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ㆍ정조 시대를 문장으로 풍미한 청장관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이 말을 당대를 대표하는 산문작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작품을 평하는 데 끌어다 쓴다.
연암은 두 말이 필요없는 산문의 대가지만 그중에서도 ’큰누이 박씨 묘지명’은 그 압권이라 할 만하다.
이 묘지명(墓誌銘)에서 연암은 큰누이가 향년 43세로 타계하던 신묘년(辛卯年)을 “(누님의)딸이 바야흐로 바느질을 일삼고 두 아들이 독서를 할 수 있게 된” 때라고 묘사했다.
이 구절을 주목한 청장관은 “창신(創新)한 어구로구만”이라는 감상을 적었다.
연암은 큰누이의 운구를 지금의 한강 동호대교 북단인 두뭇개에서 전송하고는 어릴 적 일을 회상한다.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흐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아,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때가 기억났다.”
이덕무는 이 구절에다가는 “진정을 드러낸 게 완연히 남이 읽어도 눈물을 줄줄 흐르게 하는군”이라는 감상을 적었다.
묘지명 작품 전체를 붓으로 베껴 쓴 이덕무는 “채 300자도 안 되지만 진정을 토로해 문득 수천 글자나 되는 문장의 기세를 보이니, 마치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을 품은 형국이라 하겠다”고 총평했다.
’종북소선’(踵北小選)은 이 묘지명을 비롯해 박지원이 젊은 시절 쓴 산문 중에서도 이덕무가 특히 명품이라고 생각한 10편을 가려뽑고, 그것을 직접 베낀 다음에 그 자신의 평을 붙인 평론집이다.
종북은 종각 북쪽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탑골공원 주변인 대사동(大寺洞)에 있던 이덕무의 집을 가리키며, 소선은 ’작은 선집’을 의미한다.
종북소선은 오랫동안 연암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이는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자기 아버지 문집을 정리하면서 그만 이것을 아버지 작품으로 수록하는 바람에 빚어진 오류였다.
연암 탄신 250주년인 1987년 실물이 공개된 종북소선은 거기에 찍힌 도장 때문에 원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1731~1783)이 소장했던 이덕무의 친필 필사본인 것으로 밝혀졌다.
연암 작품은 먹으로 필사하고, 글 옆에 친 동그라미와 찍은 점인 권점(圈點)은 청색으로 표시했으며 곳곳에 가한 비평어인 평어(評語)는 주홍색인 이른바 원색 필사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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