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중종반정,문체반정 중에 문체반정을 얘기한다.
문체반정/정조가 당대에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의 글을
패관소품이라 규정하고 금지한 사건 바른데로 돌린다는것이 무엇이냐.
사마천 반고시대의 문체로 되돌리려는 노력이었다.
그들 당시에는 모던한 문체였던것이 이제는 교과서 적인 글이 되었고
그들의 문체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 당시의 문체에서 새로웠기 때문이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것이 정조의 한계라 볼 수 있다.
새로운 기운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 소설(자잘한이야기)가 들어온다.
고증학(글 하나하나가 맞는지 따지는 ..(전체글파악엔 약함)
이런 개념이 생기던 때에 정조는 새 유행등에 관심을 갖는다.
왕들은 대부분 글쓰고 공부하기를 게을리 한다.
정조는 공부하기를 즐겼고 거꾸로 신하들에게 시험을 본다.
정조의 소품론(어리고 식견어린 자들이 앞다퉈 잔재주를 겨루기에
그것이 경전에 반대하며 윤리 무시를 부를 수 있다. 사학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소품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품을 읽는다는것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지식인이 생긴다는 의미
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이 왕과 지식인간의 파워게임이기도 하다.
픽션을 읽다보면 망상이 커진다는 생각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예의 주시중에 1792.10.19에 정치쇼를 벌인다. 이것이 문체반정의 서곡.
명청이래 문장은 험괴하고 첨산이 많아 보고 싶지 않다.
대표적인 몇몇을 길들이려 관직에 있는 노론계열 실세몇에게 반성문을 쓰게 한다.
사륙문(네글자 여섯글자 기본 대구법 형식의 전통적 중국 글쓰기)도 쓰게한다.
원치 않는 글을 쓰게 하는 고역을 준다.
이중 결정적으로 걸려든자로 '이옥'이라는 사람이 있다.
조선후기의 글쓰기 그룹을 보면
노론의 연암 박지원
남인그룹의 다산정약용
그리고 이옥.김려의 조선정도때의 문인 이 있다.
연암,다산은 이미 거물이어 영향력이 있었는데, 이옥은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별 볼일이 없어 지금도 알려져 있지가 않다.
지금도 신기할 정도의 여성적 문체를 사용했다.
구부총/ 아홉번시집가서 아홉번과부가 된 여자 이야기.
개가를 하는 일이 많았음에도 조선시대에 대해서는 성적보수성이 이미지화 되어있다.
어려운것이 현실일 것이니 개가는 일반적이라 볼수도 있다.
이옥은 여성의 정서.운명.생활등에 관심이 많았었그에 그의 글은
조선시대 여성생활짐작에 도움이 된다. 이런 행동이 조선사회에서 따돌림
당하기 싶지만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을 관찰하려면
남녀정사를 보는것이 좋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욕에 의해 성리학안에서 정.욕은 억압의 대상이었기에 그는
배척당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문제는 관직등용시험에 있어 본보기로 벌 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치적 뒷배경이 없었고, 글을 잘써서 왕에게 까지 갔으니
벌주기에 좋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만이 반성문 수준이 아니라 군대로
보내진다. 그러나 그는 벌로 간 군대에서도 그런 글쓰기를 계속한다. 노론은
억울할 수 있다. 문체를 문제 삼는다면 천주교에 빠져 있는 남인(주로이황계열의
사림. 재야에서 학문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들도 벌 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상소를 받은 정조가 생각해 보니 문체 반정이 천주교와도 관련이 있다.
정조가 좋아하는 정조를 보니 그의 집안 전체도 천주교 더라. 그래서 발생한 사건중에
'추조적발사건'이란것이 있다. 1785년 형조(추조)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집회를 적발한 사건이다.
왕위에 다른 존재를 설정하는 왕권에 반하는 종교모임이다.
정조의 총애인들의 대부분이 천주교도라 벌준다면 탕평정책 자체가 무너질 판이다.
그래서 이들을 벌 주는 국면전환용 사건이 '문체반정'이 될 수있다.
남인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천주교는 잘못을 알기 쉬우니 뿌리 뽑기 쉽다. 허나 너희의
문체반정은 눈치채기 어렵고 스며드는 문제이기에 더 큰 문제다' 라고 한다.
즉 천주교박해는 명분이 확실하지만, 소품론에 대해서는 권력컨트롤이 어렵다는 생각이
정조였다고 할 수 있다. 소품론의 달인 중에 한사람은 조선후기 실학자,규장각사람인 '간서치 이덕무'
이다. (책만보는 바보 = 간서치) 어느시대건 권력과 결합하면 '남성적 글쓰기'인 가부장적인 문체가
유행하는데, 이것을 깨려면 '여성''어린이'에 주목하는 마이너 적인 글 쓰기가 있다.
이덕무는 어린아이의 동심에 반하는 글 쓰기를 . 생에 자유로운 충족을 말하는 글 쓰기를 한다.
박제가'천지에 가득한 모든것이 시다'라는 아포리즘을 남기기도 한다.
문법을 넘어가면 천지자연이 살아 있음을 체험할 수 있어. 그것을 옮기면 시가되고
예술이 된다. 해서 이 시기에 새로운 예술이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정조는 열하일기를 까면서 글 잘 써서 올리면 봐주겠다 라는 식으로 연암에게 말 하기도 한다.
허나 연암은 출세욕이 없었기에 반성문을 쓸 필요가 없었다.
'왕에게 폐를 끼쳐 미안하다'라는 식의 글을 쓰고, 원하는 문체의 글을 쓰지 않는다.
연암이 구문에 집착하는것은 '사이비(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론 가짜다)라고 한다. 눈앞에 이미 참된 정취있는데
왜 고대 글쓰기에 집착하는가 라는 말을 한다. 열하일기를 보면 글쓰기의 대가 답다.
문체의 특징은 상황과 내용에 맞는 새로운 문체를 생산 할 수 있는 그런 글쓰기이다.
글은 살아 움직여야 한다. 글쓰기=존재론=실존적결단 으로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조, 연암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균열을 일으킬 문제가 있음을 주목했던 것이다.
그 안에는 노론,소론의 정치적 문제도 섞여 있고, 중국을 통한 세계 전체의 흐름과도 연관이 되어있다.
문체반정은 그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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