 비방을 많이 받는다고 함)에  속한다. 한유와 소식이 바로 이 사주엮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와 사마천(한나라의 역사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장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사기의 저자)과 같은 문장을 타고 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


3

서너 살 때 이미 조숙하여. 옛 사람이 부모의 베갯머리에서 부채질하고 그 이부자리를 따

뜻하게 한 일등을 본받아 행하셨다.


4

당시 증조부 장간공(박필균)께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셨는데, 감영과 집까지의 거리가 조금

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 왕래하여 문안을 드렸다. 장간공은  이

사를 하고자 하셨다. 아버지는 나귀를 타고 가 새 집을  보고 돌아와서는 대청과 사랑이 어

떤 방향으로 앉았으며 집이 몇 칸이나 되는지 등등을  자세히 여쭈었는데, 분명하여 하나도

틀린 곳이 없었다. 이는 아버지 다섯 살 때의 일이다.


5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했다. 증조부인 장간공 역시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하셨으며,  집

안일에만 마음을 쓰지 않으셨다. 조부의 여러 형제분들이 한  방의 좌우에서 증조부를 모셨

으므로 아버지 형제는 책을 펴놓고  공부할 곳이 없었다. 마을 아이들  중에 아버지를 따라

공부하는 자가 10여 명쯤 되었다. 그리하여 목수를 부리지 않고 눈썰미로 요량해 집을 완성

하셨다. 아버지는 이 집에 큰아버지와 함께 거쳐하셨다. 이를 통해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이

미 경제에 뜻을 두셨음을 알 수 있다.  


6

열여섯 살에 관례(옛날에 남자가 성년에 이르면 상투를 쓰고 갓을  쓰게 하던 의식)를 올

리고, 처사인 유안재 이공(이보천)의 집안에 장가드셨다.  처사는 근엄하고 청렴고결하여 예

법으로써 자신을 단속하였다. 그 아우 학사공 양천은 경서와 사서를 아주 좋아했으며,  문장

에 뛰어났다. 아버지는 처사에게서 맹자를 배우고 학사에게서 사마천의  글을 배워 문장 짓

는 법을 대강 터득하셨다. 하루는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공전'을  지었는데, 학사공이

크게 칭찬하시며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글솜씨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약관 때부터 지기가 높고 매서웠으며 자잘한 예법에 구애되지 안니하여  가끔씩

해학과 유희를 하곤 하였는데, 처사는 특별히  아버지를 애지중지하여 가르치고 꾸짖었으며

절실한 말로 바로잡아 옛사람이 이룬 바와 같은 성취를  기대하셨다. 처사는 언젠가 학사공

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지원이는 그 재기를 보니 범상한 아이와 크게 다르더라. 훗날 반드시 큰사람이  될 게다.

다만 악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뛰어난 기상이 너무 드러나 그게 걱정이다."

아버지는 처사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셨다.


7

아버지는 언젠가 꿈에 서까래만한 크기의 붓 다섯 개를 얻었는데, 붓대에는 "붓으로 오악

(중국에도 오악이 있으나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오악, 곧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묘향산, 남

쪽의 지리산, 북쪽의 백두산, 중앙의 삼각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붓으로

오악을 누르리라"는 말은 일국에 필명을 떨칠 것이라는 뜻이다)을 누르리라"라는 글귀가 적

혀 있었다고 한다.


8

산속의 절이나 강가의 외딴집에서 독서하셨는데 아버지를 따라 함께 공부한 분이 10여 명

이었다. 동년배 중 훗날 정승이  된 김이소나 판서가 된 황승원은  모두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의문나는 게 있으면 아버지께 묻곤 하였다.


9

아버지께서 스무 살 때  일이다. 지으신 글을 강한 황경원에게 갖고 가 질정을 구하였다.

황공은 당시 문형(대제학의 별칭)이었는데 크게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훗날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을 틀림없이 자넬 걸세!"


10

처사인 단릉 이윤영 댁에서 주역을 공부하셨다. 이공은 아버지가  주역의 깊은 뜻을 논하

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책상을 치며 칭찬하기를, "이건  사람들이 밝히지 못한 바를 밝혀냈

구먼! 주역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세사에 몇이나  될는지." 하시며, 나이 차이를 따지

지 않고 아버지를 벗으로 삼았다. 그리고 맏아들 희천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좇아 놀게 하였

다.


11

아버지는 소를 타고 미호 김공(김원행)을 찾아뵌 적이 있다. 공은 아버지의 태도와 말씨를

대한 후 문하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참 준수하고 빼어난 인물을 보았구나!"

소타고 미호 선생 찾아뵈었더니

빼어난 인물이라 선생이 평했지.

라는 말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족숙인 근재공 윤원이 편집한 미호어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미호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박지원에 대해 사람들이 기이하며  걸출하다고 많이

들 칭찬하던데, 접때 송양정군과 함께 나를 찾아왔길래 만나보니  장래가 퍽 촉망되는 젊은

이더군."


12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말과 의론이 엄정하셨다. 겉으로만 근엄하다고 속마음은 그렇지 못

한 자나 권력의 부침에 따라 아첨하는 자들을 보면 참지  못하셨으니, 이 때문에 평생 남의

노여움을 사고 비방을 받는 일이 아주 많았다. 외삼촌 지계공이 쓴 제문에 이르기를,

가장 참지 못한 일은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

그래서 소인배와 썩은 선비들이

늘 원망하고 비방했었지.

라고 하였으니 가히 아버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할 만하다.


13

세상의 벗사귐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좇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세태가 꼴불견이었는데,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이런 세태를 미워하셨다. 그래서  아홉

편의 전을 지어 세태를 풍자하셨는데, 그  속에는 왕왕 우스갯소리가 들어 있다. 아홉  편의

전에는 각기 시적인 서문을 붙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세 미치광이가 서로 벗삼아

세상을 피해 거지로 살아가네.

아첨배를 조롱하는 말 들어보니

그 작태가 환히 눈에 보이듯.

이제 마장전을 쓴다.


선비가 배고파 구차해지면

온갖 행실이 어그러지는데

엄행수는 똥을 져 날라 스스로 먹을 것 마련하니

하는 일은 더럽지만 입은 깨끗하지.

이에 예덕선생전을 쓴다.


민옹은 골계를 잘하고

세상을 조롱하며 비웃었으나

해마다 벽에 글을 써서 스스로 분발했으니

정말 게으른 자를 깨우칠 만하지.

이에 민옹전을 쓴다.


명분과 절개를 힘써 닦지 않고

문벌과 지체를 밑천삼아

조상의 덕을 파니

장사치와 뭐가 다를까?

이에 양반전을 쓴다.


김홍기는 큰 은자라

세속의 노님 속에 숨었으나

어떤 상황에서도 잘못이 없었고

남을 시기하지도 않고 탐욕도 없었지.

이에 김신선전을 쓴다.


비렁뱅이 광문은

그 명성이 지나쳐서

자신은 명성을 좋아하지 않았건만

형벌 그만 못 면했네.

이에 광문자전을 쓴다.


아름다운 저 우상은

옛 문장에 힘썼다네.

예가 사라지면 초야에서 구하는 법

삶은 짧았지만 그 이름 영원하리.

이에 우상전을 쓴다.


세상이 말세가 되자

허위를 높이고 꾸며

짐짓 은자인 체해 벼슬을 얻는구나

이런 짓은 옛날부터 부끄러이 여겼던 일.

이에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둑놈전을 쓴다.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웃어른 공경하면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고 할 만하네.

이 말이 혹 지나칠지 모르지만

위선자를 경계하는 말은 되지.

이에 봉산학자전을 쓴다.


이 아홉편의 전은 모두 스무 살 남짓 때 지으신 것이다. 이  중 마지막 두 편은 잃어버리

고 지금 일곱 편만 남았다. 일곱 편 가운데 '예덕선생전''광문자전''양반전', 이  세 작품은 세

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전은 그 체재가 자못 장난삼아 지은 것처럼 보이므로, 식견이 없는 자는 우스갯소리

롤 지은 글로만 알고, 식견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나는 이  글들에

대해 지계공께 한번 여쭈어본 적이 있다. 공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당시 선비인 체하면서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가 있었는데.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

둑놈전'은 그 자를 풍자하기 위해 지으신 거지, 후에 그 자가 죽자 네 아버지는 '저 옛날 소

순이 간사한 자를 비판한 글을 지어 명성을 얻은 적이 있지만 내가 다시 그런 명성을  얻을

필요는 없지' 라고 하시고는 마침내 그 글을 불태워버렸다. '봉산학자전'이 없어진 것도 아마

이때가 아닌가 싶어. 또 '예덕선생전''광문자전''양반전' 등 세 작품은 네 아버지가 젊을 적에

심심파적으로 본뜨고 모범으로 삼은 대상이 있으니, 이를테면 '양반전'은 '동약'(북주의 분장

가인 왕포가 지은 글. 노비의 의무를 자세히  서술한 다음, 그것을 위반할 경우 매 100대를

때리겠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을 본받아 지은 거지. 게다가 이들 아홉  편의 전에는 모

두 '자서'가 붙어 있는바, 연유가 있어 이들 작품을 창작했음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지"

나는 지계공의 이 말씀을 삼가 기록하여 감히 잊지 않으려고 한다. 아아, 지으신 뜻을  궁

구하지 못하고 다만 장난삼아 지은 글로만 읽는다면 이 어찌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

가? 나는 이 사실을 마음 아프게 여긴다.

지계공은 아버지에 대해 이런 말씀도 해주셨다. "네 아버지는 스무 살 남짓해서 불면증으

로 시달린 적이 있으셨다. 밤낮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는 날이 혹 사나흘씩이나 계속된 적도

있는데, 보는 사람들이 몹시 걱정했었다. 아홉 편의 전을 지으신 게 아마 그때였을 텐데, 무

료함을 잊고 병을 이기기 위해서였을 게다."


14

아버지는 소시적에 때로 남들과 함께 과거공부를 하셨다.  그리하여 한문홍, 이희문, 이횽

유, 황승원, 홍문영 등 여러  분과 때때로 어울려 과거시험의  글쓰기를 익히셨지만, 그것을

좋아하신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자주 하신 것도 아니었다.  매양 성균관의 과거시험장에 들

어가면 반드시 한유와 두보의 고체시를 본떠 시를 지으셨는데 그 시가 기이하고 뛰어나 읽

을 만했으므로, 친구들이 특이한 구절을 외어 전하곤 하였다. 그러나 왕완 한 편의 글을  다

짓지 않은 체 빈 답안지를 내고 나와버리곤 하셨으니,  아버지께서 과거시험의 합격 여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건 젊은 시절부터 그랬던 것이다.


15

당시 아버지의 문장에 대한 명성은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래서 과거시험을 치

를 때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아버지를 꼭 합격시키려  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눈치채

고 어떤 때는 응시하지 않았고 어떤 때는 응시는 하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과거시험장에서 고송과 괴석을 붓 가는 대로 그리셨는데,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를 어리석다

고 비웃었다. 그러나 이는 당신께서 과거 보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6

을유년(1756, 영조 41년으로 연암이 29세때다.) 가을,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셨다.

유언호와 신광온이 바야흐로 나란히 말을 타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고자 하면서  아버지에

게 함께 가자고 하였다. 아버지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감히 멀리 놀러갈  수 없다"고

하며 두 분을 하직하고 돌아오셨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함께 가지 않았느냐?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

게 좋느니라."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김이중이 마침 우리 집에 들렀다가 이 말을 들었다. 그는  돌

아가 나귀 살 돈 100냥을 보내면서  이 돈이면 유람을 떠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돈은

마련되었지만 데리고 갈 하인이 없었다. 이에 어린 여종으로  하여금 골목에 나가 소리치게

했다. "우리 집 작은 서방님 이불집과 책상자를  지고 금강산에 따라갈 사람 없나요?" 응하

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에 새벽에 출발해 다락원(서울에서 의정부에 가는 길에 있었다)

에 이르러 유공과 신공을 만났다. 뜻밖에도 아버지가 나타나자 두 분은 처음 금강산에 가기

로 약속한 것보다 더 기뻐하였다.

아버지는 금강산 안팎의 여러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만폭동에 이름을 새겨두고 돌아오

셨다. 삼일포의 사선정에는 연구로 된 현판을 걸어놓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금강산을 유람하실 때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라는 시를 한 수 지으셨다. 판

서 홍상한이 아들 집에서 그 시를 보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도 이런 필력이 있

었던가? 이는 거저 읽을 수 없다." 라고 하시면서, 중국 붓 크고 작은 것 이백  개를 문객으

로 하여금 갖다주게 하여 정중한 뜻을 표하였다.


17

기묘년(1759, 연암이 23세때)에 할머니 함평  이씨(연암의 어머니)의 상을 당하셨다. 할머

니는 대호군 이창원의 따님이시다. 아버지는 상중에 서건학이 지은 독례통고를  베껴쓰셨다.

(옛날 상중에는 예서-예에 대한 책-를 읽거나 베껴쓰는 것이 관례였다.)


18

정해년(1767, 연암이 31세때)에 할아버지(연암의 아버지인 박사유를 말한다.) 상을 당하셨

다. 이전부터 할아버지는 병환이 위중하셨는데, 이 해 삼월 초이튿날에는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다. 당시 아버지는 화로에서 약을 달이고 계셨다. 온 집안이 난리가 났지만 아버지는 돌

아와 숫돌에 칼을 갈았다. 큰아버지께서, "칼을 갈아 무엇하려느냐?" 하고 꾸짖자 아버지는, 

"생강을 썰러고요." 하고 대답하셨다. 아버지는 약을  짤 때에 칼로 왼손 중지를  베어 피를

뚝뚝 떨어뜨려 약에 타서 올렸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조금 있다가 소생하셨다. 이 달 엿새날

은 형님의 돌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돌상을 차리라고 하시고는 평상시와 같이  즐거워하셨다.

할아버지는 유월 스무이튿날 마침내 돌아가셨다. 손가락을 벤 일이 있은 후 110일이나 지나

서였다. 그런데 당시 이 일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아홉 살 난 나의 큰누이(연암의  맏딸)

만이 곁에서 목도했다. 그러나 어려서 영문을 몰라 아버지께서  왜 그러시는지 알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누님은 그 후 어느 날 밤 수심에 찬 얼굴로 걱정하며 말했다.  "지난  3월

경황이 없을 때 아버지께서  칼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베이셨는데,  이제 나으셨는지 모르겠

네." 이 말을 듣고 큰아버지께서 놀라 어떻게 손가락을 베었더냐고 물었다. "손가락을 벤 후

핏방울을 약주발에 떨어뜨리셨어요. 참 이상하지요?" 큰아버지는  이에 급히 아버지를 불러

손을 잡아 손가락을 펴보니 중지 두 마디에 과연 칼자국이 있었다. 큰아버지는 한참 눈물을

흘리시더니 다시는 집안 사람에게 이 일을 말씀하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는 남들이  그 일

을 알기를 바라지 않아 다친 곳을 감싸매지 않고 손을 꼭 움켜쥔 채 며칠 동안 다니셨는데,

그 사이 상처는 저절로 아물었다.


19

이 해 가을에 노원(지금의 서울시 노원구 일대)에다 할아버지의 장지를 마련했는데, 이씨

집안이 그 장지를 훼손하는 변고가 발생했다. 그 땅에는 반인(여러 대를 이어가며 성균관에

딸려 있던 천인으로 주로 성균관에 쓰이는  제수를 마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들의 무덤이

많이 있었는데, 영의정을 지낸 녹천 이유의 별장도 인근에 있었다. 그때에 이유의 손장인 이

상래는 나이도 어리고 무지하였는데, 마침  그 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반인들은  이상래를

풍수설로 꾀어 무덤자리를 더럽혀 장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 다음 그  땅을 빼앗게 하였다.

이상래는 이 일을 자신의 부형에게  고하지 않았다. 그가 한 짓은  참담하고 가슴아파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그의 부형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놀랐으며, 상래를  매

질하고 우리 집안에 사과함으로써 산송(묘지와 관련된 송사)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집

안에 고약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집안 아이가 비록  잘못했긴 하나 어찌 굽신거리며 용서

를 빌겠는가?" 라면서 끝끝내 우리 집안과 싸우려들며  우리를 비난하였다. 급기야 우리 집

안에서는 영조께서 거둥하실 때 상언(백성이 국왕에게 상소하는 것) 하였으나, 각하되어 임

금에게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마침내 격쟁(원통한 일이  있는 백성이 임금에게 직접 하소연

하려 할 때, 도성 밖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꽹과리를 쳐서 하문을 기다리는 일)을 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 당시 임금님께서  춘추가 높으셨는데 신하들이  자기에게 속이거나

숨기는 일이 있을까 깊이 걱정하시는 터였다. 이씨 집안에서는 사직(정5품) 이상지(이상래의

이복형)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려 변론하면서 상언이  각하된 것을 합리화하고자 했다. 그러

자 임금님께서 크게 노하셨다. 임금님은 급히  건명문(경희궁의 동남쪽에 있는 문으로 신문

고를 여기에 걸어두었다.)에 납시어 이상지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이상지는 당시

큰 병에 걸려 위독했으며, 기실 집안에 무슨 일이 모르고 있는 처지였다. 임금님께서 이  사

실을 아시자 더욱 노하셔서 마침내 이상지의 부형을 잡아다가 형벌을 가하면서 신문하는 지

경에 이르렀다. 이때 임금님께서 격노하신 것은  사실 이 일이 아닌 다른 일  때문이었으며,

또한 이씨 부형의 죄 때문도 아니었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박희원과 이상지의 상언이

동시에 왕에게 올라갔는데, 왕은 이상지를 친히 심문하겠다고 했다. 영의정 김치인이 그  이

유를 여쭙자 "법관도 세력있는 가문을 두려워하는데 내가 직접 결단하지 않으면  어떻게 징

계할 수 있겠고?"라고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버지는 이 일로 매양 탄식하면서 말씀

하시기를, "격쟁하여 억울함을 호소한 건 참으로 부득이해서인데, 임금님께서 이처럼 격노하

시다니 몹시 불행한 일이다." 하고 하셨다. 이상지는 병이 낫자 그제서야 이 일을 전말을 알

았다. 그는 크게 통곡하여 말하기를,  "나의 이름으로 인해 부형께서 형벌을  받으셨으니 내

어찌 온전한 사람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며 다시는  벼슬

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 떨어진 신을 신고 다니며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아버

지는 이 말을 전해듣고 크게 상심하셨으며, 평생 다른  사람에게 피차의 잘잘못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날 처분이 끝나자 임금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다. "무덤 구덩이에 오물

을 넣었다고는 하나 다시 깨끗하게 하면 그만이니, 모름지기 즉시 안장하라." 당시의 의론은

'임금님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임금님의 분

부가 비록 지극히 황감하기는 하나 이미 다른 사람과 원한을 맺은 터에 그곳에다 장사지낸

다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편안하시겠는가?" 하시고는 끝내 그곳에 장사지내지 않으셨다.


20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당신의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섬시겼다. 친척과 친구드

은 이런 아버지를 저 옛날 사마온공(송나라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사마광을 말함. 자는 군실.

사마지의 둘째아들로, 태사온국공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므로 '사마온공'이라 불린다. 사마온공

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 사마단을 아버지처럼 섬긴 것으로 유명하다.)이 그 형 백강(사

마자의 장남이자 사마온공의 형인 사마단을 말함)을 섬긴데 견주었다. 형수 이공인(공인은 5

품 관리의 아내에게 주던 칭호)은 하도 가난을 많이 겪은지라 몸이 대단히 수척했으며 때로

우울함을 풀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과 좋은  말로써 그 마음을 위로해

드렸다. 매양 무얼 얻으면 그것이 비록 아주 하찮은 것일지라도  당신 방으로 가져 가지 않

고 반드시 형수께 공손히 바쳤다.


21

아버지는 삼청동의 백련봉 아래에 세들어 사셨는데, 그 집은  바로 대장 이장오의 별장이

었다. 당시 손님들이 날마다 많이 찾아왔다. 매양 눈 오는 아침이나 비 오는 저녁이면  말을

나란히 탄 채 술병을 들고 찾아와 좀처럼 빈자리가 없었다.아버지는 처음엔 글을 짓고 벗을

사귀는 일이 즐거워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서

로 자기 당파로 아버지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를 몹시 불쾌

하게 여기셨고, 이후 초연히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뜻을 품으셨다.


22

아버지는 경인년(1770, 연암이 34세때, 영조46년) 감시(진사와 생원을 뽑는 사마시의 별칭,

소과라고도 했다.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하급관리로 등용될 수도 있었다.)에 응시하여 초종장(사마시는 제1차 시험에 해당하는  초시

와 제2차 시험에 해당하는 회시가 있었다. 회시는 초시를 실시한 지  몇 달 뒤에 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초시든 회시든 모두 초장과 종장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초장이란  시험의

첫시간에 해당하고, 종장이란 둘째 시간에 해당한다. 초장에서는 부1편과 고시, 명, 잠  가운

데 1편을 보았고, 종장에서는 오경의와 사서의 2편을 보았다. 본문에서 말하는 초종장은  초

시의 초종장을 말한다.)에 모두 장원을 하셨다. 방이  붙던 날 저녁, 임금님께서는 아버지에

게 침전(임금의 침실이 있던 궁전)으로 입시하라는 특명을 내리시고, 지신사(도승지의 별칭,

지금의 대통령의 비서실장쯤에 해당하는  직책이다.)로 하여금 시험 답안지를  읽게 하셨다.

임금님께서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어가며 들으셨다. 그리고 나서 크게 격려

하는 말씀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회시에 응시하지 않으려 하셨는데, 꼭 응시해야 한다고 권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억지로 시험장에 들어가긴 했으나, 답안지를 내지 않고 나오셨다. 식견 있는  사람들

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 모두 말하기를, "구차하게 벼슬하려  하지 않으니 옛날 사람의 풍모

가 있다. "고 하였다. 유안옹(이보천)은 이때  시골집에 머물러 계셨는데 그 아들(연암의 처

남인 이재성을 가리킴)에게 말하기를,  "지원이 회시를 보았다고  하여 나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는데,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몹시 기쁘구나"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초시의 초종의 양장에서 장원을 하신 것은 모두 우연이었으나, 임금님의 극진한

은혜를 입게 되매 그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당시 시험을 주관하는 자들은 아버지를

반드시 합격시켜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  하였다. 아버지는 이런 분위기에  영합하여 이익을

구하는 것을 경계하여 용감하게 이같은 결단을 내리신 것이다.


23

아버지께서 개성을 유람하시다가 연암골(연암이라는 호는 이 지명에서 가져온 것이다.)이

라는 땅을 발견하셨다. 당시 백동수의  어린 청지기 김오복이 아버지를 모시고  따라갔었다.

연암골은 황해도 금천군에 속해 있었고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고려 때 목

은(이색)과 익재(이제현)등의 여러 어진 이가 그곳에  살았지만 후에는 황폐해져 사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 아버지는 화장사(황해도 장단 보봉산에 있던 절)에 오르셨는데 동쪽으로 아침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하였다.  별천지가 있겠다 싶어 백군과 함께  가보았다.

초목이 우거지고 길이 나 있지 않아 겨우 시냇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기이한 땅이 나타

났다. 언덕은 평평하고 산기슭은 수려했으며  바위는 희고 모래는 깨끗했다. 그리고  검푸른

절벽이 깎아지는 듯이 섰는데 마치 그림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시냇물은 맑아 속이 비

쳤고 너럭바위는 판판하였는데 그 한가운데 평평하고 잡초 우거진 빈터가 널찍하여 집을 지

어 살 만하였다. 마침내 이곳에 은거하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연암이라 자호하셨다.


24

아버지는 나라 안의 명산을 두루 다니셨는데, 서쪽으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쪽으로는 속리

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을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언젠가 이런  말씀

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과거를 일찍 그만두어 마음이 한가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산수유람을 많이 했었다."


25

아버지는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했으며,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봐 극도로 경

계하고 삼가셨다. 중년에 과거시험을 단념하자 사귀는 벗도 또한 많지 않아 오직 담헌 홍대

용, 석치 정철조, 강산 이서구가 수시로 서로 왕래하였으며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늘 따

라 어울리며 배웠다.

담헌공은 아버지보다 여섯 살 위였으며 학식이 정하고 깊었다.  공 또한 과거공부를 그만

두었으며, 조용히 수양하며 지내셨다. 공은  아버지와 도의의 사귐을 맺어 우정이  돈독하였

다. 하지만 두 분이 공경하는 말과 호칭을 사용함은 처음 사귈 때와 똑같았다. 아버지는  늘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이용후생학(생활의 도구를 잘 이용하여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하

는 데 주안을 두는 학문), 경세제국학(세상을 경륜하고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방안을 연구

하는 학문, 오늘날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이 이에 해당한다), 명물도수학(수학, 물리학,

기하학, 생물학, 천문학 등을 포괄하는 학문이다)  등의 학문을 소홀히 한다는 점, 그리하여

잘못된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 학문이 몹시 거칠고 조잡한 점을 병통으로 여기

셨다. 담헌공의 평소 지론도 이와 같았다.

그래서 매번 만나면 며칠을 함께 지내며, 위로 고금의 치란과 흥망에 대한 일로부터 옛사

람들이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날 때 보여준 절의, 제도의 연혁, 농업과 공업의 이익 및  폐

단, 재산을 증식하는 법, 환곡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법, 지리, 국방, 천문, 음악, 나아가 초목,

조수, 문자학, 산학에 이르기까지 꿰뚫어 포괄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모두가 외워 전할  만

한 내용이었다.

정철조는 문예적 교양이 높을 뿐 아니라 뛰어난 기예를  지녔다. 그래서 기계로 움직이는

여러 기구, 이를테면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기구(원문은 인중기이다.  도르래를 이용한 장

치이다.), 물건을 높은 데로 나르는 기구(원문은 승고기,  역시 도르래를 이용한 기구), 회전

장치를 한 방아(원문은 마전기, 회전기계장치로  방아를 돌리는 기구), 물을  퍼올리는 기구

(원문은 취수기, 용골차를 가리킨다.) 따위를 능히 마음속으로 궁구하여 손수 제작해냈다. 모

두 옛날의 것을 본떠 현재에 시험하여 세상의 쓰임에 이바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모두 박학하고 견문이 넓은 선비였는데, 매양 고증할 일이 있으

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박식한 지식을 쏟아냈다. 이들은 아버지를 깍듯이 섬겻다.

이 분들은 매번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낮을  잊은 채 담소하였다. 이서구는 나이

가 가장 어렸지만 재주가 몹시 빼어난데다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그

래서 아버지께서 매우 사랑하셨다. 집안의 나이든 청지기나 하인들도 종종 그 당시 일을 말

하는데, 들을 만한 일이 많다.


26

선배인 효효재 김용겸은 연세가 많고 덕이 높았다. 또한  대범하고 예스러워 예법으로 자

신을 지켰다. 그러나 아버지와 담헌을 만나기만 하면 풍류가 넘치고 이야기가 진진했다.  늘

자신의 중부인 농암(김창협)과 숙부인 삼연(김창흡)의 언론과 풍채를 거론하며 아버지와 담

헌을 격려했다.

효효재는 운치 있는 일이 있으면  즉시 아버지를 불러 함께 즐겼다.  자리 오른쪽에는 옛

경쇠(옥이나 돌로 만든 아악기의 한가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중국어로  '관저'

나('시경' 국풍의 시, 군자가 훌륭한 배우자를  찾다가 마침내 그런 사람을 만나 즐거워하는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대단한 화락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나 녹명('시경'의 소아에  나오는

시로 임금이 신하와 손님을 접대할 때 연주하던 노래인데,  민간에서도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과 같은 '시경'의 시들을 읊었는데, 경쇠를 쳐서 가락을 맞추며

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27

아버지는 음률을 잘 분별하셨고 담헌공은 악률에 대단히 밝으셨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담

헌공의 방에 계시다가 들보 위에 양금  여러 개가 걸려 있는 걸 보셨다.  중국에 간 사신이

귀국하면서 해마다 가지고 온 것인데, 당시 사람들 중에는 그것을  연주할 줄 아는 자가 아

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그것을 풀어  내려보라고 하셨다. 담헌은 웃으며,

"곡조를 모르는데 뭘 하시려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작은  나뭇조각으로 쳐보면서, "거문고

를 가져와보세요. 줄을 따라 대조해가며 쳐보아 음이 어울리는지 확인해봅시다."  라고 하셨

다. 몇 차례 해보자 가락이 과연 들어맞아 어긋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양금이 비로소 세상에

성행하게 되었다.

당시 거문고를 잘 연주하던 음악가로  김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호가  풍무자였는데,

효효재가 붙여준 것이었다. 새로 조율한  양금을 즐기기 위해 이 사람과  함께 담헌의 집에

모였다. 고요한 밤에 음악이 연주되었다. 마침 효효재가 달빛을 받으며 우연히 왔다가  생황

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걸 들으셨다. 공은 마음이 몹시  즐거워 책상 위의 구리 쟁반을

두드리며 가락을 맞추어 '시경'의 '벌목'장(시경의 소아에  나오는 시, 친구들을 대접하는 잔

치 때 부르는 노래이다.)을 읊으셨는데 흥취가 도도했다. 잠시 후 공이  일어나 나가더니 한

참 있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가서 찾아봤지만 공은 보이지 않았다.

담헌이 아버지께 말했다. "우리가 감히 법도를 잃어  어르신을 가시게 한 모양이구려" 두

분은 함께 달빛을 받으며 공의 댁을 향해 걸었다. 수표교(서울 청계천에 있던 다리)에 이르

렀을 때다. 바야흐로 큰 눈이 막 그쳐  달이 더욱 밝았다. 공은 무릎에 거문고 하나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고 계신 게  아닌가. 그래서 다들 몹시 기뻐

하며 술상과 악기를 그곳으로 옮겨와 공을 모시고 놀다가 흥이 다한 뒤에야 헤어졌다.

아버지는 언젠가 이 일을 말씀하시며,  "효효재께서 돌아가신 뒤 다시는  이런 운치 있는

일이 없었다." 라고 하셨다.


28

정유년(1777) 정조 원년에 외조부 유안처사의 빈소에 곡하고 글을 지어 애도하셨다. 유안

옹은 뜻이 높고 식견이 뛰어나시어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아버지만

큼은 사랑하고 격려하셨다. 공은 아버지가 모가 있어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함을 걱정하셔서

매양 진원룡(동한 때의 인물인 진등. 원룡은 호. 여포를 사로잡은 공으로 복파장군에 봉해졌

으며 38세에 죽었다. 당시 인망이  높던 허사가 진등을 찾아갔을 때  진등은 허사를 예의로

대하지 않고 자신은 윗자리에 눞고 허사를 아랫자리에 눕게  했다. 진등은 천하를 구제하려

는 큰 뜻만 생각하고 작은 예의 같은 것에는 구애하지 않았던 것이다.)이 호기를 없애지 못

한 일을 거론하며 주의를 주셨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물러나 미리 은둔하신 것은 평소 공의

가르침에 힘입어서였다. 아버지 친구분들은 늘 말씀하시기를,  "연암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

인가. 그렇건만 매사에 번번이 그 장인을 칭송하며 자기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하니 참 이상

한 일이지."라고 하였다.


29

아버지께서 소시적에 교유했던 분들은 모두 점잖은 분들이었다. 연장자로는 이민보,  윤득

관, 김상숙, 김상정, 이운영, 유의양 등이 있었고,  연배로는 유언호, 김이중, 신광온, 심영조,

김노영 등이 있었다. 이 분들과는 대단히 친한 사이셨다고 한다. 내가 늦게 태어난데다 못난

탓에 많이 여쭤보지 못해 자세히 기록하지 못한다.


30

무술년(1778, 정조 2년으로 연암이 42세 때다)에 세상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연암골로 들

어가셨다. 유공(유언호)은 아버지와 우정이 아주 깊었다. 그리하여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와 의논하곤 했다. 공은  아버지의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  권세가의 비위를

거스르는 내용이 많다고 깊이 주의를 주셨다. 하루는 공이  조정에서 돌아와 수심에 잠겼다

가 밤에 아버지를 찾아왔다. 공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그토록 거슬렀는가? 자네에게 몹시 독을  품고 있으니

어떤 화가 미칠지 알 수 없네. 그가 자네를 해치려고 틈을 본지 오래라네. 다만 자네가 조정

벼슬아치가 아니기 때문에 잠시 늦추어온 것뿐이지. 이제 복수의  대상이 거의 다 제거됐으

니 다음 차례는 자넬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몹시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치 못할 것 같네.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

아버지는, '평소 의론이 곧고 바르며 명성이 너무 높았던게 화를 부른 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셨다. 마침내 아버지는 자취를 감추어 은둔하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연암골로 들어가 두어 칸의 초가집을 지어 사셨다.

이에 유득공은 외직(서울 안에 있던 각 관아의 관직을 내직이라 하고 지방의 벼슬을 외직

이라 불렀다)을 구해 개성유수로 왔다. 공은 부임하는 즉시 구종(벼슬아치들을 모시고 다니

던 하인)들을 덜어버리고 연암골로 아버지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산수는 퍽 아름답네만,

흰 돌(옛날 중국의 신선인 백석생은 흰 돌을 삶아 먹었다고 한다)을 삶아먹을 수야 없지. 이

곳에서 개성까지는 30리 거리밖에 안된다네. 개성 읍내에 자네를  위해 주선해줄 만한 친지

는 없는가? 성곽 가까이에도 세들어 살 만한  집이 많거늘 왜 알아보지 않는가? 내가 임지

에서 날마다 자네와 함께 지낸다면 자네도 기쁠테지."

당시 개성 사람 양호맹과 최진관이 의기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연암골에 들어오셨다

는 소식을 듣고 자주 찾아와 뵈었다. 그러던 중 이런 이야기를 듣고 모두 뛸 듯이 기뻐하며

찬성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양호맹의 금학동(개성에 있던 동네 이름) 별장으로 거처를 옮기

셨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은 유공이 이미  몰래 준비해둔 터였다. 그곳 고을 자제  가운데

아버지에게 배움을 청하는 자가 꽤 있었다.

하루는 유공이 찾아와 말하기를, "내일 조정에 들어가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한다네."하고

는 빙그레 웃으셨다. 유공은 많은 사람이 앉은 조정의 반열에서 당대인의 문장을 일부러 평

하며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대해 말이 미쳤다. 유공은 짐짓 웃으며 이렇게 말했

다. "인생의 궁달(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외다. 박지원이 당시에 어떠했습니

까? 내가 개성에 가서 들으니 가족들을 이끌고 떠돌아다니다가 그만 부잣집에 눌러앉아 늙

은 훈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군요." 이 말에 홍국영은 껄껄 웃으며, "참으로 형편없이 됐으니

논할 것도 없구려." 라고  하였다. 유공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몰래 말했다. "이제야 자네가

화를 면하게 됐네."

유공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시종 이와 같았다. 당시  아버지를 비방하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하였다. 대개 평소부터 질투하고 시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권세가에 아첨하여  따라

떠드는 자도 있었으며, 또 옛날의 친분을 꺼림직하게 여겨 비방하는 자도 있었다. 이들이 모

두 이러쿵저러쿵 입을 쉬지 않고 놀리며 아버지를 헐뜯었다. 다만 담헌공(홍대용)만이 때때

로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곤 할 뿐이었다. (담헌은 이때 영천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31

개성은 고려의 옛 도읍지였다. 그래서 본조(조선왕조)에서는 더러이 여겼으며 내버린 땅으

로 간주했다. 주민들은 대개 장사를 직업으로 삼았다. 그 집안에 조금 맑은 기풍이 있어  문

학에 뜻을 둔 자라 할지라도 견문이 어둡고 고루한 탓에 공부라곤 과거시험 준비밖에 몰랐

다. 아버지가 금학동에 거처하시면서부터 선비 이현겸, 이행작, 양상회, 한석호  등이 날마다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아버지가 나중에 다시 연암골로 들어가게  되자 이들은 모두 책상자

를 짊어지고 따라와 한 해가 지나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이현겸은 고을에서 문학적 명성이

높았다. 한석호는 천품이 빼어나고 총기가 있었으며, 그 아들 재렴은 재사라 일컬어졌다. 나

머지 사람들도 모두 뜻과 기개가 있었으며 녹록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현겸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고을 선비들이 무지하여 경전과 사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과거공부 이외에 문장공부가 있고 문장공부 위에 학문이 있으며,

학문이란 글을 끊어 읽거나 글에다 훈고를 붙이는 것만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지요." 이현겸은 또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

셨어요. '자네들이 책을 읽는 데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글의 뜻과 이치에 파고

들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세. 평소 과거시험의  글을 익히던 버릇이 종이와 입

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 그것을 벗어나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지. 자네들이 진실로 나를 따라

배우고자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과정을 정하도록 하게. 그리하여 매일 경서 한 장과 주자의

강목(송나라의 사마광이 지은 역사책 자치통감을 다시 강과 목으로 나눈  책) 한 단을 빨리

읽거나 외우려 하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토론, 분변함이 좋겠어.' 이때

부터 여러 사람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좇아 배운 지 수년 만에 비로소 학문의 즐거움을 알

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우리 고을의 풍기가 점점 개명해갔지요. 유식한 사람들은 당시  선생

님이 우리 고을에서 하신 일을 저 옛날 문옹(한나라때 인물. 한나라 초에 촉의 군수로 임명

되어 학교를 세워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이 촉에서 한 일이나  한유가 조주(중국 남방에 있

는 고을 이름. 원래 조주 사람들은 전혀 학문을 모르고  지냈는데 한유가 조주 자사로 부임

하여 그들에게 학문을 가르치자 조주 선비들이 모두 학문과 덕행에 힘쓰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에서 한 일에 비유했지요" 이현겸은 너그럽고 후덕한 사람이었다. 문집이 있는데 아버

지의 언행을 많이 기록하였다.


32

유공(유언호)이 개성유수를 그만두게 되자 아버지를 다시 연암골로 돌아가게 했다. 유공은

아버지가 생계를 유지하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관에서 민간에 빚을 놓던 칙수전(중국

칙사의 접대에 사용하기 위한 예비비)  1천냥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유공은  이렇게 말했다.

"화근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 돈으로 몇 년 동안 생계를 유지하게나. 자네가 어찌 이

곳에 오래 있겠나. 만약 불시에 중국에서 칙사(중국측에서 보내는 사신)가 온다는 기별이 있

으면 내가 마땅히 이 돈을 갚겠네."

유공이 떠난 뒤에 양호맹, 최진관 등 여러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상의했다.  "우리들이 박

공을 따라 노닌 것이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었네. 또 박공이 여기서 사신 지 몇 년이 되었

지만 한번도 재물을 구한 적이 없으셨네. 그래서 비록 물건으로 예의를 표하려고 해도 입으

로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했었는데, 이제서야 작은 정성을 표시할 수 있게 되었네."

그리하여 서로 분담해 그 돈을 갚았다. 그들은 훗날  아버지께서 연암골을 떠나실 때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듣고만 계실 뿐이었다.  그 후, 아버지가

안의(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현감으로 부임해 가시자 첫 해의 녹봉을  떼어 그 돈을 갚았

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탄복해 마지 않았다. 애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들은 저마다 약간의 돈을 각출하여 친목회를 만들면서 말하기를,  "공의 풍모를 잊을 수 없

어서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내 위 석벽에다 그 사실을 새겨놓았다. 그리하여 매년 봄, 가

을 좋은 날에 고을 선비들이  모여 마음껏 놀았는데, 지금도 그  모임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33

아버지는 젊을 적에는 자신을 단속해 술을 드시지 않았는데,  과거를 단념하고 산수를 유

람하실 때부터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술자리에  어울린다 해도 취하시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연암골에 들어오시고부터는 간혹 취하도록 마셨다. 만년에 아버지께서  연암

골을 다시 찾았을 때 일이다. 아버지는 개성에 이르자 옛날에 기거하던 집을 찾았다. 당시의

개성 유수인 구상은 아버지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으나 아버지가 개성을 지나간다는 말

을 듣고 얼른 아버지를 방문했다. 공은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큰 술병을 가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자고 했다. 이때 아버지는 이미 네댓 잔 술을 드신 상태였다. 마침내  커

다란 사발로 술을 돌리고 술이 떨어지자 다른 술을 계속 내놓아 한밤중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유수는 대취하여 가마에 실려 부축을 받으며 돌아갔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른  방에

피해 있던 여러 손님들을 다시 나오라고 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귀한 손님에게 눌려

그만 하룻밤의 기쁨을 잃어버렸구려." 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바로 술을 청해 그들과  함께

다시 마시니 이러구러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당시  급히 연암골로 가야 했으므로

말에게 꼴을 먹이게 한 다음 자리에서 아침을 드셨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태연하게 담

소하시다가 훌쩍 말에 올라 떠나셨다. 주인이 몰래 술잔 수를 기억해두었는데, 유수가  마신

것이 마흔두 잔이었고 아버지께서 전후 두차례의  술자리에서 드신 건 도합 오십여  잔이었

다. 마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34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벗들과 모여 글 짓고 술 마시며 질탕하게 노는 일이 꽤 있었다. 사

람들은 이를 두고 아버지가 번화함을  좋아하며 몸 단속하기를 싫어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실 그 타고난 성품이 물욕이 없으셔서, 한가롭게 지내며 고요히 앉아 이

치를 궁구하고 관찰하기를 퍽 좋아하셨다.

연암골에 계실 때 일이다. 아버지는 하루종일 대청에서 내려오지 않는 날도 있었고,  간혹

사물을 응시하며 한참 동안 묵묵히 말이 없으시기도 하였다. 당시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

신 적이 있다. "비록 지극히 미미한 사물들, 이를테면 풀, 꽃, 새, 벌레와 같은 것도 모두 지

그한 경지를 지니고 있단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하늘이 부여한  자연의 현묘함을 엿볼 수

있지."

아버지는 매양 시냇가의 바위에 앉으시기도 하고,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산보하시다가

갑자가 멍하니 모든 것을 잊으신 것 같은 모습을 하기도  했다. 때때로 묘한 생각이 떠오르

면 반드시 붓을 들어 써두셔서 잔 글씨로 쓴 종이조각이  상자에 가득 찼다. 아버지는 그것

을 시냇가에 있던 집에 간직해두며  말씀하시기를, "훗날 다시 고치고  다듬어 조리를 세운

다음 책으로 만들어야지." 라고 하셨다.

훗날 아버지는 벼슬에서 물러나(연암은 1801년, 순조  1년에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연암골에 다시 들어가 당시의 글들을  꺼내보셨는데 이미 눈이 너무 어두워져서

잔 글씨를 알아보실 수 없었다. 아버지는 슬피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안타깝구나! 벼슬살

이 10여 년에 좋은 책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이윽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도움도 되지 않고 사람 마음만 어지럽힐 테지." 마침내 시냇물에 세초(글쓴 종이를 물에 헹

구어 먹물을 제거하는 일. 곧 글을 없애버리는 것을 뜻한다.)해버리게 하셨다.  슬프다! 우리

들이 그때 곁에 모시고 있지 못한 탓에 그 글을 챙기지 못했으니.


35

경자년(연암이 44세때)에 서울로 돌아와 평계(서대분 밖 평동)에 거처하셨으니, 곧 지계공

의 집이었다. 이때 홍국영이 실세하여 화근은 사라졌지만 점잖은 옛 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

을 떠났다. 그래서 분위기가 싹 변해 옛날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더욱 뜻을 잃고 스스로 방

달(말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음을 일컫는 말.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연암을 파락

호로 간주한 사람도 있었다. 파락호란 행세하는 집의 자손으로서 난봉을 피우거나 허랑방탕

하게 결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하게 지내셨는데  그것이 몸을 보존하는 비결임을 도리

어 기뻐하셨다. 그러면서도 항상 답답해하시며 머리 떠났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마침 아버지의 삼종형인 금성도위(박명원)께서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북경에 가시게 되어 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5월에 길을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  곧이어 열하(중국 동북부의 성.  청나라 황제의

별궁이 이곳에 있었다.)로 가셨다가 그 달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셨다. 귀국

후 더욱 배회하셨으며 즐거운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당시  연암골에 혼자 들어가 지내셨는

데 혹은 해를 넘기시기도 하고 혹은 반년이 지나 돌아오시기도 했다.


36

열하일기를 저술하셨는데 모두 25편이다. 그 가운데 심세편,  혹정필담, 망양록 등은 시속

에서 숭상하는 일이라든가 풍속을 통해 천하 대세를 살핀 것이다. 그런데 중국 인사들과 필

담으로 토론하다 보니 필담을 나눈 종이가 남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서로 주고받

는 이야기 중에는 혹 청나라에  저촉되는 내용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사를

빌어 넌지시 당대의 일을 떠보셨는데, 이를 통해 그 시대 중국인들이 숭상하는 바가 무엇인

지 알아낼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말과 뜻을 살핌으로써 그 속마음을 환히 알아냈다.

