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북학의서(北學議序)|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28. 10:58

북학의서(北學議序)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僮僕)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
순(舜) 임금은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로부터 제(帝)가 되기까지 남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젊었을 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막일에 능한 것이 많았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막일 또한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 따위였을 것이다. 아무리 순 임금과 공자같이 성스럽고 재능 있는 분조차도, 사물에 나아가 기교를 창안하고 일에 임하여 도구를 만들자면 시간도 부족하고 지혜도 막히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 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제 강역(疆域)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예(禮)는 차라리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른바 사민(四民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라는 것도 겨우 명목만 남아 있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서 생긴 폐단이다.
만일 장차 배우고 묻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의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은 오랑캐들이다.” 하면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여, 중국의 옛법마저도 다 함께 얕잡아 무시해 버린다. 저들이 진실로 변발(辮髮)을 하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저들이 살고 있는 땅이 삼대(三代) 이래 한(漢), 당(唐), 송(宋), 명(明)의 대륙이 어찌 아니겠으며, 그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유민(遺民)이 어찌 아니겠는가. 진실로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心法)의 정미(精微)함과 제작(制作)의 굉원(宏遠)함과 문장(文章)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고유한 옛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이 그가 지은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과 외편(外編)을 보여 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農蠶), 목축(牧畜), 성곽(城郭), 궁실(宮室), 주거(舟車)로부터 기와, 대자리, 붓, 자〔尺〕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 번 펼쳐 보니, 나의 일록(日錄 《열하일기(熱河日記)》)과 더불어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진실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보여 준 것이요, 나도 흐뭇이 여겨 3일 동안이나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해 오던 것을 눈으로 한번 확인한 것뿐이다. 요컨대 이를 남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니,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學問之道無他。有不識。執塗之人而問之可也。僮僕多識我一字姑學。汝恥己之不若人而不問勝己。則是終身自錮於固陋無術之地也。舜自耕稼陶漁。以至爲帝。無非取諸人。孔子曰。吾少也賤。多能鄙事。亦耕稼陶漁之類是也。雖以舜孔子之聖且藝。卽物而刱巧。臨事而製器。日猶不足。而智有所窮。故舜與孔子之爲聖。不過好問於人。而善學之者也。吾東之士。得偏氣於一隅之土。足不蹈凾夏之地。目未見中州之人。生老病死。不離疆域。則鶴長烏黑。各守其天。蛙井蚡田。獨信其地。謂禮寧野。認陋爲儉。所謂四民。僅存名目。而至於利用厚生之具。日趨困窮。此無他。不知學問之過也。如將學問。舍中國而何。然其言曰。今之主中國者。夷狄也。恥學焉。幷與中國之故常而鄙夷之。彼誠薙髮左袵。然其所據之地。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凾夏乎。其生乎此土之中者。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遺黎乎。苟使法良而制美。則固將進夷狄而師之。况其規模之廣大。心法之精微。制作之宏遠。文章之煥爀。猶存三代以來漢唐宋明固有之故常哉。以我較彼固無寸長。而獨以一撮之結。自賢於天下曰。今之中國。非古之中國也。其山川則罪之以腥羶。其人民則辱之以犬羊。其言語則誣之以侏離。幷與其中國固有之良法美制而攘斥之。則亦將何所倣而行之耶。余自燕還。在先爲示其北學議內外二編。盖在先先余入燕者也。自農蚕畜牧城郭宮室舟車。以至瓦簟筆尺之制。莫不目數而心較。目有所未至。則必問焉。心有所未諦。則必學焉。試一開卷。與余日錄。無所齟齬。如出一手。此固所以樂而示余。而余之所欣然讀之三日而不厭者也。噫。此豈徒吾二人者得之於目擊而後然哉。固嘗硏究於雨屋雪簷之下。抵掌於酒爛燈灺之際。而乃一驗之於目爾。要之不可以語人。人固不信矣。不信則固將怒我。怒之性。由偏氣。不信之端。在罪山川。




 

[주C-001]북학의서(北學議序) :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은 원래의 서문 말미에 신축년(1781, 정조 5) 중양절(重陽節)에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주D-001]나는 …… 많았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02]심법(心法) : 용심지법(用心之法)을 말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규모가 크고 심법이 세밀한 점을 들었다.
[주D-003]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 연암은 정조 4년(1780) 5월부터 10월까지 진하 겸 사은별사(進賀兼謝恩別使)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다.
[주D-004]재선은 …… 사람이다 : 박제가는 정조 2년(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일원으로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다녀온 뒤 《북학의》를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