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와 학문 경향
연암 박지원은 조선 영조 13년(1737년)에서 순조 5년(1805년)에 활동 하였던 북학파 실학자로 妻叔인 李君文에게서 수학을 하고 洪大容에게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구의 신학문을 익혔다. 1780년(정조 4)에 청조에 가서 利用厚生의 실생활을 보고 熱河日記로 그 기록을 남겼다. 그는 실학의 실현을 위하여 1786년 벼슬길에 나가 민생의 문제 해결에 힘쓰고 사회적 개혁과 정책의 불합리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의 실학적 태도는 利用이 있고서 厚生이 있으며 厚生이 있고서 正德이 있다고 하여 이용후생이 정덕보다 선행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다. 우주론에 있어서는 실증적 태도를 반영하여 만물의 생성은 모두 氣의 작용이라고 하여 理는 氣의 운동에 내재하는 법칙으로 보았다. 즉 물체가 형성이 될 때에는 반드시 質이 있게 되는데 이러한 質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티끌이라는 미립자가 응취 결합하고 운동변화하는 과정에서 우주 만물이 생성된다고 하였다.
천명에 대하여는 의지를 내포한 목적론적 사유에서 벗어나 천을 단순히 자연법칙으로 파악하고 사물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다양한 현상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로써 오행상생설을 배격하고 불교와 천주교가 현실생활을 허망하게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心性의 문제에 있어서는 객관적 실재론에 입각하여 心 性 物을 각각 종과 종소리 종치는 망치에 비유하여 감각의 근원은 물질이며 감각과 의식은 물질에 감각기관이 작용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또한 기존의 도덕관념이 삼강오륜을 표방하면서 실상은 仁義의 巨盜라고 비난하면서 도덕평가의 기준을 민생에 유리한 실천 활동에서 구하여 참된 도덕은 민생에 있다고 하였다.
그의 개혁론은 이용이 있은 후에 생활을 풍족히 하고 인간의 도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에서 출발하여 田制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와 외국과의 통상 선진적인 기술의 도입 그리고 토지 소유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 제한하여 점차 빈부의 격차를 감축하려는 限田論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민생고의 해결을 위하여 토지겸병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농민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위정자가 농업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농학을 연구하며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보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분제도에 관하여 적서의 차별이 악법임을 지적하였고 존명 사대주의를 배격하여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비록 오랑캐의 학문일지라도 선진 과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실학적 태도 때문에 신분질서의 개혁과 실용주의를 주장한 실학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2) 社會改革論
홍대용의 사상에는 과학정신이 있다면 박지원에게 있어서는 문학을 통한 현실인식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정신이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하여 당시 양반계층의 도덕적 위선을 풍자함으로써 신분계급에 사로잡힌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또 천하의 사람들이 勢를 따르고 名譽와 利益을 도모하면서 군자가 勢와 名譽와 利益을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그것을 독점하기 위한 心術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형식적인 도덕질서를 타파하는 사회 개혁정신을 가지고 양반의 생활양식을 무가치하거나 착취적인 것으로 비판함으로써 그 시대의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러한 현실 비판정신을 가지고 그는 당시의 통속적 관념체계와 신분적 권위의식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전통의 권위에서 벗어나 관심을 과거적이거나 권위적인 것에서부터 현실적이고 미래적인 데로 돌려놓았으며 창조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3) 歷史意識