아버지는 태학(열하에 있던 국립교육기관으로 유학의 교육을  맡아보았다)에 머무시는 동

안 왕민호, 윤가전, 학성, 기풍액 등 여러 사람과 해후하여 먼저 역대 왕조의 흥망을 논하고

이어서 음악의 잘잘못에 대해 토론하셨다.  그런 다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슬며시

단서를 열어 그들의 본마음과 지극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셨다.  송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천도한 사실이라든가 명나라가 망할 때의 일에 대해서

는 여러 번 물어보셨는데, 사람들은 왕왕 눈물을 흘렸으며 그 필담한 글을 태워버리는 것이

었다. 이처럼 아버지는 그들과의 필담에서 춘추대의(공자가 춘추에서 보여준 엄정한 비판의

식과 역사의식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특히 명나라를 높이고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를 배척하

는 태도를 가리킨다.)를 밝히지 않으신 적이 없다.

황교문답과 반선시말 등의 글은 당시 풍속의 잘못을 살피고 백성의 향배를 확인하는 것으

로서, 사교를 물리치고 올바른 학문을 조장하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산장잡기, 환희기, 피서록 이하 여러 편은 궁궐의 거대하고 화려함, 시장의 번성함과 풍요

로움, 견문한 시문, 사적에 얽힌 전설, 광대들의 놀이와 재주 등을 낱낱이 기록한 글이다. 이

를  통해 아버지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엔 없는 게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행의 도정을 기록한 글로는 도강록으로부터  환연도중록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의  글이

있다. 이들 글에서 아버지는 지나온 길을 기록하는 한편 산천, 성곽, 배와 수레, 각종 생활도

구, 저자와 점포, 서민들이 사는 동네, 농사, 도자가 굽는 가마, 언어, 의복  등 자질구레하고

속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기록하여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 했다.  대개 풍속이 다름에

따라 보고듣는 게 낯설었으므로 인정물태를  곡진히 묘사하려다 보니 부드불  우스갯소리를

집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서씨 집의 서화를 구경할 때 우리나라 비장들이 함부로 떠들며 무식하게 행동한

일을 서술한 대목, 참외 파는 늙은이의 거짓말에 속아 바가지 쓴 일을 적어놓은 대목,  국수

집에나 어울리는 '기상새설'이라는 글귀를 전당포 주인과 머리장식품을 파는 가게  주인에게

써준 일을 서술한 대목, 초상난 집에서 조문객을 받을 때마다 북 치고 피리 부는 것을 적어

놓은 대목 등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제도와 법률을 서술해놓은  것 가운데는 살펴 취할 만

한 것이 많다.

행재잡록 한 편은 사신의 왕래 및 역관의 통역과 관련된 일을 기록한 것으로서 퍽 심원한

생각을 말해놓은 글이다. 그러므로 나라 일을 맡은 자는 알지 않으면 안되리라 본다. 그러나

열하일기의 독자들은 이 책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대개 기이한 이야기나 우스갯소리를 써

놓은 책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비록 자신이 이  책의 애독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책의 진수를 깊이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지계공은 아버지 제문에서 이렇게

쓰셨다.


공을 좋아한다는 자들조차

공의 정수를 안 건 아닙니다.

하찮은 글 주워다가

보물인 양 생각하고

우언이나 우슷갯소리를

야단스레 전파했으니,

이 때문에 헐뜯는 자들

더욱 기승을 부렸지요.

우언은 궤변으로

세상을 농락한 것이고 

우스갯소리는 실상이 아니요

거만하게 세상을 조롱한 것이다.

조롱한다는 자나 헐뜯는 자나

참모습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요.


아아, 이들이 어찌 우리 아버지를 제대로 알았다 하겠는가! 나는 이를 비통하게 생각한다.


37

아버지는 탄식하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중년 이후 세상 일에 대해

마음이 재처럼 되어 점차 골계를  일삼으며 이름을 숨기고자 할 만한  자가 없었다. 그래서

매양 사람을 대하면 우언과 우스갯소리로 둘러대고 임기응변을 했지만, 마음은 항상 우울하

여 즐겁지가 못했다. 그러나 중국에  다녀온 이후 그 견문한 사실  가운데 자못 기록할만한

것이 있어서 연암골에 왕래할 때 늘 붓과  벼루를 가지고 다니며 행장속에 든 초고를 꺼내

생각나는 대로 적어나갔다. 그리하여 쓴 글을 수습해 몇 권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애초 후세

에 전하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느냐? 책을  절반도 집필하기 전에

벌써 남들이 그걸 돌려가며 베껴 책이 세상이 널리 유포될 줄을. 이미 회수할 수도 없게 된

거지. 처음에는 심히 놀라고 후회하여 가슴을 치며 한탄했지만, 나중에는 어쩔 도리 없어 그

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구경한 적도 없으면서  남들을 따라 이 책을 헐뜯

고 비방하는 자들이야 난들 어떡하겠느냐?"

도강록(압록강에서 요양까지의 일정을 적은,  열하일기의 맨 첫  부분이다.)등 열하일기에

수록된 여러 편의 글귀에 대해 모호하게 이야기하면서 함부로  평하는 자가 있었다. 그 서

내가 '혹정필담' 한 편을 꺼내와 한번 읽어보라 했더니 무슨 말인 줄 도무지 알지도  못할뿐

더러 글을 끊어읽지조차 못하는 것이었다.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면서 남의 글에 대해 이

러쿵저러쿵 평하고 있으니, 사람을 무한히 부끄럽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책'이라는 말로 아버지를 비방하며 윽박지른 건 정말

무식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아아!  이 일을 어찌 차마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뒤에 말하겠다.


38

아버지가 북경에 가셨을 때 사귄 명사는 왕성, 태사 고역생, 한림 초팽령, 한림 허조당, 유

세기, 서황, 능야, 진정훈, 육가초 이면, 풍승건, 단가옥  등 10여 명이었다. 주고받은 필담이

나 오고간 서한들은 모두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열하일기는, 황도기략(북경의 문관, 전각,

점포, 기물 등 38종의 기록이다.)과 알성퇴술(북경의 학관, 비,  사당 등에 관한 11종의 기록

이다.)과 앙엽기(북경의 인근의 절, 묘, 궁 등 18곳의  명소에 관한 기록이다.) 등 서너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가 열하에 머물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

온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집필하시지 못했다. 이 때문에  책이름을 단지 열하일기라 총칭

한 것이니, 기실 미완의 책이다.


39

계묘년(1783, 연암이 47세때)에 담헌공(홍대용)을 여의셨다. 아버지는 중년에 이르러 교유

하는 벗이 더욱 적었다. 오직 담헌공만이 시종 변치 않으면서 아버지와 세속을 벗어나 서로

마음을 허여하는 우정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연암골에 계실 때  담헌공에게 이런 답장을 보

내신 적이 있다.

저는 평소 교유가 넓지 않은 것이 아니어서, 덕망과 지체를 헤아려 모두 벗으로 허락하였

사외다. 그러나 그 사귐은 명성을 좇아 처세를 한 혐의가 없지 않았으며, 눈에 뵈는 건 오직

명예와 권세와 잇속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스스로 초야에 은둔했거늘 산 높고 물 깊은 이

곳에서 명성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옛사람의 말 가운데 "걸핏하면  비방을 받지만 그래도 명성은  따른다."라는 말은 아마도

허무맹랑한 말인가 하외다. 한 치의 명성을 얻으면 비방은 그 열 배나 돌아오는 법이니,  이

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늙어서야 그런 줄 알게 될 것이외다. 매양 한밤중에 자신을 되돌아

보면, 입에서 신물이 나곤 합니다. 명과 실의 사이에서 스스로를 나무라기에도 겨를이  없거

늘, 왜 명예를 다시 가까이하겠습니까?

권세와 잇속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지만, 대개 사람들은 모두 남의 것을 가로

채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 궁리하지 자기 것을  덜어 남에게 보태주고자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사외다. 명예란 본래 빈 것인지라 돈이  들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혹 쉽게 주기도  하지만,

실리와 권세야 어느 누가 자기 것을 남에게 주려고 하겠습니까? 기름을 가까이했다가는 옷

만 더럽힐 뿐이지요.

이 세 부류의 벗(명예, 권세, 잇속을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킨다.)을 버리고 비로소 밝은 눈

으로 이른바 벗이란 것을 찾아보니, 도무지  한 사람도 없사외다. 그러니 고금을 살펴볼  때

왜 답답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들어온  이후로는 그런 생각조차 끊었습니다.

매양 사마휘가 방덕공의 집에 찾아가서 기장밥을 짓게 한 일(사마휘와  방덕공은 중국 삼국

시대 사람이다. 일찍이 사마휘가 방덕공의 집에 들렀는데 방덕공은 어디 가고 없었다.  그러

나 사마휘는 스스럼없이 방덕공의 집으로 들어가 방덕공의 처더러 기장밥을 지으라고 했다.

방덕공의 처는 그에게 절한 다음 밥을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을 생각하니 아름다운 정취가

눈에 삼삼하고, 장저와 걸닉(춘추시대 초나라의 은자이다.)이 짝을 지어  밭을 간 것을 생각

하니 참된 즐거움이 눈에 어른어른하외다. 그리하여 산에 오르거나  물가에 임할 때마다 어

렴풋이 그 광경을 회상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형은 벗 사귀는 일에 대해 올곧고 강개한 기질을  가지고 계신 줄 알기에, 이제

일단의 울적한 마음으로 하릴없이 여쭈어 보는 것이외다.

공은 영천 군수로 계실 때 아버지에게 얼룩소 두 마리, 농기구 다섯 가지, 줄 친  공책 스

무 권, 돈 2백 냥을 보내면서 이렇게 당부하셨다. "산중에 계시니 밭을 사서 농사를 짓지 않

을 수 없을 테지요. 그리고 의당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외다."

아버지께서 어려움과 곤궁에 처해 있었지만, 두 분의 우정은 이와 같았다. 담헌공께서  돌

아가시자 아버지는 그 장례 일을  돌보셨다. 그리고 직접 부고를 써서  소주와 항주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렸으니, 그들은 모두 중국에 있는 공의 지기들이었다. 담헌공은 평소 주장하기

를 상례에 꼭 반함(죽은 사람을 염습할 때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리는 일을 말한다.)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으며, 또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장례를 돌봐달라고 당부하셨다. 급기야 공께

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이 사실을 그 아들 원에게 일러주었다.  원 또한 부친의 유지를 들

은 터라, 부친이 쓰시던 물건들을 무덤에 묻었을 뿐 반함하지는  않았으니 그 뜻에 따른 것

이다.

아버지는 공의 묘지에 다음과 같은 명(묘지에 붙이는 글귀)을 쓰셨다.

서호의 벗들과 상봉했을 때

그대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았지.

입에는 반함을 아니했으니,

보리 읊은 유자를 부질없이 슬퍼하누나.


40

아버지는 언젠가 연암골에 가시는 길에 세마(왕세자의 호위를 맡아보는  관아인 세자익위

사의 정9품 잡직) 이송을 방문하셨다. 공은 여호(박필주)  선생의 제자다. 당시 서산 번촌에

거처했는데, 아버지가 온 것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해 마을 사람들을 두루 불렀다. 그리고

등잔기름을 마련하여 밤새도록 즐겁게 대회를 나누었다. 그때 공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

는 벗들을 떠나 쓸쓸하게 혼자 지낸 지 이미 오래라네.  자네의 뛰어난 의론을 들으니 가슴

이 조금 시원해지네그려."


41

참봉 이광려는 문장이 빼어나고 인품이 훌륭한 선비다. 아버지께서 평계에 거처하실 때다.

하루는 지계공과 함께 인근 거리를 지나다가 어느 집 사립문 안에 조그만 수레가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만든 솜씨가 자못 정교하여 다가가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그 집 주인이 마루

에서 내려와 웃으며 맞이하면서, "그대는 혹 박연암 아니시오? 나는 이광려외다."라고 했다.

대청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두 분은 문장에 대해  토론하셨다. 아버지는 이공에게 이렇

게 물었다. "그대는 평생 독서하셨는데 아는 글자가 몇 자가 되지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이공이 글을 잘하고 박식한 선비라는 걸 누가

모른단 말야!' 이공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겨우 서른 자 남짓 아는 것 같군요." 좌중의

사람들이 또 한번 깜짝 놀랐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공은 이 한마디 말로 단박에  아버지와 지기가 되어 이후 자주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

지은 시문이 있으면 반드시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평을 청하였다. 또 아버지가

찾아가면 매번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그 철에 나는  과일을 상에 차려 대접하며, "이는 귀

한 손님을 대접하는 예법이지요."라고 하였다. 두 분은 하루종일 담소하고  변론해도 당론이

다른 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연암은 노론이고 이광려는 소론

으로서 서로 당파가 달랐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42

지계공과 함께 삼퐁(마포를 가리킴)의 세심정에 거처하셨다. 세심정은 금성도위(박명원)의

강가 정자로 빼어난 명승지로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연암골에 들어간  이래 점점 더 세상에

뜻이 없었다. 도위공은 아버지께서 쓸쓸히 지내시며 마음 붙일 것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겼

다. 그래서 이 정자에서 지내게 하시며, "좋은 강산은 좋은 주인이 맡는 게 좋지 않겠나!"하

고 하셨다.

한편 지계공은 그 선친(지계공의 부친인 이보천을 가리킴)의 훈계를 삼가 지켜 명예와 이

익을 다투는 곳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려 하지 않았는데, 교외의  강가에서 한적하게 독서와

저술을 할 수 있겠다 싶어 아버지와 함께 가신 것이었다.  당시 사위인 이종목과 제자 한석

호가 와서 배우며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43

아버지께서 세상과 어긋나자 사람들 또한 발길을 뚝 끊었는데,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으셨

다. 그러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 세 검서(규장각 검서를 말한다. 정조 때 규장각에 설

치했던 관직으로 규장각 각신을 도와 서적을  베껴쓰고 교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는 지난

날의 제자로서 변함없이 아버지를 흠모하였다.  그리하여 책을 교열하는 일을  하다 여가가

생기면 그때마다 찾아와 며칠씩 묵곤 하였다. 세 사람은 품성이 착하고 지혜와 식견이 있었

으며, 남이 잘 되고 못 되고에 따라  요리조리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한  가지

방대한 책을 엮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계셨는데, 세 사람이  그 해박한 지식과 견문으로 전

고를 대고 변증해주었으므로 아버지는 그들을 늘 아끼고 사랑하셨다.

이들의 벗들로 문학에 취미가 있는 서상수, 이희경, 이희명, 이공무, 정수, 김용행 등 여러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아와 아버지를 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다시 아버지가 아무

나 사귄다고 막 비방해댔다.


44

병오년(1786, 연암이 50세때) 7월 아버지는 선공감 감역(선공감은 조선 초기 태조 때 설치

한 관청으로 건축물의 신축, 수리 및 토목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에 임명되셨다. 충문공

유언호가 천가한 결과였다. 이 일이 있기 전 임금님(정조)께서 유공에게 이렇게 하문하셨다.

"지금 재주가 있는데도 등용되지 못한 채 불우하게 지내는 자로 누가 있는가?" 공이 대답했

다. "신이 벼슬하기 전에 사귄 박지원이라는 자가 있사옵니다." 임금님께서 말씀하셨다. "나

도 오래전에 그 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소. 경이 책임지고 천거하도록 하오." 그리하여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유공은 아버지를 특별히 천거했다.


45

하루는 선공감에서 숙직하고 계셨는데, 서리가 와서 이렇게  고했다. "종실인 상계군(정조

의 조카)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틀림없이 장례를 치르라는 분부가  있을 것입니다. 장

례 치르는 일은 황급한 일이므로 관례에 따라 미리 알려야겠기에 감히 공문서를 작성해 대

령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명이 내려왔느냐?" 서리가 대답했다. "아직 내려오지 않았

습니다." 아버지는, "감히 어명을 미리 헤아린단  말이냐!"하고 꾸짖으시고는 문서에 서명하

지 않으셨다. 아침이 되자 얼른 숙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옥

사(정조 10년 상계군을 추탈삭적하고 그 부친인 은언군과 그 가족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사

건. 본래 정조 초년 세도를 장악한 홍국영은 정조에게 아직  후사가 없을 때에 자신의 누이

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정조 3년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 홍씨가 소생없

이 죽자 홍국영은 상계군을 원빈 홍씨의 후사로 삼아 장차 그를 정조의 후계자로 세우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 후 홍국영은 정조 3년  정계에서 쫓겨나 정조 5년 사망하였고, 정조  8년

의빈 성씨에게서 태어난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세워지자 후사 문제는 일단 진정되었다. 그런

데 정조 10년 왕세자가 졸하고 이어 의빈 성씨가 졸하는 와중에 상계군을 임금으로 추대하

려 한 구선복 등의 옥사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10월에 상계군은 의문의 급사를 하였다. 12월

상계군 일가와 홍국영 밀착을 성토하는 왕대비의 하교와 조정 대신들의 요청에 못이겨 정조

는 마침내 위와 같은 조처를  취하게 되었다.)가 크게 일어났으니, 아버지께서  기미를 살펴

삼가셨던 태도를 이런 일에서도 알 수 있다.


46

정미년(1787, 연암이 51세) 정월 5일에 우리 어머니 숙인(3품의 문무관  아내에게 주던 칭

호) 전주 이씨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유안처사 이보천의 따님이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갑이셨으며, 어려서 유안공의 가르침을 받아 일찍부터 여자로서의 행실이 있었다.  어머니

는 열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 시집오셨다. 그때 증조할아버지 장간공께서는 벼슬이 경기감사

에 오르셨으나, 청빈하기는 벼슬하지 못한 선비 시절과 매한가지였다. 그 당시 집이 너무 좁

아 어머니가 거처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결혼하고 나서 유안공  집에 계실 때가

많았다.

중년 이후에는 가난과 고난 속에 옮겨다니며 살아 그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한번

도 눈쌀을 찌푸려 괴로운 내식을 하신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마치 가난을 견디며 독서하는

군자 같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처음 관직에 나간 지  반년도 못 되어 그만 세상

을 뜨셨다. 아아, 애통한 일이다.

아버지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젊을 때 쓰고 남은 돈 스무 냥이 있

었더니라. 네 어머니의 의복이 해진 것을 생각하고 그 돈을 보자기에 싸서 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구나.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형수님은 늘 가난하고 쪼들리십니다.  이 돈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 내가 그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말이 잊히지 않는구나."

큰어머니는 성품이 현숙했으며, 시동생인 어린 우리 아버지를 길러주셨다. 그래서 큰어머니

와 우리 어머니는 우애가 깊었다. 큰어머니는 오랫동안 가난을  겪은 탓으로 만년에 결핵을

앓아 말씀을 하시는 도중에 기침을 하며 괴로움을 참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온화한 얼굴로 옆에 잠자코 계시다가 큰어머니께서 진정되신 후에야 당신 처소로 돌아와 일

을 보셨다.

큰 어머니는 혈육이 없이 돌아가셨다. 당시 나의 형님은 겨우 열 살 남짓 밖에 되지 않았

지만,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어야 할 입장에 있었다. 큰아버지는 형님이 너무 어림을

민망히 여겨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상주 노릇을 하겠다. 좀더 자란  다음 양자로 세워도 늦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셨으며, 끝내 형님을 불러 상복을 입혀 상주 노릇을 하게 하셨다. 이

를 보고 놀라 감탄하지 않는 조문객이 없었으며, 모두들 "이는 예법을 아는 군자도 하기 어

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아아! 이는 모두 우리 어머니가  타고난 덕성을 지녔음을 보여주

는 일들이다. 그렇건만 어머니께서는 수를 누리지는 못하셨다. 그러니 이 슬픔을 어니  감당

하겠는가. 우리 형제자매 넷은 요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집안 사람들은  어머니

의 지극한 덕이 하늘로부터 보답을 받은 것이라고 칭송하곤 하였다. 지계공은 그 자녀가 아

프면 당장 어머니께 좀 봐달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님 손은 약손이니 우리 아

이를 좀 만져주세요." 이렇게 해서 효험을 본 게 여러 번이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한 일이라

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처럼 덕이 있고 현숙한 어머니와 평생을 함께 하면서 매양 그 지극한 행실에

감복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여읜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맏며느리 이씨의 상을 당하셨

다. 그래서 끼니를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혹 소실을 얻으라고 권했지만,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로 대꾸할 뿐 종신토록 첩을  두지 않으셨다. 친한 벗들 가운데는  이 일을 갖고

아버지를 칭찬하는 사람이 많다.


47

7월에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연암골 집 뒤의 자좌(자방을 말한다. 자방은 24방위의 하

나로 정북을 중심으로 15도 각도 안을 가리킨다.) 자리에 장사지냈다. 무술년에 큰어머니 공

인 이씨께서 돌아가셨을 때 먼저 이곳에 장사지내었는데 이제  합장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

후 연암골에 가셨을 때 시냇가에  앉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시를  지어 스스로 애도하셨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우리 형님 얼굴은 누굴 닮았나?

아버지 생각나면 형님을 봤지.

이제 형님 생각나면 그 누굴 보나?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보네.


이덕무가 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정이  지극한 말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니, 정말 진실되고 절절하다 할 만하다. 내가 선생의 시를 읽고서  눈

물을 흘린 것이 두 번이었다. 처음은 선생께서 그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 보내며 읊

은 다음 시, 즉


떠나는 자 정녕 기약 남기고 가도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저 외배 한번 가면 언제 돌아올까?

보내는 자 강가에서 홀로 돌아오네.


라는 시를 접했을 때다. 나는 이 시를 읽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스무 수를 지으셨다. 그

러나 그 원고를 잃어버려 지금 볼 수 없으니 애통한 일이다.  


48

무신년(1788, 연암이 52세때)에 제생동으로 이사를 갔으니 곧 아버지의 선산공(박수원) 댁

이다. 이때에 공이 선산부사로 나가 집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을 빌려서 거처하신 것

이다.


49

하루는 감제(황감제의 준말. 제주도에서 특산물인 황감, 즉 귤을  진상하면 이를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하사한 다음 보던 시험)를  보이라는 임금님의 분부가 있었는데, 유생들

이 대의와 관련된 일로 과거장에 들어오지  않았다.(유생들은 상소문을 올려 은언군등 상계

군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 처벌에 미온적이

었다. 이 일로 유생들은 계속 문제를 제기했으며 급기야 시험을 거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때문에 임금님께서는 유생들 대신 음관(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공덕으로  과거시험을 거치

지 않고 벼슬을 하는 관원)들에게 시험을  보이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분부하시기를 이미

과거를 단념한 사람들도 모두 응시하게 하여 감히 빠지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답안지를 바칠 때 이름을 적은 명부도 함께 바치도록 분부하셨다.

아버지는 여러 사람을 따라 시험장에  들어가긴 하셨으나 답안지를 내지  않고 나오셨다.

이윽고 임금님께서 시험 본 사람들이 명부를 들여오라 분부하시고 친히 살펴보셨는데, 명부

에는 아버지 이름이 빠져 있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전해오기를, "이처럼

과거시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그 몇 년  뒤의 일이다.

다시 음관들이 보는 시험을 베풀라는 임금님의  분부가 내렸다. 이때 아버지는 제릉령(재릉

은 태조비였던 신의왕후의 능으로 경기도 개풍군에 있다.) 벼슬을 맡고 있었지만 서울에 와

계셨다. 임금님의 이런 분부가 있자 아버지는 즉시 근무지인 제릉으로 향해 떠나면서,  자신

이 지방에 있어서 응시할 수 없다는 편지를 예조에 보냈다.


50

아버지는 가난하게 사시다가 노년에 이르러서야 음관으로  벼슬길에 오르셨다. 세상 사람

들은 아직도 세상에 뜻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혹 이끌어주려 하였다. 심환지나 정일환과 같

은 이들은 모두 아버지의 젊을 때  벗이었으므로 찾아와 자신들의 뜻을 전하면서  아버지로

하여금 세상일에 관여케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우스갯말로 얼버무리며 무슨 말인

지 못 알아듣는 듯한 태도를 취하자 마침내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51

나라에서 송자대전(송시열의 문집으로 송자대전의 일관된  정신은 춘추시대의 북벌, 존주

정신이다. 명분론을 강조하는 송시열의 사상은  노론 계열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한편, 학문의 자유로운 발전에 커다란 질곡으로 작용하였다.)을 편수할 때 아버지는 그 책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셨다. 당시 우의정 김희가 임금님의 분부를  받들어 그 일을 주관하였

다. 송자대전에 수록된 편지글 중 윤휴에 대한 칭호가  비속함에도 불구하고 바로잡지 아니

한 게 있었다. 아버지는 그  한두 글자를 삭제하자고 청하여 주자가  정자의 문집을 교정할

때 했던 것처럼(주자는 정자의 문집을 교정하면서 엄격한 명분론적 입장을 견지하여 부적절

하거나 비속한 표현과 칭호를 고쳤었다.) 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의견들이 서로 합치되지 않

아 결국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늘 이 때문에 근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책이 얼마나 정대한 저술인가. 처음에  어쩌다가 잘못해 몇 글자를 바로잡지  못한 걸 갖고

이제 와서 그걸 그대로 고수하려 들다니!  이들 몇 자가 있고 없는 게  훗날의 대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52

선공감 제조(큰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의 일을 지휘, 총괄하던 종1품 또는

2품의 관원)인 호조판서 서유린이 홀연  자문감(선공감에 속한 기관으로 궁중의 건축,  수리

등을 맡아보았다.) 일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조금 있으니, 대궐에 들어와 춘당대(창경궁안

에 있다.) 주변의 형세를 살펴보라는 임금님의 분부가 있었다. 아버지는 호조판서를 따라 대

궐에 들어가 춘당대 주변을 살펴보았다. 호조판서는 이렇게  물었다. "전좌(신하들이 임금에

게 하례하는 자리에 임금이 정전의 옥좌에 나와 앉는 일)가 있을 때마다 임시로 보조계단을

설치하느라 돈과 힘이 낭비되고 있소이다.  만일 대를 쌓는다면 경비는  얼마나 들겠소? 또

그 형태는 어떠해야 하겠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벽돌을 구워 대를 쌓는다면 열 번쯤 보조계단을 설치하는 비

용은 들겠으나, 견고하고 영구적이므로 장차 보조계단을  설치하고 철거하는 비용을 완전히

없앨 수 있겠습니다."

호조판서는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임금님께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님께서는 와서(왕실에

서 쓰는 기와와 벽돌을 만들던 관아)에 벽돌 굽는 가마를 설치해 아버지  재량껏 벽돌을 굽

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아버지는 이희경으로 하여금 중국의  제도에 의거해 가마를 직

접 제작하게 했으며, 벽돌의 크기 또한 중국의 제도를 따랐다. 그렇게 하여 몇십만 개의  벽

돌을 구웠는데, 비용이 아주 절감되어 정말 열하일기에 적힌 그대로였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는 바람에 대는 결국 쌓지 못했다. 하지만 벽돌은 다른 데 사용

되었다. 후에 수원성을 축조할 오로지 벽돌만으로 성을 쌓았으니 대개 이 방법을 사용한 것

이다. 지금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 벽돌 수십 개는 바로 그 때 찍은 것이다.         




제2부 세상을 경륜하다

1

기유년(1789, 연암이 53세때) 6월에  아버지는 평시서(물가, 도량형 등에  관한 일과 상인

보호를 맡은 관아. 관원은 겸직인 제조 1명과 영 1명, 주부 1명, 봉사 1명이었다.) 주부로 승

진하셨다. 아버지는 관직을 맡아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한 적이 없었다.  무신년(1788) 섣달

도목정사(매년 6월과 12월에 관리의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면직시키거나  승진시키던 제도)

때 아버지는 선공감 감역의 임기를 6일 남겨놓고 있었다. 이조의 서리는 아버지더러 임기가

다 끝나 이번 승진 대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조에 보고하라면서,  "날짜가 며칠 모자라긴

하나 관례상 조금 융통성이 있습지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평소에 한번도

구차한 짓을 한 적이 없다. 보고하지 마라."고 하셨다. 당시 전관(도목정사때 관리를 승진시

키거나 면직시키는 일을 맡은 관리)으로 있던 분 또한 아버지의 나이가 많은 것을 동정하여

아버지를 돕고자 했던바, 그 서리와 생각이 똑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전관이 아버지의 말을 전해듣고 탄복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갈

길이 멀면 누군들 마음이 급하지 않겠는가. 그렇건만 평소 자신의 삶의 원칙을 이토록 지키

다니!" 아버지는 다음해 6월에야 비로소 승진하셨다.


2

이 해에 주교(배를 한줄로 촘촘히 띄워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든 다리를 말한다. 배를

엮어 다리를 놓는 일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지만 정조 때 주교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요

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하여 현륭원을 조성하였다. 그

리고 현륭원에 행차할 때 처음에는 한강의  양쪽에 선창을 만들어 배를 타고  도강하였으나

1790년에 주교가 완성되자 이를  이용하였다.)를 만들라는 임금님의 분부가  있었다. 다리가

완성되자 임금님께서는 주교사(정조의 명령으로 설치된 기구로 한강에 주교를  설치하는 일

과 호남, 호서 지방의 조운을 담당했다.)  제조(주교사의 일을 책임진 당상관)들에게 조정의

대신과 무장들을 두루 불러 음악을 연주하며 낙성식을 올리도록 분부하셨다. 그 날 여러 제

조들이 편지를 써서 아버지를 초대했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는 학질을 심하게 앓고 있던 데

다가 음관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은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지라 사양하고  가지

않으셨다. 날이 저문 뒤에도 계속  쪽지를 보내, "비록 가마를 타고서라도  참석하지 않으면

안되겠소이다. 이는 우리들이 공과 더불어 술이나 마시려고 그러는 게  아니외다."라고 하였

다.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마침내 아픈  것을 참고 참석하셨다. 아니나다를까,

'박지원을 초청하라'는 임금님의 은밀한 분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잔치는 몹시 성대했

으며 풍악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무장 한 분이 아버지 곁에 와 앉으며 말하기를, "오늘 훈련대

장 서유대가 연암공에게 인사드립니다. 저는 언젠가 여러 분이  자리한 성대한 모임에서 공

을 뵌 적이 있습니다. 당시 공께서는 한 끼에 쌀 한 말과 큰 구리쟁반 세 접시의 고기를 드

시고는 종횡무진 천하의 일을 담론하셨지요. 지금도 그 광경을 생각하면 망연자실하게 됩니

다."라고 하였다. 이후 그는 때때로 아버지에게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큰 술병 서너 개

를 가지고 와 종일토록 기분좋게 마신 후 돌아갔다.


3

아버지는 사복시(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주부로 직책이 바뀌었는

데, 혹 승지와 친분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임명되다는 오해를 살까봐(당시 승지는 연암의 제

자 이서구였다.) 취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의금부 도사(종1품)로 전보되셨다.  당시 이문원

이 의금부의 책임자인 판의금(종1품으로 의금부 으뜸 벼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공은 이

유를 들어 임금님이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는 취임하지 않았다.

하루는 임금님께서 한밤중에 당직 도사를 불렀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승지 이만수와 함께

다음과 같은 임금님의 전교(임금의 명령)를 받았다. "승지는 일가불이라며 감싸고돌고  당직

도사는 자기 친구라고 봐주고 있으니, 판의금은 끝내 불러들일 수 없단 말인가."

임금님의 말씀은 몹시 엄중했다. 아버지는  판의금 이공과 본래 교분이  없었으나 기질과

취미만큼은 자못 서로 투합했다. 그 날 임금님 말씀은 비록 사실과 부합되지는 않지만 통촉

하신 말씀 같아 황공하여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임금님은 판의금의 경질을 허

락한다는 분부를 내리셨다. 아버지는 분부를  받들고 물러나왔다. 이때 이공은 대궐  밖에서

패(임금이 신하를 부를 때 사용하는 붉은 색 나뭇조각.  승지가 왕명을 받아 아 '패'의 한면

에다 신하의 성명을 기입하여 승정원의 아랫사람을  시켜 전달했다.)를 받들고 의금부 당직

이 숙직하는 방에 들어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찻사발을  가리키며, "저

거 박도사 거냐?"라고 묻고는 얼른 저자에 전당 잡혀 술을 받아오게 했다. 그리하여 연거푸

서너 잔을 마신 후 경질을 허락한다는 분부를 듣고서 돌아갔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전해듣

고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아까 임금님께서 그런 전교를 내리신  건 그럴 만한 까닭이 있

어서였구나!"라고 하셨다.


4

아버지는 병 때문에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글을 올리셨다. 하루는  어가가 갑자기 효창묘

(정조의 세자였던 문효의 묘)로 향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고훤랑(임금의 거동 때에  어로의

소란을 단속하는 일을 맡은 관리. 당시 연암은 의금부 도사로서 이  임무를 맡았다.)의 임무

를 맡아 임금님의 가마를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의장으로 갖추게 되어  있는 활과 화살을

출발하기 직전에야 빌릴 수  있었다. 그래서 화살에다 미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고훤랑은

자신이 소지하는 화살에 반드시 이름을 새기게 되어 있었다.) 당시 격쟁하면서 원통함을 호

소하는 백성들이 임금님 가마 앞에 많이 모여들어 떠들썩하니 시끄러웠다. 이에 임금님께서

는 고훤랑에게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알리라는 분부를 내렸다. 선전관(무관의 직책이름)이

말을 타고 달려와 임금님의 엄중한 분부를 전하고는 화살 하나를 뽑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선전관이 임금님께 보고드릴 때 보니 화살에 아버지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선전관은

다시 말을 타고 달려와 나중에 체포해 죄를 묻겠다는 임금님의 분부를 입으로 전하고 돌아

갔다. 그러나 볼일을 다 보고 어가를 돌려 돈화문(창덕궁의 정문)에 들어서자 임금님께서 특

별히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리셨다. "고훨랑이 잘못을 범한 건 오활(물정에 어두움)한  탓이

니 특별히 정상을 참작해 용서해줘라!"

그 당시 아버지는 학질을 앓는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데다가 오활함으로 인해  죄를

지어 임금님의 특별한 용서를 받게 되자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래서 병 때문에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글을 올리신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몹시 가난했을  뿐 아니라 연세가 많아 하루

라도 빨리 고을 원으로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관리로서의 거취에 조금이

라도 구차스러움이 있으면 마치 당신의 몸을 더럽힌 것으로 여기시고 단 하루도 관직에 머

물러 있으려 하지 않으셨다.


5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사헌부의 정6품 벼슬. 관리나 관청의 비리와 부정을 살피고 규탄하

는 일을 맡았다.)에 임명되셨으나 사헌부라는 명칭이 중부의 이름과 음이 같음을 꺼려(연암

의 작은 아버지 이름은 사헌이었다.) 취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또다시 제릉령에 임명되셨

다. 능은 서울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법으로 능 주위의 나무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도

벌된 나무들이 아주 많았다. 아버지는 제릉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거듭 벌목 금지구역이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했으며, 그 구역 내에 있는 도벌한 나무들의 묵은 뿌리를 다 없애도

록 하였다. 그러자 능에 소속된 아랫사람들은 일이 없는데도  일을 억지로 만든다고 아버지

를 원망했다. 절사(절기나 명절에 지내는 제자)를 지낼 무렵 그  일을 거의 다 끝냈다. 그때

홀연 적간사(지방관리의 부정이나 비리를 조사, 적발하기 위해 국왕이 파견하던 관리)가 내

려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적간사는 능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도벌한  흔적을 적발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뜻밖인데요! 하지만 도

벌된 나무가 하나도 없다고 보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를 장차 어쩌면 좋지요?"

아버지께서 그 말에 사의를 표하며 말씀하셨다. "만일 도벌된 나무가 있다면 비록 1만 그

루라 할지라도 사실 그대로 보고해야겠지요. 그러나 재랑인 제가  보고하는 일에 어찌 간여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적간사는 도벌된 나무가 여덟 그루라고 보고했다. 관례상  한 그루도 없다고 보

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왕명을  받들어 내려온 적간사는 별군직(임금을 경호하거나

지방관리들의 부정을 적발하는 일을 하는 무관직)에 있던 이익이었다. 그는 이후 때때로 아

버지를 찾아뵈었으며, 아버지의 문집 읽기를 청했다.


6

신해년(1791, 연암이 55세)에 한성부 판관(한성부의 종5품의 벼슬)에 임명되셨다. 당시 아

버지의 명성이 다시 일세에 진동했으며, 임금님께서도 또한 아버지를 주목하고 있다는 뜻을

비치셨다. 사람들은 장차 임금님의 파격적인 은총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하여  이끌어주고

자 하는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 모

두에 대해 그저 담담한 태도를 취하셨다. 급기야 제릉령에  임명되자 아버지는 한가로운 곳

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저술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셨다. 또한 떠들어대던 말들이 진실

이 아님이 판명되어 뭇 사람들의 헐뜯는 소리가 사라진 것을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곳이 연

암골과 가까웠으므로 일에서 벗어나면 연암골에 들어가 하루 이틀 묵으면서 소요하곤  하셨

다. 그러자 사람들이 또다시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며, "이 사람이 요즘 어찌  이리 조용하

지?"라고들 했다. 이조참판 김문순이 도목정사에 참여해 이조판서에게  말하기를, "박지원이

어찌 오랫동안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이조판서 아무개는  손을 휘저으

며 말을 막았다.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소이다."

당시 사람들이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김이 갈수록 심해져 아무도  아버지를 의망(임금에게

어떤 관직의 후보 세 사람을 추천하는 것)하려  하지 않았다. 제릉령으로 근무하신 지 15개

월 만에야 이조에서는 아버지를  한성부 판관 자리에 한번  추천해보았는데, 그때 임금님의

낙점을 받아 서울로 옮겨오실 수 있었다. 아버지와 한평생 뜬 명성이 남들의 의심과 비방을

불러일으킨 게 대저 이와 같았다.


7

아버지가 한성부에 계실 때 마침 신해년(1791) 흉년이 들었다. 전국의 곡물상들이 일제히

오강(서울의 한강을 지역에 따라 이름을 붙인 다섯 개의 강, 곧 한강, 동작강, 용산강, 서강,

조강을 이른다. 조강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일대를 말한다.)에  모여들어 서울의 곡물값

이 오른 것을 이용해 갑절의 이득을 얻으려 하였다. 부자들  엮시 저마다 이때를 틈타 곳물

을 사들여 쌓아두니 값은 점점 폭등했다. 당시 재상은 시중의 곡물가를 억제하는 한편 곡물

의 매점매석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차 이를 임금님께 건의하여

시행하려고 했다. 그는 건의를 드리기에 앞서  공시당상(각 공계와 시전의 감독사무를 맡아

보는 벼슬이다.)과 한성부 평시서(시장의 점포, 도량형, 물가에 관한 질서와 상인 보초에  관

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제조들 및  낭고나(정3품 이하의 당하관을 일컫는 말)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했다. 아버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의견을 올렸다.

"옛 사람이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그 흐름을 교란하지 말라고 경계한  까닭은 무엇

이겠습니까? 상인이란 싼 곳의 물건을  가져와 비싼 곳에다 파는  존재이며, 백성과 나라는

그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진실로  장사하는 데 이익이 없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게 뻔합니다. 무엇 때문에 값을 내려서 팔려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 명령을 시행한다면 서

울의 상인들은 장차 곡물을 다른 데로 옮겨가 버릴 것입니다. 또한 매점매석을 막는다면 서

울로 오던 사방의 곡물상들이 그 사실을  전해듣고는 필시 다시는 경강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런 의견도 개진하셨다. "온 나라 사람 가운데  임금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거늘 만일 온 지방의 곡물을 모두 서울에만  모아놓고 그것이 지방으로 분산

되는 것을 막는다면, 장차 지방의 백성들은 내버려둔 채 구제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그런가 하면 이런 의견도 개진하셨다. "상인은 관에서 조종해서는 안됩니다.  조정하면 물

건값이 고정되고, 물건값이 고정되면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며,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면

가격을 조절하는 시장 기능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농민과 수공업자가 모두 곤궁

해지고 백성들은 살아갈  바탕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인들이 싼 곳의  물건을 사다가

비싼 곳에다 파는 행위는 실로 넘치는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데다 보태주는 이치인 것입니

다. 이는 비유컨대 흐르는 물 밑의 가벼운 모래가 출렁거리는  물결에 고루 퍼져 솟은 곳도

패인 곳도 없게 됨이 절로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이런 의견도 개진하셨다. "백성들이 비록 사사로이 쌓아두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또

한 비축해두는 효과가 없지 않습니다.  물가의 등락은 시세를 따르고, 쌓아두거나  내다파는

것에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가령 금년에 물가를 억제하여 곡물을 모두 내다팔게 했다가 내

년에는 또 흉년이 들면 어떢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명령은 결코 시행해서는 안됩니다."

정부에서는 결국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과연 아버지  말씀대로 거듭 흉년이 들

었지만 큰 문제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장사치는 4민(사농공상) 가운데 비록 천한 직업이

기는 하나 장사치가 없다면 온갖 물건이 유통될 수 없다. 이것이 상업을 폐지할 수 없는 이

유다. 또한 부가 백성들에게 축적된 뒤에라야 국가 재정이 풍족해진다."

그 후 나는 나라에서 매점매석을 막는 경우도 보았고,  곡물가를 억제하거나 조종하는 경

우도 보았다. 비단 서울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사나 지방수령 또한 이런 정책

을 사용하는 자가 더러 있었다. 가는 그 때마다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

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요즘 나라와 백성의 재물이 고갈된 게  그 폐단 때문은 아닐까? 아버

지의 생각이 옳다는 사실이 이런 데서 뚜렷이 확인데기에 함께 기록해둔다.


8

아직 임금님의 재가가 나지 않은 명령이건만 승정원에서는 이미 재가 받은 걸로 착각하여

한성부로 하여금 반포하게 하였다. 이 일로 승정원이 문책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승정원에

서는 한성부에 그 잘못을 떠넘기고자 하여 한성부의 낭관이 직접 임금님의 전교를 들었노라

고 했다. 그래서 한성부의 당상관과 낭관들은 야단났다고 두려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였

다. 마침내 아버지께서 승정원에 들어가 임금님의 분부늘 전해들은 후 큰 소리로 여러 승지

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관아는 다 승정원의 지휘를 받아 그 직분에  따라 일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거

늘 유독 이 명령만 승정원을 경유하지 않고 반포되었겠습니까? 또 여러분들은 임금님의 분

부를 받드는 지위에 있건만 조그만 일이라도 잘못되면 당장 해당 관청의 낭관에게 죄를 떠

넘기고자 하니, 조정의 도리가 이래서는 안될 줄 압니다." 뭇 승지들은 모두 멍하니 서로 바

라보았다. 이로 인해 한성부가 무사할 수 있었다.


9

아버지는 일을 처리함에 큰 원칙이나 법도와 관련된 경우에는 한결같이 그 규정을 엄격히

지키셨으며 비록 윗사람이라 할지라도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그리 중요하지 않

은 일인데도 혹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청탁이 많이 들어와 말하고 상대하는 데 힘은

들면서도 일을 매듭짓기 어려운 경우에는  문득 우스갯소리를 하여 상황을  완하시킴으로써

분란을 풀곤 하셨다. 그래서 그때마다 일이 해결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 또한 언짢

게 여기지 않았다. 송원 김이도는 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연암처럼  매서운

기상과 준엄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만일 우스갯소리를 해대며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세상에서 위태로움을 면하기 어려웠을 게야."


10

신해년(1791) 겨울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해  정월 임지에 부임하셨다. 아버지의 평소

지론은 이러했다. "백성들이 소소한 은혜만 알 뿐 큰 은덕을 모른다고 해서 고을 원들은 매

양 소소한 은혜만 베풀어 명예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를 알지

못한 탓이다. 고을 원은 오로지 큰 도리를 지켜서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음을 요체로 삼아야

한다."

안의현은 산골마을로 호남과 영남 사이에 위치하여  풍속이 교활하고 사나웠다. 아버지께

서 부임한 초기에 백성들이 이치에도 닿지  않는 시시콜콜한 일을 갖고 시험삼아  소송장을

내는 바람에 관청에는 소송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버지는 그  중 간사한 거짓말에 해

당하는 것 10여 건을 엄중히 가려내어 물리쳐버리셨다. 그러자  백성들은 관아를 나오며 서

로 말하기를, "이 분은 총명한 원님이라  속일 수 없다."고 하면서 남들에게  함부로 요행을

바라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에 몇 달이 안되어 소송장이 줄어들었다.


11

안의현은 아전들이 대단히 교활하고 간사하여, 매번 수령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익명으로

투서하여 서로의 비리를 들추어내곤 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리 밑에 웬 편지가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냥 내버려두셨다. 그러자  한참

있다가 저절로 없어졌다. 그 후 어느 날이다. 아버지는 동헌(고을 원의 집무실)에 나와 앉아

통인(지방 관아에서 고을 원에 딸려 그 잔심부름을 하던 이속) 아무개를 내쫓으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나 아전들은 그 통인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러시는지 영문을 몰랐다.  아전

들이 물러나와 그 통인에게 케물으니, 그는 곧 접때 익명으로 투서한 자였다. 그 후 또 어떤

자가 관아의 뜰에다 투서한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는 그 편지를 아예  뜯어보지도 않고 불

속에 던져버렸다. 아버지는 며칠 뒤에 아전 아무개를 잡아들이라  하여 매를 때려 내쫓아버

렸는데, 곧 뜰에 투서한 자였다. 아전들이 깜짝 놀라  '귀신 같다'고 여겼다. 그 후 아전들의

이런 짓이 근절되었다.


