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28. 11:01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

 

연옥(連玉)은 인장(印章)을 잘 새겼다. 그는 돌을 쥐고 무릎에 받치고서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 턱을 숙인 채, 눈을 깜빡이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먹 자국에 따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파 들어가는데 마치 실처럼 가늘면서도 획이 끊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모으고 칼을 밀고 나가는데 눈썹을 찡긋찡긋하며 힘을 쓰더니, 이윽고 허리를 받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휴!’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위로하기를,

“자네는 그 굳은 돌멩이를 새겨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건가?”

하였더니, 연옥이 대답하기를,

“무릇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각각 그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를 증명할 신표가 있어야 하네. 그러기에 열 집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을이나 백부장(百夫長)까지도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이 있었던 것일세. 주인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신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거든.
내가 무늬 있는 좋은 돌을 얻었는데 결이 반질반질하고 크기가 사방 한 치로 옥처럼 빛이 난다네. 손잡이 꼭지에다 쭈그리고 앉아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서 으르렁대는 사자를 새겨 놓으면, 나의 문방(文房 서재)을 지키고 문방의 사우(四友 종이, 붓, 먹, 벼루)를 보호할 걸세. 또 ‘아조헌원 씨류명련(我祖軒轅氏柳名璉)’이라는 여덟 글자를 아름답고 우아하게 종정문(鍾鼎文)과 석고문(石鼓文)의 서체나 조전(鳥篆)과 운전(雲篆)의 서체로 새긴 다음, 서책에다 찍어서 나의 자손들에게 물려준다면 산일(散佚)될 우려가 없어 수백 권이라도 다 보전될 걸세.”

하였다. 무관(懋官)이 허허 웃으며,

“그대는 화씨(和氏)의 벽(璧)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그야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지.”

하므로,

“그렇다네. 옛날 진 시황이 6국을 병합한 후 그 옥돌을 깨뜨려 도장을 만들었네. 위에는 푸른 용을 서려 두고 옆에는 움츠린 붉은 용을 새겨, 이것을 자신이 천자(天子)라는 증거물과 사해(四海)를 진정시키는 상징물로 삼고,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네. 그러고는 하는 말이, ‘2세, 3세로 내려가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연옥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어린 아들을 무릎에서 밀쳐 내려 놓으며,

“어찌 네 아비의 머리를 희게 만드느냐?”

하였다.
하루는 그가 전에 수집했던 고금의 인본(印本 인보(印譜))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그래도 예전에는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내용은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러한 풍습이 없어졌다.”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세태를 슬퍼한 것이다. 여기에 함께 적어 두어,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사람을 깊이 경계하는 바이다.

 

連玉善刻章。握石承膝。側肩垂頤。目之所瞬。口之所吹。蚕飮其墨。不絶如絲。聚吻進刀。用力以眉。旣而捧腰仰天而欷。懋官過而勞之曰。子之攻堅也。將以何爲。連玉曰。夫天下之物。各有其主。有主則有信。故十室之邑。百夫之長。亦有符印。無主乃散。無信乃亂。我得暈石。膚理膩沃。方武一寸。瑩然如玉。獅蹲其鈕。鞠乳獰吼。鎭我文房。綏厥四友。我祖軒轅。氏柳名璉。文明爾雅。鼎皷鳥雲。印我書秩。遺我子孫。無憂散佚。百㢧其全。懋官笑曰。子以和氏之璧。爲何如也。曰。天下之至寶也。曰然。昔秦皇帝旣兼六國。破璞爲璋。上蟠蒼蚪。旁屈絳螭。以爲天子之信。四海之鎭。使蒙恬築萬里之城以守之。其言豈不曰二世三世。至于萬世。傳之無竆乎。連玉俛首寂然。推墮其幼子於膝曰。安得使而公頭白者乎。一日携其前所集古今印本。彙爲一卷。屬余序之。孔子曰。吾猶及史之闕文。今亡矣。葢傷之也。於是幷書之。以爲不借書者之深戒。




 

[주D-001]연옥(連玉) : 유연(柳璉 : 1741~1788)의 자이다. 유연은 유득공의 숙부로, 1776년(영조 52) 연행(燕行)을 다녀오면서 이름을 유금(柳琴)으로 고쳤다.
[주D-002]자네는 …… 새겨서 : 원문은 ‘子之攻堅也’인데 ‘攻堅’은 원래 견고한 곳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관자(管子)》 제분(制分)에 용병술(用兵術)과 관련하여, 상대방의 견고한 곳을 공격하면 쉽사리 패배시킬 수 없으며, 틈이 있는 곳을 파고들어야 신속히 승리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무관의 말은 풍자의 어조를 띤 것이다.
[주D-003]백부장(百夫長) : 천 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천부장(千夫長), 백 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백부장이라 하였다. 《書經 牧誓》
[주D-004]새끼에게 …… 으르렁대는 : 새끼를 기르는 맹수를 유수(乳獸)라 한다. 맹수는 젖을 물려 새끼를 기르는 동안에는 평소보다 더욱 사납다.
[주D-005]아조헌원 씨류명련(我祖軒轅氏柳名璉) : 유연의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문화 유씨의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원래 차씨(車氏)로서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이라고 한다. 차씨는 황제(黃帝) 헌원씨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조선으로 망명한 뒤 그 후손이 차무일로 변성명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신라 말에 유씨(柳氏)로 개성(改姓)하였다가, 고려 초에 유차달의 아들 중 장남이 차씨를 계승하고 연안(延安) 차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유연(柳璉)의 《기하실시고략(幾何室詩藁略)》에 이와 같은 문화 유씨의 세계(世系)를 노래한 술계(述系)라는 시가 있다.
[주D-006]종정문(鐘鼎文)과 …… 서체 : 종정문은 주로 주(周) 나라 때의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인 금문(金文)을 말하며, 석고문(石鼓文)은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보존되어 있는 북 모양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조전(鳥篆)은 전체(篆體)의 고문자(古文字)로 모양이 새의 발자국과 흡사하다 해서 조적서(鳥迹書), 조서(鳥書)라고도 한다. 운전(雲篆) 역시 전체의 고문자로 필획이 구름 같다고 해서 운서(雲書)라고도 한다.
[주D-007]사해(四海)를 …… 상징물 : 이와 유사한 것으로 진규(鎭圭)가 있다. 사방을 진정시킨다는 뜻으로 사방의 진산(鎭山)을 본떠 만든 천자의 홀(笏)을 진규라고 한다.
[주D-008]2세 …… 전하라 : 진 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시법(諡法)을 없앨 것을 명하면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고 후세는 숫자로만 헤아려, 2세, 3세라는 식으로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주D-009]그래도 …… 없어졌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수록된 원문을 보면 “그래도 예전에는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내용은 적지 않고 말을 가진 사람이 남에게 빌려 주어 타게 하는 풍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풍습조차 없어졌다.〔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로 되어 있다. ‘有馬者借人乘之’를 생략하였으나, 실은 생략된 부분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공자가 남에게 말을 빌려 주지 않는 야박한 세태를 비판했듯이, 연암은 남에게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연암집》 권5 여인(與人)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