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담연정기(澹然亭記)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19. 11:45

담연정기(澹然亭記)

 

 

지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공(李公)이 살고 있는 집 서쪽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정자 밑에 연못을 파 담을 뚫고 샘을 끌어들여 물을 댔다. 담의 남쪽에는 석벽이 있는데 길이가 한 길 남짓하고, 벽의 틈에 노송이 박혀 있어 등걸이 구불구불 서리고 그 가지가 한옆으로 쏠려 그늘이 온 뜰에 가득하였다.
공이 날마다 빈객들과 정자에서 노닐며 거문고와 바둑으로 유유자적하니, 한가하고 여유롭기가 마치 물아(物我)를 잊어버리고 득실의 차이를 초월한 듯하였다. 이에 그 정자를 ‘담연정(澹然亭)’이라 이름하고, 지원(趾源)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짓게 하므로 지원이 이공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도랑이나 늪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도하(淘河 사다새ㆍ펠리컨)’라 한다. 부리로 진흙과 뻘을 쪼고, 부평과 마름을 더듬어 오직 물고기만을 찾아서 깃털과 발톱과 부리가 더러운 것을 뒤집어써도 부끄러워 아니 하며, 허둥지둥 마치 잃은 것이 있는 것처럼 찾지만 하루 종일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반면에 청장(靑莊 앨버트로스)이라는 새는 맑고 깨끗한 연못에 서서 편안히 날개를 접고 자리를 옮겨 다니지 않는다. 그 모습은 게으른 듯하고 그 표정은 망연자실한 듯하며, 노래를 듣고 있는 듯 가만히 서 있고 문을 지키고 있는 듯 꼼짝도 않고 있다. 그러다가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앞에 이르면 고개를 숙여 그것을 쪼아 잡곤 한다. 때문에 청장은 한가로우면서도 항상 배가 부르며, 도하는 고생하면서도 항상 배가 고프다. 옛사람은 이들을 예로 들어 세상의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것에 비유하고, 청장을 신천옹(信天翁)이라 불렀다.
슬프다! 세상 모든 일에는 각각의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어찌 다만 한 마리 새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것을 보고서야 이를 확신하겠는가.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무너질 듯한 높은 담장 밑에서 운명을 기다리며, 멍청하게 하늘을 보면서 곡식이 내리지 않나 바라기나 하고, 조급한 사람은 오늘 한 가지 착한 일을 행하면 좋은 운명이 내리기를 하늘에 구하고, 내일 한 가지 착한 말을 하면 기필코 상대방이 보답을 주리라 여긴다. 그렇다면 하늘도 장차 그 수고로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며, 착한 일을 하는 자도 진실로 장차 지쳐서 물러나고 말 것이다. 하늘은 본디 아득하여 형체가 없고 저절로 되도록 맡겨 두지만, 사시(四時)는 이를 받들어 그 순서를 잃지 않으며 만물은 이를 받아서 그 분수를 어기지 않을 따름이다. 하늘이 어찌 신용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 자질구레하게 사물마다 비교하고 따진 적이 있었으랴.
세상에서 온전한 복을 누린 사람을 들어 말할 때는 반드시 먼저 이공을 꼽는다. 그러나 그렇게 된 데에는 역시 그 방법이 있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공의 직임은 바로 종정(宗正)이다. 적자(嫡子)가 서로 계승하여 태어난 처음부터 부귀가 점지되어 있었다. 처세함에 있어서도 구하는 것이 없는 마음으로 남들과 경쟁하지 않는 자리에 있으니, 높은 관질(官秩)에 올라도 남들이 질투하지 아니하며, 임금의 은총이 날로 융성해도 누구 하나 공과 경쟁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디 권세와 이익을 좇아 다니거나 명예와 재능을 과시하는 일이 없었다. 오직 편안한 마음과 신중한 태도로 자신을 지켜서 사려를 그치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잊은 채로 이 정자를 떠나지 아니하면서도, 보통 사람들이 밤낮으로 악착스레 굴어도 하나도 얻지 못한 것들이 공에게는 힘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이르러 온다. 정자의 이름을 담연정이라 한 것은 단지 공이 스스로 붙인 이름일 뿐만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 또한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그렇게 여기지 않겠는가.

갑자기 정지(亭池)와 인물(人物)을 말하고, 갑자기 새의 이름과 성질을 말하고, 갑자기 천리와 인사를 말하였다. 글이 마치 아침 햇살에 못 위의 물오리와 갈매기를 보면 노랗고 파란 털빛이 눈부시게 번쩍이는 것과 같다.


 


 

강과 바다는 잘 내려감으로써 능히 온갖 골짜기의 왕이 된다. 이렇게 하자면 오직 담연(澹然)해야 할 뿐이다.