12

안의현은 비록 조그만 산골 마을이었지만 환곡과 향곡(군량으로  책정된 곡식) 및 호조의

저치미(각 고을에서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대동미는 중앙정부로 일부 올려보내고  나머지 일

부는 여러 가지 용도에 대비하기 위해 지방에 비축해두었다. 이 중 지방에 비축해둔 대동미

를 저치미라 불렀다.)가 총 9만여 휘(열닷 말이나 스무 말을 일컫는 수량의 단위)나 되었다.

그러나 아전들이 부정과 농간을 부려 포흠(지방 관아의 아전들이 관의  재물이나 곡물을 사

사로이 축내는 것) 아버지는 새로 부임하시자 가까이에 있는 창고를 점검해보셨다. 그때 아

버지는 아전들을 닦달해 곤궁에 몰아넣어서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감기 기

운을 핑계삼아 관아로 되돌아오시며 말씀하시기를, "멀리 있는  창고는 천천히 조사하자."라

고 하셨다. 며칠 뒤에 뭇 아전들을 불러 이렇게 분부하셨다.

"너희들은 필시 포흠이 있을 게다. 포흠은 범죄다. 너희들이 그 일을 숨긴다  하더라도 잠

시 감추는 데 불과하다. 조사를 받게 되면  절대 죄를 숨길 수 없다. 위로 감영의  점검만이

아니라 암행어사의 조사가 있을 테니, 일찍 자수하는 게 낫다. 자수할 경우에는 내가 구체할

방도를 마련해 보겠다. 그렇지 않고 적발당해 그 죄상이 드러나게  될 경우 난들 어찌할 수

없다." 아전들은 "예이, 알았사옵니다." 하고 물러나와 서로 눈치만 보며 감히 먼저 말을 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렇게 의논이 되었다. "우리가 이 일로 걱정을 하며 숨도 제

대로 못 쉬고 두려워한 지 벌써  몇 년짼가? 사또께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훈계하심이  이와

같거늘, 자수하지 않을 수 있겠나?"

드디어 차례로 포흠을 실토하니, 총 6만여 휘였다. 아버지는 경삼감사를 찾아 뵙고 이렇게

여쭈었다. "아전들이 나라의 곡식을 도둑질한 것은 법으로 처벌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낼 경우 잃어버린 곡식을 되찾을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스스로

실토했으니 그 정상을 참작해 용서할 만합니다. 만일 이 일의 처리를 저한테 맡겨주셔서 그

죄를 묻지 않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내 감영에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

니다."

아버지는 감영에서 돌아와 아전, 장요, 관로, 죄수, 이정(이장을 가리킴) 등은 물론이고 백

성들 가운데 나이든 사람으로 마을에서 신망이 두터운 자들을 모두 불러 관아의 뜰에 모이

게 한 뒤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다. "형법에 나라의 재물과 곡식을 몇 냥, 몇 섬 이상 포탈한

죄인을 어떻게 처단하라고 했는지 잘 알렷다.?" "예이" "고을 원이 포흠을 눈감아주었을 때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잘 알렷다.?" "예이"

"이제 6만 휘나 되는 막대한 포흠을  적발하였거늘 오를 당장 감영에 보고하여  관찰사가

임금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형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몇 개의 목

이 달아나고 몇 개의  무릎뼈가 바스러져 눈앞에서 당장  결딴나고 말 것임을 잘  알렷다?"

"예이"

"위엄과 권세가 견줄 데 없는 쟁쟁한 고을 원이 새로 부임하여 죄를 안의현에  책임을 물

어 장부대로 해놓으라고 하리라는 걸 잘 알렷다.?" "예이"

"그도 아니면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세월이 흘러가버려 곡식의 출납이 실제와 부합하

지 않는 헛문서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온갖 부정과  농간이 저질러져 마침내

그 포탈한 곡식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만할 텐데, 그 책임은 결국 백성에게 전가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전과 백성이 서로 원수가 되어 함께 망하게 되리라는 걸 잘 알렷다." "예이"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너희들은 이제 알았다. 본관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일을 수습하는 것이다. 일이란 크고  작고를 가릴 것

없이 3년이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법이다. 이제 본관은 여러 아전들에게 약속한다.  본관은

너희들의 논밭과 재산을 몰수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의 이웃과 친척에게 연대책임을 지우

지도 않겠다. 본관은 방금 온  고을 백성들에게 막대한 국고를 포탈한  죄가 아전에게 있지

백성에게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구차스럽게 법에 벗어난 조

처를 취할 수는 없다. 다만 매월 초하룻날 장부를 비치할 때마다  3년 기한으로 한 달도 빠

뜨리지 말고 창고에 곡식 2천 포대씩을 들여놓도록 해라. 서서히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면

너희들 중 밭이 없는 자는 밭을 갖게 될 것이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갖게 될 것이며, 아내

가 없는 자는 아내를 얻게 될 것이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훗날 다른 수령이 부임

해와 너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말씀을 끝낸 후 가장 포흠이 많으면서도 갚을 힘이 제일 없고 달리 친척도 없는 자  서너

명을 가려내어 즉석에서 수입이 조금 넉넉한 직책을 맡겨 조금이라도 소득이 생기면 포흠을

갚게 하였다. 이에 여러 아전들이 물러나와 서로 말하였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네. 우

리가 처벌을 받지 않고 버젓이 집에 앉아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될 줄이야 정말 생각이나  했

나."

또 백성들 가운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자들은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기회를 놓쳐서

는 안되겠네. 포흠이 이렇게 많거늘, 이 사또가 아니었다면 필경 우리들이 피해를  입었을게

야."

그리하여 꾸어주기도 하고 갚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여 조금이라도 생기는 건 모두  관의

창고에 들여놓았다. 이렇게 한 결과 2년 반 만에 창고가 꽉 찼다. 한 사람도 매질하거나  옥

에 가두지 않고 일을 해결한 거시다. 포흠한 곡식을 다 갚고 장부를 완전히 정리하던 날 뭇

아전들은 기뻐서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살았다.!"


13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본래대로 채우니, 창고의 곡식은 총 10여만 휘였다. 작은  고을에

곡식이 많으니 마침내 그것이 작폐의 근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마침 차원(임무를 부여받아

임시로 파견하는 관리를 일컫는 말)으로 상경하시게 되었는데, 때는  갑인년(1794) 가을이었

다. 농사는 이미 대흉작임이 드러났다.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온 김에 옛 친구인  호조판서인

심이지를 찾았다. 심공은 명년에 나라의 큰 경사가 있는데(1795년에 있었던 정조의 생모 혜

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가리킨다.) 경비가 고갈되었음을 근심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께

서 말씀하셨다. "지금 안의 고을에  호조에서 관할하는 저치곡 수만  휘가 비축되어 있소이

다."

심공은 대단히 기뻐하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오? 담당관리로 하여금 귀읍에 공문을 보내

어 오도록 해야겠소. 더구나 금년엔 곡가가  앙등하여 상정가(관에서 소용되는 물품의 가격

이나 공물의 가격 등을 국가에서 심사하여 결정한  가격.)와 비교해도 이득이 갑절은 될 거

외다. 형은 늘그막에 가난 때문에 외읍에 나가 수령노릇을 하고 있거늘 임기가 다하여 돌아

올 적에 주머니가 두둑하면 친구인 내 마음이 좀 기쁘겠소?"

"그렇겠구려. 허나 안의에 돌아가면 다시 서신을 올리겠으니  공문을 발송하는 일은 잠시

늦추시지요."

아버지는 본래 고을의 곡식을 줄이는 일과 나라의 경비를 보태는  일, 이 두가지 일에 모

두 도움이 될까 싶어 말을 꺼내신 것이었다. 그런데 '주머니가 두둑' 운운하는 말을 듣고 당

시의 곡가를 속으로 계산해보니 남는 돈이 줄잡아 3,4만 냥은 될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한 걸 후회했다.

안의로 돌아온 뒤 아버지는 심공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의 평소 성격이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지라 장부의 출납이나 곡식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 등의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이 몸이 이곳을 떠난 뒤에 다시 추진하셔도 늦지 않을 성싶습니다."

심공이 답장을 보내 다시 강권하였으나 아버지는 끝내 따르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마침내

감사에게 요청해 그 곡식을 다른 고을로 옮겨버렸다. 누가 물었다. "그 돈은 자기 것으로 해

도 의롭지 않은 돈이 아니건만  왜 굳이 마다하셨소?" 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하셨다. "나는

다만 연암골의 가난한 선비에 불과하오. 하루아침에 만금을 횡재해서  부자가 되는 일이 나

의 본분에 맞는 일이겠소?"


14

아버지께서 당시 차원으로 상경했을 때다. 대궐에 들어와 임금님을 알현하라는 특명이 있

었다. 그 무렵 조정의 의론은 "명년에 나라의 큰  경사가 있으니 절대로 백성들의 걱정거리

와 농사가 흉년이라는 사실을 임금님께 아뢰면 안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있었다. 아버

지는 마음속으로 이를 매우 개탄하셨다.  급기야 임금님을 알현하니 밤이  이슥하여 인정종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을 친 지 하마 오래되었고, 궁궐에는  촛불이 휘황하였다. 곁에는 승

지와 사관밖에 없었다. 임금님께서는 안의현의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지나온 길 주변의

농사 형편은 어떤지, 말씀하시는 뜻이  따뜻하고 정성스러웠다. 아버지는 그 대강의  사정과

함께 지나온 길에 목도한 농민들의 재해를 쭉 말씀드렸다. 임금님께서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너는 문인이다. 수령 일에 어둡지는 않느냐?" 아버지는 임금님과 네댓 차례 말을 주고받았

다. 물러나올 때 임금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령으로서 서울에 머물며  직무를 떠나

있음은 민망스런 일일 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도리에도 해로울  듯하니, 그만 여기서 하직하

고 날이 밝으면 출발하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한밤중에 사은숙배(처음으로 관원

에 임명된 자나 서울을 떠나 임지로 향하는 관리가 임금에게 네 번 절하는 것을 일컫는 말)

한 후 남대문에서 통금이 해제되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안의로 출발하셨다.

그 후 아버지는 영해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이서구(이서구는  전라감사로 재직중이던

정조 19년 천주교도들을 비호한다는  무고로 인하여 영해로  귀양갔었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셨다. "스스로 생각건대 시골 마을의 하찮은 수령이 천리  밖 대궐에 다다라 임금님 얼

굴을 뵈었으니 지극한 영광이라 할 것이오.  임금님께서는 말씀을 정성스럽게 거듭하셨는데

퍽이나 자상하고 은근하여 미천한 신하를 마치 근신(승지나 사관처럼 임금을 늘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신하를 일컫는 말)처럼 대해주셨소이다.  그러므로 도의로 보나 직분으로 보나

숨김 없이 모두 아�어야 마땅한데,  가슴속에 간직한 만 마디 말이  죄다 등줄기의 흐르는

땀으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품은 뜻을 다 아뢰지 못하고  말았소이다." 이 편지는 문집에 실

려 있다.


15

함양군은 안의현에서 40리 거리다. 함양 읍내 부근의 지형이 낮아서 여름 장마를 한번 겪

으면 둑이 터져 해마다 둑을 다시 쌓았다. 그때마다 이웃고을의 장정들까지 함께  징발했다.

그러나 그들을 제대로 통솔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각자 먹을  식량을 싸들고 오게 하여 일하

고 쉬는 것을 각자에게 맡겨두었으므로 여러 날이 지다도록  일에 진척이 없었다. 아버지께

서 부임하신 초기에 또다시 둑 쌓는 일이 생겨 5백 여명을 징발해야 했다. 아버지는 사저에

장정들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대오가 없으면 힘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또 각자 식량을

준비하게 되면 어떤 사람은 배불리 먹고 어떤 사람은 굶주리게  된다. 둑 쌓는 일이 지체되

고 쌓은 둑이 견고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는 각자 종이를 바른 작은 대나무 조각을 몸에 꽂게 하여 자신이 속한 대오의 표지

로 삼게 하였다. 그렇게 하니 다섯이면 다섯, 열이면 열 씩 대오가 갖추어져 혼란스럽지  않

았다. 아버지는 몸소 맨 뒤에 따라가셨다. 아버지는 또 함양군수와 이렇게 약속했다. "이 고

을 저 고을 장정들이 서로 뒤섞여 일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간하기 어렵소이다. 그러니 서로 구역을 나누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우리 고을 장정들

에게 맡겨주시오. 그리하여 그 담당한 구역의 둑이 온전한가  무너지는가를 보아서 만일 무

너진다고 한다면 한 해에 열 번 부역해도 원망하지  않겠소만, 만일 온전하다면 1백년이 지

나더라도 다시 우리 장정들을 동원하지 말기 바라오."

이에 관아의 주방에서 식량을 날라와서 열 사람에 한 솥씩 배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전

과 장교들을 여기저기 분산시켜 밥 먹이는 일을 주관하게 하는  한편, 북을 치며 큰 소리로

일을 독려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니 모든 장정이 일제히 일을  하여 흙과 돌이 순식간에 쌓

였다. 달구질을 하고 발로 다지며 힘써 일하니, 아침 6시경 시작하여 오후 4시에 공사가  끝

났다. 장정들이 모두 집합하여 일이 다 끝났다고  아뢰었다. 그때까지도 대오가 정연하였다.

장정들은 서로 기뻐하며 말했다. "매번  일에 동원될 때마다 배고프고 목이  탔으며, 닷새나

엿새가 지나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근데 오늘 공사는 어찌 이리도 빨리 끝났지." 아버지

께서 안의에 계셨던 5년 동안 다시는 이 일로 부역하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도간(진나라 때 인물로 지혜로운  지방관으로 명성이 있었다. 그는 형주지사

로 있을 때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톱밥을 버리지 말고 모아두게 했는데,  웃날 그것을 눈이

녹아 질퍽질퍽한 땅을 덮는 데 썼다고  한다. 연암은 도간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실용을

중시하는 도간의 태도가 연암의 실학적 사고와 서로 통하는 바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대나무 조각과 톱밥을 모아두었다가 긴요하게 쓴 일을 말씀하시면서, "천하에는 본래 버

릴 물건이 하나도 없다."라고 하셨다. 그  당시 사용된 대나무 조각은 모두 예전에  발을 짤

때 대나무 밑동을 잘라서 버린 것을 모아두신 것이었다.


16

아버지가 안의현에 처음 부임하셨을 때다. 경상감사 정대용이 평소 아버지의 명성에 감복하

고 있던 터였다. 아버지가 부임 인사를 하러 감영에 이르자  그는 몸소 객사에 찾아와서 밤

새도록 담소를 나누었으며, 도내의  의옥(죄상이 복잡하여 의혹이  많고 유죄인지 무죄인지

쉽게 판명하기 어려운 범죄 사건을 일컫는 말.)을 심리하는 일을 아버지에게 맡기면서 여러

해가 지나도록 종결이 안 된 의옥들을  모두 판결하여 억울한 사람의 원통함을  풀어주라고

간곡하게 명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감영에 며칠 동안 머무시면서 심리하신 의옥이 무려

1백여 건이었는데, 옳고 그름을 가려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은 것이 많았다. 의옥에 대해  논

한 여러 통의 편지들은 대개 문집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 일일이 언급하지 않는다.


17

임자년(1792, 연암이 56세때)에 흉년이 들었다. 아버지는 재해 대책에 몹시 마음을 쓰셨으

며, 피해 정도를 과장하거나 숨기는 폐단이 없게 했다. 감영에 보고할 때 사실대로 하게  했

으며, 조금이라도 부풀려 보고하지 않게 했다. 이에 뭇 아전들이 일제히 아뢰었다. "매번 감

영에 재해를 보고하면 피해액을 삭감하는  게 관례였사옵니다. 이제 만일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하여 감영이 그 절반을 삭감한다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줄 수 없게 되거늘 어떡하려

고 그러십니까?"

아버지는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건 장사치나 거간꾼들이 값을 부풀려 속여 파는 술

책이니 그런 일을 해선 안된다.  또 삭감될 것을 염려하여 부풀려  보고했다가 만일 보고한

대로 다 승인해준다면 그 남는 건 장차 어떡하려느냐?" 그리하여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했는

데, 감영에서는 과연 보고한 숫자대로 승인하였다.


18

아버지는 계축년(1793, 연암이 57세때) 봄에  사진(흉년이 들었을 때 관아가 아닌  개인이

사사로이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일컫는 말)을  시행하셨다. 아버지는 공진이든 사진이든 시

행하는 데 제각각 애로가  없지 않다고 생각하셨는데, 결국  사진을 시행하겠다고 자청하여

정성을 다해 백성을 구휼하셨다. 감사에게는 서신을 보내 이 사실을 보고했다. 감사는  안의

현이 재해가 가장 심한 고을인데  사진을 시행한다는 장계(관찰사나 왕명을  받들고 지방에

나간 관원이 왕에게 서면으로 올리는 보고)를 올리는 건 적당하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아버지는 감사에게 다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비록 이름은 사진이지만 곡식은 이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이 땅의 백성을 구휼하거늘 어찌 공진이니 사진이니 따질 게 있겠습

니까?"

아버지는 당신의 봉록을 덜어서 곡식을  장만하셨다. 또한 감사에게 다음과  같은 다짐을

두었다. "공진으로 해야 할지 사진으로 해야 할지의 여부와 곡식의 출처, 굶주린  백성을 정

확하게 가려냈는가의 여부 등은 저에게 일임하여 다시는  간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

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난색을 표했으나 결국 사진으로 결정되었다.

그 뒤 조정에서는 특별히 담비가죽, 소목(인도 등의 열대지방에서 나는 나무로 활의 재료,

한약재, 홍색 염색 등으로 쓰였다.) 등의 물품을 하사하여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보태쓰라고

하였다. 감사는 관례에 따라 그 일부를 보내왔지만 아버지는 사양하고 받지 않으셨다.  공명

첩이 내려온 것 역시 돌려보내셨다.


19

아버지는 관아에 구휼하는 곳을 마련해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 주셨다. 아버지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중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며, 죽을 나누어주기  전에 염치를 길러야 한다

고 생각하셨다. 제도가 바로 서지  않고서는 위아래가 뒤죽박죽이 되거나  혼란이 야기됨을

막기 어렵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먼저 뜰에다 금을 그은  다음 거기에 모래를

채워 위계를 표시했다. 그리고 방위에 따라 거적을 깔아서 동리를 구분하였다. 또한  남녀의

자리를 구분하고, 어른과 아이의 자리를 달리하며, 양반은 앞에 앉고 백성은 뒤에 앉게 하였

다. 아버지는 동헌에 나와 앉아 먼저 죽 한 그릇을 드셨는데, 그 그릇은 진휼에서 쓰는 것과

똑같았으며 소반이나 상 같은 건 차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죽을 남김없이 다 드시고  나서,

"이것은 주인의 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죽을 나누어주고 곡식을 분배하는 일이 엄숙

하게 진행되어 시끄럽지 않았다. 양반과 백성 가운데 조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

했다. "구휼하는 곳이 이렇기만 하다면야 우리가 구휼받는 데 대해 무슨 부끄러움을 느끼겠

나!"

아버지는 그 후 인근 고을 수령과 구휼하는 일에 대해 논하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백

성을 구휼하는 일은 예에 입각해서 해야 하는 것이외다." 이와 관련된 긴 편지가 문집에 수

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편지가 주자가 구휼에 대해 쓴  글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법도를

보여준다고들 했다.

아버지는 그 후 또다른 인근 고을 관리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백성을 구휼하는 일

에 지쳐 근심하고 고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어

그 마음을 위로했다.  "우리들이 하해와 같은 임금님의 은혜를 입어 갑자기 부자가 되어 뜰

에다 수십 개의 큰 가마솥을 늘어놓고 얼굴이 누렇게 뜬 곤궁한 동포 1천 4백여 명을  불러

다가 매달 세 번씩 함께 즐기니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거외다. 세상에 이만한 즐거움

이 대체 어디 있겠소? 뭣 때문에 신세를 한탄하며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이오?"

구휼을 마쳤는데도 50여 포대의 곡식이 남았다. 아버지는 처음에 이것으로 사창을 설치하

여 뒷날의 흉년에 대비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이는  감영에서 관할하는 것이 아

니므로 슈탈의 대상이 되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후임자가 그대로 준수하지 않

을 경우 도리어 곡식과 관련된 폐단만 한 가지 더  보탤 듯싶었다. 그래서 구휼을 감독했던

아전들에게 나눠져 버렸다.


20

아버지 휘하의 종 하나가 술만 마시면 주정을 부리며 몹시 무례하게 굴어 그 동료들이 멀

리하였다. 하루는 그가 또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를 동헌 앞의 작은 방에  잡어

넣어 매일 짚신 몇 켤레씩을 삼게 하였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내리셨다. 그런 지

달포가 지나 아버지는 그를 놓아주라는 특명을 내리셨다. 그 하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행실

을 고쳐 건실한 사람이 되었으며, 미친 듯이 날뛰는 버릇이 싹 사라졌다. 어떤 사람이 이 일

을 이상히 여겨 그 연유를 물었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그 사람을 보니 본

래 악한 성품은 아닌데 오래 떠돌아다녀  마음을 붙들어매지 못해 그런 것으로  여겨지더군

요. 내가 그놈더러 짚신을 삼게 한 것은 일에 마음을  붙여 자연스레 마음이 단속되기를 바

라서였지요."


21

아버지는 고을 원으로 계실 때 아랫사람에게 매를 때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부득이 곤

장을 쳐야 할 경우에는 곤장질이 끝난 후 반드시 사람을 보내 그 맞은 곳을 주물러 멍을 풀

어주게 했다.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고을 원 노릇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일만큼은 몹시 괴롭고 싫다."


22

아버지는 소송을 심리하거나 옥사를 처리하실 때 언성을 높이거나 성을 내는 일이 드물었

다. 그래서 판결에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인륜에 관련된 일, 이를테

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형제가 재산 문제로 다투거나 남의 아내를 간음한 일등은 보

통보다 더 엄격히 다스리셨다. 또한 죄를 지은 자가 뉘우칠 때까지 반복하여 타이르고 깨우

쳐주셨다.

관아의 일을 보좌하는 사람 가운데  의술을 좀 하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관아에 출입하며 의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가족처럼 친해졌다.  그

후 사람은 남의 아내를 범한 일이 발각되어 붙잡혀와 처벌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 자를 타

이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곁에 있은 지 벌써 몇 년째다. 그렇건만 네가  이런 사

람인 줄 알지 못했으니 이는 내 잘못이다." 마침내 그를 쫓아버리고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23

읍에 사는 한 평민이 늘 사람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으며 술과 음식을 빼앗기를 밥먹듯이

하였다. 매일 싸움질을 했으며, 어쩌다 관아에 끌려와 벌을 받으면 더욱 심하게 성깔을 부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피하면서 상대하여 들지 않았다.  하루는 아전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엉금엉금 기면서 관아에 들어왔는데  손에는 커다란 몽둥이를 쥐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아무개가 이 몽둥이를 갖고 소인을  때려죽이려 했사옵니다." 아버지

는 웃으며, "얼른 각수장이(나무나 돌 따위에 글이나 문양을 새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살

마.)를 불러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각수장이에게 시켜  그 몽둥이에다 다음 글을 새기도록

했다.


오호라, 이 큰 몽둥이

그 누나 만들었나?

아무개가 만들었지.

주정과 행패

너에게서 나왔으니

너에게로 돌아가야지.

이 이치는 피할 길 없으니

상해죄로 다스릴 일.

이 몽둥이 걸어두세.

저 마을문 곁에다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함께 이 몽둥이로 때려주세.

사또가 그걸 허락함을

이 글로 증명한다.


아전도 웃고 물러갔다. 아무개가 이 말을 전해듣고 다시는 야료를 부리지 못했다.

안의 읍내에는 본래 좀도둑이 많았다.  하루는 내아(지방 관아의 안채)에  도둑이 들었다.

아버지는 급히 분부하셨다. "군기고의 마름(마름 모양으로 생긴 쇳조각,  전쟁 중에 적이 들

어오는 길에 뿌려 그 침입을 저지하는 데 쓰는 무기였다." 또 이렇게 분부하셨다. "대장장이

로 하여금 마름쇠를 많이 만들어 들여보내게 하라!"

마름쇠를 가져오자 집안 사람들은 그것을 담장 밑에 쭉 깔자고 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

씀하셨다. "꼭 깔 것까지는 없다. 도둑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니까." 이로부터 관아 부근에는

좀도둑이 싹 사라졌다. 이런 일들은 종종 우스개로 전해지고 있다.

매번 장시에서 도둑을 정탐하게 하여 나타나는 대로 현장에서  체포하면, 그때마다 꼭 토

포영의 장교와 나졸 들이 출현하는 것이었다. 토포영이란 곧 진영(정3품 진영장이 관할하는

병영)을 말하는데, 도둑 잡는 일을  전담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토포영의 장교와  나졸 들은

농간을 일삼고 있었다. 그들은 도둑과 함께 다니다가 도둑을 풀어주어 재물을 훔치게 한 다

음 그 이익을 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러다가 그 도둑이 잡힐 경우 자기들이 마침 이곳을 지

나던 참이라고 둘러대고는 그 도둑을 데려가는 것이었다. 관아에서도  편의를 좇아 잡은 도

둑을 넘겨주곤 했다. 그러나 도둑을 잡는다는 자들이 실상 도둑을 풀어놓고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도둑 또한 믿는 곳이 있는지라 마음대로 날뛰면서 겁을 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부임하신 초기에 세 번 도둑을 잡았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장교와 나졸 들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그들의 간사함을 간파하셨으므로, 잡은 도둑을 장교와 나졸들에게  내주

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아버지는 그 후 토포영에 이런 공문을 보냈다. "우리가  도둑을 잡았

을 때 그쪽의 장교와 나졸이 나타나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들 또한 도둑을 다스리는 법으로

함께 다스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자 안의에는 도둑이 사라져 밤에도 문을 닫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토포사는 쓸데없는 관직이다. 아예 없애버리고, 여러 읍으

로 하여금 각기 자체적으로 도둑을 잡도록 하는 게 낫다."


24

아버지는 겉치레를 꾸미는 일과 자잘한 예법들을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셨다. 부임하신 지

달포쯤 되었을 때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분부를 내리셨다. "나는 번거롭게 꾸미는  걸 싫

어한다. 행차할 대 벽제(지위 높은 사람의 행차  때 그를 수행하던 아랫사람들이 소리를 질

러 행인의 통행을 막던 일.)하는 일, 음식을 올리는 절차, 수령의 기거동작을 소리내어 알리

는 일 등은 일체 없애도록 하며 모든 일을 간략하고  정숙하게 하도록 노력하라. 새 법령을

시행하고자 할 때 그 일로 혹 자기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염려되면 필시 전례가 그렇지 않음

을 들어 미적거리는데, 만일  사사건건 전례만을 들먹인다면 고을  원은 두어서 무엇하겠느

냐? 더구나 전례가 반드시 다  옳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함부로 전례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라."

아버지는 수령의 생활비를 기록하는 장부를 담당  아전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내가 따로 책방(고을 원이 사사로이  임명한 사람으로서, 비서 일을

맡아보았다.)을 두어 장부를 관리하게 할 수도 있지마는 너희들과 액수를 갖고 따지고 싶지

않다." 또 매일 중기(관아의 재산을 적는 장부로, 후임으로 오는 고을 원에게 사무를 인계할

때 전해준다.)를 쓰게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관아의 일에 마땅찮은 게 있으면 나는 그

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떠날 테니 그리 알아라."

이로부터 관아가 늘 조용하여 마치 산 속의 별장이나 들에 있는 정자와 같았다. 부임하신

지 반년도 되기 전에 아전들은 고분고분해지고 백성들은 신실해져 온 고을에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고을 원으로 계셨던 5년 동안 아전과 장교들은 별로 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한

가롭게 놀러다닐 수 있었으니, 낚시도 하고 활쏘기도 하며 무리를 지어 노닐었다.  그러면서

도 서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몸은 1년 내내  한가롭지만 마음은 잠시도 편할 때가 없

다."


25

아버지는 상고시대에 규전(옛날 국가에서 녹봉  이외에 별도로 주어 그  수확으로 제사를

지내게 한 밭.)을 두었던 뜻을 본떠 연지의 남쪽에  약간 사서 거기서 나오는 쌀로 일년 동

안 가묘(한 집안의 사당.)의 제수로 사용하셨다. 연암골에서 농사  짓던 농노 가운데 아버지

를 따라 안의까지 온 이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이 논을 경작하게 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고기를 먹으며 편히 지내니, 훗날 혹 네 본분을 지키지 못할까봐 걱

정이다. 이제 네가 이 논에서 농사를 지으면 나 또한 농사의 형편을 살필 수 있겠구나."

그 뒤 아버지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실 때다. 인수인계를 맡은 아전이 그 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 물었다. 아버지는 그 농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면서 너

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너는 이 땅을 경작해 먹고 살도록 해라."


26

봄 가을로 가묘에 시제(음력 2, 5, 8, 11월에 집안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시며 우

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중봉 조헌 선생 같은 분은 집이 매우 가난하셨지만,  흰 밥과

나물국만을 제사고 올리면서도 제사지내는 걸 거르지 않으셨다. 내가 항상 이를 사모했건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가례에 따라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거듭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버지는 시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먼저 중류제(경,  대부가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

'중류'는 토지신이다.)를 친히 주관하셨는데, 호장으로 하여금 아헌(제사  때 두 번째 술자을

올리는 일. 술을 올리는 절차를 헌작이라고 하는데 초헌, 아헌, 종헌 등 세 차례가  있다. 초

헌은 반드시 주인이 행하며, 아헌은 그 다음의 어른이 맡게 되어 있었다.)을 맡게 하시며 이

렇게 말씀하셨다. "시제야 사사로운 제사지만, 중류는 이 고장의 토지신이기 때문이다."


27

선조 야천(박소) 선생의 묘가 합천군 화양동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너무 멀어 오랫동안 돌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안의에 부임하셔서 여러 차례 성묘하고 제사를 지냈다. 당시 재실(묘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놓은 집)은 이머 허물어지고 제전마저 없어진 상태였다. 이에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여러 종친들에게 편지를 띄웠으며, 몸소  주관하여 재실을 세우고 제

전을 마련하셨다. 일족으로서 도내에서 고을 원을 하고 있던 분들  역시 각각 돈을 내어 이

일을 도왔다. 재실과 제전을 산 아래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맡길 경우 제전을 횡령하고 재실

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등 이전과 같은 폐단이 있을 것 같아 합천군의 길청(지방 관아의 아

전들이 일을 보던 곳)에 소속시켜  청명에 제사지내게 했다. 아버지는  재실ㅇ에 걸 기문을

친히 지으셨다.

그 뒤, 재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합천군 호장이 축문을 읽었다는 비방이 있었다. 아버지는

족형인 근재공 윤원에게 답장을 보내어 그런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해명하셨다. 기문과 편

지는 모두 문집에 실려 있다.


28

안의는 본래 산수가 빼어난 고을로 일컬어졌으며, 심진동,  원학동 등의 명승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만년에 가난 때문에 벼슬하여 고을 원이 되셨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산수와 대나

무에 퍽 만족해하셨다. 관아 한곳에는 2층으로 된 창고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퇴락한지 이미

오래였다. 이에 그것을 철거하여 평평하고 넓은 수십 보의 땅을 확보했다. 마침내 연못을 파

고 아래 위로 개울물을 끌여들어 물을 채워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으니 은연중 물아일체

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못가에 집을 짓고 벽돌을 구워 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의 집 짓는 법을 본 뜬 것이었다. 긴 대나무와 무성한 숲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어 정말 사

랑스러웠다. 집에는 저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하풍죽로당,  연상각, 공작관, 백척오동각이 그

것이다. 아버지는 이들 각각에 대해 기문을 지으셨는데, 그 글이 문집에 실려 있다.


29

지계공(이재성)과 김기무, 큰 사위 이종목과 작은사위 이겸수를 초대하여 물가에서 술 마

시며 글을 짓는 자리를 가지셨다. 계축년 봄에는 왕희지의  난정고사를 본뜬 술자리를 마련

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으셨다. 세상 사람들은  당시 아버지가 지은 시를 외워

전했으며 그 모임을 멋진 일로 생각했다.

지계공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화림(안의현의 다른  이름)에

도착해 40일 동안 하풍죽로당에 거처했다오. 당시 풍년이 든데다가  관아에 일이 없어 한가

했으므로 사또께서는 일찍 업무를 끝내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객이 묵고 있는 곳으

로 찾아왔다오. 그 곳에는 예스러운 거문고와  운치 있는 술동이, 잘 정돈된 책들과  아담한

칼이 비치되어 있었다오. 그리고 곁에는 종종 시에 능한 승려와 이름난 기생이  있었소이다.

술이 거나해지면 천고의 문장에 대해 마음껏 토론했으니, 당시의 즐거움은 1백 년의 인생과

맞바꿀 만했다오. 내가 훗날 화림과 같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고을살이를 할 수 있을지는 모

르지만, 연암과 같은 객을 얻을 수야 있겠소?"

그때 온 사람들 중 이희경과 윤인태는 아버지 문하에 출입하던 선비들이었고, 한석호,  양

상회 등 여러 사람은 모두 연암골에 계실 때의  문하생들이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별관에다

기악을 베풀어주셨는데, 당신께서는 먼저 돌아오셔서 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놀게 하

셨다. 지계공은 세 차례나 안의에 오셨다.


30

아버지께서 고을 원에 부임하실 때와  그만두고 돌아오실 때 지녔던 물건이란  책 5, 6백

권 및 붓, 벼루, 향로 , 다기 등이었다. 그래서 짐이라곤 고작 4, 5바리(말의 등에 실은 짐을

세는 단위로, 말 한 마리에 실은 짐이 한 바리가 된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임

지에 도착하시면 꼭 목공부터 먼저 불러 서가와 책상 따위를 만들게 하셨다. 그리하여 가지

고 온 책과 벼루 등을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완상하셨다. 아버지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

셨다. "고을 원으로 있는 사람은 비록 내일 당장  그만두고 떠날지라도 늘 1백년 동안 있으

면서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정사를 펼 수 있다. 매양  고을살이 하는 사람들은 고을살이를 마치  여관에서 하룻밤 자는

정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니 아전이나 백성들이 '우리 원님은  얼마 안 있어 떠나실 걸'하

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이 때문에 윗사람은 억지로 전례를 답습해 정사를 할 뿐이고,  아

랫사람은 임시방편으로 적당히 넘어가려 한다.  이래갖고서야 어찌 백성에게 선정을  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고을 원 자라를 연연해두어서도 안되니, 뜻에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헌

신짝 버리듯 흔쾌히 그만두어야 한다. 주역의 예괘에 '절개가  돌과 같다'라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예'란 즐거움이다. 사람이 즐거운 상태에 있으면 그에 연연하고 탐닉하여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낭패를 당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주자는 이  괘를

풀이하기를,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므로 곧고 또 길하다.'라고 한 것이다."

안의의 아버지를 방문했다가 서울로 돌아온 분이 있었다. 누군가  그 분에게 아버지가 고

을 원으로서 어떻게 정사를 펴고 있던지 물었다.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다. "연암이 고을 원

으로 근무하는 방식은 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후임자에게 넘겨줄 문

서를 정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무와 과실을 심고 있으니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

는 일입디다." 이 말이 전파되어 사람들이 웃었다.


31

이때 임금님께서 각신(규장각의 관원으로서,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를 총칭하는 말이다.)

아무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지원은 평생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이 궁벽한 시골과 강

가를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늘그막에 고을 수령으로  나갔으니 땅이나 집을 구하는

데 급급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천리 밖에 있는 술친구

와 글친구들을 초대하고 있다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또

들으니 고을 원으로서의 치적 또한 퍽 훌륭하다는구나."

임금님은 며칠 후 박제가에게 다음과 같은 분부를 내리셨다. "박지원이 다스리는 고을 문

인들이 많이 가서 노닌다고 하는데,  너만 공무에 매여 가지 못하고  있으니 혼자 탄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휴가를 내어 너도 한번 가보는 게 좋겠다." 마침내 박제가가  분부를 받들어

안의를 방문해 임금님께서 전후에 걸쳐 내리신 은혜로운 말씀이 이와 같았음을 전했다.


32

이때 임금님께서는 당시의 문풍이 예스럽지 못하다고 여기셔서 이를 질책하는 엄한  교지

를 여러 차례 내리셨다. 그릭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의 문신들은  모두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

에서 예스러운 글을 한편씩 지어 올려야 했다.

하루는 임금님께서 규장각 직각(규장각의 벼슬이름. 역대 국왕의 친필, 서화 및 왕실 도서

의 관리 책임자였다.) 남공철에게 다음과 같은 분부를 내리셨다.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

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인 법이니 속

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임

금의 교령 또는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종2품의 관직인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제학을 가

리킨다.)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하라!"

남공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는 실로 우리 성스러운 임금님께서

세상을 잘 교화하고 문풍을 진작시키며 선비들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는 고

심과 지극한 덕에서 나온 분부이시니 감히 그 1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

니까? 더군다나 공께서는 잘못을 반성하고 속죄함에 있어서 잠시도 머뭇거릴 수 없사외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셨다. "광대한 천지는 만물을 길러주고

밝게 빛나는 일월은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도 비추어지지 않음이 없군요.  보잘것없는 제

책이 위로 임금님의 맑으신 눈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저는 어리석고 비루

한 일개 천신에 지나지 않건만 마치 근신에게 내리는 것과 다름없는 은혜로운 분부를 내리

시다니요! 세상을 어지럽힌 데 대해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건만 오히려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바쳐 속죄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니 미물과 같이 보잘것없는 천신이 어떻게 이런

은혜를 입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중년 이래로 불우하고 영락하여 스스로 자중하지 못하

고 글로써 유희를 삼아 때때로 궁한 처지에서 나오는  근심과 하릴없는 마음을 드러냈으니,

조잡하고 허랑한 말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성품이 또한  게으르고 나태하여 원고를 챙기고

단속하는 일을 제대로 못한 탓에 자신을 그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남까지 그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혹 와전된 내용이  다시 와전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문풍이  이

때문에 진작되지 못하고 습속이 이 때문에  날로 나빠져간다면 저는 실로 임금님의  교화를

해치는 고약한 백성이요, 문단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니 법의 처벌을  면하

는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지요. 이런 결과가 초래된 원인을 따져보면 다 어줍잖은 재주 때문

이었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반성하여 올바른 글을 지어 바치도록 하겠으며, 얼른 허물을 고쳐 다시는 성세의 죄인이 되

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임금님께서 '무예도보통지'(정조 때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이 왕명

에 따라 편찬한 종합무예서.)를 가져오라 하여 보시고, 이덕무가 지은 '왜적 방비에 대해 논

함'등의 글에 대해, "모두 원만하고 좋구나."라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연암의 문체를

본떴구나."라고 하신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서울에 있던 여러 분들은 이렇게들 말했다.

"임금님께서 '열하일기'를 거론하신 건 기실 노여워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장차 파격적

인 은총을 내리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님의 분부 중에 여러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지적

하면서도 특히 박아무개를 들어 죄인중의 우두머리라고 하신 것은 임금님께서 박아무개에게

주의를 주어 그 글이 좀더 발전되게 함으로써 장차  문임을 맡기려는 의도이시다. 더군다나

'열하일기'를 가리켜 문체를 그르친 장본이라 하시면서도 그것을 익히 보셨노라고 하여 애호

하는 뜻을 나타내셨음에랴! 반드시 바른 글을 한 부 지어서 얼른 바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지어 바칠  것을 권유하였다. 지계공이 보내온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공의 글은 필력이 높고 굳세지만 자구에 있어서 그리 고문을 본

뜬 것이 아니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찌 공의 글을 명청(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때 유

행한 문장을 일컫는 말)의 소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는 건 공의

글 가운데 고문의 법도에 맞는 글을  미처 얻어보지 못한 채 일세에 유행한  '열하일기'만을

알기 때문이지요. 공이 자중자애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해학과 풍자를 일삼아 진중하지 않은

점은 있다 할지라도 어찌 섬약하고 유약하기 짝이 없는 최근 문사들의 글과 같겠습니까? 그

러니 공의 글을 배운 까닭에 오늘날의 문풍이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 억

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약간의 우스갯소리만 찾아내어 없애버린다면 '열하

일기' 이 책이 바로 순수하고 바른 글일거외다."

당시 안의에 와 있던 여러 문사들은 모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들은 붓을 들고 책을 펼쳐

아버지에게 참고가 되는 글을 베끼는 일을  한다든지 사실을 고증하는 일을 떠맡고자  하였

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임금님의 이번 분부는 참으로  전무후무한 은총이

오. 임금님께서 '열하일기'의 문체가 잘못 되었다고 하여 죄를 주셨으니 신하된 도리로서 그

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오. 견책을 받은 몸이 새로 글을 지어 올려 자신의 글이 바르다고 자

처하면서 이전의 잘못을 덮으려 해서야 쓰겠소? 더구나 잘못을 반성하고 바른 글을 지어 바

치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주는 것도 아깝지 않다고 하신 것은 스스로 반성하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거늘, 만일 이에 편승해  우쭐하여 글을 지어 바친다면 이는  바라서는 안될 것을

바라는 것이겠지요. 바라서는 안될 것을 바라는 건 신하된 자의 큰 죄라오. 그래서 나는  새

로 글을 지어 바치려고는 하지 않으며, 예전에 지은 글 몇 편과 안의에 와 지은 글 몇 편을

뽑아 서너 권의 책자로 만들어두었다가 임금님께서 또다시 글을 지어 올리라는 분부를 내리

시면 그때에 가서나 분부를 받들어 신하의 도리를 다할까 하오."

이에 앞서 경술년(1790)에 금성도위(박명원)가 작고하셨을  때 임금님께서는 이렇게 분부

하셨다. "신도비(종2품 이상을 지낸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는 내가 친히 쓸 테니 그 조카 종악에게 명하여 행장을 짓게 하

고, 묘지명은 박지원으로 하여금 쓰게 하라."

그 후 이덕무가 작고하자 임금님께서는 그가 지은 서문을  들여오게 하셨다. 그리고 규장

각 각신으로 하여금 그 글을 정선하여 활자로 간행케 하셨다. 한편 그 책의 서문과 발문 및

고인의 묘지명과 묘갈명(정3품 이하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묘 앞에 세우는 비. 기술하는 내

용은 신도비와 비슷하나 그 규모가  신도비보다 작다.)을 여러 문신들로 하여금  짓게 하고,

행장은 특별히 아버지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셨다.

아버지께서 지은 글 가운데 임금님의 명을 받아 지어 올린 글이 모두 네편인데, 이 두 편

및 이방익의 일을 기술한 글과 농사 짓는 법을 엮은 글이 그것이다.


33

아버지는 조선 부녀들의 의복제도와 아이들의 머리를 뒤로 길게 땋아내리는 제도가  모두

원나라의 풍습을 답습한 것이라 하여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돌아올

때, 그곳의 풍속을 따라 변발(남자의 머리를, 둘레는 밀어 깎고 가운데  머리만을 땋아서 뒤

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을 하고 나왔다. 당시 교외에서 왕을 맞이한  사대부들은 모두 눈물

을 삼키며 차마 쳐다보지 못했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풍속이 원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며

그 폐단이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조선은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데  엄격했다.

그러나 이런 비루한 풍속에 대해서는 편안하게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아버지께서 부임한 안의는 동게 정온  선생의 고향이었다. 선생은 병자호란  때 오랑캐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

셨다. 선생은 고향에 돌아오시자 아이들로  하여금 그 땋은 머리를 모두  풀게 하여 머리를

양쪽으로 가른 다음 뿔처럼 동여매어 쌍상투를 틀게 하였다.(이른바 총각머리) 우암 송시열

선생 또한 파곶(충북 청주의 파곶산)에 거처하실 때 이렇게 하셨다. 두 분 선생은 모두 세상

사람들의 중국의 옛 제도를 알지 못함을 깊이 통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또한 옛날에 갈천 임훈과 옥계 노진이 주자가 입던 평상복을 본떠 흰  옷에 검은 가선(옷

의 가장자리를 다른 헝겊으로 가늘게 싸서 돌린 선.)을 두른 옷을  입고 지냈었는데, 안의의

어진 선비 유처일이 그 제도를 따랐다. 아버지는 이 옷의 예스럽고 아담함을 좋아하시어 하

풍죽로당에 계실 때 더러 평상복으로  이 옷을 입으셨다. 그리고  지인동(고을 원의 관인을

관리하던 아이.)들로 하여금 모두 그 땋은 머리를 풀고 쌍상투를 틀게 하셨다. 당시 나도 쌍

상투를 틀고 사규삼(조선시대 남자 아이의 평상복)을 입었었다. 이는 모두 아버지께서 옛 것

을 좋아하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웃의 수령들이나 안의에 들른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옷

차림과 머리 모양을 몹시 해괴하게 여겨 눈이 휘둥그래졌다. 뿐만 아니라 벽돌로 쌓은 하풍

죽로당 역시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난삼아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럭

들은 모두 오랑캐의 제도인가요?"

