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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건곤일초정. 연암이 조성할 때는 부교였으나 지금은 관리하기가 어려워 돌다리로 대체됐다. 연암은 연못 주변에 수양버들과 살구나무, 복숭아나무를 심 게 했다. 지금은 벚나무와 영산홍 등으로 바뀌었다. 면천면은 골정제를 복원하면 서 제방을 쉼터로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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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역사드라마 ‘무사 백동수’가 인기절정이다. 주인공 백동수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면천군수를 지낸 연암 박지원과 혹시 관계는 있을까, 그리고 정조는 왜 연암을 면천군수로 임명했을까.
1789년 가을 어느 날 정조는 이덕무·백동수·박제가를 대전으로 불렀다. 새로운 무예서를 편찬하라고 명했다. 미리 준비는 했다. 이덕무는 문헌고증, 백동수는 무예실기고증, 박제가는 문헌고증과 판목대본글씨를 맡았다. 이리하여 ‘24반 민족무예에 관한 실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훤히 풀어낸 책’ 즉 조선의 무예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1790년에 탄생됐다.
이덕무·백동수·박제가는 ‘백탑파(白塔派)’ 일원이었다. 이들 외에 홍대용·박지원·유득공·이서구 등이 더 있다. 백탑파는 1760년대 후반부터 1780년대 중반까지 원각사 10층석탑 주변에 모여 살면서 의기투합한 이들(박지원·이덕무·유득공 등)이거나, 백탑 주변에 살지는 않지만 이들과 깊은 교류를 나눈 이들(홍대용·백동수·이서구 등)을 일컫는다. 원각사 10층석탑이 달빛을 받으면 하얗게 빛난 데서 연유했다. 박지원은 아예 32세에 백탑 근처로 이사했다. 나이로 홍대용(1731)·박지원(1937)·이덕무(1741)·백동수(1743)·유득공(1748)·박제가(1750)·이서구(1754) 순이다.
이들 중 박지원과 이서구는 적자, 홍대용은 역관이며, 나머지는 모두 서자다. 의기투합을 가능케 한 공집합은 실학(實學)이었다. 연암 박지원 면모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암은 벼슬에 뜻을 버렸다. 영조의 극찬을 받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아 주변에서 과거를 보라고 해도 마다했고, 마지못해 과장에 들어가도 답안지를 내지 않았고, 답안지를 제출하더라도 노송과 괴석 등을 그려냈다. 백동수(이덕무 처남)는 백탑파의 유일한 무인이다. 백동수도 무과에 급제했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못해 17년동안 선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지원과 이덕무·백동수·유득공 등은 전국유람에서 민생을 살피며 백성을 위한 뜻을 키운다.
연암은 61세인 1797년 7월 면천군수로 임명됐다. 55세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해 함양군 둑 공사에 공을 세웠다. 장정들을 징발할 때 관아가 식량을 대고 고을별로 장정을 나누게 했다. 그랬더니 5-6일 걸리던 일이 하루 만에, 그것도 견고하게 끝났다. 이후 5년 동안 둑 공사 부역은 없었다고 한다. 흉년에는 녹봉을 털어 백성을 구했다. 안의현 백성들이 연암의 송덕비를 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암은 자신의 뜻을 백성들이 너무 모른다며 만류했다. 임기가 끝나 서울에 돌아와 의금부도사 등으로 전직하다가 면천군수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연암은 면천에서도 흉년이 들자 안의에서처럼 녹봉을 덜어 백성을 구휼했다. 면천군 남쪽의 양제라는 제방, 지금의 순성면 양유리 제방(양뒤)이 자주 터지자 지형을 살펴 보수, 연례행사처럼 수고하는 폐단을 없앴다. 정조가 농서를 구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연암은 이전부터 농서를 즐겨보면서 발췌한 글에 의견을 덧붙이고 중국 견문에서 얻어 조선에서 시행해봄직한 것들, 면천에서의 경험 등을 종합해 ‘과농소초(課農小抄)’ 14권과 그 부록격인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올렸다. ‘한민명전의’의 요지는 개인의 소지소유 한도를 정해 그 이상의 소유를 법으로 금지하라는 것이다. 정조가 이를 보고 농서대전은 박지원에게 편찬케 해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면천읍성 동쪽, 향교 앞에 버려진 연못이 있었다. 골정지다. 연암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고 백성들을 모아 연못을 준설해 물을 가두었다. 그리고 연못 중간에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든 후 그 위에 초정(草亭)을 짓고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고 이름 붙였다. 북학파의 선배인 담헌 홍대용도 자신이 거주하던 집을 건곤일초정이라고 했다. 연암을 향교의 유생들과 모아 논어를 강론했고 강론 후 동쪽에서 개를 삶아 같이 먹고 시를 읊게 했다. 고위 벼슬아치가 3년마다 어진 이들을 초청해 베푸는 향음주례(鄕飮酒禮)란 옛 제도를 차용한 것이다.