 

 

今判敦寧府事李公。治小亭于居第之西。而鑿池亭下。穿墻引泉而注之。墻之南。有石壁長丈餘。有松老于壁之罅。蟠其榦而偃其柯。蔭滿一庭。公日與賓客逍遙亭中。琴奕自適。蕭閒夷曠。殆若忘物我而齊得失。於是乎名其亭曰澹然。屬趾源爲文而記之。趾源復于公曰。潢溝潴澤之間。有食魚之鳥。其名曰淘河。唼淤泥而蒐蘋荇。惟魚之是求。羽毛趾吻。蒙穢濁而不耻。遑遑焉若有遺失而索之者然。竟日而不得一魚。有靑莊者。立於淸冷之淵。怡然斂翼。不移其處。其容若惰。其色若忘。靜如聽歌。止如守戶。游魚至前。俛而啄之。故靑莊逸而常飽。淘河勞而恒饑。古之人以此。喩世之求貴富名利者。而號靑莊。爲信天翁。噫。世間萬事。莫不有命存焉。則亦奚特徵信於一禽之待魚哉。然而有愚人焉。俟命于巖墻之間。而視天瞢瞢。望其雨粟。有躁人焉。今日行一善事。而責命于天。明日出一善言。而取必於物。則天將不勝其勞擾。而爲善者固亦將惓然退沮矣。天固冲潢無朕。任其自然。四時奉之而不失其序。萬物受之而不違其分而已。天何甞有意於立信。而屑屑然逐物而較挈也哉。世之論享有全福者。必先推公。然殊不識所以致之者。亦有其道。公之職。乃宗正也。世嫡相承。自其有生之初。卽貴而富。其處世也。以無求之心。居不爭之地。位躋崇秩。而人不忌嫉。恩渥日隆。而物莫與競。固無所事乎徵逐勢利。夸衒名能。惟其恬愼自持。息慮忘情。不離斯亭。而凡人之日夜營營。乃不一得者。公則不勞而自至。亭之所以名澹然者。非特公之自號也。世亦以此推之。不其然乎。
忽然說亭池人物。忽然說禽名鳥性。忽然說天理人事。文如朝日觀池上鳧翳。金碧閃目。
有比有興。邇之可以事父。遠之可以事君。多識乎鳥獸草木之名。說詩。最解頤處。
江海以其善下。故能爲百谷王。夫惟澹然而已。


 


 

[주D-001]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공(李公) : 이풍(李灃)을 가리킨다. 그는 선조(宣祖)의 부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손(祀孫)으로 돈녕부 도정(都正)을 세습한 뒤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정조 19년(1795) 별세하자, 그의 아들 이언식(李彦植)이 돈녕부 도정을 세습하고 순조 19년 진안군(晉安君)에 봉작되었다.
[주D-002]신천옹(信天翁) : 신천(信天)은 하늘의 운명에 맡긴다는 뜻이다.
[주D-003]무너질 …… 기다리며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정명(正命)을 아는 사람은 무너질 듯한 높은 담장 밑에 서지 않는다.〔知命者 不立乎巖墻之下〕”고 하였다.
[주D-004]지쳐서 : 원문은 ‘惓然’인데, 어떤 이본들에는 ‘倦然’으로 되어 있어 그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5]그렇게 …… 있었음 : 《맹자》 진심 상에 “구하는 데에는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운명이 있다. 이렇게 구하는 것은 얻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나니 바깥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라고 하였다. 집주(集註)에 ‘구하는 데에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함부로 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고, ‘얻는 데에 운명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얻을 수는 없다는 뜻이며, ‘바깥에 있는 것’이란 부귀영달과 같은 외물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주D-006]종정(宗正) : 왕실의 친족을 관장하던 고대 중국의 관직인데, 여기서는 돈녕부의 도정(都正)을 가리킨다. 돈녕부 도정은 정 3 품 관직인데 이때 이공(李公)의 집안이 대원군의 사손(祀孫)으로서 세습하였다.
[주D-007]물오리와 갈매기 : 원문은 ‘鳧翳’인데, 《시경》 대아(大雅)에 ‘부예(鳧鷖)’라는 시가 있다. 이본들에는 ‘鳧翁’으로 되어 있는데, 부옹(鳧翁)은 물오리라는 뜻이다.
[주D-008]이 글에는 …… 있다 : 원문은 ‘有比有興’인데, 《하풍죽로당집》에는 ‘文有比有興’으로 되어 있다. 《하풍죽로당집》의 평어는 구체적 표현과 조목의 순서에서 이본들과 차이가 있다. 비와 흥은 《시경》의 세 가지 작법의 하나로 비는 비유법을 말하고, 흥은 감흥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9]가까이는 …… 된다 : 공자가 제자들에게 시의 효용에 대해 말하면서, “너희들은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의지를 흥기시키며, 시정(時政)을 관찰할 수 있게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며, 화를 내지 않고도 원망할 수 있게 하며, 가까이는 아비에게 효도하고 멀리는 임금에게 충성하며,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小子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論語 陽貨》
[주D-010]이는 …… 대목이다 : 전한 때의 인물인 광형(匡衡)은 어릴 때부터 시를 잘 풀이하여 당시 유자(儒者)들이 그를 두고서, “《시경》에 대해 풀이하지 말라. 광형이 온다. 광형이 《시경》을 풀이하면 사람들이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 못한다.”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51 匡衡傳》
[주D-011]강과 …… 된다 : 《노자(老子)》에, “강과 바다가 온갖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래로 잘 내려가기 때문이다.〔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12]담연(澹然) :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에 순응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