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루기(翠眉樓記)
해마다 연말에 사신이 북경에 들어가게 되면 사대부들이 역관을 시켜 당액(堂額)의 글씨를 받아 오게 하는데, 받아 온 글씨를 보면 언제나 박명(博明)의 글씨였다. 박명은 현재 기거주(起居注) 일강관(日講官)으로서, 진실로 당액의 글씨를 잘 썼다. 그런데 그 뒤에 박명의 다른 글씨를 여러 번 보게 되었는데, 필력(筆力)이 당액의 글씨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들리는 말로는 한 역관이 사물재(四勿齋)의 당액을 써 달라고 청하자 박명이 종이를 집어던지며 투덜대기를, “동방에는 호가 같은 자가 어찌 그리도 많으냐? 내 녹침필(綠沈筆)이 사물재를 쓰느라 다 닳아 버렸다.” 하더라는 것이었다.
박명은 조선 주고(主顧) 황씨(黃氏)의 사위인 까닭에 역관들이 박 기거(博起居)가 글씨를 잘 쓰는 줄 알게 되었을 것이며, 박명이 당액을 잘 썼던 것은 ‘사물(四勿)’이란 액호(額號)를 워낙 많이 썼기 때문일 것이다.
아, 우물에 빠진 모수(毛遂)와 좌중을 놀라게 한 진준(陳遵)도 똑같은 이름 때문에 오히려 당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물며 호(號)란 것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거늘, ‘삼성(三省)’이니 ‘구용(九容)’이니 하며 가는 곳마다 다 그런 호들이고, ‘눌와(訥窩)’니 ‘묵재(黙齋)’니 하는 호들이 열에 서넛을 차지한다. 남산(南山) 밑에 사는 사람은 그 대청의 이름을 반드시 ‘공신(拱辰)’이라 짓고, 북촌(北村) 안에 사는 사람은 그 당(堂)의 이름을 모두 ‘유연(悠然)’이라 짓는다. 조금이라도 원림(園林)이 있어서 잠시나마 그윽한 운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성시산림(城市山林)’이라 써서 걸어 놓고 있으니, 한 번은 있을 수 있지만 두 번은 지나친 것이다.
아, 경기의 남양(南陽)이나 황해도 황주(黃州)는 지명이 중국과 우연히 같은데도, 남양에는 반드시 와룡선생(臥龍先生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사당을 두고 황주에는 기어이 죽루(竹樓)를 짓고 마는데, 이것은 실질을 흠모한 것인가, 아니면 그 이름만 흠모한 것인가?
내가 임진강을 지나다가 강가의 절벽을 바라보았더니, 깎아지른 암벽이 수십 리나 뻗어 있었고 단풍나무 잎이 한창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몇 사람의 길손과 함께 한참 동안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정색을 하며 옷깃을 여미고 똑바로 앉더니,
하기에, 내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하고서, 서로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다.
이번에 이군 유일(李君有一)의 서루(書樓)에 올라가 보니, 누각이 남산 기슭에 있어 북으로는 백악산(白嶽山)을 바라보고 서로는 길마재〔鞍嶺 무악재〕를 마주하고 동으로는 낙산(駱山)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면이 확 틔어 있어 수많은 집들이 지상에 널려 있고 먼 봉우리들이 처마 위에 떠 있어 마치 미인의 눈썹처럼 아름다웠다. 누각의 이름을 ‘취미루(翠眉樓)’로 지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누각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마치 미인의 안방 이름과 같다 하여, 괴이하다고 질책하는 등 뭇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였다. 이군이 이러한 점을 답답하게 여겨 나에게 오해를 풀어 줄 것을 청하기에 나는 바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임금에게 충성과 사랑을 바치는 자는 반드시 미인을 노래하며 그리워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저 미인이여, 서방 사람이로다.〔有美一人兮 西方之人兮〕’ 하였는데, 이 시를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서방의 미인은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다.’ 하였다. 굴원(屈原)과 경차(景差)의 일파도 미인을 노래하며 찬송한 시가 많았다. 지금 그대의 누각을 어찌 꼭 ‘취미루’라고 할 것이 있는가. ‘미인루(美人樓)’라 이름 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저 하늘가에 마치 그림과 같이 긴 눈썹이 검푸르게 드리워져 있으니, 시인이 노래를 지어 읊듯이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나는 그대가 남을 따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요, 시문을 짓되 반드시 진부한 표현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나는 그대가 누각의 이름을 지은 것만으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족히 기록할 만하다.
[주D-002]사물재(四勿齋) : 사물(四勿)은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인을 실천하는〔爲仁〕 조목을 묻는 안연에게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답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3]녹침필(綠沈筆) : 대나무 붓대에 옻칠을 한 붓이다.