아버지는 그런 무식한 질문에 그저 웃고 말았을 뿐 대거리하지 않았다. 이때 이웃 고을의

한 수령이 아버지가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자자함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험을 찾아내

어 해코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랑캐의 옷을  입고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켰으며, 그 소문을 서울에까지 전파시켰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 친구 가운데

글을 잘한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아버지한테 인정을 받지 못한 이가 있었다. 그는 이로 인해

늘 아버지에게 유감을 품고 있던 터였다. 그 즈음  '열하일기'의 문체에 대해 임금님의 은혜

로운 분부가 계셔서 장차 임금님의 은총이 있을 듯하자 그의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더

욱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그는 '오랑캐의 옷을 입고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아버지에  대한

비방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는 이때야말로 아버지를 음해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열하일

기'를 '노호지고'(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 비난하며 자신의 무리를 선동했다  그리하

여 무오년(1788), 기미년(1790) 사이에 두 가지 비방이 함께 일어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

였다.

저들의 이른바 '노호지고'란 '열하일기' 중에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것을 가리켜서 한 말

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점에 대해 사람들에게 해명하려 하지 않았으며, 언젠가  지계공에

게 편지를 보내 그런 비방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설명하셨을  뿐이다. 그 편지가 문집에 실

려 있으니 독자들은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송원 김공(김이도) 댁의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아버직 오랑캐의 옷을 입고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소문을 이야기했다. 김공이 얼른 물었다. "당신은 쌍상투를 튼 오랑캐를 본 적이

있소?" "못 봤구려. 오랑캐는 변발을 하니까요."

김공이 다시 물었다. "가선을 두른 옷을 입은 오랑캐를 본 적이 있소?" "오랑캐의 옷에는

가선이 없사외다."

이에 김공이 말했다. "내가 듣기에 연암은 검은 색 가선을 두른 옷을  입고, 지인동자들은

모두 땋은 머리를 풀고 쌍상투를 틀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한다면 연암은 중화의 제도

로써 오랑캐의 제도를 바꾼 것이외다."


34

아버지는 평소 소실을 둔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생을 가까이하지도 않으셨다. 지방 수

령으로 계실 적에 노래하는 기생이나 가야금을 타는 기생이 늘 곁에서 모시면서 벼루며 먹

시중을 들거나 차를 받들어 올렸으며, 수건이나 빗을 받들거나 산보하실 때 수행하였다.  이

처럼 집안 식구와 진배없이 아침 저녁으로 함께 지냈지만 한번도 마음을 준 적은 없으셨다.

지계공은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매양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등잔불이 가물가물

하면 담소는 한창 무르익고 앞자리의 기생들을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었지. 이 즈음 사람들

은 바야흐로 신이 나고 흥이 고조되었는데, 공은 때때로 근엄한 낯빛에 엄숙한 목소리로 기

생들을 그만 물러가게 하곤 했지. 그러면  사람들은 흥이 싹식고 말았지. 그러나 공께서  왜

그러시는진 알 수 없었어. 아마도 이는 공이 스스로를 힘써 반성하며 극기하는 방법이 아니

었나 싶어. 비록 힘들여 억지로 절제하는 흔적이 있기는 하나, 질탕한 풍류와 근엄하게 마음

을 다스리는 공부를 겸한 셈이니 이러고서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지."


35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나는 벗을 만나면 혹 노래하는  기생들을 여럿 나오게 하여 술

잔을 들며 담소하기도 했다. 또 혹 산에 오르거나 물가에  이르러 어쩌다가 풍류를 아는 중

을 만나면 선을 논하며 밤을 지새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본래 좋아하는 일이 아니

며, 남들을 따라 그저 해봤을 뿐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마음에 드는 글을 새로 창

작했을 때 한두 사람 뜻이 맞는 이들과 조금 술잔을 기울이다가 글을 잘 읽는 의젓한  젊은

이로 하여금 음절을 바로하여 한번 낭낭하게 읽게 하고서는 누워서 글에 대한 평이나 감상

을 듣는 것이다."

아버지는 안의현에 계실 때 경암 및 역암이라는 산승과 한두 차례 선에 대해 논하신 적이

있다. 경암은 본래 영남의 유학자로 사서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36

우리 집에는 이전에 생황과 거문고 등 여러 악기가 있어서 혹 김억의 무리가 찾아오면 연

주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담헌공(홍대용)이 돌아가시자 지기를 잃은 슬픔 때문

에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5년 뒤 우연히 담헌 댁에 들르셨는데, 돌아와 슬

픔을 견디지 못하시더니 그 악기들을  모두 남들에게 주어버렸다. 이 때문에  나는 어릴 때

생황이나 거문고 따위의 악기를 본 적이 없다. 그 후 안의현감으로 부의하시자,  "산수가 빼

어나게 아름다운데다 시절도 태평하니 풍악을 울려야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침 장악

원(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늙은 악공중에 은퇴하

여 영남 땅을 떠도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불러다가 보수를  줘가며 음악적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 몇 달 간 노래와 음악을 가르치게 하는  한편, 서울에서 유행하는 음악도 전

수하게 하셨다. 그래서 당시 안의현의 음악은 경상도에서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37

갑인년(1794, 연암이 58세때)에 정조께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신하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양반과 서민 가운데 나이가 70세  이상인 사람들에게 모두 그

신분에 따라 가선대부(종2품의 문관의 품계), 통정대부(정3품의  당상관의 품계)등의 품계를

하사하고자 하여, 8도에 통보하여 해당자를 찾아 보고하게 했다. 당시 안의에는  91세로부터

70세까지의 노인들 50여 명을 보고했는데, 모두 품계를 하사받았다. 이에 아버지는 아전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임금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가 이러하니 그에 보답하는 행사가 있어야 하

겠다."

아버지는 품계를 하사받은 노인들로 하여금 아무 달 아무 날에 일제히 객사에 모여 사은

숙배를 드리게 했는데,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손자, 증손자 들을 다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비록 관례를 치르지 않은 아이라 할지라도 빠지지 말고 모두 참석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아

의 주방에 명령하여 미리 잔치 음식을 장만케 했다. 또 노인들 숫자만큼 대나무를 베어다가

꽃, 새, 풀, 나비 등의 인두 그림을 그려넣은 지팡이를 만들어넣게 했다.

그 날이 되자 아버지는 공복을 갖추어 입으시고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여러 노인들을 거

느리고 객사에 이르러 궐패(궐패란 궐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 패인데, 임금을 상징하는

물건)를 바라보며 사은숙배의 예를 올렸다.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어른과 아이들이 수백명

이나 되었는데, 길거리는 이들로 꽉 메워졌다. 아버지는 예를 마치자 노인들을 거느리과  관

아로 돌아오셨다.

동헌 앞뜰에는 널따란 차일이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께서 공복 차림으로  주인의 자리에

앉으시자 여러 노인들이 차례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따라온 여러 사람들 역시 따로 자리

를 마련하여 앉게 했다. 아버지는 꿇어앉아 소매를 높이 들어 나라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뜻

을 말씀한 다음 다시 몸을 굽혀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앉으셨다. 이는 조정의 명령에 공경

을 표하신 것이었다.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에 잔치를 베

풀고 술을 내오게 하였다. 음악 소리는 드높았으며, 기생들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이 날 구경꾼들이 관아를 삥 둘러쌌는데,  다들 생전 처음 보는 성대한 행사라고  하였다.

잔치가 끝나자 노인들에게 지팡이 하나씩을 선물로 주었다.


38

아버지는 북경에 가셨을 때 농기구와 베틀 등 백성들의 실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구들을

자세히 살펴보셨다. 귀국 후에 본떠  만들어서 국내에 통용시키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생활이 어려워 시도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안의읍에 부임하셔서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장인들을 가려뽑아  양선(풍력을 이

용해 겨 따위를 없애는 농기구이다.),  베틀, 용골차(논에 물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차), 용미차(관개용 수차의 일종) 물레방아 등 여러 기구를 제조케 하여 시험해보셨다. 힘

은 적게 들이고도 일을 빨리 할 수 있어 혼자서 수십 명이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

나 그 뒤 이 기구들을 본떠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국내에 통용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9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위한답시고 이런 말을 하였다. "공은 연세가 예순에 가까워서야 겨

우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되셨습니다. 그렇건만 다른 일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정자를 세우

고 못을 파서 친구와 손님을 맞아들이고 있으며, 남에게 편지를  쓸 때면 늘 안의의 아름다

운 자연과 그 속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크게 자랑하고 계십니다. 이는 모두 부유하고 안락한

사람의 기상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래서야 어떻게 뒷날의 계책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모

름지기 궁상을 떨고 신병이 있다고 말해야만 남이 혹 동정하여 승진하도록 주선해줄 것입니

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대답하셨다. "내가 연암골에서 가난하게  살 때에도 남한테 가나으

의 '가'자도 입밖에 낸적이 없었다오. 지금 나는 물과 대나무가 아름다운 고장에 부임하여 5

천여 호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있소이다. 고을에는  사직단(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대던 곳이다.)이 있는가하면 관아에 딸린 창고도 있소이다. 오늘날의 고을 원은 옛날의 제

후에 해당한다오. 명색이 제후이고 보면 비록 제나 초와 같은  큰 나라 사이에 끼인 등이나

설과 같이 작은 나라라 할지라도 넉넉한 것을 덜어 보충할  수 있으며, 내정을 잘하여 외침

을 막을 수 있소이다. 그러니 부유하고  안락한 사람의 기상이 안 드러날  수 있겠소? 무엇

때문에 가난과 신병을 말하여 억지로 불쌍하고 슬픈 시늉을 짓는 단 말이오?"


40

병진년(1796, 연암이 60세때) 봄에 경직으로 옮기셨다. 당시 임금님의 부름을 받아 사헌부

지평(사헌부 정5품 벼슬)에 기용된 영남  사람 이만운이 부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임금님께서는 도내의 수령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고을에 자리를 만

들어 이만운을 임명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마침 아버지의 남은  임기가 가장 적었기 때문

에 안의현감을 그만두고 군직(현장을 떠난 문관과 무관에게 계속해 녹봉을 지급하기 위하여

만든 자리로, 실무가 없는 명목상의 벼슬)을 받아 서울로 올라오시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백성을 다스릴 때 자잘한 사정을 베풀지 않고  오직 근본에 힘쓰셨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않음과 앞날을 헤아려 대비함에  주력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고

을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수령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수령이란

원래부터 그런 것인 줄 알았으며, 선정이 어떤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만두고 떠나게 되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 10여 명이 동구 밖까지 따라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

은 백성들이라 모르고 있사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할 것이옵니다."

몇 년 뒤에 아전 한  사람이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알려왔다. "백성들이 지금 구리를

녹여 송덕비를 세우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답장을 보내 다음과 같이 타으르셨다. "그런 일을  하는 건 나의 본뜻을 몰라서

다. 더군다나 그런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너희들이 끝내 송덕비를 세우려

든다면 집안의 하인들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셔서 땅에 묻어버린 다음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

자를 벌주도록 하겠다." 마침내 송덕비 세우려던 일이 중단되었다.

30년 후 갑신년 여름에 한 비렁뱅이 노파가 계산초당(연암은 안의현에서  올라온 후 저술

을 하며 여생을 보낼 의도로 계산동에 초당을 지었다.)에  들어와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상도 하지. 초당 모양이 어쩌면 이리도 우리 고을 관아에 있는 정자와 똑같을꼬?"

내가 그때 마침 초당이 앉아 있었으므로 노파를 불러 어디 사람이냐고 물어보았다. 그 노

파는 안의 사람이었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너희 고을  관아의 있는 정자는 누가  세웠느

냐?"

노파가 대답했다. "박사또께서 고을을 다스리실 때 세우셨는데, 그 모양이 이 초당과 똑같

사옵니다."

"너희들이 아직도 그 어른을 칭송하느냐?" "별다른 칭송이야 있겠습니까? 다만 새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늘, '예전의 박사또  같기야 하겠어?'라고들 말하더이다. 그리고 백성들  간에

돈을 갹출하여 술 마시기 놀 때면 언제나 박사또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분은 풍채가  훌륭하

고 풍류를 좋아하셨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듯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인자하셨지. 그 때

문에 관아의 고을이 모두 한가하고 요족하여 저절로 즐거웠지. 그처럼 좋은 시절은 다시 볼

수 없을 게야!'라고들 말합디다."

"그건 내 선친 때 일이다." 그러자  노파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노파는 내당

(부인이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 인사하고 아버지 때의 일을 다정하게 이야기한 다음 떠나갔

다.

지산 유화의 청지기(양반집의 수청방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잡일을 맡아보던 사람)인 김

철희라는 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안의현의 공리(공물을 상납하는 일을 맡아보던

아전.)를 여관에서 만나 밤새도록 진진하게 안의현의 옛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사람은 말끝마다 '연암 어르신, 연암 어르신'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은 그분을 직

접 뵈었소?'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직접 뵈지는 못했소. 다만 고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거라우'라고 했습니다."


41

유충문공(유언호)이 작고하셨다. 아버지는 안의에 계실 때 공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편지 속에 인삼 몇  뿌리를 넣어서 보내셨다. 마침 아버지께서  벼슬이 갈려 서울로

돌아오시게 되자 공은 이 소식을 듣고 날마다 시중드는 사람에게 "연암이  도성이 들어왔다

더냐?"하고 물으셨다. 공은 약을 안 먹겠다고 물리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보내신 어의가 약을 갖고 와 진맥하자,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약이니 먹지 않을 수 없구나."

라고 하셨다. 조금 있다 다시 말씀하셨다. "벗이 보내준 약도 한번 복용하고 싶구나."

그리하여 약을 달여오게 하여 한번 드시고는 탄식하셨다.  "벗을 만나보지 못하고 사별하

니 한스럽구나!"

아버지는 공이 별세한 뒤  도성에 들어오셨는데, 마지막을 지켜보며  영결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셨다.

공의 아드님 위수공 한재는 우리 아버지를 부형처럼 받들었다. 아버지께서도 그를 애지중

지하시며 그가 유공의 뜻을 잘 계승함을 칭찬하셨다.


42

아버지는 고을 원으로 계실 때 어려운 친구들에게 자주  이것저것을 보내 도와주셨다. 하

지만 그외의 사람들에겐 결코 토산물을 후하게 선물하는 법이 없었다. 유충문공에게는 대로

만든 발 두 장과 죽부인 한 개를 보내신 적이 있다. 유공은  받자마자 즉시 앞 창에다 발을

친 후 한참 동안 매만지다가 이런 답장을 보내셨다. "발  가득히 맑은 바람이 부니 그대 마

음을 보는 듯하이!"

또한 족제 금석공(박준원)에게 보내는 답장 속에 달랑 풍경 두  개만을 동봉하신 적이 있

다. 금석공이 이를 받고 몹시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형님께서

아우의 심사를 아시니, 보내주신 물건에 맑고 깨끗한 뜻을 부칠 만하군요."

금석공은 이 일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했다.


하늘이 고요하듯 이 마음 담박하니

안의현감의 청렴함을 기뻐하노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편지 속에 이처럼 조촐하고 맑은 선물을 보내는 사람

이 또 누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아버지에게 백우선(새의  흰 깃으로 만든 부채.  옛날 촉의 제갈량이

이 부채를 들고 군대를 지휘했다는 고사가 있다.)을 선물로 바쳤다. 아버지는 그것을 이명연

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머리에 이렇게 쓰셨다. "여량아! 이 백우선을 부치게나."(여량은 이명

연의 자이지만, '량'자가 제갈량의 이름자와 일치하므로 '여량'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너는

제갈량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백우선을 흔들며 군대를 지휘했다는  고사

와 연결시키면 '자네는 제갈량이니 이 백우선을  흔들게가!'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일

종의 문자희라고 할 수 있다.) 여량은 곧 이공의 자다. 공은 여러 벗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

하곤 했다.     




제3부 원칙있는 정치를 펼치다

1

계산초당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면서부터 더욱더 전원

으로 들어가 책을 저술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시게 되었다. 그래서 늘 지계공에게 이런 말

씀을 하셨다. "우리는 이제 늙어  백발이 성성하니 다시 세상일을 도모할  수 있겠나? 장차

한적한 터를 잡아 자네와 함께 소요한다면 여생의 지극한 즐거움이 될 것 같네."

마침내 계산동(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계동)의 과수원 하나를 사서 터를 닦아 조그만 집을

흙벽돌로 지었다. 흙벽돌은 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 굽지 않고  그냥 햇볕에 말려 단단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흙집 짓는  법을 본뜬 것이다. 서쪽에는 작은 다락집을  만들어

창문을 내고 '총계서숙'(서숙이란 글방을 뜻하는 말이다.)이라 이름하셨으니, 지금 내가 거처

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당시 지계공의 집이 몹시 좁아 이곳으로 옮겨와 거처하셨다. 아버지께선 늘 산보차림으로

아침 저녁 들르셔서 하루이틀 묵으며 담소하셨는데, 몹시 즐거워보이셨다. 두 분께서 연구하

고 토론하신 바는 대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와 이용후생에 관한 것들이었

다. 아버지는 매양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한가할 때 책을 쓴다면 후세에 전할 만한 책

을 쓸 수 있겠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아버지는 면천(충남 당진군 면천면 지역)군수로 부임하셨으며, 지계

공 또한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리하여 이 집은  몇 년 동안 다른 사람

에게 맡겨졌다. 그 후 내가 이 집에 와 살고 있다.


2

당시 강산 이공(이서구)이 좌승지로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양호와

형개(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원군을 이끌고 와 조선을  도왔던 장군들)를 제사지내라는 임금

님의 분부가 계셨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저더러  제문을 지어 올리라 하셨지만, 공무  때문에

도무지 겨를이 없어니 50운의 제문(운이 50개 달린 제문을 말한다.) 두 편을 대신 좀 써주셨

으면 합니다."

말이 몹시 간절하고 다급했으므로 아버지는 대신 제문을 지어주셨다. 뒤에 이공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임금님께서 은밀히 분부를 내려 박아무개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 하셨습니다."


3

병진년(1796)에 제용감(왕실에서 쓰는 의복 및 직물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주부

에 임명되셨다. 얼마 후 의금부 도사로 자리를 옮기셨으며, 다시 의릉령(의릉은 경종과 선의

왕후의 능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영은 능을 지키는 종5품 벼슬)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4

정사년(1797, 연암이 61세때) 7월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먼저 대궐에 들어와 임금님을 알현

하고 뒤에 사은(사은숙배의 줄임말, 새로  벼슬에 임명된 자가 대궐에서  왕에게 절하여 그

은혜에 감사드리는 일을 말함.)하라는  특명이 내렸다. 어전에 나아갔더니  임금님께서 물었

다. "내가 지난번에 문체를 고치라고 했는데 과연 고쳤느냐?"

말씀이 정중하셨다. 아버지는 엎드려 아뢰었다. "성스러운 분부에 황공하와 아뢰지 못하옵

나이다."

임금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최근에 좋은  글감 하나를 얻었다. 너를 시켜  좋은

글 한 편을 짓게하려 한 지 오래다."

그리고는 친히 제주 사람 이방익이 바다에 표류한 일의  전말을 자세히 들려주셨다. 임금

님께서는, "잘 들었느냐?"고 물으시고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내가 이방익과 나눈 말을 기록

한 초고가 그 날 입시했던 승지한테 있을 것이다. 그걸 면천에 내려보내도록 하겠으니 너는

한가할 때 좋은 글을 지어 바치도록 해라."

아버지는 이방익이 임금님께 아뢴  말을 기록한 초고를  참조하여 조목조목 고증을  가해

'이방익의 일을 기술하다.'라는 글 한 편을 지으셨다. 그리고 이 글을 당일 입시했던  승지에

게 보내 임금님께 바치게 하였다.


5

이때에 서양의 천주교가 8도에 크게 번져 집집마다 물들어 실로 큰 우환거리였다. 아버지

는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여러 관아를 돌며 인사를 다니다가(원문은 역사. 새로 임명된 수령

이 중앙의 주요 관아를 차례로 돌면서 인사하는  것을 말한다.) 비변사 제조 남공철을 찾았

다. 남공은 조용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면천군수에 임명되신 건 임금님의  뜻입니

다. 부임하시면 책임이 적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남공은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부임해보니 고을의 병폐나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그다지 다스리기 어렵지 않았다. 다만

사교가 성행하여 물들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사교를 믿는  것이 적발되면 감영과 병영에서

느 즉시 죄를 물어 다스렸는데, 어리석고 무식한 백성들은 절의를 지키는 것인 양 생각하여

죽을 때까지 불복했으며 설사 사형에 처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는 형벌만

을 앞세워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관찰사에게 이런 글을 올리셨다.

"예로부터 이단이란 것이 처음부터 스스로를 사학이라고 한적이 있었습니까? 백성들은 누

구나 인륜을 좇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 선을 즐거워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모두 가

지고 있지만, 다만 정밀하게 가리지 못하고 일찍 분변해내지 못해 인의가 어그러져 양주(중

국 전국시대 학자, 자기중심적인 쾌락주의를 주장하였다.)와  묵적(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

상가인 묵자를 말한다. '겸애설', 즉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도 사랑하라는 설을 주장했다.)이

되니, 아비와 임금을 부정하는 주장이 초래하는 재앙은 이미 불교에서 입증된 바 있습니다.

지금 사학을 금한다는 자들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포박하여 관아에 꿇어 앉히고는 바로 형

구를 갖추어 호통치기를 '너는 어째서 사학을 믿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끌려온 백성은 한

마디로 대뜸 말하기를 '쇤네는 사학을 믿은 적이 없사옵니다'라고 합니다. 수령된 자들은 천

주교가 왜 사학인지 그 까닭은 알지 못하므로 힐문할 근거가 없어 스스로 말문이 막히고 맙

니다. 그러므로 일단 사학을 믿었다는 자백을 한 것으로 우격다짐을 받습니다. 그러면  간교

한 자는 그 진실되지 못함을  도리어 비웃고,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마음이 더욱 미혹되어

중얼거리기를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선이고  공경하는 것은 하늘인데, 이찌하여 나의  선을

막고 나의 공경함을 금하는 걸까?'라고 합니다.

근원을 제거하지 못하고 사교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다가 곧바로 몽둥이질을 하는 등 무도

한 형벌을 가한 후 윽박질러 예수에게 맹세케 하거나 천주를 배척하게 하여 그 향배를 보아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를 살피니, 마침내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예수를 위해 죽음으로써 절의

를 지키려는 자도 있는가 합니다. 그러나 이는 형벌을 남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관과 민

이 서로 다투는 일이 되니, 비록 일시적으로 승리를 얻어낸다  할지라도 앓는 바가 또한 많

습니다. 제가 밤낮으로 고민하며 깊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게 바로 이 점입니다."

아버지는 이후 누가 사학을 믿는다는 보고를 받으면 즉시 적발하여 관아의 종으로 붙들어

두고 매일 밤 업무를 파한 후 한두 명을 불러다가  반복해서 깨우치셨다. 반드시 부모의 천

륜과 은혜가 중하다는 것부터 말하여 그들이 믿는 사교가 천륜을 거역하고 윤리를 거스르는

까닭은 밝히면서 알아듣도록 자상하게 설명하셨다. 말씀하시는 내용은, 많을 경우 10여 조목

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풀어주셨다.  이렇

게 하자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천주교 관련  책자나 예수의 초상을 스스로 갖고 와서 바친

자가 전후 30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마을에서 행세하며 사교를 전파하던 자들이었다.  아

버지는 이들을 흩어서 여기저기 다니며 그 무리를 깨우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바친 책

자와 초상은 반드시 장날 백성들이 모일 때 아버지께서 친히 성의 남쪽 문루(성문에 설치한

다락집을 말한다.)에 올라가 백성들에게 유시한 후 불태우셨다.

그 후 신유년(1801, 순조 1)에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처벌한 일(신유박해)이 있었지만, 오

직 면천군만 아무 일이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백성들을 깨우치던 여러 조목을 친히 일기에

기록해두셨다. 그 내용은 분명하고 알기 쉬어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

계공이 아버지의 제문에서 말씀하신바  "세 가지 까다로운 문제를  옳게 밝히셨다."는 말은

바로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하지만 일기를 잃어버려 문집에 싣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아버지가 처음 부임하셨을 때에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을 적발하면 중죄인을 다스리는  곤

장으로 호되게 내리치게 하셨다. 그러나 곤장을 맞는 자들은  마치 목석처럼 눈썹도 까딱하

지 않았으며 조금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천주교에 물든 자들은 모두 똑같았다.  아버지

는, "형벌로 안되니 어쩌면 좋지?"라며 몹시 걱정하셨다. 그리하여  타일러 깨우치는 방법을

쓰기 시작하셨다. 매일 밤 근무를 마치신 수 대청 아래에 불러앉혀 반복해서  타이르셨는데,

처음에는 그저 "예예" 하기만 할 뿐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깨우쳐 말씀하시기

를 그치지 않자 그제서야 대답을 하였다. 꼭 처음부터 바로 깨닫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이

격동되어 조금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그 말의 실마리를 좇아 묻고 타이르고 이끌고 설명하기

를 반복하여 그치지 않으셨다. 그러면 필경 단꿈을 꾸다가 갑자기 깨어나듯 하였다.  깨달아

뉘우치게 되면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

야 깊이 뉘우친다고 생각하셨으며, 비로서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믿으셨

다. 아버지는 한번 이렇게 물어보셨다.

"지난번에 매를 맞을 때 정말 아프지 않더냐?"

"왜 아프지 않겠습니까? 다만 천주교에서 가르치기를 '아픔을 참지 못하는 모습으 보이면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므로 죽기를 무릅쓰고 참은 것일 뿐입니다."

아아, 형벌이 혹독하건만 굳게 견뎌 꿈쩍도 않던 자가 한마디 타이르시는 말에 깊이 뉘우

쳐 눈물을 흘리다니! 참된 학문이 아니라면 어찌 이미 깊이 미혹된  자를 이토록 빨리 깨우

쳐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당시 아버지를 모시고 있어서 그 시말을 직

접 목도했으므로 이 일을 퍽 자세히 알고 있다.


6

아버지는 어느 날 관아의 곡식 장부를  검열하시다가 '정리곡'(1795년 화성, 즉 지금의 수

원에서 베풀어진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위해 마련했던 자금 가운데 사용하고 남은 2만

냥을 8도에 각각 1천에서 3천 냥씩 분배하여 쌀로 바꾸어 환곡의 밑천이 되도록 한 것을 일

컫는다.)이란 명칭을 발견하셨다.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이는 어떤 곡식이냐?"

아전이 대답했다.

"을묘년(1795) 화성정리(1795년 정조가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일과

그것에 수반되어 거행된 각종 왕실행사를 일컫는 말. 이 행사를  치르기 위해 예산 10만 냥

을 마련하고, 1794년 겨울에 임시관청인 정리소가 수원의 장용영에 설치되어 행사의 진행을

맡았다.) 후에 남은 곡식을 여러 읍에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된 것이옵니

다.

"어떻게 보관하고 있으며, 출납은 어떻게 하느냐?"

"다른 환곡과 같이 보관하고 있으며, 출납도 함께 하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 곡식은 명칭이 다르거늘 어찌 이렇게 뒤섞어놓는단 말이냐?"

아버지는 즉시 창고의 쌀을 조사해 정리곡을 샅샅이 찾아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다시

키로 쌀을 까부르고 되질을 하게 한 다음, 특별히 창고  하나를 비워 그곳에 정리곡을 보관

하게 하셨다. 또한 '정리곡고'라는 네 글자의 현판을 새겨 창고 문에다 걸었다. 뭇  아전들은

괜히 일을 만들어 들볶는다고 여겼다.

다음날 한밤중에 홀연 읍내가 소란스러웠다.  왕명을 받들어 적간사(지방관아의 부정이나

불의를 적발하기 위해 국왕이 파견하던 관리)가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적간사는 횃불을 들

고 곧장 창고로 들이닥쳐 큰소리로 호령하였다.

"정리곡을 잘 보관하고 있는지 조사하라는 어명이오!"

적간사는 횃불로 창고를 비춰보았다. 창고 문에 '정리곡고'라는 네 글자의 현판이 걸려 있

지 않은가. 이를 보자 그는 등등하던 기세가 팍 꺾였다. 그는 창도를 열어두어 포대를  검사

한 다음 말했다.

"썩 잘 보관되어 있어 염려할 게 없군요."

적간사는 말을 달려 다른 고을로 떠나갔다. 당시 여러  고을의 아전들은 대부분 정리곡을

다른 곡식과 뒤섞어 농간을 부림으로써 부정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도내의 수령 두어 명도

죄를 범했다.

임금님께서는 이러한 보고를 접하자 즉시 부정을  적발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며, "내가 여

러 읍에 정리곡을 내려준 건 실로 환곡을 보조하라는 뜻에서였다. 그렇건만 이로 인해 간악

한 폐단이 생기다니 면목이 없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임금님께서는 마침낸 정리곡을 없애버리셨으며, 부정을 범한 수령들을 처벌하였다. 그밖의

고을들도 정리곡을 일반 환곡과 뒤섞어놓았다고 해서 견책을 당하였으며, 전후에 일을 담당

했던 아전들이 모두 벌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면천군의 아전들은 아버지를 귀신 같다

고 여겼다. 아버지는 일을 처리함에 잠시도 적당히 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이와 비슷한 일이

매우 많았다.


7

이 해 섣달에 있었던 수령 근무성적 평가에서 아버지는 '중'이라는 좋지 않은 성적을 받으

셨다.(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령의 치적을 심사하여 1번이라도 중이 나오면  승진을 허락하지

않으며, 2번 중이 나오면 파직한다.)

당시 충청감사 한용화는 아버지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그는 연분(한  해 농사의 작황에

따라 매년 토지를 상지상에서 하지하까지 9등급으로 나누던 제도, 아래 등급으로 갈수록 세

금이 적었다.)을 더 낮추어달라고 청하는 장계를 누차 올렸으나 임금님의 윤허를 받지 못했

다. 그래서 판관(각 감영, 유수영 및  큰 고을에 둔 종5품 벼슬로서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

김기웅과 이 일을 상의하였다. 김공은 아버지와 친구였다.

김공이 말했다.

"장계의 내용이 구구하지 못해 간곡하지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면천군수와 상의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감사가 물었다.

"면천군수가 이런 글을 잘 짓나요?"

"이 친구가 조정에 올린 글에는 육선공(당나라의 육지를 말함. 시호가 선이었으므로 육선

공이라 부른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임금에게 자신의 경세책을 자주  아뢰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그가 임금에게 올린 글들은 후대에 '육선공주의'라는 책으로 엮어졌다.)의 유법이 있

습니다. 그는 안의에 있을 때 도내의 옥사를 판결하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옥사의  정

황을 분명하게 논술하여 조정에 올릴 때마다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 사또께서 급히 편지

를 넣어 장계를 대신 지어달라고 청하면 조정의 윤허를 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감사는 김공의 말을 좇아 즉시 사람을 보내 글을 청하였다.  아버지는 이 일이 민생과 관

련된 일인지라 글을 지어주었다. 과연 조정에 글을 올리자 윤허가 내렸다. 감사는 몹시 기뻐

하였다. 얼마 후 아버지는 도내 옥사를 심리하는 관원으로 차출되어 감영에 가 머물게 되었

다. 감사는 매일밤 술자리를 마련해 아버지를 불러 은근한 정을 표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다지 기뻐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 저녁, 감사는 느닷없이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그 가부를 함께 의논해

보자고 하였다. 그 종이는 바로 도내 수령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한 글귀를 적어넣은 것이었

다. 아버지는 "이것은 제가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외다."하고 마다하셨다. 아버지는 그 후 병

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면천으로 돌아오셨다. 이에 감사는 버럭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속마음을 통하고자 하였거늘, 어찌 이토록 나를 무시한단 말인가!"

감사는 아버지가 심리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버렸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모시고 온 아

전을 문초하여 벌을 주었다. 아버지는 여러 번 사직서를  올렸지만 감사는 번번이 허락하지

않았다. 급기야 근무성적 평가가 좋지 않게 나왔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러했다.


다스림은 구차하지 않으나

가끔 꾀병을 부린다.


아버지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혹 속이  좁다고 여길까봐 할 수 없

이 휴가를 청해 서울에 올라가 기다렸다. 조정에서는 병의 상태를 알리는 글을 올리라며 야

단이었다. 게다가 임금님께서 특별히 엄한 분부를 내려, "의금부 나졸이 압송하여 한강을 건

너오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아버지는 부득불 관아로  되돌아오셔야 했다. 문집에 '공주판관

김응지에게 답하는 서한'을 비롯한 여러 통의 편지가 실려 있어 이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김공은 자기가 주선을 잘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책하는 말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익살을 부리며 이렇게 답하셨다.

"자네 역시 나를 모르는구먼, 내 어찌 쩨쩨하게 수령자리를 얻고 잃는 따위에 괘념하겠는

가?"


8

다스리는 방식은 안의에 있을 때와 비슷했다. 부임하신  지 몇 달 만에 행차시에 벽제(벼

슬아치가 행차할 때 "물렀거라!"하고 크게 외쳐 행인들로 하여금 길을 비키게 하는 것을 일

컫는 말.) 소리 등 번거로운 의례를 없애버리거나 간소하게 하여 관아가 조용해졌다. 관내에

일이 없어 수령의 도장이 상사 속에서 잠자는 일이 며칠씩 되곤 하였다. 그리고 몇 달씩 감

옥이 텅 빌 때도 있었다. 다만 살인사건의 용의자 한 사람만이 오랫동안 홀로 빈 옥에 갇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의 억울한 사정을  심리하여 장차 다시 판결하고자 하셨다.  아버지는

그가 초췌한 모습으로 추위에 떨며 굶주리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목에 씌운 칼과 발에 채운

차꼬를 풀어주어 간수 방에서 지내게 했다. 그는 감동하여 도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9

기미년(1799, 연암이 63세때) 봄에 흉년이 들어 진휼(흉년이 났을 때  관에서 곤궁한 백성

을 구휼하는 것을 일컫는 말)을 하였는데, 안의에서의 전례에 따라 사진(관아가 아닌 개인이

사사로이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일컫는 말)을 실시했다.


10

당시 임금님께서 남당 한원진을 모신 서원에 제사를 지내라는 분부를 내리셨는데, 아버지

가 집사(제사의 절차를 주관하여 의식을 진행하는 사람)로 차출되었다. 그때 함께 차출된 호

서지방의 수령들은 남당의 성리학설이 농암 김창협, 도암 이재 등 여러 선현들의 학설과 다

르다고하여 모두 병을 핑계되고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설의 차이를 따질 필요는 없다. 남쪽 땅에서 우뚝  몸을 일으켜 어진이를 스승으로 받

들어 한 지역 학자들의 으뜸이 되었으니, 어찌 책을 잘 읽은 군자라고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마침내 서원에 가서 제사를 받들었다.


11

면천군 남쪽에 '양제'하는 제방이 있었는데, 고을로 흘러드는  물을 가두어 모아두는 곳으

로 그 물을 사용하는 농토가 매우 넓었다. 그래서 군민들을 동원해서 매년 둑을 손보았지만

장마를 겪으면 곧 허물어져 백성들이 피해를 보았다. 아버지는  부임하신 초기에 그곳에 가

이리저리 살펴보신 후 봇물이 터지는 원래의 수로를 막고 따로 제방 왼쪽의 바위가 많은 곳

을 뚫어 물을 가두고 내보내는 수문으로 삼게 했다. 이후로  제방이 무너질 염려가 아주 없

어졌는데, 백성들이 지금도 이 일을 칭송한다고 한다.


12

성 동쪽 향교 앞에 버려진 연못이 있었다. 사방 1백 보쯤 됐는데, 황폐해진 지 여러 해 되

어 물을 가둘 수 없었다. 아버지는 술과 음식을 마련한  후 백성들을 모집해 연못을 준설하

여 도랑물이 그 속으로 흘러들게 만들었다. 이에 물이 가득 고여 넘실거렸으며, 가뭄이 들어

도 물이 줄지 않았다. 연못 한가운데는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6각의

초정(풀로 지붕을 인 정자로 썩 운치가 있다.)을 세워 '건곤일초정'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

는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주련으로는 다음 글귀를 걸었다.


그 누가 왕래하나? 무회씨로다.

신령한 태극도에 대해 이야기하리.


그리하여 아버지는 이 정자에 어진 이를 구하는 뜻을 붙였다. 그리고 부교(교각을 세우지

않고 널조각을 걸쳐놓은 다리.)를 들어올려 작은 배를 띄웠는데 아득하니 은자의 정취가 있

었다. 한번은 향교에서 석전(공자를 제사지내는 의식)을 지낸 후 유생들을 거느리고 이 정자

에 올라 말씀하셨다.

"이곳은 향교와 가깝고 물에 빙 둘러싸였으니 학궁(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립한 대학

으로, 조선시대의 성균관이 이에 해당한다. 학궁을 지을 때에는 그 주위에 도랑을 파서 물이

흐르게 했다.) 주위로 물이 흐르게 한 뜻과 부합된다. 또한 '주역' 태괘의 형상이 있다."

아버지는 여러 유생들과 '논어'의 '위정'편을 강론하셨다. 강론이 끝나자 동쪽에서 개를 삶

아 옛날의 향음주례(원래 중국 고대의 제도, 제후의  향대부가 3년마다 어진 이를 손님으로

초청하여 베푸는 음주의 예.)를 본떴으며, 각기 시를 읊어 기념하게 하였다.

연못 주위에는 수양버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를 죽 심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오래지 않아 여길 떠나겠지만 이는 이 지방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당시 연못 아래에 있는 백성들의  논밭이 수만 묘였는데, 모두 그  관개의 혜택을 입어서

매년 가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13

임금님의 뜻을 받들어 농서를 지어 바치셨다.

아버지는 옛날 연암골에 들어가셨을 때  농서를 즐겨 읽으셨다. 그래서 이  책 저 책에서

발췌해놓은 종이 쪽지가 상자에 가득했다. 이 해(1799) 정월에 임금님께서는 특별히 농업을

권장하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임금의 말씀)을 내리셨다. 그리하여 관찰사와 수령들로 하여

금 저마다 농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아버지는 마침내  예전에 발췌해놓은 글에 당시느이

견해를 덧붙이는 한편, 중국에 가셨을 때 견문한 사실  가운데 우리나라에 시행함직한 것들

을 추가해 14권의 책을 엮으셨다.  책 이름을 '과농소초'라 하고  다로 지은 '한민명전의' 한

편을 그 부록으로 붙여 임금님께 올렸다.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은 모두 아버지가 일찍부터

연구하신 바로 우리나라에 한번 시행해봄직하다고 여겼던 것들이다.

임금님께서는 언젠가 신하들과 말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즘 경륜을 펼친 좋은 책을 얻어 소일하고 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농서대전은 박지원으로 하여금 편찬케 해야 할 것이야."

임금님은 그 후 각신(규장각의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의 직책을 가진 신하들을 가리

킨다.)들에게도 아버지의 책에 대해 여러 번 칭찬하셨으며, 이윽고 이런 분부를 내리셨다.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가 몹시 편협하도다! 과거시험 합격여부만을 따지고 있으니."

그러자 예전부터 아버지를 헐뜯던 자들도  공경스런 태도를 취하며, "이  분의 글은 과연

모두 실용의 학문이다."라고 하였다.

아아! 세상을 경륜하고 구제하는 학문을 지닌 아버지께서 글을 숭상하는 임금님을 만났으

니, 만약 경신년에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아  아버지로 하여금 서국(관의 장서를 보관하

는 곳)에서 책을 저술케 하는 임무를 맡기셨다면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강구하여

태평성대의 문헌으로 남긴 것이 어찌 이처럼 적막한 데 그쳤겠는가. 아아! 애통한 일이다.


14

관아에서 공무를 보다가 겨를이 생기면  늘 주자의 편지글과 육선공이  쓴 주의(상소문을

일컫는 말)를 읽으셨다. 산보하러 가실  적에도 아이 종에게 그 분들의  책을 두어 권 들고

따르게 하여 목적지에 이르면 책을 펼쳐보셨다.


15

강유안은 호서의 고결한 선비다. 아버지는  면천에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편지를 보내어

그를 초청했다. 그는 늘 거친 베옷에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선유들의 일과 행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또 모습은 공손했지만 눈빛이 도도했으며, 뜻이 높아 좀스럽지 않았다.

아버지의 벗이었던 나걸은 뜻이 높아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았으며 시를 잘 하고  글씨를

잘 썼는데, 당시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 행인 나열은  호가 해양인데, 행실과 문예에

옛사람의 풍모가 있었다. 아버지는 면천에 부임하시자마자  그를 방문해 지난 일을다정하게

이야기하셨으며, 자주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해양은 대흥에, 강유안은 해미에 살

모 있었다.

유한집, 유학금 두 사람은 총명한데다 부지런히 독서했으나 나는 것이 정밀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들로 하여금 나의 거처에 출입하게 하면서 붓을 들어 글을 초하게 하셨

다. 그러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글이 크게 나아졌다. 그 후 유한집은 서울의 공경들 사이에

노닐며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유학금은 고향에 있으면서 문장에 능하다고 일컬어

졌다. 후에 아버지가 양양에 부임하실 때 학금은 따라갔다.


16

지산 유화는 젊어서부터 글을 잘하여 선왕(정조)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작

은 죄로 인해 면천에 유배왔는데  여기에는 임금님의 은밀한 배려가  있었다. 임금님께서는

아버지와 지산이 인척사이였으므로(지산의 형인 유영이 박종채의 장인) 서로 의지하고 도와

줄 만한데다가 지산이 아버지를 좇아 배우면 스스로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셨던 것

이다. 아버지는 때때로 연못의 정자에 산보 가실 때에 그를 불러 함께 담소하곤 하셨다.  그

리고 그의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 가히 옛사람의 경지를 기약할 만함을 사랑하셔서 늘 진중

하게 마음을 닦고 조그만 성취에 만족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지산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식견은 면천에 유배갔을 때 크게 진전되었다. 연암 선생의 말씀은, 비단  책에 대해

토론할 때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우스갯소리에도 모두 이치가 있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연암 선생이 사람을 깨우치고 계발해주는 방법은  대개 우스갯소리에 있으니, 풍류가 넘

치고 재기가 번득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만약 선생의  속뜻을 모르고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듣는 사람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연못에서 노닐 때면 나와 지산으로 하여금 각건(옛날의 처사나 은자가 쓰던 두건)에다 둥

글부채를 들게 하셨다. 배를 띄워 물길을 오르내리셨는데, 책상 위에는 붓, 벼루, 시집, 향로,

다기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배의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시며, "우리가 그림 속에서

경치를 구경하는구나"라고 하셨다.

훗날 자신은 아버지를 애도하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일찍이 남쪽나라 유배와서는

공과 함께 초정에 오르곤 했지.

고상한 그 풍류 어제 일 같아

버드나무 매미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17

경신년(1800, 연암이 64세때) 6월에 정조께서 승하하셨다. 아버지는 몹시 슬퍼하시며 아침

저녁으로 객사(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둔 곳)에 걸어가셔서 북망하여 통곡하셨다. 성복

(초상이 난 지 사흘이나 닷새 뒤에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하는 날이 되자 관리들과 백성

들을 거느리고 가서 통곡하셨는데, 그  소리가 구슬펐다. 무러나오실 때 그만  쓰러지셨지만

그래도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으셨다. 곡하러  온 아전들과 백성들을 문에서  대하시고 한참

동안 슬피 통곡하셨는데 마치 서로 조문하는 것 같았다. 이  때문에 모인 사람들은 더욱 슬

퍼져서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사사로이 이런 말쓸을 하셨다.

"나는 하잘것없는 기예라 할 문예로 인해 임금님의 은혜로우신 분부를 여러 번 받들었다.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임금님의 융성한 지우(임금이 신하를 알아주는 것을 일컫는 말)

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은혜를 조금도 갚지 못했으니 이것이 나의 지극한 한이다."

뒤에 어떤 분이 아버지께 물었다.

"선왕의 사랑하심이 그처럼 두텁고도 지극하셔서  입신할 방도까지 말씀해주셨는데, 공이

그 뜻을 받들지 않은 건 어째서였습니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임금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내 어찌 분부를 받들어 스스로 힘쓰지 않을 리 있겠

소. 그러나 직접 어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소이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은 신하된 자의 큰

도리이므로 조금도 구차하게 행동할 수 없는 법이지요. 내가 주저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라

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잠시도 황공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내 어찌 임금님의 뜻을 저

버렸겠소?"


18

관찰사(김이양)가 아버지를 정조대왕의 진향문(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때나 상왕등의 국상

때 그 신위나 영전에 향을 올리는 일을 진향이라 하고, 그때 지어올리는 글)을 짓는 제술관

(의례에 쓰이는 글이 지어 바치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으로 임명하셨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으셨다.