그는 44세에 燕行을 다녀오면서 청조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淸人과의 교류를 통하여 청조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그는 熱河日記에서 조선인이 청조문물을 관찰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반성하여 五妄을 들고 있다. 즉 자신의 문벌을 뽐내는 것 , 상투를 지닌 의관을 뽐내는 것,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 중국에 문장이 없다고 헐뜯는 것, 청조에 복속하는 漢人을 보고는 강개한 선비가 없다고 탄식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만주족의 청조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려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선입관에 사로잡힌 것으로 그들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각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는 청인과의 교류를 통하여 청조사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淸帝가 황벽한 燕河에 머무르는 일에서 몽고의 강함을 제어하려는 苦心을 살피고, 西番의 僧王을 黃金殿에 모셔다 스승을 삼고 있는 데서 西藏의 강함을 무마하려는 苦心을 살피고, 모든 문장에서 청제의 공덕과 은택을 적고 있는 사실에서 억압받는 漢人의 苦心을 살피고, 漢人이나 淸人이 모두 필담한 것을 없애는 행동을 통해 엄혹한 금법을 시행하는 苦心을 살피고, 사치품이나 골동품이 범람하는 데서 태평시대의 苦心을 살핀다고 하였다. 이것은 청조사회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청조의 관학이 주자학이라는 표면적 현상의 배경에는 청조가 한인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재빨리 먼저 이를 차지하여 온 천하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려 감히 자기들에게 오랑캐라는 이름을 씌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간파하고 청조가 朱子를 높이는 효과로서 천하 사대부의 목덜미에 걸터타고는 그들의 목구멍을 조르면서 그 등을 어루만짐으로써 천하의 사대부들이 그 우롱과 위협에 휩쓸려서 구구하게 禮文이나 節目에 빠져들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청조의 사상 탄압 방법은 焚書坑儒하는 것보다도 더 효과를 거둔 것이고 四庫全書의 방대한 편찬사업도 선비들로 하여금 머리가 희도록 붓을 쉴 사이가 없게 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당시 청조학술이 지닌 訓誥學 내지 考證學的 방법의 업적을 관심깊게 이해하기 보다는 관학인 주자학과 더불어 사상의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의 입장이 청조의 정치사회적 내지 역사적 현실 이해에 기울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으며 그것은 북학파의 의식 속에 깃들어 있는 復讐義理論的 요소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4) 實用精神
그는 연행을 하면서 압록강을 건너자 마자 민가의 외양간과 돼지우리에서 가름더미에 이르기까지 법도있게 정돈된 것을 통해서 利用의 실제를 발견하였다. 그는 연경을 다녀온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중국의 장관을 말하라고 하면 중국이 오랑캐의 땅이 되어 아무 볼 것이 없다 하는 것이 뜻이 높은 선비이고 그렇지 않으면 요동벌판 蘆溝橋 山海關 등 명승지를 장관이라고 일컫는 것이 통속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자신은 기와조각과 거름더미에도 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청조의 利用을 높이고, 또한 천하를 위하는 자는 백성에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오랑캐에서 나온 법도일지라도 취하여 본받으려고 할 것임을 지적하여 이용의 법도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변방 마을에서도 벽돌의 이용 방법뿐만 아니라 벽돌가마의 제도와 효율을 관찰하고, 아궁이와 굴뚝 구둘의 제도를 조사하면서 우리의 온돌 형태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여 개량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또한 수레의 제도를 본받을 것을 강조하면서 나라의 가장 큰 실용이 수레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청조에서 활용되는 각종 수레의 형태와 서양 기계제도인 논에 물을 대는 龍尾車, 불을 끄는 水銃車, 방아를 찧는 牙輪, 가루 만드는 搖車, 등을 소개하면서 수레제도를 이용함으로써 재화를 유통시키고 부유하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용의 구체적인 문제로서 牧馬와 騎馬의 방법에서도 우리의 제도를 반성하고 청조제도를 수용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재화와 음식이 넉넉한 것이 교화의 원천이 되고 근본에 힘써 공을 일으키는 것이 백성을 양육하는 방법임을 확인하고 나라의 근본으로써 백성의 이익을 두텁게 하는 방법상의 문제로 天時 地利 人事를 經으로 하고 水利 土宜 農器를 緯로 하는 농업진흥책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이용후생의 방법을 연마하고 開物成務의 공적을 갖추게 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며 농업기술을 밝히고 상업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고 工匠의 혜택을 이루어 주는 실용의 개발을 선비의 과제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실용이 곧 실학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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