[주D-004]조선 주고(主顧) : 조선인을 단골 고객으로 삼은 상인을 말한다.
[주D-005]박 기거(博起居)가 …… 것이며 : 기거(起居)는 박명의 당시 직책인 기거주 일강관의 줄임말이다. 이본에는 이 구절의 첫머리에 ‘유독’이란 뜻의 ‘獨’ 자가 첨가되어 있다.
[주D-006]우물에 빠진 모수(毛遂) : 조(趙) 나라에 두 사람의 모수, 즉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으로 있는 모수와 야인(野人)인 모수가 있었다. 하루는 야인 모수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식객 중에 한 사람이 이를 평원군에게 고하자, 평원군이 이 말을 듣고 “아,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며 탄식하였다. 《西京雜記 卷6》
[주D-007]좌중을 놀라게 한 진준(陳遵) : 진준은 전한(前漢) 말의 인물로 자는 맹공(孟公)이다. 당시에 열후(列侯) 가운데 진준과 성(姓)과 자(字)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진준이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언제나 진맹공(陳孟公)이 왔노라고 알렸다. 좌중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면 그들이 생각했던 그 열후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 진준을 가리켜 ‘진경좌(陳驚座)’라고 불렀다. 《漢書 卷92 游俠傳 陳遵》
[주D-008]삼성(三省) : 《논어》 학이(學而)에서 증자(曾子)가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조목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고 하였다.
[주D-009]구용(九容) : 《예기》 옥조(玉藻)에 제시된 바 군자가 수신하고 처세할 때 지녀야 할 9종의 자용(姿容)으로, “발은 무겁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다물며 목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며 기운은 엄숙하고 선 자세는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여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고 하였다.
[주D-010]눌와(訥窩)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군자는 말은 유창하지 못해도 실천은 민첩하고자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고 하였다.
[주D-011]묵재(黙齋)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는 “말없이 마음에 새겨 두고, 배우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힘든 일이랴.〔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라고 하였다.
[주D-012]공신(拱辰) : 《논어》 위정(爲政)에서 덕정(德政)이란 “비유컨대 제자리에 정지해 있는 북극성을 뭇별이 에워싸고 도는 것과 같다.〔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고 하였다.
[주D-013]유연(悠然) : 도잠(陶潛)의 음주(飮酒) 시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고 하였다.
[주D-014]와룡선생(臥龍先生)을 모신 사당 :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에 “신은 본래 포의로서 남양에서 몸소 농사를 지었다.〔臣本布衣 躬耕於南陽〕”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의 ‘동짓날 내제(內弟)를 그리워함〔至日憶內弟〕’이란 시 제목 아래 주(註)에 “남양(南陽)에 와룡사(臥龍祠)가 있다.〔南陽有臥龍祠〕”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2 嬰處詩稿》
[주D-015]죽루(竹樓) : 왕우칭(王禹稱)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다. 왕우칭(954~1001)은 송 나라 진종(眞宗) 때 재상(宰相)과 불화하여 호북성(湖北省) 황주부(黃州府) 황강현(黃岡縣)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대나무의 명산지였으므로, 왕우칭은 대나무로 조촐한 누각 2칸을 짓고 나서 이 기를 지었다고 한다.
[주D-016]세월이 …… 것 :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가 “임술년 가을 7월 기망(旣望)에 내가 길손들과 함께 배를 띄워 적벽(赤壁)의 아래에서 노닐었다.〔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浮舟於赤壁之下〕”로 시작되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주D-017]나 …… 어찌하겠소 :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소동파가 술이 거나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사람이 있어 노래에 따라 화답을 하였다.〔客有吹洞簫者 依歌而和之〕”고 하였다.
[주D-018]이군 유일(李君有一) : 이유동(李儒東)으로, 자가 유일(有一)이고 호는 취미(翠眉)이다. 박제가(朴齊家)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요절하였다. 《貞蕤詩集 卷1 戱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幷小序, 卷2 四悼詩》
[주D-019]有美一人兮 : 영남대본 연암집에는 ‘彼美人兮’로 되어 있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편(簡兮篇)에 의거하여 바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주D-020]경차(景差) : 전국(戰國) 시대 초(楚) 나라의 시인으로서, 굴원(屈原)의 뒤를 이어 송옥(宋玉), 당륵(唐勒)과 함께 사부(辭賦)를 잘 지었다.
[주D-021]긴 눈썹 : 당시(唐詩)에서 먼산〔遠山〕을 흔히 긴 눈썹〔脩眉〕에 비유하였다.
[주D-022]진부한 …… 사람 : 한유(韓愈)는 답이익서(答李翊書)에서 “오직 진부한 표현을 없애는 데 힘쓸 것〔惟陳言之務去〕”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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