천년 만에 나오는 성인

동방에 탄생하사

기자의 홍범 다시 펴지고

문운이 부흥했네

공자의 생각, 주공의 마음

이어받고 본받아서

큰 꾀와 너를 책략이

한과 당보다 나았다네

24년 다스림에

강건한 덕 널리 펴시고

부모 호칭 바로잡아

사모의 정 깊으셨네

세자였던 부친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음에

강포한 자들 처벌하여

대의를 밝혔으니

백왕의 으뜸이라

벼슬 내리고 벌을 주리

단비 같고 서릿발 같네

누가 감히 의심하고

누가 감히 속이겠나?

지지하고 반대하는 그 사이에

옳고 그름 드러나네

저 1만 3천 사람

어찌 그리 날뛰면서

무리 지어 윽박지르며

인륜을 어지럽히나?

말세 풍속 어두우니

술에 취해 자빠진 듯

부류가 서로 다르니

어찌 마음 같이할꼬?

이해와 화복이

미친 것의 원인이라

그 까닭을 궁구하면

망령된 생각 때문일세

넘실넘실 미친 물결

그 누가 막을손가?

크고 작은 이치 모두

조그만 데서 잘못이 생기네

대의를 지키는 자

상서롭고 길하다면

대의를 등지는 자

올빼미요 승냥이라

성왕이 남긴 거룩한 문물

그 예법을 뉘 지키리?

곧고 바른 임금의 법도 세우니

도와 더불어 아름답네

아아! 그 지극한 덕

어찌 가히 잊을손가?

규장각을 세우시고

장용영을 창설하사

문무를 두루 갖춰

계책이 원대했네

온갖 제도 바르게 된 건

성왕의 뜻 받든 결과

형벌을 삼가고 농사를 중히 여기며

백성을 늘 근심하사

세금 덜어주는 은혜 베풀고

농서 구하는 윤음 내렸네

혹한과 무더위에도

제사 몸소 주관하고

특히 상신을 중히 여기사

밝은 덕이 향기로웠네

1백 권 홍재신서

계책이 넓고 크네

정주 학문 으뜸삼고

복희, 황제 계승하여

큰 학문을 이룩하사

도가 우리 동국으로 옮겨왔네

패도를 무리치고 사악함을 바로잡고

녹을 긁어내어 티끌을 가려냈네

선대 임금 물려주신

존왕양이 준수하고

존주휘편 편찬하사

춘추대의 드높여서

백성과 선배들에게

큰 도를 제시했네

지금의 천주교는

양주, 묵적보다 해롭거는

사악한 책 태워버려

백성을 사람답게 만들었네

이단을 배척한 건 맹자같고 

금수를 내친 건 우임금 같네

옛 성현을 계승하여 앞날을 열어

동궁에게 큰 복을 끼쳤네

송축하는 말 비등하고

찬미하는 노랫소리 높았었지

요임금과 순임금은 한 몸이라

옥새과 용상에 있네

천만 년 수를 누려

길이 강녕하렷더니

어찌하여 하룻밤에

갑자기 승하하신단 말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온 나라가 부모를 잃은 듯

남쪽 땅에서 부음 듣고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땅 끝까지 절을 하니

우주가 아득하네

산이 울고 강이 울고

피눈물이 눈에 가득

임금님의 어지심을

백성들 슬퍼함에서 알 수 있네

왕대비께서 수렴청정을

희정당에서 베푸시니

원우의 일에 견줄 만하고

태강의 아름다움을 이으셨네

어린 임금 보우하사

좋은 정치 펼치시리

하늘이 낸 화성땅엔

가래나무 뽕나무 무성코나

능침이 그 곁이니

칼과 신을 간직하리

.......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이르셨다.

"천고의 옳음과 그름, 정의와 사악함, 음과 양, 흑과 백은 구별하기가 어렵지 않으며, 또한

많은 말이 필요없다. 그것은 단지 의리와 이해에 의해 나뉠 따름이다. 의리란 곧 공변된  천

도이다. 이는 인간이 지닌 도덕적 본성상 누구가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다만 세속의 사사로운 이해에 빠져서 우리들이 알지 못할 뿐이

다. 이해란 곧 화복이다.

돌아가신 임금님의 지극한 덕과 큰 업적은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예법을 엄히

하고 대의를 밝히신 일은 가히 천지의 도와 어긋나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물어도 틀림이 없

다 할 것이며 100세 후의 성인이라 할지라도 옳다 하리니  100왕의 으뜸이라 할 만하다. 또

한 학문이 올바르고 의리가 정밀하셨으니  누가 감히 현혹하거나 어지럽힐 수  있었겠느냐?

지금 내가 하찮은 글을 지어 30년 동안 가슴속에 간직해온 생각을 쏟아내었구나. 하지만 이

글은 본래 '의리' 두 글자를 넘어서지 않는다."


19

8월에 양양 부사로 승진되셨다. 양양부사는  본래 문과에 급제한 자라야  임명될 수 있는

자리였다. 음관(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벼슬하는 관원을 일컫는 말)으로서

양양부사에 임명된 것은 아버지가 처음이셨다. 당시 대궐에 들어와 임금님께 인사드리지 말

고 곧장 부임하라는 분부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굳이 상경하여 사은숙배하고자 하셨다. 이에

여러 승지(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하부의 보고나 청원 따위를 임금에게  아뢰는 일을 맡아

보는 승정원의 한 벼슬)들이 나무랐다.

"이미 사은숙배가 필요없다고 했거늘 뭣 때문에 신청하셨소이까? 장차 그  죄를 물어야겠

소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골 고을에서 수령의 직무에 얽매여 있다 보니 임금님께서 승하하셨는데도 대궐에 나앙

가 곡을 하지 못했소이다. 이제 또 멀리 영동 지방으로 가게 되었거늘 혼전(임금 또는 왕비

의 국장을 치른 뒤 3년 동안 신위를 모셔두는 궁전)에  하직조차 못하다니요! 만일 벌을 받

아야 한다면 달게 받겠소이다."

그러자 승지들이 서로 말했다.

"인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맞는 말 같구려."

그리하여 죄를 묻지 않았다.

이때 대궐에 들어와 알현하라는 분부가 내렸다. 또, 바로 하직하고 떠나라는 분부가  내렸

다.


20

9월에 양양에 부임하셨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으셨다. 그리하여  관직

에 계시긴 했지만 억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심정이셨다.


21

양양은 바닷가 후미진 고을이었으므로 곡식 장부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이 곡

식을 훔치고 빼돌리는 탓에 창고에는 곡식이 한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환곡의 방출과 수납

을 기록한 장부는 전부 허위였다. 고을 원이 아전들에게 포흠을 갚으라고 하면 아전들은 그

때마다 달아나겠다고 위협하였다. 아버지는 아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타이르셨다.

"너희들이 걸핏하면 도망가버리겠다고 하는데 그 실정이 참으로  딱하다. 그러나 고을 원

이 할 일이란 군정과 전세와 환곡이거늘 창고가 텅 비어 있고서야 고을 원은 두어 뭣하겠느

냐? 너희들이 달아나고자 한다면 모두 달아나서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도록 하여라. 나한

테는 본래 나를 따라온 종이 하나 있으니,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장계를 올려 죄를 청한 다

음 돌아가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면 그만이다."

아버지는 마침내 공무를 일체 돌보지 않고 조그만 방에 거처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전들이 빼돌린 곡식을 도로 회수하지  못한다면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자처할

수 없다."

얼마 후 아버지는 당신의 녹봉을 떼어내 아전들에게 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면서 녹봉을 받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너희들이 각자 따로 포

흠을 갚고자 한다면 끝내 갚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많이 내고 누가 적게 내는가를 따

지지 말고 힘을 모아 나간다면 티끌  모아 태산이 될 것이다. 내가 낸  이것을 그 시작으로

삼았으면 한다. "

이에 아전들이 모여 서로 의논하였다.

"원님이 포흠을 갚는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러고도  우리가 포흠을 갚지

않는다면 원님을 뵐 면목이 없다."

마침내 아전들은 갖고 있던 물건을 팔아 포흠을 갚아나갔다.  고을의 부유한 백성들도 혹

자신의 재물을 덜어 도와주었다. 그러자 몇 달이 채 안되어  관가의 곡식 창고가 모두 채워

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동헌에 나와 공무를 보셨다.


22

양양에는 벌목을 금하는 황장목(관을 짜는 데 쓰는  질이 썩 좋은 소나무. 임금을 비롯하

여 왕족의 관은 반드시 이 나무로 짰다.) 숲이 퍽 많았다. 매번 조정에서는 감독관을 파견해

황장목을 베게 했는데 양양부사에게는 으레  사사로운 이익이 많이 떨어졌다.  비록 청렴한

수령이라 할지라도 황장목을 남겨 훗날 자신의 장례 때 쓰게 하려 했다.

아버지가 양양에 부임하시자 친지들은 황장목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셨다.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본심을 아느냐?  상고시대에는 얇은 관으로 검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너희가

혹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후일 나의 장례 때 황장목을 쓸 생각을 한다면 이는 내 뜻을

크게 거스르는 일이다. 황장목으로 나의 관을 짜는 일도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거늘, 직위를

이용해 이익을 얻는 일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황장목은 감독관의 입회하에 벌목되어 대궐에 진상되었다.  그러나 진상하고 남은 널빤지

들이 온 고을에 낭자했다. 아전들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아버지는 아무아무 곳 시냇가에 옮

겨놓으라고 하셨다. 모두들 그 영문을 몰랐다.  아버지는 며칠 후 몸소 그 시냇가에  가셔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다리가 없어 사람들이 다니는 데 괴로워한다. 이  나무로 다리를 놓으면 몇 년은

편리하게 지낼 수 있을 게다."

그리하여 널빤지를 깔아 다리를 설치하였다.

그 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유언에 따라 해송으로 만든 널(이른바 잣나무 널빤지)을

썼다. 그걸 보고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3

아버지는 신유년(1801, 연암이 65세때) 봄에 벼슬을 그만두고 상경하셨다.

양양 천후산 아래에 신흥사가 있었으니 강원도의 큰 사찰이었다.  그 절의 창오와 거관이

라는 중이 서울 근교의 산사에 출입하면서 궁속(각 궁궐에 속한 원역 이하의 노복을 이하는

말)과 결탁하여 내수사(궁중에서 쓰는 쌀,  베, 잡물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

청)의 공문이나 궁가(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 등을  가리키거나 그 집을 가리킨다.)의 명함

을 얻어내어 그럴듯한 말을 꾸며 사람들을 현혹했으며, 관리를 윽박지르고 능멸하였다. 그리

하여 선대 임금의 글이라느니 원당(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그 명복을  비는 법

당)에 봉안한다느니 큰소리를 쳤으며  심지어 관속을 구타하고  사람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분개하여 말씀하셨다.

"행패가 이런 데도 그냥 내버려둔다면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게 된다!"

마침내 감사에게 이 문제에 대한 아버지의 의견을 첨부한  보고서를 올리셨다. 그러나 감

사는 꺼리는 바가 있어 눈치를 보며 얼버무리기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아버

지는 이렇게 탄식하셨다.

"궁속과 중들에게 제압되는 고을 원이 아전들과 백성들을 어찌 다스린단 말인가!"

이에 아버지는 상경하여 병을 핑계로 사임하셨다.

후에 강산 이공(이서구)이 여러 차례 이조판서, 호조판서, 선혜청 제조를 지냈는데 결원이

생길 때마다 번번이 아버지께 자신의 아우를 보내 벼슬할  뜻이 있는지 여쭈어보았다. 아버

지는 사례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늙었소이다. 게다가 나라에서  고을 원의 임기를 둔  것은 청렴함을 기르라는

뜻이외다. 나는 임기가 끝나기 전에 고을 수령을 그만두었거늘, 그리 큰 허물이 없음을 다행

으로 생각하고 있다오. 그러니 나로 하여금 다시 벼슬길에 나서게 하실 건 없소이다."


24

아버지는 남에게 자신의 치적을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으니, "작은 일을 갖고 스스로

자랑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라고 하셨다.

안의에 계실 때 일이다. 아버지는 도내를 순시하던 관찰사를 해인사에서 맞이하셨다. 당시

그 자리에는 10여 명의 수령들이 모였는데 저마다 누누이 자기 고을의 폐단에 대해 여쭈었

다. 감사가 아버지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유독 안의현감은 아무 말이 없으니 어찌된 일이오?"

아버지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폐단이 하나 있기는 하오나 바로잡는 방책이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번 들어볼까요."

"군사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임진년 때처럼 왜구가 갑작스럽게 쳐들어온다면 이른바

속오군(조선후기의 핵심적 지방군의 하나)은 지금  좌수(주, 부, 군, 현에 둔  향청의 우두머

리)가 이끌고서 소속 진관(조선시대에 지방을 방위하기 위해 만든 군사 조직. 연안의 요지와

내륙지방에 거진을 세우고 그 주변의 여러 고을을 그 밑에 나누어 소속시키는 체제로 되어

있었다.)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으니 현감  휘하에는 단 한명의 군졸도 없게  됩니다. 그러니

장차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혹 '아전과 노비로 군대를 만들어 성을 지키면 되지 않나?'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안의의 아전과  노비는 그 수가 채 2백명도 되지  않습니

다. 게다가 평소 훈련도 시키지 못했으며 칼과 창도 없으니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온다면 이

때에 비록 제갈량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묘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형세상 어

쩔수 없이 관아 위에 있는 대숲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경우 필시 '강목'(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가리킨다. 주자는 이 역사서에 춘추대의와 명분을  강조하였다.)의 서술방식

에 따라 '안의현감 박아무개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라고 해서 대서 특필할 터이니 이 어찌

지극히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안의는  고을이 생긴 이래 돌 한조각 쌓은  일이

없거늘 처음부터 버리고 달아날 성이라는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저의 가장 큰 걱정

거리입니다."

모인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웃었다. 아버지는 당시  감사가 의견을 물었으므로 아무렇게나

말을 꾸며 우스갯소리를 하셨지만, 기실 문제로 느낀 점을 우스갯소리로 표현하신 것이었다.

좌중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버지의 이 말을 자못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도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지방 수령의 봉록을 화제로 삼아 어느 고을이 많고 어느 고을이 적다

느 등 서로 비교하는 말들을 하는 걸 들으시면 그저 잠자코 계셨다.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돌아오신 후 이웃에 사는 여러 분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을 때다. 그

분들은 이전에 자기가 다스리던 고을 봉록의 많고 적음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다가 아버지더

러 양양은 어떻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농담으로 이렇게 대꾸하셨다.

"1만 2천 냥 받았소이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고말고요!"

그 분들은 반신반의하며 어서 자세히 말해보라고 성화였다. 아버지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

하셨다.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1만 냥 가치는 되고  녹봉이 2천 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1만

2천 봉과 겨룰 만하지 않소!"

이 말에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25

임술년(1802, 연암이 66세때) 겨울, 장간공(조부 박필균)의 묘를 포천으로 이장하다가 유씨

측이 일으킨 산변(조상의 산소가 남에 의해  파헤쳐지거나 훼손당하는 일을 뜻한다. 여기서

는 장간공의 묘를 유씨측이 파헤친 일을  말한다.)을 만났다. 애초 아버지는 정해년(1767)에

산송을 만나 급하게 임시로 부친의 장례를 치르셨던바, 장차 좋은 땅을 구해 이장할 계획이

셨다. 그러던 중 이때에 이르러 포천  기지리에 있는 산을 사서 먼저 장간공을  이장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유한준이 그 사촌동생을 사주하여 모래 묘를 파내게 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송사하고자 하여 이렇게 따졌다.

"이 산에 유씨의 분묘가 있소이까?"

한준이 대답했다.

"없소이다."

"이곳이 유씨의 땅이오니까?"

"아니외다."

"그렇다면 묘를 파낸 이유가 어디에 있소이까?"

한준은 그의 선조가 여묘살이하던 초막  옛 터가 그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한다면 시비와 곡직은 재판관이 가려줄 일이 아니오? 선조의 옛 터가 증거라면

왜 소송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갑자기 이처럼 패악한 짓을 하셧소?"

한준이 대뜸 대꾸하였다.

"나는 송사나 법 같은 건 모르외다! 파낼 '굴'자만 알 뿐이오."

마침낸 우리 집안에서는 경기도 감영에 송사를 제기하지 한준은 경기감사에게 편지를  보

냈는데, 그 편지 내용은 모두 사리에 맞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유한준은 60년 동안 글을 읽은 선비거늘  어째서 느닷없이 이런 일을 했을까?  더군다나

두 집안은 대대로 사이가 좋았는데 어찌 차마 무덤을 파낸단 말인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

이다."

이에 앞서 유씨 집안의 종손인  구환이 자식도 없이 일찍 죽었다.  한준은 과부로 지내던

구환의 노모를 업신여겨 몰래 사람을 시켜 구환의 무덤을 파내게 했다. 구환의 노모는 통곡

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서 억울함을 하소연했으나 한준은 그 일을 중지시키지 않았

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환의 관을 파내어 장간공의 묘 뒤쪽  한 자쯤 되는 곳에다가 옮겨놓

았다. 당시 땅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으므로 눈을 끌어모아 봉분을 만들고 그 위를 거적으로

덮었다. 한준이 이런 짓을 한 저의는, 이 산에 유씨 집안의 무덤이 있음을 입증할 만한 아무

런 증거가 없었으므로 구환의 무덤이 여기에 있음을 내세워 남으로 하여금 무덤을 쓰지 못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의 이치를 갖고 다툴 일이 아니로구나!"

그리하여 아버지는 소송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다른  산을 구해 이장하려 하셨다.

마침내 이장할 날을 택일하여 바야흐로 아흐레 남겨두고 있었다. 한준은 이 소식을 듣자 부

랴부랴 그 문중 젊은이들 중 빈천하고 불량한 자들을 꼬드겨 이장하기 전에 다시 묘를 파내

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관이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너무

심하구나! 처음에는 그가 오로지 묏자리를 빼앗으려고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짓을 보니 너무도  악독하다. 이는 필시 어떤 세력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미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주의 성곡으로

이장하셨다.

유한준은 소시적에 고문을 본떠 글을 지어 선배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 한번은 자

기가 쓴 글을 아버지에게 평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편지로 이렇게 대답하셨

다.

"문장은 참 기이하군요. 그러나 사물의 명칭에 차용어가 많고 인용한 글들이 적실하지 못

하니 이것이 옥의 티인가 합니다. 만일 모든 왕조의 도읍지를 다 장안이라 부르거나 역대의

삼공들을 죄다 승상이라 일컫는다면 이름과 실상이 뒤죽박죽이 되어 도리어 비루하고  추하

게 될 것이외다. 이는 마치  동명이인의 전공이 좌중을 놀라게 하거나  못생긴 여인이 서시

(월나라의 미인 이름, 그녀는 얼굴을 찡그린 모습도 아름다웠다  한다.) 흉내를 내어 얼굴을

찡그리는 격이외다."   

한준은 이 편지로 인해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가 중년이래 날마다 비방

을 받은 것은 모두 이 자가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것이었다. 훗날 당시 산변의 내막을 유

씨 집안 사람한테서 자세히 들었는데, 한준이 그런 짓을 한 까닭은 전적으로 아버지께서 젊

을 적에 그의 문장을 인정하지 않은 데 있으며, 한준은 무덤 쓰는 일을 빌미로 아버지를 자

극하여 분노케 함으로써 관에 소송장을 올리게 만들 작정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경주 김씨

가 권세를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본디 이들과 사이가 안 좋았으므로 한준은 원한을 품고

있던 터에 이 때를 틈타서 아버지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음험한 자인가!

이 자는 우리 집안과 100대의 원수다.

아버지는 정해년(1767) 이후 묏자리 쓸 산을 구하여 부조의 산소를 옮기고자 하는 생각을

늘 갖고 계셨다. 그러나 또한 항상 스스로 이렇게 경계하셨다.

"차라리 들판 한가운데다 무덤을 썼으면 썼지 어린아니 하나라도 '왜 이곳에 무덤을 쓰느

냐?'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이

다."

그리하여 비록 주인 없는 무덤이 있는 산이라 할지라도 그런 산은 피하여 돌아보지도 않

으셨다. 이런 까닭에 36년 만에야 겨우 한 군데 빈 땅을 얻었건만 마침내 이런 망측한 변을

만났으니 이 또한 운명이란 말인가.


26

장간공 행장을 완성하셨다.

아버지가 만년에 짓고자 하신 글은  장간공 행장, 조부모 및 백부의  지장, 유안처사(이보

천)의 묘지, 유상공(유언호)의 비문 등이었다. 그러나 아직 착수하시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

폅 아버지는 나로 하여금 붓을  잡아 부르는 대로 받아적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가까스로

장간공 행장 한 편을 완성하셨다. 그러나 얼마 뒤에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고 말을 잘 하실

수 없게 되어 조부모와 백부의 지장은 짓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유안처사의 묘지와 유상공

의 비문 이 두 편만큼은 꼭 당신 손으로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말을 제대로 하실 수

없게 되자 역시 그만두셨다.


27

을축년(1805) 10월 20일 오전 8시경, 가회방 재동 집의 사랑에서 돌아가시니 춘추 예순아

홉이셨다.

아버지는 중년 이래 험난한 일들을 겪으시며 울적한 마음을 펴지 못해 늘 화가 치밀어오

르는 병이 있으셨다. 임술년(1802)의 산변 이후 더욱 애통해하고 상심하셔서 마음이 휑하니

빈 듯하셨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자치통감 미치 주자와  육선공의 상소문들을 읽게 하시고

는 누워서 그것을 들으셨다. 갑자년(1804) 여름 이후 병세가 극도로 심해졌으나 약을 물리치

고 드시지 않았다. 그리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주의를 주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지난날 내가 윤득관과 함께 심의(옛날 선비가 입던 두루마기 모양의 웃옷. 흰 베로 만들

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는

데, 윤공이 정한 제도가 자못  올바랐다. 윤공은 여호(박필주) 선생의 초상  때 손수 심의를

제작하여 염을 한 적도 있다. 그러니  심의는 모름지기 윤공이 정한 제도에 따르도록  해라.

나는 담헌(홍대용)의 초상 때 그의 뜻에 따라 반함을 하지 말자고 주장했었다. 그러니 반함

은 하지 말도록 해라."

아버지는 병이 점점 더 위독해지셨지만 그럼에도  지계공과 이희경 두 분을 자주  불러서

조촐한 술상을 차려 서로 담소하게 한 다음 그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이곤 하셨다.

마침내 이 날 하늘의 가호도 그쳐 끝내 운명하셨으니, 유언은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

씀뿐이셨다. 염습할 적에 아버지의 몸은  희고 깨끗했으며 얼굴은 편안히 주무시는  듯했다.

아아, 애통하다! 이 해 12월 5일, 장단의 대세현 남향에 자리한 어머니 묘에 합장했다. 그곳

은 선조 문정공(박상충,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반남 박씨의 시조이다.)의 묘소 우측 산기슭

의 바깥쪽 언덕이다.


28

지계공은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아버지를 애도하셨다.


유세차 모월 모일, 처남 이재성은 삼가 제문을 받들어 연암 박공의 영령에 곡하며 영결합

니다.


아아, 슬프도다!

사람들은 말들을 합니다.

문장에는 정해진 품평이 있고

인물에는 정해진 평판이 있다고

그러나 공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

마음과 눈으로 보지 못하면

이름하기 어려운 것과 같지요.

용을 아로새긴 보물솥은

밥하는 솥으로 쓸 수 없고

옥으로 만든 술잔은

호리병이나 질그릇엔 어울리지 않지요.

보검이나 큰 구슬은

시장에서 살 수 없는 법이고

하늘이 내린 글이나 신비한 비결은

보통의 책상자 속에 있을 턱이 없지요

신령한 거울은 잊은 걸 생각나게 하지요.

끊어진 줄을 잇는 아교가 있는가 하면

혼을 부르는 향도 있답니다.

그러나 처음 듣고 처음 보면

이상하고 괴기할밖에요.

그래서 한번 써보지도 않고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요.

아아, 우리 공은

명성은 어찌 그리 성대하며

비방은 어찌 그리 많이 받으셨나요?

공의 명성을 떠받들던 자라 해서

공의 속을 안 건 아니면

공을 비방하던 자들이

공의 겉을 제대로 본 건 아니지요.

아아, 우리 공은

학문은 억지로 기이함을 추구하지 않았고

문장은 억지로 새로움을 좇지 아니했지요.

사실에 충실하니 절로 기이하게 되고

깊은 경지에 나아가니 절로 새롭게 된 것일 뿐.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도

공에게 가면 훌륭한 문장이 되고

웃고 화내고 꾸짖는 속에

진실됨이 담겨 있지요.

강물이 구비구비 흘러

안개 속에 물결이 넘실거리듯,

첩첩이 솟은 바위 사이에

노을과 구름이 일어나듯,

문장의 천태만변은 절로 이루어진 것이지

억지로 남을 놀래려는 게 아니었지요.

무실을 중시한 관중과 상앙을

학자들은 입에 올리기 부끄러워하고

가의와 육지의 문장을

문인들은 배우려 하지 않았지만

공은 자신의 소임을

이 분들에 견주었지요.

재주 그토록 높으면서

뜻은 어찌 그리 낮추셨는지,

말세의 문인들은

고문을 짓는다고 스스로 뽐내며

거칠고 성근 것을 답습하고

껍데기와 찌꺼기를 본뜨면서

깨끗하고 질박한 양 착각하나

실은 너절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요.

공은 이 풍속 고치려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지요.

이는 흡사 위장병 환자가

맛있는 음식을 꺼리는 것과 같고

눈병 앓는 환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꺼리는 것과 같지요.

공을 좋아한다는 자들조차

공의 진수를 안 건 아닙니다.

하찮은 글 주워다가

보물인 양 생각하고

우언이나 우스갯소리를

야단스레 전파했으니

이 때문에 헐뜯는 자들

더욱 기승을 부렸지요.

"우언은 궤변으로

세상을 농락한 것이고

우스갯소리는 실상이 아니요

거만하게 세상을 조롱한 것이다!"

좋아한다는 자나 헐뜯는 자나

참모습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떠들어대는 저 자들이

공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공의 장점과 단점을

제가 한번 말해보리다.

공은 기세가 드높아서 1만 사람을 압도했지만

명리에 대해서는 가까이하길 두려워했지요.

세 가지 까다로운 문제를 옳게 밝히셨으나

세상 유행에는 어두웠지요.

가장 참지 못한 일은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

그래서 소인배와 썩은 선배들이

공을 늘 원망하고 비방했었지요.

중년에는 연암골에 들어가셔서

세상에 자취를 감추셨지요.

세상을 경륜할 큰 뜻 못 펴자

명상에 잠기며 쓸쓸히 지냈지요.

우연히 중국을 여행하게 되어

천하의 형세를 살피셨지요.

그리하여 천하의 안위를 논하고

중화와 오랑캐를 분명히 구별했지요.

만년에 벼슬한 건 가난 때문이었으니

서글프게 짐을 챙겨 임지로 향했지요.

벼슬 그만두려고 생각하신 건

책을 저술하려는 마음 간절해서였지요.

편안히 지내시던 중 그만 병이 나

말과 거동이 불편하셨지요.

그래서 품은 뜻 펼치지 못하고

술술 나오던 글도 그만 그쳤지요.

묘하도다! 저 성명을

촛불에 비유한 말씀.

형질이 초라면

마음은 심지와 같아

형질이 순수하고 마음이 올곧아야

촛불처럼 빛난다고 하셨지요.

이처럼 식견 높고 이치가 정밀하니

덧붙일 말이 있겠습니까.

절필하여 불완전한 원고밖에 전하지 않으니

누가 다시 그 심오한 이치 깨달을는지?

아아! 우리 공은

남과 화합 못하여서

이웃이 드물었지요.

제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을 따라 배우려 했었지요.

세상에 크게 쓰이지 못한 공을 위해

그 누가 탄식하겠습니까?

나의 서투른 글솜씨를

때로 칭찬해주셨으며

상자에 지으신 글 100편 넣어두시고는

제가 비평해주는 걸 좋아하셨더랬지요.

아아! 우리 공은

그 사귐이 연배를 뛰어넘어

선배에까지 미쳤었지요.

우리 아버지께 감복한 건

그 고결함과 지조 때문이었으니

잘 알려지지 않은 언행과 덕행을

제문에다 낱낱이 쓰셨지요.

어이해 붓 들어

비문을 짓지 못하셨나요?

저는 형제가 없어

공을 형님처럼 여겼지요.

머리가 허옇도록 늘 그랬으니

새삼 무얼 말하겠습니까?

숲이 우거진 저 무덤은

옛날 사시던 연암골에 가까운데

현숙했던 부인께서

먼저 잠들어 계시지요.

추운 새벽 발인하니

눈과 얼음 길에 가득

병으로 멀리 전송하지 못하옵고

홀로 서서 길이 통곡하옵네다.


29

아버지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셨으며 용모가 엄숙하고 단정하셨다. 무릎을 모아 조용히

앉아 계실 때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으셨다.  이공 영원은 언젠가 나에게 이

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 춘부장은 그 풍채가 먼저 다른 사람을 감복시켰다네. 설사 남의 집 많은 사람이 모

인 자리라 하더라도 춘부장께서 오시면 곧 좌중을 압도하셨더랬지. 담론을 하시면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주목했으며 조용히 경청하여 소란스럽지 않았었지.  또한 그 누구도 말씀

하시는 중간에 끼여들어 논란을 하지 못했다네."


30

아버지는 사람을 대하여 담소할 적에  언제나 격의없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음에 만지

않는 사람이 자리 중에 있어 말 중간에 끼여들기라도 하면 그만 기분이 상해 비록 하루종일

그 사람과 마주하고 앉았더라도 한마디 말씀도 나누지 않으셨다.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

버지의 그러한 태도를 단점으로 여겼다.  악을 미워하는 아버지의 성품은  타고난 것이어서

부화뇌동하거나 아첨하거나 거짓을 꾸미는 태도를 억지로  용납하지 못하셨다. 그리하여 한

번 누구를 위선적이거나 비루한 자로 단정하시면, 그 사람을  아무리 정답게 대하려고 해도

마음과 입이 따라주지 않았다.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내 기질에서 연유하는 병통이라 고쳐보려고  한 지 오래지만 끝내 고칠 수  없었

다. 내가 일생 동안 험난한 일을 많이 겪은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


31

아버지께서 좌우를 돌아보며 지시할 적에는 당당하여 위엄이 있으셨다.  그 모습을 본 사

람들은 문득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목소리는 크고  우렁차셔서 보통 음성으로 말씀하시더

라도 수십 보 떨어진 담장 밖에까지 들렸다.

아버지는 안색이 불그레하고 윤기가 나셨다. 또 눈자위는 쌍꺼풀이 졌으며, 귀는 크고  희

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긴  얼굴에 듬성듬성 구레나룻이 나셨다. 이마에는  달을

바라볼 때와 같은 주름이 있으셨다. 몸은 키가 크고 살졌으며  어깨가 곧추 솟고 등이 곧아

풍채가 좋으셨다. 중년에 아버지를 그린 초상화 두 점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별로 닮지 않았

다고 하여 없애버리셨다.

나는 다시 초상화를 그리자고 말씀을 드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제 기억 속의 아버

지 모습은 날로 아득해져 가는데 우러러볼 초상화조차 없으니 비통함을 견디기 어렵다.


32

담옹 김기순은 독서를 하여 깊은 식견이 있었으며, 의술에도 뛰어났다. 매양 아버지를  따

라 노닐기를 좋아했는데, 언젠가 아버지의 기품을 논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공은 순양의 기품을 타고나 음기가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높고 밝음이 지나쳐서 매

양 부드러움으로 일을 이루는 힘이 부족하고, 강직함과 방정함이  지나쳐서 항상 원만한 뜻

이 적습니다. 이는 옛사람이 말한바 성격이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태양증에 해당

합니다. 우리나라의 선현들에 견준다면 공의 기품은 송강 정철이나 남명 조식에 가깝습니다.

지금과 같은 말세를 살아감에 도처에서 모순을 느끼실 테니,  삭이지 못하고 억눌러둔 불평

한 마음이 훗날 반드시 울화증으로 나타날 겁니다. 그럴 경우  그 병은 약이나 침으로도 고

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만년에 이르자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33

아버지는 평소 잠이 적으셨다. 매양 자정을 지나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취침하

였으며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셨다. 그리고 일어나시면 반드시  창문이랑 방문을 활짝 여셨

는데, 눈 내리는 날이나 얼음이 언 추운 아침에도 그렇게 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때로는

말없이 앉아 생각에 잠기시기도 하고 때로는 이리저리 산보하시기도 하다가 동이 트면 세수

를 하신 다음 갓을 쓰고  자리에 앉으셨다. 집안의 남녀노소가 모두  아버지의 이런 태도에

익숙해져 다 잠을 적게 잤다.

옷과 이불에 두꺼운 비단을 사용하는 걸 꺼리셔서 한겨울에 입는 옷이 서민의 가을옷처럼

얇았다. 이불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4부 법고와 창신을 통일하다

1

아버지께서 문장을 논하실 때면 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문장에 고문과 금문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문장이 한유와 구양수(한유는 당

나라의 유명한 문장가이고, 구양수는 송나라의 유명한  문장가. 두 사람 모두 당송  8대가에

해당한다.)의 글을 모방하고 반고와 사마천(사마천과 반고는  모두 한나라의 역사가. 그들의

저술인 '사기'와 '한서'는 단순한 역사서에 그치지  않고 빼어난 문장으로 이름높다.)의 글을

본떴다고 해서 우쭐대고 으스대면서 지금 사람ㅇ르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

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

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는 그것으로 지극하다."

또한 아버지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과문(과거에서 요구하는 특별한 문체의 글,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며, 상투적이고 진부한 성격을 띤다.)의 낡은 관습에  골몰하여 진부한 말들을 

늘어놓거나 남의 글을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순수하고 질박한 글을 짓는 체하여 문

풍이 날마다 거칠고 무잡스럽게  변해감을 병통으로 여기셨다.  그래서 '초정집의 서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옛을 본뜨는 사람은 그  자취(겉모습이나 형식을 말한다.)에  구애됨이 병폐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법도가 없음이  폐단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로운 것은 만들어내면서도 법도가 있다면 지금의 문장은 옛 문장과 같을 수 있을 것

이다."

또 '과문 모음집에 붙인 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이치를 담고 있다면 집안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예삿말도 학교에서 가르

칠 만하고, 동요나 속담도 '이아'(13경의 하나. 천문, 지리, 음악, 기재, 초목, 조수 등에 관한

고금의 문자를 설명한 책으로 중국 고대 사전에 해당한다.)에 수록할 만하다. 그러므로 문장

이 훌륭하지 못한 것은 글자  탓이 아니다. 자구가 아름다운가 속된가  하는 것만 따지거나

한 편의 글이 고상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만 문제삼는 자들은 비유컨대 마음속에 아무

런 계책도 없는 용기 없는 장수와 같아서  갑자기 글제목을 대하면 우뚝 솟아 있는 견고한

성을 눈앞에 만난 것처럼 당황한다.  그러므로 글 짓는 사람의 걱정거리는  늘 스스로 길을

잃어 얻지 못하는 데 있다 할 것이다."

한편 '초정집의 서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으나 끊임없이 만물을 낳고, 해와 달이 오래되었으나 그 빛은

날로 새롭다. 또한 천하의 책이 비록 많다고 하나 그 담고 있는 뜻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

로 날짐승, 물고기, 길짐승 가운데는 혹 그 이름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는 법

이다. 그리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땅이나 신령한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는 영지(영지버섯, 옛날에는 상서로운 존대로 간주했다.)가 생겨나고, 썩

은 푸에서 반딧불이 생겨난다. 예악은 성인이 만드신 것이지만  그럼에도 후대에 이르러 예

를 둘러싸고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있으며 악에 관해서도 논의가 분분하다. '주역'의 경우 괘

(주역의 괘를 이룬 하나하나의 가록 그은 획.)와 효(괘와 효를 풀이한 글인 '괘사'와 '효사'를

가리킨다. 원래 괘와 효는 기호에 불과한데, 기호만 갖고서는 그 뜻을 알기가 어려우므로 후

에 설명하는 글이 추가되었다는 말이다.) 자체만으로는  뜻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후에 괘와 효를 설명하는 말을 많이 붙였고, 똑같은 것을  보고서도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

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100세 뒤의 성인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그렇다고 할  것이다"(중용에 나오는

말)라는 말은 앞 성인이 한 말이며, "순임금이나 우임금 같은 성인이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

도 내 말이 옳다고 할 것이다"(맹자, 등공문에 나오는 말)라는  말은 후대의 현인(맹자를 가

리킴)이 한 말이다. 우임금과 후직과  안회(후직은 요순시대에 농사일을 관장하던 신하로서

주나라의 선조이다. 안회는 공자의 수제자이다.)는 그 도가 하나였다. 편협함과 공손하지 않

음은 군자가 추구할 바가 아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복희씨는 '문'(여기서는 문채라는 뜻으로 쓰였다. 우주 삼라만상의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

을 가리키는 바, 연암은  이를 암암리에 '문장'이라는 말과  결부시키고 있다.)을 관찰할 때,

위로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 땅을 살폈다. 공자께서 복희씨의  이러한 관찰을 훌륭하게 여기

사 '계사전'을 지어 '가만히 집에 있을 때는 괘와 효의 형상을 살피고 괘사와 효사를 음미한

다'라고 하셨으니, 무릇 '음미한다'는 것이 어찌 눈으로 보고 살피는 것이겠는가?"

이상은 모두 아버지가 문장에 대해 논하신 대체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지으신

문장은 착상이 독창적인 데다가 기운이 가득 차고 이치가  갖추어져 있었다. 비문이나 묘지

는 생동감 있게 서술되어 그  사람의 목소리와 모습을 듣고 보는  듯하였으며, 편지글은 붓

가는 대로 썼으면서도 인정물태를 다 드러냈으니, 개성적인 글을  창조하여 진부한 말을 답

습하지 않으셨다. 몇백 년 후 의당 높은 안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리니, 이 어찌 내가 사사

로이 찬미할 일이겠는가.


2

아버지는 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문장을 짓는 데 달리 잘하는 건 없고 사실을 기술하고 대상을 묘사하는  솜씨가 요

새 사람들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요새 사람들이 지은 비지(묘비문과  묘지를 합해 일컫는

말)는 대개 판에 박은 듯하여 한 편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써먹을 수 있다. 그러니 내체 돌

아가신 분의 정신과 모습을 어디서 또올릴 수 있겠느냐? 그래서 삼연(김창흡) 공께서는 '우

리나라 사람들 문집은 상가집 곡비의 울음소리와 같다'라고 하신 것이다.  옛사람은, '얼굴이

둥글면 모난 데를 그리고 얼굴이  기다라면 짧은 부분을 그린다.'(이는 청나라  화가 대창의

말이다. 둥근 얼굴을 그릴 때  전적으로 둥글게만 그려서는 그 본질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거꾸로 둥근 얼굴 중의 어떤 모난 부분을 그려야 비로소 얼굴이 둥글다는 사실이 확연히 부

각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대상의 형상을 묘사할 때  형상 그 자체보다는 음영을 그림으

로써 형상의 개성적 특질을 부각시키는 방법과  서로 통한다)라고 했거늘, 사마천의 열전과

한유의 비문이 읽은 만한 건 이 때문이다.(이 두사람의 글은, 서술한 인물의 널리 알려진 행

적을 지루하게 언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일화

를 통해 인물의 개성과 본질을 드러내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

고 종이 가득히 진부한 말과 죽은 구절만 채워넣고 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렇게 해

야만 법도에 맞고 충실한 글이 된다'라고 한다. 나는 모르겠다. 이게 무슨 글쓰는 법인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옛사람들의 글이 그 당대에야 어찌  난해하고 모호하겠는가? '서경'의 '요전'과  대우모의

'시경'과 국풍과 아송, '주역'의 괘사와  효사, '춘추'의 여러 전들은 모두  당시의 금문이어서

그때 사람들은 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그 뜻을 점점 알기가 어렵

게 되어 전, 전, 주, 소(모두 경전에 대한 후대의 주석과 해설을 가리키는  말. 전은 주로 경

과 대비되는 말로 쓰이는데 경문 전체를 설명한 '해설서'라는  의미가 강하다. 전과 주는 경

전을 주석한 글을 뜻한다. 소는 옛날의 주를 해설했거나 그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글을 의

미한다.) 따위가 생겨나게 되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런 줄은 모르고 무조건  옛사람의 글을

본뜨고 흉내내어 어렵고 난삽한 때깔을 부리면서도 스스로는 '간명하고 예스럽다'고  여기고

있으니 참 가소로운 일이다. 만약 남들이 자기 글을 읽고자  할 경우 그때마다 자기가 일일

이 주석을 달아주어야 할 지경이라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3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당송 8대가(당나라와  송나라를 대표하는 8명의  대문장가.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을 이른다.)의 문장을 배운다  하면서 그 정신과 이치

는 터득하지 못하고 거칠게 그 겉모습만을 배울 뿐이다. 그리하여  무릇 한 편의 글을 지을

때마다 문세가 오르락내리락하게 하고 이 구절과 저 구절을 조응시키며 말을 여닫거나 마무

리를 짓는 데 하나하나 힘을 쏟고 분명하게 본뜨고들 있으니,  설사 솜씨 있는 사람이 진은

글이라 할지라도 그리 좋아할 만한 게 못된다. 하물며 글솜씨가 없는 사람은 그저 주제만은

언급하여 대충 얼버무리고 마니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옛사람들은 흉금이 넓고 학문이

깊어 글을 지을 때 분명하고 유창하며 법도 있고 아담하기만을 구하였을 뿐 작위적으로 안

배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장이 이루어졌다. 후세의 비평가들은 단락을 나누고

구절을 분석하여 문장의 입체적 구성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데, 이는 글을 쓴 옛 작가가

어는 대목에 정신을 쏟았는지를 제시하여 처음 글을 배우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깨우쳐주므

로 나쁠 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옛  사람이 붓을 잡아 글을 지을 때 그  마음속에 글 한

편에 대한 안배가 미리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옳지 않다.

고문을 배우려는 자는 자연스러움을 구해야 마땅하며, 자기 자신의 언어로부터 문장의 입

체적 구성이 생겨나도록 해야지 옛사람의 언어를 표절하여 주어진 틀에 메워넣으려  해서는

안된다. 바로 여기서 글이 난해한가 쉬운가 하는 차이가 생겨나며,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결

정된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 게 바로 오늘날의 과문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나라에 충성한 제갈량은 큰 도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문장을 쓰는 법 역시 큰 도가 무엇

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

기만 하다면 이런 들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4

아버지의 초년 문장은 전적으로 '맹자'와 사마천의 '사기'에서 힘을 얻었다. 그러므로 아버

지의 문장에 기운이 펄펄한 것은 그 근본 바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좌구명의 좌전

과 국어(춘추시대의 열국의 사적을  나라별로 기록해놓은 책)라든가 한유와  구양수의 글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공부하여 그 문장의 정신과 이치, 대의와 법도를 깊이 터득하셨다.

중년 이후 세상을 벗어나 은거하실 때 및 중국을 여행하실 때 창작한 우언, 해학, 유희 등

의 작품 가운데는 왕왕 장자나 불교에 출입한 것이다.  만년에는 가의와 육지의 상소문이나

주자가 나라일을 논한 글들을 가장 좋아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편지글을 공사를 막론하고

여기서 유래하는 게 많다. 이것이 아버지 문장에서 발견되는 초년과 만년의 차이이다.


5

아버지께서 젊을 때 지으신 글 가운데 '주공의 부도탑  명문'이라는 글이 있다. 친구 김공

노영이 그 글을 읽고 말했다.

"이는 지극히 정밀한 글이다."

공은 그 글을 암송했으며, 서늘한 밤이나  맑은 아침이면 낭랑하게 읊조리곤 했다. 그  후

내종 동생인 이정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근자에 '주공의 부도탑 명문'을 다시 읽고 이  글이 불교를 배척하는 글임을 알았습니다.

김공이 '지극히 정"E나 글'이라고 하신 건 그 글의 의미를 깊이 꿰뚫어보신 것이라 하겠습니

다."

내가 늘 남들이 이 글에 대해 평하는 말을 들었지만 이같은 해석을 없었다. 나는 어늘 날

한 늙은 중에게 이 글을 보여주었다. 그는 죽 읽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불교를 배척하는 글이구먼요!"


6

아버지의 글 가운데에는 거짓을 꾸며  명성을 훔치는 유자를 꾸짖은 것이  더러 있다. 이

때문에 혹 화를 내며 언짢아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유충문공(유언호)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

다.

"이 친구는 위선적인 유자를 꾸짖으려고 특별히 풍자한  것뿐일세. 나는 자네들이 걸핏하

면 힘을 내어 위선적인 유자를 대신해 분노를 터뜨리는 게 늘 이상하다네."


