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홍대용에게 네 번째 편지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19. 14:34

네 번째 편지

 

 


이 아우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고 밥지어 먹으며, 아무것도 없이 두 주먹만 꽉 쥐었을 뿐이라, 마음은 지치고 재간은 서투르니 무엇을 이루어 놓았겠습니까. 겨우 돌밭 두어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을 뿐이지요. 그 가파른 비탈과 비좁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애초부터 오솔길도 없었지만, 골짜기 입구를 들어서고 나면 산기슭이 다 숨어 버리고 문득 형세가 바뀌어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부드러우며 흙은 희고 모래는 곱고 깨끗합니다. 평탄하면서 툭 트인 곳에다 남쪽을 향해 집터의 형국(形局)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집터가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서성대며 노닐고 안식할 공간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추어졌지요.
전면의 왼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바위틈은 깊숙이 텅 비어 저절로 동굴을 이루매 제비가 그 속에 둥지를 쳤으니, 이것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 바위)이라는 거지요. 집 앞으로 100여 걸음 되는 곳에 평평한 대(臺)가 있는데, 대는 모두 바위가 겹겹이 쌓여 우뚝 솟은 것으로 시내가 그 밑을 휘감아 도니 이것을 조대(釣臺 낚시터)라 하지요.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면 울퉁불퉁한 하얀 바위가 마치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며, 혹은 잔잔한 호수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맑은 못을 이루기도 하는데 노는 고기들이 몹시 많지요. 매양 석양이 비치면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리는데 이를 엄화계(罨畫溪)라 하지요. 산이 휘돌고 물이 겹겹이 감싸 사방으로 촌락과 두절되니 한길을 나가 7, 8리를 거닐어야만 비로소 개짖는 소리와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된답니다.
지난가을부터 불러 모은 이웃도 현재 서너 가구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해진 옷에 귀신 같은 몰골로 무슨 소리인지 지절지절하며 오로지 숯 굽는 일에만 종사하고 농사는 짓지 않으니, 깊은 계곡에 사는 오랑캐가 호랑이나 표범을 이웃 삼고 족제비나 다람쥐를 벗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험하고 동떨어짐이 이와 같은데도, 마음속으로 한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까지 썼으니 영영 옮기지 못할 땅이 되었지요.
띠 지붕 소나무 처마로 된 집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며, 조와 보리로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가 있고 채소와 고사리가 매우 왕성하게 자라 한번 캤다 하면 대바구니에 가득 찹니다. 더러는 눈 오는 날 - 이하 원문 빠짐 -
이 편지가 모두 여덟 편이라고 예전에 들었으나, 지금 상자를 뒤져 겨우 네 편을 얻었는데 그나마도 완전하지 못하다.

 

 

弟之營一邱一壑。今已九年之久。水宿風餐。徒握兩拳。心勞才拙。何所成就。纔有石田數頃。茅屋三間。而其懸崖束峽。草樹蒙茂。初無逕路。旣入洞門。則山脚皆藏。忽換面勢。崗平麓嫩。土白沙明。夷衍開曠。向南結局。其結局至小而徜徉遊息之所。能備其中。前左蒼壁削立。如開畵障。石罅谽谺自成广厂。燕巢其中。是爲燕巖。堂前百餘武有平臺。臺皆層巖矗成。而溪彎其下。是爲釣臺。泝溪白石盤陀。如施繩削。或爲平湖。或爲澄潭。遊魚極多。每西陽映帶。影澈石上。是爲罨畵溪。而山廻水複。四絶村閭。出大路七八里。始聞鷄犬。自去秋。所以保聚鄰戶者。不過三四。皆鶉衣鬼面。啁啾魀。專事埋炭。不治農業。無異溪獠洞蠻。虎豹之爲鄰。鼪鼯之與友。其險阻孤絶如此。而心旣樂此。無與爲易。已葬嫂屋後。252_077d爲不可遷移之地。茅茨松簷。冬溫夏凉。粟麥可以卒歲。蔬蕨甚肥。一采盈筐。或雪天
舊聞此書共八頁。今於篋衍搜得四頁。猶未完。



 

[주D-001]이 아우가 …… 되었습니다 : 연암은 1771년(영조 47) 과거를 포기한 뒤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을 답사하고 나서 장차 이곳에 은둔할 뜻을 굳히고 자신의 호를 연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연암집》 권1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증정한 서문〔贈白永叔入麒麟峽序〕’ 참조.
[주D-002]엄화계(罨畫溪) : 엄화는 채색화(彩色畫)란 뜻이다. 《연암집》 권10에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이란 표제가 붙어 있다.
[주D-003]이미 …… 썼으니 : 연암의 형수 이씨(李氏)는 1778년 음력 7월 향년 55세로 별세하였다. 그해 9월 연암은 형수의 유해를 연암협으로 옮겨 집 뒤뜰에 장사 지냈다. 《연암집》 권2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참조.
[주D-004]이 편지가 …… 못하다 :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것이다.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연암이 홍대용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는 《연암집》에 그 내용이 반 이상 결락된 채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 친필의 바로 그 결락된 편지를 내가 전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편지에는 산거경제(山居經濟)를 기초한다고 한마디가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으니 이 산거경제가 발전되어 만년의 《과농소초》를 이루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박지원 작품선집1 연암집에 대한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