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의 사랑방
1870년대 중반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던 박규수의 사랑방은 20대 전후의 '젊은 그들'로 붐볐다. 10년 후 갑신정변의 '4인방'이 되는 김옥균·홍영식·서광범·박영효의 모습도 보였고 20년 후 갑오개혁의 핵심인물인 유길준도 있었다. 고종의 측근으로서 우의정까지 지낸 환재 박규수(朴珪壽·1807~1877)가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젊은 그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박규수는 혼탁한 세도정치 속에서 40세가 넘어 뒤늦게 정치무대에 섰다. 북학파의 대부 박지원의 손자인 그는 전통적인 천하질서와 전혀 다른 신(新)국제질서를 맞이해서 고민했다. 더 이상 서양세력을 사람이 아닌 금수(禽獸)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소(小)중화를 자부하는 조선이 서양을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박규수는 돌파구를 아편전쟁 후 같은 고민을 하는 청나라 웨이위안(魏源)의 '해방론(海防論)'에서 찾았다. 서양 국가와 일본이 수호조약을 맺자고 하면 조약을 맺고 무력으로 공격해 오면 힘의 우위에 따라 방어적으로 싸우면서 서양의 장기들을 배워서 힘을 길러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세력을 현실적 주인공으로 인정했지만 주연의 자리는 양보하지 않는 논리였다. 그는 이 원칙에 따라 평안감사로서 공격적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방어적으로 처리했고, 국내정치의 갈등 속에서 난관에 빠진 한일수호조규를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박규수는 초조했다. 신국제질서의 파고는 역사의 지각생인 조선의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방에서 '19세기 386'들에게 박지원의 《연암집》과 청의 '해방론'을 가르쳤다. 그러나 닥쳐오는 파도는 훨씬 빨랐다. 부국강병과 세력균형을 모르는 주인공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서양세력을 주연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박규수의 사랑방도 거대한 파도 앞의
난관에 부딪혔다. 박규수가 세상을 떠난 후 '젊은 그들'은 새로운 문명표준을 배우러 해외의 사랑방을 찾아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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