7

아버지는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려서 하루에 한 권 이상 읽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늘 이

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기억력이 썩 좋지 못하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려 머릿속이

멍한 게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거나 글제목을

정해놓고 이리저리 글을 구상할 때면 처음에는 읽은 내용이 하나씩 떠오르다가 종국에는 줄

줄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옛사람의 지나간 행적이나 선배들의  격언 가운데 눈앞의 정경

에 어울리는 것들을 죄다 활용하여 이루 다함이 없었다."

지계공은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연암은 책을 매우 더디게 보아서 내가  서너 장 읽을 때 겨우 한  장밖에 못 읽었다. 또

암기 능력도 나보다 조금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읽은  글에 대해 이리저리 논하거나 그

장점과 단점을 말할 때에는 엄격한 관리가 옥사를 처결할 때처럼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

제서야 나는 공이 책을 느리게 보는 것이 철저하게 읽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8

아버지께서 글을 지으실 때는 매양 제목에 따라 구상하여 마음을 집중하고 생각을 골똘히

하셨다. 만일 자신의 견해가 남과  다를 경우 비록 선유가 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아첨하며

따르거나 구차하게 부화뇌동하려 하지 않으셨다. 반드시  오사란지(검은 줄을 쳐서 칸을 만

들고 테를 두른 종이)에다 붓으로 깨끗이 글씨를 쓰셨으며, 한 점 한 획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셨다. 고쳐야 될 자구가 있으면 비록 한 편의 글을 거의 다 썼다 할지라도 반드시 종이

를 바꾸어 처음부터 다시 쓰셨다.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이 완성되면 곧바로 편철해두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몸에 병

이 생긱기라도 할 듯 아무리 바쁜 중이라도 꼭 그렇게 하셨다.


9

아버지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지계의 글은 침중하고 안존하며 법도에  맞아 예봉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젊을 적에

예기를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글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그는 문장을 논하는

데 빼어난 안목을 갖고 있어 옛사람들이 글을 쓸 때 고심한 곳을 잘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한 편의 글이 완성될 때마다 반드시 지계공에게 보이며

"나를 위해 비평을 좀 해주게!"라고 하셨다.

지계공은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연암은 필력이 굳세고 식견이 정하니, 이는 근대의 여러 작가들이 지니지 못한 바다."

두 분은 반평생을 한  집에 거처하며 친구처럼 격려하고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셨는데,

아버지의 글을 제대로 논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안 사람은 지계공 한 분뿐이었다.


10

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왕왕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것을 말씀하셨다.

젊을 때 유안공(이보천)을 모시고 있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의 인척 한 분이 찾아

와 인사를 드렸다. 그가 가고 난 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허, 아무개가 곡 죽겠구나!"

유안공은 정색을 하여 나무랐다.

"어찌 말을 그리 경솔히 하는가?"

며칠 뒤에 과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부고가 왔다. 유안공은 아버지를 불러 물었다.

"자네, 아무개가 죽을지 어찌 알았나?"

"접때 그의 거동을 보니 정신이 이미 나갔습니다."


11

병신년(1776) 겨울의 일이다. 아버지가 시골집에 와 계실 적에 마을의 선비 한 사람이 찾

아와 뵙고 말하기를, "서울에 유포된 윤음이 있기에  적어왔습니다."하면서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앞의 몇 줄을 보시고는 돌려주며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셨

다.

"자네는 시골 사람이다. 만약 조정의  윤음이 있다면 조만간 도와  현에서 반포할 것이니

그때 가서 얻어보는 것이 옳다. 사사로이 임금님의 말씀을  베껴와 고을에 유포하고 서울을

들락거리며 소식을 전하고 다니는 건 백성을 어지럽히는 일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이 풀이 죽어 돌아갔다. 얼마 안 있어 거짓 윤음을 유포하고 다닌 자들에 대한 옥

사가 일어나 임금님께서 친히 국문하셨는데 이에 연루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12

김건순은 법도 있는 집안의 후손으로서 뛰어난  재주와 박식으로 그 이름이 세상에  크게

떨쳐 안회가 다시 태어났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가 한번은 아버지를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

하여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돌아갔다. 그가 간 뒤 아버지는 기색이 좋지 않았다.  아버

지는 나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부터 김군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만나보고 나니 마음이 안 좋구

나. 그 재주는 정말 천하의 기이한 보배라 이름할 만하더구나. 그러나 천하의 기이한 보배는

모름지기 견고하고 두터운 그릇에 보관해야 엎어지거나 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그릇을 보건대 이러한 보배를 간직하기에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그릇을 보건대

이러한 보배를 간직하기에는 부족하니 마음이 몹시 안됐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건순은 그릇된 부류들과 사귄다고 해서 김상헌의 종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그리고 나서 5년 후 천주교에 물들었다는  죄명으로 제 명에 죽지 못

하였다.


13

하루는 아버지께서 공적인 일로 훈련대장 서유대를 만나보고 돌아오셔서는, "서대장의 얼

굴에 살기가 가득하니 이상한 일이야!"라고 하셨다. 후에 들으니 그 날 과연 서유대가 포도

청에 명령해 죄수 몇 사람을 사형시키게 했다 한다.

또 하루는 당신 앞을 지나가는 집안 노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 하인의 기색이 왜 저리 안 좋을까?"

며칠 후 그 아비의 부음이 고향에서 날아왔는데, 죽은 날이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

날이었다.


14

아버지는 중국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 그곳 사람들과 서신을  왕래하는 일이 없으셨다. 아

버지는 일찍이 박제가에에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셨다.

"자내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야! 청나라  사람들과 사사로이 소식을 주고  받는 것은 몸을

삼가는 도리가 아닐세."


15

아버지는 북경에서 돌아오실 때 거기서 사귄  중국인 벗들이 선물로 준 물건들을  대부분

사양하고 받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유황표(유세기)가, "산중의 밝은 달이 뜬 밤에 이걸 사르

면서 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라면서 준 침향 몇 근 만큼은 받으셨고, 기여천(기풍액)이 준

단도 한 쌍도 받으셨다. 그 칼은 매우  짧아 한 자밖에 되지 않았고 폭은 손바닥만  했는데,

끝이 굽었지만 예리하였다. 칼자루와 칼집은 없었으며, 고리를 달아 열 자 길이의 붉은 끈을

묶어놓았다. 이 단도는 뒤에 금성공(박명원)의 소유가 되었다.


16

아버지께서 북경에 가셨을 때 첨운패루(패루란 편액 들을 걸어둔 문이다.)에서 이홍문이라

는 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영원백 이성량의 후손이라고 했다. 또 그의  조부인

편덕이 올해 여든둘인데 조선에 사는 일가의 소식도 듣고 간행한 족보도 전할 겸 해서 여러

차례 조선 사신이 묵는 곳 근처까지 찾아왔었으나 말을 붙여볼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고 하였다. 그런데 조부가 이제 중풍이 들어 일어날 수 없게 되자 홍문으로 하여금 조선 사

신의 숙소 근처를 두루 탐문하게 했는데 다행히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홍문

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귀국에 영원백의 후손이 살고 있습니까?"

그는 이훤(이여송의 후손) 등이 조정에서 벼슬하여 현달해 있는 줄 통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무과를 거쳐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백과 태보(이여송을 가리킨

다. 그 벼슬이 태자태보였기 때문에 태보라고 했다.)는 모두 화상이 있어 관에서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지요."

홍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귀국에 살고 있는 우리 일가들도 이곳에 친족이 있는 줄 알고 있나요?"

"소식이 감감하니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 그대를 만났으니 돌아가면 마땅이  소식을 전해

그들을 기쁘게 해주겠습니다."

홍문은 몹시 기뻐했다. 그는 감사하며 말했다.

"족보를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지요."

홍문은 이튿날 비단 가게에서 아버지를 뵙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날 홍문은 가게로 찾아

와 아버지를 모셔 의자에 앉힌 다음 앞에다 수십 개의  탁자를 벌여놓고 과일 삼백 꾸러미,

붓 하나와 먹 하나, 도장 새기는 돌 스무 개를 선물로 드렸다. 그리고 족보 다섯  권을 꺼내

어 앞에 갖도놓고는 의자 아래에서 절을 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바라옵건대 저의 작은 정성을 살피시어  귀국에 사는 일가에게 이 족보를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는 사례하며 말씀하셨다.

"족보는 삼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절대 남에게  족보를 외국에 전했다고 말

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는 홍문이 준 선물 중에 붓과 먹만 받아서 족보와 함께 가지고 돌아오셨다. 먹에는

'만지명월'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뒷면에 '현상'이라는 낙관이 있었다. 그 모양은

동그랗고 테두리가 있어 흡사 우리나라의 마패와 같았다. '만지명월'이라 한 것은 은미한 뜻

이 있는 듯했고, '현상'의 현자에에서 맨 위의 점을 없애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강희제(청나라

2대 황제) 이전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귀국하시자 이훤을 불러 족보를 전해주었다. 이윽고 임금님께서 그 족보를 보시

고는 이훤의 품계를 높여줌과 동시에 이여송을 위하여 사당에 위패를 마련하라는 특명을 내

리셨다. 궁궐에서 족보가 나가던 날 의장대가 앞에서 행진하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임금님께

서는 집을 하사하여 이여송의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그리하여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은

장수가 군악 연주 속에서 제사를 지냈다.

마침내 이훤은 아버지의 은덕에 감격하여 조정의 반열에서 아버지를 칭송하는 말을  하였

다. 아버지는 그 말을 전해듣자 깜짝 놀라 이훤을 꾸짖었다.

"전후의 은혜로운 아버지의 은덕에 감격하여 조정의 반열에서 아버지를 칭송하는 말을 하

였다. 아버지는 그 말을 전해듣자 깜짝 놀라 이훤을 꾸짖었다.

"전후의 은혜로운 분부는 모두 임금님의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어거늘 그걸  나의 은혜

라 하다니 말이 되어?"

'열하일기'에는 족보를 전해준 이 일이 생략되어 있으니, 삼가 임금님께 그 공을 돌리고자

한 아버지의 뜻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홍문에게서 받은 붓과 먹을 송원 김공(김이도)에게 주었다. 이여송이 위패를 만

들 때 공은 포의(벼슬하지 못한 선비를 일컫는 말)의 신분으로서 그 위패에 글씨를 썼으니,

공이 청음(김상헌) 선생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김공이 이 붓과 먹으로 글씨를 쓴 것은 신

령이 감응해서 된 것이지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그 후 이훤은 임금님의 분부를 받들어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친족의 계보 및 사적을 엮고

자 하여 아버지에게 일을 부탁했다. 아버지는 지계공한테 찾아가 부탁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리하여 지계공은 그를 위해 널리  전기와 야사 등에 의거하여 책을  써주셨으나, 그 대략의

내용은 '지계고'에서 살필 수 있다.


17

아버지는 균역법에 대해 늘 이렇게 논하셨다.

"군포를 덜어주는 것은 본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한 것이었건만 세액의  부족을 재

신하는 방법이 좋지 않아서 그 폐다닝 끝이 없다. 가령 어살(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속에 설

치한 나무 울타리)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밀물과 썰물, 개펄의 넓이는  수시로 변하는 법

이고 어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일정하지 않다. 만약 어떤 곳의 포구에 어살을 설치하여

올해 잡은 농어가 고깃배 1백 척의 분량이라고 치자.  나라에서는 이를 기준으로 세금을 매

겨 장부에 기재한다. 이듬해 혹 밀물이 멀찍이 물러나 개펄의 넓이가 줄어들거나 어족이 모

이지 않게 되면 백성들은 수입이 준다. 그렇건만 세금은 그대로다. 관에서는 상황에 따라 세

금을 가감하지 않고 오로지 세금 독촉만 일삼을 뿐이다.  그러니 백성들은 세금장부는 그대

로 남아 계속 세금을 징수하고 있다. 기타선박세나 염세 등의 폐단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균역법이 처음 시행될 때의 일이다. 그 일을 담담할 비변사 당상을 새로 임명하고자 했지

만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 당시 조정의 의론은 우리 장간공(박필균)께 맡기자는 것이었지

만 공께서는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으셨다. 공은 이렇게 탄식하셨다.

'이 균역법을 주장한 사람은 자손이 없으리라!'

앞 세대 분들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았다. 무릇 법을 처음 만들 때는 오로지 위, 아래의 손

익을 살펴 좋은 법인지 나쁜 법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균역법을 시행한 취지는 본래 위(나

라)의 것을 덜어서 아래(백성)에 보태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아래의

것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셈이 되었으니 법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함을 알 수 있

다."


18

아버지는 일찍이 호포법(호를 단위로 군포를 징수하는  제도)과 구전법(인구에 대해 세금

을 징수하는 제도)을 시행함직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지금 옛 성인의 제도인 정전법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한다면 당나라의 세법인 조용조

가 옛 뜻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무릇 군역이 공평하지 못한 것은 명목이 번다한 데 연유한

다. 그리하여 각종 이름을 붙여 세금을 거두고 지나치게 세금을 징수한다. 이 때문에 백성들

은 날로 더욱 궁핍해진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거듭 전쟁을 겪는 바람에 지금 군역의

명목이 아주 많은데다 그 경중이 같지 않다. 그런데 이들  세금은 본래 모두 그때그때 필요

성에 따라 급작스럽게 만든 것이지 결코  태평한 시대에 심사숙고하여 멀리 내다보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일거에 모두 없애버리는 게 낫다.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일거에 다  없

앨 수 있겠는가? 오직 매호마다 군포를 부과하고 매 사람마다 구전을 부과하는 방법밖에 없

다. 그렇게 하면 정연하고 간단한데다 요체가 분명해 번거롭지 않다. 일단 큰 근본이 정해지

면 자세한 사항은 잘 강구하여 검토하면 된다. 무릇 명목이 분명한 것은 좋은 법이요,  명목

이 구차스러운 것은 나쁜 법이다. 좋은 법이라 하더라도 폐단이 없을 수 없지만, 그 좋은 취

지를 살려 폐단을 바로잡는다면 오래 갈 수 있다. 나쁜 법이라 해서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

지만, 좋지 않은 취지로 이익을 하루라도 그대로 둬서는 안된다. 하물며 지금의 군역이 한갓

민생의 괴로움과 국가 재정의 궁핍만을 초래하고 있음에랴!"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군자와 소인은 그 신분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지금의  이른바 양반은 옛날의 군자에 해

당하고, 지금의 소인은 곧 옛날의 이른바 '곤궁한 백성으로서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에 해

당한다. 어진 정치를 펼 때 가장 먼저 보살펴야 할 대상이 소인이거늘, 어찌하여 유독  소인

만 괴롭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단 말인가? 군자가 아니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고 백

성이 없으면 군자를 먹여 살릴 수 없으니, 군자가 많고 백성이 적은 것은 나라의 이익이 아

니다. 하지만 100년 안에 조선의 온 백성은  모두 양반이 될 판이니, 법이 무너지고  기강이

어지러워지는 건 필시 양반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건만 현재 양반은  이를 다스리지

않고 있으니 이 때문에 법이 서지 않고 있다."


19

아버지는 과거제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과거제도가 미비하면 인재가 공부에 힘쓰지 않고,  인재가 공부에 힘쓰지 않으면 학술이

진흥되지 못하고, 학술이 진흥되지 못하면 염치에 힘쓰지 않게 되고, 염치에 힘쓰지 않게 되

면 풍속이 돈후해지지 못하고, 풍속이 돈후해지지 못하면 논밭이 개간되지 않고, 논밭이  개

간되지 않으면 기강이 서지 않으며 예악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 한 대의 박사제자드릉ㄴ 모

두 하나의 경전으로 입신하였거늘, 독실함과  순후함을 숭상한 전한의 풍속, 이름과  절의를

중히 여긴 후한의 기풍이 어찌 배양하지 않고 저절로 이룩된 것이겠는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중국은 한나라와 당나라 이래로 지금까지 학교제도와 과거제도가 일원화되어 있는데, 우

리나라는 두 제도가 분리되어 아무 상관없이 되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과거제의 폐단을 논하면서 향공이나 현량, 효렴 따위를 들먹이는 건 늙은 유생들의 상투

적인 말이다. 지금의 제도를 따르되 조금 수정을 가하여  명나라의 제도를 본받는다면 인재

를 잃지 않을 것이다."


20

아버지는 언젠가 명나라 제도가  훌륭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역대의

법령과 제도란 처음 만들어지기는 나라를 창건한 임금에 의해서지만, 수정되고 보완되는 건

나라를 이어받아 지켜가는 임금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처음에 법을  만든 임금이 그 유폐를

꼭 예견하는 건 아니며, 후대에 유폐를 고치는 임금이 애초에 그 법을 만든 취지를 꼭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나라만은 그렇지 않았다. 명나라 태조는 제위에 오르기 전에  미천하

고 곤궁했다. 그리하여 원나라 말기의  혼란상과 어려움을 몸소 겪으면서  백성들의 병폐를

두루 맛보았으므로 그 실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천하에 군림하게  되어서는 31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 제위에 있었고,  게다가 중간에 호유용(명나라 초기의 정치가.  명 태조의

총애를 받아 수년간 좌승상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총애를 잃자 반역을 도모하였

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과 진녕(명나라 조기의 인물. 호유용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처

형되었다)의 반란을 겪었기에 법과 제도의 장점과  폐단을 낱낱이 직접 목도하였다. 그리하

여 애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법을 만들고 다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법을 고쳤는

데, 재위기간이 길어 여유가 있었으므로 법을 꼼꼼히 손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손

볼 데가 없었다. 그 법이 한두 가지 흠집을 드러낸 것은 영락제(명나라 3대 황제) 이후 법을

개악한 데 기인한다.

지금 청나라가 건국되어 나라 안이 평안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진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명나라 태조의 율령을 잘 활용하여 한결같이 따르고 조금도 어기지 않으면서

법령을 만든 근본 취지를 살펴 그것을 실천하고 시대에 맞게 그 말폐를 바로잡았기 때문이

다.

청나라에서 간행한 책들이 늘쌍 청조의 크고 거룩한 계책이 이전 시대를 능가한다고 추어

올리지만 기실 모든 게 이미 '황명회전'(명나라의 법전)에 갖추어져 있다. 청나라는 단지  이

를 실행하고 확대했을 따름이다. '법을 활용하는 사람이 중요하지 법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

니다'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진실로  국가를 경영하려는 원대한 구상을 하

는 자는 반드시 지금 중국의 정치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명나라가 훌륭한 법을 만든

덕분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1

아버지는 평소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문제에 관심을 쏟으셨다. 그리하여 균전

법, 사창제, 화폐문제, 촌락 조직의 문제, 관리등용법, 관리를 평가하는 법, 군사제도, 해양방

위 등등의 문제에 대해 모두 자기대로의 의견을 강구하여 목차를 나누고 항목을 짜 책을 집

필할 구상을 거의 다 마쳤으나 미처 착수하지는 못하셨다. 만년에 자주 관직을 그만두고 한

가히 지내면서 한 부의 책을 쓰시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계공이 아버지 제문에서,


벼슬 그만두려고 생각하신 건

책을 저술하려는 마음 간절해서였지요.


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아아! 애석하다.


22

안의현감으로 계실 때다. 아버지는 시노비(중앙의 각 시에 딸린 노비, 시는 궁중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 이름 밑에 붙여 쓰는 말)를 해방해야 함을 논하여 삼종질인 판부사(중추부의

종1품 벼슬인 판중추부사의 준말) 박종악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당시 판부사공이 우의정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첫 경연에서 임금님께 건의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또 조정에서 청나라의 동전을 사와 국내에 유통시키자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는 말을 전해듣고 우의정 김이소에게 편지를 보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논하셨다.

(당시 조정에서는 청나라 동전을 은을 주고 들여와 사용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연암은 국

내에 있는 은의 고갈을 우려해 반대하였다.)

이런 일은 모두 아버지가 백성의 고통과 국가의 정책에  대해 고심하셨음을 보여준다. 관

련된 편지는 모두 문집에 실려 있다.


23

언젠가 탄식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국의 제도는 도량형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우리나라의 도량형은 정확하지 않다. 이 때문

에 온갖 기물이 구차하고 정밀하지 않다. 동쪽 시장의 되가 서쪽 시장의 것보다 크고,  남쪽

마을의 자가 북쪽 마을 것보다 짧다. 약재를 다는 저울은 왜인에게 빌려다 쓰고, 은을  다는

저울은 북경의 시장에서 사다 쓴다. 이래서야 무슨 제도를 논하겠는가?"


24

아버지는 일찍이 '위인찬' 세 편을 짓고자 하셨다. 아버지가 꼽으신 위인은 한나라의 제갈

량, 송나라의 한위공(송나라의 어진 재상 한기), 명나라의 왕양명이었다. 내가 미처 여쭤보지

못한 탓에 아버지께서 그 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 했는지 알지 못한다.


25

언젠가 탄식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독서와 학문에는 세상에 소용이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선현들

중 조중붕(조헌)이 쓴 '동환봉사'같은 글은 오로지 정사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는 도끼를  가

지고 대궐 문밖에 엎드려(도끼를 소지하는 건, 만일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이 도끼로

죽여달라는 비장한 결의의 표시다.) 실정을 비판하는  극렬한 상소문을 올렸다가 귀양을 가

게 되었는데 유배지인 함경도 길주까지 걸어서 갔다.

그 후 조중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그의 역량과

기백은 큰 일을 맡을 만했지만,  성공과 실패라든가 이익과 손해 따위는  결코 따지지 않고

오직 자기가 해야 할 일만을 힘써 해나갔을 뿐이다.

율곡이나 우암(송시열)과 같은 선현들 역시 그 독서와  학문에 체와 용(체는 자신을 수양

하고 마음을 닦는 일이요, 용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말한다.)이 있었다.

그러므로 세상일을 경륜함에 다들 지극히 주도면밀했으니, 어찌 종일토록 성명(인성과 천명

에 대한 성리학적 논의)의 이치만을 논했겠는가?"


26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나라 선현 가운데 일두(정여창)나 한훤당(김광필) 같은 분은 모두  수학(숫자로써 우

주의 원리와 주역의 이치를 풀이하는 학문을 가리키는 바, 상수학이라고도 한다.)에 대한 조

예가 있었다. 그러나 저술을 남기지 않아 그 학문이 전해지지 못했다. 이를 통해 저서가  없

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7

매양 다음 말씀을 하시곤 했다.

"유반계(유형원)의 한평생 경륜은 통유(모든 일에 통달한 유학자)라 할 만하다."


28

평소에 농암(김창협)과 삼연(김창흡) 두 선생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또 삼연 선생과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일찍이 영시암, 삼연, 호해정 등을 유람하면서  선생의 모습을 상상해 본적이 있다.

영정을 뵌 후엔 세상에 다시 없는 선생의 풍모를 늘 꿈에 그리곤 하였다."


29

아버지는 한가하실 때면 우리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집안의 옛날 일들을 자세히 말씀해주

셨다.

"여호(박필주) 선생이 병인년(1746)에 입대(대궐에 들어가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것을 일

컫는 말)하셨을 때 나는 겨우 열 살이었다. 그런데도 그때 일이 꼭 어제 일처럼 생생하구나.

당시 선생은 우리 집에 와서 머무셨는데,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찾아와 선생께 인사를

드렸었다. 정승 조현명은 책을 끼고 방에 들어오더구나. 그는 선생께 절을 올린 다음 자리에

앉더니, '소생은 오늘 선생을 모시고 '대학'의 한 대목을 강론할까 합니다' 라고 말했는데, 풍

모가 썩 훌륭하더구나.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놀라고 탄복하여,

'정말 이렇게도 어진 이를 공경하는 정승이 있다니!'

하고 생각했느니라. 그 후 철이 들자 그가 와서 강론을  청했던 게 달리 속셈이 있어서였

음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은 장간공 행장에 서술되어 있다.


30

아버지는 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집안은 신임의리에 관한 한 매우 준엄한 입장이었다. 일찍이 장간공께서 과거를 단

념하고 응시하지 않으셨던 건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공은 영조 을

사년(1725)에 네 충신(신임사회때 사사된 노론의 4대신을 가리킨다. 곧 김창집, 이이명, 이건

명, 조태채이다.)의 관작이 회복되자  비로소 정시에 응시하여 병과에  합격하셨다. 단 한번

시험을 보아 과거에 급제하셨으니 정말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나의 증조부 일곱 현제 집안은  당론이 서로 다르다만, 우리  집과 종가만은 신임의리를

확고하게 지켰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탕평책에  찬성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익을 좇는 비열한 인간으로 간주했다. 정승 조현명이 우리 집에 묵고 계시던 여호 선생을

방문해 '대학' '혈구'장(대학의 제10장으로 치국평천하의 의미를 해석해놓고  있는 장이다.)을

강론할 것을 청했을 때 장간공은  우스갯소리를 하시어 물리쳐버렸다. 그는  낯빛이 변하며

그만두더구나. 그의 의도는 탕평책이 당시의 여론임을 넌지시 알리려던 거였다."


31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형제가 여호 선생을 강가의 집으로 찾아가 뵌 적이 있다. 선생께서는 막 진

지를 드시기 시작했고 집안 식구들은 방 밖에 모여 밥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선생께서 물

었다.

'너희들 반찬은 무어냐?'

'건어이옵니다'

선생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셨다.

'오늘 저녁은 금계(박동량) 조상의 기일이다. 너희들이 소밥을 먹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리고는 건어를 치우라고 분부하셨다. 금계공은 선생께는  고조부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

에게는 이미 6대조가 된다. 나는 그 당시 나이가 어려 선생께서 너무 예법이 엄하다고 생각

했었다."


32

이런 말씀도 하셨다.

"장간공은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가 매우 엄하여  선고(연암의 돌아가신 아버지) 형제분이

늘 곁에 모시고 서서 수발을 들었다 부녀자들은  공을 뵐 때 소매가 넓은 저고리를 입어야

했으며, 바느질을 하거나 음식을 장만할 때에는 모두 팔찌를  차서 넓은 옷소매가 걸리적거

리지 않게 한 다음에 일을 해야 했다. 진지상은 선고  형제분이 연로하여 흰 머리가 희끗희

끗하던 때에도 반드시 손수 들고 가 올리셨다."


33

또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선고께서는 효성스럽게 부모님을 봉양하셨다. 그리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슬하를 떠

나지 못하듯 50년 동안 대문을 나서서 세상일에 관여하신 적이  없다. 부모상을 치른 지 몇

년 만에 선고 또한 별세하셨으므로 세상에는 우리 선고를 아는  이가 없다. 늘 선고의 지장

을 짓고자 했으나 부모님께 효도한 것 말고는 특별히  서술할 만한 일이 없었다. 유안공9이

보천)께서 선고에 대해 언급하실 때면 반드시 탄식하시며,

'이처럼 한 뒤에야 순수한 효성이라 할 수 있지!'

라고 하셨다. 공께서 지으신 선고의 제문에는 지나친 찬사가 조금도 없으니, 이를  읽으면

선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34

일찍이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

그리고는 집안에 전해오는 옛 일들을 다음과 같이 낱낱이 들어 말씀해 주셨다.


우리 선조 반남(박상충) 선생께서는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식

다가 흉악한 무리들에게 핍박을 받아 청교역에서 돌아가셨다. 고향으로 운구하지 못하고 그

곳에 장사지냈으니, 바로 개성 동문 밖이었다. 선생의 집안이 가난하여 어쩔 도리가  없었음

을 알 수 있다.

반남 선생의 아드님이신 평도공(박은)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에다 병까지 겹쳤지만 뜻과 의기만은 의연하였다."

공은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계셨건만  탈속반(첫번 찧은

쌀로 지은 밥. 아주 거칠다.) 먹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공의 집은

낙산(지금의 동숭동 뒷산) 아래에 있었다.  하루는 태종께서 갑작스레 공의  집에 납시었다.

태종은 공이 얼른 나와 영접하지 않은 데 대해 노여워하셨다. 그러자 공은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마침 탈속반을 먹던 중이어서 그대로 나가 전하를 뵈면 실례가 될 듯하여 양치질을

하고 나오느라 감히 늦었사옵니다."

임금님께서 그 밥을 가져오라고 하여 확인하고는 더욱 노하여 말씀하셨다.

"이는 저 옛날 공손홍이 삼베 이불을 덮었던 일에 해당되지 않는가? 어찌 조정  대신으로

서 탈속반을 먹는 자가 있단 말인가?"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아뢰었다.

"대신을 의지해 살아가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워낙 많아 녹봉으로 받은 쌀이 그 날 저녁

이면 다 흩어져버리옵니다."

임금님께서 무안해하시며 말씀하셨다.

"내 잘못이로다.! 내가 임금이 되어서도 소시적 친구에게 탈속반을  먹게 하다니. 나는 도

저히 경의 훌륭함을 따라가지 못하겠구려."

임금님은 즉석에서 동대문 밖 고암(지금의 종암동)의 전지 10결을 하사하셨다.

야천(박소) 선생은 소인의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세상을  피해 우거하시다가 영남에서 돌

아가셨다.(박소는 당시 세도가 김안로에게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남양에 피해있다가 외가가

있던 합천으로 내려가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반장(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원래 살았던 곳이나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사지내는 일)하지 못했다. 당시 장남인 찬성

공(박응천)이 열아홉 살,  차남인 반성공(박응순)이 아홉  살, 3남인  문정공(박응남)이 여덟

살, 4남인 나으 7세조 도헌공(박응복)이 다섯 살, 막내이신 도정공(박응인)이 세 살이셨는데,

그 울부짖는 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홍부인께서는 이들의 손을 잡고 온갖 고초를 겪

으며 서울로 돌아오셨다.

내가 안의현감을 지낼 때 여러 차례 선생의 묘에 참배하였다. 겹겹이 둘러싸인 쓸쓸한 산

에 홀로 서서 당시 일을 생각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의 환난과 가난이 이토록  심했었

나' 싶어 통곡이 나오려 했다.

마침내 다섯 아드님이 모두 벼슬길에 올라 이름난 공경과  어진 대부가 되었다. 찬성공은

여러 차례 고을 살이를 하셨는데 종종 식구들을 거느리고 가지 못하셨다. 그때 문정공은 경

의 녹을 받고 있었는데, 그 절반을 큰형수께 드렸다. 매양 조정에서 물러나오면 조복을 벗지

도 않은 채 형수를 찾아가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여쭈어보셨다. 그리고 몸소 쌀독이

며 장독을 들추어보아 빈 것이 있으면 마련해다가 채워드렸다.  그러나 문정공은 가난 속에

서도 맑은 지조를 지켜 온 세상 사람들에게 경외를 받았으니,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참으

로 태연자약하셨다 할 것이다.

반성공은 임금의 장인이라는 귀한 신분이었으나, 집안은 썰렁하여 재물이 없었다. 국혼(왕

실과 혼인)을 치를 적에는 안팎에서 재물로  도와주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던 관례였으나,

공은 홀로 한 물건도 받지 않고 검소하게 혼례를 치렀다.

나의 선조인 도헌공은 당시  바야흐로 벼슬에 진출해 명망이  있으셨으나, 자신의 임금의

외척과 가까운 처지라 하여 더욱 겸손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셨다. 그리하여 두문불출하며 오

직 책과 화초와 대나무로 소일하셨다.  공은 평생 이렇게 지냈으며 끝내  높은 벼슬을 하지

않으셨다. 우리 가문의 청렴하고 욕심 없는 태도는 이처럼 철저하였다.

도헌공의 아드님이신 충익공(박동량)은  일찍부터 임금님께서 알아주시어  조정의 요직을

두루 맡으셨다. 그러나 국운이 험난할 때여서 자기 한몸도 돌볼 수 없었으니 하물며 집안일

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임진왜란 8년 동안 우리 집안은 연안, 수안, 안주 등을  떠돌며

온갖 곤궁함을 다 겪었다. 나라가 중흥되자 공은 외직을 맡으실 때는 큰 고을을 다스리셨고,

조정의 벼슬을 맡아서는 나라의 정책을 관장하셨다. 그러나 나라일을 도모하는 데는 능하셨

지만 집안 살림에는 능하지 못하셨다. 그리하여 논밭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몇 달을 지

탱하기도 어려웠고, 가재도구는 열에 예닐곱은 없었다. 평생 지니신 거라곤 은술잔 하나였는

데 공훈을 책봉받던 날 임금님께서 상으로 하사하신 것이었다. 그  외에는 단 한 개의 주기

나 다기도 소유하신 게 없었다. 공은  서화를 몹시 좋아하셨다. 한번은 훌륭한 화가를  만났

다. 그러나 집에는 한 폭의 비단도  없었다. 그리고 달리 구할 방도도  없었다. 마침내 공은

조복을 빨아 거기에다 그림을 그리게 하셨다. 만년에 귀양살이하실  때 나물찬과 거친 밥조

차 드시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이 사실은 공이 쓴 여러 시와 편지에 보인다. 큰아들

문정공(박미)이 부마였건만 공의 가난함은 이와 같았다.

문정공께서 선조의 부마로 간택되자 정동의 집을 하사받으셨다. 그러나  공은 그 집이 사

치스럽고 크다느 이유로 사양하시고 태평동에 다시 집을 얻으셨다. 이곳에 집을 얻은 건 부

모님 댁이 가까워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기 좋기 때문이었다.  충익공의 옛집은 지금도 창

동에 있는데 그 사랑채는 방 두  칸에 대청 한 칸 뿐이었다. 문정공은  선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지만 왕의 자녀에게 지급되는 전답 외에 개인적으로 따로 하사받은 건 없었다. 정

안옹주(문정공의 부인으로 선조의 다섯째 딸이다.)의 옷에 땟국이 졸졸 흐르더라도 서조께서

는 궁인으로 하여금 직접 확인케 하여 정말 낡을 대로 낡지 않고서는 새 옷을 하사하신  적

이 없었다. 그래서 정안옹주는 항상 옷이 쉬 해어지지 않음을 걱정하셨다. 이 일은 지금까지

도 우스갯소리로 전해지고 있다. 아조(조선왕조) 왕실의 검소한 덕은 진실로 그 의복이며 가

물을 자녀들에게 두루 하사하셨는데 다들 금은과 진귀한 물건들을 얻어갔지만 정안옹주  홀

로 선조대왕이 친히 그리고 난죽 병풍 하나만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숭상한 바가 이와 같았

으니, 이로 미루어 좋아하시지 않은 게 어떤 것이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문정공은 비록 일찍 귀하게 되셨지만 가난하여  가마와 말, 하인 등을 갖출 수가  없었다.

공께서는 이런 시를 읊으신 적이 있다.


인도하는 하인은 여든 살 노인

견마 잡힌 종놈은 궁티가 졸졸.

그 뒤를 따르는 어린 종놈은

엄동에도 내의를 입지 못했네.

시정배는 단출한 행차 비웃고 있고

처자는 고단한 행색 부끄러워하나

비켰거라 외치는 벽제 소리에

그래도 행인은 비키게그려.


"인도하는 하인은 여든 살 노인"이란 구절은 길을 인도하는 하인이 주인을 내리 3대나 섬

겨 나이가 거의 여든이 되어  간다는 뜻이다. 공은 이처럼 가난하셨지만  조용히 욕심 없이

사셨다. 공의 풍류와 문학은 당시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성품이 술을 좋아하셨지만 가난하

여 종종 마음껏 취하시지 못했다. 그럴 때는 온종일 고요히 앉아 계시다가 자리를 파하셨다.

그렇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잘 도와주어 자신이 가진 걸 아끼지 않고 주셨다.

부친인 충익공이 오랫동안 남쪽 변방에 귀양 가 온  집안이 따라갔는데, 공은 부마였기에

따라갈 수 없었다. 공은 몹시 애통해하셨으며, 한 필 말에 홑옷 차림으로 오랜 기간  유배지

를 왕래하셨다. 게다가 모부인 상을 당하고 그에 겹쳐 큰고모와  셋째 아우가 모두 남쪽 천

리 밖에서 돌아가시니 공은 세 번이나 반장을 하였다. 당시 정안옹주가 혼자 서울집을 지키

셨는데, 힘써 일하여 없는 살림을  꾸려가셨다. 그러나 쌀독은 바닥이 드러나고  돈주머니는

텅 빈 형편이었다. 옹주는 초췌해져 거의 쓰러질 뻔하였다. 옹주는 이때 일로 고생해 익숙해

져 만년까지도 몸소 길쌈을 하셨다. 이와 같은 옛 선조들의 노고와 고생은 100대 후까지 자

손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안옹주는  일흔한 살까지 사셔서 우리  증조부 현제 7명과

자매 4명이 모두 그 사랑을  받았으며, 증손자(박태두의 아들 박필하)한테까지 사랑이  미쳤

다. 이는 근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복을 아꼈기에 얻은 경사거늘, 하늘의 보답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증조부(박태길)께서는 덕은 있으셨으나 수를 누리지는 못하셨고, 이 때문에 윤부인께서 고

생해가며 조부 형제분을 키우고 가르쳐서 성취시키셨다.  조부께서 막 벼슬살이를 시작하셨

을 때 윤부인께서 그만 별세하셨다. 그래서 조부께서는 고을 원을 맡아 윤부인을 봉양할 기

회를 갖지 못하셨다.

조부 형제분은 통진(김포군  통진면)의 봉상촌에서 시묘살이(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

앞에 초막을 지어서 그곳에 기거하며 3년상을 지내는 것을 말한다.)를 하셨다. 이 땅은 본래

간이 최립의 별장이 있던 곳인데 충익공이 일찍이 매입하여  거처하셨다. 그리하여 조부 형

제분께서 얼마간의 척박한 전답을 소유하시게 되었지만 바다 근처의 소금기가 많은  땅인지

라 해마다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당질인 장익공(박사익)이 강화유수로 계셨는데

항상 쌀, 소금, 간장, 된장 등을 보내주어 제사를 받들 수 있었다.

조부께서는 그 지위가 경의 반열이었으나 자주 끼닛거리가 떨어져 가난한 선비의  살림살

이와 다를 바 없으셨다. 도성  서쪽의 낡은 집은 누추하고 비좁았으나  평생 거처를 옮기지

않으셨다. 한번은 집에 심하게 무너진 곳이 있어 객이 수리할 것을 청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도 바로 그때 조부께서 지방 수령에 임명되셨다. 조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령이 되어서 집을 수리하는 건 옳지 않다."

얼마 후 통진에 있는 척박한 땅이 방죽이 해일로 무너져  장차 다시 쌓으려 했다. 그런데

조부께서는 마침 그때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셨다.  조부께서는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

다.

"관찰사가 되어서 자기 농장을 돌보는 건 옳지 않다."

조부께서는 사람을 보내 그 일을 중지시켰다. 객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관찰사나 수령이 되려는 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선데 공은 도리어 손해만 보고 있다."

이 일이 알려져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당시 사대부들 가운데는  청렴결백한 법도로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우리 집의 법도는 당시로서도 너무 지나치다고  일컬어졌

다. 그럼에도 우리 집안은 그런 명성을  자부하지 않았다. 고을 수령들은 으레 집에  선물을

보내주곤 했는데 당시 양식이 자주 떨어져 고을 수령들이 보내온 육포와 건어 따위를 찢어

서 아침 식사를 대신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왜 그걸로 쌀을 팔아 밥을 짓지 않으시는지요?"

조모께서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다.

"시정 사람들에게는 공경 집안의 가난함을 알려서야 되겠어요?"

무릇 이런 사실들은 모두 자손들이  몰라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 집안은  수십 대에 걸쳐

청빈함과 검소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원래 타고난 것이었다. 내 비록 너희들이 따뜻한 옷

을 입고 배부르기를 바라지만 부귀와 안일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다만 바라는 건 사대부 집

안으로서 글 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 뿐이다.


35

아버지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현인 군자가 시무를 안다 함은 매양 남들이 급하게 여기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미리 대

비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인, 군자는 일단 일을 착수하여 시행하면 그 효과가

매우 크다. 가의(전한 문제 때의  충신이다.)는 수백자롤 된 '치안책'이란  글을 올려 태자를

일찍 교육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했다. 이는 저 진평이나 주발(전한때의 공신들)

과 같은 무리는 생각지 못할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묘사화(훈구세력에 의해서 조광조

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사건)  이후 한동안 도학에 대한 논의를  꺼리는 분위기였

다. 당시 인종께서 세자가 되신지 벌써 6,  7년이나 되었건만 세자시강원(세자에게 경, 사를

가르치고 도의를 선도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의 고위 관료들은 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일이 급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때 문강공(박소)은 전랑으로 계셨다. 회재(이언적) 선

생은 문강공보다 5년 먼저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직도 교서관(주로 책의 인쇄  및 반포를 담

당하던 관청)의 한미한 직책에 머물러  있어 별로 아는 자가  없었다. 문강공께서는 선생을

힘껏 천거하여 세자시강원에 근무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두 분이 번갈아가며  궁료가 되어

비로서 정주(성리학자의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세자에게 강론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여론은 아직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경서를 강론하는 일이 급하지 않다는 것이었으

나, 두 분께서는 마음을 합하고 곧음을 함께하여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비록 인종

의 거룩한 지혜는 하늘이 내리신 것이라 하더라도 그 초년에 올바른 도리를 함양한 공부는

실로 두 분이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옛날의 제도에  정7품 이하 관료들의 승진과 인사는

전랑이 담당했으므로 문강공이 회재 선생을  이끌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군자란 세상일에

있어 먼저 할 바와 나중에 할 바를 알지만, 범속한  사람들은 군자가 무엇을 고심하는지 알

지 못하는 법이다."


36

아버지는 언젠가 우리나라 왕실 법도의 엄함을 논하시다가 우리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

를 해주셨다.

"임진왜란으로 임금님께서 피란을 떠난 동파역에 머무시게 되었는데, 교군과 마부들이 뒤

섞여 분잡하였다. 그때 의인왕후께서 밖에 누가 자나가며  '박내승'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

시고는 박내승을 불러오라 분부하시어 문을 사이에 둔 채 말씀을 나누셨다.

'오늘 이곳에서야 오라버니를 만나뵙게 되는군요!'

박내승은 곧 반성부원군의 아드님인 동언공(박동언)이셨다. 의인왕후에게는 오라버니가 딱

한 분 계셨다. 반성부원군은 작고하신 지 이미 오래여서 의인왕후가 동기친척이라곤 내승공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피란길에 처음 상봉했다는 말은 이치에 영 맞지 않는 것 같다.  전해

오는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지만,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내승공은 그 후 10여 년 뒤 작고하셨는데 작고하실 때 직책은 여전히 사복시정 겸 내승이

었다. 선조께서는 나라를 중흥시키는 데 함께한 어린 왕비에게  은혜와 예우를 아주 융숭하

게 하셨으나 그 인척에게는 당상관의 영예를 베풀지는 않으신  것이다. 왕실의 법도가 이처

럼 훌륭했으며, 당시 사대부들 또한 임금의 인척으로서 당상관에  오르는 걸 영광으로 여기

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배들이 혹 전하기를, 청양군 심의겸은 명종의 인척으로서 사림을  구한 공이 있고 반성

부원군의 아우인 문정공은 선조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 훌륭한 인물들을 조정에 많이 진출

시킨 공이 있다고들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단지 문정공께서 조정에 엄숙

한 태도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옹호하셨기 때문에 간사한 무리가 물러나고 어진 이들이 진

출할 수 있었던 거이다. 만약  문정공이 임금의 인척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문정공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할 것이다."


37

가까운 친척 중 아버지와 마음이  가장 잘 통한 분은 교리공  재원과 금성공 명원이셨다.

두 분은 모두 아버지의 삼종형이었다.  교리공은 소론을 주장한 집안이었으나  평소 아버지

앞에서는 당론과 관계된 말을 한 적이 없으셨다. 공은 뜻이 굳세고 기상이 정대하여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홀(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던 물건)을 바로잡고

직언하셨다. 그 말이 모두 바르고 곧아 칭찬할 만하였다. 무술년(1778, 정조 2년)에 올린 상

소는 엄정하기가 추상같아서 가히 정재공(박태보)과 앞뒤를 다툴 만했다. 공은 매번 일이 있

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와 상의 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무어라고 대답하시면 공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가 평소 생각한 것이 자네한테 뭐 그리 신기할 게 있겠나!"

라고 하셨다. 그 의견이 합치되매 기뻐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금성공의 조카인 판서공(박종덕)이 금성공께 무슨  일을 아뢴 적이 있었다. 금성공께서는

그 일의 가부를 논한 다음 조금 있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일은 아우 미중(박지원의 자)과 상의해라. 그는 일을 논함이 명쾌하고 사사로운  감정

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아버지는 언젠가 금성공의 충성스러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형님은 50여 년 동안 대궐에  출입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님을 섬겨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처리한 게 아주 많았다. 그러므로 그 공적을 역사책에 기록한다면, 내리 두  임

금님을 섬긴 충성스런 신하라 이를 만하다. 나는 그 묘지명을 쓸 때 대궐과 관련된 일은 모

두 빼버리고 서술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까닭은 실로 이 형님의 본래 뜻이 자기가 한 일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데다가 또 나 같은 바깥 사람이 사사로이 기록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형님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쓴 글이나 '열하일기' 중에서 언급한

내용 역시 모두 형님의 한 자잘한 면모만 말했을 뿐이다."