연암의 근무성적은 충청감사와 갈등으로 중(中)이었다. 중을 받으면 승진할 수 없다. 그런데도 연암은 양양부사로 승진했다. 조상의 덕으로 관직을 받은 자 즉 음관(蔭官)으로서 양양부사가 된 이는 연암이 처음이라고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過庭錄)’에서 적고 있다. 조정이 연암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양양부사를 사직하고 서울에 와 있을 때 백탑파의 이서구가 이조판서·호조판서를 맡으면서 결원이 생길 때마다 연암에게 벼슬하라고 전갈을 보냈다. 연암은 매번 사양했다. 아니 거절했다.
여기까지는 공덕비를 세워 칭송받을 정도로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가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사항이다. 연암은 면천군이 아니라 다른 고을 군수였더라도 이와 같은 선정을 베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암은 왜 하필 면천군수로 임명됐을까. 과정록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연암이 면천군수로 임명되자 관아를 돌며 인사를 다녔다. 비변사에 들렀더니 제조 남공철이 부임하면 책임이 클 것이라는 말을 건넨다. 연암은 연유를 물었으나 남공철은 가보면 안다고만 대답했다. 부임해보니 과정록의 표현으로 사교(邪敎) 지금의 천주교가 집집마다 만연해 있었다. 적발되면 즉시 죄를 물었다.
연암도 처음에는 ‘사교자’를 중죄인 취급해 곤장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사교자’는 신음소리는커녕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연암은 방법을 바꿨다. 매일 밤 ‘사교자’를 불러 타일렀다. ‘사학’을 믿는 자가 있다고 보고받으면 붙들어다가 부모와의 천륜과 은혜 등을 반복해 타일렀다. 이윽고 ‘사학’을 믿은 것을 후회하면 풀어줬다. 이런 이들이 30여명 됐다. 이들은 나가 연암처럼 다른 이들을 타일렀다. 풀려난 이들은 책자나 예수의 초상을 가져다 받쳤다. 연암은 모아 백성들이 보도록 면천읍성의 남문 위에서 훈시한 뒤 태웠다. 이런 탓인지 천주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신유박해 때 오직 면천군에서는 희생자가 없었다고 과정록은 밝히고 있다.
정조는 성군으로 추앙받는다. 많은 선정도 베풀었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정책이 있다. 바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명말·청초에 소품(小品)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늘어나고 잦아진 조선의 사신단이 받아들여 조선에서도 소품이 유행하지 시작했다. 소품은 공맹의 가르침(성리학)보다 신변잡기의 성격이 강하다. 정조는 전통적인 유가의 관점에서 볼 때 소품만연 즉 어지러워지는 시대상을 바로 잡으려했다. 이것이 문체반정이다. 과거시험에서 소품성격을 지닌 답안지를 낸 자는 탈락시켰다. 심지어 답안을 적을 글자체까지 정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천주교 즉 ‘사학’은 반드시 바로잡아야할 문체반정의 대상이었다.
남공철이 말한바 즉 연암이 내포지방의 중심지인 면천에 가서 맡아야할 큰 책임은 바로 들불처럼 번지는 사학을 막으라는, 당대 최고의 석학에게 내린, 문체반정 차원의 특명완수였으리라. 그러나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고, 8월에 연암은 양양부사로 승진해 갔다. 그리고 면천군에는 ‘사학’이 수면위로 다시 솟아올랐다. 그것은 조선후기 내부모순으로 터져 나온 거대한 폭발이었다. 면천군수로서 연암은 면천군민에게 퍼지는 그 불길을 일시, 일부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정조 사후 21년, 1821년에 면천군에서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될 김재복(金再福)이란 아이가 태어난다.
글·사진=오융진 기자 yudang@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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