38

아버지는 선배들 이야기만 나오면 꼭 다음 말씀을 하셨다.

"내가 본 바로는 유안공(이보천)이야말로 진정한 처사셨다."

나는 언젠가 이렇게 여쭌 적이 있다.

"유안공의 학문과 기상은 어떠하셨습니까?"

"공은 늘 주자가 편찬한 '소학'을 독실히 따르셨다. 그리하여 법도로 자기 몸을 단속해 그

토록 근엄하셨지만, 담소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실 때는 호걸스런  선비의 빼어난 기상이

있으셨다. 나는 종종 과격한 말을 하여 중도에서 벗어날  때가 있었는데 공께서는 그때마다

정색을 하고 나를 꾸짖으셨다. 그러나 내가 방에서 물러나오면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미

소를 짓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마음으로 깊이 통하는 바가 있어서였을 게다."

아버지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유안공은 만년에 시골집에 계시면서도 종종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십 수백 년 후의

국가 장래에 대해 걱정하셨다. 그러니 정말 향리에 있으면서도 임금을 잊지 않은 분이라 할

만하다. 늘 나더러 자취를 감춰 은둔하라고 타이르면서 개연히 말씀하시기를,  

'선비가 과거를 포기하고 벼슬을 단념한 채 자기 한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향리로 돌아

간다 할지라도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런 마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라고 하셨다.

공의 기제 때면 지팡이에 의존하는 향리의  늙은 하인들까지 꼭 찾아와 제사에  참여했는

데, 제사를 끝낸 뒤 음식을 나누어주면 반드시 손을 씻고 옷깃을 여민 후 꿇어앉아  먹었다.

공께서 집안을 다스린 법도가 하인들까지 교화시켰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39

어느 날 손님 한 분이 아버지꼐 말했다.

"공의 주량은 선배들도 좀처럼 미칠 수 없을 듯하외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젊을 적에 미호(김원행)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마침 형제분끼리 서로 술잔을 기울이

고 계십디다. 댁에 막걸리를 한 동이 담았는데 이제 막  익어 놋사발 뚜껑으로 따라 마시고

계신 중이었지요. 그 날 저녁에 술 한 동이를 다 비우셨는데, 다들 정신이 또렷하고  기운이

펄펄하여 평상시처럼 담론하시더군요. 그러다가 밤이  되자 다시 남은 술찌끼를  짜서 마저

들지를 않겠소. 내가 당시 그 광경을 목격하고 탄복하였소이다. 그러나 미호공께서 평소  술

을 드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바로 이 점이  선배들을 따라잡기 가장 어려운 점이

지요."


40

아버지께서 강산(이서구) 댁의 모임에 참석하셨을 때다. 아버지는 좌중의 여러 사람과 효

효공(김용겸) 생전의 일을 화제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곁에 앉아 있던 한 젊은이가  공을

뵙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네, 그 얼굴을 보고 싶은가?"

라고 말씀하시더니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가져와 붓으로  공의 작은 초상을 그려보이셨다.

강산이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꼭 닮았어요!"

강산은 그 그림을 간직하여 큰 보배로 삼았다. 효효공을 뵌 사람들은 모두 몹시 기이하게

여겼으며, 완전히 똑같다고들 하였다.


41

아버지는 늘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하셨다.

"젊은이들이 정공부(성리학의 용어, 고요히 앉아 심성을 수양하는 일을 말한다.)를 하느라

혼자 있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고요히 혼자  있는 중에 사악하고 편벽된 기운

이 끼여들기 쉬운 법이다. 신독(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의 공부가 있어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는담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남들과 함께 거처하며 악의 싹을  미연에 막는 게

낫느니라. 상고시대 사람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학교에 모여 공부하게  한 뜻은 단지 공부

에 서로 도움을 주고자 해서만이 아니었다."


42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이 고요한 곳에 깊이 거처하여 물욕에 접하지 않을 때에는 그 마음이 밝고 기운

이 맑으므로 도리에 맞게 행동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시끌벅적하고 복잡ㅎ

한 상황에 처하면 왕왕 까마득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잘못되거나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세상 경험이 없어서는 안된다. 옛날 만석이라는 중은 10년 동안 참선을

했지만 끝내 한 여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 또한 세상 경험이 없

던 탓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내가 볼 때 젊은이로서 그윽함과 고요함을 좋아하는 자는  대개 양기가 부족한 자다. 양

기가 넉넉한 젊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윽함과 고요함을  좋아하겠느냐. 이것은 물이 축축

한 데로 흐르고 불이 마른  데로 번져가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양기가 많은 자가

그윽한 곳에 은둔해 사는 것은 공부하는 데 좋지만, 양기가  부족한 자가 그렇게 한다면 양

기가 점점 미미해져 마침내는 흩어져서 떨치지 못하게 된다. 이 점은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

다."


43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너희들이 갑자기 과거에 합격해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재주와 학문이 넉넉하

지 않은데 세상일까지 복잡하면 혹 자신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게 되느니라. 내가 초년에 겪

었던 일을 생각하면 두렵기만 하다. 과거야  뭇 사람을 따라 응시해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만약 과거를 단념했다고해서 고상한 이름을 얻는다면 이 또한 기쁜 일이 못된다."


44

나의 형님께서 성균관 시험에 응시하려 한  지 여러 해였다. 갑인(1794), 을묘년(1795) 사

이에 강산 이공이 성균관장으로 계셨다. 당시의 중론은 만일  이공이 겨울에 실시하는 시험

을 주관한다면 반드시 형님을 합격시키리라는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안의현감으로 계셨는

데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성균관장과 친밀한 사이임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친밀한 사람이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 못될뿐더러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에게도 누를 끼치는 일이다.

그러니 응시하지 않는 게 좋겠다."


45

청안 현감을 지낸 이광현은 고지식하고  강직한 분이었다. 일찍이 남이  아버지를 헐뜯는

말을 듣고서 그런 줄 여겼는데 만년에 지계공을 따라 아버지를 찾아뵌 후 사람들에게 말하

기를,

"나는 하마터면 연암공이 우리 시대의 인물 가운데 한  분임을 알지 못할 뻔했소이다. 내

비로소 근거없는 비방을 듣고 사람을 판단함이 망녕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구려."

라고 하였다. 이후로 이공은 자주 찾아와 옛날 사람들이 행하던 사우의 예를 다해 아버지를

공경하였다.

임술년(1802) 봄이었다. 이공은 제릉령에 임명되어 부임할 예정이었으며 아버지 또한 연암

골로 떠나실 참이었다. 두 분은 함께 출발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공교롭데고 그 날은 내가

정시를 보는 날이었다. 이공은 아버지께서  틀림없이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서  시험 결과를

기다릴 것이라 생각하고 작별을 고하러 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새벽밥

을 드신 후 이공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분은 말을 나란히 타고 출발하셨

다. 당시 아버지는 연암골에 들어가 시내에다 정자를 세우시고 몇 달을 머물다  돌아오셨다.

이 일이 있은 후 이공은 남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 마음에 누군들 자식의 과거시험에 마음  졸이지 않으리오만, 연암공만은 그렇지 않

더이다. 내가 당시 길을 가거나 유숙할 때 공의 태도를 눈여겨보았는데 조금도 자식 과거시

험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연암공은 참으로 우뚝한 인물로서 우리가 따라갈 수 없

는 분이 아니겠소!"


46

아버지께서 만년에 병환 중이실 때 붓을 잡아 큰 글자로 "인순고식, 구차미봉"(낡은 인습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적당히 임시변통으로 땜질하는 태도를  뜻

하는 말)이라는 여덟 글자를 병풍에 쓰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천한 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

라고 하셨다.


47

아버지께서 면천군수로 계실 때 흙벽돌을 찍어내는 틀을 제작하셨는데 그 테두리에  다음

과 같은 글을 써넣어 우리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하셨다.

"공자님 같은 성인도 비천한 일에 능하셨고 도간처럼 근검한 사람도 벽돌을  나르며 자기

몸을 수고롭게 했다. 너희들은 아이 종을 부려 매일 몇  개의 흙벽돌을 찍어내고 그것을 몸

소 운반하여 햇볕에 말린 후 쌓아두도록 해라. 이 일은 첫째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둘

째 집을 넓힐 수가 있다. 그러니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나는 그 당시 내 방에다 '운재'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아버지의 이 글에서 따온 말이다.


48

굿이나 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당이나 판수가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면  그 집은 필시 망하느니라.  나는 그런 경우를

여럿 보았다."


49

학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다.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분명하게 하고, 집을 한 채 짓더라도

제대로 지으며, 그릇을 하나 만들더라도 규모 있게 만들고, 물건을 하나 감식하더라도  식견

을 갖추는 것, 이것이 모두 학문의 일단이다."


50

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효는 자식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지만, 그 본분을 충분히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

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효자라는 칭송을 받는 것은 자식으로서 바랄 일이 아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어버이의 똥을 맛보거나(부모의 건강 상태를  알기 위해 하는 일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일은 효자의 작은 일에 불과하다."


51

선과 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원래 자기 몸에 갖추고 있는 이치거늘 신명이 굽어본다 할

지라도 사람들이 행하는 선에 따라 일일이 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마땅히 해

야 할 일을 한 것이므로 딱히 훌륭하다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악은 단 한가지

라도 행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 이는 어째서일까? 마땅히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이므

로 미워하고 노여워할 만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을 행하여 복을 받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

고, 오직 악을 제거하여 죄를 면할 방도를 생각함이 옳다."


52

귀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양은 신명이 되고, 음은 귀신이 된다. 귀신이란 딴  데 있지 않으니, 사람의 마음속에 있

다. 착한 생각이 드러나는 것이 신이고 악한 생각이 잠복해 있는 것이 귀이다. 그러므로  올

바른 도리와 사사로운 이익이 마음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 곧 귀신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예로부터 악인이 나쁜 일을 할 적에는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 그 일이  드러날까 두려

워하며 반드시 숨기고자 한다. 현인 군자가 꼼짝달싹할 수 없는 함정에 빠져 욕됨과 모함을

밝힐 도리가 없다 할지라도 끝내는 시비 곡직이  환히 드러나 흑백을 가리울 수 없는 법이

다. 이 또한 귀신의 섭리이니,  그래서 '중용'에서는 '진실됨을 가리울  수 없음이 이와 같구

나!'라고 말한 것이다."


53

굴신(굽힘과 폄)의 이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굴신은 자연의 이치다. 약손가락이 굽혀진 채 펴지지 않는 것도 병이거니와 펴지기만 하

고 굽혀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병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자신의 운명

에 만족하고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54

만년에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한 공자의 말씀에서 더욱 참된  이치를 깨

닫게 된다."


55

아버지께서 지계공의 집을 방문했을 때다. 공은 어쩌다가 어린 자식과 밥상을 같이하여 식

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를 보시고

"군자는, 손자는 안아주지만 자식은 안아주지 않는 법일세"

라고 말씀하시자 공은 식사를 중단하고 자기가 잘못했노라고 사죄했다.


56

이공 홍유가 교외의 집으로부터 찾아오면 아버지는 그를 2, 3일 묵게 하면서 함께 시문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역대 선비들 사이의 공론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셨다. 그리고 돌아갈 때

면 반드시 무엇을 주어 보냈으니, 이는 이공이 효성이 지극해 남에게 쌀을 얻어다 어버이를

봉양했기 때문이었다.


57

아버지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


58

아버지는 사사로이 도살한 고기를 드시지 않으셨는데,

"그런 고기는 맛 또한 좋지 않더라."

라고 말씀하셨다.

연암골의 금학동에 계실 때 어떤 사람이 기러기 고기로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아버지는

좋지 않은 낯빛이었으며, 드시지 않은 채 밥상을 물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줄을 지어 나는 기러기는 곧잘 형제에 비유된다. 그래서 먹기가 싫구나."

언젠가 진지를 드실 때였다. 까마귀 두 마리가 뜨락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는 "너희들 반포(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먹이를 물어다가 늙은  어미에게 먹인다는 뜻)하러

왔느냐?"

라고 하시더니 몇 조각 고기를 섬돌 아래에 던져주셨다. 그러자  과연 한 마리가 그 고기를

물고 가 반포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슬픈 표정으로 그 광경을 이윽히 바라보셨다.

아버지는 집 안에 개를 기르지 못하게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하지만 기르면 잡아먹지 않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는 게 낫다."

우리 집안에서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좇아 개를 기르지 않는다.

언젠가 타던 말이 죽자 아버지는 하인에게 분부해 장정들을  모아 묻어주게 하였다. 그러

나 하인들은 공모하여 말고기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다시 문하에

있던 사람에게 명하여 살과 뼈를  잘 수습하여 묻어주게 하였다. 그리고  그 하인의 볼기를

치게 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과 짐승이 비록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이 말은 너와 함께 수고하지 않았느냐?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느냐?"

마침내 그 하인을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그 하인은  문 밖에서 몇 달이나 대죄(죄인이 처

벌을 기다리는 것을 일컫는 말)한 다음에야 비로소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59

아버지는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않으셨다. 이공 희천은 훌륭한 분이건만 억울하게 목숨

을 잃었다.(나라에서 금한 중국 서적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아버지는

당시 마음속으로 애통해하셨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후 아버지는 '이몽직의 죽음을 슬

퍼함'이라는 글을 지어 그 끝에다 글을 지은 동기를 밝히셨다.

이몽직은 절도사 이관상의 아들로, 남산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던  중 잘못 날아온 화살에

마장 그만 목숨을 잃었다. 이공과 마찬가지로 비명에 죽은 것이다.


60

아버지가 안의현감으로 계실 때다. 하루는 낮잠을 주무시고 일어나 슬픈 표정으로 아랫사

람에게 분부하셨다.

"대나무 숲 속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깨끗이 쓸어 자리를 마련하고  술 한 동이와 고기,

생선, 과일, 포를 갖추어 성대한 술자리를 차리도록 하라!"

아버지는 평복 차림으로 그곳에 가셔서 몸소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올리신 후 아무 말씀

도 하지 않으시고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서글픈 기색으로 일어나셨다. 그리고 상 위에 차린

음식을 거두어서 아전과 하인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여 뒤에 가만히  여쭈어보았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

셨다.

"접때 꿈에 한양성 서쪽에 옛 친구들  몇이 날 찾아와 말하기를 '자네, 산수  좋은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왜 술자리를 벌여 우리를 대접하지 않는가'라고 하더구나. 꿈에서 깨어  가만

히 생각해보니 모두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마음이 퍽 서글프더구나. 그래서 상을 차려 술을

한잔 올렸다. 그러나 이는 예법에 없는 일이고 다만 그러고 싶어서 했을 뿐이니, 어디다  할

말은 아니다."


61

아버지는 유상국(유언호)의 훌륭함을 이렇게 칭찬하셨다.

"언젠가 큰 눈이 내린 날이다. 사경(유언호의  자, 친밀한 사이에는 자로 부른다.)이  자기

집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당시 정승이 된 지 이미 오래였건만 방 안에는 바람을 막는 병풍

하나 없더구나. 홑이불이라고 있는 건 해어졌고, 자리 곁에는  몇 권의 책이 있을 뿐이었다.

옛날 안성에서 포의로 지낼 때와 똑같더구나. 자주 술을 데워오게 했지만 다른 안주라곤 없

고 손과 주인 앞에는 이가 빠지고 투박한 큰 사발에 가득  담은 만두 100여 개뿐이었다. 날

이 샐 무렵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의 폐단을 없애는 방안이었는데,

이야기 도중 문득 탄식을 하면서 자신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 근

검함과 충후함이 이와 같았다.

사경은 일찍이 내가 지은 글이 궁궐로 흘러들어가 관각(홍문관과 예문각을 합하여 일컫는

말)에서 서로 돌려가며 읽는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몹시 걱정하면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 근

신하게 했다. 내가 스스로 뽐내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찌 모르리오만 그

럼에도 정성스럽게 충고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그가 벗을 사귀는 도리가 이와 같았다.

또한 사경은 늘 스스로를 경계하기를,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한 숟가락이라도 과식하면 곧 체하거나 토하거나 설사를 하게 된

다. 그러니 음식보다 더 중대한 것에 있어서야 털끝만큼이라도 탐욕을 내서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안분자족함이 이와 같았다."


62

또 백안 김상국(김이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백안과 나는 약관 때부터 친구였다. 그는 벗을 사귐에 정성스러웠으며, 일을 함에는 박력

이 있었다. 또한 성격이 굳세어 남에게 굽히지 않았으며, 누구한테 욕을 당하더라도  노여워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그가 큰 성취를 이루리라 기대했다. 훗날

그가 세상에 나가 입신한 바를 보니 젊을 때와 똑같았다."


63

아버지께서 강가의 정자에 우거하고 계실 때 이공 양회가 찾아와 서로 친교를 맺었다. 이

공은 성격이 꼿꼿하고 곧아 좀처럼 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건만 유독 아버지에 대해서

만큼은 첫 대면에 오랜 친구 사이처럼 되었다. 이공은 4, 5리 떨어진 곳에 그 집이 있었지만

날마다 말을 타고 찾아와 고금의 일을 논하였다.

무신년(1788) 봄, 우리 집안은 온 식구가 성홍열에 걸려 나의 큰누이와 형수가 차례로 돌

아가셨으며, 형님도 위독한 상태였다. 집에 드나들던 의원은 병이 옮을까 두려워 숨어서  나

타나지 않았다. 그 의원은 본래 이공 집안 사람이었다. 이공은 그 사실을 전해듣고 몸소  우

리 집으로 와서 그 의원을 불러다가 야단을 치고는 약을  구해 치료하게 하였다. 그 덕택에

형님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이공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다.

"내가 만년에 연암을 만나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거늘 그 집안의 우환을 내  어찌 가

만히 앉아 보고만 있겠소?"


64

이면구는 언젠가 나의 형님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의 자형 김광서(김기무)가 저에게 주의를 주면서 이런 말을 합디다. '연암 어른처럼 근

엄하신 분은 지금 세상에 달리 없을 걸세. 내가 이 어른을 모시고 노닌 지 여러 해라네. 근

세에 어른으로 일컬어지는 분들 치고 서로 담소할 때 비속한 말로 우스갯소리를 하지 않은

분이 없네만 이 어른이 그러시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때로 젊은 축들을 만나면 혹 우스개소

리를 하시기도 하지만 이 또한 모두 이치가 있는 말로서 글을 옮겨놓으면 다 격언이 될  만

하다네. 아마도 이 어른께서는 이를 통해 자신을 숨기고 세상을 조롱하는 것일 걸세. 후생들

이 이런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하게 함부로 대한다면 이 어른의 안목에 어찌 허물로 보

이지 않겠나?' 저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연암공을  곁에서 모실 적마다 가만히 살펴보았

는데 정말 자형 말이 틀림없었습니다."


65

아버지는 저술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글 짓는 데 있어 그 재주가 제각각이다. 시문을 잘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술을 잘 하는 사람도 있다. 이덕무 같은 이는 저술의  재주가 있음에도 애석하게 거작을 쓰

지는 못했다. 유계방 부자는 저술의 재주가 있는데다가 좋은 글감을 얻었으니, 왕명을  받들

어 편찬한 '춘관통고'(예조가 관장하는 일을 오례로 나누어 기록)  같은 책은 우리나라의 훌

륭한 문물이다. 그 체제와 범례는 중국 사람에게 보이더라도 부끄러울 게 없다. 무릇 저술하

는 사람에게는 네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근본이 되는 학문을 갖추기가 어렵고, 둘째 공정하고 밝은 안목을 갖추는 게 어려우

며, 셋째 자료를 총괄하는 역량을 갖추기가 어렵고, 넷째 분명하고 명쾌한 판단력을  갖추는

게 어렵다. 그래서 재주, 학문, 식견,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제대로 된  저술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술하는 재주는 참으로 얻기 어렵다 하겠다."

'계방'은 유공 의양의 자이다. 공의 아드님이신 석송거사 영은 나의 장인이시고, 지산 화는

그 아우이시다. 석송 어른은 문장과 행실이 있었고 '주역'에 조예가 깊었는데, 유공께서 왕명

을 받들어 '춘관통고'를 편찬할 때  곁에서 많이 도와드렸다. 아버지는  유공 부자가 저술의

재주가 있다고 늘 이처럼 칭찬하셨다.


66

아버지는 안의에 계실 때 이덕무의 죽음을 전해듣고 몹시 애통해하시며 이렇게  탄식하셨

다.

"애석하도다! 인재가 한 사람 사라졌구나. 나라에서 무관으로 하여금 글 짓고 저술하는 일

을 맡겼더라면 필시 한자리를 차지하여 크게 볼 만한 것을 내놓았을 텐데!"

아버지는 지계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셨다.

"무관이 죽다니! 꼭 나를 잃은 것 같아."


67

아버지는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셨다. 비록  미천한 여항(서민이 사는 동네를 가리

키는 말)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뛰어난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아끼고  사랑하여 이끌어 주셨

다. 이기득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 신분이 중인이었다. 나이는 열두엇밖에 안됐지만 차분한

데다 이해력이 깊었다. 아버지는 그를 몹시 사랑하여 사서를 가르쳤다. 그는 정밀하게  궁구

하고 힘써 행했으며, '꼭 안회같은 사람이 되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기력히 약하고 융통성이 없음을 병통으로 여겨  먼저 산학(오늘날의 수학)을 공부하게

하며

"복집하게 뒤얽혀 변화하는 게 산학의 이치니, 산학을 공부하면 너의 꽉막힌 병통을 고칠

수 있을 게다."

라고 하셨다. 기득은 산학을 공부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통달하여 모르는 게 없었다.  다시

판서 서호수가 산학에 정통했는데, 기득이 어진데다 산학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불러다

가 누가 나은지 겨루어보고자 하였다. 기득은 기뻐하며 찾아가  뵙더니 이후로는 다시 찾아

가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그 연유를 묻자 기득은,

"지난번에 찾아 뵙고 말씀을 나누어보니 실력이 저와  비슷했습니다. 공부에 별로 도움이

되는 바도 없는데 어찌 재상 문하에 출입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 후 아버지께서 연암골에 들어가시자 기득은  말고삐를 잡고 따라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함께하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물 몇 살 때 결핵으로 죽었는데, 아버지는 그의  병

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몸소  찾아가 영결하였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기득의

처 오씨가 찾아와 곡을 했으며 심상(상복은 입지 않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하며 3년

상을 지내는 것으로, 제자가 스승의 상을 당했을 때 하던 예)을 지내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이는 돌아가신 남편의 평소 뜻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기득은 손수 베껴 쓴 '소학감주' 한 책을 남겼는데, 아버지는 늘 그  책을 책상

에 두셨다.

우리 집의 옛 청지기 가운데 김오복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아버지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

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그 다음날 죽었다.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들 했다.


68

박천 군수를 지낸 백동수는 아버지와 동갑인데, 힘이 몹시 세고 몸이 매우 날랬으며 담력

과 지략이 있었다. 예를 갖춰 아버지를 섬기기를 마치 비장이 장수를 섬기듯하여, 어려운 일

이든 쉬운 일이든 궂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조금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어디서

잔뜩 취해갖고 와 아버지 앞에서 술주정을 했다. 아버지는

"자네 소행이 무례하니 볼기를 맞아야겠다."

고 말씀하시더니 판자때기로 볼기짝 열 대를 쳐서 그 거칠고 경솔함을 나무랐다. 백군은 처

음에 장난으로 그러시는 줄 여겼는데 나중에 그것이 꾸지람인 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있

고 나서부터 백군은 감히 다시는 술을 마신 채 아버지를 뵙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내가 언젠가 연암공의 책망을 들은 적이 있소이다."

라고 말했다.


69

우리 집안은 노소분당 이래 신임사화에 이르기까지 노론으로서 비타협적인 입장을 견지했

지만, 당론을 갖고 언쟁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가 친척 중에 당론을  달리하여

소론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강가의 정자에 계실 때다. 아버지의  삼

종형이신 좌원과 우원 형제분들 및 이공 양회가 자리를 함께하셨다. 이 분들은 모두 소론을

주장하는 집안이었지만 아버지와 정분이 두터웠다. 그런데 담소 중에 당론과 관계되는 말이

나와 주장이 서로 어긋나자 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그럼 오늘 한번 옳고 그름을 따져봅시다."

라고 하시더니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게 된 원인에서부터 신임사화의 본말에 이르기까지  낱

낱이 따지면서 소론측이 간사한 마음으로 요리조리 음모와 술책을 부린 일을 명확히 지적하

셨다. 세 분은 번갈아가며 소론을 변호하였고 아버지는 혼자서 그 분들을 상대하셨다.  이렇

게 사흘 밤낮을 논쟁했지만 아버지는 조금도 뜻이 꺾이지  않으셨다. 왕왕 목소리를 높이셨

으며, 화가 나셔서 손에 쥐고 있던 쥘부채와 여의 등을  내리치는 바람에 그것들이 죄다 부

숴졌다. 이에 세 분은 모두 껄걸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씀하셨다.

"연암의 당론이 참 무섭구먼!"


70

하루는 아버지께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필운대(서울의 인왕산에  있던 명승지)에 올라 봄

경치를 구경하셨다. 그 무렵 이재함이라는 자가 그곳에서 거짓 미친척하며 좌중을 매도하여

공경과 귀인 치고 그 자에게  봉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자를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이 날 그 자는 바야흐로 종이를 펴놓고 먹을 갈아 꽃을 바라

보며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곁에는 술병 서넛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는 무심코 그 앞을  지

나갔다. 그러자 그 자는 큰소리로 "미중!"하며 아버지의 자를 부르더니, 커다란 놋쇠 사발에

다 술을 가득 따라 아버지께 권하며 말했다.

"지금 세상에 남자다운 사람은 너밖에 없다!"

아버지는 단숨에 들이킨 후 술잔을 던지고 일어서며 그 자를 크게 꾸짖었다.

"예끼! 이 어린 놈아. 어른이 지나가는데  예의를 차리지는 못할망정 함부로 자를  부르며

농담을 한단 말이냐!"

마침 아버지 일행 가운데 먼저 올라온 몇몇  분이 그 자에게 붙들려 자리에 앉아 있었는

데, 아버지께서 일어서시는 걸 보자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자네가 아니었더러면 우리들은 필시 욕을 보았을 게야."

아버지께서 그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바로 이재함이라는 것이었다. 재함을 훗날 사람들에

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접때 필운대에서 박연암을 만난 적이 있지. 정말 무섭더군."



71

아버지가 면천군수로 계실 때다. 하루는 성 동문에 오르셔서,

"앞이 훤히 트여 가슴속의 찌꺼기를 씻어낼 만하구나!"

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이 날 달을  구경하시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오셨다. 그  날 밤 ,

귀신이 한 마을여자에게 붙었다. 그 여자는 미쳐서 귀신의 말을 해댔다.

"나는 원래 객사에 있었는데, 새 군수가 부임해오자 그  위엄이 무서워 동문에 피해 있었

다. 그런데 이제 군수가 동문에 와서 달을 구경하니 아는 어디 갈 데가 없다. 그러니 지금부

터 너한테 붙어 살아야겠다.!"

그 여자는 발광하여 고래고래 소리치며 이리저리 날뛰었는데, 그  하는 짓이 영락없이 귀

신이었다. 날이 밝자 그 남편이 붙들어다가  관아 문 밖에 데려왔다. 때는 바야흐로  관아의

업무가 시작되던 참이었다. 그 여자는  관아의 일을 논하는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듣자 놀라 겁을 내더니 울부짖으며 달아났다. 그 후 병이 싹 나았다고 한다.


72

아버지께서 면천에 부임하실 때 일이다. 부임길이 고을 남문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

런데 아전들은 쭉 있어 온 일이라며 이런 말을 아뢰었다.

"새로 부임하는 사또가 남문을 경유하면 반드시 빨리  해임되는 액운이 있었습니다. 그래

서 길을 우회하여 다른 쪽  문으로 들어갔으며,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

다."

아버지는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아버지는 끝내 남문 쪽으로 들어가셨다.  아전들이 전레를 들먹거리며 남문이  아닌 다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 것은 애초  새로 부임하는 사또의 국량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

다. 그렇건만 부임하는 사또마다 거기에 굴복해 길을 우회했기 때문에 금기처럼 되어버렸던

것이다.


73

아버지는 글 짓는 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론 부분의, 말이 전환되는 곳에는 깔끔하고 진중한 글자를  써야 글의 울림이 밝고 조

리가 명쾌해진다. 비단 시민의 글의 울림을 중요시하는 게 아니라 산문 역시 마찬가지다."


74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옛날 사람들은 그냥 말로 할 때에도 흔히 운을  썼으니, 설사 다급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삼로의 직위에 있던 동공이 한고조를 가로막으며 한 다

음 말이 그러하다.


덕을 따르는 자는 번창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옵고


명분 없이 군대가 충돌하면요

일을 이룰 수가 없는 거지요


그가 역적임을 분명히 밝혀야

적을 굴복시킬수 있을 거외다.


또한 약승이 황제가 자기를 때리려 하자 침대  밑으로 달아나 숨으며 한 말인 다음 말도

그러하다.


신은 천지는 온화하고 제후는 성대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듣지 못했습니다, 천자가 몸소 일어나 낭을 때린 적이 있다는 말은


이는 모두 말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문장을 이룬 경우라 하겠다. '서경과 같은  경전에도

왕왕 운을 쓴 곳이 있다."


75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주역'의 단전과 상전은 모두 운을 썼지만, 괘사와 효사 또한 운을 쓴  곳이 있다. 이르테

면 건괘의 '현룡재전'(용이 나타나 밭에 있음)과 '군자종일건건'(군자가 종일 부지런히  힘씀)

이라든가, '흑약재연'(용이 혹 연못에서 뛰어놂)과 '비룡재천'(용이 날아가는 하늘에 있음) 같

은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곤괘의 '이상'(서리를 밟음)과 '직방'(곧고  방정함)이라든가, '함장'

(아름다움을 속에 감추고 있음)과 '괄낭'(입을  다물고 있음), '황상'(누런 치마)과  '기혈현황'

(그 피가 검고 누름) 같은 것이  모두 운이 맞는다. 뿐만 아니라 건괘의  '잠룡'(물속에 잠겨

있는 용), 항룡(높은 데 있는 용), '견군룡'(뭇 용을 봄)은 옛날에는 대개 협운이었다.

이로써 미루어본다면 괘와 효 자체만으로는 뜻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괘사와 효

사를 붙인 것이고,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다시 후대의  성인이 해석하는 글을 덧붙인

게 아니겠는가? 가령 건괘를 예로 들어본다면, 처음에는 다만  이런 말들로만 되어 있을 턴

이다.


맨 아래의 양효는 물속에 잠겨 있는 용이다.

두 번째 양효는 용이 나타나 밭에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양효는 군자가 종일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다

네 번째 양효는 용이 혹 연못에서 뛰어노는 것이다.

다섯 번째 양효는 용이 날아 하늘에 있는 것이다.

맨 위의 양효는 높은 데 있는 용이다.

양효를 씀은 뭇 용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성인이 각 구절 뒤에 각기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한 것이다.


쓰지 말지니라.

대인을 뵙는 게 이롭다.

밤에까지 근신한다면 위태롭기는 해도 허물은 없으리라.

허물이 없으리라.

대인을 뵙는 게 이롭다.

후회가 있으리라.


다른 괘도 모두 이와 비슷하거니와 만일 운자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 뒷구절은 곧 후세의

주석쯤에 해당할 것이다. 모기령 역시 '주역'의 글에 운이 있다는 학설을 제기한  바 있지만,

'전'과 '인', '천'과 '인', '유회'와  '무수'를 운이라 한 것은 도리어  견강부회와 억지에 가깝다

할 것이다.

내가 젊은 시절 '주역'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어 단릉(이윤영) 어른께 가서 여쭈

었더니, 그 어른께서는 대단히 기특하게 여기시며 이전 사람이  밝히지 못한 바를 밝혀냈다

고 말씀하셨다."


76

아버지는 시를 퍽 적게 남기셔서 고체시(절구나 율시와 같은 근체시가  생기기 이전에 존

재한 한시 형식, 근체시에 비해 형식이 자유롭다.)와 근체시를 다 합해도 50수 밖에 되지 않

는다. 고체시는 전적으로 한유(당송 8대가의 한  사람. 고체시에 능했는데, 시풍이 기이하고

험준한 것으로 유명)를 배웠지만 그 기이함과  험준함은 한유보다 더했으며, 이미지가 핍진

하고 필력이 굉장했다. 절구나 율시  같은 근체시는 그 형식적 구속  때문에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종종 한두 구절 짓다가 그만두신 적이 많다.

이덕무는 '청비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연암의 산문은 천하에 오묘하다. 그러나 공은 시만큼은 몹시  삼가 좀처럼 지으려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포청천이 잘 웃지 않아 그가 한번 웃는 일이 100년에 한번 황하가 맑아지는

데 비견된 것처럼 많이 얻어볼 수 없다.

박제가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 보기 어려운 법

연암 시를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담바라꽃(3천 년에 한번씩 꽃이 핀다는 상상의 나무) 피고 포청천이 웃을 때

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 쓸 때라네.


태호 홍공(홍원섭)은 자주 아버지와 술을 마시며 글 짓는 자리를 가졌다. 공이 충주목사로

있을 때 관사에 불이 났다. 공은 창졸간에 겨우 목숨만 구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공이 성대

중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말이 들어 있다.

한밤중에 불이 나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외다. 상자 속에  넣어갖고 다니던 벗들의 편지가

이번 화재로 인해 모두 재가 되고 말았소이다. 그 가운데 가장 애석한 것은 연암의 시 한편

이외다. 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보배인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소이다.

홍공이 당시 화재로 잃어버렸다는 시가 어떤 시였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는 작은 시를 일일이 챙겨두지 않으셨다. 벗들과 해후하셨을 때 읊은 시 가운데 더

러 남들이 외워 전하는 게 있어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흩어져  망실된 시가 대체 몇 편

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남들이 외워 전하는 게 있어 수습할  수 있었다고 했지만 그것 역

시 온전한 건 아니며 시의 한두 구절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벗 그리워하는 마음 하룻밤에 천 리를 달리고

책상 위 책에는 하많은 사람이 들었네그려.


바라건대 배 타고 만 리 밖 가서

천하의 이름난 누각들을 죄다 봤으면


썰렁한 부엌에 반찬 없이 밥만 한 그릇

빈 누각에 구름은 청산을 넘누나


세상에 나가면 정위위가 되는 것도 괜찮고

문을 나서면 신릉군이 되어야 하리


서너 자 잔설 쌓인 사립문 나가

동이 이고 아내가 새벽 물 긷네


눈 속에 웅크린 곰 발바닥만 핥을 테고

이슥한 밤 둥지의 새는 제 이름만 부른다네


평측을 따져야 하니 시 짓는 일 어렵고

고향 생각에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네


삼월 삼짇날 놀이하니 마침 계축년

흐르는 물에 잔 띄우니 난정이 별건가


어린아이라도 천 마리 소를 치겠네

사방을 둘러봐도 산 하나 보이지 않으니


저 멀리 나그네는 저녁 주막 찾아들고

구불구불 봄 밭 길로 아낙네가 밥 나르네


햇빛이 눈부신 석류꽃 아래 곤드레 취해

박 잎에 부는 바람에 표표히 읊조리네


규방에서 하염없이 달 보고 비는 신세

그 누가 서방더러 군인이 되라 할까


이상의 시구들은 대부분 무엇을 읊으시려 한 건지 알 수 없다.

이덕무는 늘 이런 말을 했다.

"'푸른 물 깨끗한 모래 외로운 섬에

백로는 한 점 티끌도 없네.'

연암의 시는 비단 시상만 오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격 또한  여실히 그려냈다. 시란

이토록 거짓이 없는 것이다."


77

성대중이 홍공(홍원섭)에게 물었다.

"연암 글 가운데 어느 작품이 제일 좋지요?"

홍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평소 연암의 글 가운데 '술  빚는 것을 금하는 정책에 대한 의견'이라는  글을 몹시

좋아하여 횟수를 표시해가며 읽었던 적이 있소이다."

그 후 성대중의 아들 성해웅이 나를 찾아와 그 글을  한번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그제서

야 그런 글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글은 이미 망실되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아! 아버지께서 중년 이래로 여러 차례 환난을 겪으셨으므로 이처럼  망실된 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같은 시대를 산 친구가 횟수를 표시해가며 읽었을 정도면 그 글이 손꼽히

는 글이었음을 족히 알 수 있다. 그때는 이미 홍공도  별세하신지라 어디 물어볼 데도 없었

다. 그래서 지금껏 아버지 문집에 수록하지 못하였다. 그 글을 보신 분들은 꼭 좀 찾아서 보

내주셨으면 한다.


78

죽촌 이공(이우신)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 모습은 연암 어른의 문장을 알지 못하고들 있소이다.  그 어른은 대상의 모습을 핍

진하게 그렸으며 진부한 말을 절대  쓰지 않았어요. 그 분이 지으신  글은 자구가 아담하고

뜻이 참신하여 절로 법도를 이루었지요.  지금 사람들은 이 어른의 글을  그저 지금 사람의

글로만 읽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진가를 모르고  있지요. 간혹 그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한두 글귀를 갖고 운운할 따름이지 글의 요지와 대의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지요. 그러니 어찌 이 어른의 글을  안다고 하겠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그 글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올 거외다. 더군다나 그 글은 실용적인

면에 힘썼으니 후세에 가장 오래도록 전해질 겁니다."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연암공에게 나의 글 몇 편을 보여드려 질정을 받았더라면 필시 '그만하면 괜찮다'는 평을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한스럽군요. 연암공과 나는 글  짓는 법이 다르기는 하나 작자

의 고심처만큼은 서로 이해했을 것 같기 때문이지요."


79

판서 이익모는 아버지의 글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고 한다.

"내가 처음 글을 지었을 때 연암 글보다 낫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섬에 귀양 간 뒤로 내

글이 연암  글에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게 되었다. 이제서야 나는 공부

가 차츰 진전된 후라야 비로소 다른 작가의 글에서 그 고심처를 알아볼 수 있음을 알게  되

었다. "

이상, 이우신과 이익모의 말은 외사촌 형인 이노중이 전해주었다.


80

죽하 김기서가 일찍이 솔경(동궁에 딸린 관아인 솔경시의 벼슬로 대궐의 물시계를 관장하

였다.)에 임명되어 서울에 올라오자 나를 찾아와 친교를 맺었다.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

다.

"신고장(남의 죽은 아버지를 높여 일컫는 말)의 글 가운데 충청 우도(당시 충청도를 좌도

와 우도로 나누어 불렀다.)에 전해지는 것은 제가 다 구해 읽었소이다. 전집은 모두 몇 권이

나 됩니까?"

나는 '연상각선본'(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스스로 자신의 글을 뽑아 엮은 책) 등 여

러 책을 빌려주었다. 뒤에 그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옛날 갈흥(도가 사상가)이 육기의  글을 칭찬하여 '현포(곤륜산에 있다는  신선이 산다는

곳)에 쌓인 옥이 낱낱이 야광주인 것에 비유할 만하다'라고 했는데, 나는 한 때 이말이 지나

치다고 여겼다오. 그런데 최근 연암의 글을 읽고서 비로소 정말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되었소이다. 이 어른의 글은 책을 펼치자마자 1만  길이나 되는 빛이 뻗쳐나와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오. 그러니 평범한 안목밖에 갖고 있지 못한 게 쩨쩨하게시리 글의 형

식에 얽매여 있는 자들과 어찌 그 고하를 비교할 수 있겠소."


81

아버지의 글씨는 그 필획이 굳세고 힘차서 기골이  우뚝한 안진경(당나라의 서예 대가)의

서체에다 조맹부(원나라의 서예 대가, 송설체라는 서체 창안)의 짙고 두터운 서체와 미불(송

나라때의 인물로 서화의 대가)의 기이하고 가파른 서체를 보탠 듯했다. 빼어난 자태가 넘쳐

흘렀지만 그 써 내려가는 법도가 가지런하여, 작은 글씨의 해서로 쓴 시문의 초고들은 모두

서첩을 만들어 보배로 삼을 만했다. 그리고 행서와 초서로 쓴 글씨는 붓자루 끝머리를 잡아

붓을 드리워 팔을 놀려 쓰신 것인데 농담이 잘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이 모두 보배로 간직했

다.


82

아버지가 안의현감으로 계실 때다. 입춘 당일, 밤 사이  온 눈이 한자나 쌓였다. 아버지는

새"芙炤�일어나 관아를 둘러보신 다음 광풍루에 나가 앉아 대나무로 불을 때어 술을 데우

고 춘설을 감상하셨다. 이윽고 아랫사람에게  관아 건물의 기둥이 몇 개나  되는지 그 수를

세어보라고 분부하신 후 종이를 잘라 춘접자(입춘 때 복을 빌기 위해 좋은  글귀를 써서 기

둥에 붙이는 종이)를 쓸 감을 수백장을 만드셨다. 그리고는 아이 종에게 먹 몇 말을 끓이게

하여 사람 주먹만한 양털 붓으로 반나절이나 춘접자를 쓰셨다. 혹 옛날 사람의 율시 중에서

글귀를 뽑기도 하고 혹 새로운 글귀를 지어내기도 하셨는데, 필세가 나는 듯하여 득의한 글

씨가 퍽 많았다.

아버지께서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신 날 저녁이었다. 그 때 마침 저본  '난정

첩'(왕희지가 쓴 난정첩을 모사한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저수량이  모사한 본을

말한다.)을 책상에 올려놓고 몇 차례나 본떠 쓰신 다음 감상하고 품평하며 몹시 즐거워하셨

다. 그래서 곁에 모시고 있던 사람들도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한 일을 싹 잊을 수 있었다.

아버지 만년, 연꽃이 필 무렵의 일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벗들을 불러 반지(반송지를 말하

는데 독립문 북쪽에 있던 못이다.)에 나가 밤에 핀 연꽃을 구경하게 했는데, 당신도 함께 가

겠다는 말씀은 없으셨다. 다음날 새벽, 달이 밝고 이슬이 내려 시원할 때 아버지는 지계공과

함께 걸어서 서쪽 성곽으로 나가셔서  달빛 속에 연꽃을 감상하셨다. 아버지는  이 날 종일

소요하시다가 돌아오셨다. 이는 비록 한때의 놀이에 지나지 않지만, 이를 통해 아버지의  깨

끗하고 드넓은 마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


83

최군 진관이 아버지를 찾아 뵙고 자기 부친인 치옹(최순성, 개성의 갑부)의 비문을 지어달

라고 청하는 한편 비문 글씨도 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버지는  당시 공무에 매여 글을 쓸

틈이 없었다. 그래서 최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만간 자네 부탁을 들어줄 테니, 비석을 준비해 기다리고 있게나."

그 뒤 말미를 얻어 연암골에 들어가셨을 때 최군의 집을  찾았다. 글은 진작 머릿속에 구

상해두었으므로 비석에다 주묵으로 일필휘지하여 당장 새기게  하였다. 글씨의 필획은 굳세

고 아름다운데다 호방하고 시원하여 미불의 서체를 깊이 체득한 것 같았다. 그 고을 사람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고들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집에 그 탁본이 간직되어 있다.


84

이덕무는 '청비록'에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때때로 산수화를 그리셨는데 그 담박하고 그

윽한 정취가 넉넉히 미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붓을 잡고 그림

을 그리시는 걸 직접 본 적은 없다.

하루는 성대중이 아버지께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저는 요사이 좋은 시구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공께서 소나무 한 폭을  그려주셔야 이

일을 실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 옛날 문동(송나라의 화가,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다)이 1

만 척의 대나무를 그렸듯 말입니다."

이에 아버지는 붓을 휘둘러 청정한 소나무를 그려 보내셨다.

나는 언젠가 종손 제상의  집에서 아버지가 쥘부채에 그린  '행단언지도'(공자가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는 광경을 그린 그림)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필법이 진하면서도 섬세하여

공자를 모시고 있는 뭇 제자들의 온화한 모습과 증점(공자의 제자)이  비파 타던 것을 멈추

고 공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림의 윗부분에는 '논어'

의 해당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 집에는 조그마한 산수화 족자 둘과 '일출도', '군선도', '구룡연도' 등  여러 작은 그림

들이 간직되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젊을  때 단릉(이윤영)과 능호(이인상)을 좇

아 노닐면서 간혹 장난삼아 그들의 화풍을 본떠 그리신 것이다.


85

한재렴이 판서 윤시동을 찾아뵈었을 때다.  공은 젊을적 친구들을 모두  꼽다가 아버지의

젊을 때의 일을 언급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친구가 지금 머리 허연 노인이 되고 고을 원으로 고생하고 있는 건 동릉후 소평(진나

라의 동릉후였으나, 진나라가 망하자 가난 때문에 장안의 동남쪽에  있는 청문 밖에다 외를

재배하여 그것을 팔아 생활하였다.)이 가난  때문에 교외에다 외를 심어  생활한 것과 견줄

만하지."

그리고는 오래된 책상자를 뒤적여 바위와 소나무가 그려진 부채를 꺼내 보여주시며,

"이건 그가 그린 그림이야. 내가 보배로 간직해온 지 40년이 넘지."

하시고는 이렇게 탄식하셨다.

"우리가 젊을 때 이런 풍류와 운치가 있었건만 지금은 적막하여 다시 볼수가 없구먼."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젊을 시절 이 친구에게 '목산당기'라는 글을 받아 우리 집 대청을 빛내려  했었는데 뭉그

적 거리다가 그만 부탁하지 못했지. 그게 애석해."

재렴이 물러나와 나에게 이렇게 전해주었다.


86

아버지는 아무 일도 않으며 놀고 있는 청지기들에게 매야 그 재능과 기예를 참작하여 생

계에 도움이 되는 한 가지씩의 방도를 가르쳐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대부는 벼슬을 하면 녹봉으로 생활하지만, 벼슬에서 물러나면 문을 걸어닫고 배고픔을

감내하면서 독서하는 게 그 본분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무  일도 않는다면 배고픔을 견디

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으로서의 예의 염치를 지키기 어렵느니라."

아버지가 안의현감으로 계실 때다. 청지기  아무개로 하여금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에다

만자의 초전(한자 서체의 하나. 전서  모양에 예서의 골격을 지닌 서체인데,  필세가 굳세고

힘이 있다.)을 새기게 했는데, 흡사 비단 옷에 박힌  꽃 문양 같았다. 거기에 안료와 양잿물

등을 먹여 무명배에 대고 눌러찍어 염색을 했는데, 시전에서 배에다 꽃무늬 물을 들이는 법

과 같았다. 혹은 나무에다 그 문양을 새겨 베에 찍어서 이불이나 요, 휘장 따위를 만들어 생

활하게 하였다.

그 후 용호영의 금군(용호영은 대궐을 지키거나 임금이 거동할 때 호위와 경비를 맡은 군

영. '금군'은 그 말 탄 군사를 일컫는 말)이 입는  갑옷이 다 해져 다시 만들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비단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경비가 너무  많이 들었다. 이에 모두 이 방법으로  옷을

만들었는데, 비록 무명옷이기는 하나 그 문양과 색깔이 수 놓은 비단옷과 아무 차이가 없었

고 질기기는 더 했다. 정말 온전하면서도 비용은 저렴하다 할 만했다.

이밖에 혼인할 때 입는 옷 역시 이 방법으로 많이 만들어, 그 청지기는 마침내 많은 이익

을 얻게 되었다. 무릇 공인이나 장인 가운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곧 그 솜씨가 배

어 나아져 다른 장인들과 큰 차이가 났다.


87

아버지는 바둑이나 장기 등의 잡기를 할 줄은 아셨지만 손댄 적은 없으셨다. 나는 아버지

가 남과 바둑 두시는 걸 딱 두 번 보았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는 하릴없이 대청을 오가시다가  홀연 쌍륙

(놀이의 한 가지.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의  끝수에 따라 말을 써서 먼저 궁에

들여보내는 것을 겨루는 놀이.)을 가져와  오른손을 갑, 왼손을 을로 삼아  교대로 주사위를

던지며 혼자 쌍륙을 두셨다. 당시 손님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혼자 놀이를 하시

는 것이었다. 이윽고 웃으며 일어나시더니 붓을 들어 누군가에게 답장을 쓰셨다.

"사흘 간이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람에 어여쁘던 살구꽃이 죄다 떨어져  땅을 분홍빛

으로 물들었구려. 긴 봄날 우두커니 앉아 혼자 쌍륙놀이를 하고 있사외다. 오른손은 갑이 되

고 왼손은 을이 되어 '다섯이야!' '여섯이야!' 하고  소리치는 중데오 나와 너가 있어 이기고

짐에 마음을 쓰게 되니 문득 상대편이  적으로 느껴지외다. 알지 못하겠구려,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해서도 이 역시 물이라 할 수 있을 터이고, 나는  그 두 손에 대해 조물주의 위치에

있다 할 수 있지 않겠소? 그렇건만 사사로이 한쪽을 편들고 다른 한쪽을 억누름이 이와 같

구려. 어제 비에 살구꽃은 죄다 떨어졌지만, 곧 꽃망울을 터뜨릴 복사꽃은 장차 그 화사함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르는 것 역시 사사로움을 두어서인지."

아버지가 편지 쓰시는 걸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님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선생님이

혼자 쌍륙을 치신 게 놀이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글을 구상하기 위해서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88

아버지는 관상, 추명(사주팔자 따위로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추는  잡술.), 점, 풍수 따위의

잡술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은 남한테 물어볼 게 아니다. 선을 따르면 길하고 악을 따르면 흉하게 될 뿐이

다. 관상을 예로 들어보면, 착한 마음이 드러나면 반드시 나쁜 기색을 띠게 되고 악한  마음

이 드러나면 반드시 좋지 않은 기색을 띠게 된다. 덕이 있어 몸이 윤택하고 도를 지녀 얼굴

에 윤기가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악함을 감추고 선한 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

나 남들이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므로 결코 속일 수  없다. 평안하고 공명정대한 군자가 될

것인가, 불안하고 근심걱정에 사로잡힌 소인배가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달렸

거늘 무엇 때문에 관상쟁이한테 찾아가 길흉을 물어본단 말인가.

운수 또한 마찬가지다. 몸가짐이나 남을 대하는 일은 순리대로 하는가의 여부가 종요하다.

화와 복은 그 결과로써 올 뿐이다. 이로 미루어 생각하면 만사가 모두 그렇다. 사람은  세상

을 살면서 모름지기 선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그 운명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풍수에 많이 미혹된다. 나는 편안하거나 길한  땅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묘지를 구하는 사람들이 매양 자기 자신의  화복을 먼저 따지는 게 옳

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사람이 일을 할 때 화를 두려워하고 복에 유혹된다면 이는 사사로운

뜻이 개재된 것이다. 사사로운 뜻이  개재되면 미혹하게 되나니, 미혹되면서 일을  그르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더군다나 아득하고 막연하여 증명할 수 없는 일에 있어서이랴. 자기 자

신의 복을 위해 길지를 얻고자 한다면 천하를 다 돌아다니더라도 필시 얻지 못하리라. 산과

들에 조상의 뼈를 갖고 다니며 큰 복을 구하는 짓을 어찌 한단 말인가. 하늘이 반드시 미워

할텐데 복을 받을 리 있겠는가!"


89

아버지는 중년에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헌에 다 같이 실려 있거나 중국과 우리나라에 함께

관련된 사실들을 뽑아내어 그것들을 모아  하나의 총서를 만들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먼저

목록부터 작성하셨다. 그 후 그때그때 기록하여 책을 이룬 것만도 이삼십 권쯤 됐는데, 책이

름을 '삼한총서'라 하였다. 그러나 강가에  거주하신 이래 집안에 다섯  차례나 상사가 있어

애통함과 환난을 겪은 나머지 다시 그것들을 거두어 정리하시지 못했다. 그 후 벼슬길에 계

시는 동안 책이 흩어져 거의 다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이라곤 묵은 종이

에 기록된 목록뿐이다.

'삼한총서'의 체재는, 특정한 책 전체를 편입하기도  했고, 방대한 책 가운데 한두  대목을

인용한 경우도 있으며, 본래 그런  책이 없지만 여기저기서 글을 뽑아  모아서 책을 만들어

편입한 것이 있는가 하면, 없어진 지 이미 오래여서 그  이름만 전해오는 책에 대해 아버지

의 견해를 첨가하여 후세 사람들의 본격적인 검토를 기다린  경우도 있다. 아래에 제시하는

목록은 대개 초고인데다가 그나마 열 가운데 한둘 남은 것에 불과하다. 우선 여기에다 부기

하여 이루지 못한 일의 대략을 알린다.

고문상서 100편고

회숙신지명서

효경자웅도

회재의 정적대학

주자의 맹자집주

악경

안자조의도

기자실기

기자팔조

역대사 조선열조

조선5후연표

조선5후연표변

범사 중의 순리전

범사 중의 독행전

천자동래록

동래제왕고

화인동군고

한무제 동정장수록

수양제 동정장수록

당태종 동정장수록

황명정왜 장수록

당정백제 장수록

당정고구려 장수록

당정신라 장수록

신라봉작년고

백제봉작년고

역대동래사자고

교빙지

금영록

빈거록

사당록

동국외손제자고

여왕입조록

충선왕 빈유록

당검교 관직록

중국거애고

동인중국후비록

원공주 고려후록

황명사절배신고

화인유환록

선화봉사 고려도경

종계변무시말

무술변무시말

해동천폐고

장백산고

4군2부고

평양도경

발해국지

통왜고

낙랑칠어고

일지록

적방외기

오학편

계원필경

평백제비

황소격

전증이 주를 붙인 유학집

정왜사실

재조번방지

동환봉사

지봉유설

징비록

패해

설부

왕사례부자

고선지

흑치상지

고연수, 고혜진

천남생

안시성주

김인문

김춘추

최치원

장보고, 정년

관구검

동월의 조선부

예겸의 조선기사

봉사록

서긍의 봉사록

황화집

감구집

표영록

탐라문견록

기재잡기

표해록

황해조천록

수로조천록

월사(이정구)의 조천록

월정(윤근수)의 조천록

설해(이만영)의 항해록

잠곡(김육)의 조천록

동명(정두경)의 항해록

설정(이홀)의 조천록

통문관지

어제전운시주

순오지

황공의 일

춘방일기

서현비가 동정을 간한 소

광해군의 부인이 명나라를 배반하지 말라고 간한 소

기황후

공비

여비

진덕여주시

고려비

숭정 때의 궁인

계림 2녀

공민왕후 노국공주

의신공주

양자방언

계림유사

수경

약부공후인주

통전에 인용된 진양추

소자운서

단문에서 통곡한 일

을지문덕시

신라 재상이 백거이의 시를 구득한 일

전당시

미공비급

설령

청일통지

반남선생(박상충)의 척원존명소

삼학사전

황명배신고

노가재(김창업)의 연행록

일암(이기지)의 연행록

도곡일록

식암일록

옥오재일록

야명렴

신라인의 일

설계두의 일

주자어류 중의 고려일 몇 대목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시

소동파가 도경을 태워버린 일

박림표

박충

전겸익의 고려판 유문발

유현자의 동국서적지묵

엄주(왕세정)의 조선삼자문

효심의 일

신라법사

불인의 의천을 대우한 일

양차공의 관반 왕후의 일

부여국주전

김영철전

고려비색

고려인삼사

고려인삼찬

양촌(권근)의 응제시주

왕수재문답

건정필담

당보

사행별단

지북우담

열조시집

명시종

고철조기

고려사기

장백산기

백두산기

명문기상

감저보

서화보

서양철금보

퉁소보

생황보

간죽집

육우인의 묵사

권비

선무사비

김생이 쓴 창림사비

유인원비

관구겸 기공비

팽오통도비

초현원비

관구검 기공비

팽오통도비

초현원비

보광사비


추기

아버지의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의 책이 아직 간행되지  못한

채 고본으로 집에 간직되어 있어 내가 밤낮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축년(1892) 가을, 효

명세자(순조의 아들)께서 규장각의 관원을 보내 아버지가 남긴 글을 올리라 분부하셨다. 나

는 글상자에 간직되어 있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글도 감히  감출수가 없어 전부 다 바쳤다.

그러나 신하와 백성들에게 복이 없는 탓에 이듬해  경인년(1830)에 세자께서 그만 돌아가셨

다. 임금님(순조)께서는 궁궐로 들여온 여러 집안의  서적들을 모두 돌려주도록 분부하셨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글들이 다시 집으로 반환되어 왔다.

나는 반환된 책들을 점검해봤는데, 세자께서 읽으신 흔적이 역력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소리내어 울었다. 매 권마다 종이를 접어둔 것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는데, 대개 옛일을  근거

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강구한 대목  중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는 게 있으면 이런

식으로 표시를 해두신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장난삼아 지은  글로서 세상 사람들이 떠

받들고 있는 작품들에는 일체 표시가 없었다. 아아, 슬기로운 안목을 지니신 세상에 드문 이

런 깊은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만일  저승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신다면 감격해하실  것이

다.

또 생각나는 일이 있다. 지금 이조판서롤 재직 중인  서능보는 예전에 암행어사로 평안도

일대를 둘러본 적이 있다. 돌아와서 임금님(순조)께 보고를 드리자, 임금님께서는 둘러본 고

을의 산천과 풍속, 농사의 형편, 토산품, 백성들의 어려움 등을 조용히 물으신 다음 이런 분

부를 내리셨다.

"이는 의당 기록해두도록 하라! 박연암처럼 서술한다면 퍽 좋겠다. '열하일기'와 '과농소초'

에는 이런 좋은 의견이 아주 많다."

서판서는 나에게 종조 자형이 되는데, 물러나와 이와 같이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합젹한 적도 없고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모신 적도 없지만, 임금님께

서 알아주심은 세 조정을 거치면서 더욱 새롭기만 하다.  효명세자께서 아버지의 글을 올리

라 하신 것은 비단 아버지에게 영광스런 일이  아니다. 아아! 이는 참으로 특별한 은총이라

할 것이다. 책장이 반으로 접힌 곳은 일일이 삼가 붉은 붓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며,  여기에

이상과 같이 그 전후 사실을 기록한다.

신묘년(1831) 초봄에 불초자 종채가 쓰다.


인명해설

강유안(1736-1805). 자는 백심, 호는 기재, 문집으로 '기재집'이 전한다.

거관(1725-1827). 속성은 강씨, 호는 벽파, 13세에 신흥사로 출가하여 정업에게 계를 받았

다.

경암.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교유한 승려

고역생. 청나라 사람, 연암과 만났을 때 태사의 직책에 있었다. 연암이 중국에 갔을 때 가

장 빈번히 교유한 인사 중의 한 사람이다. '열하일기'의 동란섭필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구상(1703-1796), 본관은 능성.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능완

군에 봉해졌다. 문집으로 무명자집이 전해진다.

기풍액. 청나라 사람, 자는 여천, 만주인, 연암과 만났을 때 귀주안찰사였다.

김건순(1776-1802). 자는 정학, 호는 가귤, 본관은  안동. 김창업의 후손. 김양행의 손자이

며 김이구의 아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죽임을 당했다.

김굉필(1454-1504).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 본관은 서흥.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그는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을 만큼 평생 소학을 독실히 믿었다. 1498년 무오사

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의 회천에 유배되었으

며, 갑자회사 때 처형되었다. 조광조의 스승이다. 1610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기무(1759-1804) 자는 광서. 호는 운교, 본관은 광산. 사미시에 합격했다.

김기서(1766-1822) 자는 치규. 호는 죽하.  본관은 광산. 배와 김상숙의  아들. 제천현감과

청도군수를 지냈다. 서화가로 이름이 있었으며, 문집으로 '화초만고'가 전한다.

김기순(1749-1827) 자는 사의. 호는 담옹. 본관은 안동. 정행의 손자. 이일의 아들

김기응(1744-1808) 자는 응지, 호는 극재. 본관은  광산. 김상정의 아들. 공주판관, 황주목

사 등을 지냈다.

김노영(1747-1797) 자는 가구. 경주 김씨. 추사 김정희의 양부.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판서

를 지냈다.

김상숙(1717-1792) 자는 계윤. 호는 재화. 초루, 본관은 광산.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익위사

사어, 군수 등을 지냈다. 서예가로 유명하다. '배와유고'가 전한다.

김상정(1722-1788). 자는 치오. 호는 석당. 본관은 광산.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와 대사간을

지냈다. 문집으로 '석당유고'가 전한다.

김상헌(1570-1652). 자는 숙도. 호는 청음. 이밖에  중년 이후 양주 석실에 은거하며서 사

용한 석실산인이라는 호와 만년에 안동에 은거하면서  사용한 서간노인이라는 호가 더있다.

본관은 안동. 동정 극효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의  동생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교리,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615년(광해군 7)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의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청서파(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을 일컫는 말)의 영수로서 1624년

(인조 2)에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대사성, 대제학을 거쳐 예조,  공조, 형조,

이조 판서를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척화를 주장하여 이듬해 강화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자 그에 반대하

는 상소를 올려 이듬해 심양으로 잡혀갔다. 1645년 석방되어 귀국 후 좌의정, 영돈령부사 등

을 역임했다. 김상헌은 숭명파로 절의가 있어 신망을 받았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

할 때 대로로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이 추진하던 대동법에 반대하고 김집 등 서인계 산림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그는 윤근수로 문인이었으며, 이정구,  이경석, 이경여, 김집, 김유, 신익

성 등과 교유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그의 후손들은  조선후기의 정치, 사상, 학술, 문예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김억. 중인층 출신의 음악가.  박지원, 김용겸, 홍대용 등과 자주 어울려 악회를 가졌다.

김용겸(1702-1789) 자는 제대. 호는 효효재. 본관은 안동. 김창집의 아들이요. 김창협과 김

창흡의 조카다. 이재와 박필주에게 수학했다. 신임사화 이후  과거를 단념했다. 음직으로 장

악원정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냈다. 예에 밝았으며 음악에 조예가 이었다.

김용행(1753-1778). 자는 순필, 호는 석파도인, 파황거사, 육불암, 포도인, 본관은 안동. 진

재 김윤겸의 아들, 김윤겸은 노가재 김창업의 제자로 서화에 뛰어난 인물이었고, 김용행  역

시 서화로 명성이 높았다. 김용행은 이희경의 외종숙이었다.

김원행(1702-1722) 자는 백춘, 호는  미호, 생부는 김제겸이지만 김창협의  아들 김숭겸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창흡과 이재에게 수학했다. 젊어서 신임사화를 목도하고 평생 미호(지금

의 미금시 일대)의 석실서원에서 학문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잇는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의 문하생 중 홍대용은 북학의  선구자로서 연암과 평생을 두고

교유하면서 낡은 사상 및 편견과 싸우면서 새로운 사상을 개척하였다.

김이도(1750-1813). 자는 계근. 호는 송원. 본관은 안동. 창집의 증손. 제겸의 손자. 탄행의

아들, 연암의 벗인 이소의 아우. 숙부인 미호 김원행에게 수학했으며, 예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다. 연암집 권3에 연암이 그에게 보낸 편지 1통이 실려있다. 또 열하일기의  피서록에는

그가 북경에 가는 연암을 전송한 시 2수가 실려 있다.

김이소(1735-1798). 자는 백안. 호는 용암. 본관은 안동. 김창집의 증손. 김제겸의 손자. 김

탄행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김이양(1755-1845). 자는 명여. 호는 연천. 본관은  안동.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사, 이조

판서 등을 지냈다.

김이중(1736-1793) 자는 시가. 김창집의 증손. 김제겸의 손자. 김달행의 아들, 김조순의 부

친. 송원 김이도의 종형. 김원행의 문인으로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호조좌랑, 서흥부사 등을

지냈다.

김창협(1651-1708) 자는 중화, 호는 농암. 본관은 안동. 이단상의 사위이자 제자이며, 미호

김원행의 조부이다. 숙종조 노론 계열의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이자 손꼽히는  문장가이다.

그의 문학관은 연암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문집으로 농암집이 전한다.

김창흡(1653-1722) 자는 자익. 호는 삼연. 김창집, 김창협의 아우. 이단상과 조성기에게 수

학했다. 벼슬하지 않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했는데, 특히 시를 잘 지었다. 문집으로 삼연집이

전한다.

김희(1729-1800) 자는 선지. 호는 근와, 본관은 광산.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직각. 대사

성, 우의정 등을 지냈다. 시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문집으로 근와집이 전한다.

나걸. 자는 중흥. 본관은 안정. 나열의 동생. 서화에 능하였다.

나열(1731-1803) 자는 자회, 호는 주계, 해양, 만갑의 5대손, 익위 삼의 아들, 사마시에 합

격했으며 함창현감, 돈령부 도정을 지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나 아우 걸과 함께 이름을 떨쳤

다. 저서에 해양시집이 있다.

남공철(1760-1840) 자는 원평, 호는 금릉, 사영, 본관은 의령, 대제학 남유용의 아들, 문과

에 급제했으며 이조판서, 대제학, 영의정을 지냈다. 연암을 비롯하여 이덕무, 박제가, 성대중

등과 교유했다. 문집으로 '금릉집''귀은당집' 등이 전한다.

노진(1518-1578). 자는 자응, 호는 옥계, 본관은 풍천, 직제학, 도승지 등을 거쳐 예조판서

에 이르렀다. 죽은 후 남원의 창주서원과 함야의 당주서원에 제향되었다.

능야. 청나라 사람. 호는 사헌, 절강 사람. 연암과 만났을 때 과거준비생이었다. 연암은 그

를 소탈하고 기이한 인물이라 평하였다. 열하일기의 피서록에 그 이름이 보인다.

단가옥. 청나라 사람. 연암이 중국에서 만난 인물.

박동량(1569-1635). 자는 자룡, 호는 오창, 봉주, 시호는 충익, 박응복의 아들, 박미의 부친

이다. 연암의 6대조. 문과에 합격하여 좌참찬을 지냈으며 금계군에 봉해졌다. 저서로 기재잡

기가 전한다.

박동언. 자는 인기. 사미시에 합격하여 사복시정 겸 내승을 지냈다.

박명원. 자는 회보. 호는 만보정,  영조의 3녀 화평옹주와 혼인하여 금성도위에  봉해졌다.

776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래 모두 네 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연암의 삼종형으로

연암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미. 자는 중연, 호는 분서, 시호는 문정. 연암의 5대조이다. 선조의 5녀 정안옹주와 혼인

하여 금양군에 봉해졌다. 문학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분서집이 전해진다.

박사익(1675-1736). 자는 겸지, 호는 노주. 시호는  장익. 연암의 종고조부인 태두의 손자,

필하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 강화유수,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금원군에 봉해

졌다.

박소(1493-1534). 자는 언주, 호는 야천. 연암의 조상. 김굉필의 제자로서 사림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조광조 등과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다가  훈구파의 탄핵을 받고 외

가가 있는 합천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653년(효종 4), 그를 기리기 위해 합천군의

화양리에 화암서원이 창건되었다.

박수원(1738-1811). 자는 이중. 여호 박필주의  손자. 사미시에 합격하여 선산부사를 지냈

다.

박우원(1736-1804). 자는 계봉. 대사간을 지낸  필철의 손자,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사복의

아들. 사복에게는 유원, 재원, 자원, 우원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막내다. 연암의 삼종

형,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곡성현감을 지냈다.

박윤원(1734-1799). 자는 영숙, 호는 근재. 준원의 친형으로 연암에게는 족형이 된다. 김원

행의 제자로, 저명한 성리학자다. 문집으로 '근재집'이 전한다.

박은(1370-1422). 시호는 평도. 여말 선초의 문신. 자는 앙지, 호는  조은. 본관은 반남. 박

상충의 아들이며 목은 이색의 사위이다. 태종의 잠저(임금이 되기 전) 시절에 의기가 상통하

여 1, 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우고,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으로  반남군에

봉해졌다. 이후 한성부윤, 이조판서,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뒤 금천부원군에 봉해졌

다.

박응남(1527-1572). 자는 유중, 호는 남일, 퇴암, 본관은 반남. 시호는 문정. 명종 8년에 급

제하여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대사헌, 도승지  등을 지냈다. 직간을 잘하는 간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박응복(1530-1598). 자는 경중, 호는 졸헌. 연암의 7대조.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을 지냈

다. 대사헌은 그 별칭이 도헌이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집안에서 '도헌공'으로 불렸다. 선산

임씨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막내아들이 박동량이다. 박동량의 장

남이 박미이고 박미의 아들이 박세채이다.

박응순(1526-1580). 자는 건중, 본관은 반남.  딸이 선조의 비인 의인왕후이다.  이 때문에

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박응인(1532-1606). 자는 원중, 본관은 반남. 사미시에 합격하여 한성부 서윤, 개성부사 등

을 거쳐 돈령부 도정에 이르렀다.

박응천(1516-1581). 자는 혼중. 본관은 반남. 사미시에 합격하여 여러 지방 수령을 지냈다. 

박재원(1723-1780). 자는 이천, 호는 두암, 사복의  아들, 연암의 삼종형.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홍국영의 누이가  정조의

빈으로 들어가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당파는 소론이었다.

박제가(1750-1805). 자는 재선. 호는 초정, 정유, 본관은 밀양. 연암의 제자.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 영평 현감 등을 지냈다. 네 차례나  중국에 다녀왔으며,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

우자는 주장을 담은 '북학의'를 저술한 바 있다. 문집으로 정유집이 전한다.

박제상(1770-1842). 자는 노옥. 본관은 반남. 사익의  현손, 대원의 증손, 해수의 아들인데

종수의 양자로 갔다.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공조참의를 지냈다.

박종덕(1724-1779). 자는 여수. 본관은 반남. 홍원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병

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다. 홍국영의 권세에 굽히지 않은 까닭에 파직당했다.

박종악(1735-1795). 자는 여오, 호는 창암.  본관은 반남.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을 지냈

다. 연암의 삼종질이다.

박종채(1780-1835). 연암의 둘째 아들. 자는 사행, 호는 혜전, 경산현령을 지냈다.

박좌원(1732-1802). 자는 대봉. 대사간을 지낸  필철의 손자,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사복의

아들. 연암의 3종형,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능주목사를 지냈다.

박준원(1739-1807). 자는 평숙, 호는 금석. 윤원의 아우이며 연암의 족제이다. 셋째딸이 정

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이니, 곧 순조의 생모다.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문집으로

'금석집'이 전한다.

박태보(1654-1689). 자는 사원, 호는 정재. 본관은 반남. 서계 박세당의 아들. 문과에 급제

하여 홍문관 교리, 이조좌랑 등을 지냈는데, 노,소론이 갈릴 때  소론측에 섰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진도로 유배되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후에 당파에 관계없이 절의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로 추앙받았다.

박필균(1685-1760). 자는 정보, 시호는 장간.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도 관찰사, 대사간, 지

돈령부사 등을 지냈다. 어려서 종숙부인 박세채에게 글을 배웠다. 사유, 사헌, 사근 세  아들

을 두었는데, 장남인 사유가 연암의 부친이다. '연암집' 권 9에 그 가장이 실려 있다.

백동수(1743-1816). 자는 영숙, 호는 인재, 야뇌당,  점재. 서얼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비인 현감과 박천 군수를 지냈다.

서건학(1631-1694). 호는 건암. 명말  청초의 대가인 고영무의  사위이자 제자. 강희제 때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이 형부상서에 이르렀고, 강희제가 추진한 명사 편찬사업에 적극 참여

하여 명사관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독례통고'  120권은 그 필생의 대작으로서, 상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문집으로는 '담원집'이 전한다.

서능보(1769-1835). 자는 치량, 본관은 달성. 박수원의 사위. 문과에 급제했으며, 1808년에

평안도 암행어사를 다녀와서 수찬과 교리를 역임했다. 그 후 승지를 거쳐 형조판서,  이조판

서, 좌의정을 지냈다.

서상수(1735-1793). 자는 여오, 호는 관헌, 기공. 본관은  달성. 서명창의 서자이다. 1774년

40세의 나이로 사미시에 합격하였고 관직은 종 8품인 관흥창의 봉사에 그쳤다. 서상수는 경

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려 백탑 북서쪽에 있던 관재말고도 도봉산 서쪽에 '동장'이라는  별

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덕무에게 여러번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그는 시, 서, 화를  겸비

하였고, 악률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서화, 골동에 대한  안목이 높았다. 그리하여 연암은 '필

세설'에서 우리나라 '감상지학'의 개창자로 상고당 김씨를 지목하는 한편,  '감상지학'을 하나

의 학문 차원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서상수를 꼽고 있다.

서유대(1732-1802). 정조 때의 무신, 자는  자겸. 본관은 달성. 1757년  음직으로 선전관이

되고 2년 후 사복시 내승으로 무과에 급제했다. 어영대장  7번, 훈련대장 3번, 금위대장 7번

을 지냈던바, 정조 때 군권을 장악한 핵심인물이다. 체격이 크고 성품이 너그러우며  군졸의

원성을 산 바가 없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복장이라 불렀다.

서유린(1738-1802). 자는 원덕, 호는 영호. 본관은  달성.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경기감

사, 이조판서, 수원유수 등을 지냈다. 미호 김원행의 제자이다. 시파에 속하는 인물로서 정조

서거 뒤에 함경도 경흥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연암은 그와 친분이 있었던바, '연암집'

에 실려 있는 '은산현감으로 부임하는 서유린을 전송하며'라는 글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

다.

서호수(1736-1799). 자는 양직, 본관은 달성. 서명익의  아들, 서유구의 부친. 문과에 급제

하여 이조판서, 평안감사 등을 지냈다. 천문학과 산학에 조예가 깊었다.

서황. 청나라 사람. 호는 문포. 연암이 중국에 가서 사귄 인물. '동란섭필'에 그  이름이 보

인다.

성대중(1732-1812). 자는 사집, 호는 청성. 본관은  창녕. 서얼 출신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울진현감, 흥해군수, 북청부사 등을 지냈다. 176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

다. 문집으로 '청성집'이 전해진다.

성해응(1760-1839). 자는 용여, 호는 연경재, 성대중의 아들,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검서관,

금정찰방, 음성현감 등을 지냈다. '연경재전집'이 전한다.

송시열(1607-1689). 자는 영보, 호는 우암. 본관은 은진. 사계 김장생의 제자. 효종의 북벌

론에 동조하여 춘추대의를 강조하였다. 노론의 영수로서 남인 및 소론과 대립하였다. 저서로

'송자대전'이 전한다.

송양정(1740-1772). 자는 치존. 본관은 은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지냈다.

신광온(1735-1785). 자는 원발.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사복시 첨정을 지냈다. 홍대용의 아

들인 홍원의 장인이다.

심염조(1734-1783). 자는 백수, 호는 함재, 본관은  청송. 심상규의 부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심환지(1730-1802). 자는 휘원. 호는 만포.  1771년(영조47)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주로

삼사의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준엄하고 격렬한 언론을 펴서 의리와 공의를 강조함으로써 몇

차례의 유배생활을 하였다. 남인인 채제공, 이가환 등의 공격에 앞장서서 이단을 역률로  다

스릴 것을 주장하였고 소론 계열의 서명선도 공격하였으므로, 이른바 벽파의 선봉으로 인정

되었다. 순조 즉위후 영의정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여 반대파 인물들을  크게 살육하였으니

이 사건이 곧 신유사옥이다. 그는 장용영를 혁파했으며,  김귀주와 친분으로 김관주, 정일환

을 등용하였다. 그는 죽은 뒤 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해한 죄와 순원왕후(순조의 비)의 국혼

을 방해하였다는 죄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양호맹. 호는 죽오. 본관은 남원. 개성사람. 연암은 그의 부탁으로 '양호군묘갈명'이라는 글

을 지어준 바 있는데, '연암집' 7에 수록되어 있다.

역암.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교유한 승려

유구환(1773-1787). 자는 원시. 유한준의 손자이자  유만주의 아들. 15세때 병으로 요절했

다.

유득공(1748-1807). 자는 혜풍, 혜보. 호는 영재. 본관은  문화. 연암의 제자. 서얼출신으로

규장각 검서, 포천현감. 풍천부사 등을 지냈다. 역사에 관심이 깊었다. '영재집'이 전한다.

유언호(1730-1796). 자는 사경. 호는 칙지헌. 본관은 기계. 정조 때의 중신. 원래 벽파였는

데 정조의 즉위와 함께 시파로 태도를 바꾸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이듬해 이조참의로 발

탁된 후 형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연암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그 절친

한 벗이었다. 저서로 '연석'이 전한다.

유의양(1718-1788). 자는 계방. 호는 후송. 본관은 전주. 유무의 아들. 황승원의 처남. 이재

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강릉부사, 예조참의 등을 지냈다. 장남인 유영은 박종채의 장

인이며, 차남인 유화는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춘관통고'를 편찬했다.

유한준(1732-1811). 자는 만청, 여성, 호는 저암, 창애. 본관은  기계. '흠영'의 저자인 유만

주의 생부이며, 구한말의 인물인 유길준의 고조부이다. 남유용에게 수학했다. 사미시에 합격

했으며, 김포군수 등 지방관과 형조참의를 지냈다. 당시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유형원(1622-1673). 자는 덕부. 호는 반계.  본관은 문화. 아버지인 흠은  유몽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형원의 2세 때 옥사하였다. 외삼촌인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에게 글을 배웠으

며,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32세 이후 전라도 부안면 우반동

에 은거하며 20녀 년 동안 저술에 전념하였다. 초기 실학자의 대표적 인물에 해당한다. 저서

로 '반계수록'이 있다.

유화(1779-1821). 자는 화지, 호는 지산. 본관은 전주.  유의양의 둘째 아들. 그 형인 영은

박종채의 장인이다. 박규수의 외종조이자 그  어릴 적 스승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헌납과 승지를 지냈다.

윤득관(1710-1780). 자는 사빈, 호는 죽암. 본관은  해평, 박필주의 제자. 사미시에 합격했

으며 세손 교부를 지냈다. 성리학자로 예학에 밝았다.

윤휴(1617-1680). 자는 희중, 호는 백호. 본관은 파평.  남인계열의 학자.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다. 예송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과 논쟁을 벌여 사문난적으로 몰린 적이 있다. 1680

년 경신재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갑산에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이광려(1720-1783). 자는 성재, 호는 월암, 칠탄, 본관은 전주. 황해감사를 지낸 진수의 아

들이다. 삼종형인 이광수에게 수학했다.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선릉과 명릉의 참봉을 지냈다.

실학적 경향을 보여주는 학자로서 '이참봉집'이라는 문집이 전한다.

이덕무(1741-1793). 자는 무관, 호는 형암, 아정, 청장관, 영처,  선귤당. 본관은 전주. 성호

의 아들, 백동수의 매부. 서얼출신으로 규장각 검서를 지냈다.  연암의 제자 가운데 가장 박

식했다. 저서로 '청장관전서'가 전한다.

이만수(1752-1820). 자는 성중, 호는 극옹, 극원,  후재. 본관은 연안, 좌의정 복원의 아들.

문과에 급제했으며 대사성, 대사간,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대제학 등을 거쳐  1820년 수원유

수로 나갔다가 그 해 임지에서 죽었다. 문집으로 극원유고가 전한다.

이만운(1736-1820). 자는 희원. 호는 묵헌. 본관은 광주. 조선후기의 학자로 경상도 칠곡에

거주했다. 1796년 정조가 중앙으로 불러와 기용하려 하였는데,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벼슬을 고사하자 다시 안의현감에 제수했다. 문집으로 '묵헌집'이 전한다.

이문원(1740-1794). 자는 사질, 본관은 연안. 옥천군수 주신의 손자이며, 영의정 천보의 아

들이다. 문과에 급제했으며 1779년에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1월 홍봉한과 관계를 맺고 있던

한덕후를 대관에 천거했다는 비난을 벽파로부터 받자 빈청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퇴궐했는

데 이 때문에 숙천에 유배되었다가 석 달 만에 풀려났다. 그 뒤에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방익(1756-?). 조선후기의 무신. 1784년 (정조8)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충장장, 전주

중군 등을 지냈다. 충장장으로 있을 때 제주 앞바다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

류하여 중국의 팽호도. 대만, 하문, 절강, 산동, 북경, 요양 등을 거쳐 이듬해  서울에 도착했

으며, 정조를 알현했다. 국문으로 '표해가'를 지었다.

이보천(1714-1777). 호는 유안재. 본관은 전주. 연암의 장인. 농암 김창협의 제자인 종숙부

이명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또한 농암의  제자로서 우암 송시열을 독실히  숭배했던 기원

어유봉의 사위가 도어 그 지도를 받았다. 이처럼 그는  우암에서 농암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산림처사였다. 연암은 이러한 장인으로부터 16세  무렵 '맹자'을 배운 이래로

사상과 처세의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연암집' 권 3에 그 제문이 실려 있다.

이색(1328-1396). 호는 목은. 본관은 한산. 고려 말의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

이송(1725-1798). 자는 무백, 호는 노초 혹은 서림. 본관은  전주. 세자시강원의 보덕을 지

낸 민곤의 아들이다. 박필주와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일찍이 사미시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으나, 1756년(영조32) 부친이 유배 중 불에 타 죽는 참상을 목격한 후 벼슬을 단념한 후

서산에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

덕무, 유득공 등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실학도 깊이 연구했다. 홍대용과 친분이 두터워 그 묘

표와 제문을 썼다. 문집으로 '노초집'이 전한다.

이영원(1739-1799). 자는 유구, 본관은 전주, 진명의 증손이며 연상의 아들. '연암집' 권3에

연암이 그에게 준 글이 실려 있다.

이윤영(1714-1759). 자는 윤지. 호는 단릉, 본관은 한산. 그림과  학문에 모두 뛰어나 연암

에게 존경을 받는 선배이다. 문집으로 '단릉유고'가 전한다.

이인상(1710-1760). 자는 원령. 호는 능호, 뇌상관, 보산자.  본관은 전주, 영의정 이경여의

대수가 먼 서족, 현감을 지낸  이최지의 아들,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현감을 지냈다. 시문과

전서에 뛰어났으며 그림을 잘 그렸다. 문집으로 '능호집'이 전한다.

이재(1680-1746). 자는 희경, 호는 도암, 한천.  본관은 우봉. 노론계열의 성리학의 대가이

다. 호락논쟁에서는 이간의 학설을 계승하여 한원진 등의 호론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섰

다. 죽은 후 용인의 한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사례편람' 등이 있다.

이재성(1751-1809). 자는 중존, 호는 지계. 본관은 전주. 이보천의 아들. 박지원의 처남. 사

미시에 합격했으며 참봉을 지냈다. 연암과 이재성은 평생 지기이자 글벗으로 지냈다.

이종목(1761-1833). 자는 유숙, 본관은 전주. 연암의 맏사위.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역임

했다.

이창원(1677-1733). 연암의 외조부, 음직으로 대호군을  지냈다. 대호군은 오위의 한 군직

으로 실제 직무는 없이 녹봉만 받는 자리다.

이희경(1745-?). 자는 성위, 호는 설수,  윤암, 광명거사. 본관은 양성. 그의  부계는 6대조

이성백이래 간혹 무과 급제자만 배출되는  한미한 가문으로 전락했다. 특히  이희경의 부친

이소는 서얼 출신으로 평생 처사적 삶을 영위하였다. 외주부 김의겸 역시 서얼  출신이었다.

이희경은 25세 되던 1769년 연암을 모시고 '백탑시사'를 결성한 이래 북학에 대한 관심을 공

유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농기도'를 편찬하고 '용미차'를 제작하는 열성을 보였으며, 36세

가 되던 1780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 골짜기에 들어가 구전법을 시험해보기도 했

다. 또한 1782년 이래 1799년 까지 다섯 차례나 중국을  다녀오면서 청나라 문물에 대한 식

견을 쌓아갔다. 그는 연암이 만년에 우울증과 화병으로 고생할 때 이재성과 함께 연암의 말

벗으로 자주 내왕하였으며 우울증과 화병으로 고생할 때 이재성과 함께 연암의 말벗으로 자

주 내왕하였으며, 1805년 10월 20일 연암이 서거하였을 때 이재성과 함께 연암의 임종을 지

켜보았다. 저서로 '설수외사'가 전한다.

이희천(1738-1771). 자는 사춘. 호는  석루. 이윤영의 맏아들. 문집으로  '석루유고'가 전한

다. 연암은 훗날 '이몽직의 죽음을 슬퍼함'이라는 글에서  이희천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였

다.

인목왕후(1584-1632). 선조의 계비로 1620년(선조35) 왕비에 책봉되었다. 본관은 연안이며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이다. 선조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을 낳았다. 1613년(광해군 5)에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은 피살되고 자신도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 후  대왕

대비가 되어 인경궁에서 기거하다 1632년(인조 10)에 세상을 떠났다.

정여창(1450-1504). 자는 백욱, 호는 일두. 본관은 하동. 김굉필과 김종직의 문학에서 학문

을 연마하였다. 당시 성리학의 대가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에 유배되었으며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굉필과 함

께 동방 유학의 도통을 이은 학자라 칭송되었다. 저서가 여럿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불태워버려 전하는 게 없다.

정온(1569-1641). 자는 휘원, 호는 동게. 병자호란 당시 이조참판의 벼슬에 있으면서 청나

라와의 화의에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

와 은거하였다.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로 유명하다.

정일환(1728-1805). 자는 겸지, 호는  창주. 본관은 연일. 송강  정철의 후손 구하의 손자.

계의 아들, 사미시에 합격했으며 참판을 지냈다. 김귀주의 일파다.

정철조(1730-1781). 자는 성백. 호는 석치, 본관은 해주. 공조판서를 지낸 운유의 아들. 김

원행의 문인.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정언을 지냈다. 홍대용, 황윤석 등과 함께 18세기  후기

의 주목되는 자연과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림에도 뛰어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조헌(1544-1592). 자는 여식. 호는 중봉. 본관은 배천. 이이, 성혼의 문인이며, 토정 이지함

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동환봉

사' 등에 보이는 그의 개혁적인 사상은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

다. 문집으로 '중봉집'이 전한다.

최립(1539-1612). 자는 입지. 호는 간이 동고. 본관은  통천. 진사 자양의 아들. 이이의 문

인.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타고난 재주로 문학적 명성을 얻었다. 벼슬은 문과에  급제

하여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외교문서 작성에 제 1인자였으며, 여러 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한원진(1682-1751). 자는 덕소, 호는 남당. 본관은 청주. 송시열의 고제 권상하의 제자들인

강문 8학사의 한 사람으로서 호론, 즉 인물성이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낙론, 즉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동학 이간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문집으로 '남당집'이  전하며, 송시

열이 착수한 것을 이어받아 50년 만에 완성한 '주자언론동이고' 등의 편저가 있다.

혜경궁(1735-1815).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이  장조(사도세자)의 비 홍씨고  본관은 풍산이

다.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생모다. 1744년(영조 20)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영조 38) 남편이 살해된 후 혜빈의 호를 받았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광무 3)에 남편이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남편인 장헌세자의 참

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한중록'을 남겼다.

홍국영(1748-1781). 자는 덕로, 본관은 풍산. 1771년(영조48)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

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이때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고 그 소생인 손자(정

조)를 후계롤 정하였다. 영조 말년 별파의 횡포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세손의 승명대리(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를 반대

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귀주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1776년 홍상간, 홍인한, 윤양

후 등이 세손을 반대, 모해하려던 역모를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 해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 임명되었고, 숙위소를 창설하여 숙위대장을  겸직하여 왕궁 호위를 전담하

고 도승지에 올랐다. 이렇게 하여 실권을 잡게 되자 당시의 3공 6경까지도 그에게 맹종하였

다. 그러나 1780년 독약을 탄 음식을 왕비전에 넣었다가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

수당하고 전리롤 쫓겨났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 이조참의, 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778년 박지원이 연암골로  피신할 무렵에는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한창이었을

때다.

홍대용(1731-1783). 자는 덕보, 호는 담헌. 본관은 남양. 나주목사를 지낸 역의 아들. 미호

김원행의 문인. 북학파의 지도자. 연암의 사상적 동지이자 그 가장 존경했던 벗이었다. 음직

으로 태인현감과 영천군수를 지냈다. 문집으로 '담헌집'이 전한다.

홍문영(1732-1791). 자는 숙장. 본관은 남양.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지냈다. 홍대용과

동서간이다.

홍부인(1494-1578). 대사헌 홍흥의 손녀이며 홍사부의  딸. 본관은 남양. 남편인 박소와의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다.남편이 작고한 후 자식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훌륭한 선생들

을 불러 자식들을 가르치게 하여 맹자의 어머니에 비견되었다.

홍상한 (1701-1769). 자는 운장. 호는 이유재. 어유봉의 문인이며 사위였다. 홍봉한과는 종

형제 사이다. 영조 때의 중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홍원(1764-1818). 자는 장원. 호는  기사굴산인, 소선. 신광온의 사위.  사미시에 합격했다.

음률에 밝았으며, '산수음'이라는 시집이 전한다.

홍원섭(1744-1807). 자는 태화, 호는 태호. 본관은  남양. 홍상윤의 아들. 사미시에 합격했

으며 대구통판, 사복시정, 충주목사,  수원판관,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문집으로 '태호집'이

전한다.

황경원(1709-17870. 자는 대경. 호는 강한. 본관은  장수.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 이조판

서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남유용과 함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나, 옛 문장을 본뜨는 폐단

이 있었다. 춘추대의를 강조하여 '남명서'와 '명조배신전'을 지었다. 문집으로 '강한집'이 전한

다.

황승원(1732-1807). 자는 윤지. 본관은 장수.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지냈다. 사촌 형

인 황경원에게 수학하였다. 20세 전후 연암과 산사에서 같이 공부했다. '연암집' 권3에  실린

'황승원에게 감사하는 편지'는 연암이 부친상을 당해서 탈상을 얼마 앞두고 있을 때  보내온

황승원의 위문편지에 대한 연암의 답장이다.  이 편지에서 연암은 과거를  포기하고 은둔할

생각을 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